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전략에는 ‘햇볕정책’이 없었는데---
沙月 李 盛 永(2005. 11. 27)
  지난 11월 15일 국가 정보기관의 수장이었던 전임 국정원 원장 두 사람이 한꺼번에 구속 수감되는 일이 벌어졌다. 그 중 한 사람은 고희를 넘긴 임동원씨다.
  나의 육사 선배이고 내가 소령 시절 합참 전략기획국 제1과에서 과장님으로 모신 적이 있는 분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나의 군 생활 30여년 중에서 내가 가장 존경해 왔고, 또 2년 정도 같이 근무했지만 업무면에서 나를 가장 신임했던 상사이기도 하다. 그러나 얼굴을 마주 대한지가 30년이 넘었으니 아마 나의 이름도, 얼굴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이번에 두 전직 국정원 원장이 구속수감까지 되는 김대중의 ‘국민의 정부’ 시절의 도청문제에 대해서 솔직히 나는 별로 관심이 없다. 내가 군에 근무하는 동안, 전화 도중 이상한 소음이나 측음이 나는 경우를 많이 경험했는데, 그것이 정보기관에서 전화를 감청하다가 보안 저촉 경고를 보내는 것으로 인식해 왔기 때문에 으레 정보기관에서는 전화를 엿듣는 것이 오히려 그들의 ‘성실한 임무수행’으로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오늘은 도청문제나, 전직 국정원장 구속문제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임동원' 이름이 신문에 대서특필 되고, TV에서 구속 수감되는 장면을 보면서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저분이 어떻게 해서 고희를 넘긴 나이에 저렇게 되었나?’ 하는 생각도 들고, 지난날 저분이 국가정책과 군사전략에 크게 기여한 일들이 떠올라 이를 회상해 보려는 것이다.

  내가 임동원 그분의 국가정책과 군사전략에 관한 것을 접할 수 있었던 것은 세 번이다. 하나는 그의 저서 「혁명전쟁과 대공전략」을 육군대학 ‘대비정규전’ 과목의 부교재로 지급 받아 공부한 것이었고(졸업 시 책은 반납), 다음은 70년대 초반 합참에서 이른 바 「율곡계획」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그가 정립한 「기본군사전략」이며, 나머지 하나는 90년대 후반 ‘국민의 정부’ 시절 김대중이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햇볕정책」이다.

  햇볕정책은 대통령안보특별보좌관으로서 그분이 입안한 것으로 알려졌고, 남북정상회담 때 김정일과 가장 가까운 위치에 서 있거나, 귀엣말을 주고 받는 장면을 많이 보았기 때문에 메스컴이나 항간에서는 그를 ‘햇볕전도사’라고 말하기도 했다.
  햇볕정책의 성과로 김대중과 김정일 간의 남북정상회담이 이루어지고, 극적인 장면들이 전파를 타고 전세계에 퍼지면서 김대중은 몇 번이나 후보 추천에만 그쳤던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온 나라가 경사스럽게 생각하고, 축하해야 할 일인데 그렇지 않으니 뭔가 잘 못 된 것이 아닌가 의아해 하지 않을 수 없다.

  임동원, 그분은 1967년에 소령으로 육사 조교수로 있으면서 공산주의 혁명전쟁의 본질을 간파하고 이에 대응하는 대공전략을 내 놓아 당시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찬사를 받았고, 그 저서 속에 등장하는 많은 대책들이 국가 및 군사 정책에 반영되었다.

  또 1973년에는 중령(진예)으로서 내노라 하는 육,해,공군의 대령급 장교를 재치고 건군이후 최초의 ‘자력(自力)에 의한 군사력 건설계획’수립의 실무 책임자로 발탁되어 기본군사전략, 전력증강8개년계획(후에 ‘율곡계획’으로 명명됨) 을 완성하여 박정희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출범시킴으로써 우리 군이 현대적 군사력을 확보할 수 있는 방대한 국가적 사업의 첫 단추를 그가 끼우는 일을 맡아서 훌륭히 해냈다.

  전자는 공산주의 혁명전쟁 즉 비정규전에 대응하는 대비정규전전략(對非正規戰戰略)이고, 후자는 북괴가 기회를 노리는 남침적화에 대응하는 정규전군사전략(正規戰軍事戰略)과 이를 ‘힘’으로 뒷받침 할 전력증강계획(戰力增强計劃)이다.

  이 두 전략 내용을 살펴보고, 세 번째로 세상에 내 놓은 '햇볕정책’이 혹시 이들 두 전략 속 어느 곳에 뿌리를 박고 있는 지를 알아보고자 하는 것이다.
◆ 革命戰爭(혁명전쟁)과 對共戰略(대공전략) -게릴라戰을 中心으로-
  이 책은 林東源(임동원) 著(저)로 1967년10월20일 探求堂(탐구당)에서 초판을 냈는데 8월에 저자가 쓴 머리말에서
  “본인은 지난 삼년간 육사에서 「共産主義哲學批判(공산주의철학비판)」 및 「現代共産主義運動史(현대공산주의운동사)」,「對共戰略論(대공전략론)」을, 국방대학원에서 「叛亂對策論(반란대책론, 特殊戰)」 강의하였는데 강의 하는 사람이나 이 분야를 연구하려는 사람이나를 막론하고 자료와 연구서의 부족을 통감하였다. 현실적으로 가장 절실하게 요청되고 있는 이 분야의 연구서가 거의 없다는 데서, 그리고 승공태세(勝共態勢) 강화에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고자 하는 충정에서 이 저서를 출간한다” 고 하였다.

  당시 저자의 약력을 보면
      육사졸업(이학사),
      서울대 문리대 철학과 졸업(문학사),
      서울대 행정대학원 졸업(행정학석사),
      미 육군특수전학교 반란대책과정 수료,
      현 육사 조교수, 국방대학원 강사
로 되어 있다.

  이 책은
      제1편 혁명전쟁(革命戰爭)의 이론(理論),
      제2편 혁명전쟁의 실제(實際),
      제3편 대공전략(對共전략)
으로 되어있는데

  제1편에서는
      혁명전쟁의 본질과 특성(제1장),
      혁명전쟁의 전개과정(제2장),
      혁명전쟁의 전략(제3장),
      게릴라전(제4장)
으로 편성되었고,

  제2편에서는 혁면전쟁의 실예로 각 장에
      중국(中國)(제5장),
      필리핀(제6장),
      마래(馬來)(제7장),
      월남(越南)(제8장),
      남한(南韓)(제9장)
을 들고 있으며,

  제3편에서는
      대중지지(大衆支持)의 획득(獲得)(제10장),
      주민통제(住民統制)와 반도(叛徒)의 고립화(孤立化)(제11장),
      대게릴라전(제12장),
      결론(우리나라의 경우)(제13장)
으로 편성되었다.

  이책은 서론(緖論)의 첫머리에서 1965년 2월, 육사 졸업식에서 행한 박정희대통령의 유시 중에서 공산주의 혁명전쟁과 관련된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지금 우리는 눈부신 과학문명을 자랑하는 이른바 핵시대(核時代)에 살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핵무기의 사용이나 대량보복을 용납하지 않는, 그리고 그 긴박감에 있어서는 새로우면서도 그 연원(淵源)에 있어서는 재래식인 전쟁이 세계 도처에서 우리와 자유민의 안전을 위협하고 있음을 목도(目睹)하고 있읍니다.
  게릴라의 파괴, 폭동, 학살에 의한 전쟁, 전투가 아닌 복병(伏兵), 침략(侵略)이 아닌 침투(浸透)에 의한 전쟁, 교전(交戰)이 아닌 침식(浸蝕)과 소모(消耗)에 의한 승리(勝利)를 추구하는 이른바 공산주의자들의 해방전쟁(解放戰爭)이 신생국가들의 경제적 불안과 사상적 혼미(昏迷) 상태에 편승(便乘), 잠동(蠶動)하여 자유와 독립과 번영을 추구하는 이들의 노력을 위협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유와 평화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이 같은 위협과 도전은 그 위협을 받는 나라와 민족이 누구냐를 막론하고 우리의 자유와 안전에 대한 위협이며 도전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도전과 위협은 전혀 새로운 전략 전술을 요구하고 또 새로운 특수훈련을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이 책은 ‘공산주의 혁명전쟁을 예방하고, 저지하고, 또 격퇴할 수 있는 전략은 무엇일까? 하는 물음에 해답을 얻고자 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한다고 하였다.

  이 책은 제1편 혁명전쟁(革命戰爭)의 이론(理論) 편에서 혁명전쟁(革命戰爭, Revoiutionary War)을 정의하면서
      1936년의 모택동(毛澤東)의 「중국(中國) 혁명전쟁(革命戰爭) 의 전략문제(戰略問題)」,
      1958년 불란스 보네(Bonnet) 교수의 이론,
      하바드대 국제문제연구소의 불란스인 갈류라(Gaiuia) 연구원의 이론,
      헌팅턴(Huntington) 교수의 이론,
      심지어는 독일의 근대 전략가 클라우제빅츠의 전쟁론
까지 인용한 후 다음과 같이 혁면전쟁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혁명전쟁(革命戰爭)이란 현존 정권을 타도하고, 현존 사회제도를 개혁하고, 또는 외세를 격퇴하여 새로운 이데올로기와 정치제도를 실현하고자 하는 혁명(革命)을 목적으로 대중(大衆)을 무장동원(武裝動員)하여 전개하는 전쟁이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 혁명전쟁은 우리가 통상 쓰는 ‘혁명(革命)’, ‘쿠데타’, ‘내전(內戰)’과 구별되는 별개의 개념이라 하였다.

  혁명전쟁은 이론상으로
    주로 외세의 침략에 항거하는 반제국주의적(反帝國主義的), 반식민주의적(反植民主義的) 성격을 띄는 「민족해방전쟁(民族解放戰爭)」
    현존 정부를 전복하고 정치권력을 탈취하려는 성격의 「혁명전쟁(革命戰爭)」 또는 「계급전쟁(階級戰爭)」,
    그리고 이 두 가지가 결합된 성격의 「민족해방혁명전쟁(民族解放革命戰爭)」 세 가지로 대별(大別)하지만 실제상으로는 이 세 가지 유형의 구별이 어렵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공산주의자들은 미국과 군사동맹을 맺고 있거나, 경제 및 군사지원을 받고 있는 수원국가(受援國家)들은 모두 다 새로운 형태의 식민지(植民地)라고 주장하여 ‘해방전쟁(解放戰爭)’이라는 용어를 즐겨 사용한다. 그러나 민족해방전쟁은 외세의 지배로부터의 해방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공산정권 수립'에 그 진목적(眞目的)이 있음으로 사실상 혁명전쟁이라는 것이다.

  이 책은 이 시대에 혁명전쟁이 일어나게 되는 요인(要因)을 세 가지로 들고 있는데
    첫째 신생(新生) 후진국(後進國)이 지니고 있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제반 취약성(脆弱性)이고,
    둘째 이데올로기의 대립(對立),
    셋째 핵(核) 교착상태(膠着狀態)라 하였다.

  이 책은 혁명전쟁의 특성으로 다음과 같이 7가지를 들고 있다.
    (1) 대중획득(大衆獲得)을 목표로 한다
    (2) 이데올로기의 힘이 크다
    (3) 정치(政治)와 군사(軍事)가 통합된 형태로 전개되는 전쟁이다.
    (4) 전쟁상태로의 전환이 점진적(漸進的)이다.
    (5) 통상 장기전(長期戰=持久戰) 성격을 띈다.
    (6) 통상 게릴라전의 성격을 띈다.
    (7) 쌍방간 비용(費用)과 노력(努力)의 격심한 차이를 나타낸다.

  또 혁명전쟁의 보편적인 전개과정은
    제1단계 「대중획득(大衆獲得)단계」,
    제2단계 「게릴라전 단계」,
    제3단계 「군사적(軍事的) 총공세(總攻勢)단계」로 설명하고 있다.

  제2편 혁명전쟁(革命戰爭)의 실제(實際) 편에서
  중국
    1921년-1926년 간의 중국공산당의결성과 초기 공산주의 운동,
    1927년-1936년 간의 제2차 혁명전쟁,
    1937년-1945년 간의 항일 민족전쟁,
    1946년- 1949년 간의 제3차 혁명전쟁으로 구분하여 중국내에서 국민정부를 대만으로 밀어내고 중국 본토를 석권하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필리핀에서는
    스페인 지배로부터 미국지배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토지편중(土地偏重) 식민지 정책의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고,
    태평양전쟁 후 1945년-1954년 간에 부패, 무능한 초대 퀴리노정부하에서 초기 공산주의 운동,
    훅크(필리핀공산당 전위조직)에 의한 인민해방전쟁과 이에 대응하는 국방장관 막사이사이의 고군분투하는 과정과 그의 전략적 성공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마래(馬來: 현 마레지아)편에서는
    1946년-1960년 간의 초기 공산주의 운동,
    공산당에 의한 인민혁명전쟁,
    영국인 고등판무관 작전국장 브릭스계획(Brigg’s plan)에 의한 게릴라 고립화(孤立化) 전략의 성공을 통하여 마래반도의 공산화를 저지하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월남(越南)편에서는
    1945년-1977년 간의 초기 공산주의 운동,
    항불(抗佛) 민족해방전쟁,
    베트콩에 의한 민족해방전쟁
    그리고 미국의 대월전략(對越戰略)을 설명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남한에서는
    1945년-1950년 간 공산당의 조직활동, 사회적 취약성, 시위, 파업 등 대중투쟁의 전계 등을 통한 대중동원단계와
    1948년 정세와 무장투쟁전술로의 전환,
    폭동과 반란 등 대중동원으로부터 게릴라전의 전환기
    그리고 게릴라 근거지의 확보, 대중의 동원, 1949년 9월 총공세,
    양단전략(兩斷戰略)의 실패 등 혁명전쟁이 실패로 돌아가자 중공과 쏘련을 등에 업고 6.25 남침 정규전쟁을 일으키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제3편 대공전략(對共戰略) 편에서는
    대중지지의 획득,
    주민통제와 반도(叛徒)의 고립화,
    대게릴라전
으로 나누어 설명하면서도
    “이 세가지 전략은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불가분리(不可分離)의 일체(一體)를 이루고 있는 하나의 포괄적(包括的)인 전략이다”라고 하였다.

  대중지지획득에서는
    대공전략 개념. 지도자의 영도력, 정치, 경제, 사회의 발전, 군대에 의한 대민지원 활동, 대중의 지지 획득을 위한 준칙 등 대중지지 획득의 방법들을 설명하고,
    혁명전쟁이 대중획득을 목표로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대혁명전쟁 즉 대공 전략도 곧 대중의 지지를 얻지 못하면 혁명전쟁을 저지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주민통제와 반도(叛徒)의 고립화에서는
    주민으로부터 반도의 분리,
    정보활동,
    물리적 통제방책,
    행정 및 통제기구,
    심리던 활동 등을 설명하고 있다.

  대게릴라전에서는
    대게릴라 전술의 고려사항,
    대게릴라전 부대,
    대게릴라전 전술원칙,
    대게릴라전의 전개과정을 설명하면서

  대게릴라전의 전개과정
    1단계 적 주력부대의 격파,
    2단계 게릴라 소탕과 주민 확보,
    3단계 주민통제,
    4단계 반도들의 정치조직 파괴,
    5단계 지방지도자의 선정과 훈련,
    6단계 환경개선으로 설명하고 있다.

  제2편 혁명전쟁의 실제에서 예로 들고 있는 다섯 개 나라 중 중국은 혁명전쟁이 성공한 경우이고, 월남은 진행 중이라 결과를 알 수 없는 상태였으며(8년 후에 성공하였음), 필리핀과 마래 그리고 남한은 결과적으로 혁명전쟁이 실패한, 바꾸어 말하면 정부의 대공전략이 성공한 경우이다.

  대공전략에서 성공한 세 나라들의 경우를 보면 대중지지획득, 주민통제 및 반도의 고립화, 대게릴라전 등 대공전략 제단계에서 다 잘 했기 때문이지만
    필리핀의 경우는 특히 대중지지의 획득에 성공한 것이 결정적인 요인으로 보고 있다. 군사적인 것도 잘 했지만 특히 정치를 쇄신하고, 경제를 발전시키고, 사회제도를 개선하는 등으로 정부가 대중지지획득에 성공한 경우이다.
    마래(馬來)의 경우에는 새마을 건설, 주민등록 등 특히 주민통제와 반도(叛徒)의 고립화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기 때문에 마래반도가 적화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남한의 경우는 대게릴라작전 그 당시 용어로 말한다면 ‘공비토벌작전’이 주효하여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자들이 북한의 무혈점령적화에 이어 남한의 혁명전쟁에 의한 공산화시도가 실패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책에서 눈 여겨 보아야 할 대목이 여러 군데 있다. 박정희대통령이 책의 내용을 저자로부터 직접 요약 설명을 듣고 감탄하면서 국가 정책으로 채택되거나 군사교리에 반영된 부분들이다.

  ● 1948.6.7 마래(馬來) 전국에는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고등판무관 작전국장 브릭스 장군이 입안한 브릭스계획에 의거 주민 및 물자에 대한 강력한 통제책의 하나로 12세 이상 전 주민의 등록과 신분증 발급 및 통용규정을 제정하여 모든 주민은 경찰서에 출두하여 사진을 찍고, 지문을 채취하며, 신분증을 교부 받았는데 이것이 주민과 게릴라를 식별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전국에 통일된 신분증이 없었고, 시,도 별로 시/도민증을 교부 받고 있었기 때문에 타지방에 출타했을 때는 신분의 식별이 곤란했다. 이 책에서 마래(馬來)의 주민등록증 제도를 본받아 전국에 통일되고, 일원화 된 번호를 부여하는 주민등록제도를 실시하게 되었다.

  ● 또 1952년 마래(馬來) 브릭스계획에 의거 정글 주변에 산재하여 게릴라의 지원을 담당해 온 중국계 주민들을 새로 건설한 새마을(New villages)로 집단이주 하여 정착하는 계획을 추진하였는데, 1950.6월-1951. 11월 간에 420개 새마을에 42만 3천명이 이주, 정착하였다.

  이로서 (1) 정글 주변에 군사작전을 용이하게 하는 공간이 생기고, (2) 게릴라들은 주민들로부터 고립되어 ‘물’이 말라 버린 강 속의 ‘고기’신세가 되었으며, (3) 가난했던 주민들이 가난을 면하고, 좋은 환경에서 안정된 생활을 함으로서 과거에 야기되었던 심각한 사회문제가 저절로 해소되었다.

  설명을 듣고 있던 박정희 대통령은 “바로 이거다”하며 당시 구상 중이던 가난한 농촌의 소득증대와 생활환경개선을 목적으로 하는 운동을 ‘새마을운동’으로 명명하였다. 비록 새로 마을을 건설하고 집단 이주를 시키는 것은 아니지만 간난을 벗고, 좋은 환경으로 탈바꿈 한다면 이것이 곧 새마을이요, 좋은 환경에서 잘사는 새마을에는 공산주의가 침투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 이 책의 제3편 대공전략 ‘주민의 통제와 반도의 고립화’중에서
    「혁명전쟁에서 반도(叛徒)집단과 정부와의 중요한 차이는 반도는 불법적, 파괴적 수단에 호소해도 주민들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만 정부는 합법적, 건설적 수단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정부가 스스로 법을 어긴다면 주민에게 주는 정신적 피해는 물론이고, 실재 주민에게 법의 준수를 강요할 수 없게 되며 나아가서 주민의 지지를 얻을 수 없게 된다.」고 합법적인 활동을 강조하고 있다.
    또 ‘대게릴라전’에서 군대와 경찰과 준 군사부대 그리고 주민을 일사불란하게 장악하여 작전을 전개할 수 있는 작전지휘체계의 일원화를 강조하고 있다.

  정부는 이 책이 발간된 이듬해인 1968년 2월 1일 대간첩대책본부(본부장: 합참 본부장이 겸임)를 발족시키고, 특별경비구역 설정, 각 도, 시, 군에 군,관,민 협의 기구인 ‘방위협의회’구성 등을 포함하는 대간첩작전규정을 제정하여 대통령령으로 공포함으로써 제 작전요소가 일원화된 작전지휘체계 하에서 효과적으로 작전하고, 또 이를 지원 할 수 있는 체계를 확립하였다.

  ● 이 책은 그 내용이 국가 및 군사 정책에 많이 반영되는데 그치지 않고, 육군 각급 교육과정의 대비정규전 교리에도 반영되고 있다. 특히 육군대학의 경우는 한 때 이 책을 부교재로 채택하여 학생들에게 대여하기도 하였다.

  또 60년대 후반부터 육군 각급 교육과정에서 가르치고 있는 ‘대비정규전’ 과목에서 대비정규전의 세부과목(대비정규전 전개단계)인 ‘환경개선’, ‘주민 및 물자통제’, ‘대유격전’은 이 책의 ‘대중지지 획득’, ‘주민통제 및 반도의 고립화’, ‘대게릴라전’을 다른 말로 표현하고 있을 뿐 그 개념은 동일하다.
◆ 기본군사전략(基本軍事戰略)과 율곡계획(栗谷計劃)
 육,해,공군을 망라하는 합동군사전략은 합참이 발족한 60년대 중반부터 수립해 왔지만 각급학교에서 합동기획관리제도 교육목적에 활용될 뿐 실제로 군의 기획관리에는 적용되지 못하였다. 그것은 한국군이 유엔군사령관에 의하여 지휘되고, 군에 필요로 하는 무기, 탄약, 전투장비 등 전투물자가 거의 전량 미국의 군사원조에 의존해 왔기 때문에 실제로 우리 군에는 ‘기획제도’가 존재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1973년 4월, ‘자력에 의한 군사력 건설계획’(후에 율곡계획으로 명명됨)을 추진하기 위하여 전제되어야 할 ‘합동기본군사전략'이 작성되었는데 당시 이병형 합참본부장의 지침을 받아 전략기획국 제1과장 임동원 대령이 초안을 작성하였다. 이 초안은 동년 7월에 제78차 합동참모회의(의장: 함참의장 한신 육군대장, 위원: 육군참모총장 노재현 육군대장, 해군참모총장 김규섭 해군대장, 공군참모총장 옥만호 공군대장, 간사: 합참본부장 이병형 육군중장)에 임동원 대령의 설명으로 회부하여 검토, 의결하고, 동 월에 유재흥 국방부장관 결재를 얻어 확정하였다.

  합동기본군사전략의 세부내용은 1급비밀로 분류되어 1급비밀취급인가를 받지 않은 사람은 열람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율곡계획 수립의 시동과정에서 구성된 청와대특별분석팀(청와대 경제제1수석비서관실 김용환 수석비서관, 서석준 비서관, 경제제2수석비서관실 김광모 비서관, 재무부 증권보험국장 이건충, 국방부 최광수 군수차관보, 합참 최석신 전략기획국장 등 6명) 회의, 합동참모회의 그리고 국방8개년계획의 대통령 보고 과정에서 기본군사전략 개념이 설명되었으며, 청와대특별분석팀 또는 합동참모회의 석상에서 그 내용의 일부가 단편적으로 인용되기도 하였다.

  1973년 10월 13일 청와대 특별분석팀 회의에 때
  김용환: “장기국방력 건설을 위한 전략개념(기본군사전략) 상에 미군이 영원히 한국에 채류한다는 개념입니까?”
  합석한 유근창 국방부차관: “현대화계획(미 7사단 철군에 따른 무상 군원)이 종료되는 1970년대 후반기까지는 채류할 것으로 봅니다.”
  합석한 이병형 합참본부장: “합동참모본부에서는 2000년대까지를 10년 단위로 구분하여 1970년대는 방위전략(防衛戰略), 1980년대는 억제전략(抑制戰略), 1990년대는 공세전략(攻勢戰略) 개념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1974년 1월 16일 국방8개년계획(후에 율곡계획으로 명명됨)을 검토, 의결하는 제79차 합동참모회의 석상에서
  노재현 육군참모총장: “전투준비태세사단(RR)의 전차중대는 우선순위를 낮추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병형 합참본부장: “기본군사전략상 전차의 개발 촉진은 중요합니다. 대통령각하께서는 1979년까지 전차를 개발하도록 지시하였으나 그 이전에 개발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따라서 전차는 이번 사업계획에 일부 반영되어야 합니다.”
  옥만호 공군참모총장: “두 가지만 말하겠습니다. 공군의 증강계획이 불충분합니다. 적 항공기 세력은 양적, 질적으로 급격히 증강되어 가고 있는데 국방8개년계획에 반영된 증강 정도로는 81년도 말에도 피아 균형은 오히려 현재보다 약화 현상을 초래할 것입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전투기는 최소 21개 대대이나, 1981년 말까지 15개 대대 밖에 보유할 수 없도록 계획되어 있어 최소 6-7개 대대가 더 필요합니다.”
  이병형 합참본부장: “팬텀기 국내생산문제가 추진 중에 있으며, 1977년 경에는 최초로 생산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옥만호 공군참모총장: “일본에서 팬텀기 생산을 위한 연구개발에 5년이 소요되었는데 좀 어려울 것입니다.”
  이병현 합참본부장: “기본군사전략에 목표가 ○○대대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1단계(방위전략)는 아직 대미의존단계 이므로 미군의 증원에 의존하며, 2단계(억제전략) 초부터 대량생산하여 증가시켜 나가야 될 것이며, 제한된 가용투자비를 고려하였으니 양해해 주기 바랍니다.”

  이상의 기본군사전략의 편린을 모아 볼 때 임동원 대령이 입안하고, 청와대 분석팀, 함동참모회의 검토를 거쳐 국방장관이 결재하여 확정된 기본군사전략 개념은 방위전략(防衛戰略), 억제전략(抑制戰略), 공세전략(攻勢戰略)의 3단계로 구분되어 있으며, 이들 단계별 전략개념을 뒷받침 할 수 있도록 확보되어야 할 각종 '전력목표'가 제시되어 있는 것이다.
  * 후에 합동군사기획제도가 확립되면서 장기기획은 ‘소요기획(所要企劃)’, 중기기획은 ‘목표기획(目標企劃)’, 단기기획은 '예산(豫算)'으로 정립되었다.

  기본군사전략은 선전이나 심리전과 같이 상대를 눈속임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 힘’으로서 적의 도발을 방위(防衛)하고, 억제(抑制)하고, 나아가서 적의 도발을 기회로 삼아 공세적(攻勢的)인 작전을 전개하여 민족의 소원인 통일을 달성한다는 개념이었다.

  이러한 기본군사전략 개념을 뒷받침 할 수 있도록 자력에 의한 군사력 증강계획(국방8개년계획, 율곡계획)이 추진되었다. 이를 준비하기 위하여 1973년 2월 많은 육, 해, 공군 장교의 자력을 검토한 끝에 1973년 월 2일자로 육군 제5사단 작전참모 임기 만료가 임박한 임동원 중령(진예)이 합참 본부장과 면담을 하고, 4월 13일자로 합참 작전기획국 전략기획과 선임장교로 부임하였다가, 1973년 9월 합참전략기획국으로 개편되면서 제1과(전략기획) 과장으로 임명되었다.

  국방8개년 계획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해, 공군의 이기적인 소요제기와 육군의 냉소적인 태도, 각 군이 요구하는 소요에 비하여 부족한 가용자원, 현대화계획(미 무상군원)과의 관계 조정 등 많은 난관을 지혜롭게 극복하고 1974년-1981년 8개 년간 ‘73불변가로 15.3억불(경상가 19.8억불) 규모의 1차 국방8개년계획 초안을 완성하였다. 이 규모는 1974년도 국민총생산(GNP) 138.5억불로 볼 때 엄청난 규모의 계획이었다.

  국방8개년계획 초안은 1973년 10월 13일 청와대특별분석팀 검토, 1974년 1월 16일 합동참모회의 검토, 2월 6일 서종철 국방부장관 보고, 2월 18일 김종필 국무총리 보고를 마치고, 2월 25일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하여 결재를 받아 확정되었다.

  1974년 7월 12일-13일 간의 제4차 한미안보회의(SCM, 정래혁-LIARD)에서 현대화계획(미 무상군원)의 확정에 따른 1974년 6월 12일의 율곡계획1차조정,
  1974년 8월 18일 현대화계획(미 무상군원)의 연차계획 확정, FMS차관 사업확정, 고속정, 함대함유도탄, 해안레이다, 방산원자재 등 일부 추가소요 반영 등에 따른 율곡계획1-1차조정,
  1975년 월남의 패망에 고무된 북괴의 한반도 전면도발 가능성 증대에 따른 ‘10월 위기설’에 우선 대처하기 위하여 1975년 7월 18일 박정희 대통령의 재가를 얻어 확정한 율곡II차조정까지 율곡계획 추진 초기에 임동원 대령은 실무책임을 맡아 예리한 판단력과 조정력과 설득력을 발휘하여 어려운 난관들을 극복하고 율곡계획 추진의 기초를 확고히 구축하였다.

  임동원 대령의 명석함을 이야기 하기 위해서 율곡계획의 ‘율곡(栗谷)’명칭의 작명과정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1974년 1월 31일 합참 전략기획국 제1과장 임동원 대령은 1월 16일 제79차 합동참모회의 시 합참의장이 강조한 보안문제에 유념하고, ‘국방8개년계획 투자비분야’를 간략하고 보안에 유익한 가제목을 붙이고 채택된 사업에는 사업번호를 붙일 것을 구상하고 다음과 같은 3개안을 골자로 하는 건의문을 작성하여 1974년 2월 4일 이재전 전락기회국장, 이병형 합참본부장, 2월 6일 한신 합참의장의 결재를 득하고, 2월 16일 국방8개년계획의 박정희 대통령 보고과정에 서 이를 보고함으로써 대통령으로부터 극찬을 받았다.

  국방8개년계획 투자비분야 가제목(假題目, 별칭)
  A안: 율곡(栗谷): 조선 선조 때 임진왜란 발발 10년 전에 장기적 안목으로 국가 위기를 예견하고 10만양병론(十萬養兵論)을 주창한 율곡 이이 선생의 호를 딴 것이며, 이것은 선생의 유비무환 정신을 본받고자 하는 의미임.
  B안: 아사달(阿斯達): 아사달은 일설로 단군 개국 시 수도이며, 우리나라의 옛 이름으로 사용되었다고 하며, 또한 신라의 모범적인 화랑의 한 사람으로 용맹스러운 희생으로 나라를 구했다고 하는 신라 야사의 인물임.
  C안: 두꺼비: 두꺼비는 몸에 갑옷을 두르고, 수명이 긴 양서동물로서 비록 작고 민첩하지는 않으나 칠전팔기의 끈질긴 생명력으로 독사도 감히 접근치 못하는 강한 독을 지닌 동물이며 통상, 복, 행운, 장수의 상징물임
  건의 : A안 ‘율곡(栗谷)’
◆ 그의 전략에는 ‘햇볕정책’이 없었는데---
 어느 백과 사전에 햇볕정책
    김대중 정권의 대(對)북한 정책이념. 1998년 2월에 발족한 김대중 정권김영삼 정권의 대북강경정책을 비판하면서 노태우 정권시대의 ‘남북기본합의서’와 ‘비핵화공동선언’을 높이 평가하면서 정경분리, 유연한 상호주의, 일괄해결 등을 기본개념으로 하는 온건한 ‘적극관여’정책을 채택했다.
    또 통일정책에서도 남북연합단계, 연방단계, 완전통일단계라는 ‘3단계통일론’을 표방했다. 이 정책은 '모질게 바람이 불 때는 외투를 바싹 여미고, 따스한 햇볕 아래서는 외투를 벗는다'는 이솝우화에서 따온 이름이었으나 그 뒤 ‘포용정책'으로 개칭되었다.’
고 설명하고 있다.

  2000년 6월, 북한은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 개최에 응했다. 그러나 불법 대북송금 실체의 노출은 ‘김대중의 노벨평화상 수상을 염두에 둔 남북정상회담’을 서둘러 추진 한 것으로 대다수의 국민들이 이해하게 되었다.

  또 노무현 정권의 북의 상응하는 조치 없이 쌀도 주고, 비료도 주고, 개성공단도 건설해 주고, 역사상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비싼 금강산입장료를 지불하고, 전기까지 200만 KW를 주겠다며 온 세계가 떠들썩 하게 하면서도 ‘북한 동포의 인권’에 대해서는 한마디 안 하는지 못 하는지 꿀 먹은 벙어리가 되니 국민들은 그저 ‘퍼주기 정책’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당시 김대중 대통령의 안보특별보좌관과 국정원원장을 지낸 임동원‘햇볕 전도사’라고 빗대어 부르고 있다.

  사실 햇볕정책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도 않았고, 알 수가 없다. 혹시 햇볕정책은 개념만 있지 구체적인 내용이 없는지도 모른다, 국민들에게는 한마디 말도 없다가 통일부 장관이 김정일을 만나러 가서 보따리를 풀어 놓으니 그 속에 전기 200만 KW가 들어있었다. 앞으로도 그들이 즐겨 쓰는 용어로 ‘로드맵’도 없이 이런 식으로 그때 그때 정권에 유리한 이벤트를 골라 보따리를 풀어 놓을 모양이다.

  햇볕정책의 결과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 하기는 아직 좀 이른 것 같다. 그러나 지금 돼가고 있는 품이 좋은 결과를 얻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그래도 햇볕정책의 귀중한 ‘싹’으로 간주될 수 있는 ‘탈북자 문제’에서 정부는 전혀 손을 쓰지 않았다. 중국에 외교적 손을 써서 그들을 인도 받아 마치 고무나무 숲 근처의 중국계 주민들을 이주시킨 마래(馬來)의 ‘새마을’처럼 꾸며서 안정되고 잘 살 수 있게 해 주었다면 바로 햇볕정책, 그 어원이 의미하는 것처럼 꽁꽁 얼어붙은 북녁 땅이 해빙될 수도 있었을 것이 아니겠는가?
  국민의 정부나 참여정부, 누구도 햇벝정책의 ‘긍정적 새 싹’이라 할 수 있는 탈북자에 대해 관심을 쏟지 않았고, 오히려 탈북자를 ‘귀찮은 존재’로 생각하는 동안에 많은 탈북자들이 다시 사지(死地) 북한 땅으로 돌려보내지는 비인도적인 사태가 중-조 국경에서 자행되어 왔다.

  나라의 장래를 걸고 승부수를 띄울 수 있는 야심적인 정책을 내걸면서 이의 차질 없이 추진하는데 필요한 부차적인 지원계획이나, 정책의 추진으로 야기될 상황들을 예측하고, 대응할 준비를 하나도 갖추지 않았다면 그 정책이 비록 ‘최선의 것’이었다 하더라도 실패 할 것이 불문가지(不問可知)이다.

  1971년 내가 육군대학에서 바로 ‘혁명전쟁과 대공전략’을 배우던 그 시절에 미 참모대학에 유학하고 온 선배로부터 매우 중요한 이야기를 들었다.
  당시 육군대학의 교과과정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사단전술학이었는데 사단공격의 시험평가 경우 주공방향의 선정이 틀리면 시험은 볼 것도 없이 잡치고 만다. 아마 학교측에서는 주공방향이 틀리면 이 작전은 곧 실패한다고 본 모양이다.
  그러나 미 참모대학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설사 주공방향을 학교측 원안을 선택하지 않았더라도 ‘주공방향 선정’에 할당된 점수에서 조금 깎일 뿐 다음 기동계획, 화력계획, 행정지원계획 등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잘 못 선정된 주공방향이 적의 감제관측 하에 있는 기동로를 택하였다면 신속한 기동을 보장할 수 있도록 주공부대를 기동편성하고, 적의 감제관측을 방해할 수 있는 충분한 연막계획을 세우며, 적의 방어가 강한 곳을 목표로 잡았다면, 강한 적 방어진지를 무력화 시킬 수 있는 포병 및 항공 화력계획을 충실히 세우는 등 적절한 조치를 취한다면 그 작전은 학교측 원안(최선의 방책)을 선택하고도 그 방책이 지니고 있는 취약점을 보완하지 않는 경우보다 오히려 성공할 가능성이 더 높아 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좋은 점수를 준다는 것이다.

  나라를 경영하거나,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방책을 선택해야 할 경우는 무수히 많다. 누구나 최선의 방책을 선택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어느 방책이던 그 나름대로 강점을 기지고 있는가 하면 취약성도 갖게 마련이다. 시젯말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완벽한 방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어느 방책이 더 강점이 많고, 결정적인 취약점이 없는가를 고려해서 최선의 방책을 선택하게 되는 것인데 최선의 방책을 선택했다고 해서 그 방책이 지니고 있는 취약성을 보완하는데 소홀히 한다면 오히려 차선의 방책을 선택해서 그 취약성을 철저히 보완 하는 것보다 실패할 확률이 더 큰 것이다.

  설사 햇볕정책이 이 시대에서 최선의 방책을 선택한 것이라 하더라도 이 정책을 시행하게 되면 탈북자가 발생할 것이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생각할 수 있는 일인데, 이에 대해 중국의 선처만 바라고 있는 현실을 보면 다른 어떤 분야에서도 취약점을 보완할 계획이나, 성과를 확대해 나갈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햇볕정책이 실패할 가능성이 더 크게 보이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이솝우화의 해와 바람의 ‘나그네 외투 벗기기’ 시합은 그야 말로 우화일 뿐이다. 햇볕을 쏘이면 나그네가 외투를 훌훌 벗을 것이라는 생각은 나그네가 몰랐을 때는 가능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그네가 자기 외투를 벗기려고 바람이 불고, 햇볕을 쏘인다는 것을 알았을 경우는 순순히 외투를 벗겠는가. 그 외투를 벗으면 북한은 체제가 무너지고, 김정일은 실각하게 된다는 것을 먼저 알고 있는데 말이다. 얼마 전에 죽은 북한의 연형묵 전총리가 햇볕정책 초창기에 이미 “남조선은 더운 바람을 북쪽으로 불어넣고 있다.”고 말 한 적이 있다.

  임동원, 그분은 30대 혈기 왕성한 시절에 저서 ‘혁명전쟁과 대공전략’을 내 놓았고, 40대 원숙한 시기에 ‘기본군사전략’과 ‘율곡계획’을 탄생시켰다.
  그런데 공산주의 혁명전쟁에 대응하는 대공전략에는 ‘당근’, 다른 말로 해서 ‘햇볕’은 없었다. 합법적이고, 솔직한 대국민 정책을 펴고, 국민을 잘살게 해서 대중의 지지를 얻고, 주민과 게릴라를 철두철미하게 분리시켜 게릴라로 하여금 ‘물이 마른 강의 고기’처럼 고사케 하며, 무자비한 대게릴라작전을 전개하여 그 불씨가 남지 않도록 뿌리를 뽑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북한 정권과 공산당 그리고 군대를 ‘게릴라’, 북한 주민을 ‘대중’으로 놓고 볼 때 햇볕정책은 게릴라와 대중을 분리시켜야 한다는 대공전략과는 상반된 전략이다. ‘고기’와‘물’을 분리시켜 고기가 말라 죽게 하는 것이 아니라 꼴딱 꼴딱 숨이 넘어가는 고기에게 물을 부어주어 되살아 나게 하고, 햇볕을 쏘여 나그네가 외투를 벗게 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옷깃을 여미게 하는 전략이 되어버렸다.

  또 북괴의 정규전 남침 가능성에 대비하는 기본군사전략과 율곡계획은 ‘힘’을 그 바탕으로 하여
    70년대는 방위전략으로 현 전선에서 다소 우세할 지도 모르는 적을 방어작전으로 격퇴시키는 것이었다.

    80년대는 우리의 전력증강을 착실히 추진하여 적과 대등한 상태를 이루어 적에게 ‘침략해도 이길 수 없다’는 생각을 갖게 하거나, 국지적인 도발에 과감하게 보복을 감행하여 침략할 생각을 갖지 못하도록 하는 억제전략이었다. 당시 일반적인 억제의 개념 속에는 그 수단이 당근도 있기는 했지만 율곡계획으로 뒷받침하는 기본군사전락의 억제의 수단에는 당근은 배제되었었다.

    90년대는 적보다 우위의 전력을 갖추어 적이 오판하여 침략을 감행 했을 경우는 이를 기회로 삼아 공세적인 작전을 전개하여 통일을 달성할 수 있는 공세전략을 그 핵심 개념으로 하고 있었다. 여기에도 당근을 줘서 적을 달래는 개념은 없고, 오직 우리의 ‘힘’이 뒷받침 하고 있는 개념이었다.

  임동원, 그분의 대공전략에서는 코너에 몰린 게릴라는 계속 소탕하여 그 뿌리를 완전히 뽑고 나아가서 공산주의 조직체계 자체를 와해 시켜야 한다고 했고, ‘힘’의 뒷받침을 전제로 하는 방위전략, 억제전략, 공세전략을 내 놓았던 그가 따뜻한 햇볕을 쏘이면 나그네가 순순히 외투를 벗을 것이라는 - 나그네는 외투를 벗으면 죽는 다는 것을 아는데 - 조삼모사(朝三暮四)식 햇볕정책을 내 놓았다. 왜?

  천정배가 몇 년 전 국회의원일 때는 법무부장관의 수사지휘권을 없애자고 앞장 서더니, 자기가 법무장관이 되면서 일반국민들이‘빨갱이 앞잡이’로 인식하고 있는 강정구 구출에 수사지휘권을 행사했는데 그 이유를 묻는 야당 의원들에게 ‘생각이 바뀌었다’고 대답했다. 사람이니 생각이 바뀔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바뀌기 전의 생각은 틀린 것이 아닌가? 만약 임동원, 그분이 안보정책에서 생각이 바뀌었다고 말한다면 과거 그분이 내놓은 대공전략은 여러 분야에서 국가정책이나 군사교리로 채택되어 엄청난 자원이 투자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의 생각을 잘못되게 가르친 것이 아닌가? 그 뿐인가 기본군사전략에 입각하여 지난 30여년 동안 전력증강에 국민의 혈세가 투자된 천문학적인 율곡예산은 아무 쓸모 없는 곳에 낭비된 것이 아닌가?

  이미 30년 전의 일이긴 하지만 내가 2년 여 임동원 과장을 모신 바로는 그는 조령모개(朝令暮改)식으로 생각을 바꾸는 모사(謀士)가 아니다.
  학구적(學求的)이며, 다방면에 많은 지식(知識)을 쌓았고, 서울대학 철학도였던 만큼 논리적(論理的)이며, 자존심(自尊心)을 중시하고, 상황판단이 예리(銳利)했으며, 정도(正道)를 걷고, 합리적(合理的)인 의견에 귀를 귀울였다.
  율곡계획 수립과정에서 하루에도 십 여명의 육, 해, 공군 장군들이 와서 합참 조정안을 공박하고, 자군의 요구를 반영하라고 욱박지를 때 그는 조용조용히 차분하게 논리적인 설득으로 상대를 이해 시켜 돌려 보냈다. 돌아갈 때는 하나 같이 “임대령 말이 맞아!”하며 웃고 떠났다.
  상사에게 업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잘 보일려고 애쓰지도 않았으며, 과원들과 함께 야근하고, 늦게 퇴근 때는 과원들을 버스정류장까지 태워다 주는 동고동락(同苦同樂)하는 사람이었다.
  웬만치 화가 나기 전에는 군대사회에서 그 흔한 욕설 한 번 하지 앟고 항상 웃는 얼굴로 좋은 인상을 주었다. 얼굴에 항상 선(善)한 성격과 인격이 나타났다.

  가정적으로도 검소(儉素)하고 단란(團欒)하였다. 1974년 말 어느날 우리 내외는 원효로에 있는 적산가옥 같은 일본식 목조건물에 살고 있는 임동원 과장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9살 쯤 된 아들이 신문지를 갈기 갈기 가위질 하고 있었다. 손님이 오는데 마루가 온통 신문 조각으로 널려 있는 것이 민망했던지 사모님은 “아빠를 닮아 가지고 신문만 보면 오려서 책갈피 속에 끼운다”고 해설을 해 주었다. 아들이 늦은 편이었다. 임동원 과장은 거의 매일 과원들과 함께 사무실 책상에서 점심도시락을 먹었다.

  나는 신문에서 ‘햇볕정책’이란 단어를 보는 순간 ‘아! 이는 임동원 안보특보의 작품이구나!’하고 생각하였다. 그가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가제목 ‘율곡’을 창안해 낸 24-5년 전의 일이 머리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무리 복잡한 문제라도 개념을 잡고, 선후를 가리며, 적절한 용어를 발굴하여 조리 있게 표현하는 데는 따를 사람이 없었다.

  햇볕정책은 임동원, 그분의 작품이 아닌지도 모른다. 다만 김대중의 생각을 정리한 것일 뿐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렇다면 더욱 더 학구적이고 자존심이 강한 그분이 어떻게 자기의 생각과 다른 작품을 내 놓았을까? 곡학아세(曲學阿世)? 보은(報恩)?

  그 해답을 얻기 위해 잠시 임동원, 그분이 걸어 온 길을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나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1975년 합참 전략기획국 제1과장으로 율곡제II차조정계획을 마무리 하고, 전방 연대장에 임명되었고, 연대장 임기 종료 후 얼마 안 있어 육군준장에 진급하여 육군본부 기획관리참모부 전략처장에 부임하였다. 그 당시 정성화 참모총장이 육군의 전력증강에 새 바람을 불어넣기 위하여 편성한 ‘80위원회’의 간사를 맡았었다.
  12.12사태로 정성화 육군참모총장이 제거되자 80위원회는 해체되었고, 제5공화국이 시작되면서 외교계를 혁신한다는 명목으로 군인들을 대거 외교관에 기용 할 때 그분도 육군소장으로 진급되어 얼마 안 있어 예편하고(그 때 동료들 간에는 ‘빤짝 별’이라 했다), 서부 아프리카의 신생국 나이제리아 대사로 임명되면서 외교관의 길을 걸었다. 외교안보연구소 소장을 지냈고, 김영삼 정부 아래서 통일부차관에 기용되었다가 남북 장관급회담에 수행하여 평양에 갔다 와서 안기부차장과 회담 내용을 놓고 옥신각신하는 것이 언론에 보도되더니 급기야 통일부차관에서 해직되었다.
  얼마를 지난 후 그분의 이름이 김대중이 이사장으로 있는 김대중의 싱크탱크, 아태재단의 사무총장으로 보도되었다.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면서부터는 대통령안보특별보좌관, 통일부장관, 안기부장 등에 그 이름은 승승장구 빛을 발했고, 김대중과 김정일의 남북정상회담 때는 김정일과 가장 가까운 위치에 서 있거나, 김정일과 귀엣말을 주고 받는 장면이 TV화면에 자주 나타났다.

  임동원, 그분이 지나 온 길 중에서 통일부차관에서 해임 될 때, 그 때가 정신적으로 가장 어려웠던 때가 아닐까 싶다. 군과 외교계에서 조국의 안보와 국위선양을 위해 최선을 다 해 헌신해 왔는데 예기치 않은 일로 헌신짝처럼 버려지는 냉엄한 세태에 큰 충격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어느날 아침신문에 임동원이 아태재단 사무총장이 되었다는 기사를 보고 나는 부엌에 있는 집사람을 향해 “여보! 임동원 장군이 아태재단 사무총장으로 갔대. 김대중이 대어를 낚았군” 집사람도 임동원, 그분의 능력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내 말에 선 듯 동의 했다. 그러나 그 반대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자존심은 망가지고, 의기소침해 있는 임동원, 그분에게 김대중이 손을 내민 것은 구세주의 구원의 손길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쨋던 햇벝정책은 이 때부터 싹을 틔우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 곳, 아태재단은 김대중의 정치철학을 다듬어 정리하여 정책으로 탄생시키는 곳이었으니까. 지나간 일을 되돌아 볼 겨를이 없었을런지도 모른다. 과거 그분이 내놓았던 공산주의 혁명전쟁과 대공전략이나, 군사기본전략, 율곡계획은 지나간 꿈 속의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오직 그분의 머리 속에는 보은(報恩)만이 있었을런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햇볕정책이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포용정책’이 되어 7000만 민족이 원하는 방향, 자유민주주의체제로 통일하는데 밑거름이 될는지, 아니면 ‘퍼주기 정책’이 되어 깔딱깔딱 숨넘어가는 김정일정권에게 모르핀주사가 되어 핵 공갈을 휘둘러대는 망나니로 되살려놓는 결과가 될 지는 아직 속단할 수 없지만 요즈음 돼가는 꼴이 후자가 될 가능성이 더 크다는 생각이 든다.

  북한 주민들의 입에 풀칠도 못해 줘서 배급제를 없애더니, 메주알 고주알 따지는 유엔의 식량 원조는 거절하면서도, 내 것 주고도 할 말 한마디 못하는 참여정부가 공짜 식량을 퍼줘서 조금 여유가 생기니까 햇볕에 ‘시장경제의 새 싹’이나 돋아날까 봐 금새 배급제를 부활하여 주민들의 목줄을 바짝 조여 검어 쥐는 품이 그들이 햇볕전도사 머리 꼭대기에 올라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어쩻던 ‘햇볕정책’은 그의 소신에서 울어 난 전략들 -공산주의자들의 혁명전쟁에 대응하는 ‘대공전략’이나, 정규 남침 적화에 대응하는 ‘기본군사정략’과 ‘율곡계획’- 에서는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는 ‘돌연변이 정책’인 것 만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