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봉우리, 산고수장(山高水長)의 산(山)뿌리, 물(水)뿌리, 불(佛)뿌리 그리고 역사(歷史)의 뿌리
오대산(五臺山, 해발 1563m)
2003. 10. 25. 沙月 李盛永 엮음
백두대간이 설악산과 점봉산을 짓고, 구룡령을 넘으면서 다음 작품 구상에 몇 가지 원칙을 정한다.
첫째는 한반도 중부 내륙으로 크게 뻗치게 될 기맥의 튼튼한 기저(基底)를 마련한다는 것,
둘째는 그 기맥이 백두대간 마루금에 대롱대롱 위험하게 매달리지 않도록 동아줄 매듭처럼 폭 넓고 튼튼하게 붙들어 매어야 한다는 것,
셋째는 아슬아슬한 골산(骨山) 보다는 듬직하고 안정적인 육산(肉山) 이어야 한다는 것 등이다.

이런 원칙 아래 홍천/평창/강릉 지경에 만들어진 산이 장중하고 믿음직한 육산 오대산이다. 큼직한 다섯 개의 산봉우리를 만들어 오대(五臺)를 삼으면서 백두대간 마루금에 두로봉과 동대산으로 매듭을 짓고, 비로봉, 상왕봉, 효령봉은 마루금에서 서쪽으로 약간 벗어난 지점에 놓아 산세가 부드럽고 둔중하며 능선이 겹겹이 쌓아서 골의 깊음을 더하니 그야말로 산고수장(山高水長)을 이루었다.

오대산의 최고봉 비로봉이 비록 백두대간 마루금으로부터 6Km나 서편으로 벗어나 있지만 워낙 산세가 장중하기 때문에 선조들은 황병산, 덕유산, 민주지산 등과 마찬가지로 오대산도 '백두대간의 산'으로 치부해 왔다.

오대산은 한반도의 중심부 심장을 향해 서쪽으로 힘차게 벋은 양수기맥(兩水岐脈: 또는 한강기맥)과 정남으로 내리 뻗어 충주호 북안을 꾸미는 치악기맥(雉岳岐脈)의 산뿌리가 된다.

백두대간 마루금의 오대산 두로봉에서 비로봉, 효령봉을 거쳐 계방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는 서쪽으로 힘차게 뻗어나가면서 북한강과 남한강을 가른다. 이 산줄기에는 계방산(1577m: 남한제5봉), 운두령(1089m), 태기산(1261m), 운무산(980m), 오음산(930m), 중원산(799m), 용문산(1157m), 유명산(864m), 청계산(658m)을 거쳐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양수리까지 먼 거리를 힘차게 달린다. 그러나 선조들은 산경표에 정맥(正脈)의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다. 그 이유는 바다에 이르지 못하고 내륙에서 끝나기 때문이다.

요즈음 산악인들 사이에 이 산줄기에 정맥 이름은 아니더라도 기맥(岐脈)의 이름이라도 지어주자는 주장을 펴는 사람들이 있다. 혹자는 북한강과 남한강을 가르는 분수령이니 '양수기맥(兩水岐脈)'이라 하자는 사람도 있고, 남, 북 한강을 이루는 산줄기이니 그냥 '한강기맥 (漢江岐脈)'이라 하자는 사람도 있다. 아무튼 오대산이 분기시킨 이 산줄기에 대한 산악인들의 애착은 대단하다. 우리나라 서울을 살찌우는 한강을 만들어 주는 북한강과 남한강을 남, 북으로 가르고 또 합치기 때문일 것이다.

이 산의 깊고 그윽한 골짜기가 한강(남한강)을 발원(發源)하니 또한 물뿌리가 된다. 예로부터 오대산의 서대, 장령산(長嶺山: 지금의 효령봉) 아래서 솟아나는 우통수(于筒水)가 한강의 발원이라 전해져 왔다. 근래 와서는 태백의 금대봉(1418m) 검룡소가 한강의 발원이라는 주장이다. 1997년 조선일보사 발행 월간산 별책시리즈 '實戰백두대간종주산행'지도에 태백의 검룡소에 '한강발원지'라고 표기하고 있다.

남한강 상류에 해당하는 평창, 정선, 태백, 영월 일원의 수계를 보면 대체로 다섯 개의 큰 물줄기로 대별할 수 있다.

①황병산에서 발원한 송천이 횡계/용평을 지나면서 멋진 래프팅코스를 만들어주면서 정선선 철도의 종점 구절리를 지나 아우라지에 이르고,

② 석병산에서 발원한 임계천이 청옥/두타산에서 발원한 골지천을 아우르고 역시 아루라지에서 송천을 만나 조양강이 되어 정선으로 향하고,

③ 오대산 효령봉 우통수에서 발원한 물이 수많은 오대산의 골자기의 물들을 모아 오대천이 되어 남류하여 정선 북쪽의 나전교 부근에서 조양강에 합수하고,

④ 태백의 금대봉 검용소에서 발원한 동대천이 서북류하여 정선읍내에서 조양강에 합수하고,

⑤ 태백의 함백산에서 발원한 동남천이 서북류하면서 고한/사북과 태백선 철도에서 정선선이 갈라지는 증산을 지나 정선읍 가수리에서 조양강에 합수하면서 강 이름은 댐 건설 문제를 놓고 국론까지 분열됐던 그 유명한 동강(東江)이 되어 서남류 하여 정선,평창, 영월 지경을 지나 영월 경내로 들어간다. 동강은 영월에서 서강을 만나 합수하면서 강 이름은 남한강(南漢江)이 되어 단양을 향해 남류한다.

대 사찰 월정사와 상원사를 를 비롯하여 오대사(五臺寺: 북대사 미륵암, 서대사 수정암, 동대사 관음암, 남대사 지장암, 중대사 사자암) 그 외에도 상원사, 영감사(또는 史庫寺)등 많은 고찰들이 골짜기 마다 들어 있으니 가히 불문(佛門)의 뿌리라고 해도 될 것이다.

근세에 와서도 방한스님의 불법으로 오대산이 불문의 뿌리를 더 한층 튼튼하게 내렸다.
방한암(方漢巖)선사(1876-1951)는 우리나라 근세 불교사에서 최고의 선승(禪僧)으로 네 차례나 종정에 추대되었으며 단정히 앉은 자세로 열반에 든 이른바 '좌탈선승(坐脫禪僧)'이었다. "천고(千古)에 자취를 감춘 학(鶴)이 될지언정 삼춘(三春)에 말 잘하는 앵무(鸚鵡)의 재주는 배우지 않겠노라"며 1926년 50세로 오대산에 든 이후 입적할 때까지 27년간을 상원사와 중대(사자암)에 머물면서 한번도 산문을 떠난 적이 없다고 한다.
또 6.25 때 군인들이 거부작전(拒否作戰)이라며 상원사 절을 태우려 하자 장삼을 입고 법당에 들어가 단정히 앉아 꼼짝도 않고 있으니 군인들도 불을 지르지 못하고 문짝 몇 개를 떼어 마당에다 쌓아 놓고 불을 질러 상부 명령이행을 가장 함으로서 상원사가 온전히 보존되었다 한다.

오대산은 조선조 선조 때부터 이 깊은 산중에 '오대산사고(五臺山史庫)'를 지어 실록(實錄)을 잘 보존하니 또한 역사뿌리도 되었다.(뒤에 상술)

'오대(五臺)'란 이름이 의미는 두 가지에서 찾는다.
하나는 비로봉(毘盧峰,1563m), 효령봉(1560m), 상왕봉(象王峰,1493m), 두로봉(頭爐峰,1421m), 동대산(東臺山,1433m) 다섯 봉우리가 각각 대(臺: 사방을 멀리 바라 볼 수 있게 솟아오른 곳)를 이루고 있어 오대라 하였다.

오대산의 제1봉 비로봉(毘盧峰) 이름의 '비로'는 불가의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부처를 말한다. 연화장세계(蓮花藏世界)에 살면서 그의 몸은 법계(法界)에 두루 차서 큰 광명을 내비추어 중생을 제도하는 부처라 한다.
또 문수보살은 여러 모습을 하고 있으나 연화대에 앉아 오른손에는 지혜의 칼, 왼손에는 지혜의 그림이 있는 푸른 연꽃을 들고 있는 모습이 표준이다.
오대산에는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1만의 문수보살이 상주한다는 이른바 신라 보천태자의 '오대산 신앙'에서 제1봉을 비로자나불로 이름하였다는 것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오대산 '오대'는'동대 만월산(滿月山), 남대 기린산(麒麟山), 서대 장령산(長嶺山), 북대 상왕산(象王山), 중대 풍로산(風爐山 또는 地爐山)'이라 기록하고 있고,
조선 숙종 연간에 학자 이만부 선생이 지은 지행록(地行錄)에 따르면 당시 오대산의 오대를 삼국유사와 유사하게 만월봉(滿月峯: 동대), 장령(長嶺: 서대), 기린봉(麒麟峯: 남대), 상왕봉(象王峯: 북대), 지로봉(地爐峯: 중대)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상원사 뒤 계곡에서 올려다 본 오대산 최고봉 비로봉
오대산 비로봉 정상 표석
상왕봉에서 서쪽으로 바라 본 비로봉(오른쪽)과 효령봉(왼쪽)
비로봉에서 동쪽으로 바라 본 상왕봉(앞 오른쪽)과 두로봉(뒤)
두로봉을 좌우로 연하는 능선이 백두대간이다
비로봉에서 바라 본 동대산
동대산 너머로 황병산(오른쪽), 소황병산(가운데), 노인봉(왼쪽)이 보인다.
다른 하나의 '오대(五臺)'란의 이름은 관음암(동대), 수정암(서대), 미륵암(북대), 지장암(남대), 사자암(중대)의 다섯 사찰에서 유래된 것이다. 오대산은 부드러운 육산(肉山)과 아람드리 노거수 (老巨樹)들이 이루는 수풀이 외면적 상징인 반면 내면적으로는 불교적 정신 유산이다.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慈藏律師)가 당나라 청량산(淸凉山)에서 기도할 때 문수보살이 현신하여 가사와 불두골(佛頭骨)을 주며 '동방 명주(명주: 지금의 강릉 일대) 지경에 오대산이 있는데 1만의 문수가 항상 그 곳에 주(駐)하고 있으니 가서 봐라'고 했다고 삼국유사에 전한다. 자장은 부처의 가사와 사리를 받아 돌아 온 직후 서기 643년 월정사와 적멸보궁(寂滅寶宮)을 짓고, 이후 1300여년 동안 동,서,남,북, 중앙 에 오대의 절을 짓는 등 그 많은 불사를 일으켜 불교가 크게 성하였다.

적멸보궁
또 신라 때 보천태자와 효명태자 형제가 함께 매일 아침 차를 달여 1만 문수를 공양했다는 기록이 있고, 조선조 태조와 세조가 이 곳 상원사를 원찰(願刹)로 삼았다고 한다.

1975년에 오대산과 노인봉 및 소금강을 묶어 덕유산 다음 아홉 번째로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는데 크게 두 지역으로 구분된다. 하나는 오대산월정사지역과 노인봉소금강지역이다. 영서(嶺西)에 속하는 월정사지역은 내륙성 기후를 띄고, 영동(嶺東)인 소금강지역은 해양성기후로 이 두 지역은 서로 가까이 있지만 기온, 강수량, 안개 등에서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정상에서의 조망
북쪽: 계방천 구비를 따라 돌아 양양으로 향하는 56번국도가 구룡령에서 백두대간을 너머로 꼬리를 감추고, 그 너머로 까마득히 먼 하늘금에 점봉산이 보일락 말락 하고, 그 동쪽에 설악산의 대청봉-중청봉-끝청봉-귀때기청봉으로 이어지는 서북주능선, 서쪽에 한계령에서 서남으로 벋은 가리능선의 끝 가리봉이 선명하게 보인다.
비로봉에서 북쪽 전망
서쪽: 발 밑에 반달곰이 살았다는 '을수골'이 가로 놓이고, 남쪽 끝머리에 계방산, 운두령을 지나 서쪽으로 힘차게 달리는 양수기맥(한강기맥)이 구비친다.

남쪽: 계방산에서 치악기맥이 양수기맥에서 남쪽으로 가리왕산을 향하고, 황병산에서 백두대간을 떠난 발왕산을 향해 남쪽으로 달린다.

동쪽: 비로봉에서는 동쪽으로 두로봉을 정동으로하여 북쪽으로 만월봉-응복산-약수산-구룡령, 남쪽으로 동대상- 노인봉- 소황병산으로 연결되는 백두대간이 하늘금을 그리면서 구비친다.

상원사의 세조 관련 유적
조선왕조는 유학을 근간으로 하였지만 특히 세조는 불가에 대하여 많은 애착을 가졌던 왕이었다. 수양대군으로 있을 때 부왕 세종의 명을 받아 석가보(釋迦譜), 법화경(法華經), 지장경(地藏經), 아마타경(阿彌陀經) 등 불경에서 인용하여 석가의 일대기를 엮은 석보상절(釋譜詳節)을 편저하였고, 왕위에 오른 후에는 석보상절과 세종이 간행한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을 합편하여 월일석보 (月印釋譜)를 간행하였는데 이는 훈민정음 창제 이후 제일 먼저 나온 불경언해서로서 당시 말과 글자가 그대로 보존하고 있기 때문에 국어사에서 귀중한 문헌으로 취급되고 있다.

세조는 자신의 피부병이 인연이 되어 상원사에 많은 유적을 남겼다.

(1) 관대(冠帶)걸이

세조가 피부병 때문에 전국 유명한 온천과 약수를 찾아 목욕을 했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온양온천, 속리산 복천사(福泉寺), 그리고 이 곳 오대산 상원사가 꼽힌다. 이 상원사 관대걸이는 세조가 목욕을 할 때 의관을 걸어 두던 곳이다.

전설에 따르면 세조가 목욕을 하는데 한 동자가 지나가기에 동자보고 등을 좀 밀어 달라 하였다. 동자는 세조의 등이 부스럼으로 흉스럽게 되어 있는 것을 보고도 전혀 개의치 않고 아주 시원하게 등을 밀어 주었다. 목욕을 끝 낸 세조가 동자에게
"너 이후로 내 등(피부병)에 관한 일을 세상 사람들에게 절대로 이야기 하지 말라"하였다. 동자가 그러겠노라고 약속하면서 말하기를
"어르신네는 오늘 문수보살을 만났다는 이야기를 세상 사람들에게 절대로 이야기하지 마십시요" 하였다 한다. 그러니까 세조의 등을 밀어준 동자는 곧 문수보살이었다는 이야기다.(조용수 설명) 문수보살은 인간을 좋은 길로 인도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형상을 나타나는 부처라고 한다.

지금은 관대걸이가 있는 이 부근을 '관대걸이쉼터'라 하여 큰 주차장과 기념품가개, 화장실 등이 들어서 있고, 가을철이면 평일에도 관광버스가 큰 주차장을 꽉 메울 정도로 번잡하지만 조선 세조 당시는 그야말로 심심산중 한적한 곳이었을 것이다.

효령봉 중턱까지 올라야 하는 우통수까지 갈 수는 없고, 우통수 맑고 질 좋은 물이 흘러내려오는 이 곳에서 세조가 피부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관과 옷을 벗어 관대걸이에 걸어놓고 목욕을 했을 법도 하다.

(2) 목조문수동자좌상(木彫文殊童子坐像)

높이 98Cm, 국보제36호. 위 전설에 관련하여 세조12년(1466)에 왕실에서 제작하여 이 곳 상원사에 봉안한 것이라 전한다.(법당이 2중 문으로 되어 있고, 문을 닫고 불자들이 염불하고 있어서 아쉽게도 사진을 찍지 못했다)
목조문수동자좌상과 복장유물 ‘세조의 피고름 묻은 적삼”(2005. 6. 6.조선일보 A25면)
해인사 비로자나佛 ‘국내 最古’확인 어떻게--- 부처님 배 속이 역사를 바꿨다

(관련기사) 지금까지 국내에서 나온 복장유물은 옷과 오곡, 오색실, 경전 등이 있다. 복장(유물)은 후세 사람들에게 당시의 시대상을 알려주는 ‘타임캡슐’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가장드라마틱한 이야기를 남긴 복장유물은 1984년 강원도 오대산 상원사 문수동자(1466년 제작)상에서 나온 ‘세조의 피고름 묻은 적삼’. 세조의 딸인 의숙공주가 1466년 세조의 건강과 자신의 득남(得男)을 바라며 기록한 발원문 등과 함께 피고름이 묻은 적삼이 나왔다. 덕분에, 세조가 문수동자를 만나 등창을 고쳤다는 이야기는 500년 만에 ‘전설’에서 ‘사실’로 승격했다.
(3) 고양이 석상(猫像)
세조가 목욕을 끝낸 후 상원사 법당으로 들려고 하는데 난데없이 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나 세조의 바지자락을 물고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세조는 언뜻 집히는 것이 있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멈추고 호위한 군사들로 하여금 법당 안을 수색하도록 하였는데 불상 뒤에 숨어 있는 복면한 자객을 찾아 냈다고 한다.

그래서 고양이에게 고마움의 표상으로 법당 앞에 고양이석상(猫像)을 만들어 놓고, 또 고양이에게 전답을 이 곳과 서울에 내렸는데 이 것을 묘답(猫沓)이라 한단다.(조용수 법사 설명)

(4) 중창 권선문(重創 勸善文)

조선 세조10년(1464) 세조가 혜각존자 등이 상원사를 중수한다는 말을 듣고, 이를 돕고자 왕비와 더불어 쌀, 베, 쇠 등을 보낸 발원문으로 월정사에 보관 되어 있는데 2부로 1책은 한문으로 된 권선문과 원문 다음에 왕과 왕세자의 화압(手決)과 주인(도장)이 있고, 효령대군을 비롯한 종실과 신하들의 화압과 자서가 있고, 다른 1책은 권선문과 원문을 한문과 한글로 쓰고 세조, 왕비윤씨, 왕세자, 왕자, 세자빈 한씨 등 내궁 부인들의 주인이 있다.(보물104호)

(5) 상원사 동종(銅鐘)

신라 성덕왕 24년(서기725년)에 만들어진 높이167Cm, 직경 91Cm의 국보36호. 이 종은 원통형으로 그 표면은 하절(下節)은 앙판(仰瓣)과 복판(伏瓣)으로 둘리고, 보상화문 (寶狀花文)의 띠를 둘렸으며, 중절(中節)은 섬세한 당초지문(唐草地文)에 복연화문(覆蓮花文)을 배열한 띠를 둘렀고, 상절(上節)은 앙판을 두르고 소연화문(小蓮花文)의 띠로 둘렀다. 이 종을 더욱 우수하게 평가하는 것은 두 쌍의 비천도(飛天圖)이다.

이 종은 연화문과 당초문의 조화미와 소리의 웅장함이 높이 평가되어 왔으며, 성덕왕신종(에밀레종) 보다 45년 앞 선 것으로 현존 유물 중에서는 최고(最古)의 종이다. 영가지(永嘉誌)에 의하면 이 종은 원래 안동에 있었는데 조선 세조 때 이 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상원사 동종각과 안내문
오대산사고(五臺山史庫)
조선시대 실록을 보관하던 서고(書庫)로서 조선초기의 사고 중 춘추관, 충주, 성주 사고사 소실되고 전주 사고만 남자 선조39년(1606)에 다시 지어 전주사고의 실록을 대본으로 4부를 간행하여 1부를 이곳 오대산에 보관하다가 일제 때 일본으로 옮겨가 도쿄대학에 보관하다가 관동대지진 때 소실되었다. 조선조 때 사고로 지은 곳이 지금의 월정사와 상원사 중간쯤의 영감사(靈鑑寺 일명 史庫寺)이다.
영감사(사고사) 사고각(史庫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