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조가(黃鳥歌)
沙月 李盛永(2006. 7. 21)
꾀꼬리
翩翩黃鳥(편편황조) 펄펄 나는 꾀꼬리는
雌雄相依(자웅사의) 암수 서로 정다운데
念我之獨(염아지독) 외로울사 이내 몸은
誰基與歸(수기여귀) 뉘와 함께 돌아갈꼬
  후세 사람들이 황조가(黃鳥歌) 라고 부르는 이 노래는 고구려 제2대 유리왕 작으로 전해지고 있다. 황조(黃鳥)는 꾀꼬리를 말한다. 봄에 우리나라를 찾아와 버드나무나 참나무에 둥지를 틀고 새끼를 치는 철새다.

  온 몸이 노란색이기 때문에 한자어로 황조(黃鳥)라고 한다. 꾀꼬리를 말하는 한자는 麗鳥(여, 리)자로 꾀꼬리를 여경(麗鳥 庚鳥), 여황(麗鳥 黃)이라고도 한다. 꾀꼬리는 색깔도 예쁘지만 십여 가지의 다양한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서 사람들의 찬양을 받아 왔다.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잘하면 ‘꾀꼬리 같은 목소리’ 라 한다. 또 꾀꼬리는 암수 금슬이 좋은 새로 알려져 있다.

  김세레나가 부른 민요, 새타령에는 꾀꼬리가 나온다
    명랑한 새 울음 운다/ 저 꾀꼬리가 울음 운다/
    어디로 가나 이쁜 새/ 어디로 가나 귀여운 새/
    온갖 소리를 모른다 하여/ 울어 울어 울어 울어 울음 운다/
    이 산으로 가면 꾀꼴 꾀꼴/ 저 산으로 가면 꾀꾀꼴 꾀꼴/
    이히 어이 이히 이히 이히이히히/ 좌우로 다녀 울음 운다.
라고 노래하고 있다.

  또 다른 고문의 ‘새타령’ 중에도 꾀꼬리가 나온다.
    (1부)
    남풍(南風) 좇아 떨쳐나니 구만장천(九萬長天)에 대붕(大鵬)새
    문왕(文王)이 나 계시니 기산조양(岐山朝陽)에 봉황(鳳凰)새
    무한기우 깊은 회포 울고 남은 공작(孔雀)새
    소선적벽(蘇仙赤壁) 시월야(十月夜)에 알연장명(알然長鳴) 백학(白鶴)이
    글자를 뉘 전하리 가인상사(佳人想思) 기러기
    생증장액(生憎帳額) 수고란(繡孤鸞) 어여뿔사 채란(彩鸞)새
    약수삼천리(弱水三千里) 먼먼길 서왕모(西王母)의 청조(靑鳥)새
    위보가인수기서란(爲報家人數寄書) 소식 전ㅎ던 앵무(鸚鵡)새
    성성제혈(聲聲啼血) 양화지(梁花枝) 귀촉도(歸蜀道) 불여귀(不如歸)

    요서몽(遼西夢)을 놀라 깨니 막교지상(莫敎枝上) 꾀꼬리
    만경창파(萬頃蒼波) 녹수상(綠水上)에 원불상리(願不相離) 원앙(鴛鴦)새
    주란동정(周亂東征) 돌아들어 관명우질(觀에서見대신鳥 鳴于 土至) 황새
    비입심상백성가(飛入尋常百姓家) 왕사당전(王謝堂前) 저 제비
    양유지당담담풍(楊柳池塘淡淡風)에 둥둥 뜨는 진경이
    낙하(落霞)는 여고무제비(與孤?齊飛)하고, 추수공장(秋水共長) 따옥이
    팔월변풍(八月邊風) 높이 떠 백리추호(百里秋毫) 보라매
    금차하민수감모(今且下民誰敢冒) 연비려천(鳶飛戾天) 소리개
    쌍쌍총구안(雙雙 塚에서土제외 鳩眼)에 쌍거쌍래(雙去雙來) 비둘기
    춘산무반독상구(春山無伴獨相求)에 벌목정정(伐木丁丁) 때찌구리
    어사부중(御使府中)에 밤이 들어 울고 가는 가마귀
    정위문전(廷尉門前)에 깃들었다 작지강강(鵲之彊彊) 까치
    만천소우몽강남(滿天疎雨夢江南)은 한가하다 해월이
    우후청강(雨後淸江) 맑은 흥(興) 묻노라 갈매기
    추래견월다귀사(秋來見月多歸思)하니 열고 놓으니 두루미

    (2부)
    산림비조(山林飛鳥) 뭇새들은 농춘화답(弄春和答)에 짝을지어 쌍거쌍래(雙去雙來) 날아든다

    공기 적동 공기 쭈루루 수꿍 소떵 가가갑 수리 날아든다

    오색채의(五色彩衣)를 떨쳐입고 아홉 아들 열두 딸을 좌우(左右)로 거느리고
    상평전(上平田) 하평전(下平田)으로 아조 펄펄 날아든다.
    장끼 까토리 울음 운다 꺽꺽 꾸루룩 울음 운다

    저 무슨 새가 울음 우나 저 버꾹새가 울음 운다
    꽃피어서 만발하고 잎피어서 우거진데 청계변(淸溪邊)으로 날아든다
    이 산으로 가도 뻐꾹, 저 산으로 가도 뻐꾹, 좌우로 날아 뻐꾹새가 울음 운다.

    저 무슨 새가 울음 우나. 야월공산(夜月空山) 저믄 날에 저 두견(杜鵑)새 울음 운다.
    이산으로 오며 귀촉도(歸蜀道), 저 산으로 가며 귀촉도(歸蜀道), 짝을 지어 울음 운다.


    꾀꼬리 울음 운다. 황금(黃金) 갑옷 떨쳐 입고 양유청청(楊柳靑靑) 버드나무,
    제 이름 제가 불러 이리로 가며 꾀꼬리루, 저리로 가며 꾀꼬리루,
    머리 고이 빗고 시집가고지고 게알 가가감실 날아든다.


    할미새 울음 운다. 무곡통(貿穀桶) 한섬에 칠분오리(七分五厘)하여도
    오리가 없어 못 팔아먹는 저 방정맞은 할미새,
    경술년(庚戌年) 대풍(大豊) 시절에 쌀을 양(兩)에 열 두말씩 해도 굶어 죽게 생긴 저 할미새
    이리로 가며 팽당그르르 저리로 가며 팽당그르르 가가감실 날아든다.

    저 무슨 새가 날아든다. 초경(初更), 이경(二更), 삼사오경(三四五更)
    사람의 간장(肝腸) 녹이랴고 이리로 가며 붓붓, 저리로 가며 붓붓, 이리 한참 날아든다.

    저 비들기 울음 운다. 나의 춘흥(春興) 못 이기어 수피들기 남ㄱ에 앉고 암피들기 땅에 앉어
    콩 한 줌을 흩어 주니 수놈은 물어 암놈 주고, 암놈은 물어 수놈을 주며
    주홍 같은 입을 대고 궁글 궁글 울음 운다.

    저 무슨 새가 우는고 오색단청(五色丹靑) 때쩌구리 연년(年年) 묵은 고목(枯木)나무 벌레하나 얻으려고
    오르며 딱따그르, 내리며 딱따그르 이리 한참 울음 운다.

    저 가마귀 울음 운다. 아래ㅅ녁 갈가마귀 웃녁의 떼가마귀 거지 중천 높이 떠서 까득 까득 울음운다.

    소상강(瀟湘江) 떼기러기 장성(長城) 갈재 넘어려고 백운(白雲)을 무릅쓰고 뚜루룩 너울너울 춤을 춘다.

    저 종달새 울음 운다. 춘삼월(春三月) 호시절(好時節)에 한 길 오르며 종지리, 두 길 오르며 종지리,
    아주 펄펄 노니는구나.


  나의 시골집 뒷동산에도 내가 아주 어릴 때부터 매년 어김없이 꾀꼬리 한 쌍이 찾아와 상수리나무에 둥지를 틀고, 골짜기 천수답 논둑의 버드나무와 건너편 새터마 뒷산 기슭 상수리나무로 오가며 흉내도 낼 수 없는 그야말로 ‘꾀꼬리 같은’ 가지각색의 고운 목소리로 봄을 노래한다.

  꾀꼬리는 사람에게 전혀 해를 주지 않는 새지만 새끼를 치고 있을 때에는 나무 아래로 지나가는 어린 아이들에게 머리 위로 드라이패스(Dry pass)를 하며 위협적인 소리를 내면서 비행을 한다. 어른이 지나 갈 때는 그러지 않는 것을 보면 어른과 아이를 분별할 줄 아는 듯 싶다.

  고구려 제2대 유리왕은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이 된 주몽이 부여를 탈출해서 남쪽으로 망명해 올 때 후에 황후가 된 예씨부인 몸에 유복자로 남겨놓고 온 장남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주몽이 부여에서 졸본으로 망명하기 전 부여 여자 예씨와 혼례를 올렸고, 졸본으로 망명할 당시 예씨는 임신 중이었다고 한다.
  주몽은 어머니 유화부인으로부터 금와왕의 맏아들 대소가 주몽을 죽이려 한다는 사실을 듣고, 그를 따르던 오이, 마리, 협보 등 친구들과 함께 졸본으로 망명하였다.

  부여의 금와왕(金蛙王)과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이 된 주몽(朱夢)의 탄생에 관한 설화(說話)가 삼국사기 권13, 동명성왕편에 전해지고 있다.

  부여왕 해부루가 늙을 때까지 아들이 없었는데 산천에 제사를 지내면서 아들 얻기를 기원하였다.

  하루는 그가 곤연이라는 곳에 이르렀는데, 그곳에 있는 큰 바위를 보고 탄 말이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상하게 여긴 왕이 사람을 시켜서 그 바위를 굴리게 하였더니 바위 밑에 개구리 모양을 한 어린아이가 있었다.

  왕이 기뻐하며 “이는 바로 하늘이 내게 준 아이로다” 하면서 데리고 와서 이름을 금와(金蛙: 금개구리)라 지어주고 길렀는데 장성하자 태자로 삼았다.

  세월이 흐른 어느날 국상 아란불이 왕에게 말하기를 “어느날 하느님이 나에게 내려와 이르기를 ‘장차 나의 자손으로 하여금 이곳에 나라를 세울 것이니 너희는 여기를 떠나라. 동쪽 바닷가에 가섭원이라는 곳이 있는데, 땅이 기름져서 오곡을 재배하기에 적합하니 가히 도읍으로 삼을 만한 곳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고 말하면서 왕에게 그곳으로 도읍을 옮기도록 권하였다.

  아란불의 권유에 따라 해부루왕은 도읍을 가습원으로 옮기고 ‘동부여’ 라 하였다. 그러자 옛 도읍에는 어디서 왔는지 모르는 자칭 ‘천제의 아들 해모수’ 라는 사람이 와서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웠다.(이를 북부여라 함)

  한편 동부여의 해부루가 죽자 금와가 왕위를 이었다. 금와가 태백산 남쪽 우발수에서 혼자 살고 있는 한 여자를 만났는데 그녀에게 사연을 물었더니 그녀가 말하기를
  “나는 하백의 딸 유화입니다. 어느날 동생들과 밖에 나가 놀았는데 한 남자가 자칭 ‘천제의 아들 해모수’ 라고 하면서 나를 웅심산 아래 압록강 가에 있는 집으로 데려가 사욕을 채우고는 떠나가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나의 부모는 내가 중매도 없이 남자와 관계한 것을 꾸짖고, 우발수에서 귀양살이를 하도록 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금와는 그녀의 말을 기이하게 여기고 그녀를 데리고 와서 방에 가두어 두었는데 그녀에게 햇살이 비치는데 그녀가 몸을 피하면 햇살이 그녀를 따라다녔다. 이후 유화는 태기가 있더니 다섯 되 들이 되는 큰 알을 하나 낳았다.

  금와왕은 그 알은 개와 돼지에게 주었으나 짐승들은 이를 먹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길가에 버렸더니 지나가던 소와 말이 이를 다치지 않게 피하며 밟지 않았다. 또 들판에 갖다 버렸더니 새들이 날개로 그 알을 덮어주곤 하였다. 이렇게 되자 금와왕은 알을 도루 가져 다 쪼개려 했으나 깨뜨려지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그 알을 그 어미 유화부인에게 돌려 주었는데 그 어미가 알을 감싸서 따뜻한 곳에 두었더니 한 사내아이가 알 껍질을 깨고 나왔는데 그의 골격과 외모가 아주 영특했다.


  그의 나이 7세 때 벌써 보통사람과 크게 달라서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았는데 백발백중이었다. 부여에서는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일러 '주몽' 이라 하였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주몽(朱夢)이라 지었다.

  금와왕에게는 7명의 아들이 있어 항상 주몽과 함께 놀았는데 그들의 재주가 주몽을 따르지 못하였다. 그래서 맏아들 대소가 금와왕에게 말하기를
  “주몽은 사람이 낳지 않았으며, 그 사람됨이 용맹하므로 만일 일찍이 처치하지 않으면 후환이 생길까 두렵습니다. 그러니 청컨대 그를 없애버리소서” 하였다.
  그러나 금와왕은 대소의 청을 듣지 않고, 주몽에게 말을 기르는 일을 하도록 하였다.

  주몽은 여러 말 중에서 잘 달리는 말을 알아내 그 말에게는 먹이를 적게 주어 여위게 하고, 다른 말들에게는 먹이를 많이 주어 살찌게 하였다. 왕은 살찐 말을 자기가 타고, 여윈 말을 주몽에게 주었다.
  왕의 여러 아들과 신하들이 주몽을 죽이려고 계략을 꾸몄다. 유화부인이 그들의 계략을 몰래 알아내고 주몽에게 말하였다.
  “사람들이 장차 너를 죽이려 한다. 너의 재능과 지략이라면 어디 간들 못살겠느냐. 여기서 주저허다가 해를 당하기 보다 차라리 멀리 가서 큰 일을 도모하는 것이 좋을 듯 싶구나” 하였다.

  이에 주몽은 오이, 마리, 협보 등 세 사람과 벗이 되어 도망을 쳤든데 엄호수(일명 개사수, 압록강 동북방 지류)에 이르렀을 때 강을 건널 수 있는 다리가 없고, 뒤에는 그들을 추격하는 대소가 이끄는 부여의 군사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 때 주몽이 강을 향하여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자다. 지금 도망 중인데 뒤쫓는 자들이 추격해 오니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하고 외치니
  강 속에서 물고기와 자라가 물 위로 떠올라 다리를 만들었다. 그 덕분에 주몽 일행은 강을 건널 수 있었다. 그러나 물고기와 자라가 흩어지니 쫓아 오던 부여 기병들은 강을 건널 수가 없었다.

  주몽이 모둔곡에 이르러 세 사람을 만났는데 한 사람은 삼베옷, 또 한 사람은 납의(納衣: 장삼)을 입었으며 나머지 한 사람은 수초(水草)로 만든 옷을 입고 있었다. 주몽이 그들에게 “그대들은 어떤 사람이며, 이름은 무엇인가?” 하고 물었다.
  삼베옷을 입은 사람은 ‘재사’라고 했고, 장삼을 입은 사람은 ‘무골’이라 했고, 수초 옷을 입은 사람은 ‘묵거’라 하였는데 이들 모두 성은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주몽은 재사에게는 극씨, 무골에게는 중실씨, 묵거에게는 소실씨의 성을 지어 주면허 “ 나는 하늘의 명을 받아 나라의 기틀을 세우고자 합니다. 때마침 세 분의 현인을 만났으니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겠소?” 하고 말하였다.

  주몽은 재능에 따라 그들에게 일을 맡기고 그들과 함께 졸본에 이르러 그곳의 땅이 비옥하고, 산하가 험준한 것을 보고 마침내 그곳을 도읍으로 정하고, 국호를 ‘고구려(高句麗)’ 라 하고, ‘고(高)’ 를 성으로 삼았다. 그러나 미처 궁실을 짓지 못했기 때문에 비류수 가에 초막을 짓고 살았다.

  일설에는 졸본부여에 이르렀을 때 아들이 없던 그곳 왕이 주몽을 보자 비상한 사람임을 알아보고 자신의 딸을 그의 아내로 삼게 하였으며, 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고 한다.

  이야기는 다시 유리왕에게로 돌아간다.
  주몽이 떠난 뒤 부인 예씨는 아들을 낳았다. 이름을 유리(類利 또는 類留라 기록된 곳도 있다) 라고 지었다. 유리는 자라면서 ‘아비 없는 자식’ 이라고 손가락질을 많이 받았다.
  소년으로 성장한 어느날 유리가 참새를 잡으려다가 실수하여 물긷는 아낙의 물동이를 깨뜨렸는데, 그 아낙이 “아비 없이 자란 자식이라 돼먹지 못했다”고 꾸짖었다.

  이 말을 들은 소년 유리는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 예씨에게 아버지에 대해서 캐묻는다. 어머니 예씨는
  “네 아버지는 비상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 나라에서 네 아버지가 비상하기 때문에 용납하지 않아 남쪽지방으로 도피하여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되셨다. 네 아버지가 떠나실 때 내게 ‘당신이 만약 아들을 낳으면 나의 유물이 일곱 모 난 돌 위 소나무 밑에 숨겨져 있다고 말하시오. 만일 이것을 발견하면 곧 나의 아들일 것이오’ 하고 말씀하셨다.” 고 말하였다.

  어머니 예씨의 말을 들은 유리는 그날부터 소나무가 있는 온 산을 헤매며 아버지 주몽의 유물을 찾아 나섰으나 항상 찾지 못하고 지친 몸으로 돌아왔다. 그러던 어느날, 그날도 온 산을 헤매다가 지친 몸으로 집에 돌아와 마루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 때 유리는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는 바위 틈에 끼인 쇠붙이가 내는 소리 같았다. 그래서 그는 다시 일어나 마루에 털썩 주저앉는 동작을 해 보았다. 그 때 마다 같은 소리가 들렸다.

  한동안 같은 동작을 반복한 끝에 유리는 그 소리가 나는 곳을 알아냈다. 그 소리는 바로 기둥 밑둥과 주춧돌 사이에서 나는 것이었다. 유리는 주춧돌을 자세히 살펴보니 바로 일곱 모 난 돌이었다. 그래서 불현듯 아버지가 남겼다는 말을 떠올리고 기둥 밑을 조사하였다.
  과연 그곳에는 아버지 주몽이 남긴 징표가 있었다. 부러진 칼 조각이었다. 주몽은 가지고 있던 칼을 동강내어 그 한 조각을 징표로 감추어 놓고 나머지 한 조각은 가지고 간 것이었다.

  유리가 주몽이 감춘 징표를 찾아냈을 때는 이미 세월이 많이 흐른 뒤였다. 할머니 유화부인도 이미 죽었고, 음으로 양으로 예씨 모자를 보살펴 주던 금와왕도 임종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맏아들 대소가 실질적인 부여의 왕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대소가 군림하는 것은 예씨 모자에게는 생명을 위협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유리는 옥지, 구추, 도조 등 친구들과 의논한 후 어머니 예씨와 함께 고구려로 탈출할 것을 다짐하고, BC19년 4월 마침내 탈출에 성공하여 고구려로 왔다. 그리고 아버지 주몽 즉 동명성왕를 만났다.

  그 때 주몽은 중병에 걸려 생명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 있는 터인데, 본처 예씨와 아들 유리가 찾아오자 매우 기뻐하였고, 곧 예씨를 황후로, 유리를 태자로 봉하였다.
  이 과정에서 고구려 조정은 주몽의 의중을 알아차리고 유리의 태자 책봉을 찬성하는 유리파와 이를 반대하고 후처 소서노의 아들 비류온조를 지지하는 비류파로 갈라졌다.

  유리파는 주몽과 함께 망명한 오이, 마리, 협보를 비롯하여 대표적 무장 세력인 부분노, 부위염, 고구려의 토착 세력인 탁리, 사비, 설지 등이었고, 비류파의 주류는 소서노의 지지 기반인 계류부 출신의 관리들과 오간, 마려 등 중신들이었다.

  유리파와 비류파의 대립은 유리파의 승리로 끝났는데 그것은 고구려 개국이후 정권을 잡은 계류부를 이미 동명성왕, 주몽이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고, 나머지 네 부족(순노부, 소노부, 관노부, 절노부)도 역시 동명성왕를 지지하였으며, 주몽과 함께 망명해 온 오이, 마리, 협보 등이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 유리파가 승리한 주요 요인이었다.

  이렇게 해서 유리는 태자에 책봉되었다가 그 해(BC19년) 9월에 동명성왕이 죽자 뒤를 이어 즉위하여 고구려 제2대 유리왕 되고, 소서노와 두 아들. 비류와 온조를 비롯하여 오간, 마려 등 10명이 자신들이 머물 곳을 찾아 남쪽으로 떠나 결국 온조는 소서노를 모시고 하남위례성에 백제국(百濟國)을 세운다.

  비류파가 남쪽으로 떠날 때 많은 졸본의 백성들이 따라 나섰다. 이 때문에 민심이 이반되어 유류가 즉위한 후에도 백성들의 호응을 얻지 못해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고 급기야는 도읍을 졸본에서 위나암으로 옮기게 된다.

  또 유리가 즉위한 후 고구려 조정은 한차례 정쟁을 치루는데 조정을 장악하려는 유리왕과 이를 저지하고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개국공신들과의 사이에 기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유리왕 이를 타개하는 한 방편으로 유력자 또는 개국공신과의 혼인을 통한 유대강화를 꾀한다.

  유리왕이 재위에 오른 이듬해(BC18년) 7월 다물후(多勿侯) 송양의 장녀를 황후로 맞아들여 지지기반을 강화한다. 동명성왕 최초로 담판으로 합병한 비류국을 ‘다물도’로 개명하고, 비류국의 임금이었던 송양을 '다물후(多勿侯)'에 봉하여 자치지역을 통치하게 함으로서 동명성왕의 측근 중의 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유리왕도 그 집안과 혼인하여 외척으로 만드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 한 것이다.

  그러나 황후가 된 송양의 장녀 송씨는 시집 온 이듬해 10월에 장자 도절을 낳고 사망한다. 그러자 유리왕은 다시 송양의 둘째 딸을 황후로 맞아들인다. 두 번째 황후가 된 송양의 둘째 딸에 관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고, 서기4년(유리왕23년)에 태어나 제3대 대무신왕이 된 무휼의 어머니가 ‘송양의 딸’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제1황후 송씨(송양의 장녀)는 이보다 21년 전인 BC17년에 사망하였기 때문에 대무신제 어머니 송씨는 송양의 둘째 딸로 제2황후가 된 것으로 보는 것이다.

  당시 풍속으로는 자매가 한 사람에게 시집가는 경우는 허다했기 때문에 있을 수 있는 일이며, 제2황후가 언제 입궁했느냐 하는 것은 기록이 없으나, BC12년에 제2자 해명이 태어난 것으로 보아 그 이전일 것이며, 제1황후 사망 직후 입궁하여 언니가 낳다 죽은 장자 도절의 이모로써 맡아 키우다가 유리왕과 혼인하여 제2황후가 되었을 것으로 보고있다.

  제2황후 송씨는 태자로 봉해진 후 아버지 유리왕에게 죽임을 당하는 제2자 해명, 제3대 대무신제가 된 제3자 무휼, 제4자 여진, 제4대 민중왕이 된 제5자 해색주, 제6대 태조의 아버지가 된 제6자 재사 등 다섯 아들과 우씨의 아내가 된 1녀를 낳았다.

  그 외에도 유리왕은 지지기반을 다지기 위하여 유력한 개국공신들과 혼인관계를 맺는다. 유리왕은 제1황후가 사망한 해인 BC17년 10월에 2명의 후궁을 맞아 들이는데, 화희(禾姬)치희(雉姬)다. 화희는 골천 출신이고, 치희는 한나라에서 망명하여 고구려 땅에 와서 살고 있는 한인(漢人)의 딸이다.

  화희의 고향 골천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당시 고구려의 행정단위 명칭이 대개 ‘곡’. ‘천’ 이었다고 하니까 골천은 고구려 행정구역의 하나였을 것으로 보며, 화희는 골천의 유력자 집안의 딸이라고 보고 있다.
  화희가 유력자의 딸이었을 것이라 보는 것은 유리왕이 사냥을 나간 사이 화희가 치희를 친정으로 내쫓아버렸지만 유리왕은 화희에게 아무런 벌도 내리지 않은 사실로 입증되고 있다.

  화희와 치희 간에는 불화가 잦았다. 그래서 유리왕은 양곡에 동궁과 서궁울 따로 지어 두 여자를 따로 거처하게 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유리왕이 사냥을 떠난 사이에 회희와 치희 간에는 큰 싸움이 벌어졌는데 말다툼 중에 하희가 치희에게
  “네년은 한인(漢人)의 집에 살던 비첩인 주제에 어찌 이토록 무례할 수 있느냐?” 고 하면서 치희를 모욕하는 심한 욕설을 퍼부었다.

  당시 고구려 사람들은 그곳에 와서 살고 있는 한인(漢人)을 몹시 천하게 여겼는데 이는 한나라가 한사군을 설치하는 등 우리 민족의 강역을 침범하였기 때문에 한나라에 대한 적개심이 팽배해 있었고, 자기나라(한나라)를 떠나 온 망명인에게 ‘배반자’라는 좋지 않은 인상을 가지고 잇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구려의 유력자의 딸도 아니고, 고구려 사람들에게 천대를 받던 한인의 딸인 치희가 유리왕의 후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특출한 미색(美色) 때문이었다. 그래서 천한 신분에도 불구하고 유리왕은 하희보다 치희를 더 총애하였다.

  이를 참지 못한 하희는 유리왕이 사냥 나간 사이 치희에게 위와 같은 모욕적인 욕설을 퍼 부었고, 화희로부터 모욕적인 욕설을 받은 치희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그녀의 친정으로 가버렸다.

  치희를 뒤쫓아 간 유리왕은 돌아올 것을 간청했으나 그녀를 설득하지 못하고 허탈한 마음으로 혼자 환궁 길에 올랐다. 돌아오는 도중 어느 나무 밑에서 쉬고 있는데 꾀꼬리 한 쌍이 다정하게 노니는 풍경을 보고 자신의 외로운 마음을 짤막한 시 한수로 읊었는데 후세 사람들이 이를 ‘황조가(黃鳥歌)’ 라 불렀다.

「펄펄 나는 꾀꼬리는 암수 서로 정다운데, 외로울 사 이내 몸은 뉘와 함께 돌아갈꼬」
(翩翩黃鳥 雌雄相依 念我之獨 誰基與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