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인민위원장(面人民委員長)
沙月 李 盛 永(2005. 10,11)
  지난 봄에 시골에 가 있는 동안 어느 한가한 날 우리 내외는 산나물을 뜯으러 나섰다. 건너 앞산 양지편이 매년 빼놓지 않고 가는 코스다.

  요즈음 멧돼지가 농작물에 큰 피해를 준다는 것은 산골이면 어디나 들리는 이야기이고, 간혹 TV에서도 호소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우리 시골도 마찬가진데 그래도 앞산 주변에는 지금은 논농사만 있을 뿐 밭농사가 없기 때문에 이곳에 멧돼지 피해 이야기는 없지만 시루봉을 오르다 보면 멧돼지가 산을 엄청나게 파 헤친 곳을 쉽게 볼 수 있다.

  빽빽히 들어찬 관목들을 헤치고 겨우 겨우 빠져나가면서 눈과 손을 바쁘게 움직여 나물을 찾아 뜯었다. 주로 취나물이다. 소나무와 일본입갈나무(낙엽송)들이 숲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하늘 말고는 보이는 것이 없어 위치와 방향을 가름하기가 힘들다.
  얼마쯤 나갔을 때 앞이 훤히 트이는 곳이 있다. 묘지다. 갈증도 나고, 시장기도 있어 잠시 쉬면서 물과 간식을 먹기로 하고 묘 뜰로 나섰다. 그 때 머리카락이 쭈뼛이 서는 광경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묘의 봉분이 반으로 갈려져 있는 것이다. 섬짓했다. 어려서 할머니로부터 천년 묵은 여우가 묘를 파서 송장을 먹는다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고, 또 납양특집 같은 무서운 이야기에 공동묘지 무덤이 단골로 등장하는 것을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이가 고희 문턱에 와 있는 지금 어린시절 들은 이야기가 나의 생각을 지배하지는 못했다. ‘아! 여기도 그 놈의 멧돼지 피해 지역이로구나!’고 생각하면서 집사람을 안심시키는데 신경을 썼다. 그래서 일부러 가까이 가 보았다. 봉분에 멧돼지가 뿌리를 좋아하는 원추리 같은 풀이 있어 그 뿌리를 캐먹기 위해 팠던 모양이다. 관까지 파내려 간 것은 아니고 봉분의 2/3 정도는 파내려 간 것 같다.

  묘지 앞 상석(床石)에 쓰여진 글을 보니 ‘學生南陽洪公諱鳳基之墓’(학생남양홍공휘봉기지묘)다. 고향 아랫 사드레(沙月)에 살던 분이다. 선친과 동연배인 것으로 기억된다. 그 아들은 나보다 국민학교 1년 선배이고, 막내 딸은 동기생이었다. 일찍이 신식 글을 배워 일제시대에 면서기를 지냈기 때문에 동네에서는 보통 ‘홍서기(洪書記)’라고 불렀다.

보수된 홍봉기씨 묘소

  2005. 8. 29. 동아일보 객원논설위원 서울대 정치학 박효종교수가 동아광장에 올린 「민족주의에 눈감은 ‘친일발표’」라는 칼럼을 읽으면서 이 분과 관련된 옛날 일이 하나 생각이 났다.

  내가 6.25한국전쟁을 만난 것은 국민학교 5학년 때. 한 창 들로, 산으로, 냇물로 뛰어다니며 놀던 때다. 전쟁으로 아군이 밀려 내려와 우리 고향도 인민군(人民軍) 치하(治下)에 정확히 2개월을 살았다. 유두(流頭, 음력 6월 15일)날 아침에 아랫 사드레(沙月)에 있는 지서(支署)가 피난 짐을 싸 가지고 떠나고, 오후에 늙은이나 어린이나 간에 무조건 ‘동무!’라고 부르는 인민군이 들어왔다.

  꼭 두 달이 지나 추석(秋夕, 음력 8월 15일)날 아침에 끝도 없는 인민군 패잔병 행렬이 동네 앞 신작로를 따라 삼도봉으로, 덕유산으로 꾸역꾸역 들어가고, 정오쯤에 마치 릴레이나 하는 것처럼 검둥이 흰둥이 섞인 미군 트럭 행렬이 숲에 있는 방위대와 대한청년단이 훈련하던 마당에 들어와 동네마다 집집마다 수색하기 시작했다.

  인민군 치하에서 다시 대한민국 치하로 돌아온 것을 ‘수복(收復)’이라 했다. 우리 고향은 2개월 만에 수복된 것이다. 점령되거나 수복되거나 간에 치루는 첫 행사가 소위 ‘악질 반동분자’ 또는 ‘부역한 사람’을 색출하는 것이다.

  미군들이 수색해서 부역한 사람이라고 체포하여 김천으로 데리고 가서 김천경찰서에 넘긴 사람이 누구누구인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속에는 유월 유두날 우리 고향에 인민군 뒤따라 들어온 ‘인민군공작대’라 불리는 사람들에 의하여 부항면인민위원장(아군으로 치면 부항면장)으로 임명되었던 아랫 사드레 사는 홍봉기(洪鳳基)라는 사람도 있었다. 바로 멧돼지들에게 파헤쳐진 이 무덤의 주인이다.

  홍면위원장은 며칠 후에 곧 석방되었다. 홍면인민위원장이 미군에 잡혀가자 면민들은 즉각 구명운동을 벌렸다. 홍위원장이 적치하에서 면민을 보호하기 위해서 노력한 사실들을 열거하고, 그 밑에 많은 면민들이 서명한 탄원서를 김천경찰서에 제출한 것이다.

  실재로 적치하 2개월 동안에 우리 고향에서는 한 사람도 그 흔했던 인민재판(人民裁判)에 회부되어 공개처형 되지 않았다. 그는 비록 면인민위원장이라는 감투를 쓰고 있었지만 각 동네 이장들이 모인 곳이나 동네를 순회하면서 보국대 차출 등 인민군의 작전 협조를 호소하는 자리에서도 눈치 껏 ‘피할 것’을 암시하거나, 적치(敵治)가 오래 가지 않을 것이니 요령껏 해서 살아 남아야 한다는 것을 면민들에게 암시해 주었다.

  비록 그가 면인민위원장으로 적에게 부역했지만 면민(面民)이 희생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였다는 것이 주민들의 탄원서로 입증되었기 때문에 곧 석방된 것이다.
  그 후로도 그가 면인민위원장을 했기 때문에 본인은 물론 그 자녀들에게도 그 후로 강화된 국가보안법이나 군사보안법에 의하여 어떠한 불이익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다.
  또 그로 인하여 고향을 쫓겨나거나, 떠나야 하는 일도 없이 천수(天壽)를 다하고 죽어서 고향의 앞산 양지바른 곳에 묻혀 있는 것이다. 오히려 죽어서 ‘자연보호’의 산물인 멧돼지의 극성에 묘가 파헤쳐지는 수난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요즈음 참여정부의 개혁코드에 맞추어 앞장서 춤추는 소위 개혁세력의 앞잡이 「민족문제연구소」와「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라는 단체가 합작으로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1차 3090명의 명단을 발표했다고 한다. 나도 신문에서 지명인들의 이름이 들어 있다는 기사는 보았지만 명단을 보지는 못했다. 그들은 이 발표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가정 위에서 이루어졌다고 했다 한다.
  (1) 친일행위(親日行爲)는 명백히 정의(定義) 될 수 있고,
  (2) 친일행위를 한 인물(人物)들을 객관적(客觀的)으로 검증(檢證) 할 수 있다는 가정이다.

  과연 이 두 가지 가정이 현실적으로 성립될 수 있을까?
일본 제국주의 침략으로 나라를 통째로 빼앗겼던 36년 동안에 그들의 통치에 협력해서 벗나무도 심고, 일본글과 일본말도 배우고, 그들에게 세금을 내고, 그들의 군량미 조달에 생산된 벼 80% 이상 공출하고, 신사를 참배하고, 덴노헤이까 반사이(천황폐하 만세)를 부르고, 창씨 개명을 하고, 돈 번다고 일본에 가서 제철공장에서 일하고, 징용과 징병에 나가고, 학교 선생이 되어 일본글과 일본말을 가르치고, 면서기가 되고, 세무서 세리가 되어 동네마다 술조사 한다며 집안 구석구석 뒤지고, 일본 육사에 가서 일본군 장교가 되고, 구장, 반장으로 놋그릇, 놋수저를 거두고, 도로를 딲거나 보수하라고 부역을 보내고, 송진 채취를 할당하고,----
  어디까지 열거해야 될지 모르겠다. 이런 행위들 중에 어떤 것까지가 친일행위이고 어떤 것은 친일행위가 아닌가? 만약 전부 친일 행위라면 1945년 이전 출생으로 국내에 남아 있던 사람은 하나 빠짐 없이 친일인사가 아니겠는가? 과연 친일 행위를 정의 할 수 있을까?

  주(周)나라에 와 벼슬하고 있으면서도 ‘조국 고죽국(孤竹國)을 침략한 주나라 곡식을 먹지 않겠다’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만 캐어먹고 살다가 결국 굶어죽은 백이숙제(伯夷叔齊) 같은 사람 말고는 아무도 친일 평가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 아닌가.
  하기는 후세 사람 중에는 백의숙제도 비웃는 시조를 지은 사람도 있지 않았는가.
  수양산 바라보며 이제(夷齊)를 한하노라
주려 죽을진들 채미(採薇)도 하는 것가
                  비록애 푸새엣 것인들 긔 뉘 ㅅ다헤 낫드니
(成三問)

  나는 일제 강점 말기인 1939년에 태어났다. 부친께서는 대대로 내려오는 집안의 핏줄을 말하는 연안이씨(延安李氏)의 성(姓)의 이(李)를 따고, 항렬 영(永)자를 따서 이성영(李盛永)이라 지었다. 그러나 일제의 창씨개명(創氏改名) 정책에 순응하여 내 이름은 노부시로 모리낭아(延城盛永)로 둔갑하였다. 또 우리 동네에서 십리쯤 떨어진 곳에 신사(神社)가 있었는데 거기까지 가서 참배하였다.
  나의 선친은 일본에 가서 무슨(야하다?)철공소에서 일하고 주는 푼돈을 착실히 모아와 건넌들 논 열 마지기를 샀다. 그 열마지기 논이 일제 때는 물론이고, 해방 후에도 할아버지, 할머니,아버지, 어머니, 삼촌, 나를 비롯한 7남매, 계 열 두 식구가 굶어 죽지 않고 살아날 수 있게 하였고, 6남매 모두 소학교, 3남 1녀는 고등학교까지 학비를 대서 공부 할 수 있게 하였다.
  그렇다면 나의 선친도 나도 친일 한 사람인가?

  그들은 친일행위를 한 인물을 객관적으로 검정했다고 한다. 당시 신문이나 친일로 평가될 만한 기사에 이름이 올라있다. 무슨 무슨 단체에 이름이 들어있다. 일본육사 입학자 명단에 이름이 들어있다. 일본 장교단 명부에 이름이 들어 있다. 일본 순사 명부에 이름이 들어있다. 면서기 명단에 이름이 들어있다. 교직원 이름이 명단에 들어있다.---- 이런 것들이 ‘객관적 검정 자료' 인가? 그 신문 기사가 오보일 수도 있지 않은가?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먹고 살기 위해 장교로, 순사로, 면서기로, 교사로, 취직한 것이 친일 검정자료란 말인가? 입에 거미줄 치도록 놔두고 굶고 앉아 있으란 말인가?

  친일(親日)이냐 친공(親共)이냐를 분류하는 잣대는 그래서는 안 될 것이다. 무슨 직책에 있었느냐? 무슨 일을 했느냐? 가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우리 이웃에게, 우리 주민에게, 우리민족에게, 우리 나라에 못된 짓을 하고, 해독을 끼쳤느냐? 가 잣대가 되어야 할 것이다. 비록 어떤 단체나 직위에 있지 않았더라도 일본 관공서를 드나들면서 그들의 끄나풀이 되어 독림운동가의 은신처나 재물의 은익 장소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는 짓을 한 사람도 있지 않은가? 비록 순사 직이나 인민위원장 직에 있었다 할 지라도 그가 '토지'의 김두수였느냐? 면인민위원장 홍봉기였느냐? 가 잣대가 되어야 할 것이다.

  홍봉기(洪鳳基), 일제 때는 면서기를 했고, 해방 후 6.25 때 인민군세상이 되었을 때는 우리 면에서는 제일 높은 직위인 면인민위원장(지금의 면장)을 지냈지만 그가 한 행위 즉 면민을 보호하여 한 사람도 희생되는 일이 없도록 최선을 다한 그 행위 때문에 ‘적에게 부역한 죄’로 교도소에 가거나 본인과 그 자녀들이 불이익을 받는 일이 없이 천수를 다하고 고향 땅 양지바른 곳에 묻혀 고이 잠들어 있는 것이다.

  사람의 과학적 지식과 논리적 사고가 그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치 발전한 이 시기에 이 정부의 개혁세력과 그 앞에서 춤추는 소위 개혁단체들은 지금부터 55년 전 만도 못한 잣대를 들이대고 친일, 비친일을 재단하려고 한다. 속말로 말해서 ‘쌍팔년도'(단기4288년, 서기 1955년) 만도 못한 짓거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끝

  2005년 9월 13일자 조선일보 조용헌 살롱의 ‘玄俊鎬와 湖南銀行(1)’이라는 제목의 칼럼에 이런 얘기가 있다.

(前略) 인간의 삶은 모순된 부분이 많다. 특히나 조선이 망하고 일제 36년이라고 하는 혼란기에 살았던 인생들의 행적이 그렇다. 1920년 호남은행을 창립했던 무송(撫松) 현준호(玄俊鎬, 1889-1950). 그는 인촌 김성수와 함께 호남을 대표하던 양대 부자였다. 그는 이번에 발표된 친일 인사명단에 포함되었다. 1930-1935년까지 총독의 자문기구인 중추원의 참의를 지냈기 때문이다. 중추원의 참의를 지냈다는 사실만 놓고 보면 그는 분명 ‘친일파’이지만 한 꺼풀 벗긴 상태에서 그의 행적을 추적해 보면 ‘항일파’였던 면이 드러난다.

그가 설립한 호남은행의 운영과정에서 대표적으로 드러난다. 호남은행의 경영원칙 중에는 세 가지 특징이 있었다. 첫째는 은행에서 일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둘째 일본인을 채용하지 않는다. 셋째 일본인과 일본관계 단체에 일절 융자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현준호 본인은 끝까지 창씨개명을 거부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항이 문제가 되어 호남은행은 무려 50일 간이라는 장기간 동안 총독부 이재국의 특별감사를 받았고, 마침내 1942년 동일은행에 합병을 당해야만 했다. 호남은행의 상무취체역과 본점 지배인을 일본인으로 교체하면 강제합병을 면할 수 있다는 협상안이 들어왔지만, 현준호는 끝내 거부하였기 때문이다. (총독부) 중추원의 참의를 지냈던 경력에 걸맞지 않는 행동이었다. 흑자가 나던 은행을 강제로 뺏긴 셈이다. 이 과정이 근래에 조흥은행에서 발간한 ‘조흥은행 105년사’에 소상하게 나와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현대그룹의 현정은 회장이 바로 현준호의 손녀딸이고,--- (下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