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북정맥(錦北正脈) 끝 자락의 큰 산
가야산(伽倻山, 678m)
沙月 李 盛 永
  백두대간 속리산 천황봉에서 경기도 안성까지 흘러 온 한남금북정맥이 칠현산에서 한남정맥(漢南正脈)과 금북정맥(錦北正脈)이 갈라진다. 한남정맥과 결별한 금북정맥은 서남으로 흘러와 청양, 보령, 홍성 지경에 제1봉 오서산(烏棲山, 791m)을 솟구치고, 북서로 치다르면서 종착점 태안반도 끝 안흥진(安興鎭)에 이르기 전 정맥의 끝 자락에 ‘내포(內浦)들판의 우뚝한 전망대’로 솟구친 산이 가야산이다.
가야산 동쪽 남연군묘 부근에서 바라본 주봉 가사봉(678m)
앞 제방은 덕산수원지 상가저수지이고, 정상은 각종 통신시설 때문에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금북정맥 마루금 위의 산으로는 오서산(791m) 다음 제2봉이고, 기맥의 산들을 함께 고려하면, 오서산(791m), 광덕산(699m) 다음 제3봉이다. 가야산은 예로부터 호서지방(湖西地方) 제일의 명산이요 명승지로 인정 받아 왔다.

  가야산의 최고봉은 ‘가사봉(袈裟峯)’이 스님이 입는 옷을 말하는 것처럼 불교와 깊은 인연을 가진 산이다. 경남 합천에 해인사를 안고 있는 가야산과 한글, 한자 표기가 같은 것도 양자 모두 불교와의 인연 때문인 것 같다.

  백제 때는 중국 강남지방에서 바다를 건너 온 불교가 제일 먼저 정착한 곳이다. 서기 475년 백제가 한강변의 수도를 고구려에게 빼앗기고 공주로 천도한 이후 중국과 교류하는 통로가 태안반도로 바뀌게 되었다. 이 때 태안-서산-덕산-공주-부여로 통하는 길을 ‘백제고로(百濟古路)’ 라 하는데 가야산은 백제고로의 첫 기착지다.
  가야산 북쪽 끝 자락,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에 있는 보원사지는 중국에서 서해를 건너 오면서 항해에 지친 승려들의 휴식처나 기도처로서 그 역할을 하였으며, 절은 없어졌지만 유적 석조(石槽), 당간지주, 5층석탑, 법인국사보승탑, 법인국사보승탑비 등 5개가 보물로 지정되었다.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에 있는 ‘서산마애삼존불(瑞山磨崖三尊佛, 국보제84호)’은 서기 600년 경 백제 말기(법왕-무왕)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는데 여래입상(如來立像)을 가운데로 하고, 왼쪽에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의 보살좌상(菩薩座像), 오른쪽에 보살입상(菩薩立像)이 새겨져 있다. 우리나라 마애불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햇빛이 비치는 방향에 따라 웃는 모습이 다르게 보인다.
서산마애불

  통일신라 때는 나라의 서쪽을 지키는 요새 서진(西鎭)으로 매년 이 산에 특사를 보내어 제사를 올리게 하였다 한다. 불교가 한창 융성할 때 가야산 동쪽 기슭 지금의 남연군묘가 있는 자리에 99개의 암자를 거느린 가야사(伽倻寺)가 있었다.

  서산마애삼존불 남쪽 보원사지 주변에 있었다는 백암사지는 가야사 예하의 100번째 절인데 ‘이 골 안에 100개 절을 채우지 말라’는 계시를 어기고 절을 지었기 때문에 모두 망했다는 전설이 전해오는 곳이다.

  가야산 가사봉 동남쪽 연봉의 하나인 원효봉 중턱에는 원효대라는 전망대가 있고 절터가 있는데 신라 원효대사가 이 절을 짓고 살았다고 한다. 원효대사가 쓴 원효결(元曉訣)에는 ‘오성지간(烏聖之間: 오서산과 성주산 일대)는 산 모습과 물줄기가 가장 뛰어나 나라의 내장부(內腸部)와 같다 하여 내포(內浦)라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원효대사가 ‘내포(內浦)’라고 한 곳을 살펴보면 금북정맥 서북쪽 아산만과 천수만 사이로 아산, 당진, 예산, 서산, 홍성, 보령과 청양의 일부지역을 말하는 것이다. 내포들을 굽어보는 세 개의 산이 가운데 오서산, 남쪽에 성주산 그리고 북쪽에 가야산이다. 지금도 가야산을 중심으로 하는 문화 영역을 ‘내포문화권(內浦文化圈)’이라 부르고 있다.

  이렇게 가야산은 불교와 깊은 인연을 갖고 있지만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가 융성하던 조선조에도 춘추로 나라에서 제를 올린 산이기도 하다.

  가야산을 이야기 하면서 남연군묘(南延君墓)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남연군 묘
후면 봉우리는 가야산 옥양봉(621m)
  남연군은 흥선군(興선君) 이하응(李夏應)의 아버지 이구(李球)이다. 원래 남연군의 묘는 경기도 연천 땅 남송정에 있었는데 흥선군은 남연군의 묘가 풍수지리상 좋지 않는 자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헌종 10년, 남연군이 죽은지 9년 째, 흥선군 나이 25세 되는 해에 흥선군은 지사(地師: 풍수) 정만인에게 간청해서 ‘이 곳이 2대가 왕 위에 오를 수 있는 명당’이라는 것을 듣고 현장에 와 보니 1400년 고찰 가야사가 앉아 있었고, 정만인이 지적한 자리는 가야사 마당으로 5층석탑인 금탑(金塔) 자리였다. 금탑도 금탑이려니와 이를 지키듯이 내려다 보고 있는 가야사 보웅전(普雄殿) 때문에도 묘를 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 일대 땅 주인이자 고을 최고 부자인 윤석문(尹石門) 집안 종손에게 간청해서 금탑 서북쪽 400m 떨어진 구광(舊壙)이라는 곳에 부친 남연군의 묘를 쓰도록 허락 받았다. 당시 흥선군은 정2품의 종친 귀공자에다가 궁중 살림을 총관장하는 도제조(都提調)였으니 윤씨 집안에서는 거부할 수가 없었다.

  구광터로 남연군 묘소를 이장한 흥선군은 이듬해 충청도 관찰사에게 압력을 넣어 덕산현감으로 하여금 가야사에 승려들이 살지 못하도록 하여 폐사를 만들어버린다. 그 다음해에는 보웅전에 불을 질러버리고, 또 한 해가 지나 금탑마저 허물어 버리고, 구광터에 있는 남연군 묘를 금탑 자리로 옮긴다.

  남연군 묘를 옮긴 지 7년 후 차남 이명복(李命福)을 낳았는데 그가 열 두 살 되는 해에 철종이 후사 없이 죽자 왕위에 오른 고종(高宗)이다.

  1866년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남연군묘를 도굴했는데 관에는 손을 못 댄 채 돌아갔다. 이 사건을 계기로 대원군은 쇄국정책을 쓰게 되고, 천주교를 탄압하게 되었다고 한다.
(월간산 2005년 04월호)
남은들 상여각(喪輿閣)
  (안내간판 내용 요지)
  ‘남은들상여’는 대원군이 부친 남연군의 묘를 연천 남송정에서 덕산 가야산으로 옮길 때 운구하면서 사용한 상여. 한 지방을 지날 때마다 그 지방 주민으로 상여를 메게 하여 리레이식으로 500리를 운구하고, 마지막 ‘남은’ 구간은 덕산 광천리 주민들로 하여금 메도록 하였는데 주민들이 극진히 모셨기 때문에 그 보답으로 운구한 상여를 광천리 마을에 주었으며, 이후 마을 이름을 ‘남은들’이라 부르고 이 상여를 ‘남은들상여’라 부르게 되었다.
  남은들상여는 장강(長 木工) 위에 구름차일을 친 용봉(龍鳳) 상여로 네 귀에는 용모양의 금박이 있고, 중앙 부위에는 나무로 만든 작은 동자상이 있으며, 휘장은 검정, 노랑, 흰색 천으로 되어 근엄하면서도 호화롭다 한다.
  진품은 광천리 보호각에 보관하고, 여기에는 관람객을 위하여 재현품이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 2006년 아산회 첫 가야산 특별산행 앨범
  일정: 2006년 1월 19-20일(1박2일) 중 19일 등산
  참여인원: 18명[김서환, 김실근, 김연종, 김행일, 김홍규, 김희산, 박명환, 박영배, 반준석, 서태경, 심완식, 이성영, 이종학, 임청수, 정영상(서태경 친구), 정태진, 조용수, 황익남]
  차량: 3대(황익남, 임청수, 정영상)
  코스 및 시간: 남연군묘-석문봉-암봉-남연군묘(3시간 30분)
가야산 등산지도
앞 제방은 덕산수원지 상가저수지
남연군묘 부근 의 등산기점
옥양봉과 석문봉 갈림길
석문봉을 오르는 빙판길 등산로
석문봉-옥양봉 능선에 올라
석문봉 정상
아슬아슬한 찍사 심완식의 사진 촬영폼
석문봉 정상에서 등선주
해미산악회의 백두대간종주 기념탑
석문봉에서 바라 본 가야산 주봉 가사봉(678m)
통신중계소 때문에 출입금지구역
하산 중 휴식
대천역 시장에서 장보기
대천콘도 자취
김행일 회원의 우럭매운탕과 자연산 생굴회(19일 석식), 돼지고기김치찌개와 된장국(20일 조식)이 끝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