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사(東鶴사) 홍살문
沙月 李盛永(2006. 10. 20)
계룡산 동학사 일주문
  2006년 10월 18일 아사달 동기회원 내외 59명이 예년 대로 가을 단풍 나들이를 나섰는데 코스는 공주 계룡산(鷄龍山) 동학사(東鶴寺) 계곡과 민간에 개방한 대청호(大淸湖) 북안에 있는 대통령 별장 청남대(淸南臺)가 들어있었다.

  공주 계룡산 동쪽 자락 아늑한 곳에 동학사(東鶴寺)가 자리잡고 있다. 계룡산국립공원 매표소를 지나 10여분 걸어 들어가면 동학사에 앞서 관음암 등 세 암자가 먼저 나타나는데 관음암 좀 못 미쳐 남매탑 가는 길이 갈라지는 지점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그냥 지나치는 홍살문 하나가 있다.
  아사달 동기회원들 가을 단풍 나들이 때도 나와 가까이 동행했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회원들이 별 관심없이 지나쳤을 것이다.
동학사 홍살문
  홍살문은 능(陵), 원(園), 묘(廟), 관아(官衙) 그리고 충효절열(忠孝節烈)의 정려각(旌閭閣)이 있는 마을 입구에 세우는 붉은 색으로 칠한 창살을 세운 문으로 출입하는 사람에게 경의를 표하라는 뜻이 담긴 유교적 관습의 문이다. 유교적인 관습인 홍살문을 불교 사찰에 세우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런데 동학사에는 다른 절과는 달리 이 홍살문이 세워져 있는 데 그것은 동학사 내 동편에 자리잡고 있는 동계사(東鷄寺), 삼은각(三隱閣) 그리고 숙모전(肅募殿, 원명은 초혼각招魂閣) 등 세 시설이 때문에 이곳에서 경건한 마음가짐을 하라는 뜻에서 세워져 있는 것이다.

  동계사(東鷄寺)는 신라 충신 박제상(朴堤上)을 기리기 위하여 고려 태조 때 지은 것이다.
  신라 제19대 눌지왕(訥祗王) 때 인질로 일본에 잡혀간 왕의 아우 미사흔(未斯欣)을 탈출시키고 자기는 왜국에서 혹형으로 죽은 관설당(觀雪堂) 박제상(朴提上) 의 충혼(忠魂)을 모신 곳으로 고려 태조 19년(939)에 개국공신 유차달(柳車達)이 박제상의 만고 충절을 기려 이곳에서 초혼제사(招魂祭祀)를 지냈는데 이 일이 알려지자 왕명으로 동계사(東鷄祠)를 지었다. 오랜 세월 속에 동계사는 폐허가 되었는데 1956년 중건하고 유차달도 함께 추향하였다.
동계사
  동계사에 모신 박제상(朴堤上)은 신라 5대 파사왕(婆娑王)의 5대손으로 박물품(朴勿品)의 아들이다. (삼국유사에는 金提上으로 잘못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삽량주(삽良州: 지금의 영천 일원)의 간(干)으로 으로 있을 때 지혜와 용맹으로 명성을 날렸다.

  산라 제18대 실성왕(實聖王) 때 내물왕(奈勿王, 제17대 왕)의 아들 미사흔을 일본에, 그 형 복호(卜好)를 고구려에 볼모로 보낸 바 있는데, 서기 417년 눌지왕이 즉위한 후 박제상이 왕명을 받고, 고구려에 들어가 복호를 데려왔고, 이어서 일본으로 건너가 계책을 써서 미사흔을 신라로 탈출 시키고, 자신은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 끝에 피살되었다.

  눌지왕은 박제상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슬피 통곡하고, 박제상을 대아찬 벼슬을 추증하였고, 그의 둘 째 딸을 미사흔에게 출가토록 하여 그 공에 보답하였다.

  그 후 박제상의 부인은 세 딸과 함께 지금 경주시와 울주군의 지경에 있는 치술령(痴述嶺, 765m)에 올라 동해를 바라보며 통곡하다가 죽었는데 사람들은 그녀가 치술령 망부석(望夫石)이 되었다고도 하고, 치술령 신모(神母)가 되었다고도 한다. 또 사람들은 그녀를 불쌍하게 생각하고 노래를 지어 불렀는데 이를 ‘치술령가(痴述嶺歌)’라고 전해지고 있다.

  삼은각(三隱閣) 은 고려의 학자이며 충신인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목은(牧隱) 이색(李穡), 야은(冶隱) 길재(吉再) 이른바 삼은(三隱)으로 불리는 고려 명현(名賢)을 모신 사당으로 조선 태조 3년(1390)에 최초로 설단한 정몽주의 초혼단(招魂壇)이 있던 자리에 공주목사 이정간(李貞幹)이 각(閣)을 세워 삼은(三隱)을 모시면서 삼은각(三隱閣)이 되었다.
  그 후 금헌(琴軒) 유방택(柳方澤),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 죽헌(竹軒) 나계종(羅繼從)을 추향(追享) 하였다.
삼은각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는 고려 충숙왕 복위6년(1337)-공양왕 4년(1392) 간의 학자요 충신으로 초명(初名)은 몽란(夢蘭) 또는 몽룡(夢龍)이었고, 자(字)는 달가(達可), 호(號)는 포은(圃隱), 시호(諡號)는 문충(文忠), 본관(本貫)은 영일(迎日)이다.

  고려 공민왕 9년에 삼장(三場: 生員試, 進士試, 文科 세 과거시험)에 연달아 장원으로 급제하여 우리나라 최초로 삼장원(三壯元)이 되었다.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을 거쳐 공민왕 13년(1364) 병마사(兵馬使) 이성계의 종사관(從事官: 부관) 되어 화주(화주)에서 여진의 삼선(三善)과 삼개(三介) 등의 침공을 격퇴하는데 공을 세웠다.

  공민완 21년(1372) 사신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우왕 1년(1375)에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를 거쳐 대사성(大司成: 성균관장)이 되어 왕에게 원나라를 섬기지 말 것을 주장하다가 권신 이인임에 의해 귀양을 갔다가 풀려나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일본으로 하여금 해구(海寇)를 금하도록 교섭하고 돌아왔다.

  우왕6년(1380) 이성계를 따라 전라도 운봉의 황산전투에서 왜구를 격멸한 공으로 밀직제학(密直提學)에 오르고, 우왕 10년(1384) 정당문학(政堂文學)이 되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조명 간에 국교를 두텁게 하였고, 우왕 12년(1386)에도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세공(歲貢: 매년 공식적으로 바치는 공물)을 면제하도록 하고 돌아온 공으로 영원군(永原君)에 봉해졌다.

  삼사(三司) 좌사(左使)를 거쳐 창왕 1년(1389)에 대제학(大提學)에 오르고,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세우고, 문하찬성(門下贊成) 등 여러 벼슬을 받고, 익양군충의군(益陽郡忠義君)에 봉해지고, 좌명공신(佐命功臣)이 되었으며, 공양왕 4년(1392) 대명률(大明律)을 새로 찬정(撰定)하여 바쳤다.

  이성계의 위력이 날로 커져 조준, 정도전 등이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려 하자 우선 조준을 제거하려 기도하는 등 고려조를 끝까지 지키려다가 이방원(李芳遠: 후에 조선 3대 태종)의 초대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이방원 수하의 문객 조영규(趙英珪)에게 선죽교에서 피살되었다.

  정몽주는 성미가 호방하고 매서워 충효로 일관했으며, 성리학에 매우 밝아 오부학당(五部學堂), 향교(鄕校)를 설치하여 유학을 신흥시켰으며, 시문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조선 태종 때 대광보국숭록대부영의정부사수문전대제학감예문춘추관사익양부원군(大匡輔國崇祿大夫領議政府事修文殿大提學監藝文春秋館事益陽府院君)에 추증되고 시호 문충(文忠)이 내려졌으며, 중종 때 문묘(文廟: 공자를 모신 묘당)에 배향되었다.

  문하에 길재(吉再), 권근(權近), 권우(權遇), 변계량(卞季良), 이양소(李陽昭), 조용(趙庸), 하연(河演), 성전림(成傳霖), 박신(朴신) 등을 배출하였다.

  정몽주가 이방원에게 초대되어 갔을 때 이방원이 정몽주의 속마음을 떠보기 위하여 지었다는 시조 하여가(何如歌)와 이에 정몽주가 답했다는 단심가(丹心歌)가 유명하다. 또 정몽주 어머니가 병문안차 이성계를 방문하려는 아들 정몽주에게 만류하는 시조도 있다.
하여가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서 백년같이 누리리라
단심가
  이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이시랴
정몽주 어머니 시조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 마라
  성낸 까마귀 흰 빛을 새울세라
  청강에 좋이 시슨 몸 더럽힐까 하노라
  * 정몽주 어머니가 지은 시조의 배경은 고려왕조를 지키려는 정몽주파와 역성 혁명을 꿈꾸는 이성계, 조준, 정도전 일파의 팽팽한 대결이 점차 이성계 쪽으로 기울어져 갈 즈음 정몽주가 시국을 예의 주시하여 관망하고 있을 때 뜻하지 않은 일이 발생하였다.

  이성계가 사신으로 명나라에 다녀오던 세자 일행을 마중할 겸 사냥을 나갔다가 해주에서 낙마하여 큰 부상을 당하여해주에 머물게 되었다. 그러자 정몽주는 이것이 반역의 주역인 조준, 정도전을 제거하고, 이성계 부자까지 제거할 수 있는 기회로 생각하고 이들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는데, 이방원이 이를 감지하고 사람을 보내 이성계를 급히 귀경케하고, 정몽주 일파에 대한 선공을 하려 하는 절박한 때였다.

  정몽주는 이성계사 귀경하여 사저에서 정양중에 있을 때 동정도 살필 겸 병문안을 빙자하여 이성계를 방문하려고 집을 나섰을 때 그 어머니가 따라 나와 전날 밤 흉몽을 말하며 아들 정몽주가 이성계 일파에게 변을 당할지 모르니 병문안을 차후로 미루도록 간곡히 권고하면서 이 시조를 지었다고 한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은 고려 충숙왕 15년(1328)-조선 태조 5년(1396) 간의 성리학자로서 호는 목은(牧隱), 시호는 문정(文靖), 본관은 한산(韓山)이다.

  어려서 총기가 뛰어나 14세에 성균관시(成均館試)에 합격하고, 중서사전부로 원나라에서 일을 보던 아버지로 인해 원나라 국자감(國子監) 생원(生員)이 되어 3년간 유학 하고, 부친 상을 당하여 귀국하였다.

  공민왕 1년(1352, 24세) 학문의 경향과 정견(政見)의 윤곽을 피력한 의견서를 왕에게 제출하였으며, 공민왕 2년(1353)에 괴과(魁科: 文科의 甲科)에 합격하고, 다시 정동성(征東省) 향시(鄕試)에 장원으로 합격되어 원나라에 가는 사신의 서장관에 임명되어 원나라에 들어가 다시 원나라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지제고(翰林知制誥)가 되었다.

  귀국하여 네서사인(內書舍人), 밀직제학(密直提學), 동지춘추관사(동지춘추관사)가 되어 본격적으로 국정에 참여하여 공민왕 16년(1367)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이 되어 정몽주, 김구용(金九容) 등과 함께 명륜당에서 학문을 강론하여 고려에도 처음으로 정주(程朱)의 성리학(性理學)이 일기 시작하였다.

  공민왕 20년(1371)에 정당문학(政堂文學)이 되고, 문충보절찬화공신(文忠保節贊化功臣)이 되어 공민왕 22년(1373)에 한산군(韓山君)에 봉해졌으며, 우왕 3년(1377)에 추충보절동덕찬화공신(推忠保節同德贊化功臣)이 되고 우왕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공양왕 때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가 되고, 오사충의 상소로 장단, 함안 등지로 귀양 갔다가 돌아와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에 봉해지고, 판예문춘추관사(判藝文春秋館事)에 임명되었으나 정몽주가 피살되자 관련하여 금천, 장흥, 여흥 등지로 유배되었다가 석방되었다.

  조선 개국 후 태조는 그의 인재를 아껴 태조4년(1395) 그를 한산백(韓山伯)에 봉하면서 예를 다하여 출사를 종용하였으나 “망국의 사대부는 오로지 해골을 고산(故山)에 묻을 뿐”이라면서 고사하고, 이듬해 여강(여강)으로 가는 도중 급서하여 사인에 대해 의혹이 많았다.

  문하에 김구용(金九容), 이숭인(李崇人), 박상충(朴尙衷), 박의중(朴宜中), 하륜(河崙), 정도전(鄭道傳), 윤소중(尹紹仲), 유상(劉상), 정가종(鄭可宗), 최호(崔호) 등을 배출하였다.

  야은(冶隱) 길재(吉再)는 고려 공민왕 2년(1353)-조선 세종 1년(1419년) 간의 학자로 자는 재부(再父), 호는 야은(冶隱), 금오산인(金烏山人), 시호는 충절(忠節), 본관은 해평(海平)이다.

  우왕 12년(1386)에 진사시에 급제하여 청주목(淸州牧)의 사록(司錄)에 임명되었으나 불사하고, 이듬해 성균관 학정(學正)이되고, 또 박사(博士)가 되어 국자감에서 학생들을 교육하는 한편, 집에서는 양가(良家) 자제(子弟)를 교육하였다. 창왕 1년(1389) 문하주서(門下注書) 직을 내렸으나 노모를 핑계로 받지 않고, 이듬해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 모친을 모셨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 정종 2년(1400) 친교가 있던 태제(太弟) 이방원(李芳遠)이 불러서 태상박사(太常博士)를 내렸으나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 면서 끝내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세상 사람들은 그의 충절을 기려 목은, 포은과 함께 고려삼은(高麗三隱)이라 불렀다.

  이색, 정몽주, 권근의 제자이며, 문인으로는 김숙자(金叔滋), 김치(金峙), 박서생(朴瑞生), 길구(吉久: 弟), 최운룡(崔雲龍), 길사순(吉師舜: 子), 김극일(金克一), 조상치(曹尙治) 등을 배출하였다.

  숙모전(肅募殿)은 세조에 의하여 왕위를 찬탈 당한 조선 제6대 임금 단종을 모신 전각인데 단종 위폐 동,서에 당시 단종의 왕위를 지키다가 또는 폐위된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세조에게 죽임을 당한 이른바 사육신을 비롯하여 삼상(三相), 종실의 대군, 기타 순절한 원혼과 생육신 등 충의(忠義), 절사(節士)를 모신 곳이다.
숙모전
  세조 2년(1456) 생육신의 한 사람인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이 노량진에 버려진 사육신의 시신을 몰래 수습하여 장례지낸 후 이곳 동학사 삼은각 옆에 단을 모아 사육신을 초혼제사(招魂祭祀) 하였는데 세조 4년(1458) 세조가 이곳에 들렸다가 초혼단을 보고 감동하여 초혼각(招魂閣)을 짓고 토지와 산림을 사패(賜牌)하고, 또 자기로 인해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의 명단을 8폭 바단에 적어 유(儒), 불(佛)이 동시에 공사(供祀)토록 하였다.

  영조4년(1728) 화재로 소실된 것은 순조 27년(1827) 다시 세우고, 고종 1년(1864) 초혼각 북벽에 단종의 위패를 모시고, 그 동벽에 고려말 충신 삼은(三隱삼상(三相: 황보인, 김종서, 정발) 그리고 엄홍도 7위, 서벽에 사육신(死六臣: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과 김시습 7위를 배향(배향)하였으며, 고종 41년(1904) 숙모전(肅慕殿)이라 개명하고, 단종비 정순왕후를 함께 모셨다.

  단종 1년(1453)부터 세조 2년(1456)까지 4년 동안에 단종의 왕위를 지키려 하거나, 폐위된 단종을 복위하려다가 화를 입은 사람들은 모두 160여인이나 되는데 그 중 유명한 사람들은 아래와 같다.
    (1) 황보인(皇甫仁: 영상), 김종서(金宗瑞: 좌상), 정분(鄭?: 우상) 이상을 세칭 삼상(三相)이라 한다.
    (2) 안평대군(安平大君) 용(瑢), 금성대군(錦城大君) 유(瑜), 한남군(漢南君) 선(旋), 영풍군(永豊君) 천(王泉), 화의군(和義君) 영(瓔), 이양(李 王襄) 이상을 세칭 육종영(六宗英)이라 한다.
    (3) 송현수(宋玹壽), 권자신(權自愼), 정종(鄭悰), 정효전(鄭孝全), 권완(權完) 이상 세칭 오의척(五懿戚)이라 한다.
    (4) 민중(閔仲: 吏判), 조극관(趙克寬: 吏判), 김문기(金文起: 吏判) 이상 세칭 삼재(三宰)라 한다.
    (5) 박중림(朴仲林), 성승(成勝: 成三問 父), 박정(朴靖) 이상 세칭 삼운검(三雲劍)이라 한다.
    (6)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하위지(河緯之), 이개(李塏), 유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孚) 이상 세칭 사육신(死六臣)이라 한다.
    (7) 김시습(金時習), 조여(趙旅), 남효온(南孝溫), 이맹전(李孟專), 성담수(成聃壽), 원호(元昊) 이상 세칭 생육신(生六臣)이라 한다.
    (8) 이 외 130여인의 충신(忠臣), 의사(義士), 현인(賢人)이 죽거나 귀양가는 등 처벌을 받았다.

  반대로 응달이 있으면 양지가 있듯, 우는 사람 뒤쪽에는 웃는 사람이 있는 법. 단종을 폐위 시키고, 세조를 즉위 시키는 공으로 공신에 책록되어 광영의 공신 가문이 된 사람들은 다음과 같다.
  (1) 단종 1년(1453) 황보인 김종서 등 제거하는 데 공이 있는 정난공신(靖難功臣) 38인
      1등공신13인: 수양대군(首陽大君), 정인지(鄭麟趾), 한확(韓確), 이사철(李思哲), 박종우(朴從愚), 김효성(金孝誠), 이계전(李季甸), 박중손(朴仲孫), 권람(權擥), 홍달손(洪達孫), 최항(崔恒), 한명회(韓明澮), 봉석주(奉石柱),
      2등공신 8인: 신숙주(申叔舟), 권준(權준), 유수(柳洙), 홍윤성(洪允成), 전균(田畇), 윤사균(尹士 日勻), 유하(柳河), 곽연성(郭連成)
      3등공신17인: 이흥상(李興商), 이예장(李禮長), 강곤(康袞), 유서(柳 水변敍), 권언(權偃), 유사(柳泗), 홍순노(洪純老), 임자번(林自蕃), 안경손(安慶孫), 유자환(柳子煥), 설계조(薛繼祖), 권경(權擎), 홍순손(洪順孫), 송익손(宋益孫), 한명진(韓明 水변晉: 韓明會 弟), 한서구(韓瑞龜), 이몽가(李夢哥)

  (2) 세조 1년(1455) 사육신의 단종 복위 기도를 사전 적발한 공이 있는 좌익공신(佐翼功臣) 41인
      1등공신 7인: 이증(李 王曾), 이운(李 王運), 한확(韓確), 윤사로(尹師路), 신숙주(申叔舟), 權擥(권람), 한명회(韓明澮)
      2등공신12인: 정인지(鄭麟趾), 이사철(李思哲), 정창손(鄭昌孫), 윤형(尹炯), 윤암(尹巖), 이계전(李季甸), 이계린(李季린), 강맹경(姜孟卿), 홍달손(洪達孫), 최항(崔恒), 전균(田畇), 권반(權攀),
      3등공신22인: 이징석(李澄石), 권공(權恭), 황수신(黃守身), 박강(朴薑), 박원형(朴元亨), 윤사균(尹士 日勻), 구치관(具致寬), 홍윤성(洪允成), 원효연(元孝然), 조석문(曺錫文), 이예장(李禮長), 황효원(黃孝源), 한종손(韓宗孫), 윤자운(尹子雲), 한계미(韓繼美), 조효문(曺孝文), 김질(金 石質), 이극배(李克培), 권개(權愷), 이극감(李克堪), 정수충(鄭守忠), 조득림(趙得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