民族의 靈山, 白頭大幹의 始發,압록 두만 송화의 발원,
백두산(白頭山, 2750m)
沙月 李 盛 永

  백두산은 대대로 우리민족이 정신적 근거로 삼았던 민족의 영산이다. 단군조선을 비롯하여 부여, 고구려, 발해가 백두산을 배경으로 삼아 일어났다. 또한 우리민족 외에도 금(金), 청(淸)등 여진족이 세운 나라도 이 백두산을 배경으로 일어난 나라들이다.

  백두산은 18개의 산봉우리가 기라성(綺羅星)처럼 둘러섰고 그 가운데 최고 수심 312.7m, 평균 수심이 200여m나 되며 그 둘레가 11.3Km나되는 화산호(火山湖)를 안고 있다.

  이 화산호는 사방으로 꼭 막혀 갇혀있는데 북쪽 한곳 해발 2,200m에 달문(達門)을 조금 열고 물을 흘려보내 지근 거리에 69m 높이의 장엄한 장백폭포를 만들고, 노천온천을 솟게 한다.

  이 신비로운 형상은 그 먼 옛날 사람들에게도 무척이나 신기했던지 그 이름을 '천지(天池)'라 했다. '하늘이 만든 못'이라는 뜻이다. 천지를 달문담(達門潭)이라고도 불렀고, 중국에서는 용왕담(龍王潭)이라고도 불렀다.

  백두산은 우리 한반도 산경(山經)의 시발이다. 백두산은 백두대간(白頭大幹), 장백정간(長白正幹), 13개의 정맥(正脈) 그리고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기맥(岐脈)을 통하여 한반도 방방곡곡에 백두정기(白頭精氣)를 흘려보내고 있는 것이다. 백두대간의 맨 끝, 지리산을 일명 두류산(頭流山: 백두산에서 흘러온 산)이라 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얻은 이름이다.

  우리 아산회가 산을 찾으면서 산의 기(氣)를 받으려 함은 결국 이 백두산정기를 받고자 함이다.

  우리민족의 영산이요, 우리 한반도 산경의 시발이며, 압록, 두만, 송화강의 발원이며, 백두정기의 원천인 백두산을 잘 안다는 것은 산을 좋아하는 아산회 회원에게 더 좋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가용한 자료를 지세, 산명, 수목, 역사, 전설 등의 순으로 엮어본다.

백두산 천지와 영봉들
백두산 영봉들의 배치 개념도와 백두산 영봉 일람표
* 아산회는 2000년 9월 3일 북쪽 천문봉, 9월 4일에는 서쪽 마천우와 제운봉 중간 지점의 조-중 5호정계비가 있는 지점을 올랐다.
아산회가 천문봉에 올라 기념사진(위, 중간), 서백두에 올라 산신제(아래)
아산회 5인방이 서백두에서 천지에 내려가 물을 떠왔다.
백두산 인공위성사진
(2006.8.30. 조선일보 1면)
해상도 4m급 칼라사진(흑백사진은 해상도 1m급).
2009년 9월. 해상도 0.7m급 아리랑 3호가 발사될 예정이라 함

● 지세소고(地勢小考)
백두산은 압록, 두만, 송화 세 강의 발원이다. 백두산 천지는 이기적으로 백두산에 내린 물을 가둬 놓고만 있는 것이 아니다. 달문을 통해 흘려 보낸 물이 송화강이 되는 외에도 가볍고 구멍 투성이의 화산석을 통해 사방팔방으로 스며 맑은 물을 더 맑게 걸러 바깥 쪽 군데군데에서 용출시켜 압록강, 두만강, 송화강의 본류 또는 지류가 된다.

  백두산 가는 길의 휴게소에서 구한 길림성지도를 훑어보더라도 송화강쪽에 다섯 개의 백하(白河), 세 개의 송강하(松江河), 조자하(槽子河), 제자하(梯子河), 만강(漫江), 금강(錦江)등 이름 있는 하천만 해도 열 두개나 된다. 또 중국 쪽에서 압록강으로 흘러드는 하천은 일도도하(一道淘河)로부터 십구도도하(十九道淘河)까지 열아홉 개나 되니 가히 천지가 베푸는 그 폭을 짐작할 수 있다.

  백두산은 남쪽 한반도와 북쪽 만주지방에 전혀 다른 형상의 지세를 꾸민다. 남악북야(南岳北野)다.

  북쪽은 천지를 둘러싼 영봉들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산봉우리를 찾아보기 힘들다. 동측에 2185m봉, 2058m봉과 서측에 2305m봉, 2222m봉이 지형도에 표기되어 있기는 하지만 천문봉 꼭대기에 서서 북쪽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산이라 할만한 봉우리는 보이지 않고 한없이 내려가는 경사면에 천지가 흘려보낸 물길과 가히 수해(樹海)라 할 수 있는 밀림이 펼쳐질 뿐이다. 몇 리나 내려가는지는 잘 모르지만 그 끝자락에서부터는 또 끝없는 벌판과 구릉이 펼쳐져 산다운 산은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에 비하여 백두산 남쪽은 그야말로 산. 산. 산이다. 백두산 장군봉(2,750m, 최고봉)을 떠나 대연지봉(2,360m)과 간백산(2,164m)을 거쳐 소백산(2174m)까지의 백두대간에만 해도 해발 2,000m가 넘는 거봉들이 열 한 개나 줄을 서고, 대연지봉에서 동쪽으로 벋은 소위 장백산맥에도 2,000m가 넘는 봉우리가 세 개나 있으며, 제비봉(2,572m)에서 압록강 서편을 따라 남하한 무명의 산줄기는 압록강 지류에 의하여 단명하지만 여기에도 2,000m 이상 봉우리가 네 개나 있다. 그 외에도 삼기봉(2,740m)동쪽으로 벋은 줄기에 두 개. 백두대간이 대연지봉에 이르기 전 2,383m에서 동쪽으로 벋은 줄기에 두 개 등 백두산 남쪽 지근거리에 2,000m이상의 거봉들이 무려 스물 두개나 기라성처럼 늘어서 있다.

  백두산이 꾸며 놓은 주변의 지세는 남악북야(南岳北野)란 말이 아주 적절한 것 같다.

● 산명소고(山名小考)
백두산은 산 이름도 무려 여덟 개나 된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아방강역고(我邦彊域考)에 전하는 바에 따르면 백두산은 불함(不咸), 개마(蓋馬), 도태(徒太), 백산(白山), 태백(太白), 장백(長白), 백두(白頭), 가이민상견(歌爾民商堅)등으로 불려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중국 남북조시대에 도태, 태백이라 불렀고, 금(金)대에 백산, 장백이라 했고, 고려 광종 10년(서기959년)에 처음으로 백두산이라 불렀다고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지금도 우리는 '백두산(白頭山)'이라 부르고, 중국 쪽에서는 '장백산(長白山)'이라 부른다.

  백두산의 이름을 '불함(不咸)'이라 한 것은 '속마음을 감추고 함부로 내 보이지 않는 산'이란 뜻이다. 가이드 설명에 따르면 최근 중국의 1인자 강택민 주석이 두 번이나 찾았으나 그 얼굴을 들어내지 않았다는 이야기나 어느 무명시인이 여섯 번을 찾았어도 한 번도 그 진면목을 보지 못하고 '그럴 줄 알았다'는 푸념 어린 시를 남겼다는 이야기를 듣는 대목에서 이 이름을 다시금 생각케 한다.

  '백산(白山)''밝은산''밝산'을 한자어로 표기하면서 생긴 이름인데 '높고 큰 밝산'이란 뜻으로 '태백(太白)' 또는 '장백(長白)'이라 부른 것이다. 한자 '長'자는 어른, 長者를 말한다. '개마(蓋馬)''까마득하게 높은 산' 뜻의 한자 표기이며, '도태(徒太)''무리 중에서 우뚝 뛰어난 큰 산' 뜻이다.

  '백두(白頭)''흰머리'란 뜻인데 이번에 서백두에 올라보고 그 뜻을 알 수 있었다. 여러 개의 봉우리와 산등성이에 적설이 없는 여름에도 마치 눈이 내린 듯 하얗게 덮인 화산재가 마치 하얗게 쉰 흰머리로 보이기 때문이다.

  '가이민상견(歌爾民商堅)'은 조선 영조 때 학자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의 지행록(地行錄)에는 '청나라 사람들의 기록에는 이 산을 「장백산은 곧 가이민상견아린(歌爾民商堅我隣)」이라고 기록하고 있다'고 적고, 역자(譯者)의 해설에 「가이민상견아린이라 함은 여진족의 주어인데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그곳 백성이나 장사꾼이 노래하는 굳센 우리 이웃 산'이란 뜻이다」라고 풀이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정확한 뜻은 여진족의 말을 연구해야만 알 수 있을 것 같지만 여진족 사람들도 백두산을 숭배하고 찬양하는 이름인 것 만은 틀림없는 것 같다.

● 수목소고(樹木小考)
      -자작나무, 전나무, 잎갈나무, 마가목, 사스레나무, 소나무, 만병초
백두산 길목의 마지막 마을 이도백하(二道白河)부터는 장백폭포 쪽이나 서백두산 쪽을 막론하고 길이 가르는 틈새만 있을 뿐 양 옆은 하늘을 찌르는 쭉쭉 뻗은 원시림의 나무들이 시야를 가린다.
 
  백두산 원시림에 들어서는가 싶으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이구동성으로 영화 ‘닥터지바고’를 말하게 한다. 차이코프스키 음악이 깔리고 여인의 하얀 종아리처럼 미끈하게 벋은 자작나무 숲길에 두 연인을 실은 마차가 달리는 풍경! 숲 속의 귀족, 숲속의 가인(佳人), 나무의 여왕 등 온갖 찬사가 붙은 자작나무다.
* 자작나무(클릭): 자작나무
 
  자작나무가 집단 군무(群舞)로서 시선을 끈다면 독불장군처럼 거구(巨軀)로서 으시대는 나무가 젓나무다. 고개를 쳐들어도 차창으로는 그 끝을 볼 수가 없게 높다. 젓나무는 촘촘한 상록 침엽의 가지 위에 하얀 솜을 얹은 크리스마스 트리 처럼 한 품으로 겨울에 더 뽐내는 나무다.
* 젓나무(클릭): 젓나무
 
  "여기는 젓나무가 한데 몰려 있다" 싶어서 눈을 부비고 자세히 보면 그것은 전나무가 아니다. 우리 시골에서 많이 보던 낯익은 낙엽송(일본잎갈나무)을 생각케 하는 우리 토종의 잎갈나무(또는 이깔나무)
* 입갈나무(클릭): 입갈나무
 
  키 큰 자작나무와 젓나무, 잎갈나무 덩치들 속에서 숨도 크게 못 쉬는 듯 쪼그리고 앉은 작은 키의 마가목, 신통하게도 작고 새빨간 열매 송이를 주렁주렁 매달고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 마가목(클릭): 마가목
 
  해발 고도가 점점 높아져 수목한계선(해발1800-2000m)에 가까워지면서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자작나무가 더 극성을 부리는 듯 온 산을 하얗게 덮고 있는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아래쪽에서 보아온 미끈한 자작나무와는 다른 느낌이 든다. 키도 작거니와 줄기와 가지가 쫌스럽게 오그라지고 구불구불하다. 기온이 낮은 곳이니까 제대로 크지 못했거니 하고 그냥 넘어가지만 사실은 자작나무과에 속하는 사스레나무다.
* 사스레나무(클릭): 사스레나무
 
  우리나라 산이면 으레 주종을 이루는 소나무가 백두산에서는 귀한 편이지만 이따금씩 보이는 소나무는 그 줄기가 붉은 색을 띄고 미끈하게 하늘로 치솟은 미인송(美人松), 적송(赤松) 등 여러가지 이름으로 불리는 우리 민족과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소나무다. 연길로 돌아오는 길가에 선 소나무가 ‘미인송’이란 칭호를 얻게 된 전설을 가이드가 들려주었고, 용정 비암산의 일송정 푸른 솔은 없었지만 함께 불렀던 ‘선구자’ 노래 가사에도 소나무가 나온다.
* 소나무(클릭): 소나무
 
  서백두산을 오르는 중에 나무인지 풀인지 분간하기조차 어렵게 땅에 딱 달라붙은 활엽 관목이 지천으로 깔려 있었다. 이것이 다른 데서는 보기 힘든 상록의 만병초라는 나무다. 그것도 다른 곳에서는 보기가 더욱 힘든 꽃이 노란 노랑만병초다.

백두산에 많은 노랑만병초꽃
* 이들 나무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는 이성영홈페이지 www.sungyoung.net >> '나무이야기' 참조

● 역사소고(歷史小考)
    -백두산정계비와 한-중 국경이 정해진 경위-

  숙종 38년(서기 1712년)에 청태조가 오라(烏喇: 현 길림성지역)총관 목극등(穆克登)을 조선에 보내서 백두산 주변의 국경을 분명히 하자고 하여 접반사 박권(朴權), 군관 이의복(李義復), 역관 김응헌(金應 )을 함께 보내어 백두산에 올라 물길을 살펴보고 동남방 약 4Km, 해발 2,200m지점에 정계비(定界碑)를 세웠는데 이것이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다.

  이 비문에 이르기를,

  '대청(大淸) 오라총관 목극등은 변방의 경계를 조사하라는 천자의 명을 받들어 여기에 와서 살펴보니 서쪽은 압록강이요, 동쪽은 토문강이다. 그러므로 분수령에 돌을 새겨 기록하노라. 강희51년 5월 15일. 필 첩식 소이창, 통관 이가, 조선군관 이의복, 조태상. 차사관 허량, 박도상. 통관 김응헌, 김경문' 이라 새겼다.
백두산 정계비 원경(왼쪽)과 비문(오른쪽)
(원문국역)               
오라총관목극등봉       
지사변지차심시서위압록   
동위토문고어분수령상륵
석위기                     
강희오십일년오월십오일
필장식소이창통관이가
조선군관이의복조대상
차사관허량박도상
통관김응헌김경문

  이 비문에는 조선측의 접반사(接伴使) 박권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데 박권은 고령을 핑계로 백두산에 오르지 않고 군관과 역관만 딸려 보냈기 때문이라니 이 중대한 나라 일을 이렇게 소홀히 취급했던 것이다.

  후대에도 이 비문의 핵심인 '西爲鴨綠 東爲土門 故於分水嶺上 勒石爲記(서위압록 동위토문 고어분수령상 륵석위기)' 중에서 '東爲土門(동위토문)'은 토문강에 대한 해석이 문제가 되어 왔다. 즉 토문강(土門江)을 조선측은 송화강의 원류인 오도백하(五道白河)라 해석 했고, 청나라측은 두만강(豆滿江)이라고 해석했다.

  고종17년(서기1880) 청나라는 돌연 '토문(土門)'두만강(豆滿江)을 뜻하는 것이라고 강하게 주장하였고, 융희3년(서기1909년)에 만주 침략의 야욕을 품은 일본이 북경에서 청과 회담하고 두만강이 한-청국경이라고 임의로 협정을 체결함으로서 두만강 북쪽 간도 전역이 만주로 넘어가는 결과를 가져 온 것이다.

  그 후 만주사변 때 이 비는 일본에 의하여 슬그머니 제거되었다 한다.

  ▶ '토문강 =/= 두만강' 中공식문서 발견'
    (2005년 8월 26일. 조선일보)
      64년 中.朝 국경의정서에 '별개로 구분'
  '토문강(土門江)'이 '두만강'과 분명하게 구분되는 별도의 강이라고 기록한 중국 정부의 공식 문서가 처음 발견되었다. 1712년 세워진 백두산 정계비에서 조선과 청의 국경으로 정한 '토문강'에 대해 중국은 '두만강과 같은 강'이라고 줄곧 주장해 왔다.

  박선영(朴宣 삼수변에令) 포항공대 교수는 25일 "1964년 북한과 중국 사이에 맺어진 '중조(中朝) 변계의정서'를 이번에 찾았다"고 밝혔다. 1962년 10월 12일 김일성-저우언라이(周恩來)가 서명한 '조-중 변계조약'에 따라 국경을 확정한 이 비밀문서에는 중국측 천이(陳毅)와 북한측 박성철(朴成哲)의 이름이 들어있다.

  의정서는 당시 새로 설정된 압록강에서 두반강까지의 북한-중국 국경을 설명하며 ▲제9호와 10호 국경비를 연결하는 국경선 사이로 흑석구(黑石溝)가 지나가고 ▲그 위치는 9호비 동쪽 1229m 지점이며 ▲'흑석구'는 곧 '토문강'이라 명시하고 있다.

  본지 확인결과 흑석구는 현재 중국측 지도에 묵석구(墨石溝)로 표기돼 있으며, 백두산 부근에서 시작돼 북한-중국 국경을 지나 송화강의 지류인 오도백하(五道白河)와 만난다. 유석재기자


▶ 토문江은 두만강 아니다
  2005년 8월 26일자 동아 일보에 게재된 "토문江은 두만강 아니다. 60년대 中문서 확인. 포항공대 박영선교수---'간도는 중국땅' 억지 드러나"(추가)

  백두산정계비에 조선과 청의 경계선으로 언급된 토문(土門)강이 그간 중국이 주장해 온 대로 두만강이 아니라 쑹화(松花)강 지류임을 중국 정부가 인정한 1960년대 공식 외교 문서가 확인됐다.

  포항공대 박선영(朴宣怜-중국 근현대사) 교수는 "북한과 중국이 1964년 3월 공동으로 작성한 조중변계조약(朝中邊界條約) 의정서 사본에서 토문강과 두반강이 분명히 다르게 표기되어 있는 것을 확인했다"고 25일 밝혔다.

  조중변계조약은 1962년 북한과 중국이 비밀리에 체결한 것으로 알려진 국경조약. 이 조약엔 토문강 내용이 들어 있지 않았으나 2년 뒤인 1964년 조약의 내용을 자세히 밝히는 의정서를 작성하면서 백두산 압록강 두만강 등의 국경에 관한 내용을 추가했다.

  박교수는 "의정서에 기록된 국경 팻말의 위치를 살펴보면 이 팻말들이 헤이스허(黑石河)를 지나가는 것으로 되어 있고 이 지명 옆에 토문강이라고 병기되어 있는데 이것은 헤이스허가 바로 토문강임을 인정한 것"이라면서 "지도상으로 보면 헤이스허는 쑹화강의 지류임이 확실하다"고 말했다.

  1712년(숙종 38년) 조선과 청이 세운 백두산정계비에는 '서쪽으로 압록, 동쪽으로 토문을 경계로 삼는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토문강이 쑹화강 지류라면 과거 간도로 불리던 만주지역은 물론 연해주 일부에 대해 한국의 영토로 귀속권을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박교수는 "중국 스스로 토문강과 두만강이 다르다는 것을 외교문서에서 인정했다는 사실은 300년 가까이 지속되어 온 간도분쟁을 푸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될 수 있다'고 의미를 설명했다. 이광표 기자


백두산 정계비에 적힌 그 강… 토문강 찾았다’
  2005년 2월 10일 조선일보 발행 月刊山 백두산특별취재팀의‘백두산 정계비에 적힌 그 강… 토문강 찾았다’는 기사가 게재되었다. '조선·청의 국경… 두만강과 별개의 강으로 드러나---', '백두산 부근 북 영토서 시작, 중 송화강 본류로 흘러---', '간도지역 영유권은 한반도에" 우리측 주장 확인---', 등의 흥분된 부제가 붙어있다. 그 내용을 전재한다.

  간도(間島)의 영유권 문제를 둘러싸고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국경 분쟁을 일으켰던 토문강(土門江)의 실체를 본지 취재팀이 확인했다. 토문강은 현재도 백두산 천지 부근 북한 땅에서 발원해 동북쪽으로 흐르며, 천지로부터 동쪽으로 18㎞ 떨어진 ‘17호 국경비’에서 중국·북한 국경과 만난 뒤 북쪽으로 방향을 바꿔 송화강(松花江)과 합류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토문강이 중국측의 주장처럼 현재의 두만강이 아니라, 별도로 존재하는 강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토문강은 백두산에서 발원해 동북쪽으로 흐르는 토문강은 오도백하(五道白河)의 지류다. 나중에 송화강·흑룡강과 합류한다. 토문강과 두만강은 서로 다른 강이다.
토문강의 위치 요도
새벽 해뜰 무렵 중국 길림성 삼도(三道) 부근의 토문강 풍경

  토문강이 두만강과 별도로 실재하는 강이라면 한반도와 중국의 국경 설정에 대해 ‘동쪽으로 토문을 경계로 한다’는 1712년(숙종 38년) 백두산 정계비의 문구는 그 의미를 다시 따져봐야 한다. 현재 연변 조선족자치주에 해당하는 토문강 동쪽 동간도(東間島) 지역의 영유권은 한반도 쪽에 있다는 우리의 전통적 주장이 재확인 되기 때문이다. 1909년 일제가 조선을 대신해서 청나라와 체결해 간도 땅을 넘겨준 ‘간도협약’이 국제법상 무효라는 주장도 근거를 확보하게 된다.

  중국 길림성 도문시(圖們市)로부터 백두산 아래 이도백하진(二道白河鎭)까지 두만강변을 따라 이어진 도로는 2차선 비포장 길이다. 이 길로 접어들기 위해 화룡(和龍)에서 남평진(南坪鎭)으로 향하는 도중 무장한 중국군이 차를 세운다. “탈북자를 찾아내려는 겁니다. 저 사람들 요즘 독이 바싹 올라 있단 말입니다.” 현지 안내인이 목소리를 낮춰 설명한다. 서쪽으로 차를 몰아 광평(廣坪)의 군부대를 지난 뒤부턴 마을조차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부턴 백두산 기슭이다. 이 길과 만나는 네 줄기의 하천은 모두 오도백하(五道百河)로 흐르는 물줄기다. 그 중 세 번째 강줄기는 북한 쪽에서 흘러나오는 강이다.

  ‘기점으로부터 301㎞’라고 씌어진 작은 표지석을 지나자 얼마 안 가 그 세 번째 ‘강’이 보인다. 폭 15~20m 정도의 이 강줄기는 물이 말라 바닥이 훤히 드러나 있다. 강바닥 돌들 위로는 얼어붙은 눈이 단단히 덮여 있다. 강줄기를 따라 약 3㎞를 걸어 올라갔다. 강줄기는 자작나무가 빽빽이 들어선 숲 속에서 점점 경사가 급해진다. “더 들어가면 자칫 국경을 넘어갈 수가 있소! 그만 돌아가오.” 안내인의 목소리다. 앞쪽에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하나 보인다. 언덕으로 이어진 길을 200m 정도 걸어가니 정상에 초소가 하나 있다. 창문으로는 김이 뿜어 나온다. 중국군의 초소겠거니 생각하고 그 앞까지 걸어간 순간, 갑자기 초소에서 외투를 입은 군인 한 명이 문을 열고 나온다. 북한 군인이다.

  이쪽을 본 북한 군인은 눈을 크게 뜨더니 순간적으로 어깨에 맨 총에 손을 댄다. 그도 무척 놀란 표정이다. ‘이미 국경을 넘어선 건 아닐까’란 생각으로 주위를 둘러본다. 초소 왼쪽에 붉은 색으로 글씨가 씌어진 비석이 있다. ‘中國 17’. 백두산 천지 남쪽으로부터 두만강 상류까지 중국과 북한의 국경을 표시한 21개의 국경비 중 열일곱 번째 비석이다. 비석 앞에서 동서 방향으로 이어진 좁은 길은 중국군과 북한군이 공동으로 순찰하는 ‘순라길’이다. 국경까지 온 것이다. 여차하면 총을 겨눌 기세인 북한 군인을 뒤로 하고 오른쪽 강줄기로 향한다. 계속 가면 백두산 천지까지 이어진다는 순라길과 강이 만나는 곳에 작은 나무다리가 있다. 강 폭은 약 5~6m 정도. 물이 말라 있었고 숲에 가려 시야도 좁았지만, 상류는 바로 앞 북한 땅 깊숙한 곳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다. 아마도 조금만 더 상류로 올라가면 백두산 정계비로부터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 토퇴(土堆)와 석퇴(石堆)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갈 수 있는 건 거기까지였다. 이곳 주변에서 20년 동안 산림감시원으로 일하고 있는 중국인 A씨는 “북한쪽으로부터 물줄기가 나오는 하천은 이 근처에서 이곳 하나뿐”이라고 말했다. 겨울엔 건천이지만 봄부터 8~9월까지는 물이 흐른다고도 했다.

  ‘조선왕조실록’ 등에 의하면, 백두산 정계비가 세워진 천지 동남쪽의 분수령은 토문강의 강원(江源)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고 토문강의 흐름도 일정하지 않았다. 청나라측은 국경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 토퇴·석퇴를 쌓을 것을 조선측에 주문했다. 바로 이 토퇴·석퇴가 이어져 있던 강이 바로 토문강이었다. 1885년과 1887년 조선과 청의 국경회담 결과 양측이 작성한 지도에서 토퇴·석퇴가 있었던 강은 현재의 중국 지도에는 ‘오도백하(五道白河)’로 표시돼 있다. 간도협약 직후인 1909년 일제 통감부가 작성한 지도 역시 오도백하를 ‘토문강’으로 명기하고 있다.

  육락현(陸洛現) 간도되찾기운동본부 대표는 “많은 자료들을 검토한 결과 토퇴·석퇴가 있는 토문강 발원지는 현재 북한 영토임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토문강이 동쪽으로 흐르다가 어떤 지점에서 땅 밑으로 복류하고 다시 땅 위로 흘러 북쪽으로 방향을 바꾼다’는 기록과 들어맞는 것은 ‘17호 국경비’ 옆의 하천이다. 신형식(申瀅植) 간도학회 회장은 “토문강일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은 바로 그 하천”이라고 말했다.
토문강 관련 요도 및 영상
중국발행 吉林省地圖 상의 五道白河 위치
(2000년도 북경-백두산 관광시 본인 확보)
백두산 정계비와 토문강
    (2006.9.9. 조선일보 이덕일 舍廊)

  청나라 강희제(康熙帝)는 1709년 프랑스 선교사 레지 등에게 만주를 비롯해 전 중국 땅을 실측케 했다.
  이 때 측정 결과가 42장으로 구성된 당빌 신부의 '새 중국 지도'인데, 여기서 조-청(朝-淸) 국경은 압록-두만강 북쪽 수 백리로 표시된다.

  강희제가 1712년 오랄총관(烏喇總管) 목극등(穆克登)을 보낸 것은 이 때의 측량 결과대로 조-청 국경을 확정하라는 뜻이었다.
  조선은 우참찬 박권(朴權)과 함경도 관찰사 이선부(李善溥)를 보냈다. 둘은 백두산을 90리쯤 오르다가 목극등이 나이가 많고 길이 험하니 내려가라고 말하자 (박권이) "저와 관찰사가 뒤처질 수 없다는 뜻으로 재삼 굳게 청하였으나 끝내 기꺼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숙종실록' 38년 5월 15일) 라며 내려갔다.

  그래서 역관 김지남(金指남) 경문(慶門) 부자가 대신 따라갔다. 이들 부자가 편찬한 '통문관지(通文館志)'"백두산 경계를 정할 때에 공의 부자가 산꼭대기에 올라 손으로 가리켜 구획했는데, 웅대함이 밝고 곧았으므로 목극등이 다투지 못하고 공의 말대로 따랐다" 라고 전한다.

  이 때 세운 백두산 정계비의 '동쪽은 토문강[東爲土門]' 에서 토문은 송화강(松花江) 지류로서, 이에 따르면 현재의 화룡(和龍), 안도(安圖), 연길(延吉)과 그 동쪽은 조선 영토이다.

  한편 중국에서는 두만강의 중국식 표기인 도문강(圖們江)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청나라 가경(嘉慶) 25년(1820)의 상황을 그린 중국 사회과학원의 '중국 역사지도 청(淸) 시기' 편은 송화강 서쪽 휘발하(揮發河)의 지류를 도문하(圖們河)로 표기했다.
  이에 따르면 통화(通化), 환인(桓仁), 집안(集安)까지도 조선령이라고 주장해야 할 판이다.

  최근 중국 국지전략연구기구의 '중국-조선 국경선 분쟁의 발단' 이란 논문은 변경 지식이 부족한 무관(武官) 출신 목극등이 조선 관원에 의지하여 국경선을 잘못 그었다고 주장했다.

  목극등은 레지의 측정결과보다 청에 유리하게 하기 위해 박권을 따라오지 못하게 한 것이다.

  또한 이 논문은 1992년 (한-중)수교 당시 한국이 백두산 천지와 연변 지구의 귀속문제를 제기했다고 전한다. 1992년 외교부김지남 부자라면, 중국의 대변인 노릇을 하는 지금의 (한국)외교부는 상국(上國)의 한마디에 벌벌 떨던 박권 같다.



▶ 토문강과 두만강은 별개
    (2005년 8월 26일 중앙일보 - 국과연다물회 발간 '다물'지 통원 157호 2007년 7월)
      - 중국 공식문서 ‘64년 북-중의정서’에 나와 -
     - 포항공대 박선영교수 문서 공개, 간도 등 한, 중 영토 논란 일 듯 -


  토문강과 두만당이 서로 다른 강임이 중국 정부의 공식문서를 통해 처음으로 확인됐다. 1964년 북한과 중국 간 국경문제를 정리한 ‘중조변계의정서(中朝邊界議定書)’를 통해서다. 중국측은 지금까지 ‘토문강=두만강’이라고 주장해 왔다.

  포항공대 박선영(중국사)교수는 25일 ‘중국과 조선, 소련, 몽골 사이에 체결된 조약, 협정, 의정서 모음집’(지린성길림성혁명위원회, 1974)을 공개했다. 제목 아래엔 ‘기밀문건, 주의보존' 이라 적혀 있다. 이 속에 ‘중조변계의정서’가 들어 있다.

  토문강의 실체틑 간도 문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조선과 청나라가 1712년 세운 백두산 정계비에서 국경을 ‘서쪽으로 압록, 동쪽으로 토문’이라고 규정한 이래 토문강은 조선과 중국의 영토분쟁의 고리였다.
  ‘토문강=두만강’이라면 간도는 중국 영토가 된다. 하지만 두 강이 별개의 강이라면 사정이 달라진다. 토문강 동북쪽 영토의 귀속문제가 제기되는 것이다.

  이번에 공개된 ‘중조변계의정서’에 따르면 21개의 경계 팻말 가운데 9호와 10호 사이에 토문강이 흐르는 것으로 돼 있다.’흑석구(黑石溝)’라는 명칭 바로 뒤 괄호 속에 한문으로 ‘土文江(토문강)’이라고 적혀 있다. 박교수는

  “토문강이 백두산 천지와 쌍목봉 사이에서 발원한 강임을 알 수 있다. 두만강 발원지에는 21호 팻말을 세웠다. 두 강의 명칭이 별도로 사용됐고간격도 60Km이상 떨어져 있다”고 밝혔다.
토문강과 두만강 요도

  이 문건은 간도도 언급했다. 개산둔 일대(경도 120도 46분 39초, 위도 42도 45분 40초)에 있는 총면적 4만3000평방미터의 섬으로 규정했다. 박교수는
  “간도 규모를 너무 작게 취급했지만 ‘조선인과 일본인이 조작했다’는 중국측의 주장을 뒤집는 내용”이라고 말했다. 배영대 기자.

▶ 탁지부대신 어윤중, 간도(間島)가 우리땅임을 밝히다.
    (토지박물관 연구총서 제10집- 국토와 지명, 한국사대사전)
  고종32년(1895) 탁지부대신(度支部大臣)에 임명된 일재(一齋) 어윤중(漁允中)은 고종8년(1871) 문과 급제후 누진하여 승지, 참판을 지내고, 박정양, 홍영식 등과 함께 일본에 건너가 문물제도를 시찰하고 돌아와 서북경략사(西北經略使)가 되어청(淸), 로(露)와의 국경을 정하는데 노력하였다.
  그는 특히 백두산 정계비(定界碑)에 나오는 토문강(土門江)은 두만강이 아닌 송화강 지류이므로 만주의 간도(間島)지방이 우리 땅임을 분명하게 밝혔다.
  그러나 을사보호조약으로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뺏어간 일본은 그들 마음대로 간도를 청나라에 넘겨주었다.

▶ '백두산 정계비 유감'
    (2009년 2월 26일 국방일보, 경향신문 안보전문기자 박성진)
  국방부에 출입하다 보니 '영토수호'라는 말을 자주 듣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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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 면에서 얼마 전 방문한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백두산 정계비(白頭山 定界碑)'의 탁본을 보면서 많은 아쉬움을 느꼈다.

  백두산 정계비는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경계를 정한 사실을 기록한 비석이다.
  '백두산 정계비'는 조선 숙종 38년인 1712년 백두산 정상 동남쪽 4Km 지점에 설치됐으나 1931년 만주사변 직후 사라지고 없다.
  대신 지금은 정계비의 탁본만 남아 있다.

  탁본에 남은 정계비의 내용에 따르면 조선과 청나라는 압록강과 토문강을 양국의 경계로 삼았다.
  당시 국경 조사에서는 청나라 파견관 대표인 오자총관 목극동의 뜻대로 글자가 들어갔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조선도 국경조사에 관리들을 파견했으나 당시 조선측 대표였던 접반사 박권과 함경감사 이선부가 노쇠함을 이유로 백두산 정상 등정을 포기하는 바람에 조선에서는 이의복 등 군관과 역관 6인만 정계비에 글을 새기는데 참여했다.
  결국 조선 파견단은 책임자가 없었던 탓에 청나라 목극동이 자신의 뜻대로 글자를 새기는 것을 수동적으로 지켜봐야 했다.

  이후 청나라는 토문을 두만강으로 해석하고 간도가 자기들의 영토임을 주장하게됐다.
  급기야는 1909년 일본이 청나라와 간도협약을 맺고 철도부설권을 얻는 대신 이곳을 청에게 넘겨 중국 영토로 간주하기에 이르렀다.
  만약 조선의 박권과 이선부가 청의 대표단과 함께 백두산 정상에 끝까지 올라 조선이 원하는 정확한 지명을 비에 새겨넣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역사는 가정이 없다고 하지만 조선 고위 관료의 무책임한 행위가 아쉽기만 하다.

● 전설(傳說)

  ▶ 백두산 와호봉(臥虎峰, 2654m)에 얽힌 전설
  한국의 야담과 전설시리즈 2편 김영진 엮음 ‘조선의 암행어사’에 ‘와호봉(臥虎峰)이 된 호랑이’ 라는 전설이 들어있다. 전문을 옮긴다. 와호봉은 백두산 천지 서편 북한과 중국이 설정한 제5호 국경 정계표석에서 남쪽으로 두 번째 봉우리이다.
백두산 와호봉(臥虎峰)과 현 한-중 국경 제5호정계표석


  백두산 천지를 둘러싸고 있는 열 여덟 개 봉우리들 중의 하나인 와호봉(臥虎峰)은 천지의 서남쪽에 솟아있는 해발 2500여 미터가 되는 험한 산봉우리이다. 「누어있는 호랑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이 봉우리는 그 모양이 정말로 호랑이가 누워 뭔가를 살피는 것처럼 생겼다고 한다.

  옛날, 와호봉 기슭에 자리잡은 어느 마을에서 연희라는 아이가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다. 어느 봄날, 어머니와 둘이서 나물을 캐러 산에 갔던 연희는 광주리에 가득하게 나물을 채우고는 이마에 배어난 땀을 손등으로 닦으며 잠시 쉬고 있었다. 연희의 눈 앞에는 노란 꽃이 한아름 피어 있었다.
  “엄마, 저 꽃 좀 봐요. 너무나 고와요!”
  연희가 꽃을 꺾으려고 가까이 가 보았더니 빨간 꽃과 하얀 꽃들도 여기저기에 피어 있었다. 연희가 꽃들 사이를 누비며 이 꽃 저 꽃을 꺾고 있는데 뭔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어머니! 여기에 웬 호랑이 새끼가 있지?”
  검은 줄이 쳐진 노란 새끼호랑이 한 마리가 연희를 올려다보며 다가오고 있었다. 연희가 호랑이 새끼를 안고 가자 어머니가 놀라며 말했다.
  “아니, 얘가 무슨 봉변을 당하려고 그걸 가지고 왔니?”
  “왜요? 엄마”
  “새끼를 가져가면 어미 호랑이가 찾아와서 해코지를 한단다. 어서 원래 있었던 데다 갖다 놓아라”
  “하지만 이걸 좀 봐요. 젖을 먹지 못해서 빼빼 말랐어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너무 불쌍해요”
  “정말 그러네. 어미가 사냥꾼에게 잡혔나 보구나”
  “엄마, 집에 가져다가 길러요”
  두 모녀는 새끼 호랑이를 안고 집으로 돌아와 어미의 젖 대신 콩물을 떠 먹이면서 정성스럽게 보살폈다. 연희는 잠을 잘 때도 곁에서 함께 자게 할 정도로 새끼호랑이를 귀여워 했다. 「호돌이」라고 이름도 지어 주었다. 연희가 “호돌아!-” 하고 부르면 얼른 알아듣고 달려오고는 했다.

  작은 새끼 호랑이었던 호돌이가 제법 크게 자랐을 때, 연희의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집에는 연희와 호돌이만 남게 되었다. 그런데 며칠 후, 그 마을의 부자가 불쑥 연희네 집에 찾아왔다. 그는,
  “네 어머니가 살았을 때 내게 진 빚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 아무래도 네가 갚을 수 없을 것 같으니 그 대신 우리 집에 와서 잔심부름이라도 해야겠다” 라고 말하고 휑하니 가버렸다.
  “호돌아, 이젠 우리 둘이서 같이 함께 살 수가 없단다. 내가 커서 살 곳을 만들게 되면 그 때 다시 함께 살자”
  남의집살이를 하게 된 처지여서 호돌이까지 데리고 갈 수 없게 된 연희는 슬퍼하면서 말했다.
  그후, 연희와 호돌이는 함께 살지는 않았지만 이따금 만날 수는 있었다. 샘터나, 밭에서.

  세월은 흘러 연희가 어느덧 아름다운 처녀가 되었고, 호돌이는 제법 늠름한 호랑이 티가 나게 되었다. 연희는 같은 마을에 사는 더벅머리 총각을 사랑하게 되었고, 호랑이도 그것을 알았다.
  그런데 어느날 밤. 흑심을 품은 부잣집 주인이 연희의 방에 몰래 들어와 그녀의 몸을 범하려 했다.
  “아앗, 저리 비켜요!”
  깜짝 놀라며 저항하던 연희는 베고 있던 목침으로 그의 뒤통수를 힘껏 내리치고는 집 밖으로 뛰어나갔다. 잠시도 쉬지 않고 산기슭까지 뛰어 온 연희는 그만 기진맥진하여 쓰러지며 정신을 잃고 말았다.
  새벽녘쯤 되었을까? 갑자기 서늘한 기운이 느껴져 연희가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떠 보니 호랑이가 옆에 앉아 그녀를 지켜주고 있었다. 연희는 너무나 반갑고 서러워서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그러자 호랑이는 갑자기 자기 등을 꼬리로 치면서 연희에게 타라는 시늉을 했다. 연희가 의아해 하며 등에 타자 호랑이는 바람처럼 빠르게 달려가더니 어떤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연희는 그 동굴에 머물면서 호랑이가 가져 다 준 것을 먹으며 하루를 보냈다.

  그런데 한밤중이 되었을 때 난데없이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으응?”
  연희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움츠렸다. 그런데 그녀의 앞에 나타난 것은 놀랍게도 더벅머리 총각이었다.
  “아니, 당신이 어떻게 여기를?” 연희는 너무나 반가워 말을 잇지 못했다.
  “호돌이가 데려다 준 거라오. 밤중에 갑자기 내 방에 뛰어들더니 다짜고짜 나를 등에 태우고 여기로 달려왔다오”
  “아! 그랬군요. 역시 호돌이가 당신을 데려다 주었군요”

  이튿날. 동이 틀 무렵이 되자 호랑이가 다시 동굴로 찾아왔다. 그리고 두 사람의 옷자락을 물어 당겼다.
  “으응?”
  “호돌이가 왜 이러는 거지?”
  두 사람이 이상하게 생각하며 밖으로 나오자 호랑이는 또 자기 등에 타라는 듯이 꼬리를 흔들었다.
  두 사람이 등에 타자 호랑이는 천천히 달려가 마을로 내려왔다.그 모습을 본 마을 사람들은 두 눈을 크게 뜨면서 놀랐다.
  호랑이는 곧장 부자집 안으로 들어갔는데 집 안은 썰렁했으며 아무런 인기척도 없었다. 호랑이가 전날 밤에 총각을 동굴까지 업어다 주고 다시 부자집으로 가서 부자를 물어 죽이고 나머지 식구들을 쫓아버렸기 때문이었다.

  연희와 더벅머리 총각은 부자집의 재산과 양식을 모두 마을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 후, 호랑이는 항상 마을 앞산에 웅크리고 앉아 연희를 지켜주다가 그대로 굳어져 산이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와호봉(臥虎峰)」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2004.9.3-4 아산회 북경-백두산 관광 때 찍은 사진들
천문봉에서 일동
천문봉에서 부부
천문봉 주차장에서
장백폭포에서 부부
백두산 대우호텔에서
서백두에서 일동
서백두에서 산신제
서백두 5호정계표석
오인방 천지물을 떠다
오인방 천지 물을 떠서 귀환
금강협에서
한 뿌리 두 나무 아래서
두만강변에서
토문시 두만강에서 일동
두만강철교 배경 부부


‘간도반환소송’ 통일정부대표 국제사법재판소 정식접수
【뉴욕=뉴시스】노창현 특파원(2009. 9. 2)
  우리 민족의 땅 간도(間도) 반환 청구를 위한 정식 소송이 국제사법재판소에 제기됐다.

  민족회의통일준비정부(Korean National Council the United Preparatory Government 이하 통일준비정부)는 2일(현지시간) 뉴시스와의 인터뷰에서 "통일준비정부 대표단이 네덜란드 헤이그에 소재한 국제사법재판소에 1일 소장을 제출, 정식 접수됐다"고 밝혔다.

  통일준비정부의 김영기 대표와 김영수 부대표로 구성된 대표단은 지난달 29일 네덜란드 헤이그에 도착, 현지에서 법무 양식을 갖춘 후 1일 국제사법재판소에 소장을 제출, 접수 확인증을 받았다.

  김영기 대표는 기자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간도협약 소송가능시한을 불과 사흘 앞두고 극적으로 소송을 제기할 수 있게 됐다. 이제 간도는 100년이라는 시한에 관계없이 우리 민족이 찾을 수 있는 법적인 근거를 마련하게 됐다"고 감격해 했다.

  1909년 9월4일 일본과 청나라가 맺은 간도협약은 명백히 불법조약이지만 국제법상 특정국이 100년 간 실효적으로 점유하는 동안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경우 영구히 귀속될 수 있다는 관례에 따라 올해로 꼭 100년을 맞는 간도 문제는 우리 민족에게 초미의 관심사가 돼 왔다.

  이를 위해 뉴욕의 재야사학자 폴 김 박사 등 뜻있는 인사들이 소송을 제기하려 했으나 국제사법재판소는 국가나 유엔 기구가 아니면 소송 접수가 불가능하다는 규정에 따라 대한민국 정부에 소송을 제기하도록 수 차례 청원해 왔다.

  우리의 땅 간도를 찾아야 한다는 국민적인 여론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는 일절 반응이 없어 9월4일이 경과할 경우 영원히 간도를 잃어버릴 수 있다는 절망감이 증폭된 게 사실이다. 그러나 민간 차원에서 최근 구성된 통일준비정부가 민족 주권의 차원에서 정식 소장을 준비해 접수되는 개가를 올리게 됐다.

  김영기 대표는 "국제사법재판소가 처음에 의문을 제기했지만 우리는 한국 정부와는 별개의 채널로 온 통일준비정부 대표이고 유엔 회원국인 남북한의 통일정부를 지향하는 우리 역시 유엔의 멤버"라면서 "간도 문제는 우리 민족에게 너무도 중요한 사안이기 때문에 민족 주권의 차원에서 소송을 제기한다는 설명을 그들이 받아들였다"고 전했다.

  김 대표는 "본래 국제사법재판소는 등기우편으로 수령하고 사람이 직접 받지 않는다. 하지만 이번 소송서류가 너무도 중요해 인편으로 전달하고 근거를 남기기 위해 해당 직원의 사인을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이에 앞서 김 대표 등은 네덜란드 현지의 동포 전문가들과 함께 서류를 검토했으며 현지 양식에 맞게 법무사무실에서 일체의 오류가 없도록 만전을 기했다. 특히 헤이그에 있는 이준 열사 기념관의 이기항 원장과 송창주 관장이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통일준비정부 대표단은 이준 열사기념관 앞에서 '간도협약 원천무효'라는 플래카드를 내걸고 사진 촬영을 한 후 동포들 앞에서 국제사법재판소에 반드시 소장을 접수시키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고 전했다.

  김영기 대표 등은 "1907년 7월14일 이준 열사와 이상설 이위종 열사 등이 을사강제늑약의 부당성을 만국에 알리기 위해 목숨을 바친 이곳에서 선열의 고귀한 뜻이 훼손되지 않도록 우리 민족의 땅 간도를 반드시 찾고야 말겠다"고 다짐했다.

  한편 간도 문제를 국민적 관심사로 불지피는데 일조한 뉴욕의 재야 사학자 폴 김 박사는 "김영기 대표와 연락을 주고 받으며 이번 거사가 성공하기만을 기원해 왔다. 무사히 접수됐다니 너무나 기쁘다"며 "그간 뉴시스를 통해 간도 문제가 전 세계 한인 동포들에게 알려지면서 간도의 고지도를 소장한 호주 동포 배철상 선생과 남아공의 최경자 선생 등 많은 사해 동포들이 힘을 합치겠다고 연락을 해왔다"고 밝혔다.

  통일준비정부는 간도소송 서류 사본을 이미 중국과 일본 정부에도 송부했으며 지난달 24일과 29일 두 차례 서울의 중국대사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연 바 있다. 대표단은 9월4일 귀국하며 이날 오후 4시 중국대사관 앞에서 3차 기자회견을 가질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