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국공신(光國功臣) 홍순언(洪純彦)

沙月 李 盛 永 (육사18기 홈페이지 게재, 增補)

조선조에서 상민이나 천민이 공신이 된 예는 흔하지 않다. 몇 년 전에 TV드라마 ‘허준’에서 천민 출신의 허준이 혜민서와 내의원 의원으로서 임진왜란을 치른 후에 공신이 되는 것을 시청한 적이 있다. 전란 동안에 허준의 엄청난 활약상과 공적을 그린 드라마 내용을 보았기 때문에 시청자들에게는 허준이 공신이 되는 것을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이 지나갔다.

 

임란이 끝난 6년 후인 선조37년(1604)에 이항복 등 임란 수행과정에서 공이 큰 문신 86인이 공신으로 책록된 호성공신(扈聖功臣) 중에 허준은 3등에 포함되었다.(권율, 이순신, 원균 등 무관 18인에게는 宣武功臣이 별도로 책록됨)

 

이보다 조금 앞선 임란이 발발하기 전해인 선조24년(1591)에 책록된 광국공신(光國功臣)은 윤근수 등 19인인데, 2등공신 맨 끝에 사신을 따라 다니는 역관(譯官) 홍순언(洪純彦)이란 사람이 들어 있는데  이는 예사 일이 아니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광국공신이란 중국의 공식 문서에 태조 이성계의 조상에 관한 종계(宗系)가 잘못되어 있는 것을 바로잡는데 공이 큰 사람에게 내린 공신 책록이다.

 

일의 발단은 태조3년(1394)에 명사(明使) 황영기(黃永奇) 등 세 사람이 와서 해악산천(海岳山川)의 제신들에게 제사를 지냈는데 고제축문(告祭祝文) 내용중에 ‘고려의 배신(陪臣: 임금을 가까이 모시면서 권세를 부리는 권신) 이인임(李仁任)의 후손(後孫)인 성계(成桂)는  云云’하는 구절이 있어 이 명사 편에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상세히 변무(辨誣)하는 글을 명나라로 보냈다.

 

그 후 태종 2년(1402)에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갔다 돌아온 조온(趙溫), 공부(孔俯) 등이 고하기를 명(明)의 조훈조장(祖訓條章)‘이성계의 종계(宗系)가 이인임의 후손으로 되어 있다’고 아뢰었고, 그 후 대명회전(大明會典)에도 이렇게 잘못 기록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로부터 태종-선조간 12대에 걸쳐 전후 15회의 사신을 보내는 등 186년 간의 각고의 노력 끝에 선조22년(1599)에 종계를 바로 잡고, 2년 뒤인 선조 24년에 그      동안 종계를 바로잡는데 공이 큰 19인을 골라 輸忠貢誠翼謨修紀 光國功臣(수충공성익모수기 광국공신)』(약칭: 광국공신)으로 책록한 것이다.

종계변무 사신 현황

순서

연대

정사

부사

서장관

비고

1

태종3년(1403)

  빈(李  彬)

민무휼(閔無恤)

 

종계변무주청사

2

중종12년(1517)

이계맹(李繼孟)

이사균(李思鈞)

이지방(李之芳)

책봉주청사겸

3

" 13 "(1518)

  곤(南  袞)

이자(李자)

  충(韓  忠)

종계변무주청사

4

" 31 "(1536)

  겸(宋  겸)

 

 

하성절사겸

5

" 34 "(1539)

  발(權  撥)

임 권(任 權)

 

동지사겸

6

" 35 "(1540)

김인손(金麟孫)

임백령(林百齡)

 

사은사겸

7

명종 6년(1551)

  두(韓  두)

 

 

동지사겸

8

" 10 "(1555)

  유(鄭  裕)

 

 

동지사겸

9

선조 6년(1573)

이후백(李後白)

윤근수(尹根壽)

윤탁연(尹卓然)

종계변무주청사

10

"  7 "(1574)

안자유(安自裕)

 

이언유(李彦愉)

동지사겸

11

" 10 "(1577)

윤두수(尹斗壽)

 

김성일(金誠一)

사은사겸

12

" 14 "(1581)

김계휘(金繼輝)

 

고경명(高敬命)

종계변무주청사

13

" 17 "(1584)

황정혹(黃廷或)

 

한응인(韓應寅)

종계변무주청사

14

" 20 "(1587)

  홍(兪  泓)

 

  섬(尹  暹)

사은사겸

15

" 22 "(1589)

  탁(鄭  琢)

권극지(權克智)

 

사은사겸

 

참고로 조선조 때 중국에 보내는 사신은 정기사절과 임시사절이 있는데 정기사절에는 정조사(正朝使: 정월 초하루에 중국 황제를 배알하는 사절, 세배사절), 성절사(聖節使: 중국 황제의 탄신일 경축사절), 천추사(千秋使: 중국 황후의 탄신일 경축사절), 동지사(冬至使: 동지를 전후해서 보내는 사절)가 있고, 임시사절에는 사은사(사은사: 중국 황제가 호의를 베풀었을 때 감사하는 인사를 드리기 위하여 보내는 사절), 주청사 또는 진주사(奏請使, 陳奏使: 중국 황제에게 상주할 일이나 보고할 일이 있을 때 보내는 사절), 진하사(進賀使: 중국 황실의 경사를 축하하려고 보내는 사절), 진위사 또는 진향사(進慰使, 進香使: 중국 황실의 상고를 위문하기 위하여 보내는 사절), 변무사(辯誣使: 중국의 오해를 해명하기 위하여 보내는 사절), 참핵사(參覈使: 조, 중간에 공동 논의 할 사항이 있을 때 보내는 사절) 등인데 종계변무사신은 임시사절의 변무사에 해당한다.

 

선조24년에 종계변무에 따른 공로자 19인에게 공신책록을 하였는데 공신명(功臣名)은 수충공성익모수기광국공신(輸忠貢誠翼謨修紀光國功臣)이며 보통 약해서 광국공신(光國功臣)이라 한다.

 

  광국공신 책록(光國功臣冊錄)현황(淸選考)

등급(인원)

공신명

1등(3인)

윤근수(尹根壽), 황정혹(黃廷或), 유  홍(兪  泓)

2등(7인)

홍성민(洪聖民), 이후백(李後白), 윤두수(尹斗壽), 한응인(韓應寅)

  섬(尹  暹), 윤  형(尹  炯), 홍순언(洪純彦)

3등(9인)

  주(金  澍), 이양원(李陽元), 황  림(黃  琳), 윤탁연(尹卓然)

  철(鄭  澈), 이산해(李山海), 기대승(奇大升), 유성룡(柳成龍)

  황(崔  滉)

 

광국공신 2등 맨 끝에 홍순언(洪純彦)이란 이름이 있는 것을 마음에 두고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자.

 

아홉 살 때 효종의 다섯째 딸 숙정공주(淑靜公主)와 혼인하여 효종의 부마(駙馬)가 되고, 스무 살에 홀로된 동평위(東平尉: 임금의 사위에게 주는 칭호) 정재륜(鄭載崙)이 숙종27년(1689)에 쓴『東平尉公私聞見錄』(동평위공사문견록)에 홍순언(洪純彦)과 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301 洪純彦 譯官 外交로 功을 세우다(譯者가 붙인 題目)

洪純彦(홍순언)은 역관이다. 일찍이 燕京(연경)에 갔는데 돈을 많이 가지고 갔다. 妓館(기관)에 갔는데 안내하는 사람이 한 방을 안내하면서 "손님 돈을 좀 많이 써야 합니다" 라고 하였다. 純彦이 들어가 보니 國色(국색)인데 나이가 젊은 여자였다. 그 여자는 소복을 하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는데 몹시 처량하고, 당황해 하므로 그 연고를 자세히 물으니, 죄를 얻어 처형된 兵部尙書(병부상서: 병조판서)의 딸인데 부친의 시체를 고향으로 모셔가 治喪(치상) 하기 위하여 몸을 팔게 되었다고 하고, 또 스스로 말하기를 한 번 몸을 허락하면 종신토록 수절하겠다고 하였다.

 

純彦이 이 말을 듣고 뜰 아래 내려가 엎드려 절하고 말하기를 “저 같이 천한 역관이 어찌 감히 天朝(천조)의 宰相(재상) 집 가문을 더럽힐 수 있겠습니까” 하고는 가지고 간 금덩이를 모두 다 주고 그냥 돌아왔다. 동료들이 이를 알고 조소하면서 놀려댔으나 純彦은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그 후 수년이 지나 純彦이 또 사절을 따라 바다를 건너 명나라에 가니 禮部(예부: 예조)에서 여러 번 純彦이가 왔느냐고 물어와 사람들이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 北京(북경)에 들어가 알고 보니 전날의 兵部尙書(병부상서) 딸이 禮部尙書(예부상서)의 후처가 되어있었다.

 

그 내력은 이러하다. 병부상서의 장례를 치르고 북경의 집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가려고 올라와 아버지의 절친한 친구였던 예부상서 댁에 작별 인사차 들렸다가 예부상서 처의 병 수발을 들면서 집에 머무르게 되었으며, 예부상서의 노력으로 병부상서의 죄가 혐의를 벗게 되었고, 전처가 죽자 그녀를 후처로 맞았던 것이다. 禮部尙書(예부상서)가 그의 처로부터 純彦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진심으로 존경하게 되어 그를 찾았다는 것이다.

 

그 때에 使節(사절)은 宗系(종계)를 바로잡기 위하여 갔는데 일이 禮部尙書(예부상서)가 관장하는 일이고 보니 상서가 純彦의 연고로 해서 극력히 주선해서 백년이 훨씬 넘도록 해결하지 못한 宗系(종계)를 바로잡게 되어 王統(왕통)의 蔑辱(멸욕)을 벗게 되었다. 또 尙書夫人(상서부인)이 純彦을 불러 후한 선물로 많은 錦繡(금수: 비단)를 내려 純彦의 은혜에 보답했다고 한다.

 

宣祖大王(선조대왕)이 크게 기뻐하여 宗廟(종묘)에 고하고, 光國功勳(광국공훈)을 책록하고 洪純彦을 唐陵君(당릉군: 공신에게 내리는 封號)에 봉하였다.

領相(영상) 洪命夏(홍명하)가 그 때 어른에게서 듣고 나에게 말해 주었다.」

 

일개 역관이 마음 한번 곧게 쓴 것이 나라 일에 큰 보탬이 되어 자신은 2등 공신이 되고 품계가 자헌대부(資憲大夫: 정2품)까지 올랐으며 자손 대대로 양반의 반열에 오르게 된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