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애사와 충절의 고장 영월(寧越)
<미리 가보는 아사달동기회 2008가을나들이코스>
沙月 李 盛 永(2008.10.18)
주천면 다하누촌(중식)
한반도모양 지형
단종애사 현장 장릉(莊陵)과 청령포(淸령浦)

▶ 영월(寧越)의 역사
    영월(寧越)은 강원도 남부에 위치하며,

    본래 고구려의 내생군(奈生郡)이며,
    신라 때 내성군(奈城郡)이었다.
    고려 초 영월현(寧越縣)으로 고쳐 원주(原州)에 소속 되었다가 공민왕 21년(1372) 영월군(寧越郡)으로 승격하여 공양왕1년(1389)에 충청도에서 강원도로 이관되었다.
    조선 숙종24년(1698) 영월부(寧越府: 都護府)로 승격되었다가, 고종32년(1895) 다시 영월군(寧越郡)으로

    2개읍 7개면, 1,127평방Km에 17,159가구, 48,595명(2007년)이 살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영월군 요도
▶ 영월(寧越) 팔경(八景)
         稽山宿霧(계산숙무) 아침 안개 속에 우뚝 솟아오른 계족산(稽足山)
         錦江秋月(금강추월) 밝은 가을 달빛이 비치는 금강정(錦江亭)
         報德暮鐘(보덕모종) 저녁 종소리 은은히 들려오는 보덕사(報德寺)
         蓬萊彩雲(봉래채운) 아롱진 채색 구름 이는 영월의 주산 봉래산(蓬萊山)
         鳳沼歸帆(봉소귀범) 서울 갔다 돌아오는 돛단배가 떠 있는 금봉연(錦鳳淵)
         영浦杜鵑(영포두견) 두견화 만발하고, 두견새 슬피 우는 청령포(淸령浦)
         泰華丹楓(태화단풍) 단풍이 짙게 물든 태화산(泰華山)
         劍閣蒼松(검각창송) 칼을 세운 듯한 검각치(劍閣峙=각한치)에 눈 덮인 소나무
영월읍내 관풍헌에서 바라보는 봉래산(800m)
서강 북안에서 건너다 보는 청령포
청령포 서강 북안에서 바라보는 태화산(1027m)
◆ 영월로 가는 길목
▶ 중앙고속도로 치악휴게소
중앙고속도로 치악휴게소(위)와 치악산 남대봉 줄기(아래)
▶ 다하누촌
    영월군 주천면 주천리(면소재지,인구700여명)속칭 원래 이름이‘섭다리마을’이 2007.8.11. 한우직거래장터를 열면서 농가에서 한우를 직접 사들여 전용도축장에서 잡은 고기를 직접 소비자에게 싸게 팔면서 ‘한우만 판다’는 뜻으로 「다하누」란 브랜드를 달면서 사람들에게 ‘다하누촌’으로 불리게 되었다.

    평일 2,000명, 주말 5,000명의 외지인이 찾아와 불과 13개월 동안에 140만명이 다녀갔다. 전에는 큰 식당도 1일 3-4만원 매상이 지금은 100-200만원의 매상을 올린다.

    등심, 안심, 갈빗살 차돌박이로 구성된 1등급 600g 한근에 28,000원으로 도시 대형마트 가격의 30-40%가 싼 값에 팔린다.
다하누촌 정육점
다하누촌에서는 한우고기 판매와 음식점은 완전 분업화 되어 있다.
그곳에서 한우고기를 먹고 싶으면 정육점에서 고기를 사서 음식점으로 간다.
정육점을 중심으로 4-5개 음식점이 한 팀으로 되어 있는 것 같다.
▶ 주천면 판운리 섭다리(이번 나들이코스에 제외)
섭다리마을 가는 평창강변길
섭다리 건너 ‘미다리마을’
미다리마을로 건너가는 상류의 차량교
섭다리 입구와 출구
섭다리
차량교와 도보교(섭다리)가 한눈에
평창강에 다슬기 잡는 사람
▶‘한반도모양’지형
    영월 주천면 사정리 선암마을 앞 평창강이 급히 회돌이치면서 한반도 모양의 지형을 만들고 있다.

    지형이 묘하기도 하려니와 맑은 평창강물과 강 위에 걸려있는 섭다리, 사방 아름다운 산, 아늑한 마을, 현대시멘트 공장의 굴뚝 등이 어울려 한 폭의 그림을 연출하고 있다.

    영월책박물관 앞 88국도에서 약 5Km(약 2Km는 비포장도로)를 들어가고, 약10분 걷지만 영월군에서 길을 잘 정비하여 산보코스로 안성맞춤이다.
걸어가는 길 입구
이곳에서 전망대까지는 600m에 천천히 걸어서 10분
언덕 위에 돌탑
전망대에서 내려다 보는 한반도모양 지형
비치해 놓은 한반도 지도와 꼭 같다.
선암마을
선암마을 섭다리
선암마을 너머로 보이는 현대시멘트공장
석회석 광석 채굴 후 복구한 듯
▶소나기재 선돌(시간 여유가 있으면 잠시 쉬면서 보고 갈 계획)
소나기재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선돌
선돌 뒤 배경이 된 강은 평창강과 주천강이 합친 서강(西江)이다.
검각치, 청령포 앞을 지나 동쪽으로 흘러 두물머리(錦鳳淵)에서 동강(東江)과 만나 남한강(南漢江)이 된다.
◆ 영월의 단종애사 관련유적
▶ 단종(端宗) 애사(哀史)
    - 세종23년(1441)-세조3년(1457), 壽17세, 조선 제5대문종의 독자, 諱 홍위(弘暐), 8세(세종31년,1448) 왕세손(王世孫) 책봉, 10세(문종원년,1450) 세자(世子) 책봉, 12세(1452) 제6대왕 등극, 재위3년.

    -문종은 죽을 때 세자가 어린 것을 염려하여 황보인(皇甫仁:領相), 김종서(金宗瑞:左相), 정분(鄭?:右相) 등 원로들에게 단종을 잘 보필할 것과 성삼문(成三問), 신숙주(申叔舟), 박팽년(朴彭年) 등 신진들에게 좌우 협찬을 부탁하는 유언.

    -그러나 숙부 수양대군(首陽大君)은 정인지(鄭麟趾), 한명회(韓明澮), 권람(權擥) 등과 결탁하여 황보인, 김종서, 정분 등을 암살하고, 그 외에도 많은 의심스러운 사람들을 제거하면서 왕을 위압하여 왕위를 강탈하여 제7대왕에 등극.

    -세조1년(1455) 성삼문, 박팽년 등 세칭 사육신(死六臣)이 주동이 되어 단종 복위를 모의하다가 동료 김질(金石質)의 배반으로 발각되어 참형.

    -세조3년(1457) 6월 단종을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 영월(寧越) 청령포로 유배, 8월 큰 홍수로 관풍헌(觀風軒)으로 옮김

    -그해 가을 금성대군(錦城大君: 李瑜)가 경상도 순흥(順興)에서 단종복위를 모의하다가 발각, 노산군을 서인(庶人)으로 강등,

    -그해 12월 24일 영월에서 세조가 내린 사약을 받아 승하.

    -사사(賜死)후 이곳 호장(戶長) 엄홍도(엄홍도)가 시신을 수습하여 암매장하고 도피, 중종36연(1541) 영월 군수(郡守)로 나온 낙촌(駱村) 박충원(朴忠元)은 엄홍도가 단종의 시신을 암장한 묘를 찾아 내어 현 위치에 치제(致祭)

    -숙종 때 노산대군(魯山大君)으로 추봉(追封), 이어 복위(復位: 임금 복권) 하여 묘호(廟號)를 단종(端宗), 능호를 장릉(莊陵).

    -조선조 선비들 중에는 수양대군의 패륜(悖倫)에 분개하여 일생 동안 벼슬에 나가지 않고 숨어서 산 김시습(金時習) 등 생육신(生六臣)도 있다.
▶ 단종릉 장릉(莊陵)과 경내 단종애사 유적
장릉(莊陵) 가는 길
장릉(莊陵) 전경
    장릉(莊陵)은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에 있는, 조선제6대 임금 단종의 능(사적 제196호), 숙종 때 복위(復位: 임금 복권) 되면서 묘호(廟號)를 단종(端宗), 능호를 장릉(莊陵)이라 하였다.
    영조9년(1733) 세운 단종비에는「朝鮮國端宗大王莊陵」이라 새겨져 있다.
    경내에는 단종비각, 정자각, 장판옥과 배식단, 영천, 엄홍도 충신정려각, 박충원 낙촌비각 등의 유적이 있고, 단종역사관이 있다.
    영월군민들은 매년 4월 한식날(5-6일)에 조선왕조 500년 동안 가장 슬픈 역사의 화신이 된 단종의 고혼과 충신들의 넋을 기리는 단종문화제(端宗文化祭)를 봉행한다.

‘장릉에 참배하면 좋은 일이 생긴다.’
    오래 전부터 장릉에 가볍게 참배만 했는데 관직의 앞길이 활짝 열렸다는 사람, 아들을 낳았다는 사람 등 일이 잘 풀렸다는 사람이 많다. 단종이 자기 시신을 잘 거둬준 영월에 대한 보답이란다.
    장릉 참배시 유의할 것은 경건한 마음으로 임금에 대한 예로 ‘사배(四拜)’를 올리면서 소원을 비는 것이다.
(영월군 홍보책자)
    * 그런데 참배 할만한 장소가 없다. 그저 그저--- 맘 속으로 비는 수 밖에 없다.
정자각(丁字閣)과 단종영정(端宗影幀)
    한식날 단종제(端宗祭)를 올리는 곳으로 丁자 모양으로 되었기 때문에 정자각(丁字閣)이라 하며, 배위청(拜位廳)이라고도 부른다. 정자각내 오른쪽에 단종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단종비각(端宗碑閣)
    숙종24년(1698) 노산묘(魯山墓)를 장릉(莊陵)으로 추봉하면서 세운 비각이다. 비 전면에는 「朝鮮國端宗大王莊陵」(조선국단종대왕장릉)이라 새겨졌고, 뒷면에는 단종의 생애가 기록되어 있다.
장판옥(藏版屋)(왼쪽)과 배식단(配食壇)(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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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판옥은 정조5년(1781) 정조의 어명으로 건립된 건물로 단종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충신(忠臣) 32인, 조사(朝士) 186인, 환자군노(宦者軍奴) 44인, 여인(女人) 6인 계 268인의 위패(位牌)를 봉안하고 있다.

    배식단은 장판옥에 모신분들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하여 매년 한식날 단종제 후 제사를 올리는 제단이다.
영천(靈泉)
    단종제 때 물을 쓰는 우물 정조15년(1791)에 박팽년의 후손인 영월부사 박기정(朴基正)이 수축하고, 조정에 보고하여 장릉제정(莊陵祭井)으로 칭하였다.

    보통 때는 물이 적게 나지만 한식 때 단종제를 지낼 때는 많이 용출하여 영천(靈泉)이란 표석을 세웠다 한다
엄홍도충신정려각(왼쪽)과 박충원낙촌비각(오른쪽)
    엄홍도충신정려각(嚴興道忠臣旌閭閣)은 엄홍도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영조2년(1726)에 충신(忠臣)에 정려하고 세운 정려각이다.
    엄흥도(嚴興道)는 단종 때 영월 호장(戶長: 향리의 으뜸, 村主).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 관풍헌에 유배중 세조3년(1457) 10월 24일 사약을 받아 승하하여 시신은 강물에 버려졌다.
    단종의 시신을 거두는 자 삼족을 멸한다는 어명이 내려졌으나 엄홍도는 세 아들과 함께 밤중에 남몰래 자기 어머니가 죽으면 쓸려고 만들어 놓은 관(棺)에 단종의 시신을 수습하여 현 장릉 위치에 암매장하고 고향을 떠나버렸다.직암(直庵) 윤사국(尹師國)이 비문을 짓고, 글씨도 썼다.

    낙촌비각(駱村碑閣)은 대한민국 1972년에 박충원(朴忠元)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이다.
    낙촌(駱村) 박충원(朴忠元)은 중종26년(1531)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들어 영월군수로 재직시 어느 날 꿈에 단종이 나타나 묘(墓)를 찾아달라 하여 엄홍도의 후손과 함께 중종36연(1541)에 엄홍도가 암장했던 묘를 현 장릉의 위치에서 찾아 묘를 수축하고, 제사를 지냈다.
▶단종의 최초 유배지 「청령포(淸령浦)」
서강 북안에서 바라보는 청령포
    청령포(淸령浦)는 영월읍내에서 서쪽으로 3km쯤 떨어져 있으며, 남한강 상류의 지류인 서강(西江)이 곡류(曲流)하여 반도 모양의 지형을 이루었다.
    동, 북, 서쪽이 깊은 물로 막히고 육지와 이어지는 남쪽은 육륙봉의 층암절벽으로 막혀 있다. 그 때문에 이곳에 유배되었던 단종(端宗)이 '육지고도(陸地孤島)'라고 표현했다고 한다.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된 단종이 이곳에 유배된 것은 세조 3년(1457) 6월이었다.

    청령포에는 단종이 그곳에서 유배생활을 했음을 말해주는 유지비(遺址碑)와 복원된 어소(御所: 임금이 머무는 곳). 청령포 출입을 금하는 금표비(禁標碑)가 있다.

    단종이 걸터앉아 시름을 달랬다는 관음송(觀音松)이 낙낙장송으로 자라 있고, 단종이 자주 올라가 서울 쪽을 바라보며 망향(望鄕)의 한을 달랬다는 노산대(魯山臺)와 단종이 오르내리면서 돌을 가져다 쌓았다는 돌탑 망향탑(望鄕塔)이 서쪽 절벽 위에 서 있다.

    청령포를 건너다 보는 서강 북안에는 단종을 유배지 청령포로 호송하고 돌아가던 금부도사 왕방연(王邦衍)이 지은 시조(時調)를 새긴 시조비(時調碑)가 있다.
서강 도강
도강하는 데는 불과 5분, 배가 접안에서 떠나 돌아서면 강심
돌아가는 나룻배
인원수에 관계없이 승객만 있으면 언제나 왕복한다.
청령포
현위치 - 단종어소 - 관음송 - 망향탑 - 노산대 - 금표비
단종어소(端宗御所)와 유지비각
부속건물
시중들던 궁녀와 관노들이 기거하던 집
유지비(遺址碑)
    단종어소(端宗御所)는 세조3년(1457) 6월 22일 조선 제 6대 임금인 단종대왕이 영월로 유배되어 처음 유배생활을 하던 곳이며, 3개월 정도 있다가 큰 홍수로 영월 읍내 관풍헌(觀風軒)으로 옮겨 유배생활을 하다가 세조의 사약글 받고 승하하였다.

    당시의 단종어소는 소실되고, 영조 39년 (1763년)에 이 유지비(遺址碑)를 세워 어소 위치를 전하다가 후에 복원하였다.

    전면의「端廟在本府時遺址碑」(단묘재본부시유지비)‘단종 임금께서 본 영월부(寧越府: 寧越都護府)에 계실 때의 옛 자취가 남아 있는 터를 표지하는 비석’이라는 뜻이다.

    후면의「歲皇明崇禎戊辰紀元後三癸未季秋涕敬書令原營竪石 淸 水변令 浦」(세황명숭정무진기원후삼계미계추체경서령원영수석 청령포)‘때는 명 황제(毅宗)의 숭정(崇禎) 연호가 시작된 무진년(戊辰年: 조선 인조6년, 서기1628년) 후 세 번 째 계미년(癸未年: 순조23년, 서기 1823년, 淸 宣宗 道光 2년) 늦가을에 공경하는 마음으로 울면서 글을 써서 원영(原營 ?)으로 하여금 청령포에 빗돌을 세운다.’는 뜻이다.
관음송(觀音松)
                               
    관음송(觀音松)은 영월의 청령포 안에서 자라고 있는 소나무로, 나이는 600년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30m, 가슴높이 둘레 5m의 크기로 1.2m되는 높이에서 줄기가 두 갈래로 갈라져 하나는 위로 하나는 서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자라고 있다.

    이곳에 유배된 15세의 단종은 유배생활을 하면서 둘로 갈라진 이 나무의 줄기에 걸터앉아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관음송(觀音松)이라는 이름은 단종의 애틋한 모습을 지켜보았다고 해서 ‘볼 관(觀)’자를, 단종의 슬픈 말소리를 들었다 하여 ‘소리 음(音)’자를 따서 붙인 것이라고 한다.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나무의 껍질이 검은색으로 변하여 나라의 변고를 알려 주었다 하여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를 귀하게 여기고 있다. 영월의 관음송은 단종과 관련된 전설을 가지고 있는 등 역사적, 학술적 자료로서의 보존가치가 인정되어 천연기념물 제349호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망향탑(望鄕塔)
    단종이 이곳 청령포에서 귀양살이할 때 왕비 송씨를 생각하시면서 주위에서 돌들을 주워 날라다 쌓아 올렸는데 이것이 '고향을 그리며 쌓은 탑' 이란 뜻으로 망향탑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1974년 영월군수 금명한의 주선으로 허물어졌던 돌탑을 다시 복원하였다고 한다.
노산대(魯山臺)
    단종(端宗)이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되어 이곳 청령포에서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자주 청령포 서편 서강의 깎아지른 절벽 위 높은 곳에 올라 서울쪽을 바라보며 시름에 잠겼는데 후세 사람들은 이곳을 노산대(魯山臺)라 명명하고 돌에 새겼다.

    지금은 위험하다고 출입을 금하고 있다(오른쪽)
금표비(禁標碑) 옆과 앞
    금표비(禁標碑)는 청령포에 출입을 금하는 표지로 전면에 「淸?浦禁標」(청령포금표)라 기록되어있고, 후면에는 「東西三百尺南北四百九十尺」(동서삼백척남북사백구십척)이라고 그 출입금지 범위를 기록하고 있다
왕방연(王邦衍)의 시조비(時調碑)
    세조3년(1457)10월24일 금부도사(禁府都事) 왕방연(王邦衍)이 단종께 사약을 진언하고 돌아가는 길에 비통한 심경으로 청령포를 바라보며 시조를 읊었던 곳에 세운 시조비다.

    광해9년(1617) 병조참의 용계(龍溪) 김지남(金止男)이 영월 순시 때 아이들이 노랫가락에 맞춰 부르는 것을 듣고 한시로 옮겨 후세에 전했다 한다./TD>
▶ 이송된 단종 유배지 관풍헌과 자규루(이번 탐방에는 제외)
    세조 3년(1457) 여름에 서강이 범람하여 청령포 일대가 침수되자 8월에 영월부의 객사인 관풍헌(觀風軒)으로 처소를 옮겼다.
관풍헌(觀風軒)
위 사진 뒤로 보이는 산이 영월팔경의 하나 봉래산
    관풍헌(觀風軒)은 영월군(寧越郡) 동헌(東軒: 군수가 집무하는 건물)에 딸린 객사(客舍)로서 조선 태조7년(1398)에 건립되었다고 전해진다.

    단종(端宗)이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되어 청령포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중 큰 홍수가 나자 이를 피해서 이곳으로 옮겨 유배생활을 계속 하다가 세조3년(1457) 10월 24일 세조가 내린 사약을 받아 이곳에서 승하하였다.

    또 조선조 말기 방랑시인 김삿갓(본명은 炳淵 병연, 호는 蘭皐 난고)이 이곳에서 치룬 백일장에서 제시된 시제(詩題)의 인물 전 선천부사 김익순(金益淳)을 신랄하게 지탄을 한 시를 지어 장원을 하였는데, 후에 그 인물이 바로 자신의 조부(祖父)인 것을 알고 자책과 통한을 이기지 못하여 ‘하늘을 볼 수 없다’ 하여 늘 삿갓을 쓰고 방랑 길에 나섰다고 한다.

    * 김익순(金益淳): 순조11년(1811) 홍경래가 난을 일으켜 관서 지방을 장악하자 선천부사로서 즉시 항복하고, 홍경래의 사령장을 받았다. 후에 홍경래가 관군에 잡히게 되자 그는 자기 죄를 면하려고 돈 천냥을 주기로 하고 농민 조문형(趙文亨)을 시켜 자고 있는 적장(賊將) 김창시(金昌始)를 목 베어 자기가 죽인 양 꾸며서 조정에 바쳤으나, 약속한 돈을 지불하지 않자 조문형이 고발하여 사형을 당했다.
* 전(殿) - 당(堂) - 합(閤) - 각(閣) - 재(齋) - 헌(軒) - 루(樓) - 정(亭)
자규루(子規樓: 앞)와 매죽루(梅竹樓: 뒤) 현판
한 누각에 앞과 뒤 현판이 다르다.
    자규루 (子規樓)는 영월군(寧越郡) 영월읍 영흥리(永興里) 관풍헌에서 동쪽으로 약 70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조선시대 누각(樓閣)이다.

    세종 10년 (1428)에 영월군수 신권근(申權近)이 창건하여 매죽루(梅竹樓)라 이름을 지었는데, 이곳에 귀양 온 단종(端宗)이 관풍헌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이 누각에 올라 피를 토하며 운다는 자규(子規: 소쩍새)를 자신의 처지와 빗대어 「子規詞(자규사)」 와 위 「子規詩(자규시)」를 읊은 것을 계기로 이름을 자규루(子規樓)로 바꾸었다고 한다.

    선조 38年(1605) 대 홍수로 누각이 폐허가 되었는데, 정조 15년(1791) 강원도관찰사 윤사국(尹師國: 1728-1809)이 영월을 순찰할 때 옛 터를 찾아내어 중건케 하여 단종의 「子規詞(자규사)」를 봉안하였다.

    이복원(李福源)이 지은 누기(樓記)를 윤사국이 직접 쓰고, 채제공(蔡濟恭)이 지은 상량문을 이동욱(李東郁)이 썼다. 이 누기와 상량문의 탁본을 모은 책 자규루첩(子規樓帖)이 전해진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층 누마루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강원도유형문화재 제26호.
자규루에 봉안한 「子規詞(자규사)」
端宗御製子規詞(단종어제자규사)
    月白夜蜀魂?(월백야촉혼추) 달 밝은 밤 杜鵑(두견)새 울 제
    含愁情倚樓頭(함수정의루두) 시름 못잊어 樓(루)머리에 기대어 있노라
    爾啼悲我聞苦(이제비아문고) 네 을름 슬프니 내 듣기 괴롭도다
    無爾聲無我愁(무이성무아수) 네소리 없었던들 내시름 없을 것을
    寄語世上苦勞人(기어세상고로인) 世上(세상) 근심 많은 분들에게 이르노니
    愼莫登春三月子規樓(신막등춘삼월자규루) 부디 春三月(춘삼월) 子規樓(자규루)에는 오르지 마오
단종어제(端宗御製) 자규시(子規詩) - 영월관광 홍보물에서 -
    一自寃禽出帝宮(일자원금출제궁) 한 마리 원한 맺힌 새가 궁중을 나온 뒤로
    孤身隻影碧山中(고신척영벽산중) 외로운 몸 짝 없는 그림자 푸른 산 속을 헤맨다
    假眠夜夜眠無假(가면야야면무가) 밤이 가고 밤이 와도 잠을 못 이루고
    窮恨年年恨不窮(궁한연년한불궁) 해가 가고 해가 와도 한은 끝이 없구나
    聲斷曉岑殘月白(성단효잠잔월백) 두견새 소리 끊긴 새벽 멧부리엔 달빛만 희고
    血流春谷落花紅(혈류춘곡낙화홍) 피 뿌린 듯한 봄 골짜기에 지는 꽃만 붉구나
    天聾尙未聞哀訴(천롱상미문애소) 하늘은 귀머거린가 슬픈 이 하소연 어이 못듣고
    何乃愁人耳獨聰(하내수인이독총) 어찌 수심 많은 이 사람의 귀만 홀로 밝은가
▶ 기타 단종애사 관련 유적(이번 탐방 제외)
보덕사(報德寺)(왼쪽)와 금몽암(禁夢庵)(오른쪽)
    보덕사(報德寺)는 신라 문무왕 때안 서기 668년 의상조사(義湘祖師)가 창건하여 지덕사(旨德寺)라 하였고, 고려 원경국사(元敬國師)가 중수하고, 조선조에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하여 영월로 유배되자 절 이름을 노릉사(魯陵寺)라 개명하였고, 숙종31년(1705) 장릉보덕사(莊陵報德寺)로 개칭하였고, 영조 때 보덕사(報德寺)로 개칭하여 장릉(莊陵)능사(陵寺)로 삼았다.

    금몽암(禁夢庵) 은신라 문무왕20년(680) 의상조사가 창건한 암자, 원래는 지덕암(旨德庵)이었으나 단종이 궁중생활을 할 때 꿈에 보았던 암자와 흡사하다 하여 금몽암(禁夢庵)으로 개명하였다.
충절사(忠節祠)(왼쪽)와 창절사(彰節祠)(오른쪽)
    충절사(忠節祠)는 영월지역 출신의 충신 엄흥도(嚴興道), 정사종, 추익한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창절사(彰節祠)는 박팽년, 성삼문, 이개, 유성원, 하위지, 유응부사육신(死六臣)생육신(生六臣)김시습, 남효온 그리고 충신 박심문, 엄홍도 등 10분의 위패를 모신 숙종의 사액사당(賜額祀堂)이다.
    '창절사(彰節祠)'란 불의에 항거하고, 대의를 따르며, 비장한 최후를 마친 사육신 등의 절개(節)를 길이 표창(彰)한다는 뜻이다.
낙화암(落花巖)금강정(錦江亭)과 민충사(愍忠祠)
    금강정(錦江亭)은 세종10년(1428) 영월 사람 김복항(金福恒)이 동강이 영월 읍내로 들어오는 초입에 건립한 정면4칸, 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된 정자다. (영월8경의 하나)

    단종이 승하하자 단종을 모시던 궁녀와 관비들이 동강(당시 錦江)변 금강정으로 와서 벼랑위에서 스스로 몸을 던져 동강물로 뛰어내려 죽었기 때문에 낙화암(落花岩)이라 하였다.

    낙화암 언덕 위 뒤편에 낙화암에서 몸을 던져 순절한 궁녀와 관비들의 넋을 모시는 민충사(愍忠祠)사당이 있다.
영모전(永慕殿)에 모신 단종 영정(影幀)
    영모전(永慕殿)은 단종의 영정을 모신 사당. 단종영정은 백마를 탄 단종 앞에 추익한이 산머루 바구니를 받쳐들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다음 태백산 단종비각 참조)

    이 영정은 지금 장릉(莊陵) 정자각(丁字閣)에도 봉안되어 있다.
태백산(太白山) 단종비각(端宗碑閣)
태백산 장군봉 천제단 동쪽으로 약150m 내려와 있음
    (안내판 설명문)
    조선 제6대 임금인 단종(端宗)이 영월에 유배되자 전 한성부윤(漢城府尹) 이 고을 추익한(秋益漢)이 태백산의 머루, 다래를 따서 자주 진상(進上)하였는데, 어느 날 꿈에 산과(山果)를 진상차 영월로 가는 도중 곤룡포(袞龍袍) 차림으로 백마를 타고 태백산으로 오는 단종(端宗)을 만나게 되었다
    추익한(秋益漢)이 이상히 여기면서 영월 땅에 도착해 보니 단종(端宗)이 그날 세상을 떠난 것이다.

    단종(端宗)은 세조3년(1457)에 영월에서 승하(昇遐)한 뒤 태백산의 산신령(山神靈)이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주민들이 의논하여 단종(端宗)의 영혼을 위로하여 태백산산신령(太白山山神靈)으로 모시기로 하여 매년 음력 9월 3일 제(祭)를 지내고 있다.(沿道에 端宗 靈魂을 모시는 城隍堂이 많이 있음)

    지금의 비각(碑閣)은 1955년 망경사(望鏡寺) 박묵암 스님이 건립하였으며 「朝鮮國太白山端宗大王之碑」(조선국태백산단종대왕지비) 라고 쓴 비문(碑文)이 안치(安置)되어 있다.
    비문(碑文)과 현판(懸板) 글씨는 오대산 월정사 탄허스님의 친필(親筆)이다.
단종역사관
장릉 경내에 단종 관련 서적과 그림 등을 진열하고 있다.
    <책 소개>
    장릉 단종역사관에 비치된 책, 천안 출신의 작가 이규희씨가 열세살 때 영월로 이사하여 단종 관련 유적들을 접하면서 평생 느껴 온 단종의 열일곱살 짧은 생애를 동화 형식으로 쓴 책으로 제24회 이주홍아동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이다.(가격은 8,000원)

    책의 목차는
        - 작가의 말
        - 달콤한 바람 불어오고
        - 아바마마, 아바마마
        - 열두 살의 어린 임금
        -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고
        - 슬픈 혼례식
        - 신발이 냇물에 둥둥 떠내려가는
        - 곤룡포를 벗으며
        - 대관절 내가 무엇이기에
        - 흰옷 입은 백성들의 울음소리
        - 푸른 강물은 소리 없이 흘러가고
        - 하늘은 귀머거리인가
        - 너울너울 비단길 건너
        - 그 뒷이야기
관심이 있는 분은 한 권 사서 읽어보고, 손자 손녀들에게도 읽어보게 하면
영월의 '단종애사 유적'을 탐방했던 기억을 오래 간직하는데 좋을 것으로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