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백선엽 장군을 추모하며
沙月 李 盛 永(2020.7.13)
2020년 7월 10일 미국사람들이 더 많이 인정하고 사랑한 우리 육군의 대 선배이며
'6.25한국전쟁영웅'큰 별 백선엽 장군 이 2020. 7. 10. 타계하셨다.

종북 좌파들의 권모술수와 잔머리 굴려 억지 탄핵으로 대통령을 몰아내고
여론조작과 거짓과 부정선거로 정권을 잡아
노동계, 교육계, 문화계, 시민단체, 언론계 사법권을 장악하고,
마지막으로 사전투표 개표조작을 통해 입법권을 장악한 문재인 정부가
'친일'운운하며 홀대하는 가운데 시민들이 나서 광화문 광장에 차린 빈소에
13일 이미 80이 넘은 흰머리 육사18기 동기생들이 우중에 함께 모여 참배하였다.

내가 백선엽 장군을 가까이서 만난 것은
1971년 육군대학 교육과정의 하나로 실시된 다부동전투 현장 전술실습 때 오셔서
당시 다부동전투에서 고군 분투 했던 실감나는 이야기들을 들려 준 것이 처음이요 끝이다.
다부동 전투에 관한 것은 육사에서 배운
한국전쟁사 부도에 요약된 전반적인 내용을 요도와 함께 옮기고,
여담으로들려준 북진하면서 적도 평양에 제일 먼저 입성한 무용담을
약 50년 전의 가물가물한 기억을 더듬어 간략하게 올린다.

① 6.25한국전쟁사 백선엽 장군이
삼팔선-낙동강-수복-압록강-1,4후퇴-휴전선을 오간 발자취를 따라가며
그때 그때 전쟁상황을 되새겨 본다.

②1971년 육대 교육중 다부동전투 현장 전술실습 때 오셔서 들려준
평양 1착 입성 무용담을 되살려 본다.

만31세 백선엽 욱군대장 육군참모총장의 젊은시절 모습
1920년 평안남도 강서 출생, 2020년 7월 10일 사망, 壽100, 만99세,
학력: 군사영어학교
경력: 6.25한국전쟁 초기2년간 육군보병제1사단장으로 최전선에서 전투
(다부동전투, 적도 평양 1착 입성, 평북 운산까지 진출),
1952년 1월 만31세로 최초 육군참모총장
2003년 한미 우호상, 2013.8 주한미8군 명예사령관
2010.7.13. 세종로 이승만광장 세종대왕 동상 앞에 모신
고백선엽 장군 영정에 참배

(아래) 합동 참배하는 산수(傘壽) 망구(望九) 다 지난 육사18기 동기생들

6.25한국전쟁중 고 백선엽 장군의 발자취와 당시 전쟁 상황
< 삼팔선-낙동강-수복-압록강-1,4후퇴-평택/삼척선-현 휴전선을 오가며 >
삼팔선에서 낙동강까지 후퇴(지연전) 작전
백선엽 장군 발자취(국군 보병제1사단)
삼팔선(장단) → 충북(괴산) → 낙동강(왜관북방 도하)→칠곡(다부동)
◆ 북괴 공산군의 남침
1950년 6원25일 일요일 04:00에 삼팔선을 넘은 북괴 공산군은 최용건 지휘하에 포천-의정부 축선에 주공, 춘천과 개성-문산 축선에 각각 조공을 두고 중포의 지원하에 T-34전차를 선두로 전차 1개사단을 포함한 8개사단과 수개 여단 55,000 병력으로 기습 남침해 왔으며, 또한 서해안 옹진반도를 신속히 제압하고, 동해안 강능에 상륙했다.

국군은 총 보병 5개사단과 수도경비사령부, 전차는 전무하고, 포병지원도 미미한, 국군 41,000명의 병력을 순식간에 격파하고 28일 서울을 점령하고, 7월1일 김홍일소장이 지휘하는 2,000명의 시흥지구전투사령부를 격파하였다.

◆ UN의 참전과 국군 작전통제
UN의 신속한 참전 및 파한 결의에 따라 6.27일부터 미해/공군은 작전을 개시하였고, 7.2 William F. Dean 소장이 지휘하는 미 보병제24사단이 부산에 하선하였으며, 7.7 맥아더 원수가 UN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으며, 동시에 미제8군 주력을 투입하였다.

한국군은 6.30일 부로 육군참모총장이 된 정일권 소장 지휘하의 제1, 제2, 수도사단을 기간으로 제1군단(군단장 최홍일 소장)을 창설되었으며, 7.16 미제8군의 작전 개시와 동시에 국군의 작전통제권을 미제8군사령관에게 이양하였다.

◆ UN군의 부산교두보선(Walker라인: 낙동강)까지 지연전(후퇴)
- 7월 5일 오산에서 Smith혼성부대 작전을 시초로 UN군은 8군 주력이 투입될 때까지 지연전을 전개하며 후퇴하였다.
- 7월 2일 주한 UN군의 지휘권을 인수한 미8군은 금강을 연한 선에서 연약한 방어작전을 전개하였고, 7.12 제6, 제8사단을 기간으로 편성되 제2군단(군단장 유재홍 준장)은 중부전선 단양정면에 포진되었다.
- 경부가도를 주공으로 하는 공산군 제3,6,7사단은 7,15 금강을 도하하여 대전을 공격했는데 시가전에 들어간 미제24사단은 최초로 3.5인치바주카포로 사용하며 적전차에 대항했으나 7,20 격파되고, 사단장 Dean소장은 실종(나중에 포로)되었다
- 이렇게 해서 금강선과 대전에서 UN군은 많은 손실을 입은 대산 1주일의 귀중한 시간을 벌었기 때문에 그간에 William B. Kean 소장이 지휘하는 미 보병제25사단과 HorbartR Gay 소장이 지휘하는 미기갑제1사단이 포항을 통에서 상륙하여 기갑제1사단은 24사단과 교대하고, 25사단은 그 우측에서 국군제1,2사단 정면인 황간-함창 간을 담당하였다.
- 그러나 병력, 지형이 불리하고, 공산군의 우회작전, 게릴라작전으로 전선을 유지하지 못하고 계속 낙동강선까지 일부 지연전을 전개하면서 후퇴하였다.
부산교두보선(Walker라인) 작전
(8월5일-8월26일간)
백선엽 장군 발자취(국군 보병제1사단)
낙동강(구미)→ 칠곡(다부동)
◆ 부산교두보선(Walker라인) 작전
- Walker라인 작전은 UN군이 처음으로 연결된 방어선을 책정한 전투다.
왜관에서 동쪽으로 맡은 국군 사단은 제1(백선엽 준장), 제6(김종오 대령), 제8(이정렬대령), 수도(김석원 준장), 제3(이주식 준장) 사단 등이었다.
- (추가)왜관에서 남쪽으로 낙동강을 연하는 선은 미국군으로 제1기갑사단, 제2사단, 제25사단이 지역방어 편성을 하였다.
- 공산군은 8월3일 낙동강 전선에 도달하여 대구와 부산 저령을 최종목표로 총공격 준비를 하였다.

◆ <8월5일-8월26일간의 작전>
- Kean특수임무부대작전: Walker장군은 미제25사단과 해병제1여단으로 8월7일 아침 진주방면에서 마산을 위협하는 북괴제6사단을 공격케 하여 8월 11일까지 진주 동방 고지들을 확보 점령함
- 낙동강 서부 작전: 북괴제2, 4사단은 10사단의 증강을 받아 8월6일-15일 간에 UN군의 주병참선인 경부가도 차단차 남강지역 낙동강 동부에 교두보를 확보함.
- 동부 해안지역작전: 북괴제5사단은 포항을 점령코자 게릴라부대를 연덕 남방으로 살륙시켜 국군제3사단을 차단하였으나 해상으로 철수한 3사단은 구룡으로 상륙하여 12일에 점령된 포항을 18일 탈환함.
- 왜관-대구지역 정면: 8월 중순부터 대구 정면에 대한 북괴군의 공격은 김무정의 2군단 휘하 제1, 3, 7, 8, 15, 사단 병력으로 군위-대구와 다부동-대구 양 방면에서 돌진해 오자 Walker장군은 국군 제1, 6사단과 예비인 미 제27, 23연대전투단(RCT)으로 다부동 남방에서 저지함.
부산교두보선(Walker라인) 작전
(8월27일-9월16일간)
백선엽 장군 발자취(국군 보병제1사단)
칠곡(다부동)
◆ <8월27일-9월16일간의 작전>
- 북괴군의 Walker라인에 대한 2차 총곡격은 8월26일 포항에 대한 강력한 조공 공격으로 개시됨.
- 북괴군 주공은 8월31일 밤 메제2, 25사단 정면에 감행해 왔으나 9월15일까지 원진지(낙동강 서부)로 격퇴됨.
- 대구방면에 대한 북괴군의 주공 공격은 국군제1사단의 완강한 방어에 막혀 9월3-10일간에 겨우 6-8000야드(약7Km)를 진출하였을 뿐이다.
- 미제1군단장 Milburn 소장은 9월13일 대구에 도착한 미제1기갑사단을 왜관-대구 축선에, 그 남쪽에 영국군 제27여단을 투입하고, 그 동쪽의 국군제1사단(사단장 백선엽)을 통합지휘하여 적 주공을 계속 저지하였다.
- 8월 26일 포항정면 국군제1군단 지역으로 공격해 온 국괴군 4개사단(5,7,12,15)은 9월 6일 포항을 점령하고, 대구-경주-부산을 연결하는 병참선을 위협하는 돌출부를 형성하자 Walker 미8군사령관은 예비대인 미제24사단을 동, 국군2군단을 서로하여 역습을 감행하여 적을 격퇴시켰음.
후퇴(지연전) 작전과 부산교두보선(Walker라인) 작전 분석
작전 실패원인
초기전투
국군 실패
1. 병력, 장비 열세
2. 경계태만
3. 교육훈련 미비
4. 작전지휘 졸렬
5. 지형 불리
Walker라인에서
북괴군 실패
1. 제공/제해권 상실
2. 병참수단 열등으로 국부적 성공을 확장 불가
3. UN군의 신속한 기동과 적공격 대비
4. 병참선의 신장 대비 실패
초기 남침적전 전반
북괴군 실패
1. 초기 열세한 UN군의 계획적인 지연전 효과
2. 병참지원의 실패
3. 서울 점령후 공격계속 지연으로 전과확대 및 추격 기회 상실
인천상륙작전, Walker라인에서 총반격
백선엽 장군 발자취(국군 보병제1사단)
칠곡(다부동) → 경북(상주)→임진강(문산)
인천상륙작전
◆ 상황
- UN군은 8월 Walker라인의 강력한 방어진에서 지연전/방어전을 종결하고 공세로 북괴군의 인적, 물적 소모를 증가시켜 다음과 같이 반격이 가능한 상황이 조성되었다.
1. 적 보급로의 최대 신장, 2. 적 정예부대 소모, 3. 적 후방 예비대 전문, 4. UN군의 절대적인 제공/제해

- MacArthur장군은 7월 이후 제한된 병력을 신중히 전선에 충당하면서 인천상륙전을 위한 병력을 모으고, 훈련시켰다.
인천은 조수간만의 심한 차이와 지형관계로 대부대 상륙작전은 불가능했으나 다음 조건을 이유로 상륙작전을 강행 하기로 결심하였다.
1. 수도 서울이 20마일 이내에 위치하여 신속한 수도 탈환으로 얻을 수 있는 심리적 효과 지대
2. 인천 정면의 적 방비가 극히 미약
3. 소수 병력 상륙으로 남한에 투입된 북괴군 대 병력을 포위, 차단 가능
4. Walker라인 전투 지속은 아군의 출혈만 강요.

◆ 피아 쌍방의 병력
북괴군
- 인천에 9,000명, 해안포, 대공포 약간,
- 서울위술지구 북괴군제18사단과 제31여단의 1개대대가 경인지역에 배치
UN군
- 미제10군단(Edward M. Almond 소장) 예하 75,000명,
- 미제1해병사단(Oliver P. Smith 소장)
- 미제7보병사단(David G. Barr 소장)
- 영국 해병여단
- 국군 육군제17연대(백인엽 대령: 백선엽 장군 동생)
- 국군 해병제1연대(신현준 대령)
- 미 지원 해군(James)

◆ 계획
양공: 서해안(군산, 목포), 동해안 (영덕 남북방)-국군 해병
양동: 삼척(해군)
상륙 주공:
- 상륙지역: 인천 월미도 중심 북부(Red Ridge)와 남부(Blue Ridge),
- 상륙부대: 미제1해병사단(Red Ridge), 국군해병제1연대(Blue Ridge), Taplett부대(특공대: 월미도)
- 작전단계: 제1단계-월미도 탈취(Red Ridge로), 제2단계-인천반도 탈취(Blue Ridge로),
- 후속부대-미제7보병사단, 국군제17연대.
- D일 H시: 1950, 9, 15. 05:00(만조 1시간 전)

◆ 작전 경과
- 9월 12일 부산을 출발한 상륙 대선단은 9울 13일 영종도에 집경, 대안포격과 구축함 유도하에 200대의 함재기가 적 포대 격파후 D일 MacArthur장군 참관하에 미 제5해병연대는 28분만에 월미도 점령, 국군해병제1연대는 18:00-21:30간에 상륙 완료.
- 9월16일 미군은 탱크를 선두로 부평으로 향하고, 국군은 인천지역 적 소탕, 9월16미제 1해병사단과 국군은 경인가도를 따라 서울을 , 미제7사단은 수원을 향해 진격.
- 9월20일 한강에 도착한 UN군은 21일 )6:00에 한강을 도하, 9월24일 국군제17연대는 인천에 상륙후 25일부터 미제7사단과 협동으로 9원15일부터 서울시가전을 실시하여 9월28일 서울을 탈환.
Walker라인에서 총반격
(9월16일-26일)
- 인천상륙작전에 호응하여 UN군은 9월 16일 Walker라인에서 총반격을 개시하여 초반 3일간은 격전후 9월18일 종심이 얕아진 적진을 돌파하고 북진
- 미제9군단(John B.Coulter 소장/미제2, 5사단 기간): 9얼23일 작전 개사, 서부 호남지막으로 진격
- 미제1군단(Frank W. Milburn 소장/미제1기갑, 24사단, 국군제1사단(백선엽장군), 영지27여단): 주공, 경부가도로 진격.
- 국군제2군단(유재흥 준장/ 국군제6, 8사단): 중부 산악지역으로 진격
- 국군제1군단(김홍일 소장/국군제3, 7, 수도사단): 동해안을 따라 진격

◆ 9월 하순 이후 상황
-9월 26일 23:45시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한 미제7사단과 Walker라인에서 반격한 미기갑제1사단이 경기 편택 서정리에서 연결하므로서 북괴군 8개사단의 패잔병이 퇴로가 차단됨.
-10월 1일 동해안의 국군제1군단 예하 국군제3사단이 38선을 돌파 북진하므로서 38선에 도달. 38선 돌파(이날을 기념하여 후에 10월 1일을 '국군의 날'로 정함)
북괴군 남침으로 전개된 한국전쟁 중간결과
(6월25일-10월1일)
1. 북괴군 약 6개사단 병력이 남한에서 섬멸됨
2. 북괴군은 전차 전량( 대)를 비롯한 막대한 장비 손실.
3. 북괴 정권(김일성)의 남한 적화 점령 야심 좌절
4. 북괴군은 차후 저항지속능력 상실.
UN군 38선 돌파와 압록강으로의 진격
백선엽 장군 발자취(국군 보병제1사단)
경기도(파주) → 황해도(수안) →(적도 평양 1착 입성)→ 청천강(개천)
UN군 38선 돌파와 압록강으로의 진격
◆ 38선 돌파 문제
- 군사적으로는 괴멸 직전에 있는 북괴군의 재편성괴 재침을 분쇄하기 위해서는 시급히 38선을 돌파하고 북진작전이 필요했지만
- 외세(중공) 개입의 가능성 있을 정치적 문제로 UN총회에서 장시간 논의 끝에 10월7일 MacArthur장군에게 일임하기로 결정.

◆ 38선 돌파
- 9월 24일 제187RCT가 김포에 착륙, UN군 북진시 투입 준비,
- 제10군단은 인천상륙 작전을 지휘하여 서울에 입성한 후 전선은 미제8군에 이양하고, 북부 전구(강원 북부-함경도)를 답당 준비
- 10월 9일 미제1군단(미기갑제1사단, 미보병제24사단, 국군보병제1사단 (백선엽), 국군보병제8사단, 영제27여단)은 개성지구에서 38선을 돌파.
- 동부에서 이미 38선을 돌파하고 북진하는 국군제1군단(김백일 소장: 국군보병제3, 수도사단)은 10월 7일(UN총회서 38선 돌파문제를 MacArthur장군에게 일임하기로 결의 한 날)이미 원산점령.
- 중부 국군제2군단(유재흥 준장: 국군보병제6, 7사단)은 산악지역 기동에 고전 진출이 다소 늦음.

◆ 적 수도 평양 입성
- 10월 20일 김포에 투입준비중이던 미제187RCT는 평양의 북괴 정부인사 도주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숙천과 순천에 공수낙하(전사상 최초로 야포 등 중장비를 함께 투하)
- 10얼21일 미제1군단은 국군보병제1사단(백선엽 장군)을 선두로 평양 입성 점령(무용담 후술)

◆ 압록강 도달
- 평양이 점령된 10월 하순부터는 북괴군의 저항은 급격히 붕괴되어 공로를 메운 닌민과 패잔병 때문에 진격이 방해되었다. 산악으로 도주하는 북괴군은 무시한 채 국군보병제6사단(장도영 준장) 제7연대(입부택 대령)는 10월 26일 초산지구 압록강에 도달.
- 운산지구에 도달한 국군보병제1사단(백선엽 준장)온정리에 도달한 국군보병제8사단(이정일 준장)은 다소 강한 적의 저항을 받았는데 이것이 바로 중공군의 저항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 동부전선의 국군 수도사단(송요찬 중장)은 부전호 동부에 도달하고, 국군보병제3사단(이종찬 준장)은 장진호 남방에 도달했다.
- 미제10군단은 10월 26일 원산에 상륙한 국군제1군단을 통합지휘 하고 동시에 그냥 측방 통과한 국군 후방의 적 저항을 소탕하였다.
두만강으로의 진격/UN군 반격 기도
백선엽 장군 발자취(국군 보병제1사단)
평북(운산)
두만강으로의 진격
- 10월 27일 이후 미제8군 정면(서부)에 대한 중공군의 압력으로 UN군은 청천강선까지 철수했으나 동부 미제10군단 광정면에서는 북진이 계속되었다.
- 10월 29일 미제7사단함북 이원으로 상륙하여 11월21일에는 두만강 국경 도시 혜산진에 도달하였다.
- 미제1해병사단은 장전호 부근에서 많은 적설과 함께 새로운 적(중공군)의 저항에 봉착했다.
- 미 육군제3사단(Robert H. Soule소장)은 원산으로 상륙하여 11월 초 3주간 원산지역과 미제1해병사단 서측에서 미제8군과의 전투지경선까지 경계작전을 수행하였다.

◆ UN군의 반격 시도
- 11월 6일 미제8군의 Walker장군은 미제8군과 미제10군단 협동으로 청천강에서 반격 총공세를 취하고자 부대를 재정비하였다.
- 이 총반격 공세에는 남한지역에서 공비소탕중이던 미제9군단도 투입하도록 계획되었다.
- 미제10군단은 동부에서 강력한 조공으로써 적의 주병참선인 강계-희천 방향으로 공격하아여 서부 서부 미제8군의 주공을 돕기로 하였다.
- 총반격 공격일은 11월4일오 정했으나 미제9군단의 기동 지연으로 총공격은 11원24일로 연기하였다.
- 그간 미8군 예하 UN군은 계속 증가하였다. 필리핀, 호주, 터키,태국, 네델랜드, 불란서, 카나다 등 부대가 도착하였으며, 미군부대의 강화와 한국군 훈련목적으로 미국부대는 한국군인과 혼성편성하기도 하였다.
- 이렇게 하여 11월 24일 현제 재한(在韓) UN군의 총 병력은 약 42만명에 달하였는데 그중 한국군이 20만, 미군이 17.7만이었다.
- 11월 24일 개시된 미8군의 총공세는 경미한 적 저항을 물리치고 진출했으나 11월 25일 밤 중공군 22개사단의 반격에 조우하여 총공세는 좌절되었다.
- 동부 미제10군단은 11얼27일 총반격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중공군 9개사단의 반격으로 좌절되었다.

◆ UN군의 반격작전의 결과(실패원인)
- 추격작전에서 공격력의 과도한 분산
- 산악에 의거한 적 게릴라에 대한 과소평가
- 산간 도로만 따르는 진격으로 고지 제압 소홀
- 미제8군과 미제10군단의 협조된 작전 결여오 부대간 간격이 형성됨(이곳으로 중공군이 대량 침투)
중공군의 한국전쟁 개입
백선엽 장군 발자취(국군 보병제1사단)
청천강(개천) → 황해도(사리원) → 경기도 (문산) → 충북(음성)
중공군의 한국전쟁 개입과 피아 군지휘체계
피아 군지휘체계
피/아 총사령관 부대(지휘관) 목표
중공군 팽덕회
(彭德懷)
서부:중공제4야전군
동부:중공제3야전군

평양 회복
장진호-혜산진간 UN군 포위
계속남하, 북괴군 2군단 합류
UN군 서부 미제8군사령관
(Walker중장)

동부 미제10군단장
(Almond소장)
미제1군단(Milbur소장)
미제9군단(Coulter소장)
국군제2군단(유재흥소장)
미제10군단(Almond소장)
국군제1군단(김백일소장)
중공군 남하 저지
◆ 작전 경과
- 11월 25일 중공군 정규사단들이 미8군의 우익 국군제2군단과 미제9군단예하 미제2사단 간의 간격을 침투함으로써 미제8군과 미제10군단이 분리,
- 국군2군단을 정면을 돌파함으로써 미제8군은 우익이 노출, 위협을 받게되었으니 국군제2군단은 영웅적인 지연전을 전개하여 서부지역 UN군이 평양선으로의 철수를 철저히 엄호.
- 국군제2군단의 엄호하에 12월4일 평양선으로 철수한 미제1군단은 5일 대동강방어선을 구축하여 중공군을 저지할 태세를 갖추었으나 동부전선의 흥남철수작전과 때를 같이하여 전선을 정돈할 필요성이 제기되어 38선을 연한 새로운 방어선으로 철수.(38선 방어선: 한강하류-문산 북방 임진강-중부 산악-양양선)
- 중공군은 서울 북방에 주력 집결.
- 12월 23일 Walker 미제8군사령관이 교통사고로 사망, 12월 26일 Ridgway 중장이 취임.
- 동부전선은 미제7, 1해병사단이 부전호 부근에서 포위되었으나 미제3사단이 퇴로를 타개하여 12얼8일 흥남으로 철수.

◆ 흥남철수작전(12월19일-27일)
- 미제10군단은 차량 17,000대, 보급품 35만톤, 병력 105,000명을 철수할 계획으로 해/공군 지원하에 국군1군단과 미제10군단 일부가 중공군의 흥남 교두보 공격/침투를 저지하면서 12월 27일 흥남 철수를 완료.
- 철수한 미제10군단은 부산 부근에 상륙하여 12월 26일 미제8군에 편입시켜 처음으로 UN군은 단일 지휘체제가 됨
- 흥남철수작전은 2차대전시 Dankirk철수와는 달리 전 병력, 장비, 보급품을 주도면밀한 계회으로 완전 철수에 성공한 작전.
- 2월15일-12월 하순간에 38선을 연하는 전전선에서 탐색전 전개.

◆ 중공군 개입후 작전에 대한 논평(초기작전 실패 원인)
- 1. UN군 통합지휘 미흡(미제8군과 미제10군단 분할 지휘)
- 2. 산악지형 영향으로 횡적 연결 부실
- 3. 전략지역(만주 중공군기지) 폭격 불이행.
38선상에서 중공군의 2차 공세와 1.4후퇴
피아 군지휘체계와 병력
피/아 총사령관 부대/병력
중공군 (미상) 일선부대:중공군 21개사단
북괴군 12개사단
486,000명
예비대: 만주와 압록강 주변: 100만명 추산
UN군 Ridgway 중장 미제8군: 미제1, 9, 10군단
국군제1, 2군단
365,000명
-12월 30일 MacArthur장군은 미 합함으로부터 한국전쟁의 국지화(만주 확전 불허), 군 저지, 한국으로부터 철수 등 제 권한을 부여받았으나 Ridgway 장군에게는 최소한의 우군 피해로 적 피해 최대화를 위한 현진지 방어를 명령.

◆ 작전 경과
- 중공군 주공: 연천-의정부-서울, 조공: 개성, 화천, 인제
- 1951. 1. 1중공군 9개사단은 미제1,9군단 정면 공격, 1월 3일 UN군은 서울교두보-양평-홍천선으로 철수.
- 그 후 중공군이 서울 북부를 장악하자 서울은 극도로 절박한 위기에 놓이자 미8군은 중공군의 원시적인 병참능력의 한계를 고려해 평택-원주-삼척을 연하는 최후 방어선으로 철수할 것을 결심.
- 1월4일 서울, 인천 포기하고 오산을 경유 평택으로 철수하여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1.4후퇴)
- 중공군의 2차공세중 동부산악으로 침투한 북괴군 제2군단은 UN군 후방교란을 위하여 게릴라전을 전개.
- 중부전선에서는 중공군의 침투로 미제10군단과 국군제3군단 간에 거대한 간격이 형성되어 후방을 위협했는데 1월 10일 북괴군 1개사단이 이 간격으로 침투하여 국군제3군단 후방으로 진출하지 미제1해병사단을 투입하여 안동-영덕선에서 격퇴하여 동부전선에서의 적 진출과 후방 위협을 제거.
- 이 기간 서부전선에서는 큰 작전 없이 수색전을 전개.

◆ 논평: UN군은 적의 게릴라전으로 고전했으나 Ridgway 장군은 중공군의 공격력을 정확히 평가하여 적에게 최대한의 손실을 가하면서 철수에 성공하였다.
UN군의 반격과 현 휴전선에서의 공방, 교착상태와 휴전
백선엽 장군 발자취(국군 보병제1사단/국군제1군단)
경기도(문산)/강원도(삼척) →(속초)
◆ UN군 1차공세
- 1월 중순까지 UN군은 거력한 탐색전으로 적의 공세가 약화되자 Ridgway 장군은 다음 목적으로 제한된 목표에 대한 공격을 결심
1. 작전 주도권 장악
2. 계속적인 압력으로 적 병력 균형 파괴.
3. 적의 차후 대공세 사전 분쇄
4. 적의 인적 물적 손실 최대 강요

◆ UN군 Thunderbolt(벼락) 작전
- 1월 25일 Ridgway 장군은 한강 이남지역의 탈환 목적으로 서부전선에서 Thunderbolt(벼락) 작전을 감행.
강력한 공중지원하에 미제1, 9군단은 1월 30일까지 적의 경미한 저항 속에 한강에 접근, 1월 31일 이후에는 강력히 저항하다가 2월 9일 밤 후퇴함으로써 UN군은 2월 10일 서울 남방에 도달.

- 동부전선 UN군은 미제100군단과 국군제1,3군단도 서부의 Thunderbolt(벼락) 작전에 호응하여 2월5일 Roundup작전을 개시하였으나 2월8일 적의 강력한 저항에 조우.
- 2월11일 적군은 횡성-원주가도로 대역습을 해왔으나 미제7, 국군제3,5사단이 제천북방에서 적을 강타하여 작전 주도권을 장악하고, 2월21일에는 Killer작전을 개시하여 2월25일 원주정면의 적 돌출부를 제거.

- Ridgway 장군은 적의 역습에 대비하여 서부와 동부의 중공군을 분리시킨 후에 홍천과 춘천을 탈환하고 38선까지 진출하기 위하여 Ripper작전을 계획.
- Ripper작전은 서부에서는 미1군단이 서울 동남방 진지를 확보하고 동부에서 국군제1,3군단이 국부적인 공격을 하는 동안 미제9,10군단이 중부에서 일령릐 골격으로 서울 동북방으로 적을 포위코자 하는 작전.
- Ripper작전은 3월7일에 개시하여 3월 11일까지 북한강과 남한강의 합류지점(양수리) 대안에 교두보를 확보하자 이에 위협을 느낀 서울의 적군은 3월 14일 밤 서울에서 후퇴하고, 3월 15일 국군1사단(백선엽)이 서울을 탈환.
- 다음주부터 적은 지연전을 하면서 38선 북방으로 후퇴하자 3월23일 미공수제178RC를 문산부근에 투하.
- 3월27일 동부전선 국군제1군단은 38선 이북의 양양을 점령, 3월말까지는 서부 일부를 제외하고 거의 대부분 전선에거 38선 이북까지 진출.

◆ 38선 이북으로의 진격 문제
- 또 38선 돌파문제가 제기되었는데 UN은 1950년의 경험을 두려워했으나 미국 정부는 일선 지휘관에게 일임하자 Ridgway 장군은 MacArthur장군의 승인하에 진격 결심.
- 이때 중공군 제19집단군(제63, 64, 65군)은 서부 개활지로 집결하였고, 중부와 동부에는 중공군 10개 군과 북괴군 18개사단과 6개여단이 작전중
- Ripper작전후 4월 11일 UN군은 철원-평강-금화 이른바 「철의 삼각지대」에서 재편중인 적을 격파하기 위하여 Dauntless작전을 전개.
- 미제1군단은 서서히 38선을 향해 접근하였으나 점차 강한 적과 조우하여 서부 국군제1사단(백선엽 장군)은 38선을 돌파하지 못하고 문산 부근에 있었다.

◆ UN군사령관 교채
- 4월11일 트루만 미대통령은 MacArthur장군을 UN군사령관에서 해임하고 Ridgway 장군을 임명.
- 기간중에 적군은 증강되어 4월말에는 MIG-15전투기 260대를 포함한 860대의 항공기가 북한에서 활동중이었다.
적군의 춘기공세
(1951. 4. 22-7. 8)

◆ 1차 총공세(4월22일-5월16일)
- 월 22일 중공군 3개 군은 연천과 화천지구에서 공격 개시25일 새벽까느는 전 전성에서 공세를 폈는데 주공은 서부지역 미제1,9군단 정면에 두어 서울을 2중으로 포위하려 했다.
- Un군은 강력히 저항했으나 미제9군단 동부 국군제6사단 정면이 돌파되자 UN군총사령관 VanFreet장군은 미제1,9군단을 Kansas선(가평선)으로 철수코자 하였으나 가평지구 경춘가도가 차단되어 재차 홍천강까지 철수.
- 이후 적군은 서부에서 대공세를 취하여 서울을 북방과 동방에서 포위할 기세였으나 4월30일 UN군은 서울 4마일 북방에서 저지.
- 적군이 부대재편로 소강상태중일 때 UN군은 주도건 장악을 위한 탐색작전을 전개하여 5월16일까지 8마일 북진.

◆ 2차 총공세(5월17일-22일)
- 5월 16일까지 철의 3각지대에 집결한 적군은 당일 밤 2차총공세를 개시, 덕천-인제간 75마일 전선에서 21개사단을 투입, 서울 외곽을 포위 37도선까지 점령할 목적으로 가평지역에 조공, 인제지역 미제10군단예하 국군제7사단 정면에 막대한 지상포 화력지원 하에 15마일이나 진출했으나 UN군의 공군과 지상군의 강타를 받고 5월 22일 공세중지.

◆ 2차 총공세(5월23일-11월 27일)
- 적군의 공세가 약화되자 5월 23일 UN군은 미제1, 9,10군단으로 즉각 공세, 초기 진격은 빨랐으나 5월말 부터 완강한 저항에 조우하고 38선 이북으로넘어서면서 적의 강력한 저항과 산악으로 고전.
- 7월 10일 중부에서 철원을 점령하고, 동부에서 고성에 육박하던 중에 개성에서 휴전협상이 개시되어 휴전 성립시까지 대규모 공세를 않기로 합의.
- 7월 9일 개시된 UN군의 하기공세는 [철의 삼각지대]와 [Punchbowl(양구]지역을 제외하고는 소규모 강력 탐색전이 11원27일까지 계속.
- Punchbowl의 '피의 능선'과 단장의 능선'은 하루에도 수차나 주인이 바뀌으나 10월 22일 만문점에서 휴전회담이 재개되면서 연말까지는 재차 소강상태.

◆ 교착된 전선(1952년)
- 적군이 지루하게 휴전회담을 끌어가도 UN군이 강력한 공세를 취하지 않은 이유
1. 적 방어진지에 대한 공격은 성과보다 희생이 크다.
2. 휴전회담 재개로 성립될 가능성이 많다.
3. 반복된 지상전으로 각개병사의 전투의욕이 저하
4. 미, 영, 불, 카나다 중심의 서방진역 단합 결여
5. 이들은 조속한 휴전협정 성립으로 지상전 종결을 원했다.

- 1952년에 들어서면서 UN군은 적의 재침기도를 격파하고 전선의 세력균형을 도모코자 Clear-up작전(전초지역의 철수를 가장하여 적을 유인후 화력과 역습으로 격파하는 작전)을 활발히 개시하여 도처에서 치열한 소규모 전투가 전개되고 MBP(주전투지점)은 고정되어 점차 잠호화 되고 전초진지만 수차 주인이 바뀌었다.
- 기간중 전투는 주로 대포병전, 탐색전, 항공전.
- 5월 12일 UN군 총사령관 Ridgway 장군는 북대서양연합군최고사령관으로 전보발령되고, Mark W. Clark장군이 후임으로 부임.
1953년 작전
◆ 상 황
- 1951. 11. 27. 판문점 휴전회담에서 "현 접촉선을 군사분계선으로" 합의한 후 MBP(주전투지점)는 무변동, 그러나 1952년 후반기부터 전선의 병력 균형이 변동.
- 즉 UN군은 휴전을 성립시키고자 수세를 취하고, 공산군(중공군과 북괴군)은 휴전의 지체와 전선의 소강상태를 이용하여 전력을 회복

◆ 병 력
UN군:
-16개 사단 639,000명
-국군: 동부 제1군단(이형근 중장), 중부 제2군단(정일권 중장)
-1월31일 대장으로 승진한 백선엽 참모총장 휘하에 단합.
-국군 총병력 11개사단으로 155마일 현 전선의 3/4을 담당.
-미군등 기타 UN군은 서부 담당( ? )
공산군:
-중공 7개군과 북괴군 2개군단 계 120만명
-충분한 화력과 약 2000대의 항공기(약 1/2은 만주기지)

◆ 작전경과
-UN군은 적 전투력 소모를 목적으로 공중 및 지상 포화로 S-mack작전 전개
-2월 11일 VanFleet장군은 퇴역하고 ㅡMaxwel D. Taylor 중장이 미8군 사령관에 취임.
-5월 휴전회담이 활발해 지자 전선은 긴장하여 6월10일 공산군은 6개 사단 병력으로 금성지구 국군 제2군단 정면을 공격.
-UN군은 백암산-주파리 선에서 이를 저지하고, 7월 17일 반격을 개시하여 19일 11시까지 금성천에 도달하여 전선을 회복.

◆ 휴 전
-1953. 7. 27. 22:00 휴전. 3년6개월간의 6.25한국전쟁 전투 중지
-공산군 병력손실: 142만면
-UN군 병력손실: 41만명

◆ 결 론
특징:
1. 잡단안전보장을 위한 UN의 전쟁
2. 비판의 전쟁
3. 제한 전쟁
4. 심리전이 큰 비중

교 훈
1.지휘권 단일화를 위한 상급사령부의 필요성 절실
2. 게릴라전 공격에 대한 방어계획과 훈련의 필요성 증가.
3. 전투 투입부대의 철저한 전투훈련과 정치교육
4. 일성 하급지휘관의 자질 향상 중요
5. 항공사진의 중요성
6. 조우전에 대한 훈련의 필요성
7. 야간전투의 중요성
8. 전초진지의 중요성. 밀번 장군 (Frank W. Milburn)9. 민간인과 포로 처리 문제.
우중에 고백선엽장군 조문을 기다리는 육사18기 동기생들
고백선엽장군 조문후 세종문화회관 옆 커피점에서 맛있는 커피 한잔


② 고 백선엽 장군의 평양 1착 입성 무용담
<1971년 10월 육군대학 정규#72 다부동전투 현장 전술토의 초빙강의>
고 백선엽 장군이 6.25한국전쟁을 통해 우리 대한민국의 '전쟁영웅'으로 탄생 할 수 있었던 것은 앞의 한국전쟁 상황에서 보았듯이 전쟁 초기 우리 국군이 무기력하게 낙동강전선까지 밀려내려가 우리 대한민국이 대구-부산만 남은 소멸의 위기, 바람앞에 등불 같은 위험천만한 시기에 태동되고 있었다.

이런 위급한 시기에 고 백선엽 장군은 부하들에게 "내가 도망하거던 나를 쏴라" 고 할 정도로 솔선수범하였고, 휘하 사단 장병들은 사단장을 믿고 일치단결하여 혼신의 힘을 다하여 맡은 참호속에서 그야말로 물밀듯이 몰려오는 북괴군을 향해 총열이 싯뻘겋게 달아오르도록 쏘고 쏘고 또 쏘면서 적 주공 정면의 주저항선의 중심 유학산(해발 839m) 을 걷든히 지켜냈다.
1950년 8월 5일 부터 9월 16일까지 장장 41일 동안이다. 조선조 인조 14년의 병자호란으로 야기된 남한산성 농성전투와 맞먹는 기간을 버텨 낸 것이다.

이 상황을 보고받고, 지켜보고, 또 항공사진으로 확인하면서 남모르게 미소짓고 있는 사람이 있었으니 당시 직속상관으로 부임한지 얼마 안되는 미제1군단장 프랭크 밀번 장군 (Frank W. Milburn)이다.
고 백선엽 장군이 그의 자서전(?)에서 "나의 군사적 재능을 일깨워 준 위대한 스승"이라 했던 미국 장군이었다..

밀번(Milburn) 장군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미제7군 예하 미제21군단장으로 프랑스 마르세유에 최초로 상륙, 독불(獨佛) 국경지대인 알사스-로렌 지역으로 진격했다.
이때 그는 미군 2개 사단과 드골 장군이 지휘하는 자유 프랑스(Free France)군 2개 사단을 통합지휘함으로써 미군 장성 중 최초로 ‘자유프랑스 훈장’을 수여받았다.

6·25한국전쟁 발발 당시 그는 서독에 주둔하고 있던 미제1사단장이었다. 그는 처음에는 한국전선의 미제9군단장에 내정됐으나, 공세 이전의 상황에서 워커 미제8군사령관에 의해 주공군단인 미제1군단장을 맡게 됐다.
이때 그는 서독에서 미제1사단장 시절 그의 참모장과 참모들을 데리고 한국전선으로 왔다. 참모장 밴브런트, 정보참모 톰슨, 작전참모 지터 등이 그들이다.

밀번 장군은 1914년 웨스트 포인트를 졸업했다. 그는 생도시절 미식축구 공격수로 맹활약했다. 그는 축구경기에서 마치 등을 움츠리고 잽싸게 뛰는 새우처럼 공격한다고 해서 ‘새우 밀번(shrimp Milburn)’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의 이런 투지와 적극성은 군대생활에 그대로 적용했다.

고 백선엽 장군은 자서전(?)에서
「6·25전쟁 초기 나를 가장 신뢰하며 내 재능을 마음껏 발휘하게 했던 장군이 있다면 그는 밀번 장군일 것이다. 그는 그만큼 내가 군 고급지휘관으로 성장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줬다.

밀번 장군은 온화하면서도 투지가 강하고, 부하를 칭찬해 쓰며, 한번 신뢰한 부하에게는 간섭보다 권한과 책임을 부여하고 그 결과를 기다릴 줄 아는 배포있는 지휘관이었다.
내가 그런 지휘관 밑에서 전쟁 중 가장 중요한 시기에 함께 작전했다는 것은 커다란 행운이었다.

그분은 그만큼 한번 신뢰하는 부하들은 끝까지 믿는 대범한 지휘관이었다. 그런 밀번 장군이 총반격을 앞두고 나의 1사단을 주공인 미제1군단에 배속시킨 것은 나에게는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였다.
그와의 첫 만남은 대구 교외 사과밭에서였다. 그는 낙동강에서 우리 1사단의 선전을 치하하며, 전황은 곧 공격으로 전환될 것인데 귀하의 국군제1사단은 미제1기갑사단, ·미제24사단과 함께 미제1군단에 배속됐다고 말했다.

이때 그분은 국군 전체 사단의 화력보다 우세한 미군 포병부대(3개 대대)를 나에게 배속시켜 줘 장차 통합지휘관의 역량을 마음껏 발휘케 했다.
내가 그분을 다시 만난 것은 군단사령부가 있는 대전에서다. 내가 속리산의 적 패잔병을 소탕하고 청주에 도착했을 때 군단사령부에서 작전명령을 직접 수령하라고 해서 군단사령부에 도착하니 미군사단장들은 이미 작명을 수령해 가고 없었다.

군단참모장으로부터 평양 공격이라는 작명을 받고 기쁜 마음에 투명지를 살펴보니 우리 사단은 해주~진남포 행으로 평양 입성이 제외되어있었다.
반면 미제1기갑사단(후속 영제27여단)은 경의선 축선을 따라 주공으로서 평양으로 진출하고, 미24사단은 시변리~수안을 거쳐 평양으로 진격하는 것이었다.

군단장을 찾아간 나는 한국군인 우리 1사단이 평양을 공격해야 한다는 것과 청일전쟁 시 일본군 평양 공격 전례를 들어 우리 사단을 공격의 선봉에 서게 해줄 것을 간청하였다, 밀번 장군은 참모장에게 전화해 국군제1사단과 미제24사단의 임무를 바꾸라고 지시했다.
특히 1사단이 공격 첫날부터 난관에 부딪치면서 전차증원을 요청하자, 그는 흔쾌히 전차 1개 중대
(3개소대x전차5대+중대본부2대=계17대)를 보내줘 미군사단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경쟁하게 되었다.

나는 밀번 장군의 크나큰 신뢰에 '평양 1착 입성'으로 보답했다. 내가 그에게 준 첫 선물이었다.
'평양 최초 입성' 후 백선엽 사단장이 밀번 군단장으로 부터 훈장을 수상하는 장면
이어 나는 북진 시 생포한 중공군 포로를 밀번 장군 앞에서 직접 심문, 적의 실상을 알게 했다.
또 평북 운산 최일선에서 처음으로 중공군과 접전하여 우리 1사단이 전멸될 위기에 몰렸을 때 나는 이를 적시에 보고해서, 헤닉의 미고사포군단 전 화포로 1만3000여 발의 포탄을 퍼부어 위험한 고비에 화력으로서 우리사단을 구하였다.

특히 임진강선 철수와 이어지는 37도선 철수 그리고 서울 재탈환 시 나에 대한 그의 강한 믿음과 적극적인 지원으로 우리 1사단은 적의 어떠한 공격에도 끄떡하지 않았다.
1951년 내가 소장 진급과 동시 국군제1군단장으로 영전하자 그는 과분하게도 서한을 보내 “당신은 가장 뛰어난 리더(You are the most skillful leader)”라며 축하했다 」
"그분은 나의 군사적 재능을 일깨워 준 위대한 스승이었다"
고 백선엽 장군이 '평양 1착 입성을 밀번 군단장에게 드린 첫 선물'이라고 한데는 그만한 사연이 있었다.

1971년 육대 교육중 '다부동전투' 현장에서 전술토의 할 때 장군이 직접 오셔서 다부동전투에 관한 이야기를 실감나게 설명하신 다음, 여담으로 평양 입성 일화를 너무나 재미있게 하셔서 나는 지금도 그 이야기를 잊지 않고 있다.

앞에서 고 백선엽 장군은 평양을 공격하는 작전에서 "군단장에게 한국군 사단에는 한대도 없는 전차증원을 요청하여 흔쾌히 전차 1개 중대를 배속받아 미군사단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경쟁하게 되었다"고 했지만 이것은 겸손한 표현이다.

당시 경쟁해야 할 미군부대는 제1기갑사단으로 미군 사단 중에서도 '전차위주 보전협동' 개념으로 편성되어 필요시는 전 전투원을 전차, 장갑차, 트럭에 태우고 일거에 기동할 수 있는 가장 모범적으로 기동화 된 사단이다.
전차 1개중대 배속 받았지만 아직도 훨씬 못미치는 기동력이었다. 더구나 현 상황에서 배속된 미군 전차만 빠른 속도로 앞서 가서 먼저 평양에 입성한다는 것이 의미가 없는 일이다.

고 백선엽 사단장도 이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사단 작전회의 때 여러 참모들과 각급 예하 지휘관들에게 기동문제를 화두로 내놓았지만 지금 사단이 보유한 이동 가능한 차량 수준으로는 방법이 없어 뾰족한 방안을 제시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한참 뒤 저 뒷쪽에서 미군 대위 한사람이 일어나서 앞으로 나와 영어로 뭐라고 하는데 통역이 전하는 요지는
"모험을 할 수 있느냐? 저의 전차중대 17대의 전차위에 최대 보병 1개대대 전투병력을 탑승할 수 있다. 1개 소대당 전차 2대, 총 17대에 현 병력 수준의 8-9개 소대가 승차할 수 있으니 행정/근무병을 제외하면 1개 보병대대 전투병력이 모두 전차에 탑승하여 동시에 기동 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 기갑대위, 전차중대장의 제안은 사단장 뿐만아니라 작전회의에 참석한 모두의 눈과 귀를 확 트이게 했다고 했다.
외국군 부대에 배속 나온 중대장, 대위가 이런 용감한 제안을 할 줄은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것이라고 하였다.
나는 그 장교, 아니 대부분의 미국장교들은 군대의 지휘관계에 있어서 국적, 친소(親疎), 파벌, 인사권 보다 현재 자기에게 임무를 부여하는 지휘관과 부여된 임무에 충실한 점이 군 전력을 강하게 하는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해서 선두 보전협동 기동부대를 편성하기로 했지만 문제는 전차가 대동강을 어떻게 건너가느냐 하는 문제가 남아 있다.
미제1기갑사단에는 대대규모의 공병부대가 충분한 부교셋트로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부교가설 시간이 좀 지연될 뿐 전투부대가 대동강 정도 건너는 것은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여기서 고 백선엽 사단장은 또 한번 모험을 하기로 마음 먹었는데 그것은 고향이 평양에서 멀지 않는 평안남도 강서 출생으로 어린시절 평양에서 오래 살면서 대동강에 자주나가 멱감으며 물놀이하고 놀면서 약간 북쪽 외곽에 걸어서도 도섭이 가능한 곳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수심이 얕을 뿐만 아니라 수중 지질이 단단하여 전차가 충분히 통과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되어 전차중대장과 공병대대장에게 그곳에 대한 도상 및 현지 정찰과 주변 민간인들에게 탐문하도록 한 결과 전차가 병력을 탑승한 채로 충분히 도섭가능 하다는 결론을 내려 실행하도록 결심하였다고 하였다,
결국 성공하므로써 미제1기갑사단이 부교 가설하는 시간에 먼저 규모는 적지만 보전협동작전으로 평양 도심부에 먼저 진입할 수 있었다고 하였다.
이것이 곧 고 백선엽장군이 '평양 1착 입성' 무용담이며 고마운 밀번 군단장에게 드리는 첫번 째 선물이라 한 것이다.
당시 백선엽 사단장께서 알아서 잘 했겠지만 배속된 미군 전차중대장에게도 고마운 마음을 이 지면에서나마 보냅니다.

고 백선엽 장군은 이와같이 스스로 군인으로서 전투와 직무에 충실했던 성실성 때문에 당시에도 미국사람들에게 좋은 인상과 존경을 받았지만, 43년이 지난 2003년에도 '한미우호상'을 수상하였다.
또 얼마 전까지도 주한미군사령관과 주한 미대사가 부임하거나 퇴임 할 때는 빼놓지 않고 찾아 뵙는 것이 마치 전통처럼 되어 왔다.
아마 이 전통은 이후로도 고 백선엽장군의 묘소를 참배하는 것으로 이어질지도 모른다.
미국 대통령 트럼프도 '잘사는 대한민국'이라 했는데 6.25한국전쟁에서 고 백선엽 장군 같은 영웅이 없었던들 오늘의 대한민국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대한민국의 대통령이란 사람(문재인)이 고 백선엽장군 빈소를 외면하고, 그 졸개 종복죄파 놈들이 '친일' 운운 하는 꼴을 보면 저런 인간도 아닌 인간들과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내 자신이 참으로 부끄럽다는 생각이 든다.

기분전환 의미로 젊은시절 막걸리에 저가락 장단 맞춰 눈물 글썽거리며 불렀던 트롯 가사 하나 올리면서 끝냅니다.
삼팔선의 봄
(김석민 작사, 박춘식 작곡, 최갑식 노래)
1, 눈녹인 산골짝에 꽃이 피누나
2.눈녹인 산골짝에 꽃이 피는데

철조망은 녹- 슬고 총칼은 빛- 나
설한에- 젖은마음 풀릴길 없- 고

세월을 원망하랴 삼팔선의 봄
꽃피면 더욱슬퍼 삼팔선의 봄

싸워서 공을세워 대장도 싫- 소
죽음에서 달리-는 북녁 내 고-향

이등병 목숨바쳐 고향 찾으리
그동포 웃는얼굴 보고 싶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