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0년의 삼도 지경(地境) 삼도봉 거느린 민두름산
민주지산(岷周之山,1242m) 소개/등산
沙月 李 盛 永(2007. 1. 13. 增補)
무주구천동 입구 나제통문 인근에서 바라 본 민주지산 정경
민주지산 정상(2003.12.27)
바뀐 정상표석(2007.1.5)
개 요
  백두대간이 황악산에서 기력을 되찾아 그 기세를 유지하여 서남진 하면서 우두령 건너 화주봉을 일구고, 밀목재 지난 다음 정남향으로 방향을 바꾸는 자리에 경상, 전라, 충청 삼남의 600년 지경(地境) 삼도봉을 솟구친다. 백두대간은 여기서 잠시 갈 길을 멈추고 서북쪽으로 기를 벋어 석기봉-민주지산-각호산으로 이어지는 기맥을 펼치는데 백두대간 마루금에서 약 5Km를 벗어난 지점에다 주산 민주지산(岷周之山, 1242m)을 만들었다.

  민주지산(岷周之山)은 원래 동국여지승람에 백운산(白雲山)이란 이름이 있었지만 순한 산세 때문에 충청도 사람들은 '민두름산'이라 불러왔다. 사납거나 가파르지 않고 충청도 인심처럼 순한 '밋밋한 산'이란 뜻이다.

민주지산 주변 지도
(지도오기: 경상남→경상북)
  그런데 일제 때 지도제작과정에서 지도상에 한글 표기를 할 수 없기 때문에 발음과 뜻이 '민두름산'에 유사한 한자를 찾다 보니 岷(산봉우리 민), 周(두루 주), 之(--한), 山(뫼 산)을 찾아낸 것이다. 그러고 보면 민주지산 이름은 역사도 뿌리도 없고 일제 침략의 잔재(殘滓)로서 남아있는 이름인 것이다.

  90년대 중반쯤 그것도 4월 중순에 특전부대 요원들이 이 산에서 훈련하다가 갑작스런 눈보라와 추위에 여섯 명인가 얼어죽는 조난사고가 있었던 곳이다. 충청도의 순하디 순한 민두름산이 오기를 부린 것이다.

  민주지산은 북쪽으로 약 3Km 되는 지점에 각호산(1178m)을 이웃하고, 동남쪽 2.5Km 지점에 석기봉(1200m), 1.5Km 더 가서 백두대간 마루금 위에 충청, 전라, 경상 삼남을 가르는 삼도봉(1177m)을 거느리고 있다.

석기봉(石奇峰, 1200m)
  민주지산 동남쪽 3Km 지점에 암석이 옹기종기 쌓여진 송곳니처럼 솟은 봉우리가 석기봉이다. 한자 이름 그대로 하면 '돌(石)이 기이한(奇) 봉우리(峰)'라는 뜻이다.
민주지산에서 바라 본 석기봉
왼쪽 끝이 삼도봉, 오른 쪽은 삼도봉에서 남쪽으로 벋은 백두대간

  정상에서 남쪽 무주 설천 쪽으로 50m 쯤 내려간 곳에 언제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60도 정도 비스듬히 누운 암벽에 삼두마애불(三頭磨崖佛: 몸통 하나에 머리가 상하로 3개)이 새겨져 있고, 천정 바위에서 물이 떨어져 고이는 물 탕이 있는데 심한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앞에 움막을 지을 수 있는 20여평 정도 되는 공터가 있어 예로부터 하늘과 산신에게 소원을 비는 기도처로 이름이 나 있었다.

  내가 어릴 때 우리 시골의 마지막 동네 해인동에 사는 '상촌할매'는 거의 매일 이 석기봉 물탕에 올라와서 '의뢰 받은 자녀들?'을 위하여 산신에게 기도한다고 한다. 어린 자녀들의 안녕과 무병성장을 산신에게 빌기 위하여 상촌할매에게 부탁하는 것을 사람들은'팔았다'고 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남쪽 백두대간 마루금의 감투봉에서 나뭇가지 사이로 본 석기봉
서쪽에서 올려 다 본 석기봉
대호(大虎)가 하늘을 향해 포효하는 듯.
석기봉 정상 표지목과 삼두마애불
<석기봉 기도처 관련 옛날이야기 하나>
효자(孝子)와 호랑이
  이 이야기는 지극한 효심으로 호랑이의 공포를 이겨내고 오히려 친구가 되고, 죽은 후에도 인연이 계속된 이야기다.

  지금으로부터 약 150년 전에 지례현(知禮縣) 사월(沙月: 현 김천시 부항면 사등리 사드레)에 이원하(李源河)라는 효성이 지극한 사람이 살았다.

  그는 7대 외동으로 극진히 효성스럽게 살아가고 있었으나 고민이 한가지 있었다. 그것은 나이 서른이 넘도록 자녀를 두지 못한 것이었다. 7대의 외동으로 자식을 얻지 못하면 조상에 대하여 큰 죄를 짓는 것으로 그 보다 더 큰 불효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어떻게 하던 아들을 낳을 한 궁리를 하고서 그 해는 이른 봄 씨앗을 뿌릴 때부터 시작해서 김을 매고 가꾸어 가을에 추수할 때까지 머슴에게 맡기지 않고 지극한 정성을 다하여 손수 농사를 지었다.

  이렇게 지은 농사의 추수가 끝난 후에 그는 석달 열흘(100일) 먹을 수 있는 쌀을 꾸려 등짐으로 지고 아들을 낳기 위해 기도를 드리려고 깊은 산으로 들어간 것이다.

  충청, 전라, 경상 삼도의 경계에 우뚝 솟은 삼도봉(三道峰)에서도 서북쪽으로 약 십리나 떨어진 석기봉(石奇峰)이란 명산이 있는데 그 산이 그의 목표였다. 그는 바로 석기봉 약수물탕 앞 공터에 눈비를 피할 수 있는 움막을 짓고 100일 기도에 들어갔다.

  그런데 첫날밤 밤이 으슥해 지자 움막 앞에 큰 산짐승이 접근하는 듯한 기미가 있더니 움막이 앞뒤로 사정없이 흔들리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큰 산짐승이 몸을 움막에 기대고 흔드는 것이었다. 허술하기 짝이 없는 움막이 꼭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래도 그는 어금니를 깨물면서 몸과 마음을 가다듬어 자세를 흐트리지 않고 단정히 앉아 기도에 열중하였다. 얼마 동안 움막을 흔들던 짐승은 슬그머니 문을 밀고 움막 안으로 들어서는데 언뜻 곁눈질로 보니 큰 송아지 만한 호랑이였다.

  움막 안으로 들어 선 호랑이는 기도에 열중하고 있는 그를 뚫어지게 쏘아보는 것이었다. 그래도 그는 더욱 더 마음을 다잡아 정신을 잃지 않고 마음 속으로 이렇게 되뇌었다.

  "나는 아들을 낳아 효(孝)하려고 한다. 내 효성이 부족하면 이 호랑이가 나를 잡아 먹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호랑이도 나를 해치지 못 할 것이다. 호랑이가 나의 효심을 시험하고 있는 것이다. 어디 한 번 해보자!"하며 독하게 맘을 먹으니 곧 마음의 평정이 왔다.

  이렇게 긴장된 시간이 얼마를 흘렀을까. 얼마 동안 움막 안에는 침묵만 흘렀다. 한참동안 그를 노려보던 호랑이는 그제서야 앞 뒤 다리를 쭉 뻗고 배를 바닥에 깔고 자리에 누웠다. 날이 샐 즈음 호랑이는 일어나 움막 밖으로 나가서 어디로 사라졌다.

  그 날 이후로 그와 호랑이는 친구같이 다정하게 되었다. 석 달 열흘 꼭 100일 동안 그와 호랑이는 밤마다 한 움막 속에서 한 식구처럼 지나게 되었다. 오히려 호랑이가 가끔 사냥이라도 나가서 움막에 혼자 있게 될 때는 마음이 허전하고 무서워지는 것이었다.

  백일기도를 끝내고 산에서 내려 온 이후에도 그가 어디 먼 데로 출타했다가 날이 저물어 늦게 집으로 돌아 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그 호랑이가 나타나 길동무가 되어 주었다. 이런 사실들을 알게 된 이웃 사람들은 그의 지극한 효성에 호랑이도 감복한 것이라 말하였다.

  그는 그 후 아들 삼형제를 두어 조상에게 효도를 하며 살다가 일흔 여섯으로 천수를 다하고 죽었다.그가 죽어 상례 중에도 호랑이는 밤이 되면 하루도 빠지지 않고 빈소 뒤 곁 텃밭에 와서 쪼그리고 앉아 빈소를 지켰다. 상주는 흰죽을 쑤어 호랑이를 대접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그의 장례가 치러지고도 매년 기제일(忌祭日) 밤에는 어김없이 호랑이가 집 근처에 내려 와 서성이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보았다고 한다. 호랑이가 이 땅에서 없어진 이후 이야기는 끝이 나고 지금은 할머니가 전해주는 그야말로 호랑이 담배 피우던 옛 이야기로 남아 있고, 연안이씨 부사공파 족보에 몇 줄 적혀 있어 실화로 믿고 있다.

다시 가 보니 이름이 '삼신상<三神像>'으로 바뀌어 있다.
삼신상 설명판
삼도봉(三道峰, 1177m)
  백두대간이 남한 땅에 들어와서 세 개의 삼도봉을 탄생시켰다. 이곳 민주지산 삼도봉을 비롯하여 덕유산 준령으로 들어서기 전 대덕산(大德山, 1290m)에 경남북과 전북을 가르는 삼도봉이 있는데 사람들은 '거창삼도봉'이라 부른다. 그리고 지리산에 이르러 반야봉 삼거리 노루목을 지나 일명 날날이봉이라 부르는 전남북과 경남을 가르는 삼도봉을 만들었다.

  대덕산과 지리산의 삼도봉은 고종33년(1896년)에 조선 팔도가 남, 북도로 나뉘어져 13도로 분할되면서 얻은 100년 남짓 된 이름이다. 그러나 이곳 민주지산의 삼도봉은 조선 태종 14년(1414)에 전국이 8도로 되면서 얻은 600년이나 오래 된 이름이다.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가 만든 대동여지도에도 표기되어 있는 이름이다.
대동여지도

  민주지산 삼도봉 정상은 헬기장 크기 만큼 펀펀한데 90년까지만 해도 삼도 지경을 표시하는 표지목이 하나 외롭게 서 있었는데 90년대 초에 와서 '삼도화합비(三道和合碑)'라 명명된 거창한 석조 조형물이 세워졌다.

  삼도를 상징하는 세 마리의 거북 등에 역시 세 마리의 용이 오석(烏石)의 큼직한 대리석 공을 공중에 떠 받히고 있는 형상이다. 자연과는 어울리지 않는 억지 조형물까지 세우고 매년 10월 10일에 삼도 지사를 대신하여 김천시장, 무주군수, 영동군수가 공동 주재하는 '삼도화합행사'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남쪽 백두대간에서 올려 다 본 삼도봉
서쪽에서 본 삼도봉 정상
민주지산 삼도봉 정상 표시목과 삼도하합비
왼쪽:1990년이전, 가운데: 1991년, 오른쪽: 1992년이후
삼국시대에도 이 삼도봉은 북쪽과 동쪽은 신라의 길동현(吉同縣: 영동) 과 금물현(今勿縣: 김천), 서쪽은 백제의 무산현(巫山縣: 무주)으로 신라와 백제의 국경을 이루면서 자주 격돌하며 힘 겨루기를 한 곳이라는 기록이 있다.

  내가 어린 시절 어른들이나 상급생들에게 들은 바는 삼도봉 꼭대기에 세 개의 돌무더기가 있는데 경상도 사람들이 소풍이라도 오게 되면 돌들을 경상도 쪽으로 옮겨 놓고, 충청도 사람들이 올라오면 충청도 쪽으로, 전라도 사람들이 올라오면 전라도 쪽으로 돌을 옮겨 놓는 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지만 그 때는 '지역감정'이라는 말 자체가 없었으니까 아마 애향심이 발로한 애교 어린 장난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민주지산 삼도봉에서 백두대간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오면 해발 680m 쯤 되는 이 주변에서는 가장 낮은 부항령(釜項嶺)이 있다. 세종14년(1432년)에 완성되었다는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도 있는 이름이고, 철종 12년(1861년)에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가 완성한 대동여지도(大東與地圖)에도 釜項峴(부항현)으로 표기된 이름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지례현편
  이 부항령 이름은 이 고개 동쪽의 마지막 자연부락 가목(가마목의 약자이며 한자로 釜項) 마을 이름에서 따 온 것이다. 1999년에 이 곳으로 아스팔트포장길이 완공되면서 해발 607m에 꾀나 긴 터널이 뚫렸다. 누구(?)의 말처럼 천지개벽(天地開闢) 한 것이다.

  그런데 이 터널의 이름이 엉뚱하게도 '삼도봉터널'이다. 삼도봉 밑을 뚫은 것이 아니라 부항령 밑을 뚫었는데 이름이 삼도봉터널이라면 일반적인 통념에 맞지 않은 소도 웃을 이름이다. 삼도봉은 이곳에서 북쪽으로 약 7Km나 되는 먼 거리에 있고, 또 남쪽 7Km 쯤 되는 대덕산에도 삼도봉이 있어서 터널 이름이 어느 삼도봉을 지칭하는지도 헷갈린다.

  오랜 역사적 뿌리가 있는 '부항령'이름을 두고 구태여 관련도 없고 헷갈리게 하는 이름을 붙인 것이 또한 '지역이기주의'때문 이라니 참으로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일제 때 행정구역으로 '면(面)'생겨날 때 대간 동쪽 김천군은 이웃 대덕면이 대덕산에서 그 이름을 따 오듯이 이 곳은 역사 깊은 부항령에서 이름을 따서 '부항면(釜項面)'이라 이름을 지었다. 그래서 이 터널 이름을 '부항령터널'이라 하면 경상도쪽의 부항면만 돋보이게 하기 때문에 전라도쪽에서 반대하여 엉뚱한 이름이 지어졌다는 이야기다. 지역이기주의가 이 곳에서도 역사를 깔아뭉갤 정도로 그 위력(?)을 떨치고 있는 것이다.
동쪽에서 본 삼도봉터널
  실제로 삼도봉터널이 생긴 이후 이 곳 지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삼도봉터널 지나면 무주로 갈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또 삼도봉터널이 삼도봉 밑에 뚫린 터널인 줄로 알고 "삼도봉이 어디냐?"고 물어서 삼도봉 밑 해인동 막다른 골목까지 갔다가 허탕치고 다시 "삼도봉터널이 어디냐?"고 물어서 가르쳐 주면 몹시 투덜거리며 되돌아 나오는 일이 자주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누구를 위한 행정인지 모르겠다.
아사달산악회 2003년 제9차 특별산행
일정 및 목표: 2003. 12. 26-28(26일: 적상산, 27일: 삼도봉-석기봉-민주지산, 28일: 황악산)
인원: 13명(김연종, 김희산, 박명환, 박범순, 박영배, 반준석, 서태경, 성하진, 이성영, 이종학, 정태진, 조용수, 황익남)

코스: 베이스캠프- 차량이동 (주차장 100m 전에서 빙판으로 하차)-백두대간 사거리-삼도봉-무명봉-석기봉- 무명봉-민주지산(사발면과 고구마도시락 중식 및 등선주)-(하산은 역순)-무주일성콘도(목욕)- 오복식당(석식 ○○탕)-베이스캠프 (민주지산 등산은 곡절은 있었지만 계획대로 잘 맞았다)

제2일(12월 27일) 민주지산 등산 사진
주차장에서 삼도봉을 향하여 출발
상고대가 만발한 백두대간 능선 사거리
위: 등산중, 아래: 하산중, 우상봉이 삼도봉,
대간 종주길과 무주 설천, 김천 부항(해인리)으로 통하는 길이 교차하는 사거리, 하산시는 상고대 없음
삼도봉 직전 상고대와 억새가 어울린 백두대간길
삼도봉 정상 삼도화합비
역광인데도 불구하고 굳이 자기 고향 쪽에서 찍겠다고---
석기봉으로 가는 도중 상고대
석기봉 정상에서(하산길)
석기봉-민주지산 중간 무명봉
동기회장과 아산회장이 직위만 믿고 사전 모의하여 민주지산등산을 중단할 것을 종용했으나 신, 구 산악대장의 과감한 추진력과 '가야혀-'가 뒷받침하여 계획대로 실시
민주지산 정상
'오기를 잘했다'고 이구동성
다시 올라 선 민주지산 정상(2007.1.5)
정상표석과 방향이 바뀌었다.(화강석 -> 오석, 서향 -> 동향, 종서 -> 횡서)
민주지산에서의 전망-황악산
삼도봉-무명봉-석기봉
온 길 되돌아 본다. 무명봉과 석기봉 사이 먼 공제선의 불꽃 같은 봉우리가 가야산
대덕산-덕유삼봉산
왼쪽 끝 희미한 산이 수도산(1327m), 육안으로는 지리산 천왕봉이 보였는데 사진에는 안 나타나네.
선명한 능선이 삼도봉 남쪽 백두대간: 감투봉-백도래산-부항령-덕산재-대덕산-소사고개-덕유삼봉산-
덕유산 향적봉
산악인들과 환경운동가들이'주목도 죽이고, 산도 죽이고, 기업도 죽었다'고 혹평한 설천봉 무주스키장 슬로프가 선명하게 보인다
삼도봉-석기봉 중간 무명봉 마지막 휴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