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북정맥(錦北正脈) 끝 자락의 큰 산
가야산(伽倻山, 678m)
沙月 李 盛 永
  백두대간 속리산 천황봉에서 경기도 안성까지 흘러 온 한남금북정맥이 칠현산에서 한남정맥(漢南正脈)과 금북정맥(錦北正脈)이 갈라진다. 한남정맥과 결별한 금북정맥은 서남으로 흘러와 청양, 보령, 홍성 지경에 제1봉 오서산(烏棲山, 791m)을 솟구치고, 북서로 치다르면서 종착점 태안반도 끝 안흥진(安興鎭)에 이르기 전 정맥의 끝 자락에 ‘내포(內浦)들판의 우뚝한 전망대’로 솟구친 산이 가야산이다.
가야산 동쪽 남연군묘 부근에서 바라본 주봉 가사봉(678m)
앞 제방은 덕산수원지 상가저수지이고, 정상은 각종 통신시설 때문에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금북정맥 마루금 위의 산으로는 오서산(791m) 다음 제2봉이고, 기맥의 산들을 함께 고려하면, 오서산(791m), 광덕산(699m) 다음 제3봉이다. 가야산은 예로부터 호서지방(湖西地方) 제일의 명산이요 명승지로 인정 받아 왔다.

  가야산의 최고봉은 ‘가사봉(袈裟峯)’이 스님이 입는 옷을 말하는 것처럼 불교와 깊은 인연을 가진 산이다. 경남 합천에 해인사를 안고 있는 가야산과 한글, 한자 표기가 같은 것도 양자 모두 불교와의 인연 때문인 것 같다.

  백제 때는 중국 강남지방에서 바다를 건너 온 불교가 제일 먼저 정착한 곳이다. 서기 475년 백제가 한강변의 수도를 고구려에게 빼앗기고 공주로 천도한 이후 중국과 교류하는 통로가 태안반도로 바뀌게 되었다. 이 때 태안-서산-덕산-공주-부여로 통하는 길을 ‘백제고로(百濟古路)’ 라 하는데 가야산은 백제고로의 첫 기착지다.
  가야산 북쪽 끝 자락,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에 있는 보원사지는 중국에서 서해를 건너 오면서 항해에 지친 승려들의 휴식처나 기도처로서 그 역할을 하였으며, 절은 없어졌지만 유적 석조(石槽), 당간지주, 5층석탑, 법인국사보승탑, 법인국사보승탑비 등 5개가 보물로 지정되었다.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에 있는 ‘서산마애삼존불(瑞山磨崖三尊佛, 국보제84호)’은 서기 600년 경 백제 말기(법왕-무왕)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는데 여래입상(如來立像)을 가운데로 하고, 왼쪽에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의 보살좌상(菩薩座像), 오른쪽에 보살입상(菩薩立像)이 새겨져 있다. 우리나라 마애불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햇빛이 비치는 방향에 따라 웃는 모습이 다르게 보인다.
서산마애불

  통일신라 때는 나라의 서쪽을 지키는 요새 서진(西鎭)으로 매년 이 산에 특사를 보내어 제사를 올리게 하였다 한다. 불교가 한창 융성할 때 가야산 동쪽 기슭 지금의 남연군묘가 있는 자리에 99개의 암자를 거느린 가야사(伽倻寺)가 있었다.

  서산마애삼존불 남쪽 보원사지 주변에 있었다는 백암사지는 가야사 예하의 100번째 절인데 ‘이 골 안에 100개 절을 채우지 말라’는 계시를 어기고 절을 지었기 때문에 모두 망했다는 전설이 전해오는 곳이다.

  가야산 가사봉 동남쪽 연봉의 하나인 원효봉 중턱에는 원효대라는 전망대가 있고 절터가 있는데 신라 원효대사가 이 절을 짓고 살았다고 한다. 원효대사가 쓴 원효결(元曉訣)에는 ‘오성지간(烏聖之間: 오서산과 성주산 일대)는 산 모습과 물줄기가 가장 뛰어나 나라의 내장부(內腸部)와 같다 하여 내포(內浦)라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원효대사가 ‘내포(內浦)’라고 한 곳을 살펴보면 금북정맥 서북쪽 아산만과 천수만 사이로 아산, 당진, 예산, 서산, 홍성, 보령과 청양의 일부지역을 말하는 것이다. 내포들을 굽어보는 세 개의 산이 가운데 오서산, 남쪽에 성주산 그리고 북쪽에 가야산이다. 지금도 가야산을 중심으로 하는 문화 영역을 ‘내포문화권(內浦文化圈)’이라 부르고 있다.

  이렇게 가야산은 불교와 깊은 인연을 갖고 있지만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가 융성하던 조선조에도 춘추로 나라에서 제를 올린 산이기도 하다.

  가야산을 이야기 하면서 남연군묘(南延君墓)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남연군 묘
후면 봉우리는 가야산 옥양봉(621m)
  남연군은 흥선군(興선君) 이하응(李夏應)의 아버지 이구(李球)이다. 원래 남연군의 묘는 경기도 연천 땅 남송정에 있었는데 흥선군은 남연군의 묘가 풍수지리상 좋지 않는 자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헌종 10년, 남연군이 죽은지 9년 째, 흥선군 나이 25세 되는 해에 흥선군은 지사(地師: 풍수) 정만인에게 간청해서 ‘이 곳이 2대가 왕 위에 오를 수 있는 명당’이라는 것을 듣고 현장에 와 보니 1400년 고찰 가야사가 앉아 있었고, 정만인이 지적한 자리는 가야사 마당으로 5층석탑인 금탑(金塔) 자리였다. 금탑도 금탑이려니와 이를 지키듯이 내려다 보고 있는 가야사 보웅전(普雄殿) 때문에도 묘를 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 일대 땅 주인이자 고을 최고 부자인 윤석문(尹石門) 집안 종손에게 간청해서 금탑 서북쪽 400m 떨어진 구광(舊壙)이라는 곳에 부친 남연군의 묘를 쓰도록 허락 받았다. 당시 흥선군은 정2품의 종친 귀공자에다가 궁중 살림을 총관장하는 도제조(都提調)였으니 윤씨 집안에서는 거부할 수가 없었다.

  구광터로 남연군 묘소를 이장한 흥선군은 이듬해 충청도 관찰사에게 압력을 넣어 덕산현감으로 하여금 가야사에 승려들이 살지 못하도록 하여 폐사를 만들어버린다. 그 다음해에는 보웅전에 불을 질러버리고, 또 한 해가 지나 금탑마저 허물어 버리고, 구광터에 있는 남연군 묘를 금탑 자리로 옮긴다.

  남연군 묘를 옮긴 지 7년 후 차남 이명복(李命福)을 낳았는데 그가 열 두 살 되는 해에 철종이 후사 없이 죽자 왕위에 오른 고종(高宗)이다.

  1866년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남연군묘를 도굴했는데 관에는 손을 못 댄 채 돌아갔다. 이 사건을 계기로 대원군은 쇄국정책을 쓰게 되고, 천주교를 탄압하게 되었다고 한다.
(월간산 2005년 04월호)
남은들 상여각(喪輿閣)
  (안내간판 내용 요지)
  ‘남은들상여’는 대원군이 부친 남연군의 묘를 연천 남송정에서 덕산 가야산으로 옮길 때 운구하면서 사용한 상여. 한 지방을 지날 때마다 그 지방 주민으로 상여를 메게 하여 리레이식으로 500리를 운구하고, 마지막 ‘남은’ 구간은 덕산 광천리 주민들로 하여금 메도록 하였는데 주민들이 극진히 모셨기 때문에 그 보답으로 운구한 상여를 광천리 마을에 주었으며, 이후 마을 이름을 ‘남은들’이라 부르고 이 상여를 ‘남은들상여’라 부르게 되었다.
  남은들상여는 장강(長 木工) 위에 구름차일을 친 용봉(龍鳳) 상여로 네 귀에는 용모양의 금박이 있고, 중앙 부위에는 나무로 만든 작은 동자상이 있으며, 휘장은 검정, 노랑, 흰색 천으로 되어 근엄하면서도 호화롭다 한다.
  진품은 광천리 보호각에 보관하고, 여기에는 관람객을 위하여 재현품이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 2006년 아산회 첫 가야산 특별산행 앨범
  일정: 2006년 1월 19-20일(1박2일) 중 19일 등산
  참여인원: 18명[김서환, 김실근, 김연종, 김행일, 김홍규, 김희산, 박명환, 박영배, 반준석, 서태경, 심완식, 이성영, 이종학, 임청수, 정영상(서태경 친구), 정태진, 조용수, 황익남]
  차량: 3대(황익남, 임청수, 정영상)
  코스 및 시간: 남연군묘-석문봉-암봉-남연군묘(3시간 30분)
가야산 등산지도
앞 제방은 덕산수원지 상가저수지
남연군묘 부근 의 등산기점
옥양봉과 석문봉 갈림길
석문봉을 오르는 빙판길 등산로
석문봉-옥양봉 능선에 올라
석문봉 정상
아슬아슬한 찍사 심완식의 사진 촬영폼
석문봉 정상에서 등선주
해미산악회의 백두대간종주 기념탑
석문봉에서 바라 본 가야산 주봉 가사봉(678m)
통신중계소 때문에 출입금지구역
하산 중 휴식
대천역 시장에서 장보기
대천콘도 자취
김행일 회원의 우럭매운탕과 자연산 생굴회(19일 석식), 돼지고기김치찌개와 된장국(20일 조식)이 끝내주었다.
조선일보 2020. 9. 2일자 오피니언/인문기행[박종인의 땅의 歷史]
"저 험한 내포 가야산에는 예부터 사연이 많았느니라"
沙月 李盛永(2020.9.12 옮김)
충남 예산 가야산(伽倻山, 678m) 주변에 있는 열 고을을 내포(內浦)라고 한다.
홍주, 결성, 해미, 서산, 태안, 덕산, 예산, 신창, 면천, 당진 같은 마을이 그 내포다. 큰 바다가 내포를 만나면 뭍으로 파고들어 ‘육지 속 바다’가 된다. 그래서 ‘내포(內浦)’다.
바다와 땅이 섞여 있기에 천주교 같은 바깥 문물도 일찍 들어왔고, 비산비야(非山非野) 충청 땅답지 않게 산도 험준해 산이 품은 사연도 많다.
1623년 인조반정 때 광해군 아들 이지(李)가 도망가려 했던 땅. (: 衣변 至, 통상 '질'로 발음하나 전주이시 족보에는 '지'로 표기되었다 함)
구한말 흥선대원군이 자기 부친 묘를 옮겨 기어이 아들과 손자를 천자(天子)로 만든 땅.
심지어 최근 소유자가 국립중앙박물관에 무상으로 기증한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 秋史 金正喜 그림)’와 너무나도 깊은 인연을 가진 땅이다.
인조반정에서 대원군과 세한도까지, 그 사연 이야기다.
흥선대원군 아버지 남연군(南延君: 李山, 중앙)의 묘와 배경 가야산
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에 있는 남연군묘.
가야산 자락이 날개처럼 무덤자리(가운데)를 에워싸고 있다.
흥선대원군이 자기 선친 남연군을 연천에서 이장한 자리다. 목적은 '천자 2명을 낳을 명당을 찾아서'
아들 고종과 손자 순종이 왕과 황제가 되면서 목적은 이뤘다.
대원군은 어떻게 이 '촌구석'에 명당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까.
강화도 유배지를 땅굴을 파고 탈출하던 광해군의 아들에서
동학농민혁명까지 가야산에서 벌어진 역사에 그 비밀이 숨어 있다.
○ 광해군 세자 이지의 탈출극
1623년 3월 13일 능양군 이종이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다. 광해군이 죽인 이복동생 영창대군의 어머니 인목대비는 경운궁에 유폐 중이었는데, 그녀는 모시러 온 반정 세력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 친히 그들 목을 잘라 망령에게 제사하고 싶다.”(1623년 3월 13일 ‘인조실록’)
반정 세력이 겨우 뜯어말려 참극은 벌어지지 않았다. 광해군과 왕비는 강화도로, 그 아들인 세자 이지(李?) 부부는 부속 섬 교동으로 유배당했다.(*광해군 부부의 유배지도 교동에 있음)
두 달 뒤인 5월 22일 밤 이지가 땅굴을 파고 도망가다가 체포됐다. 땅굴 길이는 70척(약 23m)이나 됐다. 이를 위해 세자는 보름 넘도록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몸을 줄였고, 세자가 굴을 파면 세자빈 박씨가 그 흙을 받아 방에 쌓았다.
체포된 세자는 6월 25일 자진(自盡) 왕명을 받고 목을 매 죽었다. 세자빈은 남편 체포 사흘 만에 역시 목매 죽었다.(1623년 5월 22일 등 ‘인조실록’)

그런데 함께 체포된 하인 막덕(莫德)은 이렇게 증언했다. “(세자가) 바로 도망쳐 나와 마니산으로 가려다가 가야산(伽倻山)으로 방향을 돌렸습니다.” 그러니까, 최종 목적지가 예산에 있는 가야산이라는 것이다. 왜 가야산인가. 이유가 있었다.
○ 충청도 양반 조극선의 일기
“어제 모두 가야사에 모였다. 가야사는 지금 동궁의 원당이다. 궁중 노비라는 자가 막 와서는 양반 욕질을 해댔다. 그래서 돌아왔다"(昨日會伽寺 今爲東宮願堂 所謂宮奴者方來 辱極兩班 故還也·작일회가사 금위동궁원당 소위궁노자방래 욕극양반 고환야).(조극선 ‘인재일록’ 4책 1620년 10월 1일)

양반들이 승려들을 천민 취급하던 그때, 조극선이라는 예산 양반이 가야산 가야사에 놀러 갔다가 혼쭐이 나서 돌아왔다는 일기다. 여기에 ‘지금 동궁의 원당’이라는 말이 나온다.
가야사가 훗날 왕이 될 세자(李?)의 원찰(願刹: 창건주가 자신의 소원을 빌거나 죽은 후 명복을 빌기 위하여 건립하는 절)이라는 뜻이다.
왕실 원찰이 되면 그 지역에서 막강한 권력자가 된다. 절은 세금을 면제받고 부역 또한 면제받는다. 천대받던 절집 사람들과 지역 양반들 신세가 완전히 역전되는 것이다.
넉 달 뒤 조극선이 다시 가야사에 가보니 거기에는 하늘 높이 ‘東宮願堂(동궁원당)’이라는 금표(禁標)가 걸려 있었다.(조극선, 앞 책 1621년 2월 30일)
그때 동궁은 바로 광해군 세자 이지(李?)였다. 그러니까 2년 뒤 세자 자리에서 쫓겨난 그 원찰의 주인, 세자 이지가 ‘가야산’을 목적지로 정하고 탈출극을 벌인 것이다.
○ 인조반정과 몰락한 가야사
‘본궁(本宮)의 원당이랍시고 양반을 능멸하던’(조극선, 앞 책 1621년 11월 24일) 기세등등한 가야사였다. 그 절이 인조반정 7개월 뒤인 1623년 10월 17일 ‘절집은 텅 비고 승려들은 모두 숨어버리는’ 완전히 몰락한 절로 변해버렸다.
가야사를 들볶아서 종이를 공급받던 양반들은 임박한 과거시험에 쓸 종이를 마련하지 못해 달아난 승려를 잡으러 돌아다닐 정도로 대혼란에 빠졌다. (조극선, 앞 책 1623년 윤10월 6일)
종이 만드는 ‘지역(紙役)’을 피해 달아나기도 했지만, 쿠데타로 왕이 바뀌고 옛 왕 아들이 자살 ‘당한’ 이유가 더 컸을 것이다.

이후 가야사는 몰락했다. 1700년대 문인들이 쓴 가야산 답사기에는 ‘가야사’ 대신 ‘묘암사(妙巖寺)’라는 절이 나온다. “옛날에 묘암사는 가야사에 속했다.
가야사가 훼손된 이후 그 이름을 사칭 중이다. 불당 뒤 언덕에 층계가 77계단이 있고, 그 위에 석탑 하나가 우뚝 솟았다. 지세가 쥐 달아나는 형국이라 언덕에 을 세워 쥐를 눌렀다고 한다.”(이철환 ‘상산삼매·象山三昧’, 1753)
○ 흥선대원군의 야심과 석탑
100년 뒤 바로 그 가야산 절집에 흥선대원군이 선친인 남연군 상여를 들고 나타나 절을 부수고 선친 묘를 이장했다. 사연은 이러하다.

“가문 부흥을 염원하던 흥선군 이하응에게 정만인이라는 지관이 ‘가야산 가야사 석탑 자리에 묏자리를 쓰면 2대에 걸쳐 천자(天子)가 나온다’고 귀띔했다.
이에 대원군이 전 재산을 털어 가야사 주지를 2만 냥으로 매수한 뒤 가야사를 불 질러버리고 석탑을 도끼로 부순 다음 그 자리에 묘를 옮겼다. 형제들이 악몽을 꾸고서 석탑 부수기를 주저하자, 이하응이 직접 도끼로 내려쳐 탑을 없앴다. 그리하여 13년 뒤 아들 명복(고종)과 손자 척(순종)이 왕이 되었다, 운운.”
지금도 풍수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즐겨 찾는 예산 남연군묘 역사는 그러하였다. ‘하늘을 찌르던 외로운 탑’(孤塔撑天·고탑탱천: 송인(宋寅·1517~1584), ‘백 척 누대 위에 깨진 채 서 있다가’(百尺危臺破塔留·백척위대파탑류: 임방1640~1724 ‘수촌집’) 권력을 염원한 중년 사내(흥선군) 손에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남연군 묘에서 남쪽 개울가 숲을 ‘남전(南殿)’이라 부르는데, 예산 토박이인 가야산역사문화연구소장 이기웅에 따르면 연전에 땅속에서 ‘폭삭 주저앉은 서까래와 기와가 나왔다’.

자, 그러니 대원군이 부순 절은 가야사가 아니라 묘암사다. 그리고 석탑 또한 전설 속 허구가 아니라 실제로 존재했던 탑이다.
하나 더 있다. 대개 남연군묘에 대해 대원군이 선친 묘를 이장한 해를 ‘고종이 왕이 되기 13년 전’인 1850년이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남연군묘 입구에 있는 비석에는 역사적 진실이 기록돼 있다.

‘처음 마전 백자동에 장사 지냈다가 바로 연천 남송정에 이장하고 을사년에 덕산 가야산 북쪽 기슭에 이장했다가 병오 3월 18일 드디어 중록 건좌(乾坐: 乾方, 정북서 307.5도-322.5도)한 언덕(현위치)에 면례하였다’.
이미 대원군은 연천에서 선친을 한 차례 이장한 뒤 을사년(1845년) 가야산 북쪽에 이장하고 이듬해에 지금 자리에 묘를 썼다는 뜻이다.

을사년에 첫 이장한 자리를 주민들은 ‘구광터[舊壙址·구광지]’라 부른다. 옛 무덤 자리라는 뜻이다. 남연군 묘에서 400미터 북동쪽 산기슭 밭이다. 이기웅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부터 구광터라 불렀다”고 했다.

왜 처음부터 석탑 자리에 옮기지 않았을까. 이기웅이 말했다. “묘암사와 주변 주민들과 땅 문제를 협상하는 시기였을 것이다. 그러다 마지막 남은 절을 불태웠고.”
‘만세 권력을 누린다는 지관 말에 있는 돈 없는 돈 탈탈 털어서 급히 가야사라는 대찰(大刹)을 방화하고 주민을 내쫓았다’는 대중매체와 공식 안내문은 수정돼야 마땅하다.(* 대찰 가야사가 아니라 그 부속 묘암사터라는 뜻)
남연군 이산 표석
남연군 묘가 있는 예산 곳곳에서 발견된 '李山' 표석>
○ 미륵불과 세한도
18세기까지 석탑은 ‘층마다 작은 부처가 있었고 돌 틈에 쇳물을 부어 비바람이 불어도 무너지지 않았다’.(‘가야산기’, 이의숙(1733~1805), ‘이재집’ 권4)
탑 자리에 지금 큰 무덤 하나가 앉아 있다. 풍수를 논하지 않아도, 남연군묘 풍경은 압도적이다. 땅에서 보면 아늑하고 하늘에서 보면 웅장하다. 산줄기가 끝나는 언덕에 나무를 다 베고 묘를 썼으니, 언덕 전체가 왕릉처럼 보인다.

남연군묘가 있는 상가리 마을 옛길에 미륵불이 서 있다. 숲으로 들어가는 서쪽 방향을 보고 있다.
남연군묘에 대한 전설에는 “절을 불태우던 날, 탑을 바라보고 있던 돌부처가 돌아섰다”는 내용도 있다. 하지만 그 숲속에 웅거할지도 모를 산적과 산짐승에게서 행인을 지키려는 비보(裨補) 석불로 봐야 한다. 전설과 신화와 사실(史實)과 동화가 섞여서 사람들을 유혹하지만, 언제나 사실은 전설을 앞서는 법이다.
미륵불
백제 시대 공주에서 당진으로 가는 옛길에 서 있는 미륵불.
불상 앞쪽이 당진 방향이다. 이 길목에 서산 마애삼존불도 있다.
예산 마을 사람들 집에는 ‘李山(이산)’이라 새겨진 표석이 눈에 띈다. “우리 아버지가 이장을 했는데, 땅문서에 소유주가 ‘이왕직(李王職)’인 땅이 그렇게 많았다.
나는 사람 이름인 줄 알았다.”(이기웅) 이왕직은 식민시대 전주 이씨 왕실 재산을 관리하던 법인이다. 망해버린 옛 왕실 땅이 예산에 그리 많았다는 뜻이다. 이기웅은 그 ‘이산’ 표석이 이왕직 재산을 알리는 안내석이라고 믿고 있다.

그런데 끝이 아니다. ‘근래 이하응이 덕산현에 묏자리를 살피러 갔다가, 고려 옛 탑에서 용단승설(龍團勝雪) 4덩이를 얻었다. 내가 하나를 얻어 간직하였다.’(이상적, ‘기용단승설’, 은송당집 속집, 정민, ‘한국의 다서’, 김영사, 2020, 재인용) 용단승설은 송나라 때 명차(名茶)다.
700년 전 명차가 이 탑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이야기는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로 연결된다./박종인 선임기자
(추신) ○한결같은 마음,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
(이는 가야산과는 무관, 인터넷 수집 게재)
우리는 24시간 늘 어떤 대상을 만난다. 느낌 없이 지나치거나, 일상적인 일도 문득 공감 상대로 마음에 와닿을 때가 있다. 자신의 상태에 따라 깨달음이 되기도 한다.

조선 정조대왕이 세상을 떠남으로써 왕권은 급격히 약화 된다. 왕권뿐 아니라 문화예술을 비롯한 각종 사회제도가 퇴보의 길을 걷는다. 결국, 나라가 망국으로 치닫는다.

정조의 급작스러운 죽음으로 즉위한 순조는 11세였다. 안동 김문의 세도정치 빌미가 된다. 하지 않은 것인지, 못 한 것인지 왕은 거개 한 일이 없다. 3당이 어우러졌던 탕평 정부는 해체된다.
친위 부대였던 장용위(壯勇衛) 혁파를 시작으로 군도 와해 된다. 대동법, 균역법, 서얼허통(庶孼許通)과 통공정책(通共政策) 등 선대 왕들의 개혁 의지가 담긴 정책도 모두 유명무실해진다.
국가 경영에 대한 책임의식 또한 아무도 갖지 않는다. 피폐한 삶에, 조세 기본조차 지키지 않는 가혹한 수탈로 백성은 생사의 갈림길에 내몰리게 된다.
기본이 무너지면 재해도 따르는 것일까, 각종 재해도 이어져 온 나라가 탄식 소리로 넘쳐난다.

김정희가 모든 지위와 권력을 박탈당하고 유배되어 있던 제주도에서 그린 그림 중 하나가 《세한도》이다. 1844년 작으로 국보 제180호다.
9년간의 제주도 유배는 고금도에 이어 두 번째다. 훗날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기도 한다.
세한도(歲寒圖)
김정희 필 세한도, 1844년, 세로 23㎝ × 69.2㎝, 종이에 수묵,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난국에 등장하여 한결같은 마음으로 살다가 간 사람이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 ~ 1856, 문신, 실학자, 서화가)다.
단순한 예술가요 학자가 아니라, 신지식인의 기수였으며
이 땅에 새로운 문화 전개를 가능케 한 선각자였다.
당시엔 죄인과 관계 가지면 같은 죄로 벌 받기 일쑤였다. 죄인의 시신 수습이나 수발들기와 같은 일은 목숨 건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다.
그런 시국에서도 김정희 문인으로 사제 간 의리를 지킨 사람이 이상적(李尙迪, 1804 ~ 1865, 역관, 문인)이다. 이상적도 시를 잘 썼다. 스승과 같이 골동품, 서화, 금석에도 조예가 깊었다.
역관으로 중국에 12번 다녀왔다. 당대 저명한 중국 문인들과 교류, 나름 청나라에서 명성을 얻어 그곳에서 시문집을 발간하기도 한다.
수집한 귀한 책을 두 번이나 김정희에게 보내 준다. 발문에 의하면 계복(桂馥)의 <만학집晩學集>과 운경(?敬)의 <대운산방문고大運山房文藁>, 우경 하장령(賀長齡)이 편찬한 <황조경세문편皇朝經世文編>이다.

감사한 마음을 담아 답례로 그려준 그림이 《세한도》다.
이상적 또한 스승의 그림을 받고 감동하였던 모양이다. "세한도 한 폭을 엎드려 읽으매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리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歲寒圖一幅 伏而讀之 不覺涕淚交)"로 시작하는 답장을 쓴다.
《세한도》를 북경에 가지고 가, 청나라 문사 16명의 제찬(題贊)을 받기도 한다. 뒷날 그림을 소장하였던 김준학(金準學)의 찬(贊)과 오세창(吳世昌)·이시영(李始榮)의 배관기(拜觀記) 등이 함께 붙어 긴 두루마리가 된다.
세한도》는 두말이 필요 없는 조선의 대표적 문인화다. 문기(文氣)와 사의(寫意)가 충만하여 시서화가 하나 된 아름다움의 진수를 보여준다.
집 앞뒤에 소나무와 잣나무 두 그루씩 갈필로 그렸다. 우측에 화제(畵題)와 관지(款識)가, 좌측에 꽤 긴 발문이 적혀있다.
권세와 이익만 따르는 세태를 비판하고, 그에 초연한 제자의 한결같은 마음과 인품을 칭찬하는 가운데 논어 자한편에 나오는 이야기를 인용한다.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孔子曰, 歲寒然後, 知松栢之後凋也)" 세한도라는 말도 여기에서 따왔다.
곧은 지조와 절개, 변함없는 한결같은 마음이다. 제자(이상적)의 마음이면서 자신(김정희)의 마음이기도 하다.

최근 몇몇 언론 보도에 따르면, 《세한도》가 국민 품에 안기게 됐다는 소식이다. 반가움에 그림에 얽힌 이야기가 새롭게 다가왔다.

《세한도》는 이상적이 세상을 떠난 뒤 제자 김병선과 그의 아들 김준학으로 전해졌다가, 한 말 권세가 민영휘 집안으로 넘어간다.
민영휘 아들 민규식이 소유했다, 경성제대 교수였던 후지쓰카 지카시(藤塚隣)가 수집해 일본으로 간다.
서예가이며 컬렉터였던 손재형의 노력 끝에 극적으로 1944년 한국에 돌아온다. 손재형이 정치 일선에 나서면서 이근태에게 저당 잡힌다. 다시 개성 갑부였던 손세기가 소유했다가 아들 손창근에게 물려준다. >그 과정에서 추사의 학문과 예술에 매료되었던 일본인 후지쓰카 지카시는 《세한도》를 한 푼도 받지 않고 되돌려주며, 그의 아들 후지쓰카 아키나오(藤塚明直)는 부친이 수집했던 추사 친필과 관련자료 2700여 점을 과천시에 기증했다. 돈으로 바꾸지 않았으며 오히려 자료실에 써달라고 200만 엔을 기부했다 한다.
마지막 소유자였던 손창근은 시가 1000억 원에 달하는 경기도 용인 땅을 국가에 내놓았고, 수집한 컬렉션 304점을 국립중앙박물관에 조건 없이 기증했다 한다.
그림의 내용만큼이나 품위 있는 처신이 깊은 울림을 준다. 절의 지조만큼이나 문화재 사랑도 한결같다.
명품은 그를 알아보는 사람에 의하여 지켜진다. 스스로 명품이라 해서 명품이 되는 것이 아니요, 강요한다고 지켜지는 것이 아니다./시인, 수필가 양동길 씀, 김의화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