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수 밀어내고 235년을 기다린 길지(吉地), 독립기년관 품은 땅
흑성산(黑城山, 520m)
沙月 李 盛 永(2007. 3. 15.)
    안성 땅 칠현산에서 한남정맥과 결별하고, 서남으로 벋어오던 금북정맥(錦北正脈)이 서운산에서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성거산(579m), 태조봉(422m)를 솟구치고, 조금 더 나아가 동쪽으로 약간 비켜선 아홉사리고개 건너편에 금계포란(金鷄包卵: 금닭이 알은 품은 형상)의 길지에 ‘좌우동천승적지(左右洞天勝敵地)’ 를 품은 흑성산(黑城山)을 솟구친다.
    (좌동천승적지는 흑성산 동편 산방천 상류 석천리를 말하고, 우동천승적지는 서편 승천천을 끼고 있는 지산리를 말하는데, 지산1리에는 지금도 승적골이란 이름의 마을이 있다.)
< 흑성산 원경 >
동쪽, 독립기념관 정문에서 바라본 흑성산
남쪽, 경부고속도로 목천나들목(IC)에서 바라 본 흑성산
서쪽, 유량고개에서 바라 본 흑성산
왼쪽 도로가 넘어가는 고개가 '아홉사리고개' 다.
흑성산 정상 북쪽(위)과 남쪽(아래)
정상 부분은 KBS, MBC, TJB TV송신소와 미군 통신중계소가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정상표석도 남쪽 능선에 비스듬히 초라하게 세워져 있다.
흑성산 정상표석
(표석 후면 기록)
黑城山의 유래
상왕산 검은성 이라고도 불렸으며 여기서 기우제를 올리면 비가 잘 왔다.
흑성산 설명판
흑성산성(黑城山城)은 원래 ‘검은 성’ 이라 하였는데 일제 때 (지도작업을 하면서)
‘검은 성’ 을 그대로 한역하여 산 이름으로 ‘黑城山’ 이라 하였다고 안내판에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 철종 12년(1861)에 고산자 김정호가 완성한 대동여지도에도 이미 ‘黑城山’ 으로 표기되어 있으니 안내판의 설명이 틀린 것 같다.
대동여지도
    조선 영조 때 이름난 어사 박문수가 죽자(영조32년, 1756) 지관을 풀어 이곳 흑성산 남쪽 아래 지금의 독립기년관 자리에 묘자리를 정했는데 이 소식을 들은 어느 유명한 지관이 와서 ‘이곳은 2, 3백년 후에 나라에서 요긴하게 쓸 땅이라 그 때 이장해야 될 것이니 이곳에서 십여 리 동쪽에 묘를 쓰라’ 고 권하여 그 말 대로 흑성산 정동 6Km 지점의 은석산(銀石山. 455m) 남쪽 기슭으로 옮겨 썼다고 한다. (지금도 실제 박문수의 묘가 은석산 서남 기슭에 있다)

    박문수가 죽은 지 235년이 지나 흑성산 동남쪽에 민족독립의 역사관, 독립기념관이 1991년에 준공되어 구국선열들의 행적을 전시해 놓고 있으니 과연 박문수의 묘를 떠나게 했던 지관은 이미 200년 후를 내다 본 명 지관이었던 모양이다.
독립기념관 정면
흑성산에서 내려다 본 독립기념관
    흑성산이 나라에 기여하기로는 통신소통에도 큰 역할을 하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산꼭대기 통신시설들이 산을 회손하고, 산을 산악인들로부터 뺏었다'는 불평도 하지만 통신 또한 우리생활에 있어서 필수 중의 필수가 되었으니 불평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TV송신소와 통신중계소가 이 산의 정상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북쪽으로부터 MBC, TJB 송신소, 미군 통신중계소 그리고 KBS 송신소 순이다.
MBC(왼쪽)과 TJB(오른쪽)(정상 북쪽 부분)
헬기장과 미군통신중계소 (최정상)
KBS송신소(정상 남쪽 부분)와 안내문
    흑성산은 독립기념관 외에도 임진왜란 때 진주대첩의 진주목사로 주장이며, 선무공신 2등에 녹훈된 김시민(金時敏),
    영조 때 이인좌의 난을 진압하고 양무공신(揚武功臣) 2등에 훈록되고, 병조판서에 추증된 기은(耆隱) 박문수(朴文秀) 어사,
    일제 독립운동의 선구자로 상해 임시정부의 초대 주석, 의정원장을 지낸 석오(石吾) 이동녕(李東寧) 선생,
    기미년(1919년) 3월 1일 아우내(竝川) 장터에서 궐기하여 삼일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게 불을 붙인 유관순(柳寬順) 열사,
    청산리 전투의 영웅이요, 대한민국 초대 국무총리 철기(鐵驥) 이범석(李範奭) 장군,
    해방후 미군정 때 경무부장, 초대, 4대 민의원, 민주당대표최고위원, 민주당 공천 대통령 후보로 이승만과 대결하다가 신병으로 도미하여 치료하다가 그곳에서 병사한 유석(維石) 조병옥(趙炳玉) 박사 등 역사적인 구국 선열들이 바로 이 흑성산 아래서 태어난 사람들이다.

김시민 (金時敏, 명종9년,1554∼ 선조25년,1592): (야후백과사전)
    조선 중기 무신. 목천(木川) 출생, 자는 면오(勉吾). 본관은 안동(安東). 시호는 충무(忠武).
    선조11년(1578) 무과에 급제, 선조24년(1591) 진주판관이 되고,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목사 이경(李璥)과 함께 지리산에 피신하였다가 목사가 병사하자 그 직을 대리하면서 민심을 수습하여 피난했던 성민을 귀향시키고, 성을 수축하고 무기와 기재를 정비하는 한편, 군사의 항오(行伍)를 편성하여 군사체제를 갖추었다.
    이때 왜적은 진주의 방위가 허술함을 알고 창원·진해·고성으로부터 사천에 집결한 다음 진주로 향하려 하였다. 이에 곤양(昆陽) 군수 이광악(李光岳), 의병장 이달(李達)·곽재우(郭再祐) 등과 함께 적을 격파하고 패주하는 적을 추격, 십수교 (十水橋)에서 다시 승리를 거두어 고성·창원 등 여러 성을 회복하는 등 여러 차례의 전공으로 그 해 8월 진주목사로 승진되었다.
    취임 후 염초(焰硝) 500여근을 만들고, 총통 70여병을 만들어 정병을 뽑아 이의 사용법을 연마케 하는 등 성을 지키는 방책을 강화하였다. 왜군의 10월 공격에서 적탄을 맞아 진몰(陣歿)했으나 적에게 비밀로 했다가 안정된 후 상을 치렀다.


기은(耆隱) 박문수(朴文秀, 숙종17년,1691∼ 영조32년,1756): (야후백과사전)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성보(成甫), 호는 기은(耆隱). 본관은 고령(高靈). 시호는 충헌(忠憲),
    경종3년(1723) 문과 증광시(增廣試) 병과에 급제, 예문관 검열로 뽑혔다.
    영조3년(1727)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기용되자 사서(司書)에 등용되어 영남암행어사로 나가 부정한 관리들을 적발했고,
    영조6년(1730) 충청도에 암행어사로 나아가 굶주리는 백성의 구제에 힘썼다.
    영조10년(1734) 예조참판으로 있을 때 진주사(陳奏使)의 부사(副使)로 청(淸)나라에 다녀왔다.
    영조13년(1737) 병조판서가 되었고, 병조판서의 인신(印信)과 이군색(二軍色)의 인신을 만들어 줄 것을 주청하여 성사시켰다.
    영조18년(1742) 병조판서로 있을 때 지리적 여건으로 봉군(烽軍)의 충원이 어려운 북도(北道)에 각지방에서 정배(定配)된 봉무사(烽武士)로써 변통할 것을 주청하여 시행하게 하였다.
    영조25년(1749) 호조판서, 영조25년(1750) 수어사(守禦使)를 거쳐 영조27년(1751) 예조판서가 되었다. 영조29년(1753) 우참찬에 올랐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정치적으로 소론에 속하였으며, 명문벌열(名門閥閱) 중심에서 벗어나 4색(四色)의 인재를 고루 등용하는 탕평의 실(實)을 강조하였다. 군정(軍政)과 세정(稅政)에 밝아 당시 국정의 개혁논의에 중요한 몫을 했다.
    영조25년(1749) 영조에게 주청하여 《탁지정례(度支定例)》를 출판하였고, 글씨로는 안성의 《오명항토적송공비》가 전한다.
기은 박문수
유관순 (柳寬順 1904∼1920)(야후백과사전)
    독립운동가. 충청남도 천안(天安) 출생.
    1916년 기독교감리교 공주교구(公州敎區)의 미국인 선교사의 도움으로 이화학당(梨花學堂)에 교비생으로 입학하였으며,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고등과 제1학년생으로 만세시위운동에 참가하였다.
    이화학당이 휴교되자 귀향하여 예배당을 중심으로 서울의 독립시위 상황을 설명하면서 만세시위운동에 참가할 것을 권유하였다.
    조인원(趙仁元)·김구응(金球應) 등의 마을유지들을 규합하고 연기(燕岐)·청주(淸州)·진천(鎭川) 등 각지의 교회와 유림계의 찬동을 얻어, 같은 해 음력 3월 1일 아오내(竝川 병천)장터에서 수천 명의 군중을 모아 독립만세를 선창하며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아버지와 어머니를 비롯하여 많은 인사들이 피살되었으며, 유관순은 주모자로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을 받았으나 끝내 굴하지 않았다.
    공주지방법원의 판결에 불복하여 항소, 경성복심법원에서 재판을 받으면서도 항거하고 7년형을 선고받았다.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중에도 독립만세를 부르며 옥중항쟁을 전개하다가 옥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유관순 열사와 석오 이동녕선생
석오(石吾) 이동녕 (李東寧 1869∼1940) (야후백과사전)
    독립운동가. 충청남도 천안(天安) 목천 출생, 향리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고,
    고종29년(1892)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896년 독립협회에 가담, 이듬해 국민운동의 일선에 나섰으며
    1903년 이준(李儁)·이승만(李承晩)과 함께 옥고를 치렀다. 이상재(李商在)·전덕기(全德基) 등과 기독교청년회운동을 펼쳤고, 1904년 제1차 한·일협약의 체결로 국권이 위축되자 양기탁(梁起鐸)·신채호(申采浩) 등과 상동청년회(尙洞靑年會)를 조직,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듬해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조약의 무효와 파기를 선언하고 연좌시위를 벌이다가 체포되었으며, 1906년 북간도(北間島) 용정촌(龍井村)으로 망명, 이상설(李相卨)·여준(呂準) 등과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였다.
    1907년 귀국하여 안창호(安昌浩)·김구(金九) 등과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는 한편, 상동학교(尙洞學校)를 설립하고 교사로 재직하기도 하였다.
    1910년 국권피탈 뒤 서간도 유하현(柳河縣)으로 가서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고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신흥학교의 전신)를 세웠다.
    그 뒤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권업회(勸業會)를 조직하고 《해조신문(海潮新聞)》 등을 발행하였다.
    1918년 상하이[上海(상해)]로 건너가 대한민국임시정부에 가담, 초대 의정원의장·내무총장 등을 지냈다.
    1922년 파벌싸움으로 임시정부가 위기에 처하자 안창호·여운형(呂運亨) 등과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 단결을 촉구하였고, 1924년 임시정부의 국무총리로 군무총장(軍務總長)을 겸임하였으며, 1925년 두 번째로 의정원의장이 되었다.
    1927년 임시정부의 주석이 되었으며, 1929년 김구 등과 한국독립당을 조직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이 시작되자 한국광복진선(韓國光復陣線)을 결성, 항일전을 전개하였다.
    1938년 임시정부와 함께 창사[長沙(장사)]로 이전, 그 뒤 쓰촨성[四川省(사천성)] 치장에서 죽었다.
    임시정부 국장(國葬)으로 장례식을 거행하였고, 광복 뒤 1948년 사회장으로 봉환식을 거행, 효창공원에 안장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철기(鐵驥) 이범석 (李範奭 1900∼1972) (야후백과사전)
    독립운동가, ·정치인.
    1913년 이천공립보통학교를 거쳐 경기고등보통학교에 들어갔다.
    1915년 여운형(呂運亨)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하여 1919년 윈난육군강무학교(雲南陸軍講武學校)를 수석 졸업한 뒤 신흥무관학교 교관, 북로군정서 교관, 사단연성소 교수부장 등을 지냈다.
    1920년 김좌진(金佐鎭)을 도와 청산리전투에서 제2대대 지휘관으로 활약하였고, 1923년 고려혁명군 기병대장, 1922~1925년 러시아합동민족군프리모르스키지구 지휘관으로 러시아혁명전에 참가하였다.
    그 뒤 중국항일군의 헤이룽장성군[黑龍江省軍(흑룡강생군)] 작전과장 등을 거쳐 1934년 뤄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의 한적군관대장(韓籍軍官隊長) 등을 지냈다.
    1940년 중국군 중앙훈련단중대장을 거쳐, 1941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광복군총사령부를 창설하자 제2지대장으로 미국군과의 합동작전에 참가하였고, 1945년 광복군의 참모장으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8월 연합군자격으로 귀국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46년 귀국하였다.
    이해 10월 조선민족청년단을 창설하였고, 1948년 대한민국정부수립과 함께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부장관을 지냈으며, 1952년 원외 자유당 부당수로 부통령에 입후보, 낙선하였다.
    1956년 무소속으로 다시 부통령에 입후보하였으나 낙선하였고, 1960년 참의원의원에 당선, 1963년 <국민의 당> 결성에 참여하여 최고위원이 되었다. 1969년 국토통일원 최고고문을 지냈다.
    1963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複章 ; 지금의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수여되었다. 회고록인 《우등불》 《방랑의 정열》 등이 있고, 논설집으로 《민족과 청년》 등이 있다.
철기 이범석 장군과 유석 조병옥 박사
유석(維石) 조병옥 (趙炳玉 1894∼1960)(야후백과사전)
    정치가·독립운동가. 호는 유석(維石). 충청남도 천안(天安) 출생. 1914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에 건너가 1925년 컬럼비아대학에서 철학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그해 귀국하여 연희전문학교에서 강의하였으나 좌익(左翼) 교수와 대립, 곧 사직하였다.
    그 뒤 신간희(新幹會)·광주학생운동·수양동우회사건 등 항일운동에 가담하여 5년간 복역하였다.
    광복 후 송진우(宋鎭禹)·장덕수(張德秀) 등과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을 창당, 총무가 되었으며, 이어 미군정청 경무부장으로 혼란기의 치안을 담당, 공산당을 색출하는 데 힘썼다.
    1948년 정부수립 후 대통령특사·유엔한국대표를 역임하였고, 1950년 6·25 때는 내무부장관으로 대구(大邱) 사수를 위해 진두지휘 하였다.
    그러나 그 뒤 이승만(李承晩) 대통령과 정치노선 차이로 충돌하여 사직하고, 반이승만 세력의 선봉에 섰다.
    1954년 제3대 민의원, 1958년 제4대 민의원에 당선되었고, 1956년 신익희(申翼熙)의 뒤를 이어 민주당 대표최고위원에 피선, 야당을 영도하면서 반독재투쟁을 선도하였다.
    1960년 제4대 대통령선거에 민주당대통령후보로 입후보하였으나, 신병으로 미국에서 가료중 별세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흑성산은 고려 때도 우리나라를 지키는데 큰 역할을 한 김상혁상원사의 전적지다.
김사혁(金斯革: ? - 우왕11년,1385): (국사대사전)
    고려 때의 무신, 시호는 충절(忠節)이며,
    공민왕11년(1362) 홍건적(紅巾賊)을 물리친 공으로 2등 공신,
    우왕 초년에 공주목사(公州牧使)로 서해안에 침입한 왜구(倭寇)와 싸웠으나 패전,
    그 후 여러 번 충청, 전라도에 침입한 왜구와 싸워 승전,
    우왕 7년(1381) 양광도도순무사(楊廣道都巡問使), 양광도상원수(楊廣道上元帥),
    (양광도는 고려 때 10도의 하나, 경기도 일부와 충청북도)
    우왕11년(1385)에는 관직이 지문하사(知門下事)에 올랐다.
김사혁상원사 전적비와 설명비
복원한 흑성문
흑성문 안은 KBS송신소(출입금지)
    미군 통신 중계소 건설 때부터 경치석과 현무암 석재로 석축을 쌓아 헬기장을 건설하였고, MBC, TJB, KBS 송신시설 건설 공간을 조성하면서 흑성산성은 거의 흔적도 없이 허물어지고, 상징적으로 성문을 복원했으나 옛 성과는 무관한 것 같다.
우물터
북쪽 전망 성거산(聖居山, 579m)
정상에 무슨 시설이 많이 건설 되어 있다.
동쪽전망 독립기념관
동쪽, 청소년수련원과 은석산(銀石山)
은석산 서남기슭(이쪽)에 박문수의 묘가 있다.
서쪽 전망, 마점산(馬占山, 솔봉, 321m)과 천안 시가지
남쪽 전망, 새로 난 21번국도(가까이)와 경부고속도로(멀리)
남쪽전망, 취암산(鷲岩山: 驚岩山, 321m)
금북정맥 마루금을 자르고 지은 <<동우아파트>>
우리 땅 중요 산경 중의 하나인 금북정맥의 마루금 맥을 뚝 잘라 아파트를 지었다. 여기사는 사람들, 좋은 일 있을까?
흑성산 북쪽 매듭 아홉사리고개
어디서 유래했는지는 모르지만 고개 이름이 특이하다. '아홉사리고개'
약 40m 높이를 절개하여 북면, 금북정맥을 넘어 입장으로 통하는 2차선도로를 개통하였다.
흑성산 북쪽 등산로 시발점
흑성산(黑城山) 등산
    2007. 3. 13. 우리 부부는 천안(목천) 독립기념관 뒷산 흑성산을 등산했다. 북쪽 아홉사리고개를 등산기점으로 하여 정상 북부 MBC, TJB 송신소에 올라 미군통신중계를 서측으로 우회하여 정상표석(실제는 정상에서 남쪽 약 100m), 복원된 흑성산성, KBS송신소를 서측 우회하여 전망장소까지 가서 동쪽과 남쪽을 전망하고 되돌아 하산했다.
    최 정상은 미군시설로 출입이 금지되고, 주변 수목 때문에 전망이 좋지 않다, 200m남쪽에 행글라이드 이륙장이 있어 동, 남향의 전망이 좋다.
    하산 시는 KBS송신소와 미군통신중계소를 동측으로 우회를 했는데, 길이 없어져 고생했다.
흑성산 등산 지도
북릉 등산기점 아홉사리고개 출발
북릉 등산로
육산으로 등산길이 편안하다.
미군통신중계소 서측 우회 통로
흑성산 정상표석에서
복원한 흑성문에서
정상 남쪽 양지바른 곳에서 점심
KBS와 미군통신중계소 동측으로 우회
초입에는 우회로가 있는 듯 했으나 중간부터 희미해졌고, 사람이 안 다니니 꿩, 토끼 세상, 많이 쫓았다.
없는 길 따라 TJB와 MBC송신소(북쪽 끝) 도착
폐허가 된 우물 지나 하산
우물터에서 만난 주민과 개
옛날에는 질 좋은 약수가 많이 솟아올라 약수를 길러러 오는 사람이 줄을 이었었단다.
하산길
송파보리산악회 리본
산행 기점 아홉사리고개 도착
< 태조산(太祖山) 각원사(覺元寺) 구경 >
 
각원사 전경
고려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기 위하여 이 곳에서 병사를 훈련시켰다 하여
이름을 얻었다는 태조산 중봉아래 위치한 각원사(覺元寺)
'남북통일기원' 사찰로 웅장한 사찰 규모와 함께 거대한 아미타여래청동대좌불로 더욱 유명해졌다.
대웅보전
대웅보전 치미
전시된 대웅보전 치미 샘풀의 전후면(위)과 측면(아래)
태조산루/성종각 치미
치미는 궁궐, 능원, 사찰 등 건물의 지붕 위에서 용마루를 지키고 있는 새의 날개처럼 생긴 망새라는 장식물.
원래 용(龍)의 아홉 아들 중 불을 제압하는 능력을 가졌다는 이문(蟲離 蚊)인데,
단군왕검 개국 보다 약 300년전 중국 하화족의 시조 황제(黃帝)를 혼내준 우리민족 배달국 자오지환웅(慈烏支桓雄>이며,
중국에서도 강자로 인정 받아 출전에 앞서 승리를 기원하는 제사를 올렸다는 치우(蚩尤)천왕을 상징하여 ‘치미(蚩尾)’라 불려왔다.
아마 절 집을 지키는 데도 ‘강자(强者)’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불교가 우리 민족고유의 사상인 ‘치우’ 를 도입한 것은 이 치미와 사천왕상 요대 바클의 도깨비상이다.
치우이야기 I(클릭): '치우이야기 I' ,     치우이야기 II(클릭): '치우이야기 II'
아미타여래청동대좌불상
부처님 진신사리와 팔만대방경 탁본을 복장(腹藏)한 아미타여래청동대좌불
앉은 높이 14,5m, 둘레 30m, 귀 길이 1.75m, 손톱 길이 30Cm, 무게 60톤,
태조산 중봉을 뒤로하고 서향(西向)으로 정좌하여 자비로운 미소가 일품이다.
(천안시 발행 관광홍보 팜프랫에 '아미타여래청동대좌불'이라 하였음)
대불봉안공덕비
청동좌불상 앞에서
코끼리모양으로 전지한 향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