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학루시(黃鶴樓詩)-봉황대시(鳳凰臺詩)
안전유경도부득(眼前有景道不得)
沙月 李盛永(2021.2.23)
시선(詩仙)이니 시중천자(詩中天子)니 하면서
자타가 시(詩)에서는 제1인자로 공인하는
이백(李白)이 무창에 있는 황학루(黃鶴樓)에 올라
멋진 풍경에 멋진 시 한수 지으려고 시상을 가다듬다가
짓지 못하고 누를 내려오면서"안전유경도부득(安前由景都不得)
최호시재기상두(崔顥詩在其上頭)"라 하였다 한다

'눈앞에 이런 좋은 경치가 있지만 도(道:詩)를 얻지 못하는 것은
최호(崔顥)의 시가 맨 윗머리에 있기 때문이다'는 뜻이다.
즉 최호보다 더 좋은 시상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말이다.
후에 이백은 금능(金陵: 현 南京)에 있는 봉황대에 올라
시를 지어 최호의 황학루시에 대적했다고 한다

이백과 최호는 당나라 동시대 사람이지만
시인으로 세상에 알려지기는 천지 차이다
그러나 두 시를 한데 놓고보면 위 아래를 가를 수 없을 것 같다
덤으로 이 두 시인과 시,나의 방계 조상 양원공의 가학루(駕鶴루) 시,
그리고 나의 고향 김천(金泉)과 관련성을 찾아 보았다.

고려 예종 때의 문신 김황원(金黃元: 1045-1117)은 일찍 문과에 급제하고, 고시(古詩)에 이름을 날려 해동제일인자 (海東第一人者)라 불려왔다.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있을 때 평양 대동강변의 부벽루(浮碧樓)에 올라 대동강을 내려다보는 절경에 취하여 시를 한 수 지으리라 마음 먹고 시상을 떠올렸다.
長城一面溶溶水(장성일면용용수) 장성 한쪽은 용용수(대동강)가 둘렀고
大野東頭點點山(대야동두점점산) 넓은 들판 동쪽 끝머리에 점 점이 산,산.
위 두 구절은 읊었으나 다음 구절이 떠오르지 않아 해가 저무도록 시 구절을 잇지 못하고 누각을 내려오면서 붓을 꺾어버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해동제일의 문장도 너무 좋은 절경 앞에선 이를 표현할 구절을 찾지 못하고, 누각을 내려오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마 대자연의 가없는 능력 앞에 자신의 능력이 초라함을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또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시선(詩仙), 시중천자(詩中天子), 주일두시백수(酒一斗詩百首) 등 온갖 찬사가 따르던 중국 당나라 시인 이백(李白)에게도 있었다.
이백은 우리나라에서는 통상 그의 자(字)를 불러 이태백(李太白)으로 아녀자들의 자장가에도 나온다. 기억을 더듬어 복기해 본다.
자장 자장 자장 자장, 우리 아기 잘도 잔다.
멍멍 개도 짖지 말고, 꼬꾜 닭아 우지 마라
금자동아 옥자동아 나라님께 충신동아,
부모님께 효자동아, 형제간에 우애동아
금을 주면 너를 사며, 옥을 주면 너를 사랴
동방삭(東方朔)이 명(命)을 주고,
석숭(石崇)이 복(福)을 주고,
이태백(李太白)이 글(文)을 준다
자장 자장 자장 자장,


새록 새록 잠든 아기를 따뜻한 아래목에 눕히면서 "에이고! 고새 잠들었구만, 이쁜 것"
나는 어린 시절 어머니가 여섯 동생들을 키우면서 툭 하면 밤중에 탈이 나서 이마가 불덩이 같이 되어 잠들지 않고 칭얼거리는 아기를 업고 방 안을 서성이면서 위 이태백이 나오는 자장가를 흥얼거리는 모습을 수 없이 보면서 자랐다.
또 시골집 앞집에 사는 의성김씨 집에서는 그 아들 딸 삼남매 이름을 장자 동방석(동방삭), 장녀 석순(석숭), 차자 태백, 이라 지었다. 지금도 차자 김태백이 죽고 그 부인이 아들 딸 모두 외지로 내보내고 혼자 살고 있다.

이태백은 고전 소설 『장끼전』에 장끼가 약넣은듯한 콩을 먹으려하자 까투리가 수상하다고 못 먹게 말리니 장끼가 콩을 찬양하며 이를 꼭 먹어야겠다는 지론을 설파하는 가운데 나오는 이름이다. 그 부분만 옮긴다
『오곡 백곡 잡곡 가운데서 콩탯자(太)가 제일일세.
강태공(姜太公)은 달팔십(達八十)을 살아있고,
시중천자(詩中天子) 이태백(李太白)
고래 타고 하늘에 올랐고(騎鯨上天),
북방의 태을성(太乙星)은 별 가운데 으뜸이라
나도 이 콩 달게 먹고 태공(太公)같이 오래 살고
태백(太白)같이 하늘에 올라 태을선관(太乙仙官) 되리라.』

장끼는 이렇게 별별 좋은 일들만 사설로 늘어놓으면서
가부장적(家父長的) 고집을 꺽지않고 그 콩을 먹고 독약에 중독 돼 죽고,
까투리 또 한 별별 사설을 늘어놓으면서 남편(장끼)를 원망하며 슬퍼하는 장면이 이어진다.
이백(李白: 李太白)이 중국에서도 경치가 좋기로 소문이 난 무창(武昌)에 있는 황학루(黃鶴樓)에 올라 눈 앞에 전개되는 아름다운 경치에 취해 시를 한 수 지으리라고 마음을 먹었으나 결국 시를 짓지 못하고 누각을 내려오면서
”眼前有景道不得(안전유경도부득) 崔顥詩在其上頭(최호시재기상두)”이란 말을 남기고 떠났다고 한다.
‘이렇게 아름다운 경치가 눈 앞에 있어도 도(道: 詩)를 얻지 못하는 것은 최호(崔顥)의 시가 그 맨 윗머리에 있기 때문이다.’는 뜻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최호(崔顥)보다 더 나은 시가 떠 오르지 않는디는 말이다.
최호(崔顥)의 시는 동정호 호반의 방초(芳草) 우거진 앵무주(鸚鵡洲)와 망망대해 같은 동정호(洞庭湖)가 눈앞에 펼쳐지고, 이를 내려다 보는 황학루가 조화를 이루는 풍경이 가 보지 않은 사람에게도 선하게 떠오르게 하는 시다.

이백(李白)최호(崔顥)의 시를 극구 칭찬했지만 내심 자존심이 무척 상했을 것이다.
그 후 이백은 금능(金陵: 지금의 남경)에 있는 봉황대(鳳凰臺)에 올라 ‘등금능봉황대(登金陵鳳凰臺)’라는 시를 지어 최호의 황학루시에 필적했다고 한다.
이백의 금능봉황대시(金陵鳳凰臺詩)는 최호(崔顥)의 황학루시(黃鶴樓시)와 몇 개의 같은 운(韻)자에 시상(詩想)과 시구(詩句)까지 본 떠고 있다. 오늘날 같으면 '저작권 침해' 운운 할 수도 있을 것 같지만 옛 사람들은 그렇게 쫀쫀하지 않고 다 같이 좋은 경치를 좋은 귀절로 묘사한 시라고 찬양하여 왔다.
최호의 화학루시와 이백의 금릉봉황대시 대비
최호(崔顥)의
등황학루시(登黃鶴樓詩)
이백(李白)의
등금릉봉황대시(登金陵鳳凰臺詩)
昔人已乘黃鶴去(석인이승황학거)
옛 선인은 이미 황학을 타고 가버리고
此地空餘黃鶴樓(차지공여황학루)
이 땅에는 텅 빈 황학루만 남아 있네
黃鶴一去不復返(황학일거불복반)
황학은 한번 가서 다시 돌아오지 않고
白雲千載空悠悠(백운천재공유유)
흰 구름만 천년을 허공에 유유히 떠 있네
晴川歷歷漢陽樹(청천역역한양수)
맑은 날 강물 한양의 나무들 역력히 비치고
芳草처처鸚鵡洲(방초처처앵무주)
향기로운 풀 앵무주에 무성하네
日暮鄕關何處是(일모향관하처시)
해 저물어 가는데 내 고향은 어드메뇨
煙波江上使人愁(연파강상사인수)
연기 강에 서려 사람을 시름에 잠기게 하네
鳳凰臺上鳳凰遊(봉황대상봉황유
봉황대 위에 봉황새들이 놀더니
鳳去臺空江自流(봉거대공강자류)
봉황은 가고 텅 빈 대 앞엔 강물만 흐르네
吳宮花草埋幽徑(오궁화초매유경)
오나라 궁궐 화초 오솔길에 깊이 묻혀버리고
晉代衣冠成古丘(진대의관성고구)
진나라 때의 귀인들(무덤) 옛 언덕 이루었네
三山半落靑天外(삼산반락청천외)
삼산은 푸른 하늘 바깥으로 반쯤 솟아있고
二水中分白鷺洲(이수중분백로주)
두 강물이 백로주를 가운데 두고 갈라졌네
總爲浮雲能蔽日(총위부운능폐일)
어떻던 뜬구름이 능히 해를 가려버리니
長安不見使人愁(장안불견사인수)
장안이 보이지 않아 시름에 잠기게 하네
무한의 황학루 영상과 금능의 봉황대 그림
○ 청천역력(晴川歷歷) 방초처처(芳草 처처)(艸아래)
고금을 통해서 한시(漢詩) 구절 깨나 읊조리는 사람이면 하얀 눈이 온 세상을 하얗게 덮은 풍경 앞에서 유종원의 강설(江雪)에 나오는 千山鳥飛絶(천산조비절: 온 산에 나는 새가 없어졌고) 萬逕人踪滅(만경인종멸: 모든 길에 사람의 발자국이 없어졌다),
또는 천길 절벽에 떨어지는 폭포 앞에 서면 이백여산폭포(廬山瀑布)에 나오는 飛流直下三千尺(비류직하삼천척: 공중을 날아 수직으로 삼천척을 떨어지니) 疑視銀河落九泉(의시은하낙구천: 마치 은하수가 하늘에서 구천으로 떨어지는 것 같아라) 이런 구절을 저절로 중얼거리게 된다
강설풍경과 여산폭포
유종원의 강설시와 이백의 망여산폭포시
유종원의 강설(江雪) 이백의 망여산폭포(望廬山瀑布)
千山鳥飛絶(천산조비절)
온 산에는 새들도 날지 못하고,
萬逕人踪滅(만경인종멸)
모든 길에 사람의 발자국 없어졌네.
孤舟蓑笠翁(고주사립옹)
외로운 배에 도롱이 삿갓 쓴 늙은이
獨釣寒江雪(독조한강설)
홀로 찬 눈 덮인 강에서 낚시질 하네
日照香爐生紫煙(일조향로생자연)
햇빛이 향로봉을 비추니 보랏빛 연기가 일고
遙看瀑布掛前川 (요간폭포괘전천)
멀리서 폭포 바라보니 앞에 내(川)가 걸린 듯
飛流直下三千尺 (비류직하삼천척)
공중을 날아 수직으로 삼 천 척이나 떨어지니
疑是銀河落九天 (의시은하낙구천)
마치 은하수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 같아라

최호의 황학루시의 '晴天歷歷(청천역력) 방초처처(芳草처처)' 구절도 위 '천산조비절 만경인종멸'이나 '비류직하삼천척 의시은하 낙구천' 처럼 이런 경치 앞에서 무심코 읊조리게 되는 구절이다.
역력(歷歷)은 뚜렸함, 분명함, 사물이 질서정연한 모양을 나타내는 말이고, 처처(처처)는 더부룩하게 무성한 모양을 나타내는 말이다. (아래)
맑은 물 흐르는 냇물 속에 나무 그림자가 산듯하게 보이고, 무성한 풀들이 더부룩하게 자란 자연 풍경을 바라보노라면
최호 황학루시의 청천역력(晴川歷歷) 방초처처(芳草 처처)(艸아래) 이 두 구절이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게 되고, 많은 시인들이 이 구절을 인용하였다.

경부선 기차나 고속버스로 남행하다가 충북 황간(黃澗)을 지나치면서 북창 밖으로 눈이 약간 앞서가면 높은 벼랑 위에 날아갈 듯 서있는 누각이 보인다.
조선조 초기 황간 현감에 부임한지 달포밖에 안 되는 하동인(河東人) 하담군(河澹君)이 짓고, 개국공신이며 좌상(左相)까지 오른 경상도 관찰사 의성인(義城人) 구암(龜巖) 남재(南在)가 이 누각에 오르면 마치 ‘학(鶴)을 가마(駕)처럼 타고 하늘을 훨훨 나르는 듯 하다’ 하여 ‘가학루(駕鶴樓)’라 편액을 한 정자다.
나의 16대 방조(傍祖)로 조선조 성종 때 전라, 충청, 함경도 관찰사를 역임한 양원공(楊原公; 淑咸) 이 충청도 관찰사 때인지 전라도 관찰사 때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이곳에 올라 지은 시가 동국여지승람에 등재되어 있는데 그 시에도 최호의 황학루시의 이 두 구절이 나온다.
황간 가학루 원/근영
< 양원공의 가학루시(駕鶴樓詩) >
弱歲放浪此地遊(약세방랑차지유) 젊은 시절 방랑하며 이곳에 와서도 놀았는데
跣丸歲月經幾秋(선환세월경기추) 탄환처럼 빠른 세월 그 몇 년이나 지났던고
蒼樓木追碎今重修(창루추쇄금중수) 옛 정자가 낡아서 부수고 이제 다시 지으니
功重使君古諸侯(공중사군고제후) 사군의 공로가 옛날 제후와 같이 무겁도다.
激湍水聲亂驚湃(격단수성난경배) 세찬 물소리에 놀라 어지러이 물구비가 일고
遠混陰壑響靈(원혼음학향령뢰) 먼 음침한 골짜기 신령스런 소리 메아리 치네(竹밑賴)
試憑畵欄卷珠簾(시빙화난권주렴) 그림 난간에 기대어 주렴을 걷고 보니
萬像森羅騁目外(만상삼라빙목외) 삼라만상 풍경이 눈 앞으로 말타고 달려오네
坐待一更山月吐(좌대일경산월토) 초경까지 앉아 기다리니 산이 달을 토해놓고
以手弄之淸可(이수농지청가국) 희롱 삼아 손 내밀면 맑은 달이 잡힐 것 같아 (手변菊의 艸제외)
銀橋何順隨(족섭은교하순수) 은교 밟고 월궁에 가는 것 (注1)어찌 이에 따르리. (에서 手변 대신 口변)
仰宇宙直窮搜(면앙우주직궁수) 굽어보고 우러러보며 온 우주를 찾아 보아도. (人변免)
崔灝已去挽難留(최호이거만난류) 최호(注2)는 이미 가고 없으니 붙들 수도 없네
霜枯芳草不復(상고방초불복처) 서리가 방초를 말려버렸으니 다시 무성할 수 없고(艸밑妻)
只有歷歷淸川流(지유역역청천류) 지금은 맑은 시냇물만 역력히 흐르고 있구나
笛吹何處徹寂廓(적취하처철적곽) 어디서 부는 피리소리 적막한 허공을 꿰뚫으니
惹起客愁雲漠漠(야기객수운막막) 나그네 시름 구름처럼 막막하게 피어오르네
壁間詩句更起予(벽간시귀갱기여) 벽에 붙은 시귀가 다시금 나의 흥을 일깨워
欲和高吟頭側鶴(욕화고음두측학) 좋은 글귀에 화답하려 학 목을 빼고 기웃거리네.

(注1) 중국 당나라 명황(明皇) 때 도사 나공원(羅公遠)이 명황을 모시고 월궁(月宮)에 갈 때 지팡이를 공중에 던져 銀橋(은교)를 만들어 이를 밟고 올라갔다는 이야기를 말함.
(注2) 崔灝(최호): 중국 당나라 때 시인. 중국 무창(武昌)에 있는 황학루(黃鶴樓)에 올라 지은 황학루 시의 「芳草처처(방초처처) 淸川歷歷(청천역역)」이란 구절을 인용한 것.


○ 금능(金陵)과 삼산이수(三山二水) 나의 고향 김천(金泉)
지금의 김천은 조선시대에 김산현(金山縣), 개령현(開寧縣) 그리고 나의 고향 사월(沙月)이 있는 지례현(知禮縣)으로 분할되어 있었다.
김산현은 정종1년(1398) 왕의 태(胎)를 황악산에 봉안하면서 군(郡)으로 승격하고, 별호로 금릉군(金陵郡: 중국의 南京의 별호)이라 하였다.
고종(32년, 1895) 8도 행정구역에서 13도로 구뢱되면서 김천군으로 유지되다가. 6.25 전란 후 인구 밀집지역이 김천시(金泉市)로 승격하면서 여타지역을 금릉군(金陵郡)으로 분활되었다가 최근에 국회의원 선거구 조정에 따라 다시 합쳐서 현재는 김천시가 되었다.

김천(金泉)이란 이름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 원병 사령관으로 조선에 왔던 이여송이 이곳을 지나다가 지금 김천시 남산동에 있는 과하주(過夏酒) 제조에 쓰이던 과하주샘 물을 마시고 물맛이 좋기로는 중국 금릉에 있는 금천(金泉) 샘물과 같다 하여 이 고장을 김천(金泉: 금릉에 있는 샘)이라 명명했다는 전설이 있다.
삼산이수(三山二水)의 고장 김천의 심볼
솟아오르는 붉은 해(붉은색)에 겹쳐(오버랩)
세개의 산(三山: 검은색)이 솟아있고,
두 개의 물(二水: 푸른색)이 합수동류(合水東流)하여 낙동강(洛東江)으로 흐른다.
김천을 삼산이수(三山二水)의 고장이라 부른다.
별호 금릉(金陵)이나 삼산이수(三山二水) 모두 이백의 금릉봉황대시(金陵鳳凰臺詩)에서 따온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수(二水)는 남쪽 수도산(1317m)에서 발원하여 동북으로 흐르는 감천(甘川)과 북쪽 황악산(1111m)에서 발원하여 동남으로 흘러 김천에서 감천에 합류하는 직지천(直指川)을 말하는데 이는 예나 지금이나 같다.
그러나 삼산(三山)은 시대에 따라 달라져 왔다.
조선조에는 이수가 합류하는 곳의 둘레 3개 지점에 있던 산 세 개를 말하는데 자산(鳥山: 현 紫山), 황산(凰山: 현 黃山), 응봉산(鷹峰山: 현 매봉산)으로 鳥는 자고새, 凰은 봉황, 鷹은 매를 말하니 모두 새를 지칭한 명칭이었다
일재때서부터 얼마전까지는 당시 김천시를 모두 포함하도록 북쪽의 황악산, 남쪽의 금오산, 중간의 고성산을 지칭해 오다가 최근 김천시와 금릉군이 통합되어 김천시가 되면서 역시 전 지역을 커버한다는 명목으로 고성산 대신 대덕산으로 바뀌어 지금은 황악산, 금오산, 대덕산을 지칭한다.
백두대간의 산 황악산 정상
2003년 11월 우리부부가 지례-황간 간 우두령제-황악산 등산 때(좌)
동년 12월 아산회원들 우리 시골집에 자고 직지사-황악산 등산 때(우)
황악산은 그 높이가 해발 1111m로 동남쪽 품속에 대 가람 직지사를 안고 있으며,
내가 다닌 김천중고등학교 교가의 첫 구절에 나온다.
♩'삼한대처(三韓大處) 김천 고을 황악산(黃嶽山) 밑에'♪ 라고 시작된다.
금오산 정상 현월봉
2009년 2월 우리부부가 구미-금오산 등산 때
금오산에는 고려말 유학자이며 목은(牧隱) 이색(李穡),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와 함께
삼은(三隱)의 한사람인 야은(冶隱) 길재(吉再) 선생이
조선조에 불사(不仕)하고 지조를 지키며 은둔한 동굴이 있고,
동남쪽 구미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태어난 생가가 있다.
백두대간의 산 대덕산 정상
2006년 9월 우리부부가 소사고개-대덕산 정상 등산 때(좌)
2007년 1월 아산회원들 전날 영동 천태산, 우리 시골집에 자고 소사고개-대덕산 등산 때(우)
대덕산은 우리 시골집에서도 서남쪽으로 잘 보인다
고향집에서 바라보는 대덕산
백두대간의 1290m 대덕산 하얀 눈은 12월에 시작되면 이듬해 4월 초에나 없어진다.
내가 어린시절 부항국민학교 6년 동안 겨울이면 등교 길에 쌩쌩 부는 칼바람은
저 눈덮인 대덕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이었다. 그 때는 몹시도 야속한 눈바람이었다.
그러나 나에게 강인하게 자라도록 한 채찍이었다.
그리고 동북 백두대간 상에 고향집 앞을 흐르는 내감천(內甘川; 현 이름 釜項川)의 발원이며,
600년 충청,전라,경상 삼도지경인 삼도봉(三道峰)이 있는데
대덕산에도 백두대간 따라 서남 1Km 지점에 제2봉이며
고종32년(1892) 이후 129년 전북, 경북,경남 삼도지경의 삼도봉(三道峰)이 또 있다.

(삼도봉은 지리산 반야봉 곁 전북, 전남, 경남 삼도 지경에도 있어 남한 백두대간 상에 3개의 삼도봉이 있다)
영남 제1문(嶺南第一門)
황악산 동남쪽 추풍령을 넘어 김천 시내로 들어오는 4번 국도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