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가람 직지사(直指寺)를 품고 ,三韓大處 김천(金泉)고을 바람막이
황악산(黃嶽山, 1111m)
< 직지사 - 황악산 등산 >
沙月 李 盛 永
    백두대간이 충북 보은/상주 지경에 속리산을 짓는데 기력을 다해서인지 속리산 형제봉에서 추풍령에 이르기까지는 산다운 산을 솟구치지 못하고 겨우 대간의 명맥만 유지해 오다가 추풍령을 지나면서 기력을 가다듬어 다시 힘차게 솟구친 산이 황악산이다.
서쪽 민주지산에서 바라 본 황악산
동쪽 경부고속도로 김천IC에서 바라본 황악산
남쪽 직지사에서 올려다 본 황악산


가운데: 2005년 3월 1일 삼곡회 동기회, 아래: 2006년 4월 12일 삼곡회 동기회 때 찍은 사진
    또 일제 들어 철도가 이곳으로 놓이고 신작로(新作路)가 맨 먼저 생기면서 조선조 때 문경-조령-충주를 통하던 부산-서울을 잇는 제1의 교통로와 영남 제1의 관문을 추풍령이 빼앗았다. 추풍령을 통하는 철도와 도로는 일제가 호남의 곡물을 태평양전쟁에 쓸 군량미로 실어가기 위한 수탈수단으로 생겨난 것이다.

    황악산은 삼남의 대부분 백두대간 산들이 그러하듯이 전형적인 육산(肉山)이다. 그러면서도 이 산을 바라보는 사람에게 힘이 넘치게 하는 마력을 지녔다. 그것은 육체미대회에 출전한 선수의 근육처럼 울툭불툭 꼬이며 흘러내린 능선과 깊게 패인 계곡이 그러한 인상을 주는 듯 싶다.

    황악산은 내가 다닌 김천중고등학교 교가의 첫 구절에 나온다. '삼한 대처 김천 고을 황악산 밑에--' 그리고 6년 동안 김천 시내 반대쪽 변두리에 자취를 하면서 매일 등교할 때는 금오산을 등에 업고 황악산을 바라보며, 하교할 때는 황악산을 등에 업고 금오산을 바라보며 한시간씩 걸어서 다녔다.

    황악산은 동쪽 아늑한 곳에 대가람 직지사(直指寺)를 안고 있다. 직지사는 고구려 선교사로서 신라에 불교를 전했다는 아도화상이 신라 눌지왕 2년(서기418년)에 창건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황악산 정상에서 내려다 본 직지사
절 앞 관광 집단부락과 조성중인 직지사문화공원이 보인다.
'직지(直指)'라는 이름은
    ① 절을 처음 창건할 때 아도화상(阿道和尙)이 금오산에서 손가락으로 바로(直) 이곳을 가리켜(指) 절의 자리를 정한 데서 얻었다고도 하고,
    ② 고려태조 19년(서기936년)에 능여대사가 절을 확장하면서 손가락으로 바로(直) 가리키며(指) 측량하였다 해서 얻은 이름이라는 전설도 있다. 그러나
    ③ '직지(直指)'는 불교의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에서 따 왔다는 설이 더 설득력이 있는 것 같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불성(佛性)을 똑바로(直) 가리켜(指) 깨치면 곧 부처가 된다'는 뜻이다.

* 아도화상(阿道和尙)과 이차돈(異次頓): 본래 고구려의 승려였는데, 눌지왕 때(서기417-458 재위, 혹은 미추왕 때라는 주장도 있음) 불교를 전파하러 신라에 왔다. 이 무렵의 고대 불교는 '왕이 곧 부처'라는 '王卽佛', 왕이 다스리는 나라는 불국토(佛國土)라는 이념으로 전파되었다.
    그러나 삼국(고구려, 백제, 신라) 사회는 불교가 전래되기 전 원시 자연신앙은 귀족(부족장)들이 자신이 다스리는 영토 내에서 천신(天神), 지신(地神), 일원신(日月神), 산신(山神) 등에게 제사를 지내는 제사장으로 막강한 권위를 지녔기 때문에 왕과 귀족(부족장)들의 권위가 대등하였다.
    그러므로 왕과 왕실에 월등한 권한을 부여하는 불교의 전파를 귀족들이 반대하고 나선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아도는 신라에 와서 일선군(一善郡: 善山) 사람 모래(毛禮)의 집에 숨어 살았는데 마침 공주가 병이 나서 아무도 고치지 못하자 아도가 나서서 고쳤다. 왕이 기뻐하며 소원을 물으니 아도는 금성(金城: 경주) 천경림(天鏡林)에 절을 짓게 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이에 왕이 허락하여 지은 절이 흥륜사(興輪寺)다.
    그런데 아도가 절을 짓고자 했던 천경림은 신라에서 원시 자연신앙의 발상지이자 최고의 성지였기 때문에 자연히 귀족들의 반발이 거세지않을 수 없었다.
    그 와중에 왕이 갑자기 죽자 아도는 다기 모례의 집으로 피신해 스스로 무덤을 만들고 나오지 않으니 절은 폐허가 되었다.

    훗 날 법흥왕이 즉위하여 다시 흥륜사를 재건하려 하자 다시 왕실과 귀족들의 대립이 재현되었는데 바로 이 때 '이차돈의 순교사건' 이 일어난 것이다.
    이차돈(異次頓: 성은 朴, 이름은 居次頓, 處道, 厭觸, 높여서 厭道라고도 불렀다, 習寶 葛文王의 아들)이 법흥왕과 사전 모의 하여 처형될 때 보여준 이적(異蹟: 목을 베니 그가 예언한데로 피가 흰 젖빛으로 솟구침)으로 말미암아 귀족들은 불교를 수용하지 않은 수 없었고, 신라는 불교를 공인하게 되었으며, 이는 또한 귀족세력이 왕권에 복속되는 계기가 되었다.
(김정산의 三韓志 1권에서)

    황악산 정상에서 동쪽으로 내려다 보면 경부선철도, 2번국도, 고속철(공사중) 그리고 그 뒤에 경부고속 도로가 우회전 커브를 그리며 추풍령을 향한다. 그 커브지점 너머로 나직한 산에 낀 기다란 계곡이 선명하게 보이는데 이 곳이 '봉계(鳳溪)'라는 곳이다. '봉황새가 깃드리는 계곡'이라는 예쁜 이름을 가지고 있다. 지금의 행정구역이름으로는 김천시 봉산면이다.

    이 곳이 조선조와 현대사의 소용돌이속에 희생된 두 사람의 고향이다. 그 한 사람은 조선 단종2년(1454)-연산군 9년(1503)간에 영남학파의 거두 점필재(人변占 畢齋) 김종직(金宗直)의 수제자였던 학자 매계(梅溪) 조위(曺偉)이다. 연산군 때 김종직의 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제자이며 사관이던 김일손이 사초에 올린 것이 발단이 되어 많은 학자 특히 사림파들이 죽거나 귀양가고 장본인 김종직은 부관참시(副棺斬屍) 당하는 사건이 연산군 4년(1498)에 일어난 무오사화인데 이 때 조위도 하정사(賀正使)로 명나라에 다녀 오다가 잡혀 의주와 순천에 유배되어 그 곳에서 죽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금산군(金山郡) 인물편에는 조위는 맨 위에 올라 있고, 누정(樓亭)편에 ‘경렴당(景濂堂)’은 옛날 김종직이 살던 집을 말하며, 당 앞에 못을 파고 연을 심어 이름을 경렴(景濂)이라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김종직이 말년에 사위 조위 집에 와서 살았다는 것을 말한다.

    현대사의 또 한 사람은 육군참모총장으로 있다가 12,12사태 때 신군부세력의 구테타로 강제 축출 당하고, 교도소에 간 정성화 이다. 정성화 총장이 여기 출신으로 출세하였으나 도중하차 하게 된 것이 경부고속도로가 봉계 마을의 우백호 산줄기를 잘라버렸기 때문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믿거나 말거나).

    해발 200m의 추풍령은 ①백두대간의 가장 낮은 고개인 반면 ②경부선 철도 450Km에서 가장 높은 고개다. 그리고 ③경부고속도로 428Km의 한 중간 214Km지점이기도 하다.

    추풍령(秋風嶺)에서 황악산에 이르는 백두대간을 보면 눌의산(733m), 가성산(657m), 두 개의 산을 솟구치고 다시 해발 250m의 괘방령(掛榜嶺)에 가라 앉았다가 다시 솟구쳐 여시골산(여시는 여우의 경상도 방언), 운수봉(668m), 백운봉(770m)를 지나 황악산 정상(1111m)로 올려 챈다.
추풍령-황악산간 백두대간 지도

    요즈음 ‘추풍령!’ 하면 나이 지긋한 사람은 으레 ‘구름도 자고 가는 바람도 쉬어가는---’으로 시작하는 저음의 구수한 노래 ‘추풍령’이 자기도 모르게 흥얼거려지게 마련이다.
    추풍령은 경상북도 김천시 봉산면 광천리와 충천북도 영동군 추풍령면 형천리 사이의 ‘당마루마을’에 있는 고개다. 당마루마을은 한자로 ‘당령(唐嶺)’이라 하는데 이 곳에 당나라 병정들이 진을 쳤던 곳이기 때문에 얻은 이름이라고 하며(사실이라면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정벌하던 그 시절일 것이다) 이 고개가 바로 옛날추풍령고개이다. 지금 그곳에 추풍령고개 표석이 세워졌는데, ‘추풍령’ 노래가 새겨져 노래비가 되어있다.
옛 추풍령고개 마루와 표석
추풍령
전성범 작사, 백영호 작곡, 남상규 노래
(1) 구름도 자고 가는 바람도 쉬어가는/ 추풍령 구비마다 한 많은 사연
흘러간 그 세월을 뒤 돌아 보는/ 주름진 그 얼굴에 이슬이 맺혀
그 모습 흐렸구나 추풍령고개

(2) 기적도 숨이 차서 목 메여 울고 가는 /추풍령 구비마다 싸늘한 철길
떠나간 아쉬움이 뼈에 사무쳐/ 거치른 두 뺨 위에 눈물이 어려
그 모습 흐렸구나 추풍령고개
    요즈음 젊은 사람들이 경부선 열차를 타고 추풍령을 넘다 보면 ‘기적도 목이 메여 목 메여 울고 가는---’하는 이 노래말이 실감 나지 않을 것이다. 새마을호 열차는 말할 것도 없고, 무궁화호 열차도 언제 추풍령고개를 넘었는지 모르게 후딱 지나 서울로 또는 부산으로 달려간다. 심지어는 열차 두 개를 연결한 소위 새마을호‘장대열차도’숨 찬 기색이 전혀 없이 쏜살 같이 추풍령을 지나간다.

    그러나 내가 중학교 1, 2학년시절(1952-53), 6,25 한국전쟁이 막바지에 있을 때 전쟁물자 이를 태면 대포와 탱크를 실은 100칸이 넘는 화물차를 한 대의 기관차로는 추풍령을 넘지 못해 김천역에서 뒤를 밀어주는 기관차를 하나 더 붙여서도 거북이 걸음으로 겨우 추풍령을 향해 올라가는 것을 보며 우리들은 운동장 가 버짐나무(푸라다나스) 그늘에 나란히 앉아 화물차 칸수를 빨리 세어 맞추는 내기를 한 기억이 있다. 추풍령을 넘겨준 보조 기관차는 곧 김천역으로 되돌아와 다음 화물차를 밀어주기 위해 대기한다.

    화물열차 뿐만 아니라 객차를 단 열차도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중유 열차가 나오면서 조금씩 빨라지기는 했지만, 석탄을 때서 가는 기관차는 소리만 요란하고, 기적소리만 귀청을 따갑게 할 뿐 힘이 없었다. ‘추풍령’ 노래는 그 시절에 나온 노래다.

    1970년 7월 7일 경부고속도로가 준공면서 개장한 추풍령휴게소는 당마루 추풍령고개 보다 조금 남쪽인 김천 쪽에 있는데 여기에 경부고속도로준공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추풍령휴게소에 세워진 경부고속도로준공기념탑
「서울 부산간 고속도로는 조국 근대화의 길이며, 국토 통일의 길이다.
1970년 7월 7일 대통령 박정희’」
원래 추풍령고개인 당마루 마을은 동네 가운데로 경상북도와 충청북도 도계가 지나가기 때문에 ‘경북 당마루’와 ‘충북 당마루’가 나누어져 있다 경부선 기차역인 ‘추풍령역’은 충북 영동군 추풍령면 추풍리에 있다.
추풍령역
    영동군 추풍령면(秋風嶺面)은 원래 황금면(黃金面)이었는데 1991. 7. 1 전국적으로 지명도가 높은 ‘추풍령’ 이름을 따서 ‘추풍령면’으로 개명한 것이다. 금(金)은 ‘가을’을 의미하고, 그 색갈이 황색이라 황금(黃金)이라 표현한 것이니 '추풍'과 뜻이 크게 바뀐 것은 아니다.
    ‘추풍(秋風)’‘가을 바람’이란 뜻인데 어떻게 해서 이런 이름이 생겨났는지는 모르지만 '조선조 때부터는 과거를 보러 올라가는 선비들이 넘기를 꺼려 했다’는 말이 전해져 오고 있는 것을 보면 꽤나 오래된 이름 같다.
    아마 ‘추풍낙엽(秋風落葉)’이란 고사숙어 때문이었던 것 같다. ‘추풍낙엽(秋風落葉)’이 곧 ‘가을 바람에 나뭇잎이 떨어져 흩날리는 것과 같이 산산이 떨어지는 것’을 말하니 과거에서 낙방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옛날 영남의 선비가 과거에 낙방하거나 관원이 넘으면 파직된다 하여 넘기를 꺼려했지만 이와는 반대로 괘방령의 ‘괘방(掛榜)’은 ‘방(榜)이 걸렸다’는 뜻이니 곧 과거에 급제하고, 승진 교지가 나붙는다는 뜻이니 즐겨 이 고개를 넘었다고 한다.

    그런데 중종25년(1530)에 발간된 신증동국여지승람 금산군(金山郡: 현 김천)의 역원(驛院)편에 추풍역(秋豊驛)이 기록되어있고, 김천역(金泉驛) 찰방(察訪: 종6품-전7품의 馬政을 맡아보는 관리로 경상도에 11인을 두었으며 김천 역에도 1인이 있었음)이 관할하는 20개 역 중에 추풍역(秋豊驛)이 들어있다. 여기 글자대로 하면 추풍낙엽이 아니라 ‘가을 풍년’이란 뜻인데, 후대에 영남 사람들이 좋아하는 시적(詩的) 표현인 ‘추풍(秋風)’으로 바뀌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사람도 있다.

    * 김천역 찰방(察訪) 관할 역: 추풍(秋豊), 답계(踏溪), 안언(安彦), 무게(茂溪), 안림(安林), 금양(金陽), 부상(扶桑), 동안(東安), 팔진(八鎭), 무촌(茂村), 고평(高平), 양원(楊原), 권빈(勸賓), 성기(星奇), 양천(揚川), 금천(琴川), 문산(文山), 작내(作乃), 장곡(長谷), 성초(省草) 계20개 역.

    또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고려 충목왕1년(1345)- 조선 태종5년(1405) 간 고려의 여러 관직을 거쳐 조선조에 정헌대부(정2품) 까지 오른 이첨(李詹)이 추풍령에 대하여 읊은 시가 수록되었는데 여기서도 가을 풍년(豊年)을 노래하고 있다.
        古館依山麓危橋涉淺沙(고관의산록위교섭천사) 낡은 집이 산기슭에 의지하였고, 위태로운 다리는 옅은 모래를 건너네
        地肥秋大捻木老 山아래威 無花(지비추대염목노외무화) 땅은 기름져 가을에 풍년 들고, 나무는 늙어서 해마다 꽃도 안 피네
        使騎驚邦吏鄕風廳野歌(사기경방리향풍청야가) 사신이 탄 말이 역 아전을 놀라게 하고, 시골 풍속은 들노래에서 들려주네
        悠然動懷抱佳節客中過(유연동회포가절객중과) 유연히 회포가 움직이는 것 좋은 계절을 나그네로 지냄일세

    괘방령이 조선 철종12년(1861년) 고산자 김정호 작성한 대동여지도에는 ‘괘방령(掛榜嶺)’으로 표기되어 있지만 중종25년(1530)에 발간된 신증동국여지승람 금산군(金山郡: 현 김천) 편에는 ‘괘방현(卦方峴)은 군 서쪽 15리 황간현 경계에 있다(在郡西十五里黃間縣界)’로 기록되어 있으니, 굳이 한자를 풀이 한다면 卦(괘)는 ‘점괘’를 말하고 方(방)은 ‘술법(術法)’이란 뜻이니 점술(占術)을 말한다. 그러니까 신증동국여지승람 이후 영남의 선비들이 고개 이름의 음에 다른 의미를 부여하여 개명된 것으로 추정된다.
괘방령
    추풍령과 괘방령에 관련된 이야기는 과거 급제 뿐만 아니라 전쟁으로도 이어진다. 즉 ‘추풍령 고개를 넘은 군대는 패하여 괘방령으로 퇴각한다’는 말이 심심찮게 이어진다.

    임진왜란 때 추풍령을 넘어 서울로 진격하던 왜군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의 4만 왜적은 영동출신 의변장 장지현(張智賢: 1536-1593,추풍령 전투에서 전사하였고, 추풍령면에 사당이 있음)의 2,000 의병에게 한 때 고전하여 물러났고또 그들이 뒤에 후퇴할 때는 괘방령을 넘어갔다고 한다.

    6,25한국전쟁 때도 북한 공산군은 추풍령으로 주공을 두고 물밀듯이 처내려 왔지만 낙동강전선에서 불과 두 달 후에 유엔군의 반격에 지리멸렬하여 유엔군의 기갑부대가 더 빨리 추풍령을 넘었기 때문에 패잔병은 추풍령을 넘지 못하고 괘방령으로 숨어서 퇴각하였다. ‘추풍령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는 가사로 된 군가 ‘전우야 잘 자라’가 이 때 생겨났다.
    그렇게 치면 추풍령을 넘어 전진한 유엔군도 압록강에서 중공군의 참전으로 퇴각 하여 서울까지 내주는 1.4후퇴가 있었는데, 괘방령으로 퇴각하지는 않았으니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셈이다.

    ‘추풍(秋風)’ 이야기가 나왔으니 가을을 가장 잘 설명한 글로는 중국 북송 때 사람으로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인 구양수(歐陽修)‘추성부(秋聲賦)’일 것 같다.
                추성부(秋聲賦)
    (前略)
    ‘아, 슬프다! 이것은 가을의 소리구나. 어찌하여 온 것인가?
    저 가을의 모습이란, 그 색(色)은 안담(暗담)하여 안개는 날아가고 구름은 걷힌다.
    가을의 모양은 청명(淸明)하여 하늘은 드높고 태양은 빛난다.
    가을의 기운은 살이 저미도록 차가와 피부와 뼈 속까지 파고 들며,
    가을의 뜻은 쓸쓸하여 산천이 적막해진다.
    그러기에 그 소리가 처량하고, 애절하며 울부짖는 듯 떨치고 일어나는 듯한 것이다.
    풍성한 풀들은 푸르러 무성함을 다투고, 아름다운 나무들은 울창하게 우거져 볼만 하더니,
    풀들은 가을이 스쳐가자 누렇게 변하고, 나무는 가을을 만나자 잎이 떨어진다.
    그것들이 꺾여지고 시들어 떨어지게 되는 까닭은 바로 가을 기운이 남긴 매서움 때문이다.

    가을은 형관(刑官)이요. 때로 치면 음(陰)의 때요, 전쟁에서는 상(象)이요, 오행(五行)의 금(金)에 속한다.

    (禮曺 春官, 兵曺 夏官, 刑曺 秋官, 工曺 夏官), (五行: 火,水,木,金,土)
    이는 천지간의 정의로운 기운이라 하겠으니 항상 냉엄하게 초목을 시들어 죽게 하는 본성을 지니고 있다.
    하늘은 만물에 대하여 봄에는 나고, 가을에는 열매 맺게 한다.
    그러므로 음악으로 치면 가을은 상성(商聲)으로 서방(西方)의 음을 주관하고, 이칙(夷則)으로 칠월(七月)의 음률에 해당한다.

    (五音階: 궁宮,상商,각角,치艸밑徵,우羽),
    (夷則: 음력 7월을 달리 이르는 말, 陰陽으로는 陽律, 方位로는 申方, 節候로는 음력 7월에 속하는 十二律의 아홉번 째 음, 올림 사(G#)에 해당함)
    상(商)은 상(傷)의 뜻이다. 만물이 이미 노쇠하므로 슬프고 마음 상(傷)하게 되는 것이다.
    이(夷)는 육(戮)의 뜻이다. 만물이 성할 때를 지나니 마땅히 죽이게 되는 것이다.

    아! 초목은 감정이 없건만 때가 되니 바람에 날리어 떨어 지도다.
    사람은 동물 중에서도 영혼이 있는 존재다. 온갖 근심이 마음에 느껴지고, 만사가 그 육체를 수고롭게 하니
    마음 속에 움직임이 있으면 반드시 그 정신이 흔들리게 된다.
    하물며 그 힘이 미치지 못하는 것까지 생각하고 그 지혜로는 할 수 없는 것까지 근심하게 되어서는
    마땅히 홍안이 어느새 마른 나무 같이 시들어 버리고 까맣던 머리가 백발이 되어 버리는 것도 당연하다 할 수 있다.
    금석(金石) 같은 바탕도 아니면서 어찌하여 초목과 더불어 번영을 다투려 하는가?
    생각컨대 누가 저들을 죽이고 해하고 하는가>
    또한 어찌 가을의 소리를 한하는가?’

    (後略)

    가을을 노래한 것은 아마 중국 한무제(漢武帝)의 ‘추풍사(秋風辭)’가 처음이 아닌가 싶다.
            한무제(漢武帝)의 추풍사(秋風辭)
    가을바람 불어와 흰구름 날아가네
    초목은 황락(黃落)한데, 기러기는 남쪽으로 날고
    난초가 빼어났다, 국화가 향기롭네
    가인을 부여잡네 잊지 못할 것은 정이어라

    (中略)
    젊을 때가 언제이던가, 늙은 것을 어찌할꼬

    신라 경덕왕(서기742-765년) 때의 시인으로 알려진 월명(月明) 스님이 죽은 누이동생을 슬퍼하며 향가를 지어 불렀다는 ‘제망매가(祭亡妹歌)’에도 ‘가을바람’이 나온다.
            제망매가(祭亡妹歌)
    생사의 길 여기 있으니 두려워하고
    나는 간다는 말도 못다 이르고 가느냐
    어느 가을 이는 바람에 여기 저기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한가지에 나고서도 가는 곳을 모르는구나
    아으, 미타정토에서 만날 나 도 닦아 기다리네
김천의 관문 '영남제1문'
충청북도 영동땅에서 4번 국도를 따라 추풍령(또는 괘방령)을 넘어 김천으로 들어가면 이 문을 지난다.
아사달 산악회 2003년 제9차 특별산행
일정 및 목표: 2003. 12. 26-28(26일: 적상산, 27일: 삼도봉-석기봉-민주지산, 28일: 황악산)
인원: 14명(김연종, 김희산, 박명환, 박범순, 박영배, 반준석, 서태경, 성하진, 이종학, 정태진, 조용수, 황익남, 이성영/박옥자)
코스: 주차장-백련암-운수암-백두대간안부-백운봉-정상-형제봉 직전 계곡길로 하산-직지사-주차장-경북식당(산채비빔밥) (계획대로 정확히 맞았다)

연수원 퇴소 기념사진
연수원 사감과 함께
몇 명을 정책적으로 유급시킬 방침이었으나 등산도 열심히 하고,
침구정리, 청소 등 내무생활 점수가 만점이라 전원 수료키로 결정.
직지사 뒤 계곡 황악산 등산 시작
백두대간 능선으로 오름길
백두대간 능선 안부 첫 번 째 휴식
백두대간 능선 두 번 째 휴식 후 '가야혀'
황악산 정상
등선주, 올리고 내리고---
1111 1111 1111의 비밀
말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들 왈 "황악산 1111m 정상에 11시에 도착하여 11분에 등선주 하면서 1잔, 1잔, 1잔, 1잔 넉 잔을 마시다" 이것도 말이 되는가?
황악산 정상에서 내려다 본 김천 시가지
오른쪽 하늘금이 구미 금오산, 이곳 사람들은 금오산을 '코가 잘 생긴 이승만 얼굴'이라 한다.
하산 시작 눈 길
80도 급경사 하산길
이구동성으로 "황악산에 악(嶽)자가 붙은 이유를 알겠다"고
유일한 무명폭포
직지사 비로전
내가 어릴 때는 그냥 천불당(千佛堂)이라 했는데---
대웅전
사천왕상과 도깨비상
  사천왕(四天王)은 중생과 사원을 지켜주는 힘이 있는 부처로서 불교가 우리나라에 전래되면서 오랜 옛날 신시(神市)시대(단군왕검 건국 300여년 전) 우리조상의 가장 강건한 군장이며, 14대 환웅 자오지환웅(慈烏支桓雄)으로 알려진 치우(蚩尤)의 형상이라 하며 특히 네 사천왕의 배에 조각된 도깨비상 또한 치우를 형상화 한 것이다.
  내가 어린 시절 어른들로부터 들은 절에 관한 이야기 두 가지가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다.
    (1) 직지사에 가면 무서운 형상을 한 사천왕이 있는데 임신한 여자가 모르고 사천왕문을 들어섰다가는 열에 열사람 다 놀래서 낙태를 한다
    (2) 해인사에 있는 해우소(뒷간)는 하두 깊어서 볼 일을 다 보고 일어서서 허리 띠를 다 매고 나면 그 때서야 "털퍽", "털퍽'하고 소리가 들린다.

직지사 일주문
동국제일가람황악산문
황악산 등산을 무사히 끝냈다고 마나님께 보고하는 아산회 신임 산악대장
서울을 향하여 출발
9865, 6684 그 동안 수고 했고, 안전하게 서울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