自嘆(자탄)

예순(禮順) 비구니 작

祗今衣上汚黃塵(지금의상오황진)

何事靑山不許人(하사청산불허인)

寰宇只能囚四大(환우지능수사대)

金吾難禁遠遊身(금오난금원유신)

 

혼자 탄식함

어느새 이 몸 풍진에 더럽혔느니

청산마저 이 몸을 싫다는구나

하늘 땅 넓다 해도 이 몸 하나 둘 곳이 없네

금오랑 넨들 어찌 멀리 멀 리 떠도는 이 몸 잡을 수 있으리

 

  이 시는 기구한 운명으로 비구니(比丘尼: 여승)가 되었는데 운명은 끝나지 않고 또 불가(佛家)와 천륜(天倫)의 정(情) 사이에서 고뇌(苦惱)하게 하는 마음을 표현한 시다.

 

  조선 광해군의 난정(亂政)과 패륜(悖倫)에 반기를 들고 반정(反正: 혁명)을 도모하여 성공한 것이 인조반정(仁祖反正)이다. 반정을 주모(主謀)하여 성공으로 이끄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은 평산부사(平山府使)로 있던 이귀(李貴)의 부자들이다.

 

  인조반정이 성공한 후 인조 1년에 시행된 정사공신(靖社功臣) 책록에 정공신(正功臣)으로 이귀(李貴: 1등), 장자 이시백(李時白: 2등), 삼자 이시방(李時昉: 2등) 삼부자가 포함되었고, 차자 이시담(李時聃: 出系)은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이귀의 딸은 훗날 반정동지가 된 김자점(金子點)의 동생 김자겸에게 출가하였으나 남편이 일찍 죽고 과부가 되었다가 불문에 입문하여 비구니가 되어 니명(尼名)을 예순(禮順)이라 불렀다. 재색(才色)을 겸비하고 어려서부터 글을 배워 시문이 상당한 수준에 올라 있었다.

 

  예순비구니는 자주 궁중에 드나들게 되었는데 궁인들이 예쁘고 글 잘하는 이 여승을 공경하고 따랐다. 특히 광해군의 애첩 김상궁(金介屎)이 이 여승을 무척이나 총애하면서 자주 불러서 이야기를 나누며 가까이 지냈다.

 

  김상궁으로 말하면 원래 선조(宣祖)에 의하여 임란 때 의주 파천 길에 발견되어 총애를 받다가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면서 광해군의 애첩이 되어 궁중의 실질적인 안주인 노릇을 하면서 이이첨, 박승종 등과 결탁하여 매관매직 등 온갖 비리로서 재물을 모으고 권세를 부렸기 때문에 광해군 난정과 패륜의 가장 큰 원흉이 되고있었다.

 

  반정이 일어나기 하루 전날 어떤 사람의 고변으로 반정모의가 들통나고 이귀 등 주모자를 잡아들이라는 명이 떨어졌다. 궁중에 들러 이 사실을 알게 된 예순비구니는 장문의 글을 써서 아버지 이귀가 억울하게 모함을 당하고 있다는 거짓 편지와 함께 아버지 이귀의 임금에 대한 충성심을 노래한 애절한 시를 김상궁에게 보냈다.  편지와 시를 받아본 김상궁은 그 글에 매혹되어 사실로 믿고 즉시 광해군에게로 달려가 편지와 시를 보이면서 광해군으로 하여금 이귀 등의 채포령을 철회하도록 설득하였다.

 

  자칫 차질을 초래할 뻔했던 반정모의는 예순비구니의 거짓편지와 시에 힘입어 계획대로 진행되고 다음날 새벽녘에 반정군이 창의문(자하문)으로 들이닥쳐 성공하게 된 것이다. 김상궁은 즉시 잡혀 효시되었고, 광해군은 잡혀 교동으로 부처되었다가 정묘난이 일어나자 제주도로 이송되어 거기서 죽었다. 뿐만 아니라 이이첨, 박승종 등 광해군의 난정에 직간접으로 연루된 많은 사람들이 처형되거나 귀양을 갔다.

 

  예순비구니는 불가에 귀의한 몸으로서 이러한 소용돌이치는 역사의 현장 복판에 서게 되어 천륜의 부녀지정을 끊지 못하고 아버지를 도운 결과 때문에 번뇌에 싸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시의 첫 구절은 자기의 (衣上)이 이미 황진으로 더럽혔다는 죄책감에 젖어 있음을 읊고 있다.(祗今衣上汚黃盡)

 

  그렇게 더럽힌 (人)을 그가 가장 가까운 친구로 생각해온 청산(靑山)마저 싫어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사람이 사물을 본다는 것이 결국 자기자신의 마음을 사물에 비춰 보는 것이니 자연 청산이 자기를 싫어하고 허락하지 않는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何事靑山不許人)

 

  그러니 하늘과 땅, 온 우주가 지극히 넓고 못 이루는 것이 없이 능하다고는 하지만 어느 곳에도 이 한 몸과 마음을(四大) 붙잡아 둘(囚) 곳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寰宇只能囚四大)

 

  이렇게 몸과 마음을 한 곳에  잡아두지 못하고 멀리 멀 리 떠돌게 되니 아무리 죄인을 잘 잡아들이는 금오랑(金吾郞: 의금부 도사, 지금의 민완 형사)인 들 나를(身)를 잡을 수(禁) 있겠는가(金吾難禁遠遊身)하며 탄식을 하고 시는 끝난다.

 

  *사대(四大): 불가에서 이 세상 만물을 이루는 근본을 지(地), 수(水), 화(火), 풍(風) 네 가지로 보며 사람의 몸도 이들 네 가지로 이루어졌다 하여 사대(四大)라고 한다.

 

  그 후 예순비구니는 도봉산 동북쪽 사패산 동남 회룡골에 위치한 회룡사(回龍寺)의 주지가 되어 인조 8년(서기1630년) 절의 5창(五脹: 다섯 번 째 확창사업)에 힘 쓴 것도 그의 죄책감을 조금이나마 회개하는 뜻에서일 것이다.

 

  * 회룡사 창건역사를 설명한 간판에 ‘조선 인조 8년 (서기1630년) 예순(禮順)비구니 5창(五脹)’으로 기록되어 있음.

 

  근대사에서 일본제국주의 앞잡이로 민족에게 해독을 끼치거나 해방 후 독재자에 빌붙어 알게 모르게 남에게 폐를 끼치고도 그 사실 조차도 알지 못하고 고개를 치켜들고 다니는 부류가 얼마나 많은가!

 

  이에 비하면 이 시의 주인은 불가(佛家)에 귀의(歸依)한 몸으로 천륜(天倫)의 정(情)을 끊지 못하고 아버지를 위급(危急)에서 구한 것을 두고 번뇌하는 모습을 이 시는 보여주고 있다. 우리 범인들이 보기에는 당연한 일이요 잘 한 일로 생각되며 역사는 인조반정을 옳았던 사실로서 기록하고 있는데 말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