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소식따라 땅끝까지
沙月 李盛永(2005. 4. 10)
  봄바람은 나이를 잊게 하나보다. 엊그제까지 아이쟁을 신고 눈산행을 했건만 남쪽 꽃소식은 그냥 앉아 있게 하질 않는다. 시골 가는 길에 남녘을 둘러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月刊山 특별부록에 ‘붉은 동백과 함께 봄날은 온다’는 제목으로 월출산 경포대-녹우당-두륜산 대흥사-달마산 미황사-땅끝-보길도-다산초당-백련사를 잇는 꽃길을 소개하면서 ‘환상의 여정’이라 극찬한 글을 읽었다.

  우리 내외만으로는 좀 싱거울 것 같고, 동료를 찾아 보려고 월요, 금요산행 때 은근히 운을 띄운 것이 박영배와 통하는 것이 있었다. 박영배는 내외가 어느 TV 프로에서 보았다며 달마산 도솔봉 어느 곳에 있는 관음암을 꼭 가보고 싶다고 했다. 바위가 좋고, 산이 좋더란다. 그래서 죽이 맞은 것이다.
  내 승용차로는 두 집이면 되지만 아들 RV로는 3집도 가능하다. 결국 박영배가 이범수를 끌어 들였다.

  2005년 4월 1일 출발해서 4월 3일까지 2박3일로 박영배, 이범수, 그리고 우리 네 부부가 RV차 한대로 다음과 같은 코스로 남쪽 바람을 쏘였다.
  제1일(4/1): 서울-해남 이동, 윤선도 유적 녹우당 구경, 두륜산 구경(케이블카), 대흥사 구경, 땅끝 이동 땅끝전망대 및 땅끝탑 구경, 땅끝마을 숙박(미황사 부근에는 숙박시설이 없음)
  제2일(4/2): 달마산 등산, 미황사 구경, 땅끝- 보길도(배편, 차량탑재), 윤선도 유적 세연정 및 보깅도 3/4 일주, 보길도-완도(배편, 차량탑재), 완도-쌍계사 앞 민박(주말 벗꽃 축재 개막으로 하동-화개장터 간의 숙박 시설 만원)
  제3일(4/3): 쌍계사, 불일폭포, 매화마을 화개자터, 지리산온천랜드 온천욕, 박영배와 이범수네는 남원에서 고속버스로 상경, 우리 부부는 시골행

  꽃은 수명이 긴 동백이 가는 곳마다 반겨 주었고, 매화는 한창 철을 약간 넘어선 상태이지만 주말에는 마을이 버스와 승용차로 미어졌다. 섬진강 백리길 벚꽃과 쌍계사 십리길 벚꽃은 축제는 벌려놨지만 아직 꽃망울을 맺은 채 벌리지를 않고 있었다.

  찍은 사진을 다음과 같이 5개 파일로 나누어 앨범을 엮어 이성영의 홈페이지 강산이야기에 ‘꽃소식따라 땅끝까지’라는 제목으로 올려 놓았다.
  제1편: 두륜산(녹우당, 두륜산, 대흥사)
  제2편: 달마산(달마산, 미황사)
  제3편: 땅끝(땅끝전망대, 땅끝탑, 땅끝마을)(1박)
  제4편: 보길도(땅끝-보길도-완도)
  제5편; 섬진강(쌍계사, 불일폭포, 매화마을, 화개장터)(1박)

  만세불훼(萬歲不毁)의 땅
두륜산(頭輪山, 703m)
  호남정맥이 화순 청풍면과 장흥 장평면의 지경 국사봉(499m) 조금 지난 지점에서 정맥은 남진하고, 땅끝기맥(土末岐脈)을 서북쪽으로 분기한다.

  땅끝기맥은 잠시 서진하다가 궁성산(482m)에서 남쪽으로 기수를 돌려 서남진 해서 영안-강진 지경에 노천바위진열장 월출산(809m)을 솟구친다.

  땅끝기맥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 영암과 강진 지경, 이어서 해남과 강진 지경을 따라 남진하여 내려오다가 지경을 버리고 해남 옥천면 땅으로 접어들어 해남읍 남쪽 삼산면, 북일면, 북평면 지경에 만세(萬歲) 불훼(不毁)의 아름다운 산을 솟구치니 두륜산이다.

  땅끝기맥은 계속해서 땅끝(土末)까지 일직선으로 서남진하면서 또하니의 명산 달마산을 꾸민다.

고계봉에서 바라 본
두륜산 제1봉 가련봉(703m,왼쪽)과 노승봉(능허대,685m, 오른쪽)

  두륜산의 원래 이름은 우리말로 ‘크다’는 뜻의 ‘한’에 ‘둥글다’, ‘덩어리’란 뜻의 ‘듬’ 또는 ‘둠’을 붙여서 ‘한듬’ 또는 ‘한둠’이라 불렀다 한다. 이것이 한자 '大'자를 써서 ‘대둠’이라 하다가 ‘대둔(大芚)’으로 변질되어 아직도 일부 사람들은 대둔산이라 부른다고 한다.

  그러다가 백두대간을 비롯한 우리 땅 산경개념이 생겨나면서 중국의 곤륜산(崑崙山)이 벋어와 백두산이되고, 백두산에서 흘러와 그 ‘백두산(頭) 줄기의 끝부분에 우렁차게 일어난(輪) 산’이란 뜻으로 ‘두륜산(頭崙山)’ 또는 ‘두륜산(頭輪山)’으로 표기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崙은 ‘곤륜산 륜’자이고, 輪은 바퀴, 땅 길이, 우렁차다, 서리다, 돌다, 둘래 등의 뜻) 여기서 물론 두(頭)자는 백두산을 의미한다.
  이러한 산 이름 작명이나 해석은 지리산‘백두산에서 흘러왔다’는 뜻으로 일명 두류산(頭流山), ‘백두산에서 흘러와 머문 산’이란 뜻의 두류산(頭留山)이라고도 부르는 것 과 같은 맥락이다.

  혹자(한국문화답사회)는 일제 때 지명을 새로 표기하면서 ‘頭崙山’‘頭輪山’으로 바뀌었다’는 주장도 있으나 조선일보사 발간‘月刊山’에서는 「1861년 고산자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여지도에도 이미 '頭輪山' 이라 표기된 것이 보이기 때문에 이는 잘못된 말」이라 하였다.

  두륜산에는 8개의 큰 봉우리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눈길을 끄는 것에 제1봉인 가련봉(703m)과 능허대(685m), 그리고 두륜봉(630m)이다. 가련봉과 능허대는 가까이 붙어 있어서 멀리서 보면 두 개의 크고 길다란 암봉이 남북으로 서서 두륜산 전체를 통제하고 있는 듯한 형국이다. 그래서 이 두 암괴가 곧 두륜산의 상징이다.

▶ 대둔사(大芚寺) 또는 대흥사(大興寺)

대흥사 대웅전

  두륜산의 고계봉, 가련봉, 노승봉, 두륜봉, 도솔봉, 연화봉 등 둘러 선 봉우리로부터 벋어 내린 산줄기들이 부채살 모양으로 한 곳에 모이는데 그 곳에 세워진 사찰이 대둔사(大芚寺)이다. 대둔사는 신라 눌지왕10년(서기426년)에 정관대사(靜觀大師)가 창건하였다 하며 도중에 대흥사(大興寺)라 불리다가 1992년에 '대둔사' 이름을 다시 찾았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서산대사가 승병을 지휘한 항왜 작전기지로 유명하며, 서산대사의 유물이 보관되었다고 한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서산대사가 조선 선조 37년(1604년)묘향산 원적암에서 입적하기 직전 이 대둔사에 자신의 의발(衣鉢: 가사와 바리때)을 전하라면서 “(대둔사는) 바다와 산이 둘러싸 지키고 골짜기는 깊고 그윽하니 만세토록 불훼(不毁: 훼손되지 않을)의 땅이다”고 그 이유를 밝혔다고 한다.

  서산대사의 이 예언이 적중하여 대둔사와 두륜산의 신림은 임진왜란과 6.25한국전쟁 때 전화를 입지 않았다고 월간 산은 쓰고 있는데 임진왜란은 선조25년(1592)-선조 31년(1598)이니 말이 좀 안 맞는 것 같다.

  서산대사가 의발을 전한 이래 대둔사는 서산대사를 비롯하여 그의 제자 초의(草衣), 호암(虎巖), 상월(霜月)등 13인의 대종사(大宗師)와 만화(萬化), 원오(圓梧), 연해(燕海), 광열(廣悅) 등 13인의 대강사(大講師)로 대표되는 숱한 선사들을 배출하였는데 그 증거로 국내 사찰 가운데 국내 최대 규모인 부도전에는 서산대사와 초의선사의 부도를 비롯한 56기의 부도와 17기의 탑비가 보존되고 있다.

13 대 종사(宗師) 도장(道場) 표석

13 대 강사(講師) 도장(道場) 표석

56기 부도(浮屠)와 17기 탑비(塔碑)

임란 극복 유공자 서산대사를 모신 표충사
중앙에 서산대사가 주향되어 있고,
제자이며 함께 임란 극복에 나섰던 유정(惟政, 사명대사)과
처영(處英)이 좌우에 배향되어있다.
조선 현종10년(1669)에 처음 건립되었으며,
이 건물은 정조12년(1788) 사액 사당으로
현판 글씨를 정조 임금이 직접 썼다고 한다.
안에는 서산대사의 유품 금란가사, 발우(밥그릇),
정조 임금이 하사한 금병품 등 유품이 전시되어있다.

  서산대사: 조선 중종15년(1520)-선조37년(1604) 때의 고승, 법명은 휴정(休靜), 속성은 최(崔), 자 현응(玄應), 호 청허(淸虛), 서산(西山), 평안도 안주 태생. 9-10세 때 고아가 되어 안주목사를 따라 서울로 와서 한학을 공부하였으나 맞지 않아 동료 몇 사람과 지리산에 들어가 불경 공부를 하여 선가의 법을 깨닫고 숭인 징로에서 중이 되고, 30세에 선과(禪科)에 급제하고, 대선에서 양종판사(兩宗判事)까지 올랐으나 승직을 버리고 금강산에 들어가 삼목사(三夢詞)라는 글을 지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의주에서 선조임금을 뵙고, 의승(義僧) 5천을 모집하여 관군을 도왔고, 서울 수복후 늙음을 이유로 군사를 유정(사명)와 처영(제자)에게 맡기고, 풍악, 두류, 묘향 등의 산으로 왕래하니 제자가 천여명에 이르고 출세한 제자도 70여명. 나라에서 국일도대선사선교도총섭부종수교보제등계등사(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라는 호를 하사 받았다.

  금강산 향로봉에 올라가 지었다는 시 때문에 선조22년(1589) 정여창의 옥사 때 요승 무업(無業)이 무고 하여 체포되었으나 선조가 억을 함을 알고 석방하면서 오히려 그의 시를 칭찬하고 상을 내렸다 한다.

금강산 향로봉에 올라 가 지었다는 서산대사의 시 한수
萬國都城如蛭蟻(만국도성여질의) 만국의 도성들은 개미집 같고
千家豪傑等류鷄(천가호걸등류계) 고금의 호걸들이란 바구미 벌레들이라
一窓明月淸虛枕(일창명월청허침) 창에 비친 밝은 달빛 아래 청허하게 누우니
無郞松風韻不齊(무랑송풍운부제) 끝없는 솔과 바람의 운치가 별미로다


  대둔사는. 국가 보물급 문화재가 4점을 보존하고 있다. 마애여래좌상(보물48호), 탑산사 동종(보물88호), 북미륵암삼층석탑(보물301호), 응진전삼층석탑(보물320호) 등이 그것이다.

  북미륵암에 있는 마애여래좌상은 고려시대에 높이 4.2m, 무릎 폭 2.7m 화강석을 깎아 새긴 석가여래좌상으로 불두에는 육계(肉?: 부처의 32상의 하나, 정수리에 솟은 상투모양의 살덩이)가 잇고, 목에는 삼도(三道: 수행과정의 세 단계 즉 見道, 修道, 無學道 또는 생사 윤회의 인과 세 가지 모양 즉 惑道, 業道, 苦道)를 표현했고, 두광(頭光)과 신광(身光) 주위에는 화염문을 배치하고 그 안에 네 비천상(飛天像)을 부각시켰다.

  북미륵암삼층석탑은 고려초에 2단의 기단 위에 건립한 높이 4m의 탑으로 제1탑신은 4매의 판석이고, 나머지는 모두 1석으로 되어있다. 응진전삼층석탑은 신라 선덕여왕 때 세운 것이라 한다..

  대둔사 본절을 지나 좀 더 들어가면 일지암은 ‘한국 다도(茶道)의 발상지’로 불려지는 곳이다. 다성(茶聖)으로 불리는 초의(草衣)선사가 1866년 입적할 때까지 40년 동안 머물면서 홀로 노구를 이끌고 어렵사리 불을 지피고 찻물을 올리며 다선여일(茶禪如一: 차와 선은 곧 하나다)을 깨쳤고,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선생 등과도 깊은 교분을 가졌다고 한다.

  일지암 뒤에는 초의선사 때부터 차 끓이는 물로 써 왔다는 돌확(돌을 절구통 모양으로 오목하게 만든 것)이 있는 샘 유천(乳泉)이 있다.

다선여일(茶禪如一)을 깨친 초의선사(草衣禪師)

  초의선사(草衣禪師): 조선 영조42년(1766)-고종3년(1866), 정조 때는 우리의 독자적인 민족문화를 이루려는 시기로
  (1) 선사는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등 진보적 지식인들과 함께 새로운 정신문화를 형성하는데 공헌. 1400년의 한국 불교와 실학사상의 만남을 주선하여 실학사상이 꽃을 피울 수 있게 하였다.

  (2) 선사는 차인(茶人)으로 조선의 유교문화와 중국차에 밀려 지취를 찾아보기 힘들었던 한국차를 오늘까지 이어지게 한 다도(茶道)의 중흥조(中興祖). 대둔사와 부속 일지암에 머물면서 한국차의 고전으로 일컬어지는 ‘동다송’을 편찬하여 우리 차문화의 역사와 우수성을 복원. 또 차를 손수 만들어 당대의 사상가들에게 한국차의 정신과 맛을 알게 함으로서 선(선)과 차(차)의 세계가 하나로 통하는 이른바 ‘다선일미(茶禪一味)’의 정신과 맛을 오늘까지 전하게 하였다.

  (3) 선사는 글과 글씨에 탁월한 경지에 들어 범서(梵書), 선필(禪筆)을 남겼다. 그림에도 조예가 깊어 그에게서 배운 소치(小痴) 허유(許維, 진도에 살았다)가 남도 남종화(南宗畵)의 맥을 잇게 하였다.

  일지암에서 20분 정도 오르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왼쪽이 북미륵암, 오른쪽이 두륜봉으로 가는 길이다.북미륵암으로 가는 길에는 ‘금강너덜’이라 불리는 너덜길이 있다. 북미륵암에는‘나라의 변고가 있을 때 땀을 흘린다’는 좌불상이 있다. 또 이 곳은 바닷게의 형상을 한 지형으로 게의 발에 해당하는 양쪽 능선을 눌러 지기(地氣)를 다스리도록 절을 지었다고 한다.

  게의 오른발에 해당하는 북쪽 능선을 넘어 학사대(學射臺)에 올라서면 고계봉과 오심재 일대의 광대한 풍광과 아래 대둔사 풍광이 펼쳐지는 전망대다. 학사대 동쪽 안부진 오심재는 아침 해가 뜨는 곳이라 하여 일문(日門)이라 하고, 대둔사 건너편 오도재는 달이 뜨는 곳이라 하여 월문(月門)이라 부른다고 한다.

일문(日門: 해뜨는 문) 오심재와 월문(月門: 달 드는 문) 오도재

  북미륵암에서 게의 왼발에 해당하는 왼쪽 능선을 넘으면 평평한 암반이 펼쳐져 있는데 극락대(極樂臺)라 한다. 극락대에 서면 산 위로 능허대-가련봉-두륜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하나의 장벽이 되어 벌떡 일어선다. 두륜산에서 제1의 감탄사가 튀어 나오는 곳은 바로 극락대라고 月刊山은 극찬하고 있다. 학사대쪽의 풍광이 다분히 여성적이라면 이 곳 극락대의 풍광은 단연 남성적이란다.

  북미륵암에서 10여분 걸리는 오심재는 널찍한 억새밭이다. 오심재 네거리에서 오른쪽으로 30여분 땀 좀 흘리며 산죽길을 오르면 능허대 암릉 위에 선다. 능허대 정상은 널찍한 암봉인데 뛰어난 조망처이다. 가까이 붙어있는 두륜산 최고봉인 가련봉이다.

▶고산 윤선도 유적 녹우당(綠雨堂) 구경

  윤선도(尹善道): 선조20년(1587)-현종12년(1671), 조선 중기 시조작가, 자 약이(約而), 호 고산(孤山), 시호 충헌(忠憲), 본관 해남(海南), 어려서 총명하고 경사백가(經史百家)에 무불통지(無不通知), 의약, 복서(卜書), 음양지리(陰陽地理)에 정통하고, 시조(時調)에 뛰어났다.

  광해군 때 성균관 유생으로 있으면서 이이첨, 박승종, 유희분 등의 죄를 낱낱이 밝혀 조정을 놀라게 하였고, 함경도 경원에 8년간 귀양갔다가 인조반정 후에 풀려났다.

  봉림대군, 인평대군의 사부가 되고,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서인과의 알륵으로 벼슬을 버리고 해남으로 귀향하였다가 병자호란이 일으나자 전라, 경상의 주사를 이끌고 강화도에 갔으나 이미 함락 된 후라 되돌아갔다.

  그 후 남한산성에 왕을 문안하지 않았다는 죄로 경상도 영덕으로 귀양 갔다가 효종 즉위후 승지, 예조참의를 내렸으나 서인에게 몰려나 귀향하였다. 효종이 죽자 조대비 복제문제로 서인과 논쟁하다가 누명을 쓰고 삼수(三水)로 9년간 귀양.현종6년에 용서되어 귀향했다. 죽은 후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시호 충헌이 내려졌다.

  윤선도 시조 오우가(五友歌: 水石松竹月)의 서(序)
    내 벗이 몇이냐 하니 수석과 송죽이라
    동산에 달 오르니 긔 더욱 반갑고야
    두어라 이 다섯 밖에 또 더하여 무엇하리


  병자호란 후 고산은 주로 완도, 보길도, 해남의 수정동과 금세동 등에서 은거하면서 완림(莞林)을 경영하고, 산중신곡(山中新曲),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 등 불휴의 명작을 냈다.
녹우당, 두륜산, 대둔사 앨범

서해안고속도로 하행 홍성 휴게소

녹우당 안내도
녹우당은 해남윤씨 종가 고택이며, 고산의 선조 어초은(魚樵隱) 사당, 고산의 사당, 추원당(追遠堂) 등이 있다.

신갈나무 고목 보호수

녹우당 바깥마당

녹우당 현판

녹우당 동백꽃

소나무 거목 보호수

죽림

비자나무 거목 한 그루
뒤 산 중턱에 고산의 선조가 조성했다는 500년 된 3천여 그루의 비자나무 숲이 천연기념물 제 241호

어초은(고산의 고조부) 사당

고산 유물관
윤공재(尹恭齋) 자화상(국보240호), 해남윤씨가전고화첩(보물481호), 윤고산수적관계문(보물48호), 지정14년(고려공민왕3년, 1354)노비문서 등 3천 여 점이 소장

▶두륜산(頭輪山) 구경

두륜산 등산지도
일반적으로 두륜산을 오르는 코스는 대흥사-일지암-북미륵암(극락대, 학사대)-오심재-능허대-가련봉-만일재-두륜봉(구름다리)-진불암-대흥사 코스이지만 이번 ‘꽃소식따라 땅끝까지’는 시간 절약 때문에 두륜산은 케이불카로 고계봉에 올라 두륜산의 진면목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것으로 간소화 했다. 언젠가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직접 밟아 볼 생각이다.

두륜산 케이불카

고계봉(638m) 정상 표석

고계봉 전망대
맨 위층에는 동전 넣으면 노래 반주가 나오는 노래방 장치도 하고, 무대가 360도 돌아가는 최신식 시설을 해 놓았지만 외모는 이렇게 자연을 훼손하고 또 자연과 어울리지 않은 인공지물을 만들어 놓았다.

고계봉 정상 동남부에서 가련봉(왼쪽)과 능허대(오른쪽)를 배경으로

▶대둔사(大興寺) 구경

두륜산대흥사 일주문

대둔사 동백이 반긴다
왕벚나무 자생지 안내표지판
왕벚은 일본의 국화로 지정되어있어,
일제 압정의 표상으로 우리에게 거부감이 있지만 사실은 일본에는 자생지가 없고,
우리나라에는 제주도 한라산에 2곳, 이곳 두륜산에 1곳 자생지가 있는 우리나무다.
옛날(임진왜란 때) 일본 사람들이 가져가 이 나무에 반하여 그들 국화로 정하고,
왜정 때 역으로 우리나라로 대량 들여 온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벚나무에 대한 자세한 것(클릭): 벚나무

두륜산대흥사 금강문
금강문에 모셔진 금강역사의 상은 부드러움이 그 특징이다.
사천왕상과는 대조적이다. 대둔사에는 사천왕문은 없다.

대웅전

대웅전 뜰에서 올려다 보는 능허대(왼쪽)과 가련봉(오른쪽)

대둔사에서 올려 다 본 도솔봉-연화봉-혈망봉 능선

대웅전 앞 샘물

활짝 핀 천리향

초의선사상 설명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