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바랜 추억
- 안병년 영전에 올립니다 -
沙月 李 盛 永(2006.3.11)
  안병년! 항상 밝고 명랑한 얼굴에 다정다감한 인상을 간직하고 있던 호남아 안병년이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겨우 1년 전 삼곡회(三谷會) 모임에도 함께 하여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노년의 건강관리에 관한 이야기들을 서로 나누며 담소하고, 노래방에서 ‘대전부르스’ 노래도 불렀고, 끝나고 서울 친구들(이옥님, 이윤분, 이현이, 이성영)과 함께 동승하여 대전에서 내렸는데 말입니다. 유독 혼자 대전에 뿌리 박고 타향을 고향 삼아 살아 온 그입니다.

  우리는 충청, 전라, 경상 삼도(三道)의 600년 지경(地境) 삼도봉(三道峰)아래서 태어나, 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과 함께 부항국민학교를 입학하면서 6년간의 고향 불알친구가 되었습니다.
  1952년 어려운 농촌 살림 때문에 우여곡절 끝에 김천중학교에 입학 원서를 내고, 지례(知禮)에 가서 국가고시 시험을 치루고, 당당히 합격하여 남들이 우러러 보던 김천중학생이 되었고. 이어서 3년 후 김천고등학교에 진학하였습니다.
  그 것도 나와 똑 같은 길이었습니다.

  그나 나나 대학 학비를 댈 수 없는 가정 형편 때문에 학비가 필요 없는 사관학교에 갈 것을 결심하고, 함께 해군사관학교에 원서를 냈습니다. 시험 장소는 대전이었습니다. 가까운 대구를 두고 대전으로 한 것도 그는 그의 누님이 한 분 대전에 살았고, 나는 5촌 고모님 한 분이 대전 인근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숙박 경비라도 줄일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해군사관학교 입학 시험에 그와 나는 함께 낙방하였습니다. 첫 관문인 신체검사, 그것도 맨 첫 검사 종목인 신장(身長)을 재기 위하여 신장기에 올라섰다가 다른 검사종목에는 가 보지도 못하고, 검사표를 빼앗기고 검사장에서 퇴장 당했습니다.
  본고사장 근처에는 가보지도 못하고 낙방한 것입니다. 키가 해군사관학교 컷트란인 1m 62cm를 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는 대전에 온 김에 누님 댁에 며칠 머물면서 대전구경 좀 하고 온다고 했습니다. 난 그럴 처지가 아니라 신체검사장에서 퇴장 당하는 그 길로 바로 대전역으로 가서 김천행 열차에 올랐습니다.
  열차에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니 분하기 그지없었습니다. 학과 실력이 모자라서 떨어졌다면 그래도 좀 덜 분할 텐데 키가 모자라 신체검사장을 쫓겨났으니 정말 분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해사 아니면 갈 데가 없나? 육사도 있고, 공사도 있지 않느냐?” 하는 데까지 생각이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기억하기로는 육사나 공사는 내일까지 원서접수 마감일인 것이 머리에 떠 올랐습니다. 시간이 없었습니다. 언제 원서를 사와(육,공사 원서는 대구 병사구사령부에 가야 살 수 있었음), 써서, 학교장 도장을 받아 제출하느냐? (제출도 대구 병사구사령부)하는 생각에 이르자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 는 속담이나 ‘궁즉통(窮卽通)’ 이란 장기나 바둑 둘 때 하는 말처럼 나는 이런 저런 많은 우여곡절 끝에 육사와 공사 입학원서를 내고, 신체검사는 물론 학과고사, 중앙정밀신체검사, 체력검정까지 합격하여 둘 중 선택하는 문제로 즐거운 고민을 하다가 결국 나는 육사를 가게 되어 육군 장교생활을 평생 직업으로 갖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그와 내가 다른 길을 가게 된 갈림길이었습니다. 만약 그도 나와 함께 김천으로 내려왔더라면 꼭 같은 생각을 하고, 함께 육사와 공사에 지원하여 같은 길을 걸었을 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 후 그도 육군 갑종간부후보생으로 지원하여 초급장교생활을 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되는 것입니다.

  그 후로 그와 나는 다른 길을 걷다 보니 서로 자세한 사항은 몰랐습니다. 아들, 딸이 몇이나 되고, 학교나 직장을 잘 잡았는지, 살아가는 형편이 어떤지--- 사실 아무것도 모르고 지냈습니다. 경쟁의 틈바구니에서 옆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던 거지요. 최근 몇 년 삼곡회 동기회에서 만나 밝고, 건강한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벌써 우리 곁을 떠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우리 나이 고희(古稀) 문턱에 왔으니 친구가 갔다고 해서 그리 놀랄 일은 아닙니다. 몇 년을 일찍 또는 늦게 가느냐 하는 문제만 남았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그가 먼저 간 것이 어쩐지 아쉽고, 아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빛 바랜 사진첩을 넘기다 보니 안병년, 그와 내가 함께 했던 사진이 몇 장 있어 그의 영전에 바치고자 합니다.

  안병년 친구! 이제 지난 세상 일일랑 이들 사진처럼 좋았던 일만 기억하고, 궂었던 일일랑 다 잊어버리고 고이 잠들게나---

  인생살이 너무 허무한 것 같애. 난 요즈음 나훈아 작사, 작곡, 노래의 '사나이 눈물' 이라는 노래를 자주 흥얼거린다네.
  곡도 좋지만 가사가 맘에 와 닿는 것이 있다네. 한 번 적어 볼까?

<사나이 눈물>
(1) 흘러 가는 뜬구름은 바람에 가고, 허무한 내청춘은 세월에 가네
      취한 김에 부르는 노래, 끝도 없는 인생의 노래
      아- 아- 아- 뜨거운 눈물, 사나이 눈물

        (2) 웃음이야 주고 받을 친구는 많지만, 눈물로 마주 앉을 사람은 없더라
      취한 김에 부르는 노래, 박자 없는 인생의 노래
      아- 아- 아- 뜨거운 눈물, 사나이 눈물

      (3) 돌아보면 그다지도 먼 길도 아닌데, 저 만큼 지는 노을 날보고 웃네
      취한 김에 껄껄 웃지만, 웃는 눈에 맺힌 눈물은
      아- 아- 아- 뜨거운 눈물, 사나이 눈물

<빛 바랜 추억의 사진들>
- 그러나 아름다웠던 추억들 -

1952년 부항국민학교 제14회(해방후7회) 졸업기념사진

1953년 김천중학교 2학년 때 졸업하는 선배와 기념촬영

1957년 김천고둥학교 2학년 때 어느 한가한 날 고부할매(송설당) 묘역에서

둘이 이 사진을 보면서 그는 “야! 너는 의젓하고 여유가 있는데, 난 벌벌 떨고 있는 것 같애” 했고,
나는 “아니야 너는 무슨 기술을 써서 날 넘어뜨릴까 궁리하는데, 난 멍하게 그냥 서 있는 것 같애” 라고 했었다.

1990년대 후반 어느 해, 동창회 참석 후 동기생 일동

2004년 삼곡회 동기회 때(직지사 청산고을)

2005년 삼곡회 동기회 때(직지사 영일식당)
오른쪽 맨 끝이 안병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