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암촛대바위 능파대(凌波臺) 한국의 석림(石林)
동해시 추암동 해파랑길
沙月 李盛永(2020.2.9)

나이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3년전 2017. 4. 14-16일 2박3일로 박영배네 하고 삼척에 가서
그렇게 신나게 구경하고 찍어온 영상들을
컴퓨터 파일에 담아놓고 지금까지 나몰라라 하고 지냈으니
건망증도 이쯤되면 중증인것 같다.

집사림이 TV 앞에서 부르기에 가 봤더니
삼척 바닷가 해파랑길에 있는 추암촛대바위 영상을 가리키며
"우리 저거 본 거잖아" 한다.
"맞아! 영배네하고 삼척 대명리조트에 가서 바닷길로 걸으면서 본 거지!"
거 사진들이 어디 있지? 한참만에 찾았다.

불영사, 덕구온천원탕 , 삼척대명콘도, 이사부사자공원, 해파랑길,
무릉계곡, 죽서루, 썬그루즈, 정동진, 강릉조옥현가옥 등
많기도 한데 여태 잊고 있다. 영상들이 3년동안 몹시 섭섭했겠다.
지금이라도 세상에 내놔서 빛을 보게 해야겠다.

이사부사자공원에서 바라보는 증산해수욕장, 대명리조트
이사부사자공원에서 해파랑길로 내려서는곳
해파랑길 표지와 삼척/동해지경 표지
동해 해파랑길 개요 소개
'해파랑'(바다,海)+(파랑색, 靑)+(너랑나랑, 함께, 與)의 합성 신조어라고 한다.(네이버)
그러니까 '푸른 바다랑 함깨 걷는 길'이라는 뜻인 것 같다.

우리가 걸은 길은 동해해파랑길 7구간(삼척 동해) 33번길(코스: 묵호역-북평 해암정)
끝자락인 동해시 추암동의 추암해수욕장과 촛대바위 구역 약3Km를 왕복한 것이다.
동해 해파랑길 10구간이 50개 코스로 나누어졌다는데
각 코스의 始/終 지점과 거리 등에 관한자료를 확보하지 못해 자세한 소개는 못한다.
추암해수욕장 모래판에서 바라보는 이사부사자공원
추암촛대바위를 배경으로
추암촛대바위가 있는 이곳은 원래 바위섬이었는데
오랜 세월 인근의 전천(箭川)과 동해바다물이 모래를 실어날라 육지와 연결된 육계도(陸繫島)이다.
동해 해암정(海岩亭)과 주변 석림(石林) 모습
고려 공민왕 10년(1361) 심한(沈漢)이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하려 하자
왕이 만류하다가 승락 하면서 '노인이 동쪽으로 간다'는 뜻으로
이름을 '동로(東老)'라 하여 하사하였다.
해암정(海岩亭)은 심동로(號 信齊)가 이곳으로 낙향하여 건립한 정자로
현재 삼척심씨 종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죽서루 누각에 심동로를 추억하는 이구(李球)의 시 한 수가 김충헌 서(書)로 걸려있다.

심동로의 조상으로는 문림랑(文林郞) 군기시주부(軍器寺主簿)를 지낸
심적충(沈迪沖)이 삼척에 세거(世居)하였다고 전해지나
300년 이상 지나 중간 세대가 실전(失傳)되어 불명하므로 후손들이
심동로(沈東老)를 삼척심씨(三陟沈氏) 1세 시조(始祖)로 삼아 가계(家系)를 이어 가고 있다 한다.
형제바위와 타일모자이크한 그림
추암촛대바위 주변 석림(石林)의 이모저모
석림(石林)은 유네스코 인류자연유산으로 등재된
중국 곤명 동남쪽에 있는 아래 영상과 같은 '바위 숲'을 말한다.
위 두 영상은 2004년 5월 17일-23일(4박 6일) 중국 운남성을 관광하며
곤명 동남쪽 석림에서 찍은 것이다.
* 중국 운남성 곤명 석림 바로가기(클릭): 석림
6.25한국전쟁 참전16개국 국기

왜 이곳에 우리를 도와 준 나라들의 국기를 그려놓았는지 모르겠다.
잠시 되돌아 오는 솔밭길
갈 때와 올때 다른 길로 걸었음
다시보는 석림들
가마우지 한마리 고공 다이빙 시도.
추암 촛대바위 이모저모와 타일모자이크 그림
바다에서 솟아 오른 형상의 기암괴석으로 그 모양이 촛대와 같아 촛대바위라 불린다.
전설에 따르면, 추암에 살던 한 남자가 소실을 얻은 뒤 본처와 소실 간의 투기가 심해지자
이에 하늘이 벼락을 내려 본처와 소실은 죽고, 남자만 남겨놓았는데
이때 혼자 남은 남자의 외로운 형상이 촛대바위라고 한다.

여기 추암촛대바위는 대한민국이 건립된 이후로 알게 모르게 영광을 누리고 있다.
즉 관공서는 물론이고, 민간에서도 공식 행사를 시작하면서 애국가를 부를 때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하는 음악이 흘러나오는 동안
스크린에는 이 동해의 촛대바위가 나타나면서 동해 바다가 출렁인다.
사실 나도 몰랐었는데 듣고 보니 가물가물 기억이 나는 듯도 하다. .
다음 행사 때는 눈여겨 봐야겠다.
바닷물 속의 석림
가마우지 사냥터
凌波臺(능파대) 암각(岩刻)과 조상들의 타일모자이크한 그림/시 작품
택당(澤堂) 이식(李植)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 상촌(象村) 신흠(申欽), 계곡(鷄谷) 장유(張維)와 함께
조선조 4대 문장가(文章家)로 전해지고 있다.

凌波臺(능파대) 의 '능파(凌波)''급류의 물결' 또는 '파도 위를 걷는다'는 뜻으로
미인의 아름다운 걸음걸이를 뜻한다.
김홍도의 그림작품과 이헌경의 시 작품에는 '凌波臺(능파대)'라 하였고,
김득신의 시 작품에는 '陟州臺(척주대)'라 하였는데
陟州(척주)는 고려 성종14년(995) 삼척이 군(郡)에서 주(州)로 승격하면서 불리던 이름이다.

그러나 고려 충선왕 2년(1310)년 고려가 원나라의 내정간섭하에 있을 때
속국 고려가 종주국 원과 같은 주(州) 이름을 쓰지 못하도록하는 칙명을 받고
모든 주(州)가 군(郡), 부(部) 등 다른 이름으로 바꾸면서 강등시켰다.
이에 따라 여기 척주(陟州)도 삼척군(三陟郡)으로 환원 강등된 것이다.

촛대바위 주변에 솟아오른 약10여 척의 기암괴석들은 동해바다와 어울려져 절경을 연출하며,
그 모양에 따라 거북바위, 두꺼비바위, 부부바위, 코끼리바위, 형제바위 등으로 불린다.
이곳의 바위군(群)은 동해시 남서부에 분포된 땅 속에 파묻혔던 석회암이 노출된 것이다.
석회암들은 땅 밑에 있을 때 지하수의 작용으로 용해되어 독특한 모양을 이루었고,
이것이 노출되어 지금과 같은 절경을 이루게 되었다.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여러곳을 순찰하며 이곳에 들렸던 압구정(鴨鷗亭) 한명회(韓明澮)가
바위 절경을 가리켜 '미인의 걸음걸이'라는 뜻으로 '능파대(凌波臺)'라 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고려때는 '척주대'라 하였고, 조선조에 들어와서 '능파대'라 한 것이 된다..
바위에 글자는 누가 새긴 것인지 모르겠다.
남한산성에서 정동방(正東方) 표지
이 시설물은 정동방지점 표지라 하는데
남한산성에서 정동방이 무슨 의미를 갖는지 모르겠다.

강능의 정동진(正東津)은 '한양(漢陽)의 광화문에서 정동쪽에 있는 나루터(關津)'이라는 뜻인데
그것은 조선 8도강산의 방향과 거리의 기준이 되는 원점인 한양에서 정동쪽을 말하며
지금도 광하문 사거리에 다음과 같이 전국 각지점과의 거리 기준원점으로 도로원표(道路元標)가 있다.
광하문 사거리 도로원표 표지와 道路元標
壬戌生回甲契記念碑(임술생회갑계기념비) 전후면
서문(序文)이 없고 계원 명단만 열거되어 있어 취지등 제세한 내용은 모르겠는데
특히 임술년(壬戌年)이 회갑이면 1982년, 1922년을 고려 할 수 있있다.
1922년은 일제 치하 호구지책도 어려운 때에 이런 기념비는 생각도 할 수 없었을 것이고
아마 1922년에 나서(生) 1982년에 회갑을 맞은 동갑계인 것 갔다.
후면 명단을 세어보니 총 102인이다. 아마 당시 삼척군관내 총원인것 같다.


동갑계 얘기가 나왔으니까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이 파일을 끝내야 겠다.
나의 고향에도 나의 선친과 같은 병진생(丙辰生: 1916년) 동갑네 22인이
무오년(戊午年: 1973년)에 63세로서 동갑계(同甲契) 수계(修契)를 하면서
금난계(金蘭契)
라 하였는데,
'금란(金蘭)'은 주역(周易)에서 따온 것으로
'두 사람이 마음을 합치면 그 날카로움은 쇠(金)를 자를 수 있고,
마음이 합쳐 전하는 말은 그 향기가 난향(蘭)과 같다'
는 뜻이다.

그런데 알고보니 '금난(金蘭)'이란 이름이 고향에서만 쓰는 줄 알았는데
진주 촉석루에도 금난계(金蘭契) 현판이 걸려 있고,
이곳 동해시의 무릉계곡에도 금난대(金蘭臺) 정자와 금난계(金蘭契)유래비가 있다.
나의고향 김천시 부항면 금난대 석각문
이 석각문의 글씨는 나의 선친(우로부터 9번째 李鉉玉)의 글씨다.
진주 촉석루 금난계 현판
무오사화를 촉발하여 피화한 탁영 김일손이 쓴 서문과 계원 명단이 있다.
금난계의 좌장을 진주목사 경임으로 하고
계원에 김종직의 사위이면서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 오다가
의주에서 잡혀 처형된 무오사화 피화자가 된 태허 조위도 들어있다.
무릉계곡 초입에 있는 금난정
다음 무릉계곡/죽서루 파일에 나온다.
해파랑길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