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가계(張家界) 그 이름에 얽힌 역사 이야기

沙月 李 盛 永

 

기원전 256년부터 195년에 살면서 한(漢)나라를 세운 한고조(漢高祖)는 본명이 유방(劉邦)이고, 지금의 강소성 패현(沛縣) 사람으로 진나라 2세 황제 때 기병(起兵)하여 함양(咸陽)을 빼앗아 한왕(漢王)이  되었다.

 

동 시대에 기병한 초패왕(楚覇王) 항우(項羽)에게 늘 밀리다가  해하(垓下: 안휘성 봉양부 영벽현) 싸움에서 결정적으로 그를 격파하고 천하를 통일하여 도읍을 장안(長安: 지금의 西安)에 잡고 나라 이름을 한(漢)이라 부르니 한은 곧 중국을 말하는 대명사처럼 되었다. 한족(漢族), 한문(漢文), 한자(漢字) 등이 그것이다.

 

한고조를 도와 진나라와 초패왕 항우를 격파하고 중국을 통일하는데 큰 공을 세운 장량(張良: 戰略), 소하(蕭何: 內政), 한신(韓信: 作戰指揮) 세 사람을 한고조 삼걸(三傑)이라 부른다.

 

한고조 삼걸 중 장량(張良)은 자를 자방(子房)이라 하고 시호가 문성(文成)인데 그 선조는 한(韓)의 사람이다. 진시황(秦始皇)이 한을 멸하자 이를 보복하고자 창해역사(倉海力士)를 시켜 박량사(博良沙)에서 진시황을 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변성명하여 하비(下邳)에 숨어 살 때 황석공(黃石公)이라는 한 노인으로부터 태공망(太公望: 강태공)의 병서(兵書)를 얻어 전략에 능하게 되었다.

 

초패왕 항우와의 결전 해하싸움에서 장량은 옥피리로 슬픈 곡조를 불어서 이를 들은 항우의 정예 호위군 8,000명이 모두 고향의 부모를 생각하고 도망가게 만드는 심리전을 벌리기도 하였다. 그 공으로 장량에게는 삼만호의 식읍까지 내리는 은전을 베풀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병을 핑계로 한고조를 떠났는데 사람들은 적송자(赤松子: 신선)를 따라 갔다고 말한다.

 

한고조가 중국을 통일한 후 그 부인 여후(呂后)의 모략으로 한고조 삼걸의 나머지 두 사람 소하, 한신(고조 11년)이 한고조에 의하여 죽임을 당했다.

 

임관40주년기념 행사의 일환으로 2002. 9. 9-16 간에 실시한 중국여행 때 9월 11일과 12일에 장가계 산수를 구경하였다.

여행 일정표에서 장가계란 말이 있어서 지명 치고는 좀 특이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러려니 했는데 여행 중에 가이드의 설명과 안내간판 및 팜플릿에서 그 이름이 한자로는 張家界이고, 위 한고조 삼걸의 하나였던 장량(張良)과 관련이 있음을 알고 더욱 흥미를 갖게 되었다.

 

그것은 내가 어린 시절에 선친께서 하시는 한고조의 천하통일과 관련된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는데 그 이야기 속에 장량이 자주 등장했었다. 그 중에 기억 나는 한가지-  한고조 유방이 초패왕을 격파하고 천하를 통일한 후 어느날 그 동안 함께 고생한 신하들을 위안하는 연회가 열렸는데 한창 흥이 고조에 달했을 때 한고조가

대저 장막 안에서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을 실천에 옮겨 천리 밖의 전선에서 승리를 걷우게 하는 참모적인 재능에는 내가 자방(子房: 장량의 자)만 못하고(夫運籌유幄之中 決勝千里之外 吾不如張良 부운주유막지중 결승천리지외 오불여장량), 국가를 다스려 백성을 어루만지고 군량을 전선에 공급하여 양도를 한 번도 끊이게 하지 않은 내정이나 병참적 기량에서는 내가 소하만 못하고(鎭國家撫百姓 給궤餉不絶糧道 吾不如蕭何 진국가무백성 급궤향불절양도 오불여소하), 백만대군을 이끌고 싸우면 반드시 이기고 공격하면 반드시 취하는 실전적인수완에서는 내가 한신만 못하다.(連百萬之衆 戰必勝攻必取 吾不如韓信 연백만지중 전필승공필취 오불여한신) 그런데 왜 나는 황제가 되고 경들은 내 밑에 있는가?

라는 질문을 던졌는데 이 때 장량이 나서서

그것은 폐하께서 이런 저런 재주를 가진 사람들을 믿고 일을 맡기고, 그들로 하여금 열성을 다하여 일 할 수 있도록 하는 더 큰 재주(지도력)을 가지셨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다는 이야기가 지금까지 나의 기억에 남아 있다.

 

중국 호남성 서북쪽 한 구석에 위치한 장가계(張家界)는 3억8,000만년 전에 바다였던 곳이 융기하여 해발 1,500m의 고원지대가 만들어졌는데 장구한 세월에 걸쳐 퇴적암(堆積岩) 중 역암(礫岩), 사암(沙岩), 석회암(石灰岩) 등 약한 부분이 깎여 나가고 단단한 이암(泥岩) 부분만 남아서 78,000개의 각가지 물형석(物形石)과 기암봉(奇岩峰)들을 만들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그래서 예로부터 이 곳을 신선들이 산다는 낙원(파라다이스) 무릉도원(武陵桃源)이라 불렀고, 지금은 다른 곳에 도원(挑園)이 따로 있다 하여 무릉원(武陵源)이라 부른다고 한다.

 

바로 이 곳에 한고조 삼걸의 한 사람 장량의 묘가 있다. 원앙(鴛鴦)계곡 입구, 그러니까 지난 8월 달에 준공했다는 백룡전제(百龍電梯: 높이 335m의 세계제일의 엘리베이트)에서 가깝다.

 

가이드 설명에 따르면 장량은 한고조가 중국 천하를 통일한 다음 미리 앞날을 내다보고 자기에게 주는 삼만호 봉토도 사양하고 병을 핑계하여 은퇴한 후에 바로 이 곳에 와서 신선처럼 살았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이 지역의 주인으로 행세하던 토가족(土家族: 중국 56개 소수민족 중의 하나지만 이 곳에서는 지금도 장가계시 인구 150만의 66%인 98만명)의 거부반응 이 거세었으나 장량은 수차(水車)를 고안하여 그들의 농사에 큰 보탬을 주는 등의 노력으로 차츰 토가족의 신임과 숭앙을 받게 되었다 한다.

 

소하, 한신 등을 모함하여 죽이게 한 여후는 장량도 없애야겠다는 생각으로 한고조에게 장량이 반역할 것이라고 모함하여 정벌하도록 꾀어 한고조는 장량도 채포하고 토가족도 정벌할 생각으로 이 곳을 침공하였다.

 

그러나 용감한 토가족은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면서 장량을 중심으로 일치단결하여 끝까지 저항함으로써 결국 한고조도 이들을 정복하지 못하고 체면상 이 곳이 ‘장량 일가의 땅(張家界)’으로 인정하고 물러 갔다고 한다. 그래서 이 곳 지명이 ‘장가계(張家界)’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장량은 전쟁에서도 앞 일을 잘 내다보고 전략을 세웠지만 개인의 앞날도 잘 볼 줄 아는 명철(明哲)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 선조들도 그의 혜안(慧眼)을 존경하여 많은 시조에서 그를 칭송하는 글들을 많이 남겼다. 몇 가지만 싣는다.

 

장량을 칭송한 시조

張良(장량)의 六鞱三略(육도삼략) 그 뉘게 배웠던고

金椎一聲 (금추일성)에 四海(사해)가 봉기하니

祖龍(조룡)의 놀란 魂魄(혼백)이 半生半死(반생반사) 하거라.

장량의 육도삼략(전략)은 그 누구에게서 배웠던고

진시황을 친 쇠방망이의 한 소리에 온 세상이 벌떼처럼 일어나니

진시황의 놀란 혼백이 반은 살고 반은 죽었도다.

 

鷄明山(계명산) 玉蕭(옥소) 부러 八千弟子(팔천제자) 흣튼 후에

三萬戶(삼만호) 辭讓(사양)하고 赤松子(적송자)를 좇아 노니

아마도 見機明哲(견기명철)은 子房(자방)인가 하노라.

계명산에서 옥피리를 불어서 항우의 팔천 군사를 흩어지게 하고

그 공으로 내리는 삼만호의 봉토도 사양하고 신선 따라 노니니

아마도 기회를 볼 줄 아는 밝은 현인은 장자방인가 하노라.

 

古今(고금) 人物(인물) 혜어보니 명철보신(明哲保身) 그 뉘런고

張良(장량)은 謝病僻穀(사병벽곡)하야 赤松子(적송자)를 조차 놀고,

氾蠡(범여)는 五湖烟月(오호연월)에 吳王(오왕)의 亡國愁(망국수)를 扁舟(편주)에 싣고 오니

아마도 이 둘의 高下(고하)를 나는 몰라 하노라.

고금의 인물을 살펴보니 총명하게 처신한 사람이 누구인가

장량은 병을 핑계로 벼슬을 사양하고 은퇴하여 곡식을 먹지 않고 신선을 따라 놀았고,

범여는 오호의 은은한 달빛 아래 놀면서 오왕(부차)의 망국한은 조각배에 싣고 오니

아마도 이 두 사람의 높고 낮음을 나는 모르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