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상호 머리에 인 여인이 곱게 차려 입은 붉은치마산
적상산(赤裳山,해발1,029m)
沙月 李 盛 永
개 요
적상산은 덕유산(德裕山) 향적봉(香積峰)에서 12Km 서북쪽 끝 자락에 기암괴석(奇巖怪石)과 붉은 단풍으로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어 '자수(刺繡)를 놓은 붉은 치마를 차려 입은 여인'을 꾸민 대자연의 수작(秀作)이다.

조선 숙종 때 학자 이만부(李萬敷)의 지행록(地行錄)에는 상산(裳山)이라 기록하고 '이 산은 사방에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있고 그 절벽의 빛깔이 붉은 까닭에 적상산(赤裳山)이라고도 부른다' 하였다.
대전-통영 고속도로 무주 나들목(IC)에서 바라 본 적상산
(왼쪽 상고대가 많이 핀 곳이 향로봉, 통신 안테나가 있는 곳이 주봉, 그 우측 끝이 안렴대, 산 너머에 안국사와 양수발전용 상부댐 적상호가 있다)
적상산에는 고려 때 최영장군이 단칼에 내리쳐 두쪽으로 쪼갰다는 전설이 있는 폭1.5m, 높이 20m의 장도바위, 서측 산허리에 병풍을 친 듯한 암벽 치마바위, 서측 사면의 단풍바다를 한눈에 내려다 보는 안렴대, 적상호에서 동쪽으로 흘러내린 물이 비류직하(飛流直下)로 쏟아지는 천일폭포 등 자연의 작품과 함께 고려 최영장군이 건의하여 축성했다는 적상산성(赤裳山城), 덕유산에서 북쪽으로 적상면을 관통해서 흐르는 괴목천의 물을 해발 900m 높이까지 끌어올려 거대한 양수발전 저수지가 된 적상호(赤裳湖)등 인공지물들이 자연과 인공, 산과 물의 조화를 이루어 사람들에게 감탄을 멈추지 못하게 한다.

추위에 얼어 붙은 천일폭포
적상호 댐 축조 후 수량이 감소하여 폭포가 왜소해졌다.
내가 적상산을 오른 것은 네 번이다. 처음 이 산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경향신문에 소개된 것을 읽고 부터다. 적상산은 고향 가는 길목이며 가을철에 대전에서 금산을 지나 무주로 향하다 보면(고속도로가 생기기 전) 산의 모양과 붉은 산의 색갈이 아주 인상적이라 언젠가는 꼭 이산에 올라야 겠다고 벼르던 어느날 아마 수요일 체육의 날 오후에 혼자서 처음 올랐다.

신문에 소개 된 데로 서편의 서창에서부터 오르려고 갔으나 허탕을 쳤다. 산불방지기간이라 입산을 통제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동편쪽으로 가면 덕유산국립공원이라 입산이 가능할 것이라는 말을 듣고 갔더니 과연 입산료를 받으면서 허락을 하는 것이었다.

등산도 등산이려니와 적상호가 있는 해발 900m 높이까지 포장도로를 닦았는데 구절양장이 아니라 십이절양장 (十二切羊腸) 쯤 되는 것 같다. 드라이브 코스로 그저 그만이다. 등산은 북쪽의 1029m봉에 올랐다가 통신 안테나가 세워진 남쪽 정상을 거쳐 안렴대에서 한참 동안 좋은 전망을 감상하고 안국사로 내려왔다.

혼자만 가 보기에는 너무 아까워서 한번은 집사람, 또 한번은 ADD 직장 사람들을 안내하여 똑 같은 코스로 돌았다. 마지막은 김도현 내외가 시골집을 방문했을 때 안렴대까지 안내해서 올랐다. 가을이 아니라 이산의 백미라 할 수 있는 '붉은치마'를 보지도 못했는데도 하나같이 감탄하였다.

적상산성(赤裳山城)과 적상산성조진성책(赤裳山城條陣成冊)
적상산성은 고려 말기 공민왕23년(1374) 최영장군이 탐라를 토벌한 후 귀경 길에 이 곳을 지나다가 산의 형세가 요새로서 적지임을 알고 왕에게 축성을 상소하여 수축하게 된 것으로 알려져 왔다. 거란병 침입 때 충청, 경상, 전라 삼도 의 접렴사 (接廉使)들이 이 성 안으로 피난하였다 한다 조선 인조 10년(1632) 무주현감 김수창이 적상산성의 성문의 형세, 성밖의 길, 성안 보경사(寶鏡寺)의 대강, 사고(史庫)의 대강, 관리의 수, 성안에 저장된 곡식, 군기(軍器) 등을 조사, 기록한 책 적상산성조진성책 (赤裳山城條陣冊)이 전해 오고있다.

또 조선 숙종 때 학자 이만부(李萬敷)의 지행록(地行錄)에 따르면 이 곳에는 예전에도 성이 있었는데 글안과 왜구가 침입하였을 때 부근의 백성들이 그 성안으로 들어가 피난하였다.

고려 때 도통사였던 최영장군이 조정에 요청하여 이 곳에 성을 쌓게 하였고, 조선조에 들어와 초, 중엽에는 이 성이 폐성이 되었으나 후에 중수하여 역사기록(실록)을 갈무리하였다.

적산산성은 사적 146호로 지정되었다.

동편 적상호로 오르는 길 부근의 적상산성
적상산 사고(史庫)
왕조 실록이 전란으로 없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노력으로 궁벽하고 안전한 곳에 사고(史庫)를 둔 것은 고려 말기부터였다. 실록의 편찬과 보관에 관한 내력은 다음과 같다.
- 고려 초기부터 사관(史館: 春秋館)을 두어 국사 편찬과 보관에 힘 씀
- 고려 고종 14년(1227) 명종실록을 해인사에 보관
- 충렬왕 1년(1275) 강화도에서 환도하자 불당고(佛堂庫)에 실록 보관
- 조선조 초기부터 고려의 제도를 계승하여 태조 초기에 춘추관과 충주 실록보관소를 두어 역대 실록을 보관
- 세종 21년(1439) 경상도 성주(星州)와 전라도 전주(全州)에 사고를 추가하여 서울의 춘추관 외에 충주, 성주, 전주 세 사고에 실록을 보관
- 선조25년(1592)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춘추관, 충주, 성주의 사고가 불타고 전주사고만 남게 됨

전주시내 경기전(慶基殿) 경내에 있는 전주사고
- 전주본 실록을 내장산으로 옮겼다가, 묘향산사고로 옮김
- 선조39년(1606)에 실록을 재인(再印)하여
① 춘추관(春秋館), ② 강릉 오대산사고(五臺山史庫: 현 靈鑑寺, 史庫寺), ③봉화태백산사고 (太白山史庫), ④강화 마니산사고(摩尼山 史庫), ⑤ 무주 적상산사고(赤裳山史庫: 護國寺)에 각각 보관하니 이를 조선조 오대사고(五大史庫)라 부름

오대산 영감사(일명 사고사)에 있는 오대산사고
- 인조 2년(1624) 이괄의 난 때 춘추관 사고가 또 불타고 나머지는 한말까지 보존
- 한일합방후 오대산사고본은 일본 도쿄대학(東京大學)으로 옮겨 갔다가 1923년 관동 대지진 때 없어짐
- 태백산사고본과 정족산사고본(마니산사고에서 옮긴것)은 규장각
으로 옮겼다가 지금은 서울대학교에 보관하고, 적상산 사고본은 구 황실문고에 보관중이다.

적상호(赤裳湖)
남한에 양수발전용 산상호수는 청평의 호명산, 산청 묵계치 아래 배바위, 그리고 유서 깊은 이 곳 적상산 동북편 해발 900m에 상부댐 적상호, 아래 적상천에 하부댐 무주호를 막아 양수발전시설을 만들었다.

또 상부댐 적상호의 물이 낙하하는 지점에 발전과 관계된 큼직한 수조를 만들어 놓고 그 위에 전망대를 꾸며 공개하고 있다. 덕유산 향적봉과 무주스키장 슬루프가 가까이 보인다.

아사달 산악회 2003년 제9차 특별산행
일정 및 목표: 2003. 12. 26-28(26일: 적상산, 27일: 삼도봉-석기봉-민주지산, 28일: 황악산)
인원: 13명(김연종, 김희산, 박명환, 박범순, 박영배, 반준석, 서태경, 성하진, 이성영, 이종학, 정태진, 조용수, 황익남)

제1일(12월 26일) 적상산 등산 사진
적상산 등산은 민주지산 등산의 준비운동으로 베이스캠프(이성영의 시골집)로 가는 여유 시간에 차로 적상호반 주차장까지 오르고 1시간 30분 동안에 주차장-향로봉-주봉(통신 안테나)-안렴대-안국사-주차장-(차량으로) 수조 위 전망대-하산 순으로 산행할 계획이었으나----

노면 결빙으로 덕유산국립공원 적상산 매표소에서 차량 출입을 금지하여 부득이 적상호까지 도로상으로 약 8Km 를 지름길로 단축하면서 2시간에 올라 적상호 호반에서 조촐한 등선주 행사를 하고 하산하였다.
덕유산국립공원 적상산매표소 차량출입금지
천일폭포 배경 일동
동편 적상산성(위)와 설명(아래)
적상댐
위: 올라 가며, 아래: 내려가며
위에 전망대를 꾸민 수력발전시설용 수조(水槽, 물탱크)
적상호표석 앞에서 일동
OECD 국가 원수 정상회담 사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