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3년전 2017. 4. 14-16일 2박3일로 박영배네 하고 삼척에 가서
그렇게 신나게 구경하고 찍어온 영상들을
컴퓨터 파일에 담아놓고 지금까지 나몰라라 하고 지냈으니
건망증도 이쯤되면 중증인것 같다.

집사림이 TV 앞에서 부르기에 가 봤더니
삼척 바닷가 해파랑길에 있는 추암촛대바위 영상을 가리키며
"우리 저거 본 거잖아" 한다.
"맞아! 영배네하고 삼척 대명리조트에 가서 바닷길로 걸으면서 본 거지!"
거 사진들이 어디 있지? 한참만에 찾았다.

불영사, 덕구온천원탕 , 삼척대명콘도, 이사부사자공원, 해파랑길,
무릉계곡, 죽서루, 썬그루즈, 정동진, 강릉조옥현가옥 등
많기도 한데 여태 잊고 있다. 영상들이 3년동안 몹시 섭섭했겠다.
지금이라도 세상에 내놔서 빛을 보게 해야겠다.

무릉계곡/죽서루
무릉계곡(武陵溪谷)
沙月 李盛永(2020.2.11)
무릉계곡 입구
많지는 않지만 가랑비가 와서 우산을 들었다.
무릉계곡 등산안내도
이 길로 들어서면 5군데(두타산, 박달령, 청옥산, 망군대, 고척대)로 오르는 길이 갈린다
오늘 우리 길은 세번째 청옥산 길로 용추폭포까지가 목표다.
우리를 맞이하는 반달가슴곰 석상과 무릉계곡 설명판
무릉계곡 입구 풍경과 용오름길 설명판
무릉계곡 금난정과 금난계 모임의 유래 설명
'금란(金蘭)'은 주역(周易)에서 따온 말로
'두 사람이 마음을 합치면 그 날카로움은 쇠(金)를 자를 수 있고,
마음이 합쳐 전하는 말은 그 향기가 난향(蘭)과 같다'
는 뜻이다.
무릉반석/암각서 설명/
위 화면 글씨가 우로부터 『무릉선원 중대천석 두타동천』의 한문 글씨다.
김홍도 그림의 타일모자이크 작품
하늘을 가리는 숲길 가에 고색창연한 큰 덩치 바위하나
학소대와 설명
암수 학 두마리(모형)가 구애 동작 중
비오는데 숲길과 육교
큰 바위 덩어리 계곡과 마당바위 그리고 이끼가 고색창연안 바위들
박달령길과 청옥산/망군대/고척대길이 갈리는곳 이정표
병풍바위와 장군바위
병풍바위는 못 찍었다1
발달령 물을 건너 오르는 계단길
쌍폭포
쌍폭포는 박달령물과 청옥산 물이 만나는 자리 한 웅덩이에 두 개의 고만고만한 폭포가 떨어진다.
쌍폭포 근방에 절리(節理)의 모범을 보이는 바위
하이라이트 용추폭포
용추(龍湫)는 용이 살았다는 웅덩이 즉 용소(龍沼)와 같은 말인데
맨 위 주폭포아래와 맨 아래 그림 두개의 웅덩이가 있는데
위의 주폭포가 떨어지는 웅덩이를 지칭하는 듯 싶다.
여기 용추폭포는 위 시작점에 깍인 항아리를 휘돌아 밑으로 떨어지는 풍경이 장관이다.
두타산(頭陀山) 삼화사(三和寺) 일주문(一柱門)
12지신(十二支神) 석상
주역(周易)을 연구하는 학문인 역학(易學))의 지론인 12지상(十二支像)을
불교의 전당인 절에 석상으로 세워놓은 것이 좀 이상하다.
불교가 한국에 전래된 이래 민간신앙이나 다른 학문과 융합된 흔적으로 볼 수 있다.
우로부터 자(子: 쥐)와 축(丑: 소)
우로부터 인(寅: 범)와 묘(卯: 토끼)
우로부터 진(辰: 용)와 사(巳: 뱀)
우로부터 오(午: 말)와 미(未: 염소-양)
우로부터 신(申: 잔나비-원숭이)와 유(酉: 닭)
우로부터 술(戌: 개)와 해(亥: 돼지)
삼화사(三和寺) 적광전(寂光殿: 大雄殿)
적광전은 '세상의 번뇌를 끊고 적정(寂靜)의 진리에 의하여 발하는 진지(眞智)의 광명.
또는 고요히 빛나는 마음을 위한 공간'이란 뜻.

삼화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月精寺)의 말사이다.
642년(선덕여왕 11) 신라시대 자장(慈藏)이 당(唐)나라에서 귀국하여
이 곳에 절을 짓고 흑련대(黑蓮臺)라 하였다.
864년 범일국사(梵日國師)가 절을 다시 지어 삼공암(三公庵)이라 하였다가,
고려 태조 때 三和寺(삼화사)라 개칭하였으며,많은 부속 암자를 지었다.
고려 공민왕18년(1369년) 절을 크게 확장하였는데,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어 중건하였으며,
대한제국 광무9년(1905년) 의병(義兵)이 이곳을 근거지로 활약하다가
1907년 왜병의 공격으로 또다시 소실된 것을 이듬해 중건하였다.
대한민국30년(1977년) 이 일대가 시멘트 공장의 채광지로 들어가자
중대사(中臺寺) 옛터인 무릉계곡의 현위치로 이건하였다.
경내에는 대웅전(大雄殿: 寂光殿), 약사전(藥師殿)을 비롯하여,
문화재로 신라시대의 철불(鐵佛), 3층석탑 및 대사들의 비(碑)와 부도(浮屠)가 있다.

"그저 그저 우리 손자 무탈하고, 공부 잘 해서 알쌍급제(좋은 대학) 하도록 해 주소소"
삼층석탑
최인희(崔寅熙) 시비(詩碑)
최인희(1926-1950)는 삼척 출신 시인으로 강원도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사람,
작품으로 「낙조」(落照: 서정주 추천), 「비 개인 저녁」, 「길」(모윤숙 추천) 등 작품이 유명,
32세로 요절 유고집으로 『여정백척(旅情百尺)』이 있다.
무릉반석에 잘 생긴 오석(烏石) 바위 하나
무릉계곡 끝
무릉계곡/죽서루
죽서루(竹西樓)
沙月 李盛永(2020.2.11)
죽서루 안내판과 설명
죽서루(竹西樓) 이름에 걸맞게 대나무숲
죽서루 정면 『竹西樓 關東第一樓』
(죽서루 관동제일루)
삼척죽서루(三陟竹西樓 )
강원도 삼척시 성내동(城內洞) 소재 관동8경(關東八景)의 하나,
고려 충렬왕1년(1275)에 간관(諫官) 이승휴(李承休) 창건 추정,
정면 7칸, 측면 2칸, 단층집, 천정(天井)의 가구(架構)가 간단하고 아름답다.
조선 태종3년(1403) 부사(府使) 김효손(金孝孫)이 중수(重修: 재건),
건축 양식으로 보아 조선조 초기 양식이다.뒷면 10여길 절벽 아래 오십천(五十천)이 흐른다.
(국가보물 제213호)
(한국사대사전)
* 오십천(五十川): 50개(많은)의 물이 합쳐져 흐르는 하천, 경북 영덕에도 오십천이 있음.
죽사루 다락으로 오르는 길에 육중한 바위들
누대 위에서
도호부사(都護府使) 허목(許穆)의 죽서루기(竹西樓記)
< 죽서루기 국역 >
관동지방에는 이름난 곳이 많다. 그 중에 경치가 뛰어난 곳이 여덟 곳인데 통천(通川)의 총석정(叢石亭), 고성(高城)의 삼일포(三日浦)와 해산정(海山亭), 수성(수성:속초)의 영랑호(永郞湖), 양양(襄陽)의 낙산사(洛山寺), 명주(溟州: 강능)의 경포대(鏡浦臺), 척주(陟州: 삼척)의 죽서루(竹西樓), 평해(平海: 울진)의 월송포(越松浦)인데 관광하는 자들이 유독 죽서루를 제일로 손꼽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대개 해변에 위치한 주군(州郡)들이 대관령(大關嶺) 밖을 동으로 큰 바다를 접했으므로 그 바깥은 끝이 없으며 해와 달이 번갈아 떠 올라 괴이한 기상의 변화가 무궁하다. 해안은 모두 모래톱인데 어떤데는 모통이 큰 소(大沼), 또 어떤데는불거진 거대한 바위, 그리고 또 어떤데는 욱어진 깊은 솔밭으로 되어 있어 습계(習溪) 이북으로 기성(箕城) 남쪽 접경까지 7백리는 대체로 다 이러하다.

유독 죽서루의 경치만이 동해와 마주하여 높은 산봉우리와 깎아지른 벼랑이 있으며,서쪽으로는 두타산(頭陀山)과 태백산(太白山)이 우뚝 솟아 있는데 짙은 이내 속으로 바위 니섶이 아스라이 보인다. 큰 시내가 동으로 흘러 꾸불꾸불50리의 여울을 이루었고, 그 사이에는 울창한 숲도 있고 사람사는 마을도 있다.

누각 밑에 와서는 겹겹이 쌓인 바위 벼랑에 천길이나 되고 흰 여울이 그 밑을 감돌아맑은 소를 이루었는데 해가 서쪽으로 기울 녘이면 넘실거리는 푸른 물결이 바위 벼랑에 부딪쳐 부서진다. 별구(別區)의 아름다운 경치는 큰 바다의 풍경과는 아주 다르다.관람하는 자들도 이런 경치를 좋아해서 일컫는 것이 아닌가 싶다.

매 고을 고사(故事)를 상고해 보아도 누를 어느시대에 세웠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황명(皇明) 영락(永樂) 원년(1403) 태종 3년에 부사(府使) 김효손(金孝孫)이 폐허를 닦아 누를 세웠고, 홍희(洪熙) 원년(1425, 세종7년) 부사 조관(趙貫)이 단청을 올렸다. 그 뒤 48년인 성화(成化) 7년(1471,성종2) 부사 양찬(梁瓚)이 중수했고, 가정(嘉靖) 9년(1530, 중종25)에 부사 허확(許確)이 남쪽 처마를 증축했다.

또 그 뒤 61년인 만력(萬曆) 19년(1591,선조24년) 부사 정유청(鄭惟淸)이 다시 중수하였다. 태종(太宗) 영락 원년 계미(1403)에서부터 청주(靑州) 강희(康熙) 원년 영안(1682, 헌종3)까지는 260년이 된다.옛날에 누 앞에 죽장고사(竹藏古寺)란 절이 있었는데 누 이름을 죽서라 부른 것은 아마 이 때문인 듯하다. 이상을 기록하여 죽서루기로 삼는다.

정유 헌종 8년(1662)
삼척부사 허목 지음(三陟府使 許穆 撰)

삼척시장(三陟市長) 김광용(金光容)의 중수기(重修記)
< 죽서루 중수기 >
관동팔경의 하나인 죽서루(보물제213호)는 오십천 푸른 물이 감돌아 흘러 수십길 기암절벽에 어울러진 천혜의 단애 위에 터를 잡아 장관인데 옛부터 시인묵객이 다투어 찾아와 시정에 젖었던 유서깊은 곳으로 이 고장 젊은이들의 꿈과 낭만히 충만한 이상적 역사의 현장으로써 찾는 이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이토록 자랑스러운 관동의 제일루로 만인의 사랑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은 1980년 당시 최규하 대통령께소 취임 직후 경내 확장을 칙지함에 따라 1981년 10월 18일부터 1982년 12월 4일까지 2억 100만원을 들여 경내 면적을 3,813평으로 확장하고 누각 개수 화장실 신축 평삼문 개축 담장 설치등 대대적으로 중수함으로써 독특한 건축 양식을 자랑하는 누각과 수려한 주변 경관은 세계적인 명소로 불멸의 문화유산으로 영원히 남게 되었다.

늦게나마 최규하 전 대통령께서 배려해 준 은혜에 감사하는 삼척시민의뜻을 모아 이 중수기를 쓴다.
1991년 12월 20일
삼척시장 김광용 근고
일죽 홍태의 서각>


* 蛇足2개: '젊은이들의'→ '삼척시민들의'( 이유: 끝에는 '삼척시민의 뜻을 모아'라 했음, 죽서루가 역사적 현장이라면 젊은이보다 늙은이가 더 깊은 의미가 있지 않은가?)
칙지(勅旨)→하명(下命)( 이유: 勅旨=勅令, 임금의 명령, 대통령을 '임금'으로 표현하는 것은 전제군주적이 생각)
죽서루 후면 오십천 풍경
명필 글씨들
해선유희지소(海仙遊戱之所)
누구의 글씨인지 모르겠다.
제일계정(第一溪亭)
누구의 글씨인지 모르겠다.
이구(李球)작, 김충현(金忠顯) 서 죽서루 시 2수
(시 2수 역)
(심동로를 그리며)삼척의 관루는 죽서루이고
누중의 과객은 심중서로다
지금과 같이 백발임에도 시와 술에 의탁하여
한가로이 나를 위해 자리를 베풀었네.

* 심중서(沈中書): 해암정을 짓고, 삼척심씨 시조로 추대 된 심동로를 말함.

(최복하를 그리며)봉지(鳳池)의 사간(司諫)이 선사(仙 木差)에 높이 누워
일찌감치 어부가의 뜻을 알았네
염매(鹽梅)를 잘 만드는 것이 시급한 임무이니
상감의 주방에서 그대의 조리 솜씨 기다렸다네


* 이 내용은 조선 건국에 참여를 거부하고 고려의 신하로 남는다는 뜻을 나타낸 것이다.
봉지(鳳池): 봉황이 사는 연못,
사간(司諫): 대사간(大司諫) 최복하를 말함,
선사(仙 木差): 신선이 타는 배,
염매(鹽梅): 염장한 매실(약재로 씀),

* 이구: 고려 충렬왕 때 예빈경(禮賓卿).
심동로: 고려 공민왕 때 중서사인 지제교, 삼척심씨(三陟沈氏) 시조.
최복하: 고려말 대사간(大司諫).
김충현: (1921-2006) 서울 태생, 천안지역에서 활동, 서예발흥 중시조 평가.

정조(正祖) 어제(御製) 죽서루시
彫石鐫崖寄一樓 (조석휴애기일루) 바위벼랑 위에 지은 다락 하나
樓邊滄海海邊鷗(누변창해해변구) 다락 옆 일렁이는 바다에는 갈매기 나네
竹西太守誰家子(죽서태수수가자) 죽서의 태수는 뉘련가
滿載紅粧卜夜遊(만재홍장복야유) 배위에 가득 탄 여인들과 밤새워 노니네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죽서루시
(한역/해역)
(수장천오창화루) 누가 하늘을 받들어 화려한 누각을 세웠나요
(석노성이불기추) 하염없이 지나온 세월에 기억 할 수도 없도다
(야외천환부원수) 멀리 들판 밖에는 수 많은 산들이 떠 있는데요
(사변일대담한류) 모래사장 가까이는 맑은 물도 차게 흐르네

(시인자시다유한) 시인은 절로 그윽한 한이 많다고 하지마는
(청경하수야객수) 많은 경에 어찌 나그네 수심만 일으키랴
(희발만연휴적적) 온갖 인연을 다 떨쳐버리고 긴 낚싯대 들고
(벽애서반롱면구) 푸른 절벽 서쪽 물가에서 조는 물새와 놀까.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죽서루시
죽서루 송강 정철 가사의 터
가사는 관동별곡
송강 정철의 죽서루 한시 1수
竹樓珠翠映江天(죽루주취영강천) 강 하늘에 죽서루 천상 누각되어 비추이고
上界仙音下界傳 (상계선음하계전) 하늘의 선녀 소리 들리어 오건마는
江上數峯人不見(강상수봉인불견) 사람은 아니 뵈고 산봉우리만 강상에 있어
海雲飛盡月娟娟(해운비진월연연) 바다 구름 다 지나가도 달빛만이 곱게 비치네

(다른 해역-송강 정철 한시 전집)
竹樓珠翠映江天 죽서루의 珠簾과 翠竹은 강물에 비치고
上界仙音下界傳 천상의 仙樂은 하계에 내려오네.
江上數峯人不見 강 위엔 사람 없고 몇 개 봉우리만 있더니
海雲飛盡月娟娟 바닷구름 다 불고 달빛만이 곱고나.
송강가사 관동별곡(關東別曲) 죽서루부분 원전
(가사 풀이는 다음 영상에 있음)
정철의 관동별곡 죽서루 부분에 서울 남산(南山)의 옛 이름 중 '목멱(木覓)'이란 이름이 등장하는데
그 뜻은 '나무(땔감)를 구한다'는 뜻인 것 갔고,
어떻게 남산의 이름이 된 유래는 잘 모르겠으나 옛날 남산 주변의 가난한 서민들에게
남산은 '땔감(木)을 구하는(覓) 곳'이라는 관념에서 온 이름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멱(覓)자가 방랑시인 김삿갓 이야기에 '四覓難關(사멱난관)이란 성어로 등장하는데 '김삿갓이 4개 멱자(四覓)의 어려운 관문(難關)을 거뜬히 돌파했다'는 뜻의 재미있는 유모어다. 내용을 옮긴다.

* 김삿갓의 '四覓難關(사멱난관)' 이야기
김삿갓이 여름 내내 즐겼던 금강산 절경을 뒤로 하고 다시 길을 나선다. 역마살이 끼어도 단단히 끼어 한 곳에 정착을 모르는 김삿갓은 그저 걷는 것이 천직인듯 싶었다.

그날도 김삿갓은 작은 산을 하나 넘어 길을 가고 있었다. 어느새 금실같은 햇살을 산자락에 남긴채 해가 지고 있었다. "해란 놈도 어디 자러 들어가는 모양이로구나 난 오늘 어디서 밤이슬을 피할까?"
혼자말로 구시렁거리면서 먼 하늘을 바라보며 걷던 김삿갓은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살폈다.
마침 오솔길 위로 보이는 연기가 멀지 않는 곳에 민가가 있음을 알려주었다. "어허 밥짓는 연기를 보니 회가 동하는 구나", 연기가 나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마침 김삿갓이 도착한 곳은 마을 서당이었다. 김삿갓은 안의 글소리에 질세라 목청을 높여 주인을 청했다.
훈장으로 보이는 한 어른이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김삿갓 "지나가는 사람이온데 하룻밤 쉬고 갈 곳을 구하고 있습니다"
훈 장 "마침 사랑채가 비어 있으니 쉬어가도 좋소. 그렇지만 단 조건이 있소"

김삿갓을 요리조리 뜯어보던 훈장은 그의 용모가 썩 내키지 않은지 조건을 걸었다.
김삿갓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훈장의 조건을 물었다. 빤한 글시험이겠지만 김삿갓에게 그것만큼 자신이 있는 것은 없었다.
오히려 아무 실랑이도 없이 쫓겨나 뒤통수에 대고 비꼬는 시 한 수 읊어 던지는 것보다 이렇게 대구(對句)하는 게 훨씬 재미 있지 않은가?

훈장 "에햄! 내가 운을 띄울 터이니 시구(詩句)를 지어 보도록--잘 하면 따뜻한 저녁상에 술상까지 나가지만 그렇지 못하면 ---"
훈장은 턱 수염을 만지면서 뒷 말을 흐렸다. '못 할 것 같으면 알아서 나가라'는 뜻이다. 그러나 김삿갓은 더욱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시제를 청했다.

김삿갓 "무슨 자이옵니까?"
훈 장 "구할 覓(멱)". 김삿갓은 빙그레 웃고는 이미 운을 알고 있었다는 듯 바로 시구를 댔다.
김삿갓 "許多韻字何乎覓(허다운자하호멱) 많고 많은 운자 중에 하필 멱자를 부르는가?"

훈 장 "다시 覓(멱)". 훈장은 두번째도 覓(멱)자를 불렀다.
김삿갓 "彼覓有難況此覓(피멱유난항차멱) 첫번 멱자도 어려웠는데 이번 멱자는 어이 할까?"

훈 장 "또 覓(멱)".
김삿갓 "一夜宿寢懸於覓(일야숙침현어멱) 오늘 하룻밤 자고 못자는 운수가 멱자에 걸렸구나.

훈 장 " 마지막도 覓(멱)". 훈장은 마지막 멱자에 힘주어 운을 띄웠다.
이에 응답이라도 하듯 김삿갓은 쓴 삿갓을 올리며 훈장을 빤히 올려다 보고 힘주어 마지막 싯구를 읊었다.
김삿갓 "山村訓長但知覓"(산촌훈장단지멱) 산촌의 훈장은 멱저 밖에 모르는가?

훈장의 운이 끝나기 무섭게 김삿갓 입에서 흘러나온 시구에 서당 학동들은 눈을 동그랗게 떠고, 입이 벌어진채 김삿갓을 바라 보았다.
학동들이 '四覓難關(사멱난관)'이라 부르는 이 시제를 이렇게 멋지게 넘긴 사람은 김삿갓이 처음이라 했고, 훈장도 할 말을 잃은 듯 너털웃음을 터뜨리고 머섬을 불러 저녁상에 주안상을 곁붙이도록 시켰다.
훈 장 "어-허 이런 실례가 많았소이다. 오늘은 우리 집에서 쉬었다 가십시오"
김삿갓은 훈장이 말 한 대로 따뜻한 저녁식사와 술상을 받고, 오랜만에 지붕 아래 따뜻한 방안에서 편안한 잠을 잘 수 있었다.
가사풀이
(解譯)진주관 죽서루 오십천에 내린 물이
태백산 그림자를 동해로 담아가니
차라리 한강으로 향해
목멱(木覓: 남산)에 이르고저.
왕정
(임금을 모시는 일)의 발길은 유한한데
명기 보고 봐도 실증나지 아니하니.
회포도 많고 많아 나그네 시름 끝이 없다.

* '진주'는 삼척의 옛 이름, 진주관은 삼척부(三陟府)에 있던 객관(客館)
가사 배경
송강이 45세에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가사 문학의 대표작인 관동별곡을 지었다.
관동 제일루라고 호칭되는 죽서루는 태백산에서 발원하여 오십천 구비치니흘러 동해로 흐른다.
오십천 물이 옹벽상을 이루는 절벽 위 죽장쪽에 세워졌다.
이 누각의 북쪽으로는 삼척도호부 객사인 진주관과 오벽헌이 있었고,
남쪽으로는 연근당, 서벽당 등의 건물이 있었다.
선인들은 이곳에서 절경에 취하여 많은 시를 읊었다.
생애와 작품
조선조 중종 31년(1536년) 출생, 선조 26년(1593) 사망하였으며,
자는 季涵, 호는 宋江, 시호는 文淸이다.
16세 때 전남 담양으로 옮겨 서예와 학문을 닦아 27세에 문과 장원하였으며,
45세에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하였다.
예조판서, 대사헌 등의 벼슬을 거쳐 선조 22년에 우의정이 되고, 이듬해 좌의정이 되었다,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사미인곡, 성산별곡, 장진주사 등 가사 5편과 단가 77수를 남겼다.
필적과 수결
季涵(계함)은 송강의 자(字)인데, 수결(手決: 싸인)은 모양이 이상한 그림이다.
필적의 글은 단가(短歌: 時調)인 것 같은데 내용은 식별하기가 어렵다.
세움말
여기 이 죽서루와 오십천 냇물은 송강 정철의 가사 관동별곡 가운데 이름 높은 경치로 읊어진 곳이다.
비록 400년 전 일이요 진주관, 서별당도 그 옛 모습을 찾기 어려우나
지금도 저 푸른 냇물과 맑은 바람 속에는 송강 문학의 그윽한 향기가 있나니
이 곳에 작은 돌을 세워 길이 아름다운 노래의 터 임이 되게 하리라.
세운이
이 가사비는 문화부가 1991년 2월을 송강 정철의 달로 삼고, 그 뜻을 기념하기 위하여
다음 분들의 도움을 받아 세운 것이다.
출 연 동양그룹회장 현 재 현
글 씨 원곡 김 기 중
설 계 최 민 희
1991. 2. 28
인증샷
수령 350년 회화나무 보호수
죽서루 구경끝
점심먹을 식당 찾으며 장구경
식당에서 줏은 명언들
[중아함경(中阿含經) ]은 「장아함경」, 「증일아함경」, 「잡아함경」과 함께
원시불교의 교리를 설법한 네 가지 아함경 중의 하나로
4제, 12인연 등을 비롯한 주요 교리와
부처님의 인연담과 그의 제자들이 닦은 불도수행의 여러 가지를 서술하고 있는 불경이다.
죽서루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