千山鳥飛絶(천산조비절) 온 산에는 새들도 날지 못하고,
萬逕人 足從 滅(만경인종멸) 모든 길에 사람의 발자국 없어졌네.
孤舟蓑笠翁(고주사립옹) 외로운 배에 도롱이 삿갓 쓴 늙은이,
獨釣寒江雪(독조한강설) 홀로 찬 눈 덮인 강에서 낚시질 하네(柳宗元(유종원) |
내가 이 시를 어디서 보았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작자와 이 짧은 네 구절도 다 외우지 못하고, 앞의 두 구절만 머리 속에 남아 있어 눈이 펑펑 쏟아져 온 산야가 하얗게 덮일 때, 특히 높은 산에 올라 이 설경을 내려다 볼 때면 으레 이 앞 두 구절(천산조비절, 만경인종멸)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와 중얼거리곤 한다.
웅장한 폭포 앞에 서면 어느 시인이 여산폭포(廬山瀑布)를 두고 읊었다는 ‘飛流直下三千尺(비류직하삼천척 : 마치 날아 수직으로 떨어지는 것이 삼천척이요) 疑視銀河落九泉(의시은하낙구천 : 마치 은하수가 구천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의심스럽네)’하는 구절처럼--- |
여산폭포(廬山瀑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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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산은 중국 서안 남쪽 진령산맥(秦嶺山脈)에 있다. |
여산 위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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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령산맥의 이름난 산은 태백산(太白山, 3767m), 수양산(首陽山, 2720m), 취화산(翠華山), 종남산(終南山,2604m), 여산(驪山,1302), 화산(華山,2160) 등이 있으며, 화산(華山)이 중국 오악(五嶽)의 서악(西嶽)이다. |
지난 5월 어느날 동대문에서 종로5가 쪽으로 걷다가 우연히 눈에 띈 고서점으로 발길이 돌려졌다. 들어서자마자 바로 서가에서 눈에 띈 것이 ‘新完譯(신완역) 古文眞寶(고문진보)’라는 책인데 어디선가 많이 보던 제목이다.
번역본이니 고서는 아니고 또 헌 책이 아니라 새 책이다. 전,후집 두 권으로 되어있는데 전집은 고시(古詩)이고, 후집은 고문(古文)이다. |
| 고문진보 전,후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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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장을 넘기면서 생각이 났다. 선친의 필사본 유고 중에 한 권으로 ‘古文眞寶(고문진보)’가 있었다. 바로 이 책(원본)의 후집을 빌려서 다 베낄 수는 없고 특히 맘에 드시는 글만 골라 필사한 것이다.
소식(蘇軾: 蘇東坡)의 전적벽부(前赤壁賦), 후적벽부(後赤壁賦), 희우정기(喜雨亭記), 제구양문충공문(祭歐陽文忠公文), 왕우칭(王禹稱)의 대루원기(待漏院記), 황주죽루기(黃州竹樓記), 범중엄(范仲淹)의 악양루기(岳陽樓記), 구양수(歐陽修)의 취옹정기(醉翁亭記), 왕희지(王羲之)의 난정기(蘭亭記), 굴원(屈原)의 어부사(漁父辭), 왕발(王勃)의 등왕각서(騰王閣序), 이백(李白; 李太白)의 춘야연도리원서(春夜宴挑李園序), 여한형주서(與韓荊州書), 도잠(陶潛: 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 오류선생전(五柳先生傳), 한유(韓愈; 韓退之)의 상장복야서(上張僕射書), 위인구천서(爲人求薦書), 답진상서(答陳尙書) 등 열 여덟 개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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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친이 필사한 고문진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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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3년 5월 23일 필사, 38쪽 |
한문 해득능력이 별볼일 없는 나로서는 이따금씩 책장만 넘길 뿐 그 뜻도 모르고 제목과 단지 중국 한문학의 거장들의 글이라는 정도로 알고 지냈다. 이 글들이 그 책(고문진보) 후집에 하나 빠짐 없이 들어있다. 각 권 만원으로 2만원을 주고 사와서 서가에 꽂아 놓고 이따금씩 펼쳐 본다.
전집에는 중국의 내노라 하는 시인들의 고시(古詩) 243수가 실려 있는데 바로 위 유종원(柳宗元)의 시 ‘강설(江雪)’도 실려 있다. 이제 선무당처럼 두 구절만 중얼거릴 필요가 없게 되었고, 또 선친이 필사한 글들도 이제는 그 뜻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먼저 위 시의 낱말을 풀어 보면
-천(千), 만(萬): ‘많은 것’을 형용한 것 - 경(逕=徑): 길 - 인종(人 足從): 사람의 발자취, 행적
-멸(滅): 없어지다 -사(蓑): 도롱이 -립(笠): 삿갓 -옹(翁): 늙은이 -조(釣): 낚시
이 시는 눈 덮인 겨울 강의 한 풍경을 읊은 시다. 사람은커녕 새조차 날지 못하게 큰 눈이 내려 온천지가 조용하고, 하얀 대자연 속에 외로이 고기를 낚는 늙은이---, 한강설(寒江雪: 찬 눈내린 강) 속에 독조(獨釣: 홀로 낚시)하는 고주(孤舟: 외로운 배)의 사립옹(蓑笠翁: 도롱이 입고, 삿갓 쓴 늙은이)이 바로 이 시의 작자 유종원 자신을 비친 영상(影像)이다.
이 시의 작자 유종원(柳宗元, 서기 773-819년)은 독조사립옹(獨釣蓑笠翁)의 고고(孤高)한 마음을 지녔기에 고문운동(古文運動)을 대성시키고, 자신은 시문(詩文)으로써 일생을 깨끗이 살 수 있었을 것이다.
자(字)는 자후(子厚), 당나라 때 하동(河東: 山西省 永濟)사람, 진사(進士)에 급제한 후 교서랑(校書郞: 도서관 직원) 등을 지냈다. 10대 순종(順宗: 서기 805-816년) 때 유우석(劉禹錫) 등과 함께 왕숙문(王叔文)의 혁신정치(革新政治)에 참여하여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을 지냈으나 개혁이 실패하여 영주(永州) 사마(司馬)로 좌천되어 쫓겨났다.
순종10년(서기815년) 유주(柳州) 자사(刺史)로 자리를 옮겨 그 곳에서 죽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유종원을 ‘유유주(柳柳州)’라고도 부르고, 한유(韓愈: 韓退之)와 함께 고문운동(古文運動)을 전개하였기 때문에 이 두 사람을 함께 불러 ‘한유(韓柳)’라고도 한다.
그의 산문(散文)은 한유의 웅혼(雄渾)함과는 달리 빼어난 맛이 있고, 사회의 모순을 비판하는 풍자적인 글과 산수유기(山水遊記)에 특히 뛰어났다고 한다. 또 그의 시는 한유보다 더욱 세련되어 맑고 빼어난 품격을 지녔다는 평을 받았다고 하며, 그가 자연의 정경을 노래한 것이 후대에 도연명, 왕유, 맹호연, 위옹물 등으로 이어져 이들을 ‘자연시파(自然詩派)’라고 알려져 왔다고 한다.
유종원은 한유와 함께 당나라를 대표하는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 당의 한유(韓愈), 유종원(柳宗元) 2인, 송의 구양수(歐陽修), 소순(蘇洵), 소식(蘇軾), 소철(蘇轍) 삼부자, 증공(曾鞏), 왕안석(王安石) 6인, 계 8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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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뒤지다가 유종원의 강설(江雪)과 꼭 빼닮은 시가 하나 눈에 띄었다.
제목도 강설(江雪) 시의 마지막 구절과 비슷하게 '한강독조도(寒江獨釣圖)'이고, 그림도 있다. 함께 올린다. |
寒江獨釣圖(한강독조도)-당숙(唐肅/元)
非爲投竿爲好奇(비위투간위호기); 고기를 잡자는게 아니라 호기심 때문인데
江寒凍折釣翁자(강한동절조옹자); 강바람 추위에 수염이 꽁꽁 얼어붙었네(자: 髮의 아래부분이 此)
緣知雪壓蓬창曉(연지설압봉창효); 봉창에 쌓인 눈으로 날이 밝은 것 알았거니 (창: 片悤)
不載漁歸只載詩(부재어귀지재시); 고기는 싣지 않고 시(詩)만 싣고 돌아오네 |
* 자구(字句) 해석 : 投竿(투간): 釣竿(조간) 낚시하다, 凍折(동절): 꽁꽁 얼어붙다, 髮의 아래부분이 此(자): 코밑 수염, 緣知(연지): --때문에 알게 되다, 雪壓(설압): 눈이 쌓이다, 蓬片悤(봉창): 작은 고깃배의 창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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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자가 唐肅(당숙)/元(원)이라 되어 있는데, 원(元)나라 말기에서 명(明)나라 초기에 사람 같은데 정확히는 모르겠다.
혹시 이사람이 아닌가 싶다. 원(元)나라 말기에 오송청구(吳淞靑丘)라는 곳에 은거했던 사람 중에 '오중사걸(吳中四傑)'이라 불렸던 고계(高啓), 양기(楊基), 장우(張羽), 서분(徐賁) 네 사람이 있었고,
또 '북곽십우(北郭十友)'라 불리던 시인들이 있었는데 위 오중사걸 중 양기를 제외한 세 사람과 왕행(王行), 고손지(高遜志), 당숙(唐肅), 송극(宋克), 여요신(余堯臣), 여민(呂敏), 진칙(陳則) 등 10명인데 이들 모두 오성(吳城) 북곽(北郭)의 제문(齊門)지역에 살면서 교유자 매우 투터웠다고 한다.
이 시의 작자가 북곽십우의 한사람인 당숙(唐肅)이 아닌가 싶다. |
한강독조도(寒江獨釣圖)
-명대(明代) 화가 주단(朱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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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