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산(泰山)의 대부송(大夫松)
沙月 李 盛 永(2007.3.17)
    2007년 3월 13일자 동아일보의 [횡설수설]에 김창혁 논설위원의 글 ‘태산(泰山)’ 이 올랐다. 이 글에 따르면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산둥(山東) 성 대표가 최근 태산을 ‘나라의 산(國山)’으로 정하자고 제안해 논쟁이 뜨겁다고 한다. 그리고 ‘태산은 진시황을 시작으로 중국의 역대 황제들이 하늘의 뜻을 받드는 봉선(封禪)의식을 행한 곳’이라 하였다.
중국 서안의 진시황릉 앞에 세워져 있는 진시황 옥상(玉像)
뒤에 보이는 산이 아직 발굴하지 않은 진시황릉이다.
    중국 주(周)나라가 서북방 흉노족의 침략에 못 견디고 수도를 낙양(洛陽)으로 옮긴 BC770년부터 진시황이 통일을 이룩한 BC221년까지 349년 동안 중국은 소위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라는 혼란기, 변혁기를 거친다.

    전국시대 진(秦), 초(楚), 연(燕), 제(濟), 한(韓), 위(魏), 조(趙) 7국으로 각축전을 벌이다 진(秦)나라 시황제 때 나머지 6국을 평정하고 통일 진나라를 세운 것이 BC221년이다.
중국 전국시대 각 나라의 위치도
가장 서쪽에 위치했던 진(秦)나라가 동진하여 전국토를 통일하였다.
연(燕)나라 수도는 지금의 북경(北京),
그래서 조선의 사대부들은 북경을 청경(淸京: 청나라 서울)이라 하지 않고,
연경(燕京: 연나라 서울)이라 불렀다.
    고동영 저 「연대순으로 엮은 檀君朝鮮47代史」(ㅎ.ㄴ뿌리)에 따르면 이 시기에 우리나라는 BC239년 북부여 제1세 해모수(解募漱)가 단군조선의 옛 도읍지 백악산(白岳山)을 습격하고 스스로 임금이라 하여 북부여가 시작되고, 이듬해(BC238) 47세 단군 고열가(高列加)가 왕위를 버리고 산으로 들어감으로써 단군조선은 끝나고 북부여시대로 들어간다.

    그러고 17년 후인 BC221년에 진시황이 전국시대의 중국을 통일한 것이다. 진시황의 중국 통일은 중국인(夏華族, 漢族)에게는 전국시대 ‘일곱 개 나라를 하나로 통합 것’‘국가(國家)와 국토(國土) 통일’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민족(民族), 문자(文字), 화폐(貨幣), 심지어는 도량형(度量衡)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완벽한 통일을 이룬 것이다.
진시황의 화폐통일
아래 화폐들을 없애고, 위의 엽전으로 통일한 것이다.
    특히 ‘민족통일(民族統一)’ 이 유의 할 사항이다. 원래 중국의 시조로 불려온 황제 헌원(軒轅)은 기원전(B.C) 2692년에 태어난 사람이다. 기울어진 염제신농씨(炎帝神農氏)를 대신하여 제위에 오르면서 공손씨(公孫氏) 성을 희(姬)로 바꾸었다고 하는데, 희(姬)는 황하 중,상류의 한 갈래인 희수(姬水)에서 따 온 것이라 한다.

    이는 곧 중국인의 뿌리인 황제가 황하의 중, 상류 지역에서 일어 난 족속임을 입증하는 기록이다. 즉 진시황에 의한 중국 대륙의 민족통일이 이루어지기 전 중국 대륙에는 황하 중, 상류인 서쪽에는 황제를 중심으로 하는 하화족(夏華族: 漢나라 이후에는 漢族이라 불렀음)이 있었고, 황하 하류인 동쪽에는 또 다른 족속이 살고 있었던 것이다. 역사서들은 이들을 동이(東夷: 동쪽에 사는 큰 활을 잘 쓰는 족속) 라고 기록하고 있다.

    중국의 고대 국가로 하(夏) 나라와 주(周)나라가 하화족이 주도하여 세운 나라로서 이들은 황하 중,상류 지금의 협서성이 그 발상지이고 중심은 장안(長安), 지금의 서안(西安)이다. 서안의 고대 신석기 반파유적(半坡遺跡)은 하화족이 남긴 문화 유적인 것이다.

    그 이후로도 서안에는 진(秦), 한(漢), 당(唐)으로 이어지면서 15왕조 73황제가 이 곳에서 통치를 했고, 72황릉 있다고 한다. 이 또한 고대 중국 하화족의 터전이 서안을 중심으로 한 서쪽이었던 것을 말해 준다.

    ‘민족의 통일’ 이 무슨 말인가? 이는 곧 ‘민족을 없앴다’ 는 말과 동이어(同意語)가 아닌가? 진시황이 서쪽에서 동진하여 동쪽 끝 산동반도에 도달하여 국가와 국토를 하나로 통일하는 과정에서 동쪽의 민족 즉 동이족(東夷族)을 말살한 것이다.

    그래서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이후로는 ‘동이(東夷)’ 이란 말은 종전의 민족의 한 갈래를 뜻하는 말이 아니라,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과 함께 ‘동쪽 오랑케’ 란 뜻으로 비하하는 말로 변질되었다. 마치 일제 때 ‘조센징(朝鮮人)’ 과 같은 맥락이다.

    중국의 동쪽지방 황하 하류와 동해안지방의 대문구문화(大汶口文化), 용산문화(龍山文化), 청령강문화(청령강문화), 은나라 갑골문(胛骨文) 등 소위 고대 황화유역문화를 이룩한 주역들이 곧 동이족(東夷族)이었다.

    하화족(한족)이 그들을 정벌한 것이다. 동이족의 일부는 만주, 한반도 등 동이족이 살고 있는 땅으로 탈출하였지만, 일부는 저항하다가 무자비하게 학살 당하거나, 남쪽 척박한 오지로 강제 축출되고, 나머지는 그대로 하화족에 동화되어 지금 그 후손들은 자기들의 뿌리가 동이족(東夷族)이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소위 ‘중화사상(中華思想)’ 에 도취하여 '동북공정(東北工程)' 운운 하면서, 이제는 '동이족역사말살'을 획책하는데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진시황의 여러 학정(虐政) 중에 '분서갱유(焚書坑儒)''책을 불사르고, 유학자(儒學者)를 생매장했다'는 것이 곧 동이족을 대상으로 저지르진 죄악이었고, 동이족이 이룩한 문명과 문화를 말살하려는 것이 그 목적이 아니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 때 진시황에 끝까지 끈질기게 저항하다가 결국 남쪽 운남성 일대로 추방당하여 지금도 그곳에 중국 소수민족의 하나로 남아있는 묘족(苗族)이 동이족 배달국의 치우천왕(蚩尤天王: 제14세 慈烏支桓雄)의 직계 후손들이라는 것이 여러 사서에 기록되고 있다.
묘족 처녀들
묘족은 은제품 장신구를 무척 좋아한단다.
2004년5월 운남성 곤명관광 때 여강 흑룡담에서 그 곳 소수민족 여인들과 기념촬영
앞줄 왼쪽에서 세 번 째가 묘족 여인이다. 역시 은장신구를 많이 했다.
    그러나 아무리 인위적으로 민족을 통일해도 동이족의 피는 지금도 그들의 혈관 속을 흐르고 있을 것이다. 지금 중국사람들도 그것을 느끼고 있는 모양이다.
    그들은 1980년 이전까지는 한결같이 자신들은 '황제지손(黃帝之孫: 황제의 자손)이라 웨쳐왔는데, 1980년 이후에는 '염황지손(炎黃之孫: 염제와 황제의 자손)이라 바꾸더니, 1993년 이후는 '염황치지손(炎黃蚩之孫: 염제와 황제와 치우의 자손) 이라면서 염제신농(炎帝神農)과 황제헌원(黃帝軒轅)과 치우(蚩尤)가 마지막 사생결단을 벌렸던 탁록이라는 곳에 귀권원(歸根苑)이라는 성지를 조성하고, 그 복판에 삼조당(三祖堂)이라는 큼직한 건물을 짓고, 그 안에 염제황제치우의 세 석상을 한자리에 모시고 있다고 한다.
    '치우(蚩尤)는 동이의 청구국(靑丘國)의 군장이었다'는 것이 그들 선조들이 쓴 역사서에도 뚜렷이 기록되어있는데 말이다.
탁록의 귀근원(歸根苑)
귀근원의 삼조당(三祖堂)
삼조당 지붕 용마루 양 긑에는 '치우'를 상징하는 치미(蚩尾)까지 설치하고 있다. 참으로 가소로운 일---
삼조당에 모신 치우(蚩尤) 석상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고 3년 후 BC218년 진시황을 저격한 사건이 있었다. 후에 한고조의 삼걸의 한 사람으로 한(韓)나라 사람인 장량(張良 :字 子房, 시호 文成) 이 한(韓)을 멸한데 대한 보복으로 창해(滄海)역사(力士) 여홍성(黎洪星)을 시켜서 박량사(博良沙)에서 진시황을 철퇴로 저격했다가 위장된 수레를 치는 바람에 실패한 사건이었다. 아마 장량도 여홍성도 동이족이었는지 모른다.

    12세 단군 아한(亞漢) 2년(B.C 1833년) 임금이 요하에 이르러 순수관경비(巡狩管境碑)를 세워 역대 임금의 이름과 호를 새겼는데(金石文字의 원조), 후에 창해(滄海) 역사(力士) 여홍성(黎洪星)이 지나다가 이를 보고 시 한 수를 지었다고 한다.
      村郊稱弁韓(촌교칭변한) 마을과 주변 땅이 변한이라 하는데
      別有殊常石(별유수상석) 뚜렷이 구분되는 수상한 돌이 있네
                      臺荒 足鄭 足蜀 紅(대황척촉홍) 받침은 헐어지고 철쭉꽃만 붉게 피었는데
  字沒매苔碧(자몰매태벽) 글자는 깎이고 이끼만 푸르구나
生於剖判初(생어부판초) 천지가 처음 열릴 때 생겨나서
  立了興亡夕(입료흥망석) 나라가 흥하고, 망할 때 세워졌네
  文獻俱無徵(문헌구무징) 문헌으로 다 고증할 수는 없지만
  此非檀氏跡(차비단씨적) 이것이 단군의 자취가 아니리요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후 어느날 날을 잡아 중국 통일을 하늘에 고하는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 태산(泰山)에 올랐다. 동아일보 횡설수설의 ‘태산’에서 말하는 ‘하늘의 뜻을 받드는 봉선(封禪)의식’을 행하기 위해서다.
    허구 많은 중국의 명산들 중에 별로 높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태산을 택한 것에 큰 의미를 갖는다. 중국의 동쪽 즉 동이족들의 터전 한복판에 우뚝솟은 태산 꼭대기에서 '동이족을 평정했다'는 사실을 하늘에 고하고, 만 천하에 공포하려는 속 샘이었을 것이다.

    그 때 일화가 하나 전해지고 있다.
    진시황태산(泰山)에 올라 천하를 통일을 하늘에 고하는 제사를 올리려 하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져 미쳐 우장을 준비하지 못하여 비를 맞게 되었다. 마침 가까운 곳에 큰 소나무 한 그루가 있어 그 밑에서 비를 피하고, 비가 그친 후 무사히 제사를 마칠 수 있었다. 제사를 끝낸 진시황이 그 소나무를 고맙게 생각하고 이 소나무에게 대부(大夫)의 벼슬을 내렸다.
    사람들이 이 소나무를 ‘대부송(大夫松)’ 이라 부르면서 ‘영화로운 일’ 을 의미하는 말이 되었다.

    * 대부(大夫)는 관직에 따른 가자(加資: 직급명)로 조선조의경우 종4품이상(무관의 경우 종2품 이상)의 가자에 '○○대부(大夫)' 가 붙는다.

    김창혁씨는 ‘태산과 비’'중국사람들의 관광상혼이 만들어낸 얘기' 라 했지만, 위 대부송 이야기에 진시황의 천하통일 다시 말하면 황제 자리에 오른 것을 공식 인정하는 행사에 비가 한 몫 한 것[비로 인해‘대부송(大夫松)’ 이란 말이 생겨나게 된것]을 보면 그게 아닌 것 같다.

    세종대왕 때 10여년간 집현전 학자로서 세종의 문화창달에 크게 기여한 저헌(樗軒) 이석형(李石亨)은 젊을 때 신숙주, 성삼문, 이개, 박팽년, 하위지 등과 호당(湖堂)에 뽑혀 진관사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 하며 함께 공부한 친구이다.
    세조2년(1456) 이석형이 전라도 관찰사로서 익산을 순시하던 중 사육신이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착잡한 심경으로 다음과 같은 ‘次益山東軒韻(차익산동헌운)’ 이라는 짧은 시 한수를 지었는데 이 시에 ‘대부송(大夫松)’ 이 나온다.
次益山東軒韻(차익산동헌운) 익산 동헌에서 짓다
虞時二女竹(우시이녀죽) 순임금 때는 이녀죽의 슬픈 일이 있었고,
    秦日大夫松(진일대부송) 진나라 때는 대부송의 영화로운 일이 있었네
  縱是哀榮異(종시애영이) 이것은 비록 슬프고 영화스러움이 다를 뿐
        寧爲冷熱容(영위냉열용) 어찌 차갑게(냉대), 뜨겁게(환대) 함이 용납되리
    이 시에서 二女竹(이녀죽)은 중국 고대 삼황오제(三皇五帝)의 마지막 임금, 순(舜)임금은 아황(娥皇)과 여영(女英) 두 왕비를 두었는데 모두 요(堯)임금의 딸이다. 순임금이 남쪽 창오(倉梧) 지방을 순시하다가 갑자기 돌아가셨는데, 두 왕비가 소수(瀟水)와 상강(湘江)이 만나는 소상강(瀟湘江)까지 와서 슬피 울었는데, 두 왕비의 눈물이 강가에 무성한 대나무 잎에 떨어져 반점이 생겼다. 사람들은 이 대나무를 ‘소상반죽(瀟湘班竹)’ 또는 ‘이녀죽(二女竹)’ 이라 하여 ‘슬픈 일’ 을 의미하는 말이 되었다.

    그러고 보면 태산(泰山)은 중국인(夏華族, 漢族)에게는 ‘대부송(大夫松: 영광스런 일)’ 이지만, 우리민족을 포함한 동이족에게는 ‘이녀죽(二女竹: 슬픈 일)’ 이요, 치욕스럽고, 한 맺힌 산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내력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국의 ‘대통령병자들’이 이 산에 올라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제사까지 올리는 사람이 있다니 참으로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횡설수설/김창혁] 태산(泰山)
(동아일보 2007. 3. 13일자)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마는/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조선 전기의 문인 양사언(楊士彦·1517∼1584)이 지은 그 유명한 고시조(古時調)다. ‘하늘 아래 뫼’라는 말 때문에 아직도 많은 사람이 중국 태산(泰山·타이산)의 높이를 궁금해하지만 실은 1545m로 우리 태백산(1566m)보다 낮다. 그래도 중국 5대 명산을 일컫는 오악(五嶽) 중 으뜸으로 꼽힌다.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전국인대) 산둥(山東) 성 대표가 최근 태산을 ‘나라의 산(國山)’으로 정하자고 제안해 논쟁이 뜨겁다. 태산이 산둥 성에 있기 때문이겠지만, 마냥 황당한 제안만도 아니다. 태산은 진시황을 시작으로 중국의 역대 황제들이 하늘의 뜻을 받드는 봉선(封禪)의식을 행한 곳이고, 공자가 “태산에 오르니 천하가 작아 보인다”고 한 바로 그 산이기 때문이다. 태산에서 1시간 거리에 공자의 고향인 취푸(曲阜)가 있다.

    ▷좀 우스꽝스러운 얘기지만 태산은 ‘대통령병(病)’에 걸린 일부 우리 정치인에게도 ‘성산(聖山)’으로 통한다. ‘현대판 봉선의식’의 유혹 때문이다. 한중(韓中) 수교를 이뤄 낸 노태우 전 대통령도 올랐지만 대선 판에 태산 등정을 유행시킨 사람은 김대중(DJ) 전 대통령이다. 1996년 6월 말 국민회의 총재였던 DJ가 케이블카를 타고 태산에 오를 때 비가 내리자 중국 가이드는 “대통령이 된다는 징조”라고 속삭였다. ‘태산과 비’는 중국인들의 ‘관광 상혼(商魂)’이 만들어 낸 얘기겠지만 이후 태산을 찾는 대선주자들은 일기예보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김중권 전 민주당 대표도 2001년 태산에 올랐다. 내심 비를 기다렸지만 하산(下山)할 때까지 끝내 비는 오지 않았다. 손학규 씨도 경기지사 시절인 작년 이맘때 태산을 등정한 뒤 “DJ처럼 좋은 성공을 거두라”는 덕담을 들었다. 그는 “태산의 정기를 받겠다는 의미가 아니다”면서도 제(祭)를 올렸다. 말 그대로 ‘살짝’ 비가 스쳐갔다고 한다. 야속한 지금 지지율처럼 살짝.
김창혁 논설위원 ch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