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가외인(出嫁外人)

                                                                                  沙月 李 盛 永

출가외인(出嫁外人)이란 말은 ‘출가한 딸은 곧 남’이라는 뜻이다. SBS TV드라마로 인기가 높았던 ‘여인천하(女人天下)’에도 자주 등장했던 말이다. 다분히 조선조와 같은 가부장적 시대에 생긴 말이며 지금 이 시대는 맞지 않는 말이다.

 

지금은 상속법에도 친정 아버지가 유언이나 법적 조치를 취하지 않고 남기고 간 유산을 출가한 딸도 상속을 주장할 권리가 규정되어있다. 그래서 아들이 상속 절차를 취하려면 출가한 딸에게도 분배하거나 그렇지 않으려면 ‘포기각서’를 받아야 한다.

 

근래에 용인이씨(龍仁李氏) 어느 파의 종중(宗中) 땅이 개발지역으로 결정되면서 땅 값이 엄청나게 올라 생각지 않은 종중재산(宗中財産)이 생기게 되어 종재 분배를 놓고 법정공방이 두 차례 벌어졌는데 두 번 다 ‘출가외인’의 원칙이 적용되어 제소자인 출가한 딸이 패소하였다.

 

유산배분에는 출가외인이 적용되지 않고, 종재(宗財) 배분에는 출가외인이 적용된 것이다. 언뜻 보면 법의 형평성이라는 것이 우습게도 느껴지기도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것이 이치에 맞는 것 같기도 하다.

 

친정 부모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생신이다, 회갑이다 하는 행사에 출가한 딸도 적극적으로 참여할 뿐만 아니라 정성과 사는 형편에 따라서 ‘딸이 아들보다 낫다’는 말을 우리 주변에서 흔히 들을 수 있다.  그러니 그 친정 부모가 남긴 유산은 출가한 딸이 포기하지 않는 한 당연히 분배 받아야 할 권리가 인정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친정 부모가 죽고 나면 형제자매 간의 돈독한 우애의 정도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친정 부모의 제사등에 참여하는 정도이지 조부, 증조부 등 그 윗대까지 각종 제례(祭禮)에 외손이 참여하는 경우는 좀처럼 볼 수 없다.

 

종재는 바로 돌아가신 종중 윗대 어른들의 제사, 분묘관리 및 치장 등 제례(祭禮)에 필요한 비용을 염출하는 자산인데 횡재를 만나 종재가 넘쳐 나서 일부를 분배한다면 당연히 조상을 받들었던 사람 만이 그 권리가 있지 않겠는가?

 

나는 상속권이나 종재 분배권과 같은 법률적인 이야기를 하려고 이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출가외인’이라는 말에 꼭 맞는 옛날이야기 하나를 하려던 참에 근래 있었던 사건이 생각나서 언급한 것 뿐이다.

 

고려 말 만고의 충신으로 우리들 뇌리에 박혀 있는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고려 충숙왕복위6년 1337-공양왕4년 1392)선생은 이성계의 역성혁명(易姓革命) 즉 조선창업을 반대하다가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 수하의 조영규에게 철퇴를 맞고 선죽교에 피를 뿌리고 죽었다.

 

이 방원의 집에서 이방원과 정몽주가 대좌하여 시조로서 자기 속마음을 주고 받은 것도 유명하고, 정몽주 어머니가 정몽주에게 당부한 시조도 우리들이 중고등학교 시절에 많이 암송했던 시조들이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서 백년같이 누리리라  이방원

 

  이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아로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이시랴    정몽주

 

  가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자 마라

  성낸 가마귀 흰 빛을 새오나니

  청파에 좋이 시슨 몸 더럽힐까 하노라       정몽주 어머니

 

그런데 아이러니칼 하게도 이방원이 조선 제3대 임금 태종으로 즉위한 다음 지금까지 역적으로 취급된 정몽주에게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正一品 加資)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正一品職) 수문전대제학(修文殿大提學: 正二品職) 감예문춘추관사(監藝文春秋館事: 正一品職) 익양부원군(益陽府院君: 一品職에 오른 功臣의 封號)으로 추증(追贈: 죽은 후에 직위, 봉작, 시호 등을 내리는 것)되고, 시호 문충(文忠)이 내려졌으며 그 후 중종 때에는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문묘(文廟)는 종로구 명륜동에 있는 공자(孔子)의 위폐를 모신 사당인데 공자의 위패를 가운데로 하여 동서(東西) 양무(兩撫)에 유학에 출중했던 사람의 위폐를 함께 모시는 것을 문묘배향(文廟配享)이라한다. 현재까지 문묘에 배향된 사람은 아래 표와 같다.

문묘배향 현황

구분

신라

고려

조선

동무

(東廡)

薛聰

(설총)   (1)

安裕

(안유)

(1)

金宏弼(김굉필), 趙光祖(조광조), 李滉(이황),  李珥(이이),     金長生(김장생),  金集(김집),  宋浚吉(송준길)       (7)

9

서무

(西廡)

崔致遠

(최치원)

(1)

鄭夢周

(정몽주)

(1)

鄭汝昌(정여창),李彦迪(이언적),金麟厚(김인후),  成渾(성혼),   趙憲(조헌),  宋時烈(송시열),  朴世采(박세채)       (7)

9

2

2

14

18

 

고려의 충신으로 조선창업에 반대하여 역적으로 취급된 정몽주가 조선조 초기 그것도 그를 심복에게 죽이도록 사주한 태종에 의하여 복권되어 외관상으로는 명예가 회복되고 융숭하게 대접을 받은 것이다. 그 후 어느 때인지는 자세히 모르겠으나 역적으로 송도 어느 산야에 묻혀 있던 정몽주의 묘를 한양 인근으로 이장하였는데 그 곳이 지금의 용인군 모현면 능원리 문수산 남쪽 기슭이다.

 

정몽주의 묘를 이 곳으로 이장하면서 왕능(王陵)의 격식을 갖추어 둘레석과, 문무관석 등을 설치하였기 때문에 이 마을은 능원리(陵院里)라는 이름까지 얻었고, 이 마을에는 정몽주의 묘 뿐만 아니라 정몽주사당과 하마비(下馬碑: 지나는 사람은 말에서 내려 예를 갖추라는 경고의 비석)까지 세워졌다.

 

정몽주의 묘가 있는 문수산은 남쪽으로 4개의 능선을 뻐치고 있데 양쪽 2개는 길게 뻗어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를 이루고 가운데 2개 능선은 약 40m 간격으로 나란히 짧게 끝난다. 문수산을 바라보면서 왼쪽 날등에 포은의 묘(능)가 있고, 오른쪽 날등에는 저헌(樗軒) 이석형(李石亨: 태종15년 1415-성종8년 1477)선생의 묘가 있다. 모두 경기도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이석형은 세종23년에 생원과, 진사과, 문과에 동시에 장원하여 한 방(榜: 과거 급제자 발표)에 세 개의 장원이 오른 조선조 최초의 삼장원(三壯元)이 되고, 세종25년에는 호당(湖堂: 일명 賜暇讀書라고도 하는 유망 인제 연수제도)에 뽑히고 신숙주와 성삼문 등 이른바 사육신들과 10여년간 집현전 학사로 있으면서 세종대왕의 문화창달에 크게 기여하였다.

 

세조의 왕위 찬탈 후 사육신 사건 때는 전라감사로 원지에 나가 있어 동참하지는 않았으나 사육신과의 특수한 관계 때문에 세조로부터 항상 우대를 받아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正一品加資)에 까지 올랐으면서도 한명회 등 그 측근들에게 항상 견제를 받아 육조판서나 정승에는 오르지 못하고 실권 없는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 正二品), 수문전제학(修文殿提學: 從二品), 세자좌빈객(世子左賓客: 正二品) 등의 직위에만 올랐으며, 최종 관직은 판중주부사(判中樞府事: 從一品)였다. 성종 2년에 시행한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책록되어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에 봉해지고, 시호는 문강(文康)이 내려졌으며 많은 시문을 남긴 사람이다.

 

이석형의 묘에 합부(合祔)된 전배(前配) 연일정씨(延日鄭氏) 오늘 이 글 ‘출가외인’의 장본인인데 바로 정몽주선생의 증손녀(曾孫女)이니까 이석형은 정몽주 선생의 증손서이다.

 

연일정씨가 이석형과 혼인한 후에도 남편 이석형은 벼슬살이 하느라고 한양에 가 있었지만 부인은 그냥 향촌인 이 곳 문수산 아래 살고 있었다. 지관을 들여 문수산 일대를 둘러 본 결과 가운데 2개 날등 중에서 오른 쪽이 아주 명당이라는 언질을 받아 장차 이석형의 묘자리로 점 찍어 놓았다.

 

그런데 나라에서 정몽주의 묘를 이장 할 곳을 바로 문수산으로 정하고 다음날 지관이 묘 터를 보러 온다는 전갈이 왔다. 연일정씨는 밤중에 산아래 천수답에 물을 대는 물웅덩이에서 물동이로 물을 퍼 날라 오른쪽 날등에 갖다 붇기를 밤새도록 하였다.

 

다음날 조정에서 보낸 지관이 먼 앞산에서 문수산을 바라보고 가운데 두 날등이 다 괜찮은데 오른쪽 날등이 아주 좋다는 결론을 내리고 현장으로 갔다. 현장에 도착한 지관은 오른쪽 날등이 축축하게 물이 나고 있는 것을 보고 ‘아! 아깝다. 이 좋은 자리에 물이 나니 묘자리로는 안되겠다’ 하면서 왼쪽 날등으로 결정하고 돌아가 정몽주 묘는 왼쪽 날등에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석형이 죽은 후 오른쪽 날등에다 묘를 썼다

 

 

 

 

 

 

 

 

연일정씨가 물을 퍼 나른 웅덩이(이석형 묘 바로 아래 있음).

 

이석형의 후손은 아주 번창하였다. 그 후손 중에는

8정승(八政丞: 인조6년 李廷龜, 효종원년 李時白, 영조28년 李天輔, 영조34년 李후, 정조6년 李福源, 정조12년 李性源, 정조23년 李時秀, 순조27년 李存秀),   

삼대대제학(三代大提學)을 비록하여 대제학 6인(선조34년 李廷龜, 인조9년 李明漢, 효종10년 李一相 삼대대제학, 영조37년 李鼎輔, 영조48년 李福源, 순조1년 李晩秀 2대대제학),

③ 조선조 대표적인 문장가 월상계택(月象鷄澤: 月沙 李廷龜, 象村 申欽, 鷄谷 張維, 澤堂 李植)의 월사 이정구를 비롯하여 문장가록(文章家錄)에 오른 4인(李石亨, 李廷龜, 李明漢, 李天輔),

④ 인조반정을 주모하여 성공으로 이끈 정사공신(靖社功臣) 삼부자(三父子: 부 李貴 1등 延平府院君, 장자 李時白 2등 延陽府院君, 3자 李時昉 2등 延城君),

육조(六曹) 판서(判書: 正二品) 37인,

2대 3부원군(府院君), 9대 11인의 봉군(封君:1대 李貴 延平府院君, 2대 李時白 延陽府院君, 李時聃 延豊府院君, 李時昉 延城君, 3대 李炘 延昌君, 4대 李相胃 延城君, 5대 李泳 延恩君, 6대 李明熙 延原君, 7대 李瑜 延陵君, 8대 李度陽 延川君, 9대 李押 延豊君) 등을 배출하는  반면 한 사람의 역신이나 탐관오리가 나오지 않았고, 청백리(淸白吏)와 충효절열(忠孝節烈)이 줄을 이어 나왔다.

 

이렇게 후손이 융성한 것이 이석형의 묘자리 때문이라 것이 현대 과학적인 사고로는 허무맹랑한 것이겠지만 옛날 풍수지리설을 믿던 시절에 사람들은 그렇게 믿어왔던 것이다.

 

하기는 요즈음도 부친의 묘자리를 잘 잡아 이장하였기 때문에 -그것도 이 이야기와 관련이 있는 용인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고 믿는 사람이 있으니 옛날에는 그것이 부동의 진리라고 믿었던 것이 사실일 것이다.

 

밤중에 물동이로 물을 퍼 나른 연일정씨의 심중에는 친정집의 번영이 시집의 번영만 못한다고 생각한데서 나온 행동일 것이니 ‘출가외인(出嫁外人)’즉 출가한 딸은 곧 남인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