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자우환(識字憂患) 어비울
沙月 李盛永(2010. 1. 1)
  용인출신의 작가 이제학 지음 「용인의 山水이야기」와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 발행 「국토와 지명」이라는 책에 지금의 용인시 처인구 이동면 어비리 어비울 마을에 얽힌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이 이야기에 따르면 그리 오래지 않은 조선조 말기 1895년, 명성황후가 일본인 자객들에게 시해 당한 그 해 섣달 그믐날 이곳에서 탁지부대신(度支部大臣 : 현 국토해양부장관) 어윤중(魚允中)이 흥분한 군중들의 몽둥이에 맞아 죽는 불상사가 일어났던 곳이란다.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과 일본을 배경으로 하여 수립된 김홍집 내각에 위협을 느끼고 고종황제는 상궁의 가마를 타고 궁을 빠져나가 러시아공관으로 피해 있을 때였다. 이를 역사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이라 하였다.

  민심이 흉흉해지자 탁지부대신 어윤중도 ‘소나기는 피하는 것이 상수(上手)’라는 생각으로 이 역사의 소용돌이 한고비를 우선 피해야겠다고 고향인 충청도 보은으로 가기 위해 여인의 가마로 위장하고 서울을 무사히 빠져 나와 해가 떨어질 때쯤 이곳을 지나다가 위험지역은 벗어난 것 같기도 하고, 날도 저물었으니 하루 밤 묵고 가야겠다고 주막에 들어 여장을 풀었다.

  주모가 손님 뒷바라지 할 것이 없나 하고 방문 앞에 서성거리자 어윤중은 주모에게 이 마을 이름을 물었더니 주모는 ‘어비울’ 이라고 대답하였다. 물론 주모는 까막눈이니 한자(漢字)를 말했을리 없다. 어윤중은 직책이 직책인지라 ‘어비울’이란 지명에 관심이 갔다.

  "어비울 이라!" 마을 이름치고는 좀 독특하다 는 생각을 하면서 뜻을 새기는 식자(識者)의 습성을 버릴 수가 없었던지
  ‘어비’는 고기 어(魚)와 슬플 비(悲)자인 것 같고, ‘울’은 순수우리말 같은데 ‘운다’는 뜻으로 한자로 말하면 읍(泣)자가 아닐까. 어비읍(魚悲泣)이라. 그렇다면 어비울마을은 ‘고기가 슬피 운다’는 뜻이 아닌가. 이거 참 불길하다. 내 성이 어(魚)가이니 내게 슬픈 일이 생긴다는 뜻이 아닌가. 』
  자신이 피신차 고향으로 가는 몸이니 마음의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좋은 쪽으로 생각이 미치지 못하고, 나쁜 쪽으로만 생각이 미치는 것은 인지상정이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부랴부랴 하인을 불러 행장을 갖추어 이웃동네 수역(水域) 마을로 거처를 옮겼는데 오히려 그것이 화근이 되어 신분이 탄로가 나서 어비울 마을 장정들이 달려와 수역마을 장정들과 합세하여 그를 잡아서 지금은 이동저수지 수문이 된 어비울 강변에서 몽둥이로 무참히 타살되고, 장작더미에 얹어 시신마저 불태워버렸다.
  '어비울'= '어비읍(魚悲泣)'의 예감이 적중한 꼴이 되고 말았다.
어윤중이 타살된 곳으로 전해지는 옛 어비울,
지금은 이동저수지 수문
  그러나, 이곳 ‘어비울’은 냇물이 깊고 물이 많아서 ‘고기(魚)가 살찌는(肥) 여울’이라는 긍정적인 뜻이었다. ‘울’자를 굳이 한자로 쓴다면 여울 탄(灘)자를 써서 ‘어비탄(魚肥灘)’으로 뜻을 새겼어야 할 터인데 공연히 불길한 쪽으로 생각하여 '어비읍(魚悲泣)'으로 뜻을 새긴 것이 화를 불러온 샘이 되었다.
  식자우환(識字憂患)이란 말이 이런 때 꼭 맞는 말 같다.

  어윤중 타살 사건이 있은 후 한동안 어비울 강변에서는 밤마다 “어탁지, 어탁지” 하고 귀신 우는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죽은 어윤중의 혼령이 편히 쉬질 못하고 구천을 떠돌면서 억울함을 호소하는 소리였는 지도 모른다.

  실제로 조선조 말기에 조정은 일제의 침략 앞에 민족을 배반하고 일제에 빌붙어 친일매국(親日賣國) 한 인사들이 판을 친 것은 사실이지마는 탁지부대신 어윤중은 그렇지 않은 인물로 알려졌다.
탁지부대신 어윤중(魚允中)
  어윤중(魚允中)(헌종14년,1848-고종33년,1896)은 조선 고종 때의 대신으로 자를 성집(聖執), 호를 일재(一齋)이고, 시호가 충숙(忠肅)이며, 함종인(咸從人) 약우(若愚)의 아들이다.
  고종8년(1871) 문과 급제하고, 누진(累進)하여 승지(承旨), 참판(參判)을 지내고, 박정양(朴定陽), 홍영식(洪英植) 등과 함께 일본에 가서 문물제도를 시찰하였으며, 서북경략사(西北經略使)로 있을 때 청(靑), 로(露)와의 국경을 정하는데 노력하였다.
  동학혁명 때는 선무사(宣撫使)로 파견되어 난을 진정시키는데 노력하였고, 고종32년(1895) 탁지부대신(度支部大臣)에 기용되었다.
  명성왕후 시해 후, 조정에는 일시적으로 친로파(親露派) 세력이 강해져서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옮기고, 총리대신 김홍집을 죽이니, 그도 도주하여 고향(보은)으로 가다가 용인에서 잡혀 죽었다.
  융희4년(1910) 규장각(奎章閣) 대제학(大提學)에 추증(追贈)되고, 임금이 제관을 보내 제사를 지냈다.
(韓國史大辭典)

  어윤중(魚允中)은 명성황후 시해사건 때는 고향에 낙향해 있었기 때문에 관련이 전혀 없고, 친일과는 거리가 먼 원만한 성품의 중도파 대신으로 알려져 있었다. 특히 서북경략사(西北經略使)로 있으면서 숙종 때 조(朝)-청(淸) 간의 국경을 확정한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에 있는 ‘토문강(土門江)’ 은 두만강(豆滿江)이 아니라 송화강(松花江)의 한 지류이므로 간도(間島)는 우리의 땅임을 분명하게 밝힌 의지가 굳은 인물로 알려졌다.
*백두산 정계비 이야기 바로가기(클릭): 백두산(역사소고)
  그런 사람이 억울하게 성난 군중들에게 무참히 살해되었으니 그 혼령이 귀신이 되어‘어(魚) 탁지(度支) 대감은 억울하다’고 슬피 울만도 하다

  ‘어비울’은 용인대학교 뒷산인 한남정맥(漢南正脈)의 부아산(負兒山,403.6m)에서 발원하여 동남류하다가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흐르는 지금의 석성천이 흘러와 이곳에 이르러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한 구비 돌면서 진위천이되는 지점의 여울 이름이고, 동시에 마을 이름이기도 하다.

  어윤중이 주막에 묵으려다 그 이름이 꺼림칙해서 도루 나왔다는 어비울마을은 일제시대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리(里)’가 생겨날 때 인근의 당머루, 방목리, 점촌 등을 합해 어비리(魚肥里)가 되었고, 마을사람들에게 수상하게 보여 그것이 화근이 되어 군중들에게 잡혀 몽둥이로 맞아 죽고, 시체를 강가에서 태워버렸다는 수역(水域)마을(한글학회가 펴낸 지명총람에는 壽域) 은 중복동 등과 합쳐 수역리(水域里)가 되어있다.
지금의 수역마을
  또 ‘물고기가 살찌는 여울’ 이라는 뜻의 어비울에는 1960년에 용인에서 제일 크고,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저수지가 생겼는데 면(面) 이름을 따서 ‘이동저수지’ 라고 한다. 저수지 댐을 막는 바람에 여비울 마을은 제 자리를 지킬 수 없어 남쪽 산 쪽 높은 곳으로 올라왔고, 그 물가에는 「魚肥洞遺跡地永世不忘碑」(어비동유적지영세불망비)가 세워져 있는데 이 비석에는 이동저수지를 ‘魚湖’(어호)로 명명하고 있다.
어비동유적지영세불망비
魚湖八景(어호팔경)
聖輪峰朝旭(성륜봉조욱): 성륜봉(?) 아침 햇살
睡仙臺明月(수선대명월): 수선대(?) 밝은 달빛
濯纓亭聚友(탁영정취우): 탁영정(?)에 모인 친구들
石隅川垂釣(석우천수조): 석우천(?)에 낙시드리운 풍경
龍岡落照(용강낙조): 용능선(?)에 지는 해
放木里午烟(방목리오연): 방목리 마을의 점심 연기
金丹寺曉鍾(금안사효종): 금안사의 새벽종소리
渴馬山翠積(갈마산취적): 갈마산의 짙은 푸르름
  이동저수지는 어비(魚肥)울 옛이름 그대로 물고기가 풍족하여 결빙되는 겨울을 제외하고 수도권의 강태공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물가는 물론이고 저수지 안쪽에도 낙시터를 만들어 놓았다. 그러고 보면 조상들이 지은 ‘어비(魚肥)’라는 이름이 기막히게 들어맞는 것을 공연히 ‘고기가 슬피운다’고 해석해서 화를 자초했으니 어윤중의 혼령은 ‘식자우환(識字憂患)’을 원망해야 할 것 같다.
  이동저수지에는 낚시 외에도 수상스키 등 레저시설도 갖추어져 있다.
이동저수지 수상스키 광경
  이러한 어비울에 얽힌 탁지부대신 어윤중의 슬픈 이야기를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고, 언제, 어떻게 선정했는지는 모르지만 어비낙조(魚肥落照)가 용인시의 용인팔경(龍仁八景) 제2경으로 선정되어있다. 어비울(지금의 이동저수지) 서편 용강(龍岡: 용능선?) 위로 지는 해가 저수지 수면을 비추는 풍경이 아름다운 모양이다.
  나는 한겨울 저수지가 꽁꽁 언 때에 그것도 대낮에 갔으니 낙조는 구경할 수 없었다. 언제 때 맞추어 한번 구경 가야겠다.
용인팔경의 제2경(第二景) 어비낙조(魚肥落照)
용인시 홍보물 사진, 저수지 가운데도 만들어 놓은 낙시터가 많다.
<어비울 자리 이동저수지, 魚湖(어호)의 한겨울 풍경>
동쪽 점촌마을에서 바라보는 풍경
맨 아래 건너편 큰 마을은 이동면사무소가 있는 송전이다.
어비울마을 불망비에서 바라보는 풍경
맨 아래 구조물은 이동저수지 수문
이동저수지 수문아래서 바라보는 풍경
탁지부대신 어윤중이 군중들의 몽둥이에 맞아 죽고.
시체를 붙 태웠다는 어비울에는 수문과 잡초만 우거져 옛 일을 감추고 있다.
< 增補 1 >허동현의 모든 타임스[4] '해외유학'이 韓, 中, 日 운명을 갈랐다.
  20세기 초 한국과 중국은 식민지와 반(半)식민지가 됐고 일본은 제국이 됐다. 세 나라의 실패와 성공이 엇갈린 것은 서구 문물 수용 태도와 시기가 차이 났기 때문이다. 결정적 분기점은 청일전쟁(1894~1895년)이었지만, 성패는 1880년대에 이미 갈렸다.

  중국은 1860년 북경이 영·불 연합군의 군홧발에 짓밟힌 후 무기와 기술이 뒤졌음을 깨닫고 양무(洋務)운동을 시작했지만 해외 유학 필요성을 깨닫는 데는 10년이 넘게 걸렸다. 1872년부터 10세 전후의 '유미유동(留美幼童)' 120명을 15년 유학 예정으로 미국에 보냈던 청나라는 1881년 이들을 돌연 소환했고, 1889년부터 1896년까지 유학생을 단 한 명도 보내지 않았다.
  게다가 중국 유학생들은 일요일마다 감독 관청에 모여 옹정제(雍正帝)의 유교적 가르침이 담긴 '성유광훈(聖諭廣訓)'을 암송해야 했다. 그들은 중국의 변화를 이끌 힘이 없는 천자의 가신(家臣)에 지나지 않았다.
청나라 유미유동(留美幼童)
  일본의 해외 유학생은 도쿠가와 막부 시절 나가기 시작해 메이지 유신(1868년) 이후 급증했으며 1873년에 1000명을 넘어섰다. 이들은 '문명개화(文明開化)'를 기치로 내걸고 서구의 모든 것을 흡수하려 했으며, 일찍 유학했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나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등은 1880년대에 이미 그 성과를 국민과 나누는 사령탑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오늘은 모두가 지식의 힘으로 자웅(雌雄)을 겨룰 뿐이다. 과거(科擧)를 혁파하면 지금 공명을 좇는 무리가 앞다투어 외국에 나가 재주와 기예를 습득해 돌아올 것이다."
  1881년 근대 문물을 배우기 위해 일본에 간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에 참가한 한국의 어윤중(魚允中)은 유학생 파견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러나 1883년까지 일본에 파견된 한국 유학생 100여명은 1884년 갑신정변 실패 이후 조선을 장악한 원세개(袁世凱)에 의해 형장의 이슬로 스러지고 말았다.

  그로부터 근 130년, 이제 미국 유학생 수는 중·한·일 순서로 역전됐다. 이런 변화는 동양 삼국의 진로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2012.4.6. 조선일보)
< 增補 2 > 녹둔도(鹿屯島)
  -前略- 1860년 청나라와 러시아가 베이징조약을 체결하여 녹둔도(鹿屯島)가 우리도 모르게 갑자기 러시아 영토가 되어버렸다.
  당시 조선말 국정의 혼란으로 녹둔도에 대한 제대로 된 관리가 되지 못한 상태에서 한참 세월이 흐른 1882년 고종은 이를 알고 어윤중(魚允中)서북경략사(西北經略使)로 삼아 녹둔도를 우리 영토로 편입할 방책을 모색토록 명하여 1883년에 어윤중이 고종에게 녹둔도가 조선 땅임을 보고하였다.

  1885년 고종은 김광훈, 신선욱을 보내 녹둔도와 주변 지도를 작성하도록 하였으며 나중에 아국여지도(我國輿地圖)를 제작하여 주변 상황을 정확하게 묘사하였다.
  당시 녹둔도 민가에는 조선인이 113호에 822인이 살고 있다고 확인하였고, 1889년에는 고종이 직접 청나라에 항의 하는 한편 녹둔도의 반환을 요구하였지만 이루어지지 못하였다.(네이버 : 조산만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