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
沙月 李 盛 永(2007, 12, 11)
    참여정부가 들어선지 5년이 다 끝나가는데 이 정부 들어서 나라의 어느 분야 하나 제대로 돼 가는 것이 없고, 그들의 설익은 좌익화 기도에 따른 정체와 혼란이 심각한 지경에 이른 분야가 부지기수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분야가 교육분야라 할 수 있다. ‘평준화(平準化)’라는 대중에게 달콤하게 들리는 다분히 선동적인 구호아래 ‘상향 평준화’가 아니라‘하향 평준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듯 학생을 ‘모두 공부 잘 못하는 학생’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최근 등급제 수능시험 결과가 발표되면서 고교 교육의 혼란과 하향평준화 기도가 노골적으로 극에 달하고 있다. 공부를 잘 못해도 높은 등급을 받을 수 있고, 공부를 잘 해도 낮은 등급을 받게 될 수도 있는 이 등급제 수능시험은 대학 입시시험으로서의 기능은 상실하고 말았다. 이 제도를 밀어부친 노무현을 비롯한 좌파세력과 그 하수인으로 전락한 교육부는 그들이 기도한 목적이 달성 된 셈이다.

    그들은 수능시험을 무력화하여 대학 입시에 쓸모가 없게 만들어서 대학 입시는 내신성적만으로 결정토록 하는 것이 그들의 기도였기 때문이다. 사실 내게는 대학에 보낼 아들, 딸이 없어 당장은 가벼운 처지이지만, 손녀가 중3년에 올라가니 그렇게 강 건너 불구경하듯 쳐다 보고만 있도록 느긋한 것은 아니다. 며늘아이는 오래 전부터 조바심을 태우고 있는 것을 자주 보기 때문이다.

    매주 일요일 오후 7시에 방영되는 KBS 1TV 시사교양프로 「도전 골든벨」을 시청할 때면 심경이 오락가락 한다. 초반의 아주 쉽고 상식적인 문제에서 추풍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질 때면 “도대체 고등학교라는 데서 뭘 가르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두 세 명이 남아서 학교에서 가르치지도 않은 어려운 문제 같은데 척척 맞추어 나가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그런대로 좀 안심도 된다.

    2007년 12월 9일 일요일 방영된 「도전 골든벨」은 김천고등학교(金泉高等學校)에서 녹화된 것이다.
추풍령 넘어 김천으로 들어가는 관문, 嶺南第一門
김천고등학교는 이 문 밑으로 보이는 가까운 거리에 있는데, 사진은 못찾겠고 이거라도 한장---

    요즈음 도전골든벨 프로는 김현욱과 오정연 MC가 진행하고 있는데, 예고를 보면서 꼭 시청해야겠다고 별러서 만사를 제쳐놓고 시청하였다. 나의 모교(母校)이기 때문이다.
나의 모교 김천중고등학교 정문과 본관 전경
2009. 6. 11. 중19회, 고6회 동기회에 참석하여 묘교에 집결하였을 때 찍음(추가)

    15번 문제인가에서 단 3명만 남아서 “선생님 살려주세요!”를 외칠 때는 정말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더구나 한자(漢字)문제에서 소나무와 대나무와 매화를 말하는 송죽매(松竹梅)를 쓰라는 문제가 출제되었는데 이를 올바로 쓴 학생은 몇 명 밖에 안돼 참으로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세 글자 중에서도 소나무를 말하는 ‘松(송)’자를 못 쓴 학생이 제일 많은 것 같았다.

    김천고등학교는 조선조 말 고종황제 때 상궁으로 있던 전북 고부 출신 송설당(松雪堂)께서 임금의 배려로 출궁(出宮)하면서 김천으로 낙향하여 살면서 결국 나라가 일제에 강점 당하자 구국의 일념으로 육영사업에 하사금 전액을 내놓아 건립한 것이 6년제 김천중학교였다. 해방 후 학제가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분리되면서 같은 캠프스 안에 김천중,고등학교가 함께 있다.

    그래서 사립 김천중,고등학교 학생들은 지금도 교정에 송설당 동상을 우러러 보며 등교하고, 하교한다. 그래서 김천중,고등학교는사람들에게 ‘송설학교(松雪學校)’로, 또 송설당(松雪堂)은 이 학교 학생들에게 ‘고부할매’로 통한다. 그런데 이 학교 학생들이 그 첫 자인 ‘松(송)’도 못 쓰니 더 이상 무엇을 기대하랴.
김천중고등학교 교정에 서 있는 송설당 고부할매 동상
2009. 6. 11. 중19회, 고6회 동기회에 참석하여 묘교에 집결하였을 때 찍음(추가)

    몇 번 문제부터인가 일찌감치 혼자가 된 2학년 이규인 학생은 정말로 경상도 사나이었다. 저음의 목소리에 그저 묵묵히 문제를 푸는데 집중할 따름이다. 한 문제, 한 문제 차근차근 맞추어 나가면서도 요즈음 젊은이들의 그 흔한 몸짓, 재스쳐, 세러머니는 커녕 웃는 모습 한번 보이지 않고 그저 무뚝뚝하고 덤덤하기 이를 데 없다.

    방송사측에서는 지금까지 이 프로를 매번 흥미진진하게 진행해 왔기 때문에 지금 이규인 학생의 무뚝뚝한 매너는 바람직하지 않았을 것이다. 김현욱 MC가 이군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는 말씨의 억양을 여러 차례 교정해 주는 장면까지 나오면서 화면에는 ‘지금은 현욱MC의 화술 강의시간’이란 자막이 나왔다.

    이규인 학생 혼자 남은 상태에서 Think Korea 문제인 43번 문제까지 왔다.
    [43번 문제] 조선 세조 때 문신으로 이두문자를 비롯하여 중국어, 일본어, 인도어, 아랍어 등 7개 국어에 능통하며, 해동제국기를 쓰는 등 우리나라 어문학에 많은 업적을 남겼으며, 훈민정음 창제와 세조실록 편찬에도 참여한 사람이다. 이 사람은 누구인가?
    [답] 신숙주

    이규인 학생은 43번 문제는 찬스를 써서 아슬아슬하게 맞혔다. 이 때까지만 해도 끝까지 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 뿐이었다. 그러나 그 이후 문제부터는 그야말로 일사천리로 맞추어 나가 결국 50번 문제를 맞혀 이 프로가 생긴 이후 65번째 골든벨을 울렸다.
    3개월 만에 울린 골든벨이란다. 1개월에 4회씩 진행된다고 치면 12회 만에 울린 것이다. 보고 있는 나도 가슴 뿌듯했다. 장하기도하고--- 방송을 시작할 때 김현욱 MC가 학교를 소개하면서 ‘명문 사립 김천고등학교’라 했는데 처음에는 나의 모교지만 그 말이 맞는지 회의적이었으나 끝 날 때는 김현욱 MC가 선견지명이 있는 사람 같이 보였다.

    오늘의 주 화제는 도전 골든벨 프로가 아니라, 이 프로의 43번 문제에 나온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다.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는 일본의 지세(地勢), 국정(國情), 교빙왕래(交聘往來)의 연혁(沿革), 사신관대예접(使臣館對禮接)의 절목(節目)을 기록한 책으로 성종2년(1471)에 신숙주(申叔舟)가 지은 것이다.
    해동제국(海東諸國)이란 일본 본국과 규슈(九州), 이키(壹岐島), 쓰시마(對馬島) 및 류구국(流球國)의 총칭으로 이 책을 저술할 당시의 내용은 해동제국총도(海東諸國總圖), 일본 본국도(本國圖), 서해도규슈도(西海道九州圖), 이키도(壹岐島圖), 쓰시마도(對馬島圖), 류구국도(流球國圖) 등 6매의 지도와 일본국기(日本國紀), 류구국기(流球國紀), 조빙응접기(朝聘應接紀)로 되어 있었으며, 그 후에 2-3회 추록(追錄)이 첨가되었다.
    성종5년(1474) 3월 예조좌랑 남제(南悌)가 삼포(三浦:
동래의 富山浦, 웅천의 齊浦, 울산의 鹽浦)의 왜호(倭戶)의 실화를 진휼(賑恤)할 때, 왕명을 받아 몰래 삼포의 지도를 그리고, 또 항거 왜인의 호구조사 결과가 된 제포지도(齊浦地圖), 부산포지도(富山浦地圖), 염포지도(鹽浦地圖) 3매가 첨가 삽입되었으며, 연산군7년(1501) 선위사(宣慰使) 성희안(成希顔)이 류구(流球)의 사자(使者)에게서 들은 일본의 국정을 열기해서 끝에 첨부하였다.
    이 책은 조선 초기의 한-일 관계사 연구에 귀중한 사료가 될 뿐만 아니라 이론 역사를 연구함에도 중요한 재료가 된다.
(한국사대사전 抄)

    이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를 최초에 쓴 신숙주(申叔舟)
    태종17년(1417)-성종6년(1475) 조선 초기 학자이며 정치가. 자(字) 범옹(泛翁), 호(號) 보한재(保閑齋) 또는 희현당(希賢堂). 본관은 고령(高靈).
신숙주 초상화
인터넷에서 퍼옴(진위?)

    세종 20년(1438)에 생원, 진사시에 급제하고, 이듬해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集賢殿) 부수찬(副修撰: 종6품),
    세종24년(1442) 훈련원(訓練院) 주부(主簿: 종6품),
    세종29년(1447) 중시(重試) 4등 급제하여 집현전 응교(應校: 정4품),
    세조3년(1457) 우의정(右議政: 정1품),
    세조5년(1459) 좌의정(左議政: 정1품),
    세조6년(1460) 강원, 함길도 도체찰사(都體察使),
    세조8년(1462) 영의정(領議政: 정1품),
    성종1년(1470) 재차 영의정.

    어려서부터 총명하였는데 자라면서 열심히 공부하여 읽지 않은 책이 없었다.
    집현전 부수찬 때 장서각(藏書閣)에 들어가 평소에 보지 못한 책들을 열심히 읽고, 동료들의 숙직을 대신 해주면서 새벽까지 공부하기가 일쑤였다. 이 때 세종이 그가 열심히 공부하는 것을 발견하고, 어의(御衣)를 한 벌 내린 적이 있다.
    훈련원 주부로 있을 때 일본에 보내는 통신사(通信使)의 서장관(書狀官)에 선발되었다.(使臣의 主務 3인: 正使, 副使, 書狀官) 몹시 앓고 난 직후여서 주위에서 말렸으나 ‘신하로써 험하고, 편한 것을 가릴 수 없다’면서 일본에 갔다. 일본에 이르러 그의 재주를 듣고 시(詩)를 써달라는 사람이 몰려들자 즉석에서 시를 써 주니 모두 감탄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쓰시마(對馬島)에 들려 무역협정 계해조약(癸亥條約)을 체결하였다.
    이어서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창제에 공이 컸다. 그 때 요동에 귀양 와 있던 명나라 한림학사 황찬(黃瓚)을 13번이나 찾아가 음운(音韻)에 관한 것을 논의하였는데 한 번 들으면 곧 이해하고 어김이 없어 황찬이 매우 신통하게 생각하였다 한다.
    세조가 즉위하기 전 수양대군으로 있을 때 명나라에 사은사(謝恩使)로 가면서 신숙주를 서장관(書狀官)에 임명하여 따라갔다. 후일 세조와 개인적인 각별한 친분은 이 때 맺어진 것이다.
    세조가 어린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할 때 신숙주는 의리를 저버리고 세조 편에 가담하여 가장 친한 친구였던 성삼문(成三問)과도 등이져 성삼문 등의 단종복귀 기도가 실패하여 국문을 받는 마당에서 성삼문으로부터 심한 모욕을 당하기도 했다.
    세조가 즉위한 후로는 신숙주를 침실에까지 불러들여 국사를 의논하였다.
    예종이 어려서 즉위하니 원상(院相: 어린 임금을 보좌하며 정무를 맡아 다스리던 임시 직책)으로 승정원에 들어가 서정을 처결하고, 남이장군을 숙청하는데 참여하였다.
    성종이 즉위하면서 영의정에 다시 임용되어 「경국대전(經國大典)」,「세조실록(世祖實錄)」,「예종실록(睿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하고, 일본과 여진의 지도를 만들었으며, 왕명으로 「도국통감(東國通鑑)」, 「오례의(五禮儀)」를 편찬하였다.
(한국사대사전 抄)

    신숙주는 단종-성종 연간에 4개 공신에 책록되고 고령부원군(高靈府院君)에 봉해졌다.
    (1) 단종1년(1453) 정난공신(靖難功臣) 2등- 黃甫仁, 金宗瑞, 鄭분, 이른바 三相 등 양위 반대파를 주살한 공
    (2) 세조1년(1455) 좌익공신(佐翼功臣) 1등- 成三問 등 이른바 死六臣의 단종복위 기도를 분쇄한 공
    (3) 예종1년(1469) 익대공신(翊戴功臣) 1등- 南怡, 康純 등의 謀逆 伏誅 공
    (4) 성종2년(1471) 좌리공신(佐理功臣) 1등- 조선 왕조의 기틀을 튼튼히 한 공
(靑選考 抄)

    신숙주는 세종조를 통하여 나라의 발전 특히 훈민정음 창제 등 세종대왕의 문화창달에 크게 공헌하였지만, 세조가 집권하는 과정에서 세조의 편에 서서 최고의 관직과 공신으로 영달을 누렸지만 후세 사람들에게 변절자로 낙인 받아 변질이 잘되는 녹두나물을 ‘숙주나물’로 부르게 되는 천추의 불명예스런 이름으로 남아 있다.

    신숙주가 쓴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는 한-일 관계사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었지만 한 때는 조-명간의 중요한 외교문제를 야기시켜 나라가 위태로울 뻔 했던 문서이기도 하다.

    즉 선조30년(1597) 임진왜란 때 정유재란이 일어난 다음해인 무술년(戊戌年) 1월에 조-명연합군과 왜군 간에 1차 울산전투가 끝난 후 명군 사령관 경리(經理) 양호(楊鎬)가 조-명군도 피해가 많았지만 왜군의 재편성 시간을 주지 않고 압박하기 위해 재차 공격을 계획하고 있을 때 명군 작전 감독기관인 경략(經略: 현 보안부대 성격) 형개(形 王介) 수하의 병부주사(兵部主事) 정응태(丁應泰)가 명군 지휘부와 조선 조정을 싸잡아 20여 가지의 비리를 명 황제에게 무고(誣告) 상소하였는데 조선 조정 관련 사항은
    ① 유왜입범(誘倭入犯)-후에 초왜복지(招倭復地)로 발전- 조선이 왜국과 내통하여 명나라를 침범하려 했다. - 조선이 왜를 데려다가 중국 요하 이동의 옛 고구려 땅을 되찾으려 했다.
    ② 우롱천조(愚弄天朝) 명나라 황제를 우롱했다.
    ③ 교통왜적(交通倭賊) 조선은 은밀히 왜국과 교통하여 반명의지(反明意志)가 있다.
    ④ 칭종칭조(稱宗稱祖) 조선의 선왕들에게 중국의 천자와 똑 같이 종(宗), 조(祖)라는 시호를 붙여 부르고 있으니 이는 반명의지의 증거다.
    ⑤ 붕기천자(朋欺天子) 양호와 조선이 결탁하여 울산전투 결과에 대하여 천자를 기만했다. 등이다.

    이에 대하여 조선 조정은 7월에 최천건, 8월에 좌의정 이원익 등을 변무사로 파견했으나 오히려 사태가 악화되어 명장 양호는 사직 상소를 올리고 중국으로 돌아갔고, 선조 임금은 약 1개월 동안 궁궐 마당에 거적을 깔고 석고대죄하면서 명황의 분부를 기다리는 상황이 되어 전세는 왜적을 이 땅에서 몰아내고 승리할 유리한 상황에서 자칫 역전될 위기에 이르렀다.

    이 절박 시기에 조선 조정은 영의정 유성룡을 이원익으로 바꾸는 개각을 단행하고, 새로 우의정에 기용된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을 정사(正使), 병조 참지에 있던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를 공조참판으로 특진시켜 부사(副使), 황여일(黃汝一)을 서장관(書狀官)으로 하는 진주사(陳奏使)를 파견하였는데, 이 때 명황제에게 올린 상소문이 공모에서 선정된 월사 이정구의 글인데 이를 「무술변무주(戊戌辨誣奏)」라 하며, 이로서 정응태의 무고를 명쾌하게 해명하여 조-명연합은 계속되고, 왜군을 몰아내고 8년간의 임진왜란을 끝낼 수 있게 되었다.
무술변무주(戊戌辨誣奏)
「무술변무주(戊戌辨誣奏)」이야기 바로가기(클릭): 무술변무주(戊戌辨誣奏)
    무술변무주에서 정응태의 무고를 변무함에 있어서 ①,②,④,⑤항은 특별한 물적 증거 없이 보는 사람의 견해에 따라 달리 할 수도 있기 때문에 변무하는데 큰 문제가 없었으나 ③ 교통왜적(交通倭賊) 즉 ‘조선이 은밀히 왜국과 교통하여 반명의지(反明意志)가 있다’는 문제에 대해서는 바로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가 그 증거물로 제시되었기 때문에 이를 뒤엎고 명 황제의 마음을 돌리기가 쉬운일이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즉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에 실려있는 조-일 간의 외교문서 중에 왜국연호(倭國年號)를 대서(大書: 크게 쓴 것)하고, 명연호(明年號)를 분서(分書: 작게 註解로 쓴 것) 한 것을 ‘반명의지(反明意志)의 증거'로 제시하고 있어 이 부분에 대한 변무가 가장 난제였다.

    이정구의 「무술변무주(戊戌辨誣奏)」
    유왜입범(誘倭入犯) 또는 초왜복지(招倭復地) 문제는 그간 해안지방에 왜적이 침범하거나, 고기를 잡게 해달라고 청원하여 그들을 달래는 뜻에서 삼포(三浦: 副山浦, 齊浦, 鹽浦)를 열어 왜인들이 일시 머물면서 고기를 잡게 한 적이 있으나 89년 전인 중종5년(1510)의 삼포왜란 이후에는 폐쇄하여 왜인들의 조선 진입을 금지하였다는 왜인들이 조선 땅에 들어왔던 경과를 설명하고
    “고금 천하에 어느 바보가 적군(왜국군)을 자기 땅으로 끌어들여 스스로 자기 나라를 적군의 말발굽 아래 짓밟히게 하면서 군부(君父)의 나라(명나라)와 땅을 다투려 하겠는가?” 하고 반문하였고.

    칭종칭조(稱宗稱祖) 문제는 “신라, 고려 때부터 해왔던 관습을 그대로 답습했을 뿐 다른 뜻(반명의지)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해명하였으며, 우롱천조(愚弄天朝), 붕기천자(朋欺天子) 등도 듣기 좋은 말로 해명하였다.

    가장 핵심인 교통왜적(交通倭賊)과 관련된 연호(年號) 문제는
    왜국이 바다 멀리 떨어져 있어 그들의 의도와 동태를 파악할 길이 없던 차 정통(正統: 명 英宗 연호, 조선 세종18-31년) 왜국이 사절을 요청하여 신숙주(申叔舟)를 보내서 통론(通論: 일상적인 대화)하고, 피방정형(彼方情形: 그곳 정세와 형편)과 성쇠강약(盛衰强弱)을 험찰(驗察: 직접 살펴봄)하고, 적정을 탐지하여 명나라에 보고했던 사실을 들고,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신숙주(申叔舟)가 왜국에 갔다 돌아오면서 왜국의 풍속세계지도(風俗世系地圖)를 기록한 것을 구하여 이를 바탕으로 조선의 왜인에 대한 관대사례(館待事禮)를 기록하여 첨부하면서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라 이름하였다면서 문서 작성의 경위와 성격을 설명하고,

    이 문서에 왜국 연호를 대서(大書)하고, 명연호를 분서(分書)한 것에 대해서는
    「春秋因魯史所作故大書(춘추인노사소작고대서) 魯元年其下分註周平王幾年(노원년기하분주주평왕기년) 亦可因此而有疑於尊周之義乎(역가인차이유의어존주지의호) 況其國王關伯皆書死尊奉者果若是乎(황기국왕관백개서사존봉자과약시호)」라 하였다.

    즉 “공자(孔子)가 쓴 춘추(春秋)는 노(魯)나라 사기(史記)인 고로 노나라 원년을 대서(大書)하고, 그 아래 주(周) 평왕(平王) 몇 년이라 분주(分註: 분서하여 주를 단 것)하였는데 이것도 또한 존주(尊周: 황제국 주나라를 존경함)의 의리에 의혹이 있다 하겠습니까?
    하물며 의혹 받는 그 문서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는 그 나라(왜국) 국왕과 관백의 이름까지 모두 사자(死字
: 작게 쓴 글자)로 썼으니 이것이 과연 그들(왜국)을 존봉(尊奉: 높이 받듬)한 것이라 하겠습니까” 하면서 되묻고 있다.

    명황제를 비롯한 당시 중국의 사대부가 모두 공자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자가 없음을 잘 아는 월사 이정구는 바로 그 공자(孔子)가 지은 춘추(春秋)를 끌어들이고, 춘추(春秋)의 연호 기록에 노(魯)나라 연호를 대서(大書)하고, 주(周)나라 연호를 분주(分註) 한 것을 찾아내는 예리한 관찰력을 발휘 한 것이다.

    이로써 정응태의 무고는 말끔히 변무되어 명 황제는 정응태를 그날로 혁직(革職: 직무를 빼앗음)하여 서민으로 만들고, 회적(回籍: 직첩을 반납함)하여 그 죄를 다스리면서
    “조선은 참으로 예의 바른 나라이다. 국왕의 진주(進奏)함이 이처럼 명백통쾌(明白痛快)하여 짐으로 하여금 눈물을 금치 못하게 한다”고 극구 칭찬하였다.

    이정구의 「무술변무주(戊戌辨誣奏)」는 조선보다도 중국에 외교문서로서 뿐만 아니라 명문장(名文章)으로 더 잘 알려져 중국의 글 좀 한다는 선비는 누구나 그 전문을 외울 정도로 유명했다 하며, 이정구는 무술년(戊戌年) 이후 3회(甲辰年, 丙辰年, 庚申年) 더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는데 그때마다 그의 글을 얻으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고 한다.

    또 신숙주의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는 지금 와서는 조-일관계사 연구에 유용한 자료가 되고 있지만, 조심성 없이 쓴 것이 한 때 나라를 위태롭게 했던 문서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