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산의 북쪽 진, 호국의 얼 숨쉬는 산
독용산(禿用山: 956m)
沙月 李 盛 永
  백두대간 대덕산 삼도봉에서 동남쪽으로 분기한 수도기맥(修道岐脈)이 수도산(1317m), 단지봉(1324m) 지나 가야산 초입의 두리봉(1133m)에서 북쪽으로 하나의 지맥을 뻗치는데 석항산(797m), 형제봉(1022m) 다음에 삼각으로 우뚝한 산을 솟구치니 독용산이다.

  독용산에서 북쪽으로 내려다 보면 약 1Km 되는 지점에 그저 그런 봉우리 하나를 솟아 놓은 것 같지만 북쪽 배바위나 넉바위 마을에서 독용산을 오르는 사람들에게 한참동안 독용산으로 착각케 하는 기봉(欺峰: 속이는 봉우리) 856m봉이다.

  856m봉은 높이로는 독용산 정상보다 100m정도 낮지만 그 생긴 모양새가 정상을 꼭 빼닮았고, 그 위세가 독용산 정상을 능가할 정도로 당당하다.

  독용산의 ‘독(禿)’자는 대머리라는 뜻이니 민둥산이란 말이지만 이 산은 바위가 별로 없고 토심이 깊어 수목들이 잘 자라서 계곡이나 등성이나 온 산이 울창하게 우거졌다. 그런데 왜 이 글자를 썼는지 감이 잡히질 않는다.
독용산 정상(왼쪽)과 기봉(欺峰) 856m봉(오른쪽)
독용산 위치도

  지도를 놓고 보면 ‘산형 천하제일, 지덕 해동제일’의 가야산을 가운데 두고 서쪽에는 수도산, 남쪽에는 매화산과 남산제일봉과 우두산(일명 별유산), 동쪽에는 미숭산 그리고 북쪽에는 바로 독용산이 진을 치고 있는 형국이다. 더구나 독용산은 영남제일의 산성 ‘독용산성(禿用山城)’을 띠처럼 두르고 있어 오랜 가야(伽倻)시대부터 호국의 산으로 그 사명을 다해 왔다.

  북쪽은 수도산에서 발원하여 독용산을 휘감아 도는 대가천이 성주댐에 잠시 갇혔다가 남쪽으로 흘러 고령시가지 동남쪽에서 가야산에서 발원해서 동류하는 안림천과 합류하여 고령, 달성, 합천, 창녕 4군의 지경에서 낙동강에 합수한다.
독용산 정상
정상에는 관리하지 않고 있는 시멘트 헬기장이 있으며,
표석이나 표목은 없고, 어느 등산객이 걸어 놓은 종이 표지가 소나무에 걸려있다

▶독용산성(禿用山城)
  독용산 정상 북쪽 9부를 북단으로 하여 동쪽은 신흥뒷산(562m)로 연결된 능선, 서쪽은 형제봉(1022m)에서 흘러내린 능선을 따라 각각 1-2Km 가다가 성주군 가천면사무소가 있는 창천을 향하는 계곡을 감싸 안는 이른바 포곡식(包谷式: 계곡을 껴 안는 방식) 산성이다.

  지금부터 1500여년인 4세기 중엽 6가야 중 성산가야(星山伽倻) 때 토성으로 시축(始築)되어 백제, 신라,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 때까지 확장을 거듭하면서 석성으로 개축하였으며, 그 후 조선 중기까지 소외되었다가 조선 중기에 일부 개수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가야시대에 시축 한 것으로 추정하는 것은 성 내에서 발견되는 토기편들이 가야시대 토기로 평가되기 때문이다. 또 조선 중종30년(1530)에 발간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독용산성을 돌로 쌓았다’는 기록이 있어 처음에는 토성이던 것을 석성으로 개축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조선 숙종실록에도 ‘숙종 원년(1675) 말에서 이듬해 초까지 4개월간 독용산성을 개축했다’는 기록 등으로 보아 임진왜란 이후 경상도병마절도사(兵使)에 딸린 병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1677년에 발간된 성주지(星州誌)에는 성의 길이가 13,064척(尺) 4,581보(步)로 기록되어있으나, 1992년 독용산성지표조사 결과 등고선 800m선을 따라 높이 2-3m, 둘레(길이) 7.7Km로 영남에서는 가장 큰 포곡식(包谷式) 산성으로 평가되었다고 한다.

  현재 6Km의 성곽과 동, 서 남, 북 4개소의 문지(門址: 문이 세워졌던 터), 동, 서, 남 3개소의 암문지(暗門址: 비밀통로 터), 계곡 1개소의 수구지(水溝址: 성 밑 물길 구멍 터), 객사터, 군기고터, 창고터, 안국사터 등 4개소의 건물 터, 2개소의 샘이 남아있고, 해방 전후하여 약 40여 호의 민가가 있었으나 1960년대에 모두 떠났다고 한다.

  지금은 동남방 일부(약 1Km) 성곽과 동문, 동암문이 복원되었고, 성내에 산재하던 5기의 선정비(善政碑)와 불망비(不忘碑)를 복원된 동문에 이전하여 전시해 놓고 있다.

  * 선정비와 불망비: 성주목사 이용화(李龍和)의 불망비를 중앙으로 하여 왼쪽에 별장(別將) 이승무(李承憮) 선정비와 주진기관(主鎭記官) 배능헌(裵能憲) 불망비, 오른쪽에 별장 장천학(張天鶴) 불망비와 별장 박시연(朴時演) 선정비순으로 배열해 놓았다. 또 비석들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성주군수와 성주문화원장 이름으로 '우리고장의 사적(史蹟)안내'라는 표석도 세워 놓았다.

  우리고장사적안내표석 전문: 李龍和(1823-1902)는 1888년 고향인 성주고을에 부임하여 사재를 털어 백성을 구휼하고 산성과 성 안의 관사 건물을 중수하고 국난에 대비하여 병사들이 편하게 맡은 일을 하게 되었으며, 덕을 쌓ㅇㄴ 선생은 마침내 병조참판이 되어 떠나니 고을 사람들이 그의 공을 기려 이 비(이용화 불망비를 말함)를 세웠고, 또한 성주읍에는 牧民善政碑(목민선정비)를 따로 세워 백성을 아끼고 사랑한 선생의 옛 모습을 볼 수 있다.
아 아! 懿德(의덕)이 백성을 심었으니 산 같이 높고 물과 같이 길었도다.(山高水長) 나라에 忠(충)을 다 했기에 가문에도 孝(효)가 이어져 이제 碧珍李氏(벽진이씨) 문중 후손들이 경모의 뜻을 모아 琴石(금석)코자 함에 누구가 장하다 않으리오.
서기 2000년 춘3월 성주군수 김건영, 성주문화원장 제수천.
복원되지 않은 독용산성 부분
암문의 덮개인 듯한 대형 석편
올려 다 본 복원된 성벽(오른쪽)과 동문(왼쪽)
왼쪽 봉우리가 독용산 정상(956m), 오른쪽 봉우리가 기봉 856m봉
동문 전면(위)과 후면(아래)
동쪽 날개성
가까운 쪽은 복원된 부분이고 먼 쪽은 복원되지 않은 상태

▶일제 치하의 아픈 상처
  일제시대에 전국의 소나무들이 큰 수난을 당했다. 뭣에 쓰는 지는 잘 모르지만 - 구전에 의하면 비행기 운용에 쓰인다 했음- 소나무 송진을 의무적으로 공출하도록 할당하고 강요했다. 송진은 소나무 줄기의 일부 껍질을 베끼고, V자로 홈을 파 놓으면 송진이 흘러내려 얻는다.

  856m봉에서 독용산 정상으로 오르는 능선상에만 해도 십여 그루 이상의 소나무가 그 형상이 일그러져있다. 껍질을 베낀 곳이 아물기는 했지만 그 상처는 흉스럽게 남아 있는 것이다. 우리 소나무는 예로부터 자태가 붉고, 미끈하고, 늘씬하여 적송(赤松), 미인송(美人松), 여송(女松)이란 별칭도 얻은 나무였는데 이렇게 흉스럽게 일그러져 있다.
흉스러운 흉터가 일제의 학정을 이야기하고 있다
독용산 등산 앨범
  2005년 3월 14일에 봄채비를 하려고 시골에 내려왔다. 오는 길에 전국의 묘목 70%가 생산된다는 충북 옥천군 이원면으로 지나오면서 밤나무 20그루, 천중도 복숭아 10그루를 사왔기 때문에 과수 묘목부터 먼저 심고, 다음은 배나무, 복숭아나무 순으로 전지(剪枝)를 하고, 농협에서 계분(鷄糞) 발효 걸음을 사다가 시비(施肥)를 하였다.

  귀경 길에 길 가의 전문 과수원들을 넘겨 다 보니 난 아직도 멀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금년에는 눈 딱 감고 과감하게 전지를 하겠다고 생각하고 내려갔었는데 다른 과수원을 보니 50%는 더 잘라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음에 내려가서 추가적으로 전지를 해야겠다고 맘 먹고 있다.

  식재, 전지, 시비를 하고 나니 별 할 일이 없다. 뻐근한 몸도 풀 겸 참숯가마 찜질을 가기로 했는데 하루 종일 숯가마에 들락거릴 수도 없고 해서 숯가마 근처 산을 오르기로 하고 지도를 놓고 여기저기 찾아보니 수도산(修道山: 1317m)이 적절한데 나는 작년에 2회나 올랐고, 집사람도 한 번 올랐으니 별 흥미가 없다.

  그러는 가운데 눈길이 간 것이 독용산이다. 독용산에는 붉은 글씨로 ‘독용산성’이라 적혀 있으니 더욱 흥미롭다. 아산회 가야산특별산행을 위해 오갈 때 30번 국도변에 독용산성 안내표지가 있는 것도 본 기억이 나서 독용산에 올라 산성을 구경하고 숯가마에 가기로 결정하고 집을 나섰다.

  우리 시골 쪽에서 독용산을 오르는 길은 성주군 금수면 봉두리 배바위 마을과 넉바위 마을 두 곳에서 오를 수 있다. 성주군에서는 독용산성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인지 이 두 코스에 과도할 정도로 수목을 잘라 등산로를 개척해 놓았다.

  이번 등산은 배바위 마을에 차를 두고 올라 독용산 정상에 올랐다가 동쪽 복원된 성곽과 동문을 구경하고 넉바위 마을로 내려왔다. 등산에 2시간, 성곽 구경 및 하산에 2시간 20분, 넉바위 마을에서 대가천 물길을 따라 배바위 마을까지 돌아오는데 40분, 합계 5시간이 걸렸다.

  등산은 배바위 마을 뒤 골짜기 계곡길로 오르다가 기봉 856m봉의 코 앞에서 왼쪽 능선으로 올라 능선길로 좀 오르다가 856m봉을 오른쪽에 두고 왼쪽 사면을 비껴 가로질러 856m봉과 정상을 있는 능선에 올라서서 계속 능선 길로 정상까지 오른다. 마지막 200m정도가 경사가 급하고 나머지는 등산하게에 적절한 경사다.

  하산은 독용산성의 동쪽 날개성을 따르다가 성이 끝나는 지점에서 능선 길로 하산 하는데 경사가 몹시 심하다. 능선으로 거의 다 내려와서 왼쪽 계곡으로 내려서서 골짜기를 조금 나오면 넉바위 마을이다. 내려온 길은 몹시 경사가 급해서 이 길로 등산하기에는 좀 무리인 것 같다.
30번 국도상의 독용산성 안내 표지
배바위교에서 바라보는 배바위 마을과 독용산(기봉) 모습
배바위 마을의 독용산 산행기점표지
등산 중 바위 및 이정표
휘어져 얽힌 복분자딸기 넝쿨
암석에 노란 페인트로 방향표시
왼쪽 능선에 올라서 묵묘에서 바라 본 856m봉
856m봉과 정상을 잇는 능선의 흉터진 소나무 옆
독용산 정상(956m)
독용산성에서 바라보는 가야산
정상에서는 더 크게 보이지만 수목 때문에 사진을 찍을 수가 없다.
독용산에서 바라본 서북쪽 수도산(1317m)-덕유산 향적봉(1614m)
내 고향 백두대간 대덕산(1290m, 가운데)
내 고향 백두대간 부항령 - 삼도봉(1177m) - 화주봉(1207m)
내 고향 백두대간 삼도봉 - 화주봉 - 황악산(1111m)
독용산 정상 9부 성터에 꽂힌 배바위, 넉바위 갈림길의 이정표
복원된 독용산성을 구경하려면 넉바위 방향으로 가야한다.
복원된 성곽
복원된 동문에 올라
성안에서 흘러내리는 물길 계곡, 먼 들판이 가천면사무소가 있는 창천마을
하산길 마당바위
하산길 중간 이정표
하산길에 내려다 본 30번 국도와 성주댐 저수지
넉바위 마을 등산길 기점이자 하산길 종점 이정표
넉바위 마을 하산 종점에서 뒤 돌아 본 독용산 856m봉
수도산 발원의 대가천 맑은 물과 기암
선바위
이 바위 윗쪽 마을이 윗선바위마을이고, 아랫쪽 마을이 아래선바위마을이다.
숯가마가있는 김천시 증산면 금곡리에서 보이는 가야산 꼭대기
김천시 증산면과 지례면을 잇는 속칭 ‘아흔아홉구비길’에서
바라본 내 고향 백두대간
왼쪽으로부터 백도래산(1030m), 감투봉(1150m), 석기봉(1200m), 삼도봉(1177m), 밀목재, 화주봉(1207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