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관왕(三冠王)
沙月 李 盛 永(2007.1.9)
  작년 세밑에는 소록도에서 43년간 한센병환자들을 사랑으로 돌보다가 나이가 많아 부담을 줄까 봐 몰래 편지 한 장 써 놓고 홀연히 떠난 오스트리아 인스브르크의 마리안 수녀와 마가렛트 수녀 기사가 산뜻하게 가슴에 와 닿았었다.

마리안 수녀와 마가렛트 수녀 이야기: [‘인스부르크 단상’](클릭): 인스부르크 단상

  그래서 올 세밑에도 무슨 좋은 소식이 없나 하고 은근히 기대하면서 아침이면 신문을 펴는데 밝은 소식은 잘 안보이고 어두운 소식들만 지면을 도배하고 있어 언짢은 마음으로 신문을 덮는다.

  그 중에서도 12월 21일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에서 이 나라 대통령이란 자가 쌈닭으로 변신하여 좌충우돌, 숱하게 많은 독설을 뱉어 놓아 온 국민의 가슴을 향해 쏜살 같이 날아왔다.

12월 21일 민주평통자문회의에서 연설 중 쌈닭으로 변신한 노무현의 공격자세
쌈닭은 목털은 세우고, 관자놀이 핏대를 올리고, 왼 손가락은 적의 급소를 조준하고, 오른 주먹은 한 펀치 곧 튀어 나갈 듯---

  그렇게 많이 뱉어놓은 독설 가운데 “요새 아이들도 많이 안 낳는데 군대에 가서 몇 년씩 썩히지 말고 그 동안 열심히 활동하고 장가를 일찍 가는 제도로 전부 바꿔줘야 한다”는 말은 내 귀와 눈을 의심케 했다.
  이 나라 젊은이가 군대에 가서 국방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고 있는 것이 과연 ‘썩고 있는 것’ 인가?

  “군대 가서 한 삼년 푹 썩고 왔지!”
  안보이던 옛 친구를 만나 “그 동안 뭘 했기에 그렇게 소식이 없었나?” 하는 질문에 따라 나올 법한 대답으로는 있을 수 있는 말이다.
  하기는 군대에서 법학도, 의학도, 공학도, 수학도, 물리학도, 화학도 가르치지 않으니 이런 것들을 전공해서 한 평생 업으로 할 특정인에게는 학업에 손 놓고 ‘썩고 있는 것’ 일 수도 있다. 그러나 꼭 그런 것은 아니다.

  대통령제 국가에서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지위에 서있다.
  첫째는 국가를 대표하는 국가원수이고,
  둘째는 행정부 수반이며,
  셋째는 군(軍) 통수권자(統帥權者)국군의 최고사령관이다.
  설사 그렇더라도 온 국민과 군인들에게 공개될 공식 자리에서 국군통수권자의 입에서 나올 말은 결코 아니다.

  군의 군기와 사기를 최상의 상태로 유지해야 할 책임도 군의 최고사령관인 대통령에게 있다.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이 군의 사기 앙양에 노심초사하는 각급 지휘관들에게 찬물을 끼얹고, 맥 빠지게 하고, 고추가루 뿌리는 이런 말을 함부로 내 뱉어서야 될 말인가? 참 어이가 없고 정말 나라가 걱정스럽다.

  군대가 전투기술 외에 전문적인 지식을 가르치지 않는 대신 사람에 따라서는 군 복무를 마치고 사회에 환원하였을 때 전문지식보다 더 우선하는 것들을 배우게 하는 곳일 수도 있다. 용기와 복종, 자신과 겸손, 책임감과 인내심, 애국애민정신, 친구간의 인간관계--- 이런 것들은 그들이 사회에 돌아와 가족의 일원으로서, 사회인으로서, 또 어떤 조직원으로서 갖추어야 할 필수 덕목들이다.

  과연 군 복무가 ‘썩는 것인가?’ 라는 질문은 지난 이십 여 년간 우리집 아이 시화(時和) 문제로 내가 나 자신에게 수없이 던졌던 질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집 아이의 군대생활과 그 후 회사 조직원 생활에 관한 이야기를 함으로서 그 속에 답이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다.

  지난 연말과 연초는 나라는 뒤숭숭하고 썰렁했지만 우리 집에는 연거푸 좋은 소식이 있었다. 우리집 아이 시화가 저희 동료들의 말 대로 삼관왕(三冠王)을 한 것이다.
      ① KAIST(한국과학기술연구원) 전자공학 박사학위 논문심사 합격(11월 30일),
      ② SAIT(삼성종합기술원) 무한탐구상(無限探究賞) 수상(12월 29일 종무식),
      ③ SAIT(삼성종합기술원) Master 선발(1월 3일 시무식),
  이 세 가지 경사가 연말과 연시 불과 한 달 남짓 사이에 시화에게 안겨진 것이다.

  KAIST 박사학위는 2월 초순 졸업식 때 받게 될 것이고, 무한탐구상은 부상으로 100만원을 받아 동료 연구원들과 회식으로 단합을 다질 것이라 하며, SAIT Master선발에 관한 기사는 여러 일간 신문에 보도되었다.(SAIT Master 선발에 관한 기사: 첨부 2007년 1월 4일자 조선일보, 동아일보 기사)

  시화는 1983년 대학 입시에 공과대학을 지망했다가 낙방해서 한 해 재수를 했다. 다음 해 입시가 전해보다 어려워서 대부분의 재수생들이 점수가 떨어졌다는데 시화는 1년간 열심히 수험공부를 해서 20점 가까이 올라 전 해보다 급을 높여서 서울에서도 괜찮다는 대학교의 이과대학 전산학과에 합격이 하였다. 전화위복이 된 것이다.

  당시만 해도 이 학교에 전산학과가 생긴지 불과 2년 차로 아직 전산의 인기가 별로일 때니까 크게 높은 경쟁률은 아니었다. 그러나 전산학은 한 해가 다르게 인기가 치솟았다. 전산학과를 나오면 ‘군 면제 특례’로 군대를 가지 않을 수도 있는 길이 열려 있었다.

  그런데 시화가 1985년 말 쯤, 2학년을 마치고 나더니 “아버지! 나 군에 갔다 왔으면 해요.” 이유를 물었더니 졸업 후 군복무 문제로 고민하는 것보다는 재학 중에 군복무를 마치면 졸업 후 5년간 '특례의 굴레(?)'에 매일 필요도 없고, 자유스럽게 직장 잡아 업무에 전념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직업군인인 입장에서 시화의 생각이 몹시 반갑고 고마우면서도 ‘공연히 3년 썩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을 반대할 생각은 없었다.

  “그래? 그렇다면 네가 전산학과이니까 컴퓨터를 만지면서 군대 근무를 하게 되면 좋겠구나. 군에도 컴퓨터가 보급되기 시작했으니 가능할 게다” 하고는 육본에 알아 봤더니 마침 군전산병모집요강이 공시되었다는 것이다. 시화하고 상의 해서 군 전산병모집에 응시하기로 했다.

  몇 주 후 어느 토요일 60-70명 모집에 응시자가 무려 1300여명이라 중경고등학교 하나로는 부족해서 이웃 학교를 빌려 시험을 봤는데 시화도 합격하였다. 그 길로 논산에서 6주간의 기본병훈련을 마치고 속초 북방의 전방 보병제22사단에 배치되었다. 사단 전산실 창설요원으로 배치된 것이었다. 대위 한사람이 '전산실장'이란 이름으로 보직되기는 했지만 '컴'자도 잘 모르는 상태이고 전산실 창설과 운영 책임은 고스란히 시화의 어깨에 걸려 있었다.

  당시 각종 군 행정업무 수행을 위한 소프트웨어를 국방부 예산개혁위원회(?)에서 개발하어 각 부대에 공급하였는데 각급부대에 적용하는 데는 실정에 맞지 않아서 많은 문제들을 야기시켰다. 전산실장-관리참모 계통으로 실상을 보고하고, 중앙 공급된 소프트웨어를 일부 조정하여 시스템을 가동케시키니 칭찬과 표창까지 받았는데 얼마후 중앙 감찰검열 때는 중앙지급품을 함부로 고쳤다고 처벌을 받을 뻔 한 적도 한두번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래서 병사들이면 누구나 그렇게 좋아하는 서울 외출이나, 특별휴가는 생각도 할 수 없고, 전산실 유일의 기술요원으로 창설초기 불안정한 시스템과 중앙공급되는 소프트웨어의 고장과 트러불을 해결하는데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몰랐었다고 했다.

  거기다가 야간 보초근무, 내무생활, 제설작업, 그러면서도 유격훈련, 전술훈련은 빼주지 않으니 그의 군대생활은 정말 심신이 고달팠던 것 같다. 그 중에서도 겨울에 한 번 내렸다 하면 무릎 위까지 차는 눈은 몇 날 몇 일을 두고 넉가래질을 해야 하니 겨울철 군대생활은 ‘눈 치운 것’ 외에는 생각나는 게 별로 없다고 하였다.

사단 배치후 첫 면회
설악산 설악동

  그러나 상사와 동료들이 잘 이끌어줘서 사고 없이 2년 6개월의 현역 군복무를 무사히 마치고 귀가하였고, 학기가 맞지 않아서 복학은 6개월 기다려야 했다. 그러니까 군 복무로 인해 만 3년간 학업이 지연된 것이다. 노무현 국군통수권자의 말대로 하면 ‘군대 가서 3년간 푹 썩은 것’ 이다.

  그러고 보니 대학 3, 4학년은 3년 후배들과 함께 공부하였다. 1990년 8월 대학 졸업 후 대학원 2년을 수료했는데, 전산과학(소프트웨어)의 취약성과 한계를 느끼고 하드웨어 쪽을 더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대학원 석사과정은 전자공학을 공부 했다.

  1992년 가을학기에 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치고 몇 개 회사에 입사원서를 넣었는데 외국계 회사 하나와 삼성종합기술원 두 곳에서 합격통지가 와서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고민을 해야 했다. 당시 이 회사들은 괜찮은 회사로 서울대학 출신자 등 우수한 학생들이 많이 지원했었는데 아마 우리 아이에게는 현역 군 복무가 이들 회사에서 좋은 점수를 얻은 것 같다고 했다.

  결국 삼성종합기술원에 입사하여 1992년 하반기부터 초년생 연구원 생활을 시작하였는데, 대학 1, 2학년 때 친했던 동기생 친구는 이미 이 연구소에서 선임연구원에 승진 해 있었고, 다른 친구 하나는 현대전자에서 대리 직위에 올라 있었다. 그들은 특례로 군 복무를 면제 받아 6주 논산훈련소 병 기본훈련을 수료하고 군대 근무를 마쳤기 때문이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괜히 현역 군복무를 해서 3년간 푹 썩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삼성종합기술원에 입사하면서 영상처리기술분야 연구개발팀에 편성되었는데 이 팀은 그 때 세계적인 과제에 직면하고 있었다. MPEG-4 표준화 프로젝트 즉 세계동영상전문가협회((Moving Picture Expert Group) 주관으로 추진하는 동영상기술 세계표준화 프로젝트에 삼성종합기술원이 도전하는 것이었다. 현대전자, 포항공대 등 국내 몇몇 회사나 학교에서도 시도하고 있었다고 하였다. 표준화에 주기술은 물론 주변기술이라도 채택이 되면 세계적인 화상전화 수요를 감안할 때 회사는 물론 국가적으로도 큰 이득(로열티)이 있기 때문에 각국의 유수한 회사들이 사생결단을 한다고 하였다.

  연구원 초년생으로서 선배와 동료 연구원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열심히 연구에 전념하는 것 같았다. 당시는 나도 대전에 있는 국방과학연구소에 책임기술원으로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에 연구소 생리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어 이따금씩 대화에서 기술원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었다.

  입사한 지 5년 만인 1997년에 박사과정 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상사로 모시고 있는 랩(LAB)장이 적극 추천하여 산학협동(産學協同) 케이스로 대전에 있는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 입학하여 2년간 소요의 학점을 따고, 돌아와 근무하면서 박사학위 논문을 쓰는 것이었다. 회사에 돌아 온 후에도 매주 토요일은 대전에 가서 지도교수를 만나 논문 지도를 받았다. 주중에는 연구개발활동, 주말에는 논문 구상 및 실험, 하루도 맘 편히 쉴 틈이 없었다.

  또 1998년 삼성종합기술원에 복귀하자 마자 MPEG-4 표준화 프로젝트가 본격적으로 추진되어 연구한 결과를 가지고 세계 여러 나라로 순회하면서 열리는 연구결과토론 세미나에 참석하여 우리 연구결과에 대한 외국 연구원들의 공격에 방어하고, 외국 연구결과에 대한 공격을 하는 총성없는 전쟁터에서 세계적인 안목을 넓혀가는 좋은 기회였지만 심신이 너무 바빠서 박사학위 논문 작성은 항상 뒷전이 되는 게 십상이었다.

  이런 고된 날이 4년 쯤 흘러 MPEG-4 표준화 프로젝트는 결론이 났는데 주기술은 억울하게 스위스에게 빼잇겼다고 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우리의 것이 스위스 보다 질적으로 우수했는데 구미의 강대국들의 동양기피현상(?) 때문에 밀렸다고 했다. 국력의 중요성을 이 때 실감했다고도 했다. 그러나 주변기술로는 여러개가 채택되어 삼성그룹에서는 아주 축제분위기였다고 한다. 당시 국내 일간지에도 보도되었다.

  이렇게 해서 바쁜 연구원 생활을 하던 중에 소위 IMF바람이 불어닥쳤다. IMF가 가져온 두드러진 현상 중에 하나는 기업도산이고, 또 하나는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밴쳐기업이었다. 밴쳐기업으로 가장 각광을 받은 분야가 IT 즉 정보산업이다. 바로 시화가 전공해 온 분야인 것이다.

  그러니 일확천금을 노리는 밴쳐기업 창업자들은 IT분야 전공자들은 찾는데 혈안이 되었다. 자연히 시화네에게도 많은 유혹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연봉 1억에 KAIST 학비 변제를 다 부담하겠다’는 등 당시로는 아주 파격적인 제안이 많았다고 한다. 실제로 시화 주변사람들 중에 몇몇이 회사를 나가 밴쳐기업을 차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밴처 회사로 스카우트돼 가는 동료들도 있었다.

  시화는 동요하지 않았다. 바위처럼 묵직하게 무게 중심을 잡고 하던 연구에 조금도 소홀함이 없이 일했다. 한 우물을 판 것이다. 얄팍한 계산을 하지 않는 묵직한 그의 성격 때문이기도 하고, 지금껏 돌봐준 상사와의 의리 때문이기도 하고, 군대에서 익힌 인내심 때문이기도 하다.

  입사초기부터 상사(LAB장)이 시화를 잘 보게 된 데는 현역 군대생활을 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인 것 같다. 연구원들은 대부분 머리가 좋다. 손익에 대한 계산이 빠르다. 속말로 잔머리를 잘 굴린다.

  그래서 상사가 어 떤 과제를 맡기면 대체로 즉석에서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이 보통이다. 연구개발(硏究開發)이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은 사상(事象)을 창조해 내는 과정이다. 따라서 성공할 확률보다 실패할 확률이 더 높은 것이다.
  “그거 안될 겁니다” 하는 것이 즉석에서의 답이다. 일종의 자기 방어이다. 나중에 실패할 때를 대비한 포석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하라고 하면 결과가 성공적일 때는 그냥 넘어가는 것이고, 실패할 경우 “보세요! 제가 뭐랬어요?” 하는 답변을 미리 준비하는 셈이다.

  그 답을 듣는 상사는 어떤 심경이겠는가? 아무리 이해심 많은 상사일 지라도 호감을 갖지는 않을 것이다. “짜-식, 해 보지도 않고 안 된다고 하네. 용기도 없고, 자신감도 없고, 책임감도 없는 놈이야” 하고 단정해 버릴 것이 뻔한 일이다.

  그러나 시화는 달랐던 것이다. “예, 한 번 해 보겠습니다. 까짓 거 안되겠습니까?” 군대 그것도 최전방에서 2년 반 동안 노무현 대통령이 말하는 ‘푹 썩는’ 동안 그는 자신도 모르게 상사의 정당한 명령에 대한 복종심과 새로운 도전에 대한 용기와 책임감, 그리고 인내심--- 이런 것들을 몸과 마음으로 채득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시작한 과제들이 하나씩 하나씩 성공해 나가는 과정에서 상사의 신뢰는 쌓여 갔고, 설사 성공하지 못한다 해도 일단 초기 연구를 해 보고 결과 예측을 한 후에 상사에게 “이것은 이러 이러해서 성공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하고 보고를 하면, 상사도 “아- 그건 안 되겠구먼” 하고 생각을 바꾸거나 다른 과제를 찾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입사 후 15년이 된 지금까지 연구원으로 시작해서 TM(Technology Manager: 기술관리 책임자), PM(Project Manager: 사업관리 책임자) 등 직책을 수행하면서 ‘A’가 아닌 평점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KAIST 박사과정 산학 위탁생 기회도 올 수 있었고, SAIT Master에 선발도 되었고, 지금은 대부분 이사급 이상 임원이 맡는 것이 상례인 Program Team Leader도 맡아 중견 연구원으로서 40명의 연구원을 이끌어가는 위치가 된 것이다.

  지금까지의 성공의 요체는 현역 군대생활을 첫째로 꼽을 수 있고, 다음으로 한 우물을 판 결과라고 생각된다. 물론 맡은 바 직책에 대한 열성과 끊임없는 자기발전 노력도 뒤받침 한 것이다.

  시화 나이 이제 40을 좀 넘었으니 앞으로도 일 할 기간이 많이 남았으니까 아직 그 끝을 누구도 장담하지는 못하겠지만, 지금까지 온 길과 그의 몸에 밴 군대정신으로 미루어 볼 때 인생의 훌륭한 결과를 이루어 낼 것으로 나는 의심치 않는다.

  내가 우리 아이의 군 복무와 직장근무 과정을 통해서 얻은 결론은
  「현역 군복무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헌법에 규정된 4대 의무 중의 하나인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다하면서, 개인적으로는 상사의 정당한 명령에 대한 복종심, 맡은 바 임무에 대한 책임감, 어떠한 고난에도 참고 견딜 수 있는 인내심, 새로운 세계에 도전하는 용기, 질서와 겸손, 심지어는 동료들과의 대화와 운동 및 오락에 이르기 까지 사회생활과 개인 인생 행로에 큰 보탬이 되는 덕목과 행동들을 군 복무에서 체득하는 제2의 국민교육 도장이지 결코 ‘썩는 곳’ 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는 바이다. 우리 아이 시화의 '삼관왕(三冠王)'이 내 확신의 뒷받침이다.

<첨부>

(1) SAIT Master 선발에 관한 조선일보 기사

삼성종기원, '기술名人' 4명 선임
이시화.박두식.정재우.국건 등 4명

입력 : 2007.01.03 10:49

  세계적인 기술경쟁력을 가진 삼성종합기술원(SAIT)의 ’최고 연구원’을 의미하는 ’사이트 마스터(SAIT Master:삼성종합기술원 기술명인)’ 4명이 새로 탄생했다.
  삼성종기원은 3일 사이트 마스터에 이시화(41), 박두식(42), 정재우(45), 국건(43) 등 전문연구원 4명을 선정, 임명했다고 밝혔다.

  사이트 마스터는 기술적 독창성(Originality)과 탁월한 기술력(Excellence)을 통해 기술의 줄기를 만들고 이를 경영성과로 창출해 주변 동료 연구원의 표상이자 존경받는 연구전문가 중에서 선정된다고 삼성종기원은 설명했다.

  영상 압축 및 시스템 분야의 전문가인 이 마스터는 최신 영상 압축기술 MPEG-4의 국제표준 채택을 위해 형상기반 부호화 기술을 개발, 다수의 기술을 국제표준으로 채택하는 성과를 이뤘다. 그는 이 기술들을 기반으로 임베디드(embedded)용 영상압축 알고리즘과 오디오 압축 알고리즘 개발을 통해 삼성 제품의 일류화에 기여하고 있으며 현재 멀티미디어를 위한 플랫폼 개발에 주력하고 있다.

  박 마스터는 디스플레이 공정 분야에서 세계 최고 기술력을 보유한 연구원으로, 색 재현 감성엔진 기술을 세계 최초로 개발, 디스플레이 패널에 상관없이 삼성 고유의 표준색을 재현함으로써 디지털 TV 화질을 한 단계 높이는 데 기여했다.

  정 마스터는 실리콘 가공기술을 이용한 독자적인 초정밀 잉크젯 헤드설계와 프린팅 기술을 바탕으로 디스플레이 공정을 혁신할 수 있는 신공정 기술을 개발했다. 이 기술로 분광 특성이 우수한 LCD 컬러 필터를 구현하고 대면적 프린팅 등의 기술 혁신으로 차세대 LCD의 경쟁력을 높여가고 있다.

  잉크젯 헤드 분야의 세계적인 전문가인 국 마스터는 ’백워드 슈팅’이라는 독창적인 헤드를 개발, 특허를 확보했으며 현재 고속.고화질 인쇄를 위한 헤드 요소기술 개발에 주력하고 있다.

  이번에 선정된 사이트 마스터들은 앞으로 새로운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세계 최고수준의 기술 역량을 키우는 한편 기술지도 및 전수, 최신의 기술정보, 시장정보 등의 수집과 전파 등의 역할을 수행한다.

  삼성종기원은 사이트 마스터들이 세계 최고, 최초 기술에 도전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수 있도록 연구개발에 몰두할 수 있는 환경 조성에 전폭적인 지원을 하고 있다.
  이들에게는 ▲연구에 전념할 수 있는 신분 보장 ▲그룹 내 최고 연구원 수준의 대우 ▲세계 최고 연구기관에서의 방문연구 기회 제공 등의 특전이 부여된다.

  사이트 마스터 제도는 삼성종합기술원이 기술과 인재를 중시하는 경영철학을 실현하기 위해 2002년부터 도입됐다. 삼성종기원의 사이트 마스터는 이번 4명이 새로 선임됨에 따라 모두 14명으로 늘어났다.
(서울=연합뉴스)
조선일보 기사(1월 4일자 A28면))

(2) SAIT Master 선발에 관한 동아일보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