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
沙月 李盛永
<상 황>
  Walker선(낙동강전선)에서의 부산교두보작전
Walker선(낙동강전선) 방어작전도
낙동강전선의 상황과 인천상륙작전 비판자 들에 대한 대답
  후퇴한 국군, 지원된 UN군, 경찰, 학도병, 피난민들이 가뭄에 물웅덩이가 말라 오갈 데 없는 올챙이 신세가 되었던 풍전등화의 상황이다.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이라는 예리한 비수를 북괴군 아니 김일성의 등 뒤에 꽂고, 이 급박한 상황에서 대한민국을 구출하였다.
  그 현장을 기념하기 위하여 동상하나 세워 놓은 것을 눈에 가시처럼 생각하고 철거하겠다고 날뛰는 불한당들! 소위 전국민중연대, 통일연대, 한총련 등. 이들을
‘빨갱이’, ‘김정일 앞잡이’란 말 외에는 다른 표현할 말이 없다.

  “남의 집안싸움인 통일내전(한국전쟁)에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전쟁은 한달 이내에 끝났을 것”, “맥아더는 (한국민)의 생명을 앗아간 원수” 라는 동국대 강정구라는 자의 실성한 말에는 더 할 말을 잃고, 그저 하늘만 쳐다보고 웃어야 할 판이다.
  그는 왜
 ‘2차세계대전 때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더라면 히틀러 나치 통일 하에 그 때 이미 구주연합국이 탄생하였을 것’ ,
  '김일성이 적화야욕으로 남침하지 않았더라면 한국전쟁을 없었을 것이며 수백만 동포가 서로 죽고, 죽이는 참상은 없었을 것'
 ‘중공군이 한국전쟁 막바지에 개입하지 않았더라면 한반도는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으로 통일되고, 지금의 북한지역 주민의 기아(飢餓)로 쪽박차고 온 세계에 양식 구걸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며, 이미 선진국에 진입하여 남부럽지 않게 잘사는 나라가 되었을 것’

 이란 당연한 말들은 모르는가? 안하는가?

인천상륙작전계획 상황판단
  연합군은 8월 말 이래 Walker선(낙동강전선)의 강력한 방어진에서 지연전을 종결시키고, 공세적 방어작전으로 북괴군의 인적, 물적 소모를 강요한 후 다음과 같은 이유로 반격이 가능하다고 판단하였다.
  (1) 적 보급로의 신장(伸長)
  (2) 적 정예부대의 소실(消失)
  (3) 적 후방 예비대의 전무(全無)
  (4) UN군의 절대적인 제공(制空), 제해(制海)권 장악

  MacArthur(맥아더) 장군은 7월 이래 제한된 병력을 신중히 전선에 충당하면서 상륙전을 위한 병력을 모으고, 훈련을 시켰다.

  대부분의 참모장교들은 인천은 심한 조수간만의 차이와 지형관계로 대부대의 상륙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인천에서 상륙작전을 감행키로 결심을 하였다.
  (1) 수도 서울이 20마일 내에 위치, 신속히 서울을 수복함으로서 얻을 수 있는 심리적효과 지대(至大)
  (2) 인천 정면의 적 방비가 극히 미약(微弱)
  (3) 소수병력의 상륙으로 남한에 투입된 적의 대병력을 후방차단(後方遮斷) 가능
  (4) Walker선(낙동강전선)의 전투 계속은 소득 없이 출혈만 강요(出血强要)

<쌍방의 병력>
  북괴군: 인천지역에 병력 9,000명, 해안포와 대공포병 약간, 서울지구: 제18사단, 제31여단(-) (1개대대가 경인지구에 배치)
  U N 군: 미군 제10군단(E.M.Almond 소장) 예하 미 제1해병사단(O.P.Smith 소장), 미제7보병사단(D.G.Barr 소장), 영국 해병여단, 한국군 보병제17연대(백인엽 대령), 한국군 해병제1연대(신현준 대령), 지원해군 등 병력 75,000명

<작전계획>
  양동(揚動): 해군부대로서 부산→삼척 해상이동
  양공(揚攻): 서해안: 군산, 목포, 동해안: 영덕 남북방에 한국군해병으로 기동
  주공(主攻): 인천 월미도를 중심으로 북부(Red Ridge), 남부(Blue Ridge)
  상륙기동부대(LTF): 미 해병 1사단,
        미국 제5해병연대: Red Ridge 상륙해안
        한국군 제1해병연대: Blue Ridge 상륙해안
        Taplettqneo(특공대): 월미도
  제1단계작전(O-1): Red Ridge로 월미도 점령
  제2단계작전(O-2): Blue Ridge로 인천반도 점령
  후속부대: 미군 제7사단, 한국군 제 17연대
  D일 H시: 1950. 9. 15. 05:00(만조시간 전)

<작전경과>
  인천상륙작전
  1950년 9월 12일 부산을 출발한 상륙기동부대 선단은 9월 13일 영종도에 집결하여 대안(對岸) 함포 포격과 구축함에서의 항공유도로 200대의 함재기가 출격하여 적 포대를 철저히 격파하고, D일 맥아더 사령관의 참관 하에 미군 제5해병연대는 28분 만에 월미도를 탈취하고, 한국군 제1해병연대는 18:00-21:30간에 상륙을 완료하였다.

  9월 16일 상륙부대들은 Tank를 선두로 부평으로 향하고 후속 한국군이 인천지역 소탕작전 실시. 이후 미군 제1해병사단은 경인가도를 따라 서울로 향하고, 미군 제7사단은 남쪽으로 수원을 향해 진격하였다.

  9월 20일 한강선에 도달한 UN군은 21일 06:00에 한강을 도하(渡河), 한국군 제17연대는 9월 24일 인천에 상륙한 후 미군 제7사단과 협동작전을 하다가 9월 25일부터 서울 시가전에 참가하여 1950년 9월 28일 수도 서울을 완전히 탈환하였다.

  Walker선(낙동강전선)에서의 총반격
  인천상륙작전에 호응하여 미 제8군사령관 Walker중장 지휘하의 낙동강전선 UN군은 1950년 9월 16일을 기해 총반격을 개시, 최초 3일간의 격전 후 9월 18일 경부가도를 주축으로 돌파작전으로 적진을 돌파하고 북진 개시.
  미군 제1군단(F.W.Milbun 소장): 미제1기갑사단, 미제24보병사단, 한국군제1사단, 영제27여단으로 경부가도를 따라 진격(주공)
  미군 제9군단(J.B.Coulter 소장): 미제2사단, 미제5사단으로 9월23일 반격을 개시하여 서부 호남지방으로 진격(조공)
  한국군 제2군단(유재흥 준장): 한국군 제6사단, 제8사단으로 중부 산악지역으로 진격(조공)
  한국군 제1군단(김홍일 소장): 한국군 수도사단, 제3사단, 제7사단으로 동부 해안을 따라 진격(조공)

  1950년 9월 26일 23:45. 서정리(현 평택시 원곡면, 송탄 남쪽)에서 미군 제 7사단과 미군 제1기갑사단이 연결작전을 함으로서 낙동강 전선에 투입되었던 북괴군 8개 사단의 퇴로가 완전 차단되고, 독안에 같인 쥐가 되어 상당기간 후방지역을 시끄럽게 하였다.
인천상륙작전- Walker선(낙동강전선)반격, 연결작전 상황도


  1950년 10월 1일 한국군 제3사단이 동해안에서 38선에 도달하였다.
(이 날을 기념하여 '국군의 날'로 정했는데, 그 때 우리와 함께 이 전사도 배웠던 표모라는 자는 국군의 날을 바꿔야 한다고 떠들고 다닌다. 38선을 돌파한 날이 저들에게는 기념할 날이 안되겠지. 그도 분명 불그스럼 아니 샛빨갛기 때문이 아닐까?)

<작전결과>
  (1) 남한에 투입된 북괴군 약 6개 사단의 병력이 남한 땅에서 괴멸되었다.
  (2) 북괴군은 막대한 무기와 장비의 손실을 입었다.
  (3) 김일성의 남한 점령과 적화통일 야욕이 좌절되었다.
  (4) 북괴군은 이후 전쟁 지속 능력과 전쟁의지를 동시에 상실하였다.
  (5) UN군은 전과확대 내지는 추격작전 등 가벼운 작전으로 압록강-두만강 국경으로 진격할 수 있었다.
38선 돌파후 압록강-두만강 국경으로 의 진격 상황도
그러나 무지막지한 중공군의 개입으로 통일을 목전에 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