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석루(矗石樓) 금난계(金蘭契)

沙月 李 盛 永 엮음

육사18기 임관 40주년기념행사의 일환으로 지난 10월 29-31일 2박 3일간의'맛따라 길따라'국내여행 중에 진주 촉석루에도 들렸었다. 진주성(晉州城), 논개 사당 의기사(義妓祠), 논개가 왜장을 끌어 안고 강물로 뛰어 든 의암(義巖)을 구경하고 석양 무렵 언덕 위의'남강댐물홍보관'에 올라 진양호를 내려다 보았다.

진양호 남강댐 수문을 벗어난 남강 물이 진주시가지를 지나면서 북으로 반원을 그리며 회두리 치는 지점의 북안(北岸)에 금새라도 하늘로 날아 갈 듯 날개를 펼친 누각이 바로 촉석루다.

촉석루 전경


진주의 주성을 지금은 진주성(晉州城)이라 부르지만 고려 말 축성하고는 촉석성(矗石城)이라 불렀으며, 촉석루는 축성 당시 촉석성의 주장대(主將臺: 주지휘소)로 건립된 것이라 한다.

문화재 안내판에 따르면 촉석루는 고려 고종 28년(1242) 진주 목사 김지대(金之岱) -한국사대사전에는 진주 부사 김충광(金忠光)- 의 지휘 아래 창건한 이래 7차에 걸쳐 중건(重建) 또는 중수(重修)를 하면서 오늘에 이른 것이다. 수려한 주변 경관과 때문에 예로부터 영남제일의 명승으로 평가 받아 왔고, 풍류가들이'북은 평양 대동강 부벽루, 남은 진주 남강 촉석루'라 평했다.

지금의 촉석루는 정면 5칸, 측면 4칸의 단층으로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광해군 10년(1504)에 병사(兵使: 병마절도사, 종2품) 남이흥(南以興)이 재건하여 내려 오면서 1948년 국가보물로 지정되었고, 6.25 때 불 탄 것을 1960년에 진주고적보존회가 시민의 성금으로 복원하였다.

촉석루'촉석(矗石)'은 우리 말로'모난 돌'이란 뜻이다. 속담'모난 돌이 정 맞는다'를 한자로는'矗石逢釘(촉석봉정)'이라 한다. 이 성이나 누각이 이런 이름을 얻게 된 것은 촉석루 성벽 아래 남강가에 각이 진 돌들이 많이 늘어서 있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촉석루를 다른 이름으로 남장대(南將臺), 또는 장원루(壯元樓)라고도 불렀다 하는데 남장대는 진주성의'남쪽 지휘소'라는 뜻이고, 장원루는 과거에 장원 급제를 한 사람들이 이 누각에 많이 들렸던 데서 얻은 이름이다.

진주 촉석루 하면 이야기거리가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임진왜란 삼대첩의 하나로 꼽히는 진주성 대승첩 이야기, 이듬해 재차 공격 때 결사항전 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성이 함락 당하고 장병은 물론 성 안의 백성들까지 왜병에게 무참하게 주살당한 이야기,왜군의 승전 축하연에서 기생 논개가 왜장을 안고 남강 물에 뛰어들어 함께 자결한 이야기 등등이다.

이런 이야기 들은 어린시절부터 많이 듣던 이야기들이니까 오늘은 좀 색다른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이다.

◆ 진양수계(晉陽修契) 금난계(金蘭契) 이야기
이번 여행 중 진주에 들렸을 때 정봉화 동기가 멀리 포항에서 와서 고향을 찾은 동기생들에게 제공하는 만찬시간에 쫓겨 촉석루 누각 위에 올라 간 사람은 나 외에는 없었지만 보통 촉석루를 찾으면 누각을 올라 경치를 한바퀴 휘 둘러 본 다음 누각에 걸려 있는 현판들을 살펴 보는 것이 일반적인 순서다.

그러나 내가 촉석루 누각에 올랐지만 이런 한가한 순서에 따를 수는 없었고, 오래 전부터 이 곳에 오르면 꼭 확인하리라고 마음 먹었던 것이 있었기 때문에 바로 그 쪽으로 갔다. 전면 내부 오른 쪽 귀퉁이에 걸려 있는 현판이다.

검은색 바탕에 흰 글씨로 된 현판의 오른쪽에 한문 문장의 글이 있고, 왼쪽에 가자(加資)와 직함(職銜), 성명(姓名), 자(字) 본관(本貫)이 기록된 31인의 인적사항이 열기되어 있다. 맨 끝에서 두 번째 줄에서 <通德郞行開寧縣監(통덕랑행개령현감) 李元禮(이원례) 字可行(자가행) 本延安(본연안)>을 확인하고는 안도의 숨을 쉬었다. 길게 읽어 볼 여가도 없이 사진 한 장을 찍고 내려와 동료들의 맨 뒤를 따라 의기사(義妓祠)를 참배하고 서둘러 의암(義巖) 쪽으로 따라 갔다.

진양수계 금난계 현판


내가 왜 이 현판에 관심을 갖는지 그 내력을 잠시 설명하여야 할 것 같다. 나의 선친께서는 젊은 시절 왜정치하에서 가난 때문에 서당에도 다닐 형편이 못돼서 주경야독(晝耕夜讀) 자습으로 공부했지만 서당을 다닌 남 못 지 않은 한문을 익혔고, 특히 글씨에 있어서는 근동 누구도 따를 사람이 없어 인근의 뉘 집 상량문(上樑文)이나 입춘 덕담문(德談文)은 도맡아 써 주었다.

그렇게 글씨 쓰기를 좋아하다 보니 어디서 좋은 책을 빌리면 관심 있고, 흥미로운 내용은 초본하여 책으로 만들어 두고두고 보시는 것이 습관처럼 되었다. 典故大方(전고대방), 百禮祝輯(백례축집), 古文眞寶(고문진보)등 많은 필사본(筆寫本) 책을 유고로 남겼는데 金陵郡誌 抄(금능군지 초)도 그 중의 하나다.

을묘년(乙卯年: 서기1975년) 12월에 필사한 것으로 금능군(지금은 김천시에 통합됨)의 제반사항을 수록한 책인데 그 뒤 부분의 여백에 <晉陽修契序 金蘭契(진양수계서 금난계)>란 글이 있는데 선친의 설명에 따르면 인근 종친 한 분이 관광차 진주 촉석루에 들렸다가 위 사진의 현판을 보고 그 내용을 베껴 온 것을 빌려서 이 책 여백에다 써 놓은 것이라 하였다.

언젠가 당신께서 진주 촉석루에 가게 되면 직접 확인해야겠다고 맘 먹고 있었지만 형편이 허락치 않아 차일 피일 하다가 결국 수(壽)하지 못하여 진주 촉석루에는 가보지 못하고 작고하셨다.

그래서 선친께서 하지 못한 것을 내가 이번 <길따라 맛따라> 여행 때 확인 하고 위 사진까지 찍어 온 것이다.

선친 유고(遺稿)<금능군지 초>와 <진양수계서> 필사본





진양수계는 진주 목사 경임(慶?)을 비롯한 영남 일원의 관직에 있는 풍류객들이 중심이 되고 일부 내직에 있는 사람도 포함되어 주기적으로 이 곳 촉석루에 모여 풍월을 즐기던 문계(文契)의 하나로 그 이름을 금난계(金蘭契)라 하였다.

금난계의 취지등을 적은 서문(序文)인 진양수계서(晉陽修契序)는 당시 진주교수(晉州敎授: 정7품)로 있던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이 성종20년(1489)에 지은 글인데 그는 글도 잘 했거니와 좌장 격인 진주목사 경임의 밑에 있었기 때문에 지금으로 치면 어떤 모임의 총무나 간사에 해당하는 위치였던 것 같다.

김일손이란 이름은 조선 사화역사에 대한 조그만 상식만 있어도 쉽게 알 수 있는 사람이다. 연산군 4년(1498) 춘추관 사관으로 있으면서 스승 점필제(占畢齊) 김종직(金宗直)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성종실록 편찬 사초에 올린 것을 훈구파 이극돈, 유자광 등이 발견하고 이 글이'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찬탈한 것을 비방한 글'이라고 연산군에게 고하여 이미 죽은 김종직이 부관참시(副棺斬屍) 당하고, 김일손을 비롯하여 중앙 관계에 진출한 수많은 사림파 학자들이 죽거나 귀양가는 이른바 조선조 4대사화의 첫번째 무오사화(戊午士禍)의 피해 당사자이다.

김일손 외에도 무오사화에 피해를 입은 매계(梅溪) 조위(曺偉)도 이때 함양군수로서 금난계 계원이었다. 김일손이 지은 진양수계서의 내용은 아직 번역하지 못하였으나 대강을 보니 중국 진(晉)나라 때 우군장군(右軍將軍)을 지내고, 해서(楷書), 행서(行書), 초서(草書) 삼체(三體)의 서체를 완성한 명필 왕희지(王羲之) 등 42인이 결성한 난정수계(蘭亭修契)와 문언박(文彦博) 등 12인이 결성한 낙양기영회(洛陽耆英會)를 본받아 촉석루에 자주 모여 풍류를 즐기고 친목을 도모한다는 내용으로 보인다.

선친께서 확인하려 했던 개령현감(開寧縣監) 이원례(李元禮)는 나의 직계 15대조부이다. 통훈대부(通훈大夫: 정3품下)로서 성균관 직강(直講: 정5품)을 지낸 이숙황(李淑璜)의 5자 중 장자로서 크게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고향을 지키면서 개령(開寧: 김천 동쪽 현 개령면 일대) 현감을 지내면서 금난계 계원에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