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통일의 영웅 김유신의 태를 안은 생거진천(生居鎭川)의 진산(鎭山)
만뢰산(萬賴山, 612m)
沙月 李 盛 永(2006.10.8)
서편 능선에서 바라 본 만뢰산 정상과 표석

  속리산에서 서북으로 벋어온 한남금북정맥(漢南錦北正脈)이 안성 땅 칠현산(七賢山 516m)에 이르러 한남정맥(漢南正脈)은 해어져 서북쪽으로 가고, 금북정맥(錦北正脈)은 서남쪽으로 갈라진다.
  한남정맥과 결별한 금북정맥은 덕성산(519m)에서 경기 안성과 충북 진천의 지경을 이루면서 서남진하여 서운산(547m)을 지나면서 방향을 남쪽으로 틀어 조금 내려가다가 엽돈재에서 동남쪽 진천과 천안의 지경을 따라 한줄기 기맥을 뻗고 가는데, 그 기맥이 첫 봉우리를 크게 솟구치니 진천에서는 가장 높은 만뢰산(萬賴山)이다.

  만뢰산(萬賴山)은 다른 이름으로 만노산(萬弩山), 보련산(寶蓮山), 금물노산(金勿奴山), 이흘산(伊訖山)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려왔다. 그 중 보련산은 산 전체가 마치 연꽃(蓮)처럼 생긴 대서 얻은 이름이며, 만노산과 금물노산은 진천을 신라 때 만노군(萬弩郡)과 고구려 때 금물노군(金勿奴郡)이라 한데서 비롯된 이름이다. 또 시중의 도로지도나 등산지도에는 ‘만근산’ 이라고도 표기되어 있다.

  진천(鎭川)의 이름은 고구려 때 금물노군, 신라 때 만노군, 고려 때 강주(降州), 진주(鎭州), 창의현(彰義縣)으로 바뀌어 오다가 조선조 태종14년(1414)에 진천현(鎭川縣)으로 개명하여 오늘에 이르는데, 조선 시대부터 생거진천(生居鎭川 혹자는 生於鎭川: 살아서 진천에 거한다)이라 하여 사어용인(死於龍仁)과 대구(對句)로 많이 사용되어 왔다.

  생거진천(生居鎭川), 한마디로 진천이 살기 좋은 고장이라는 말인데, 어떤 평가에서 나왔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진천의 지세를 잘 살펴보면 알 것 같다.
  서북쪽에 금북정맥(錦北正脈)이 지나가면서 칠현산(m), 덕성산(519m), 무제봉(574m), 서운산(547m), 만뢰산(612m) 등 해발 500-600m의 산들이 줄지어서 있어 그 깊고 긴 계곡의 풍부한 수량의 미호천과 백곡천이 그 동남쪽의 넓은 진천들을 적시어 웬만한 가뭄에도 농사가 잘 되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산과 들이 적절하게 분포되어 들에서 얻는 것과 산에서 얻는 것이 함께 풍부하고, 자연 인심이 순후하게 되니 백성들의 살림이 윤택할 수 밖에 업었기 때문에 진천은 백성들의 살기를 바라는 고장이 되었을 것이다.
진천IC를 나오면 눈 앞을 가리는 생거진천(生居鎭川) 표석

  명산(名山)에는 명찰(名刹)이 있고, 명인(名人)이 태어나는 법이다. 만뢰산 기슭에도 우리나라 유일의 3층 목탑(木塔)이 있는 보탑사(寶塔寺)가 자리잡고 있다. 만뢰산은 정상이 뾰족한 산이 아니라 주변 봉우리가 비슷 비슷한 펑퍼짐한 산이다. 펑퍼짐한 산에 나무가 수해(樹海)로 덮이니 마치 활짝 핀 연꽃을 닮아 산 천체가 연꽃 꽃잎처럼 부드러운데, 만뢰산 정상은 제일 큰 꽃잎이고, 보탑사 3층 목탑은 바로 그 꽃 술에 앉은 형상이다.

  비선골 보탑사는 만뢰산 남쪽 계곡 연꽃골(蓮谷里) 옛 절터에 우뚝 서있는 보탑사(寶塔寺)에는 경주의 황룡사 9층탑 (임진왜란 때 소실됨) 이후 다음으로 내부로 3층까지 오를 수 있게 지은 목탑(木塔)이 있다. 탑의 높이는 42.71m, 넓이는 1층이 60.14평, 2층이 50.33평, 3층이 41.4평이다.
3층 목탑의 앞(남)모습과 옆(서북)모습

  보탑사와 목탑의 연혁에 관한 안내판이 없어 건립연대는 알 수 없으나 목탑을 한국의 통일을 기원하는 ‘텅일대탑’이라 불리는 것으로 보아 건립 한 것은 얼마되지 않은 것 같다. 높이는 141자(42.7m), 탑신 108자(327m), 상륜 33자(10m), 상륜 무게 3.6톤, 1층 넓이 60평, 2층 넓이 50평, 3층 넓이 41vud, 사용된 목재량 8톤트럭 150대분량이라 하며, 우리나라에서 내부로 올라갈 수 있게 건립된 것으로는 신라 때 황룡사 9층 목탑 다음으로 두 번째라고 한다.

  목탑 외부 앞쪽은 1층 대웅보전(大雄寶殿), 2층 법보전(法寶殿), 3층 미륵보전(彌勒寶殿), 뒤쪽 1층 적광보전(寂光寶殿), 2층 보장전(寶藏殿), 3층 두솔타전(兜率陀殿) 등의 현판이 걸려있다.

  목탑의 1층의 금당에는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신 탑의 심주를 중심으로 사방이 약사보전(藥師寶殿: 약사여래불), 극락보전(極樂寶殿: 아미타불), 대웅보전(大雄寶殿: 본존불, 석가여래불), 적광보전(寂光寶殿: 법신불) 등 사방불(四方佛)을 모셔저 있다. 2청 법보전(法寶殿)에는 8만 대장경(大藏經)을 모신 윤장대와 4면 벽에 한글 법화경(法華經)을 새긴 석경을 비치하고 있다. 3층 미륵전(彌勒殿)에는 미륵삼존불(彌勒三尊佛)을 모셔 놓고 있고, 벽에는 세계 유명 목탑 사진들이 전시되어있다.
1층 사방불 중 서측(위)과 동측(아래)의 불상
2층 법보전(法寶殿)의 팔만대장경의 윤장대와 한글 법화경
3층 미륵보전(彌勒寶殿)의 미륵삼존불상
적조전(寂照殿)과 와불(臥佛)
영산전
반가사유상의 정면과 측면
법고각
범종각
백비(白碑)
높이 2.13m의 고려 때 화강석비. 고려초기 건립되 비석으로 보물 제 404호.
귀부(龜趺), 비신(碑身), 이수(璃首), 용두龍頭)를 모두 갖추고 있으나 비신에 각명(刻銘)이 없고,
이수(璃首)에도 27Cm x 25Cm의 방형액(方形額)만 있을 뿐 전제(篆題)가 새겨지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백비(白碑)’라 부른다

  만뢰산 동쪽으로 좀 떨어져 나간 봉우리 태령산(胎靈山: 450m)과 그 남쪽 기슭에는 삼국을 통일에 주역을 하여 흥무왕(興武王)에 봉해진 신라 장수 김유신(金庾信)이 태어난 생가(生家) 터와 태를 보관한 태실(태실)이 있다.

  진천군에서 가장 높은 만뢰산에는 지금으로부터 1,500여년 전 옛 신라 때 고구려와 백제의 침략을 막기 위해 쌓은 1,300m나 되는 퇴뫼식(堆뫼式) 석성(石城) 만뢰산성(萬賴山城)이 있다.

  김유신장군의 생가터가 있는 태령산 아래 상계리 계양마을은 예부터 ‘담안밭’이라 불려왔는데 옛날에 큰 담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매우 큰 주춧돌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김유신 장군의 부친인 김서현 장군이 만노군(萬弩郡) 태수(太守)로 있을 때 이곳에 집을 짓고 살았으며, 이곳 만뢰산성에서 침공해 온 백제군을 방어했다고 한다.
김유신 생가터에 복원한 생가터

  이곳은 신라 진평왕 17년(서기596년)에 태어난 신라 삼국통일의 명장 김유신이 태어난 곳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근처에는 김유신이 소년시절 활쏘고, 말달리기 수련을 했던 치마대(馳馬臺)라 부르는 치마바위가 있으며 뒷산 태령산(胎靈山, 400m)은 김유신 장군이 태어날 때의 태(胎)를 묻었다는 태실유지(胎室遺址)와 주위에 돌로 쌓은 둘레 216m의 석성이 남아 있다. 생가터에는 1983년에 세운 유허비(遺墟碑)와 비각이 세워져 있다.
치마대에 세운 화랑무예태권도성지
흥무대왕유허비

  금관가야의 왕손이기도 한 김유신이 이곳에서 태어나게 된 내력을 역사소설 삼한지(三韓志)에서 간추려 옮겨본다.
<김유신 생가가 진천에 있게 된 내력 이야기>
신라 왕실 가계도
  신라 24대 진흥왕의 장자이며 태자인 동륜이 개에게 물려 죽는 불상사가 벌어졌는데, 진흥왕이 다시 태자를 정하기도 전에 사망하였다. 그래서 신라 조정에서는 다음 임금을 세우는데 진흥왕의 장손이며, 태자의 장자인 백정을 세우자는 파와 진흥왕의 차자 사륜을 세우자는 파로 갈라져 쉽게 결말이 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중도파의 한 사람이 진흥왕의 국토를 확장과 국세 진작을 보좌한 이른바 오신(五臣: 이사부, 거칠부, 동대, 김무력, 고고도도) 중 살아있는 원로 거칠부에게 물어서 결정하자는 의견이 제기되고, 양파의 합의가 이루어져 거칠부 집을 방문하여 의견을 물은 즉 태자의 아들 백정은 너무 어리므로 차자 사륜으로 왕위를 잇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진술하여 그렇게 결정되니 이가 제25대 진지왕이다.

  그러나 당시 최고 관직 상대등으로 실권을 쥐고 있던 노리부와 백정의 동생 백반을 중심으로 한 일당은 백정을 임금으로 세우기 위해 갖은 음모와 술수를 궁리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진지왕이 도화라는 미녀를 만나 궁으로 데리고 와서 동침하고, 후궁으로 삼으려 있으나 도화는 지아비가 있는 몸이라면서 거절하여 하는 수 없이 출궁시켰다. 노리부 등은 이를 구실 삼아 화백회의를 열어 숫적인 우세로 밀어붙여 4년 만에 진지왕을 폐하고 백정을 임금으로 세우니 이가 곧 진평왕이다.
  뿐만 아니라 폐위된 진지왕이 화병이 나자 조카 백반이 돌팔이 의원을 교사하여 진지왕에게 서서히 죽는 독초를 사용하여 증거를 인멸하면서 독살하였다.

  진평왕을 세운 노리부와 백반은 누구도 제지할 수 없는 세도를 부렸고, 노리부의 아들 역부가 아버지의 권세를 믿고 부녀자 강간 등 온갖 만행을 부리는 현장에서 진지왕의 독자이며, 화랑인 김용춘이 한 칼에 역부를 죽이고, 지답현(지금의 영일)로 귀양 갔다가 노리부와 한 패인 그 곳 태수 육담의 갖은 행패에 시달리다가 결국 육담을 죽이고, 이승(異僧) 낭지가 있는 취산(지금의 양산 영취산)의 작은 절 몽암으로 피신한다.

  한편 진흥왕 오신(五臣) 중의 한 사람인 김무력은 금관가야 마지막 왕 구혜왕의 제3자였는데 ,구혜왕이 가야를 신라에 합병하자 신라의 진골(眞骨)이며, 각간이 되어 진흥왕을 도와 영토확장과 국세 진흥에 성심을 다하여 지흥왕 오신(五臣)의 한사람이 되었다. 김무력은 진흥왕 14년(서기553년)에 백제의 동북변경을 쳐서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신주의 군주(軍主)에 임명되었으며 죽은 후 양산의 취산 부근에 묻혔다.

  김무력의 아들 김서현은 신라 조정에 벼슬을 하면서 매년 부친 기일에 성묘 갔다가 김무력의 동료였고, 역시 진흥왕 오신의 한 사람인 고고도도를 만나 성묘한 후 취산 몽암으로 안내되어 거기서 이승 낭지와 김용춘을 만나게 되는데 김용춘과 김서현은 이미 서로 명성을 들어서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곧 뜻이 일치하고, 친근해 져 친구로서 변치 않을 것을 맹세한다.

  그 때는 세도가 노리부가 실권을 쥐고 행사했기 때문에 진평왕은 사냥 등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노리부가 죽자 왕이 직접 권력을 장악하고, 조정을 일신하기위해서 인재를 찾는 중이었다. 그래서 취산에 갔던 김서현은 김용춘의 사면 운동을 약속하고 돌아와 임금에게 영향력이 있는 왕실 어른 숙흘종을 찾아가 용춘을 사면해 줄 것을 임금(진평왕)에게 청할 것을 약속 받고 나오다가 숙흘종의 독녀 만명아씨를 만나 한 눈에 반하고 말았다.

  그 후로도 김서현은 숙흘종 집 하인의 도움을 받아 수시로 몰래 만명을 만나 장래를 약속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던 중에 김용춘에 대한 진평왕의 사면 약속을 얻어낸 숙흘종의 전갈을 김서현이 김용춘에게 전하러 갈 때 만명아씨는 말미를 얻어 외가에 가 있다가 하루 빨리 돌아와 집으로 가지 않고, 김서현을 만나 함께 취산 몽암으로 향하여 동지들을 만나고, 그날 밤 몽암에서 이승 낭지가 미리 마련해 둔 신방에서 김서현과 만명아씨가 동침하여 만명이 임신을 하게 된다.

  두 달 후, 만명의 임신 사실이 알려지자 온 왕실이 발칵 뒤집혔다. 성골처녀(만명)과 진골 총각(김서현)의 결합은 당시 관습으로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명의 아버지 숙흘종은 김서현 개인은 사위로써 탐나는 인물이지만, 왕실의 어른으로서 왕실 체면을 손상한다는 점에서는 허용할 수도 없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터였다.

  그 때 숙흘종의 진언으로 진평왕의 사면을 받고 신라 조정으로 돌아와 중신에 기용된 김용춘이 한 계책을 내었는데, 숙흘종은 딸 만명을 집에서 내쫓아서 왕실의 법도가 지엄함을 보여 체면을 시우고, 김서현은 병으로 공석 중이던 만노군(萬弩郡) 태수로 좌천하면, 김서현이 부임할 때 쥐도 새도 모르게 만명을 빼내 가서 그곳에서 혼인하여 부부가 되는 방법이었다.

  김용춘의 계책대로 진행되어 만명아씨는 집에서 쫓겨나 외가에 머물고 있는 사이 김서현과 김용춘이 합심하여 어느 천둥치고 번개 치는 날씨를 이용하여 만명을 몰래 빼내서 만노군(萬弩郡)으로 데리고 가서 부부의 인연을 맺고, 거기서 이미 임신했던 첫 아기를 낳으니 이가 곧 김유신이다.

  김유신은 후에 김용춘의 아들 김춘추 즉 태종무열왕을 도와 나당연합의 신라장수로서 백제를 멸하고, 이어 김춘추의 아들 법민(法敏) 즉 문무왕(文武王)도와 역시 나당연합으로 고구려 멸하여 삼국통일을 하는 주역이 된다. 그가 태어난 곳이 바로 지금의 충북 진천의 만뢰산(萬賴山 일명 萬弩山) 동남쪽 봉우리 태령산(胎靈山)기슭이다.
  ‘만노산(萬弩山)’ 이름은 진천의 옛이름 만노군(萬弩郡)에서 가장 높은 진산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 만뢰산 등산 앨범
  2006. 10. 7. 추석 다음날 우리 부부는 진천의 진산 만뢰산을 올랐다. 만뢰산은 내가 월간산(月刊山)을 구독하기 시작한 초기 1999년 6월호에 소개된 것을 읽은 후로 늘 한번 가보고 싶은 산이었다. 그것은 ‘김유신장군은 금관가야 출신으로 신라에서 벼슬은 한 김서현의 아들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주역인데 어떻게 진천 땅에서 태어났을까?’ 하는 의문 때문이었다.

  2006년 9월 김정산의 역사소설 삼한지(三韓志)를 구독하면 서 그 의문은 풀렸지만 그러니까 더 가보고 싶어 추석 세러 왔던 아이들도 다 가고 조용하니 가기로 마음 먹었다. 돌아올 때 교통이 걱정됐지만 고속도로를 피하여 진천-백곡-베티고개-안성-용인으로 통하는 한가한 길을 알기 때문에 막힘이 없이 돌아왔다.
등산경로 요도
주:주차장, ①보탑사 서측 등산로기점, ②목탑 전망지점, ③주능선 사거리,
④보탑사 동서 등산로 합치전,⑤충남북지경 결별지점, ⑥신선샘, ⑦정상

  만뢰산 등산로는 사방에서 많지만 김유신 생가터와 보탑사를 구경하자니 자연 보탑사 쪽 등산로를 택했다. 보탑사 서쪽으로 올라 뒤쪽으로 내려왔다. 연곡리로 들어가면서 김유신장군 생가터를 구경하고, 하산길에 보탑사를 구경했다.
  등산로는 부분적으로 급경사도 있지만 대체로 완만한 능선을 따르다 보니 등산에 1시간 반 정도 걸렸고, 하산은 1시간 걸렸다. 등하산 도중에는 수목이 우거져 전망이 거의 없었고, 정상 헬기장에서 남, 서, 북쪽은 전망이 좋은 데, 동쪽은 전망할 수가 없어 약 600m 동쪽으로 560m봉까지 가 보았지만 진천시가지도 볼 수 없어 동쪽 전망 사진은 한 장도 찍지 못했다.
보탑사 서측의 만뢰산 등산기점①
상수리나무, 굴참나무 빽빽한 능선 등산로
뒷산에서 내려다 보는 보탑사 3층 목탑②
보탑사 동서 등산로가 합치는 곳④
신선샘⑥
만뢰산 정상 헬기장
만뢰산 정상표석에서⑦
만뢰산 안내도
만뢰산 유래(전문): 만뢰산은 해방 611.7m로 진천에서 가장 높은 명산이며, 천안시 병천면과 경계하고, 옛 지명으로는 만노산, 만뢰산, 금물노산 또는 이흘산이라 불려옴. 이곳에는 신라 때 쌓았다는 옛 성터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고구려, 백제의 침공을 방어하던 군사적 요충지이기도 함. 조선시대 병자호란을 맞아 조감(趙 王咸)선생과 유창국(柳昌國)선생이 청나라군을 패퇴시킨 전승지임. 만뢰성은 1530년(중종25년)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석축으로 둘레가 3980척이고, 성내에는 우물이 하나 있었으나 폐지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아직도 그 흔적이 남아 있음. 남쪽으로 지량마을에 김유신 장군의 생가터가 있고, 장군의 태를 묻었다는 태령산이 있으며, 남서쪽 능선 아래 통일대탑 보탑사가 있으며, 북쪽 뒤편은 백곡면 대문리와 경계하고 있다.
만뢰산 정상 전망-남쪽, 천안 광덕산
만뢰산 정상 전망-서남쪽, 목천 독립기념관 뒷산 흑성산
만뢰산 정상 전망-서북쪽,서운산과 베티고개
만뢰산 정상 전망-동북쪽,덕성산, 무제봉
하산길-박달나무와 일본입갈나무(낙엽송)숲
보탑사 뒤 계곡에서 바라보이는 목탑과 감나무
3층 목탐 앞에서
보탑사에 핀 이름 모를 꽃
보탑사 정문
비석골 잘생긴 느티나무
묘하게 생긴 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