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백년 왕도의 든든한 보루, 수도 서울을 지키는 진산(鎭山)
북한산(北漢山, 836m)
沙月 李 盛 永(2007. 4. 10)
    한북정맥(漢北正脈)이 도봉산을 짓고, 우이령(牛耳嶺)을 건너 곧바로 서진(西進)하려다가 도봉산 하나 만으로는 오백년 왕도의 북쪽 바람막이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우이령 맞은편에 온 정성을 다하여 백운대, 인수봉, 만경대 세 암봉이 솥발처럼 정립(鼎立)한 북한산(北漢山)을 짓는다.
    그래서 고려 때부터 사람들은 ‘삼각산(三角山)'이라고도 불렀다. 주봉 백운대(836m), 인수봉(810.5m), 만경대799.5m)가 솥발처럼 삼각으로 정립(鼎立)해 있기 때문에 얻은 이름이다.
수락산에서 바라 본 북한산
오른쪽에 백운대, 인수봉, 만경대, 왼쪽이 보현봉, 문수봉
올림픽대로에서 한강을 건너 바라 본 북한산
왼쪽에 백운대와 만경대가 보이고, 오른쪽에 보현봉과 문수봉이 보인다.
왼쪽 중간에 상암 축구전용 경기장이 보인다
    북한산은 보는 방향에 따라 그 모습이 확연히 달라진다. 동쪽 기슭에서 올려 다 보면 하나의 거대한 장벽(障壁)이요, 북쪽에서 보면 첨예한 뿔 세 개가 솟은 삼각(三角)의 준봉(峻峰)이요, 서쪽에서 보면 늠름하고 굵게 흘러내린 암릉미의 극치요, 남쪽에서 보면 암봉들이 꽃무리를 이룬 화산(華山)이란 옛 이름에 걸맞는다.
< 삼각 정립(鼎立)한 북한산 주봉의 이모저모 >
비봉에서 바라본 삼각산
인수봉은 백운대 오른쪽 어깨위로 살짝 보인다. 백운대 오른쪽 송곳처럼 날카로운 봉우리가 만경대이고,
그 앞쪽의 두리뭉실한 바위 덩어리 봉우리가 노적봉이며, 그 앞에 가르지른 능선이 의상봉능선이다.
동쪽 수락산에서 바라본 삼각산
오른쪽으로부터 인수봉, 백운대, 만경대.
서쪽 대서문에서 올려 다 본 삼각산
인수봉은 안보이고, 왼쪽이 백운대, 오른쪽이 만경대, 그 오른쪽 종을 엎어놓은 것 같은 암봉이 노적봉.
오른쪽 끝이 북장대가 위치했던 봉우리
동장대에서 바라 본 만경대(왼쪽)와 인수봉(오른쪽)
    조선 숙종 때 학자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선생은 그의 문집 중 지행록(地行錄)에 삼각산의 유래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온조(溫祚)는 고구려와 더불어 다 함께 부여(扶餘)에서 나와서 백제(百濟)의 시조가 되었다. 남으로 망명해서 처음 부아악(負兒岳)에 올라 자기가 살 만한 땅을 점(占)쳤다. 그 후 그가 개국을 하게 되자 사신을 마한(馬韓)으로 보내서 국토의 경계를 정하니 그의 영토는 북으로는 패강(浿江: 지금의 대동강)에서부터 남으로는 웅천(雄川: 지금의 공주)에서 끝나고, 동으로는 주양(走壤:?)에 이르고 서로는 큰 바다에서 끝나는 영역이었다. 그는 한산(漢山: 지금의 남한산)에 성을 쌓고 궁궐을 지어 위례(慰禮)의 백성을 이곳으로 옮겨 도읍을 알차게 하였다.

    그 당시 부아악(負兒岳)이 곧 지금의 삼각산(三角山)이다. 그런 까닭에 신라도 역시 이 산을 ‘부아악(負兒岳)’이라 불렀고, 고려 때는 ‘화악(華岳)’이라 하다가 이태조가 천명을 받아 왕이 된지 3년 만에 도읍지를 한양으로 정하고, 이 산을 ‘삼각산(三角山)’에 봉하고, 나라의 중악(中岳)으로 삼아 중사(中祀:
나라에서 산천에 지내는 제사)의 제사를 드리게 되었다」고 하였다.

    병자호란때 남한산성 농성(籠城)전투에서 조선군은 더 버티지 못하여 치욕적인 항복을 하고, 청군에게 불모로 잡혀간 이름있는 사람은 소현세자(장자), 봉림대군(차자, 효종이 됨), 인평대군(3남), 김상헌(金尙憲: 예조판서), 이명한(李明漢: 이조판서) 그리고 이른바 삼학사(三學士)라 불리는 홍익한(洪翼漢: 사헌부 장령), 윤집(尹集: 홍문관 교리), 오달제(吳達濟: 부교리) 등이다.

    김상헌이 청군에게 끌려가면서 벽제부근에 이르렀을 때 이 삼각산을 바라보고 복받치는 설움을 이기지 못하여 시조 한 수를 읊었다. 아마 김상헌도 벽제 부근에서 바라 본 북한산의 모습이 삼각을 이루고 있는 것이 무척 인상적이라 불현듯 시상을 떠 오르게 했는지도 모른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
(청음 김상헌 작)
    백제 시조 온조가 이 산에 올라 나라를 세울 터를 잡았다는데 그 때 산 이름이 부아악(負兒岳)이라 하였는데, 부아악은 마치 이 산이 ‘어린아이(兒)를 업고있는 듯(負) 하다’ 하여 얻은 이름이며, 또 고려 때 화악(華岳)이라 한 것은 마치 이 산이 ‘꽃송이(華)들이 피어있는 듯하다’ 하여 얻은 이름이다.

    북한산은 단순히 몇 개의 봉우리가 우뚝 솟은 정도가 아니라 산이 갖는 모든 것을 갖추고 있다. 힘차게 치솟은 백운대, 인수봉, 만경대 암봉, 노적가리 쌓아 올린 듯 묘하게 솟은 노적봉, 서울 시가지를 한눈에 내려다 보는 보현봉, 문수봉, 비봉, 향로봉, 수리봉(족두리봉) 등이 전망대다.

    북한산은 뭐니뭐니 해도 바위의 입체감과 질감이 수려한 산이다. 동양화(東洋畵) 그림을 그릴 때 바위의 입체감과 질감을 나타내는 기법을 준법(峻法)이라 하는데, 20여 가지가 넘는다고 한다. 준법(峻法) 몇 가지를 열거해 보면
        - 도끼로 찍어 갈라진 듯한 바위의 날카로운 질감을 나타내는 기법을 부벽준(斧劈峻)
        - 비가 내리는 것처럼 점을 내리찍어 황토암석을 나타내는 기법을 우점준(雨點峻)
        - 가로로 긴 선을 긋다가 수직으로 내리 꺾는 기법을 절대준(折帶峻)
        - 산이나 봉의 전체적인 형상을 귀신의 얼굴처럼 험상궂게 그리는 기법을 귀면준(鬼面峻)
        - 말의 이빨처럼 가지런하게 그리는 마아준(馬牙峻) 등인데
    북한산은 이들 준법을 모두 구사할 대상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노적교에서 올려다 본 북한산 노적봉(716m)
왼쪽은 15년전, 오른쪽은 2007.4.8. 찍은 것
노적봉의 앞과 옆얼굴
위는 남쪽 노적교에서, 아래는 동쪽 동장대에서 찍은 것이다.
북한산 문수봉(727m)과 보현봉(714m)
왼쪽이 문수봉, 오른쪽이 보현봉
대서문 좌우측에 든든한 보루(堡壘), 원효봉(왼쪽)과 의상봉(오른쪽)
    또 문수봉에서 서남으로 승가봉, 비봉, 향로봉, 수리봉 그리고 만경대에서 동북으로 영봉, 상장봉이 양 날개를 펼치고, 향로봉에서 남쪽으로 탕춘대능선으로 이어져 홍지문까지 성곽이 이어진다. 산봉과 능선이 성벽을 쌓기에 알맞도록 늘어섰는가 하면 그 계곡에 흐르는 계류와 군데 군데 솟는 샘은 그야말로 천혜의 산성터를 제공 해 준다.
북한산 수리봉(일명 족두리봉)(왼쪽)과 향로봉(535m)(오른쪽)
    어느 산 보다도 북한산의 각 산봉들은 저마다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올려 다 보기만 해도 힘이 용솟음치게 하는 것, 신기한 모양이 보고 또 보게 하는 것, 아름다운 돌의 작품들을 있어야 할 자리에 알맞게 진열하여 바라보고 있노라면 절로 오묘한 산의 조화를 느끼게 하는 것, 여인의 가느다란 허리처럼 매끈하게 흘러내린 능선, 어머니 품안처럼 포근함을 느끼게 하는 계곡, 어느 한 개 라도 빠지면 북한산이 안될 것 같이 느껴진다.

    인구 천만이 북적대는 서울! 그기에 북한산이 있었기에 그래도 포근하고 여유가 있다. 북한산으로 향하는 어느 산능과 골짜기를 등산코스로 잡아도 마치 초행의 산처럼 새롭다. 바위도, 나무도, 물줄기도 다 새로워 보인다

    조선조 에리뜨 양성제도 ‘호당’(湖堂: 일명 賜暇讀書)이 시작된 현장 장의사(藏義寺: 세검정초등교 자리)와 진관사(津寬寺: 현재도 비봉 북쪽 계곡 진관내동에 있음) 등 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역사 흔적들이 있다.
진관사 일주문
▶ 정상에서의 조망
    임진왜란이 지나간 5년후인 조선 선조 36년(1603)에 당시 예조판서로 있던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선생이 북한산성 한가운데 있던 중흥사 주지와 함께 삼각산 노적봉에 올라 사방을 바라보고 쓴 ‘삼각산 기행(遊三角山記)’에서 조망을 이렇게 적고 있다.

    (전략)「산봉우리의 절정에 이르니 산 꼭대기는 좁아서 10여명 정도 앉을 만하였다. 밑을 내려다보니 너무 까마득하여 정신이 아찔하였다. 나는 눈을 감고 마음을 안정시킨 뒤에 다시 먼 곳을 바라보았는데, 서남쪽으로 바다가 하늘과 같은 푸른 빛으로 보이고, 구름 속에 떨어지는 해가 은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서 바라보아 기록할 만한 산은 도봉산, 수락산, 불암산, 아차산, 관악산, 청계산, 천마산, 송악산, 성거산
(천마, 송악, 성거산은 개성에 있음)등이 있는데 여기서 보기에는 모두 작은 언덕 같이 보인다.
    또 월계(月溪) 골짜기에는 굽이쳐 흐르는 물길이 사방에서 모여들고, 한강물은 마치 깨끗한 비단을 펼쳐 놓은 듯 왕도(王都)를 감돌아 꿈틀꿈틀 흘러가고 있다.
    도성 백만호의 집들은 아주 가까이 있지만 볼 수가 없었다. 다만 산 밑에서 연기 피어 오르니 마치 살아있는 그림 한 폭을 보는 듯 하다. 구름사이로 상투처럼 보이는 것이 종남산(終南山:
남산을 말하는 듯)임을 알겠다」 하였다.

    북쪽 전망: 오른편에 도봉산(740m)이 흡사 형 닮은 동생처럼 솟아있고, 송추길 건너편에 노고산(406m), 그 너머로 고양/파주/양주 지경의 계명산(622m), 더 멀리에 파주의 감악산(675m)과 동두천의 소요산(532m)도 보인다.

    동쪽 전망: 의정부로 이어지는 전철과 두개의 도로 건너편에 수락산(638m)과 불암산(508m)으로 이어지는 서울의 동쪽 울타리는 아차산 용마봉(348m)을 끝으로 한강으로 가라앉고, 그 울타리 너머로 천마산(812m), 주금산(814m), 축령산(879m) 등 서울 동쪽 근교의 산들이 진을 치고 그 너머 하늘금에는 용문산(1157m)이 걸쳐있다.

    서쪽 전망: 북한산성계곡의 끝에 대서문, 그 너머로 통일로가 북서로 달리는 주변의 고양, 파주의 낮은 구능지대가 전개된다. 저 멀리에 한강과 임진강이 합수하는 곳에 오두산이 작은 점으로 보이고, 그 오른 쪽에 높고 낮은 구능들 중에 월롱산(246m)이 맞형 노릇을 하고 있다.

    남쪽 전망: 발 밑에 북악, 인왕, 안산이 내곽을 둘린 안쪽에 거대한 20세기 공룡 서울시가지, 그 복판에 남산과 63빌딩, 이 사이에 수억년을 변함없이 흘렀을 한강이 햇빛을 받아 빤짝인다. 그 너머로 관악산(631m), 청계산(583m), 청량산(남한산성,480m), 검단산(685m) 등 강남의 산들이 맞보고 있고, 더 멀리에 광교산(582m), 수리산(475m)도 희미하게 식별된다.
북한산 비봉 오름 길에 바라보는 서울 풍경
▶ 북한산성(北漢山城)
    북한산은 산성을 쌓기 좋도록 천부적인 보루를 이루고 있다. 서북쪽 원효봉에서, 염초봉, 백운대, 만경대, 용암봉, 시단봉, 보현봉, 문수봉, 나한봉, 나월봉, 증취봉, 용혈봉, 용출봉, 서남쪽 의상봉에 이르기까지 암봉이 둘러서 있어 약간의 인공 성곽만 구축해도 튼튼한 산성을 이룰 수 있도록 되어있다

    백제가 세력이 강성해져 대방군(帶方郡)의 옛땅을 합치고 북진할 때인 백제 개루왕 5년(서기137년)에 처음으로 북한산성(北漢山城)을 쌓았다.

    고구려 광개토왕과 그 아들 장수왕대에는 고구려의 세력이 강성해져 만주 대륙과 반도 내부로 팽창하면서 연이어 백제를 공격하여 장수왕은 백제의 북한산성을 함락하고 이 일대를 북한산주(北漢山州)에 예속시켰다.

    신라 진흥왕 때는 신라가 강성하여 이 곳을 차지하고 북한산에 왕의 순행(巡行)을 기념하여 비봉(碑峯)에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를 세웠다.

    고려때는 개성이 수도이기 때문에 이 곳을 중요시하지 않았으며, 조선 초기에도 그다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다가 선조때 임진, 정유왜란과 인조때 정묘, 병자호란을 당하여 피란처로 중요성이 인식되었다.

    조선 효종 10년(1659)에 왕이 우암 송시열에게 명하여 북한산성을 수축하여 ‘임란이어처’(臨亂移御處: 유사시 임금이 옮겨갈 곳)로 하여 도성(都城)의 근본(根本)을 견고하게 하라는 하교가 있어 이때부터 북한산성 축성에 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숙종28년과 30년에 본격적인 논의를 거쳐 숙종37년(1711) 4월에 축성을 착수하여 9월에 완료하고, 이듬해 임금이 직접 둘러 봄으로서 현재의 산성이 완성되었다.

    숙종38년에 도제조(都提調: 정승이 겸직)와 제조 1인, 낭청 1인으로 된 북한관성장(北漢管城將)이라는 산성 경리청(經理廳)을 설치하였고, 또 중흥사(重興寺)에는 전국의 절에서 윤번제로 차출된 370명의 승병(僧兵)을 거느리고 산성을 지키게 하는 북한산성총섭(北漢山城摠攝)을 두었다. (중흥사 중창 사업이 진행중임)

    북한산성은 둘레가 7,620보, 행궁지 1개소, 문 14개, 장대 3개, 곽성 143개, 못 26개소, 우물 99개소가 있다. 14개문은 대남문(大南門), 대성문(大城門), 보국문(輔國門), 대동문(大東門), 중성문(中城門), 대서문(大西門) 등 6개의 대문과 위문(衛門: 백운대와 만경대 사이), 용암문(龍暗門: 노적봉과 용암봉 사이), 청수동암문(청수洞暗門:문수봉과 나한봉 사이), 부왕동암문(부왕洞暗門: 나월봉과 정취봉 사이), 가사동암문(가사洞暗門: 용출봉과 의상봉 사이), 수문(水門: 북한산성계곡 하류 물길), 서암문(西暗門: 일명 시구문, 원효봉 능선 끝), 북문(北門: 염초봉과 원효봉 사이) 등 8개의 소암문(小暗門: 작은 비밀 통로)이다.

    전투시 지휘소로 쓸 장대(將臺) 3개는 문수봉의 남장대(南將臺), 노적봉 서쪽 끝 봉의 북장대(北將臺)는 그 터만 남아있고, 대동문 북쪽 시단봉에 동장대(東將臺)는 1996년에 그 원형을 복원하였다.

    산성(山城)의 대문 이름 중에는 대남문(大南門), 대동문(大東門), 대서문(大西門)이 있는데, 도성(都城)의 남대문(南大門), 동대문(東大門), 서대문(西大門)과 구별하기 위하여 글자를 바꾼 것으로 생각된다.
북한산성 요도와 안내판 글
복원된 북한산성의 성곽 모습
북한산성 대남문(大南門)
북한산성 대성문(大城門)
북한산성 보국문(輔國門)
북한산성 대동문(大東門)
북한산성 대서문(大西門)
    북한산성에는 남한산성과 달리 중성문(中城門)이 있는 것이 특이하고, 또 동장대는 성곽에 위치했지만, 남장대와 북장대는 성곽보다 훨씬 안쪽에 위치하고 있다.

    북한산성은 물론 사주를 동시에 방어할 수 있도록 구축했지만 아무래도 적의 주공격방향을 북서쪽 즉 대서문 방향으로 본 것 같다. 만에 하나 이방향에 역부족으로 성곽 일부가 피탈 당하는 상황을 고려한 예비 계획까지 고려한 것으로 생각된다. 즉 대서문 지역 일부가 피탈 당하더라도 북문-북장대-중성문-중취봉을 연하여 제2의 방어선을 이루어 농성전투를 지속할 수 있도록 종심편성을 한 것이다.

    이경우 행궁은 물론이고, 남장대(남쪽 지휘소)와 북장대(북쪽 지휘소)는 변함없이 현 위치에서 전투지휘를 계속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참으로 융통성 있는 계획이 아닐 수 없다.
북한산성 중성문(中城門)
북한산의 동장대(東將臺)
북한산성 남장대(南將臺)가 있던 곳
능선 오른쪽 끝에 남장대가 있었고, 왼쪽으로 문수봉이 이어진다.
북한산성 북장대(北將臺)가 있던 곳
가운데 봉우리에 북장대가 있었고, 오른쪽으로 노적봉을 올라간다.
    북한산성은 조선 인조 때부터 고종21년(1884)까지 총융청에서 관할하였으며, 총융청 책임관원이 총융사(摠戎使)인데 역대 총융사의 공덕비들 한 곳에 집결하여 세워져 있다.
총융사 선정비군
▶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
    북한산 문수봉에서 서남쪽 능선에 승가봉, 비봉, 향로봉 순으로 암봉이 솟아 있는데 비봉에는 신라 24대 진흥왕(서기 540-576년)이 북한산을 순행하여 국경을 척정(拓定)하고, 세운 높이 1.55m, 폭 0.71m의 화강석 비석을 ‘북한산신라진흥왕순수비’라 한다.

    신라 진흥왕순수비의 건립 연대는 진흥왕16년(시기555년)에 북한산을 순행한 기록이 있는 만큼 이 시기 일 것이다. 국보 제3호로 지정하였으며, 오랜 세월에 비문도 거의 마멸되어 현 상태라도 보존하기 위하여 원비(原碑)를 국립박물관에 옮겨 보관하고, 그 자리에는 동일한 크기의 모조 비석을 세웠다.

    진흥왕의 순수비는 여기 북한산 외에도 북쪽으로는 멀리 함남북의 경계인 황초령에서 남쪽으로는 경남 창녕까지 모두 4개가 발견되었는데 고구려 광개토대왕비 다음으로 중요한 물증적인 사료(史料)가 되고 있다.

    창녕비(昌寧碑: 경남 창녕), 북한산비(北漢山碑: 서울 북한산 비봉), 황초령비(黃草嶺碑: 함남 황초령), 마운령비(麻雲嶺碑: 함남 이원군 마운령) 등이다.
비봉(560m)
지금 비봉에 서 있는 진흥왕순수비 모조품
15년 전 쯤에 찍은 것
진품이 비봉에 서 있던 모습(왼쪽)과 지금 국립박물관에 소장된 사진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가 발견하여 고증(考證)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한다.
실내 유리관 속에 보관되어 사진이 선명하지 않다.
< 북한산성 답사 등산 앨범 >
    2007. 4. 8. 우리부부는 주말 산행으로 북한산으로 잡고, 코스는 구기동-대남문-대성문-보국문-대동문-동장대-중흥사지-중성문-대서문으로 정했다. 부부 함께 대서문을 오른 것이 15-6년 전 휘림 애미와 함께 오른 후로 오른 기억이 없고, 복구 중이던 성곽이 어떻게 탄생했는지 궁금해서 이 코스의 성곽을 따르기로 했다.
▶ 구기동계곡
    구기동 계곡은 다른 어느 곳보다도 등산객이 많은 코스라 등산로 정비도 잘 되어 있다. 다리와 데크식(나무 마루) 등산로가 일찍부터 설치되었다. 교량의 이름들이 박새교, 버들치교, 귀룽교 등 그 주변에 서식하는 동식물의 이름을 많이 따고 있어 흥미롭다.
버들치교
1번교 박새교는 깜빡 해서 찍지 못했다.
버들치는 우리 시골에서는 ‘둥태’라 해서 민물고기 중에서 별로 각광을 받지 않았는데
지금은 1급수 바로미터 물고기로 각광을 받고 있다. 그러니까 버들치가 사는 개천은 맑은 물, 1급수다.
귀룽교
귀룽교 주변과 북한산성계곡의 귀룽나무
귀룽나무 잎, 꽃, 열매
    귀룽나무는 벚나무속에 속하는 나무로 봄에 잎이 일찍 나고, 꽃은 총상꽃차례(總狀花序: 아카시아, 마로니에 등)로 벚꽃보다 좀 늦게 피고, 5-7월에 까만 열매를 맺는다. 보기 힘든 나무인데, 북한산 계곡에서는 구기동계곡, 승가사계곡, 북한산성계곡 등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이와 유사한 나무로 외국에서 조경수로 들여 온 ‘세로티나벚나무’가 있다.( 8-9년전 시골집에 많이 식재했다)
세로티나벚나무
우정교
전 금요산악회장 우정 정진덕이 이 다리 때문에 1년에 한 번 씩 준공기념일에 한 턱 쏘아야 했었다.
박신자씨 왈 “고마 그 다리 때리 뿌아야 겠심더”
돌단풍교
돌단풍
돌단풍은 초본과 다년생 풀. 잎 모양이 난풍나무를 닮았고, 봄에 흰색 꽃을 피운다.
철쭉교
지금 피어있는 꽃은 철쭉이 아니라 진달래다. 주변에 철쭉이 안 보이는데 ‘철쭉교’라 했다.
철쭉교 주변의 진달래와 생강나무꽃
다른 곳에는 생강나무 꽃이 시들었는데---
대남교
이 대크등산로는 여기서 대남문까지 약 300m 이어진다. 그래서 얻은 이름 같다.
대남문 중간 바람재를 오르는 깔닥고개
바람재인줄 알았는데---
진짜 바람재
바람재에서 바라보는 대남문
< 바람재-대남문 사이 바라보이는 암봉들 >
비봉
승가봉 사모바위
승가봉
승가봉-문수봉 간의 무명봉
문수봉
대남문 앞에서
대남문 문루 위로 바라보는 서쪽 문수봉 쪽 성곽
대남문 문루 위에서 동남쪽으로 바라보는 보현봉
대남문 문루 위에서 내려다 보는 구기계곡(올라온 길)
보현봉쪽 성 밖 기암
자연 암문
성안 따듯한 곳에서 점심(김밥과 군고구마)
삼각산 전망대
가운데 백운대는 만경대에 가려 안보이고, 왼쪽은 노적봉, 오른쪽은 인수봉
대동문 밖과 안
동장대 원경과 근경
동장대에서 남쪽으로 바라보는 대남문
참 멀리 왔네
동장대에서 내려다 보는 진달래능선 등산로와 수유동 시가지
중성문을 나오며
대서문을 나오며
지나온 길 도상에서 리뷰
< 대남문에서 동장대까지 성곽을 따라 >
삼각산이 가깝게 보이는 복구된 성 끝부분
< 추억의 북한산 등산사진 >
    그동안 수없이 북한산을 오르면서 카메라를 가져가서 찍었거나, 동료들이 한, 두 장씩 찍어준 사진이 사진첩 곳곳에 끼어 있어 이들 추억의 사진들을 모아 함께 올린다. 사진첩을 성의 있게 정리하지 않아서 사진을 찍은 등산 코스는 기억이 나는데 연도는 모르는 것이 대부분이다.
▶ 평창동-보현봉(부부)
보현봉 정상 직전 암반
보현봉 바로 아래
▶ 정릉(국민대)-보현봉(부부)
보현봉 아래
보현봉 정상
위 사진 왼쪽, 아래사진 오른쪽 멀리 보이는 봉우리가 만경대
보현봉 정상에서 서울 시가지를 배경으로
의좋은 까치 형제(위)와 의 안 좋은 까치 형제(아래)
▶ 구기동-비봉(부부)
비봉 남쪽 아래서
비봉 진흥왕순수비 모조품
비봉 정상에서 보현봉을 배경으로
하산 중, 비봉서편에서 비봉을 배경으로
▶ 대서문-원효봉(부부, 미애, 미영)
원효봉과 염초봉 사이 북문 근처 허물어진 성터에서
나 혼자 염초봉 중턱에 올라 바라본 원효봉 성터
아내와 미애, 미영이 아래 남아 있었는데 너무 멀어 식별이 잘 안된다.
▶ 우이동 도선사-백운대(부부)
백운대 정상에서 인수봉을 배경으로
▶ 우이동 도선사-만경대(부부)
만경대 오르는 도중 괴석 옆에서
만경대 정상에서 인수봉을 배경으로
만경대 정상에서 도봉산을 배경으로
가운데가 오봉, 오른쪽이 자운봉, 만장봉
만경대 정상에서 바라 본 백운대 등산길
휴일이라 등산객이 일렬로 줄을 섰다.
▶ 우이동 도선사-백운대(동호회)
백운대 암벽등산의 시발점 위문 근처
가운데가 백운대, 오른쪽이 인수봉
백운대 정상에서 인수봉을 배경으로 일동
정상 아래 마당바위에서 백운대 정상을 배경으로
정상 아래 마당바위에서 인수봉을 배경으로
야영장에서 점심 취사
지금의 용암문 남쪽 북한산대피소 지역
점심식사후 노적봉과 백운대를 배경으로 일동
왼쪽이 노적봉, 오른쪽이 백운대
▶ 정릉-보국문(부부, 미영)
정릉에서 보국문으로 오르는 정릉계곡 등산로
하산길 칼바위능선 위에서
▶ 평창동-보현봉(1992년 5월, 아산회)
보현봉 아래 일선사 입구에서 일동
뒤에 멀리 보이는 봉우리 오른쪽으로부터 인수봉, 만경대, 노적봉(백운대는 만경대에 가려 안보인다)
▶ 정릉-대성문(1995년 6월, 아산회)
대성능선 보현봉 아래
대성문 부근에서 등선주
▶ 진관사-비봉(부부)
진관사 계곡 만산홍(滿山紅) 진달래
진관사계곡 상부 암봉을 배경으로
비봉능선에 올라
오른쪽이 비봉, 가운데가 보현봉, 왼쪽이 문수봉
비봉능선에 올라 백운대쪽을 배경으로
비봉 정상
비봉능선에서 북쪽 북한산 파노라마
하늘금 왼쪽 먼 봉우리가 백운대, 만경대, 오른쪽 문수봉과 보현봉
▶ 의상봉-대남문(부부)
의상능선 괴암에서
용출봉 정상
의상능선 숲길 등산로
문수봉을 배경으로
추억의 북한산 등산사진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