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인구(處仁區)
沙月 李 盛 永(2005.12.12)

  지난 11월 1일부로 용인시(龍仁市) 산하에 3개의 구(區)가 생겼다. 구(區)란 행정구역은 도(道)와 동급의 특별시나 광역시(전에는 직할시)아래 있는 행정구역으로 알아왔는데 언제부터인가 일반 시(市) 아래도 구(區)를 두는 것으로 바뀐 모양이다.

  이미 수원시, 성남시, 고양시, 부천시, 안양시 등에 구가 생긴 지 오래 되었으니 용인시 아래 구(區)가 3개 생겼다고 뭐 그리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행정구역체계가 일정한 규칙이 없고 제 맘대로인 것 같아 혼란스럽기 짝이 없다.

  우선 '직할시(直割市)'라 부르던 것을 ‘광역시(廣域市)’라 고친 것만 해도 그렇다. ‘광역(廣域)’이란 ‘넓은 구역, 넓은 지역’이라고 국어대사전은 정의 하고 있다. 그렇다면 광역시(廣域市)가 일반 시(市)보다 면적이 더 넓은가?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는 것을 그 예로 아래 표에서 보자.


  더욱더 혼란스러운 것은 예하 행정구역 명칭이다. 전 같으면 그래도 덜 복잡하고 일정한 규칙이 있었다.
  특별시(特別市)/직할시(直轄市)-구(區)-동(洞)-통(統)/반(班),
  시(市)-동(洞)-통(統)/반(班),
  군(郡)-읍(邑)/면(面)-리(里)-반(班)

  그러나 지금은 뭐가 뭔지 모를 정도로 복잡하고 혼란스럽고, 개념이 헷갈린다.
  특별시(特別市)-구(區)-동(洞)-통(統)/반(班),
  광역시(廣域市)-구(區, 자치)/郡(군)-동(洞)/읍(邑)/면(面)-동(洞)/리(里)-통(統)/반(班)
  광역시(廣域市)-구(區, 비자치)-동(洞)-통(統)/반(班)
  시(市)-구(區, 비자치)-동(洞)/읍(邑)/면(面)-통(統)/반(班)
  시(市)- 동(洞)/읍(邑)/면(面)-통(統)/반(班)
  군(郡)- 읍(邑)/면(面)-반(班)

  또 광역시(廣域市) 예하 구(區)는 지방자치제를 실시하는 구(區)지만 일반 시(市) 예하 구(區)는 지방자치제를 실시하지 않은 순수한 행정기구이다.

  행정구역 이름을 정하는 데는 특별한 원칙은 없지만 대체로 역사성을 띈 지역 명칭이나, 산, 강, 고개등의 이름에서 따 온 것이 대부분이다. 우리나라 행정구역의 명칭 또한 같은 이름, 비슷한 이름 등 헷갈리게 하는 것이 많다. 시/군의 경우 광주(光州)광역시와 경기도 광주시(廣州市), 강원도 고성군(高城郡)과 경남 고성군(固城郡), 경남 남해군(南海郡)과 전남 해남군(海南郡) 등이 그것이다.
  또 면(面) 이름의 경우 전국에 같은 이름의 면은 부지기수다. 특히 동면(東面), 서면(西面), 남면(南面), 북면(北面)은 지도를 펴 놓고 보면 같은 이름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우리나라 행정구역의 명칭이 어떤 일관성이 없는데 비하면 월남의 경우는 너무도 철저하다. 즉 군(郡) 예하의 면(面) 이름은 군의 첫자나 끝자를 돌림자로 하여 면 이름의 첫 자가 된다. 빈딘(BINH DINH)성 내 맹호부대가 주둔했던 몇 개 군의 예를 들어 본다.
  풋캇군- (면)캇손, 캇람, 캇한, 캇히앱, 캇트린, 캇타이, 캇민, 캇칸, 캇하이, 캇중, 캇논, 캇훙, 캇티엔, 캇찬.
  푸미군- (면)미덕, 미땅, 미차우, 미록, 미로이, 미트린, 미퐁, 미안, 미호아, 미꽝, 미찬, 미또, 미딴, 미히앱, 미타, 미캇.
  안녕군- (면)녕딴, 녕한, 녕마이, 녕안, 녕푹, 녕흥, 녕록, 녕호아, 녕또, 녕탄
  투이폭군-(면)폭짱, 폭호아, 폭쾅, 폭히앱, 폭손, 폭록, 폭똰, 폭안, 폭딴, 폭미.
  반칸군-(면)칸빈, 칸히앱, 칸리앤, 칸똰, 칸히앤, 칸호아.
  월남의 행정구역 명칭은 불란서가 통치할 때 개혁한 것이라 들었다.

  더욱더 개념이 뚜렷하지 않은 것은 일반 시(市)와 군(郡)의 차이다. 전 같으면 좁은 지역에 인구가 밀집하여 도회지를 이루는 곳 중에서 법정인구를 초과하고, 문화적 시설을 갖춘 곳을 시로 승격하는 것이 상식 이였는데 지금은 그 상식도 통하지 않도록 시와 군은 개념적으로 구별할 수가 없다.

  이야기는 본론으로 돌아와서 용인시에 생긴 3개 구(區)는 수지구(수지區), 기흥구(器興區) 그리고 처인구(處仁區)이다. 수지구는 수지읍이 수지구로 승격한 것이고, 기흥구는 기흥읍이 구성읍과 통합하여 기흥구가 되었다.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을 합쳐서 처인구(處仁區)가 되었는데, 어떻게 해서 ‘처인(處仁)’이란 이름이 생겨났는지는 용인에 사는 사람도 아는 사람이 드물다.

  처인구의 ‘처인’은 용인시 남사면 아곡리에 있는 ‘처인성(處仁城)’에서 비롯 되었다. 그러면 용인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잘 모르는 처인성이 어떠한 역사성을 띄었기에 이번에 새로 생긴 구(區)의 명칭으로 선택될 정도로 중요성을 갖는가? 하는 것이 이 이야기의 골자다.

처인성지 위치 요도

  * 처인성(處仁城)

  고려 때 처인성에서 몽고군과 벌인 전투. 1232년(고종 19) 고려는 몽고에 대항하기 위해 강화(江華)로 천도하자 이에 몽고 장수 살리타(撒禮塔,살례탑)가 북계(北界;평안도 지방)에 침입하여 왕이 육지로 나올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에 응하지 않자 남쪽으로 개경(開京)을 거쳐 한양산성을 함락하고 처인부곡(處仁部曲)의 처인성에 이르렀다.

  이때 난을 피해 이곳에 와 있던 백현원(白峴院)의 승려 김윤후(金允侯)가 활을 쏘아 살리타를 죽이자 몽고군은 곧 철수하였다. 이 전투의 승리로 남쪽 지방은 전쟁 피해를 줄였고 처인부곡은 처인현(處仁縣)으로 승격되었다.(국사대사전)

처인성지 모습과 처인성승첩기념비

(처인성지 설명 내용)
경기도 기념물 제11호
소재지: 경기도 용인시 남사면 아곡리
고려 때 수주(지금의 수현)에 속해 있던 처인부곡(處仁部谷)의 토성(土城)으로 오랜 세월 동안 풍우에 훼손되어 흔적만이 남아 있을 뿐. 현존하는 성의 길이는 250m정도이다.

  고려 고종19년(1232) 몽고 장군 살리타(撒禮塔,살례탑)가 침입하였을 때 고려의 승장(僧將) 김윤후(金允侯)가 이 성에서 격전 끝에 살리타를 사살하자 지휘관을 잃은 몽고군은 사기가 떨어져 개경으로 퇴각하였다.

  승장 김윤후는 살리타를 사살한 공으로 상장군을 제수 받았으나 자신의 공로가 아니라고 하면서 벼슬을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후에 김윤후는 섭랑장(攝郞將)을 거쳐 충주산성(忠州山城) 방호별감(防護別監)으로 있을 때 몽고군이 성을 포위하고 70여일을 공격하였으나 군민(軍民)이 일치단결하여 성을 사수하고 이를 격퇴시켰다. 그 공으로 감문위(監門衛) 상장군(上將軍)이 되었고, 원종(1260-1274) 때 추밀원(樞密院) 부사(副使)를 거쳐 수사공우복야(守司公 右僕射)가 되었다.


    * 부곡(部曲)
  한국의 전근대사회에 존속하였던 특수계층사람들이 거주하던 지역. 이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을 부곡인이라고 한다. 부곡에 관해서는 《삼국사기》 <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주목(驪州牧) 고적조(古蹟條)>에 부곡이 삼국시대부터 존재하였음을 알려주는 단편적인 기록이 있다.

  고려시대 부곡에 대해서는 《고려사》와 《세종실록》 <지리지>에 명칭과 위치가 실려있다. 역사적 의미를 지니는 고려시대 부곡집단은 신라 말·고려 초에 후삼국 통합전쟁이라는 사회변동과정 속에서 형성되었다. 후삼국 통합전쟁시 고려는 왕조에 저항한 호족세력지역의 주민들을 부곡민으로 편성하였고, 후삼국 통합 후에는 이 지역들을 법제적으로 부곡제라는 행정구획으로 편성하여 군현제의 하부기구로 예속시켜 지배하였다.

  부곡의 주민은 부곡리와 부곡인으로 구성되어 있고 이들은 둔전(屯田: 군대)·공해전(公?田: 관청)·학전(學田: 학교) 등을 경작하거나 군사요충지에서 성을 수축하는 역을 부담하였다. 또한 국학(國學)에 입학하거나 승려가 되거나 관직에 진출하는 데 법제적으로 제한을 받았다. 고려 중기 이후 군현제의 변동으로 수취체계가 변질되면서 부곡은 고유의 성격을 탈피하여 점차 소멸하였다. (국사대사전)

  1988년 12월 20일 국방부천사편찬위원회가 발행한 민족전란사(5) 대몽항쟁사(對蒙抗爭史)에 처인성 전투의 경과에 대하여 자세한 내용이 있어 간추려 옮긴다.

  (개황)
  고려 때 몽고의 침입으로 1231년부터 1259년까지 30년에 걸친 여몽전쟁(麗蒙戰爭)이 있었는데 1차 대몽항쟁은 고종18년(1231) 8월부터 19년(1232) 12월까지 1년여이고, 2차는 고종(1235) 윤7월부터 (1259) 3월까지 24년 간의 장기전이다.

  1차 대몽한쟁 때는 몽고군이 침공을 개시하여 40일 만에 개경250리(100Km) 인 황주까지 진격하였으나 고려는 긴급히 3군(三軍)을 편성하여 남진을 저지하는 한편 서북계북로(西北界北路)의 귀주(龜州)에서 고려 군민이 일치단결하여 남진을 저지하는데 성공하자 점차 몽고군이 불리한 상황이었으나 몽고군은 일부병력을 개경으로 진격시켜 도성을 포위하려 하자 고려 조정에서는 사신을 보내 강화교섭을 추진하고 몽고측도 수락하여 서북계(西北界) 요지에 감독관인 다루치기(達魯花赤, 달노화적) 지휘하에 72명의 군사 잔류하고 1232년 1월에 철수하였다.

  그러나 고려에는 몽고인에 대한 적개심이 고조되어 조야에 강경론이 팽배하여 결국 잔류시킨 다루치기와 군사들을 살해하거나 국경 밖으로 축출하고 장기전에 대비하여 수도를 강화도로 옮겼다.

  이에 1232년 8월 몽고 태종 오고타이는 원수 살리타이(撒禮塔,살례탑)로 하여금 고려 침공을 재개토록 하였는데 9월 국경 진입 후 3개월 만인 11월에 남경(한양)을 함락시키고, 한강을 건너 광주로 진출하였으나 광주 군민의 완강한 저항으로 광주성을 제대로 공략하지도 못한 채 용인 방면으로 남진하였다가 주력을 강화쪽으로 돌리면서 살리타이가 직접 지휘하는 일부병력으로 처인성을 공격하므로서 처인성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다.


  (처인성전투)
  몽고군 원수 살리타이가 지휘하는 제4군은 광주성공격작전에 실패한 후, 그 주력을 용인으로 전진시켰으나 이미 소식을 전해듣고 일대 수령들은 군사와 백성, 무기와 양곡들을 처인성으로 대피시킨 뒤였으므로 몽고군은 텅 빈 용인현성(龍仁縣城)을 무혈로 입성하였다.

  그러자 살리타이는 제4군 주력을 용인-수원-군포-부평-김포를 연하는 방향으로 강화도 대안의 통진으로 진출시켜 강화도를 압박하는 한편 자신은 일부병력만으로 처인성으로 남하하여 처인성 공략에 나섰다.

  한편 처인성에는 용인을 비롯한 인근 각 고을에서 피난 온 군민1,00여 명과 승장(僧將) 김윤후(金允侯)를 비롯한 승병 100여 명이 방어에 임하고 있었다.

  살리타이가 직접 인솔한 500여 기(騎)가 처인성 동북방의 완장리, 매룡리 일대에 포진하여 처인성을 포위공격할 준비를 하였다.

처인성전투 요도

  고려 고종19년(1232) 12월 16일 용인으로부터 처인성 동북방 50리 지점에 도착한 몽고군 원수 살리타이는 처인성 동북방 인근 완장리, 매룡이, 화동 등지에 병력을 3개 대로 분산 배치하여 처인성에 대한 공격준비태세를 갖추고, 처인성의 동태를 파악하기 위하여 몸소 5,6기의 정찰기병만 거느리고 경장(輕裝)으로 처인성 동문을 향하여 접근하였다.

  한편 승장 김윤후는 처인성 동문 밖 300m 지점의 언덕(속칭 살장터, 殺將址)에 저격병 수십 명을 미리 매복시켜 유사시에 대비하고 있었다. 살리타이 일행이 이 지점에 이르자 매복하고 있던 고려군 저격병들은 몽고군의 주장 살리타이와 수행 기병들을 기습적으로 공격하여 사살하고, 그 목을 베었다.

  몽고군 진영에서는 이 광경을 목격하고 주장 살리타이를 구출하기 위하여 일제히 처인성 동문으로 돌진하였으나 성을 방어하던 승병들이 성 밖으로 달려나와 역공하므로서 몽고군과 고려군은 처절한 혼전을 벌어졌는데 몽고군은 주장을 구하기는커녕 한차례의 격전 끝에 태반이 사상되고, 마필과 병기를 빼앗기고 그들의 본진으로 후퇴하였다. 이에 고려군은 승세를 틈타서 몽고군 본진으로 반격을 가하여 몽고군을 대파시켰다.

  주장 살리타이가 고려군에게 사살되자 몽고군 전열은 걷잡을 수 없이 와해되고 말았다. 그 결과 몽고군은 더 이상 고려군의 공세를 막아내지 못하고 용인방면으로 패주하였다.

  처인성전투 결과 주장을 잃은 몽고군 부원수 테케는 서둘러 고려와 강화를 체결하고 철군함으로서 제1차 대몽항쟁은 종료되었다.


  (처인성 승첩의 의의)
  승장 김윤후의 기계(奇計)에 의하여 살리타이를 사살한 처인성 승첩은 여-몽항쟁이 발발한 이래 고려군측에서 거둔 일방적인 최대의 승리였다. 따라서 고려군의 처인성 승첩은 전쟁 발발 이래 시종 고려군이 열세로 몰리던 전세를 일거에 역전시키는 전환점이 되었다.

  한편, 살리타이가 전사한 처인성전투는 몽고군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전의(戰意) 를 상실하게 하여 고려로부터 서둘러 철수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몽고군은 고려군의 반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다수가 사로잡히고, 나머지는 대소 규모로 무리 지어 서북변 국경으로 분산도주하였다. 몽고군은 이미 지휘체계가 완전히 붕괴되어 조직적인 퇴각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고려 조정에서는 사리타이를 사살하는데 큰 공로를 세운 승장 김윤후를 표창하여 상장군의 직위를 내렸으나 김윤후는 다은과 같이 완곡히 사양하였다.

  “저는 전시를 당해서도 무기를 잡고 일어서지 못했던 몸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잘 것 없는 공으로 후한 상을 받겠습니까?”
「고려사」 권103, 김윤후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