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사(瀕死)의 사자상' 스위스와 사라진 류쿠(琉球)왕국
<나라와 평화를 지키려는 두 가지 전략의 성(成)과 패(敗)>
沙月 李盛永(2012. 4. 7)
  나라와 평화를 지키려는 데는 크게 상반되는 두 가지 전략으로 대별할 수 있다. 하나는 강병(强兵)을 길러 적국의 침략에 철저히 대비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평화국가’ 기치를 높이 걸고 아예 군대를 갖지 않고 타국들이 선처 해주기 바라는 전략이다.

  조선일보에 이 두 가지 전략과 그 성공(成功)과 실패(失敗)의 결과를 잘 설명해 주는 칼럼이 올랐는데
  전자는 2012년 4월 3일자 조선데스크에 김홍수 경제부 차장의 「小國의 생존법」으로 스위스를 예로 들었고, 후자는 2012년 4월 5일자 태평로에 정우상 논설위원의 「'평화국가’, 꿈에서 깨어난 이후」로 지금은 나라가 없어져 일본의 한 영토가 되고, 종족은 일본인의 1%도 안 되는 소수민족으로 전락한 류쿠(琉球)왕국을 들고 있다.

    칼럼 「小國의 생존법」의 내용을 간추려 보면
  스위스는 국토의 75%가 산악지대이고 별다른 자원도 없으면서 지금 부국(富國)이 되는 과정을 이야기 하면서 루체른 빙하공원에 있는 ‘죽어가는(瀕死) 사자상’과 강력한 스위스 민병대를 들고 있다.
루체른 빙하공원의 ‘죽어가는(瀕死)의 사자상’
  60년대 우리가 가난하던 시절 우리의 선배들과 동료들이 독일의 탄광과 병원, 월남의 전쟁터, 중동의 뜨거운 사막에서 땀과 피를 흘리며 외화를 벌어와 경제개발의 밑천에 보태면서 다른 한편으로 국제사회에 우리의 근면성을 알리고, 신뢰를 쌓아 오늘의 대한민국을 이룩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듯이, 스위스의 선조들은 유럽 각국에 용병(傭兵)으로 고용돼 ‘외화벌이’를 하면서 돈은 벌어들이고, 국제사회에 신용을 심었다.
  루체른 빙하공원에 있는 ‘죽어가는(瀕死) 사자상’ 은 선조들의 이런 희생을 잊지 않으려는 기념물로 1821년 덴마크 조각가 토어발트펜 작품이라 한다.
‘죽어가는(瀕死) 사자상’ 설명
  스위스 용병을 상징하는 사자가 화살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프랑스 부로봉왕가 루이16세 왕을 상징하는 흰 백합문양이 새겨진 방패를 보호하고 있는 돌 조각품인데 이는 1792년 파리 튈러리궁전(현 루불박물관)에 시민혁명군이 몰려와 루이16세는 도망갔지만, 스위스 용병 700명은 끝까지 궁전을 지키며 옥쇄했다. 시민혁명군이 항복을 권했지만 용병들은
  “우리가 항복하면 스위스인들의 신용(信用)이 떨어져 후손들이 더 이상 용병 일자리를 얻지 못한다” 면서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는 것이다. 용케 살아남은 두 사람은 이어지는 나폴레온시대에도 근위병 용병으로 고용되어 근무했다고 한다.

  스위스 은행들은 이들 스위스인 용병들이 벌어온 외화를 취급하면서 금융노하우를 축척하고, 유럽 귀족들의 신뢰를 얻어 스위스 은행은 '믿을 수 있는 은행'이라는 신뢰 때문에 세계적으로 번창하는가 하면 신용 때문에 세계 검은돈이 숨는 곳이라는 부작용도 생겨나게 되었다.
  로마교황청이 500년 이상 스위스 용병을 근위병으로 채용해온 것도 프랑스 왕실의 스위스 용병들이 생명을 신뢰와 바꾼 전통 때문이다.
  스위스에는 약속을 지키는데 필수 도구인 시계산업이 발달한 것도 이런 스위스인들의 신용을 지키는 문화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스위스가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 강대국의 틈바구니에 끼어 있으면서도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번영을 구가하는 것은 신용(信用)과 함께 실용주의(實用主義) 정신과 철저한 안보관(安保觀) 때문이라는 것이다.

  2차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이 스위스 철도를 이용해 무기를 수송하자 스위스군은 독일 열차를 세우고 무기를 모두 압수하니 독일은 스위스를 침공하려 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스위스는 40만 군대를 동원하고, 수 많은 스위스 내 터널과 교량을 모두 파괴하겠다고 맞섰다. 그러면서도 뒤로는 스위스군 최고군사령관 앙리 기장 장군은 베른 인근 시골 마을 레스토랑에서 극비리에 독일 나치스 친위대 최고 간부를 만나
  “독일이 스위스를 선제 공격하지 않으면 스위스도 민병대 동원령을 내리지 않겠다”는 약속을 내세워 독일을 압박하여 독일군의 스위스 침공을 막았다고 한다.

  스위스는 직업군인이 3,700명에 불과하지만 민병대 동원조직은 이스라엘과 함께 세계 최고 수준의 동원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민병대원은 20세부터 40세까지 매년 10여 일씩 훈련을 받는 병역의무를 귀찮아하지 않았다.
  2001년 민병대 폐지안이 국민투표에 부쳐지자 국민들은 찬성율 21%에 그치고 79%가 반대하여 부결시켰고,
  얼마 전 스위스 국민들은 모든 고용자들의 연간 4주 유급휴가를 6주로 증가하는 안도 국민투표에서 부결시켰는데, 이는 유급휴가의 증가가 기업의 비용부담을 늘려 국가경쟁력을 훼손하는 것을 걱정해서 ‘돈 받으면서 놀기’를 스스로 포기한 것이다.
  또 스위스는 바다가 전혀 없는 나라지만 자국 상선들의 항로를 보호해야 한다는 이유로 24척으로 구성된 함대를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 루체른 관광 사진
  2002.3.29-4.7간 우리 부부는 김연종 부부와 함께 이태리, 오스트리아, 스위스, 프랑스, 영국 등 서부 유럽 5개국 관광 때 스위스에서는 등산열차로 해발 3454m의 융프라우요흐역까지 올라 융프라우(4158m)관광하고, 프랑스 파리로 가는 도중 잠시 루체른에 들려 경관을 구경하고 간 적이 있다.
  루체른은 인구69,000의 루체른주 주도(州都)로 루체른호 서안 로이스강 기점에 위치한 스위스 최대의 휴양 관광지로서 시내에는 8세기경 건립된 성당, 17세기 건립된 공회당, '루체른 빈사(瀕死)의 사자상' 등이 있다고 가이드 설명을 들었지만 시간 제한으로 다 가보지 못하고,
  루체른호에 1333년에 건설된 길이 200m의 유럽 최고(最古)의 목교 카펠교 주변만 산책하며 먼발치에서 풍광만 감상하고 떠났는데 지금 ‘빈사(瀕死)의 사자상’의 영상을 대하니 그 때 구경하지 못한 것이 몹시 후회된다.
루체른호반 주변과 잔설이 덮인 산 경치
위는 김연종 부부, 아래는 우리 부부
유럽 최고(最古)의 목교(木橋) 카펠교
천정에 17세기의 루체른 관련 이야기를 모아 110장의 판화가 걸려 있다.
언덕 위 아담한 성당(8세기 건립 성당?)이 보이는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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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이 자랑하는 미국 LPGA(여자프로골프협회)에서 활약하는 미야자토 아이(宮里藍)는 오키나와(沖繩,충승) 출신이다.
  올해 나이 26세 밖에 안되니 본인도 일본인으로 알고 있을지 모르지만 사실은 99%를 차지하는 일본족에 속하지 못하고 1% 밖에 안 되는 류큐족, 니브히족, 윌타족, 아이누족 등 홀대받고 있는 소수민족들 중 류쿠족(琉球族)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일제 치하에 있을 때 런든 올림픽에서 손기정 선수가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뛰어 세계기록으로 우승하면서 눈물을 삼켰던 심정으로 미야자토 아이(宮里藍)도 경기를 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칼럼 「'평화국가’, 꿈에서 깨어난 이후」의 내용을 훑어보면
  류쿠열도의 섬으로 구성된 오키나와현은 북위 26도 선상에 있어 위도상으로 하와이나 타이완과 비슷하다. 원래 이 땅에는 일본인과 다른 언어와 문화를 가진 민족(류쿠족)이 살고 있었다.
류쿠열도(오키나와) 위치
  미야자토 아이(宮里藍)는 얼굴이 가무잡잡한 것이 멜라네이시안에 가깝고, 키 155Cm, 몸무게 52Kg의 체격이 마이크로네시안에 가깝게 왜소하지만 2008-2011년간 미LPGA 6승과 3등 1회,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골프 여자부문 개인상 금메달, LET(유럽여자골프투어) 2011년 상금왕을 차지하였다.

  아직 초반이기는 하지만 2012년도에도 골프투어마다 상위 그룹 조에 편성되어 선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골프 평론가들이 그녀를 특히 ‘숏게임의 달인’이라 칭송하고 있고, 그 왜소한 체격에도 드라이버샷 비거리는 덩치 큰 선수들을 능가하고 있다.
미야자토 아이(宮里藍)
<* 잠깐 >
  나는 미야자토 아이(宮里藍)가 미 LPGA투어에서 위와 같은 좋은 성적을 내면서도 일본 JLPGA투어에만 출전하면 신통한 성적을 못 내는 이유를 몰랐었다.
  이 이야기를 쓰면서 그녀가 일본에서 홀대 받고 있는 류쿠인이라는 것을 알고는 그 이유를 알았다.
  일본 JLPGA투어에 진출한 대한민국 낭자 골퍼들이 이미 100승을 달성하고, 연간 10승 이상 우승배를 들어올리는 기염을 토하며 기가 살아있는 것과는 달리,
  사라져버린 조국 류쿠왕국의 후손 미야자토 아이(宮里藍)는 국적은 일본인이면서도 일본인 상전들 앞에서 기를 못 펴고 주눅이 들기 때문인 것이 틀림 없다.
  마치 일제 때 일본인들이 우리 민족을 '조센징' 하며 하인 취급 하던 때를 떠올리게 한다.
  일본사람들은 1609년부터 류큐가 자신들의 속국(屬國)이었다고 주장하지만 미야자토 아이(宮里藍)의 조상 류쿠족(琉球族)은 1429년부터 통일왕조를 이루고, 군대가 없는 비무장국가(非武裝國家)로서 500년간 무역과 외교로서 독립을 지켜왔다.
  조선조 때 신숙주가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와서 성종2년(1471)에 지었다는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에도 류구국도(流球國圖) 지도와 함께 류쿠왕국(琉球王國)에 관한 기록이 있다고 한다.

  1609년 일본의 1차 침략 후에도 류쿠는 1년에 두 번 중국에 조공을 바치며 해상무역권을 유지하면서도 중국 몰래 일본에도 정치적 예(禮)를 갖추어 소위 세력균형(勢力均衡) 외교와 해상무역이 가져온 경제적인 풍요로서 평화(平和)를 지켰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일본이 메이지유신을 단행하면서 아시아에서 서구화 선두에 서는 반면 중국(靑)이 서구 열강의 놀이터가 되면서 류구의 ‘평화국가(平和國家)’ 전략은 그 한계에 다다르고 말았다.

  일본은 1879년 4월 4일 신무기로 무장한 일본군 500명의 병력으로 류쿠왕국을 단숨에 함락시켰다. 류쿠에는 상선 수백척이 있었지만 군함은 한 척도 없었고, 소수의 호위병들은 왕의 경호원일 뿐 나라의 군대는 아니었다. 평화국가(平和國家)의 꿈 속에 살던 류쿠왕국은 이렇게 해서 하루 아침에 지구상에서 사라져 버렸다.

  ‘평화국가(平和國家)’ 미몽(迷夢)에서 깨어난 류쿠인들을 그 후 일본인들이 저지르는 전쟁범죄(태평양전쟁)의 하수인으로 굴욕과 비극 속에 살아야 했다.
  특히 1945년 3월 태평양전쟁의 패색이 짙어진 일본은 류쿠인들의 땅 오키나와를 본토 방어용 방패로 삼으면서 미국과 일본이 오키나와에서 대규모 공방전을 벌이는 바람에 류쿠 주민 1/4인 12만명 이상이 일본 군부의 ‘옥쇄작전’ 명에 따라 집단 자결하거나 일본군에게 학살당했다.

  전후 류쿠의 주인은 미국으로 바뀌었다가 1972년 다시 일본으로 바뀌면서 류쿠인의 운명이 류쿠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남의 손에 맡겨져 이리 저리 떠다녔다.
  2009년 총선에서 일본 민주당은 ‘평화의 섬 오키나와’를 공약으로 내 건 시민단체들의 장단에 맞춰 미군기지 이전을 공약했지만 총선 승리 후 이로 인하여 미-일관계가 악화되고 방위계획에 차질이 오자 공약을 파기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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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빈사(瀕死)의 사자상'이 말해주는 바와 같이 국제적 신용을 생명과 바꾸면서 번영의 기틀은 다지고, 국가안보를 위한 병역의무를 국민들 스스로 지키면서 동원체제를 굳건히 유지해 온 스위스는 작은 나라지만 세계 230여개 나라 중에서도 당당한 독립국(獨立國)으로서 선두그룹에 드는 부국(富國)이요 선진국(先進國)으로 국민들은 세계 어느 민족보다 행복을 구가 하고 있다.

  ‘평화국가(平和國家)’ 꿈속에서 깨어나지 못했던 류쿠족(琉球族)의 류쿠왕국(琉球王國)은 이미 지도상에서 사라졌고, 그 종족들은 일본의 소수민족으로 전락하여 자기들의 운명이 남의 손에 의해 죄지우지 되면서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소국이면서 독립국, 부국, 선진국으로 잘 살고 있는 스위스와 이미 지도상에서 살아지고 그 종족들만 남아 일본의 소수민족으로 운명을 남의 손에 맡기고 살아가는 류쿠왕국(琉球王國)의 교훈을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평화(平和)를 앞세우며 제주해군기지 건설 반대를 외치는 좌빨들의 반미종북행위, 갓 체결된 한-미FTA를 시행 해 보지도 않고 재협상-폐기 운운 하며 반미(反美)를 획책하는 국제신용의 철면피(鐵面皮)들의 농간에 국민들이 속아 올 해 우리나라의 명운이 걸린 총선과 대선의 귀중한 표를 그들에게 던진다면 멀지 않아 류쿠족의 후회를 뼈에 사무치게 느끼며 한탄할 날이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