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정요(貞觀政要)
沙月 李 盛 永(2007.3.10)
    요즈음 중국의 소위 ‘동북공정’으로 우리의 고조선, 고구려, 발해 역사를 통째로 탈취해 가려는 기도에 자극을 받았기 때문인지 TV 3사가 경쟁이라도 하듯 고구려-발해 때 이야기를 드라마로 엮어가고 있다. 맨 먼저 시작한 MBC TV는 월, 화 드라마로 ‘주몽’, 그 후발로 SBS TV와 KBS 1TV는 토, 일 주말드라마로 ‘연개소문’‘대조영’을 방영하고 있다.

    ‘주몽’은 고구려를 건국하는 과정이니까 시대적으로 좀 앞서지만, ‘연개소문’과 ‘대조영’은 약간의 연대가 차이 날 뿐 비슷한 시대를 배경으로 비슷한 주인공들이 등장하기 때문에 드라마 내용을 갖고 헷갈릴 때가 많다. 더구나 방영시간도 저녁 9시와 10시로 약간의 시간이 겹치고 있어 두 가지를 다 시청하려면 ‘연개소문’이 끝나자 마자 다음이야기를 접고, 곧바로 채널을 바꿔도 ‘대조영’이 이미 시작하여 조금 진행된 상태이다. 시청자에 대한 배려는 없고, TV 3사 입장만 고려한 탓으로 생각된다.

    또 ‘연개소문’은 고구려 장수를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인데 거의 반 정도의 장면이 중국 즉 수나라와 당나라에 관한 이야기로 전개된다.
    달반 전 어느 주말에는 당나라 고조 이연의 아들들의 정쟁에 관한 이야기가 방영되었는데, 장남 태자 건성(健成)과 4자 제왕(齊王) 원길(元吉)이 합심하여 2자 진왕(晉王) 세민(世民)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민이 간파하고 선수를 쳐서 태자와 제왕을 주살하고 태자의 책사 위징(魏徵)을 색출해 참살하라고 명했다가 위징의 의젓한 태도와 조리 있는 대변에 태종의 마음이 동하여 위징을 죽이지 않고, 자기의 신하로 만드는 과정이 나온다.

    당나라 건국 후 제2대 황제 자리를 놓고 형제간에 세력투쟁을 할 때 책봉된 태자 건성에게는 위징이 책사로 있었고, 제2자 진왕 이세민에게는 방현령(房玄齡)이 책사로 있었다. 세력투쟁에서 승리한 진왕 이세민은 정적이던 태자의 책사 위징도 포섭하여 방현령과 함께 이들의 올바른 말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황제 재위기간 627년-649년, 24년간 후세 사가들이 소위 ‘정관(貞觀)의 치(治)’라 칭송하는 정치철학의 황금시대를 이룩한다.

 ‘정관(貞觀)’은 당 태종 재위기간 24년 동안의 연호(年號)이다. 중국의 역대 왕조의 연호를 보면 ‘연대를 구분하기 위한 것’ 이상의 의미 즉 ‘국정지표(國政指表)’와 같은 뜻을 가지고 있다. 요즈음 우리나라 정권들이 내거는 슬로건으로 ‘문민정부’니, ‘국민의 정부’니, ‘참여정부’니 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한 황제가 재위 기간 1개의 연호만 갖는 것은 아니다. 당 고종의 경우 재위기간 34년 동안에 모두 14개 (永徽 6년, 顯慶 5년, 龍朔 3년, 麟德 2년, 乾封 2년, 總章 2년, 咸亨 3년, 上元 2년, 儀鳳 3년, 調露 1년, 永隆 1년, 開耀 1년, 永淳 1년, 弘道 1년)의 연호가 제정된다

    정관(貞觀)은 ‘신하와 백성의 소리를 똑바로 들어 세상을 곧게(貞) 본다(觀)’는 뜻이다. 당나라가 한(漢)나라 이후 500여년간의 혼란을 수습하여 중국을 통일하고, 300여년 간의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웠던 것도 초창기 ‘정관의 치’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사가들은 평가하고 있다. 이러한 찬란한 당나라 문화는 중국에 국한되지 않고 우리나라의 신라, 백제, 고구려 문화, 일본의 나라(奈良)와 헤이안(平安) 문화 등 동양 제국의 문화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당나라는 '하늘에서 귀양온 시선(詩仙)'이란 뜻으로 '적선(謫仙)'이라 한 이백(李白: 李太白)과 또한 '시성(詩聖)'이라 불리던 두보(杜甫: 杜子美)를 낳았고, 중국 문학의 황금기, 당(唐)-송(宋)대의 여덟 문장가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한유(韓愈: 韓退之)유종원(柳宗元)이 당나라가 낳은 문장들이다.

    이들은 우리나라 조선조 글하는 선비들의 귀감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일반 서민들에게도 선망의 대상이었다. 어머니가 어린 아기에게 불러주는 자장가 중에 "동방삭이 명을 주고, 석숭이 복을 주고, 이태백이 글을 준다" 하는 구절이 있다. 내가 어릴 때도 어머니가 어린 동생들을 재우면서 부르는 것을 많이 들었다.
    시문학 뿐만 아니라 조정과 지방 관제, 관혼상제 의식 등 많은 제도와 문물이 당나라의 것을 따 온 것이 많다.

    당태종은 24년간 재위에 있었는데 이 때가 당나라의 기틀을 잡는 시기로 후세의 사가나 정치평론가들로부터 ‘총명신무(聰明神武)’라는 찬사를 들을 만큼 훌륭한 군주로 기록되고 있다.
   이는 수나라 말기 혼란한 군웅할거 시대를 평정한 뛰어난 전략가이기도 하지만, 재위기간 동안에 뛰어난 관제(官制)를 확립하였고, 간의대부(諫議大夫)에 위징(魏徵)을 임명하는 등 적재 적소에 인재를 등용하여 기탄 없는 간언을 서슴없이 수렴하는 등 선치의 결과인 것이다.

    당태종은 진시황이나 한무제가 신봉했던 신선(神仙) 따위의 생각을 배격하고, 스스로는 유교(儒敎)정신에 입각하여 치국(治國)의 방침을 굳히고, 유학의 학문적 소양이 높고, 정치의 본질을 아는 자들로 하여금 국사를 맡도록 하였다.
    이러한 태종의 면모를 보여주는 사건으로
    (1)즉위 초기에 수나라 신하로써 수양제 시역(弑逆)에 가담했던 자들을 모조리 죄인으로 다스린 것과
    (2)유학의 경전인 오경(五經: 詩經, 書經, 易經, 春秋, 禮記)을 학자들로 하여금 알기 쉽게 정리하여 「오경정의(五經正義)」를 펴내 널리 보급한 것.(드라마에서 도교를 당나라 국교로 삼고, 고구려에 신봉하도록 강요하는 장면은 좀 이해가 안간다.)
    (3)또 궁녀 3천을 방귀(放歸: 궁을 내보내 귀가 시킴) 시키고 무고한 백성이 벌받지 않게 한 것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태종에게도 실수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고구려 정벌에 나선 것이 대표적인 예다. 고구려 정벌을 실패한 후 깊은 회오에 빠져있었다고 한다. 그렇게도 신뢰했던 위징이 죽은 후 도리어 불신하여 '고구려 정벌은 말리지 못했다' 는 문책으로 그의 묘비를 철거시켰다가 다시 세워주기도 했다고 한다.

    당태종이 죽은 후 50년쯤 뒤에 오긍(吳兢)이란 역사가가 당태종 시대의 정치철학을 정리하여 전 10권 40편에 달하는 책을 펴내어 「정관정요(貞觀政要)」라 하였다. 당태종과 신하들 특히 위징, 방현령 등과 정치에 관하여 주고 받는 대화형식으로 집필하였다
    태종과의 대화 상대로 나오는 신하로는 위징, 방현령, 왕규가 많이 나오고, 그 외에도 봉덕이, 저수량, 잠문봉, 온은박, 곡나율, 소우, 고사렴, 두정륜, 두업, 유계, 두덕소, 조원해, 두여회, 이대량 등이 등장한다.

    「정관정요」의 저자 오긍(吳兢)은 당나라 중종, 현종 시대의 사관(史官)으로 현종 8년(서기 749년)에 80세 죽었는데 당나라 「사통(史通)」의 저자 유지기(劉知幾)와 함께 당시 일류 사가로 알려졌으며, 특히 「무후실록(武后實錄)」편찬시는 곡필아세(曲筆阿世) 하지 않은 사람으로 널리 알려져 왔다.

    오긍(吳兢)「정관정요」를 쓰게 된 동기는 당나라가 국가적 위기에 처허여 이를 극복하고 나라의 기틀을 바로잡고자 하는 충정에서 였다고 보고 있다.
    즉 영휘(永徽) 6년(서기 655년) 3대 황제 고종의 왕후가 된 측천무후(則天武后)가 고종이 만년에 중풍으로 눕자 모든 국가권력을 전단하였고, 고종이 죽자 어린 장자를 중종(中宗)에 앉혔다가 고분고분하지 않자 갈아치우고, 차자를 예종(睿宗)에 앉혀 전횡을 일삼다가 그도 모자라 사성(嗣聖) 7년(서기 690년) 측천무후 스스로 제위에 올라(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황제) 나라 이름을 주(周)로 고치고, 당 종실 사람들을 차례로 주살하였다.

    측천무후에 대한 저항세력들이 잇달아 일어났으나 모두 실패하고, 무씨(武氏: 측천무후의 성씨, 측천무후의 원이름은 무미랑) 일족에 의한 전제정치가 극성을 떨쳐 당나라는 존망의 위기를 맞는다. 다행이 무후가 노쇠하고, 병약해 지자 이를 틈타 장간지(張柬之)가 중종을 복위시켜 당나라 왕조를 회복하기에 이른다.

    오긍(吳兢)은 일찍부터 사관이 되었기 때문에 태종이 나라의 기초와 백년의 근본을 튼튼히 쌓기 위하여 어떤 노력을 기울였으며, 인재등용, 민심수렴, 탁월한 지도자적 풍모 등 태종에 관한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당나라 부흥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당태종의 굳건한 정치철학'이 절실하다고 믿었다.
    그래서 이 책을 써서 복위된 중종에게 당나라의 재건과 중흥을 위한 정치철학과 비결을 제공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중종은 그만한 그릇이 못되어 황후 위씨(韋氏)의 말에만 귀를 기울이다가 급기야 위씨일가의 전횡시대를 맞는다. 이 책의 저자 오긍의 기대는 빗나간 것이다.

    그러나, 이 「정관정요」책은
    당(唐)나라 때 헌종(憲宗: 서기 806년-820년), 문종(文宗: 서기 827년-840년)이 애독하였고, 선종(宣宗: 서기 847년-859년) 때는 주요 내용을 병풍으로 만들어 황제가 기거하는 방에 펴두고 늘 읽었다 하며,
    ② 송(宋)나라 인종(仁宗: 서기 1023년-1063년)이 애독하였고,
    ③ 요(遼)나라 흥종(興宗: )이 애독하였고,
    ④ 금(金)나라 세종(世宗: 서기 1161년-1189년)은 각본으로 펴내어 읽기를 권장하였고,
    ⑤ 원(元)나라 세조(世祖: 서기 1264년-1294년)가 애독하였고,
    ⑥ 명(明)나라 헌종(憲宗: 서기 1465년-1487년)이 간각(刊刻)하여 보급하였으며, 신종(神宗: 서기 1573년-1619년) 또한 애독하였고,
    ⑦ 청(淸)나라 고종(高宗: 乾隆帝, 서기 1736년-1795년) 역시 애독하고, ‘독정관정요(讀貞觀政要)’라는 시를 짓고, ‘정관정요서(貞觀政要序)’라는 글도 짓고, 이어서 ‘당태종론(唐太宗論)’이란 글도 지었다고 한다.
    ⑧ 일본에서는 유학자들이 탐독하고 덕천가강(德川家康)은 1593년 이책을 강의하게 하였고, 1600년에는 이 책을 개방하여 널리 보급하였다고 한다.


    이 「정관정요」책에 실린 내용은 비록 전제군주 시대의 군주의 지도자적 품성을 다듬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정리된 것이지만 오늘날의 민주주의 시대 국가 지도자의 품성 함양과 민심 소재의 파악, 위민정책을 입안과 추진에 부족함이 없는 책이다.

    오긍의 「정관정요」를 편역한 「唐太宗 -정관정요」
    1986년 번역 당시 편역자 내무부장관 김종호(金宗鎬)의 번역문,
    오긍(吳兢)의 원문(漢字),
    편역자의 자해(字解)
    편역자의 풀이
    편역자의 추가 해설
순으로 엮어져 있다.

    「정관정요」책은 총 56개 대화 주제가 7개 장(章)으로 정리되고, 8장에 위징 등의 상소문이 실려 있다.
    내용이 길기 때문에 추려서 '정관정요초(貞觀政要抄)'를 별도로 올리고, 다음 4개로 구획하여 올린다.
    정관정요抄: 56개대화 중에서 21개, 상소문 1개(房玄齡이 高句麗 정벌을 반대한 상소)
    정관정요-1: 서언, 제1장(군주는 배, 백성은 물: 대화1-8), 제2장(善을 행하면 번영하고, 惡을 행하면 멸망한다: 대화9-16),
    정관정요-2: 제3장(민중을 직접 다스리는 지방관일수혹 좋은 인물이 필요하다: 대화17-24), 제4장(피서 궁전을 짓자는 진언을 물리치다: 대화25-32),
    정관정요-3: 제5장(법의 적용을 신중히 하여 무고한 죄인이 없게 하다: 대화33-43), 제6장(良臣과 忠臣은 어떻게 다른가?: 대화44-50),
    정관정요-4: 제7장(군주가 暗愚하고 신하가 아첨하면 나라는 망한다: 대화51-56), 상소문(4개 중 1개(房玄齡이 高句麗 정벌을 반대한 상소)

정관정요(貞觀政要)


    이 글을 파일작업 하는 도중, 2007년 2월 10일자 조선일보 東아시아칼럼 난에 「‘帝國의추억’에 빠져드는 중국」이라는 박승준 북경지국장의 글을 접하게 되었는데 지금 중국에서는 중국중앙TV 채널1에서 박력이 넘치는 당태종 이세민(李世民)을 주인공으로 한 82부작 드라마 ‘정관장가(貞觀長歌)’가 절찬 중에 8일자로 24부까지 방영되었고, 이 정관장가가 끝나면 후속 편으로 ‘정관지치(貞觀之治)’라는 또 다른 당태종 이세민이 등장하는 드라마를 준비 중에 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TV에서 당(唐)나라 바람이 불자 출판사들이 앞 다투어 ‘대당제국 (大唐帝國)’, ‘정관정요(貞觀政要)’같은 당나라를 배경으로 한 책들을 내놓고, 드라마에서 책까지 당나라가 넘쳐 나자 중국의 신문과 방송에는 ‘장안(長安)의 열정’이니, ‘대당(大唐)의 기상’이니 하는 말들이 여기 저기 나돌고, ‘2007년은 관당년’(觀唐年: 당나라를 바라보는 해)이라는 말까지 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이 책 내용을 홈페이지에 올리는 것이 마치 중국의 '당나라 열풍'을 거드는 결과가 되는 것 같아 좀 꺼름직하기는 하지만 그런 중국의 당나라 열풍과는 관계 없이 책의 내용이 정치철학이 실종한 우리나라 이 시대에도 좋은 거울이 될 수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그대로 소개하려고 한다.

정관정요초(貞觀政要抄)

◆ 대화(2) 창업(創業)과 수성(守成), 어느쪽이 어려운가?
    정관(貞觀) 10년(서기636년)에 태종이 시신(侍臣)들에게
    “제왕(帝王)의 업(業)으로 초창(草創) 곧 창업(創業)과 수문(守文) 곧 수성(守成) 중 어느 쪽이 더 어려운가?” 하고 물었다.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방현령(房玄齡)이 답하여 아뢰기를
    “천하가 어지러우면 군웅이 다투어 일어납니다. 적을 공파(攻破)해서 항복을 받고, 싸워서 이겨 겨우 세상을 평정합니다. 이러한 연유로 말씀드리자면 초창(草創) 쪽이 어렵다고 생각됩니다.”하였다.

    위징이 답하여 아뢰기를
    “제왕이 일어나면 받드시 전대의 쇠퇴하고 어지러웠던 일들을 이어받게 되니, 저 음침하고 교활한 자를 뒤엎었으니 백성들은 즐거이 천자를 추대하여 사해(四海: 온 세상)가 천명(天命)으로 돌아옵니다. 이것은 하늘이 내려주고, 백성으로부터 받는 것이니 어려운 일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미 천하를 얻은 뒤에는 제왕이 지향하는 바가 교만해지고, 방일해 집니다.백성이 안정을 되찾고자 하나 부역이 그치지 않습니다. 백성은 지칠 대로 지쳤건만 사치한 사업은 그치지 않습니다. 나라가 쇠퇴하는 것은 언제나 이런 일로 말미암아 일어납니다. 이로써 말씀 드리면 수문(守文) 쪽이 더 어렵습니다.”
하였다.

    태종이 이르기를
    “현령은 지난날 나를 따라 천하를 평정하였으므로 간난(艱難)과 신고(辛苦)를 고루 경험하면서 거의 죽을 고비, 위험한 지경에 이르러 구사일생으로 겨우 목숨을 부지했다. 그의 말은 곧 그가 창업의 어려움을 겪은 까닭이다.

    위징은 지금부터 나와 함께 천하의 안정을 도모하면서 나의 마음이 교만해지고, 방일한 데로 흘렀다가는 반드시 위망(危亡)의 길을 밟을 것을 염려한다. 그래서 수문의 어려움을 말하는 것이다. 이제 창업의 어려움은 이미 지난 일이다. 수문의 어려움을 마땅히 제공(諸公)과 함께 신중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였다.

◆ 대화(3) 천하를 지키는 것이 쉬운가 어려운가?
    정관 15년(서기641년)에 태종이 시신들에게
    “천하를 지키는 일이 어려운가 쉬운가?” 하고 물었다.

    시중(侍中) 위징이 답하여 말하기를
    “매우 어렵습니다.” 하였다.

    이에 태종이
    “현자(賢者)와 능자(能者)에게 맡기고, 간쟁(諫爭)을 받아들인다면 어려울 것이 없지 않은가?” 하고 되물었다.

    위징이 대답하기를
    “고래로 제왕들을 관찰하건대 나라에 근심스러운 일이 있고, 위태로울 때는 현자에 맡기고 간언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태평한 세상이 되면 마음이 느려지고 게을러집니다. 태평을 믿고 관태(寬怠)를 탐하면 간하고자 하는 자가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날이 가고 달이 가는 동안에 쇠퇴하여지고 위망의 지경에 이릅니다.
    성인들이 ‘삶이 편안할 때에 위태로움을 생각하라’고 한 까닭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태평한 때일수록 경계해야 합니다. 어찌 어렵지 않다고 하십니까?”
하였다.

◆ 대화(7) 치국(治國)과 양병(養病)은 같다.
    정관 5년(서기631년)에 태종은 시신들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일과 병을 치료하는 일은 서로 같다고 할 수 있다. 병들었던 사람의 병을 치료되었을 때일수록 더욱 정성을 기울여 요양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 병이 치료되었다고 생각될 때 안심하고 병 중에 지키던 여러 가지 금제(禁制)를 깨뜨린다면 반드시 목숨까지 잃게 될 것이다.
    나라를 다스리는 것도 마찬가지다. 천하가 잠시 편안하게 다스려 질 때일수록 가장 두려워하고 삼가지 않으면 안 될 때인 것이다. 만일 경솔하게 자만하고 방자하게 군다면 반드시 멸망의 길을 밟으리라.

    지금 천하의 안위는 나 한 사람에게 걸려있다. 그러므로 날로 조심에 조심을 거듭하여 남들이 아무리 훌륭하다고 찬미하더라도 나는 아직 스스로 훌륭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물며 나의 귀와 눈과 수족으로서의 역할은 모두 경들에게 의지하고 있다. 나 개인의 힘만으로는 이 광대한 천하를 다스릴 수 없고 아무래도 경들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의리상으로 말한다면 나와 경들과는 이신동체(異身同體)인 것이다. 꼭 힘을 합치고 마음을 하나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 이것이 위태롭다고 생각되는 일이 있으면 숨김없이 극언(極言) 해 주기 바란다.
    만에 하나라도 군신 간에 서로 의심하는 일이 생기고 속마음을 충분히 터놓을 수 없는 일이 생기면 그야말로 그것은 국가를 다스림에 있어서 크게 손해 되는 일이다”
하였다.

◆ 대화(8) 군주는 배, 백성은 물과 같다.
    정관 6년(서기632년) 태종이 시신들에세 말하기를
    “옛 제왕들을 관찰하건대 성(盛)함이 있고 쇠(衰)함이 있는 것은 아침(朝)이 있으면 저녁(夕)이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들이 쇠망하는 것은 모두 신하가 군주의 귀와 눈을 가려 어둡게 함으로써 백성의 곤궁도, 변방에서의 반란도, 외적의 침입도 전혀 모르고, 그로 말미암아 군주는 정사에 있어서 어떻게 하면 좋을 것인지에 대하여 전혀 아는 바가 없게 된다.

    그리고 충정한 자는 군주의 태평 무드에 젖어 있는 기분을 손상시킬까 봐 두려워 하여 그러한 사실에 대하여 말하지 않고, 간사하여 아첨하기 좋아하는 자들만이 날이 갈수록 군주에게 접근한다. 그럼으로써 군주 자신이 정치상의 과실을 모르고 지내는 것이니 국가가 멸망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는 구중궁궐 깊숙이 들어앉은 몸이 되었으니 천하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고루 알 수 있는 처지에 놓여 있지 않다. 그러므로 그 임무를 경들에게 분담시켜 나의 귀와 눈을 대신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천하가 무사하고 세상이 편안하다고 해서 마음에 두지 않고 안일한 생각에 잠겨 있을 수는 없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군주가 덕으로써 백성을 사랑하면 백성도 또한 군주를 경애한다. 그러나 군주가 무도하면 백성은 이반한다. 가히 두려워 할 일이다.’ 라고 하였다.
    천자가 훌륭한 도덕을 가지고 있으면 백성은 그를 떠받든다. 그러나 천자가 무도하면 백성은 그를 천자의 자리에서 몰아낸다. 참으로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였다.

    이에 대하여 위징이 답하여 말하기를
    “예로부터 나라를 잃은 군주는 누구나 다 나라가 편안할 때 어려웠던 지난 날을 잊어버리고, 정사가 바로잡혔을 때 어지러웠던 지난 날의 일을 잊어버립니다. 그것이 나라를 오래 지탱해 나가지 못하게 되는 이유입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그 부(富)로 말하면 천하의 모든 것을 다 지녔고, 나라의 안팎이 다 청평(淸平)하고, 안태(安泰)함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항상 정치를 어떻게 하면 좋을 것인가를 생각하시고 늘 깊은 못에 엷게 언 얼음판을 밟듯이 조심조심 두려워하고, 삼가고 계시므로 우리나라는 국위가 빛나고 장구할 것입니다.

    신은 일찍이 옛말에 ‘군주는 배요, 백성은 물이라. 물은 능히 배를 띄울 수가 있지만, 한편 배를 전복시킬 수도 있는 것이다.’(君舟也 人水也 水能載舟 亦能覆舟)라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폐하께서는 백성이야 말로 두려운 존재라고 생각하고 계십니다만 신 또한 진실로 폐하께서 생각하고 계신바와 같습니다.”
라고 하였다.

◆ 대화(11) 명군(明君)과 양신(良臣)의 만남이 태평의 기초
    정간 원년(서기627년)에 태종이 시신들에게 말하기를
    “바른 군주가 사악한 신하를 신임하게 되면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 수가 없다.
    또 충정한 신하가 사악한 군주를 섬기게 될 때도 선정을 베풀어 태평한 세상을 이를 수가 없다.

    명군(明君)과 양신(良臣)이 맞추어 서로 만나는 일이 고기와 물과 같은 관계로써 친밀하다면 나라는 태평해질 것이다.

    나는 어리석은 자이지만 다행히도 제공이 나의 결함을 바로잡아주어 위험에서 건져주고 있다.
    어떤가? 제공의 꺼림 없는 직언과 기개 있고 강경한 의론에 의해 천하의 태평을 실행하고자 한다.”
하였다.

    간의대부 왕규가 태종의 말에 답하여
    “저는 이러한 것을 듣고 있습니다. ‘아무리 굽은 나무라도 먹줄을 따라서 켜면 똑바르게 되고, 어떠한 군주라도 간하는 말에 잘 따르면 성군이 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옛날의 뛰어난 군주에게는 반드시 임금에게 간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신하가 일곱 명씩이나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만약 간하는 사람이 임금에 의하여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서로 이어 죽음으로써 간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폐하께서는 마음을 활짝 여시고 신분이 낮은 자의 의견도 받아들이십니다. 어리석은 저는 거리낌 없이 직언 할 수 있는 조정에 있으면서도 판단력이 흐려 바른 의견을 제대로 말씀 드리기 어렵습니다만 진력을 다해 폐하의 선정을 돕고자 원합니다.”
하였다.

    태종은 왕규의 말을 옳다고 여겨 칭찬하였다. 그리고 조칙을 내려 이후로는 재상이 궁중에서 참여하여 국가의 정책을 논의하고 처리 할 때는 반드시 간관(諫官)도 함께 참여시켜 정사를 함께 의논하고 그의 의견을 개진하게 하였으며, 반드시 꺼림직한 마음을 두지 않고 그들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 대화(18) 민중을 직접 다스리는 地方官일수록 좋은 인물이 필요하다.
    정관 2년(서기628년)에 태종이 시신들에게 이르기를
    “나는 매일 밤 언제나 백성들에 대한 생각으로 해서 때로는 밤 깊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는 일이 있다. 오직 지방의 도독(都督)이나 자사(刺史)들이 백성을 잘 다스릴 능력이 있는가 없는가에 대해 신경을 쓰고, 두려워 하고 있다.

    그래서 병풍 위에 그들 지방관의 성명을 적어두고 눕고 일어 날 때마다 언제나 그것을 들여 다 본다. 그리고 그들이 지방관으로 있으면서 혹 선정을 베푼 일이 있으면 그 사실을 상세하게 성명 밑에다 기입해 둔다.

    나는 깊숙한 궁중에 들어앉아 있으므로 먼 변방 곳곳에서 행하여 지는 지방관의 정사에 대하여 일일이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다. 원방의 정사를 위임할 자는 오직 도독과 자사 뿐인데 이들은 정말나라의 치란(治亂)에 관계가 있는 중요한 직책을 담당하고 있다.

    그러므로 많은 신하 중에서도 첫째로 꼭 그 일에 적합한 인물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다.”
하였다.

◆ 대화(19) 현재(賢才)가 묻히는 일을 우려한다.
    정관 2년(서기628년)에 태종이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 봉덕이(封德彛)에게 일러 말하기를
    “평화로운 나라를 이루는 근본은 다만 훌륭한 인재를 얻는 일이다. 근자에 그대에게 현명한 인재를 기용하라고 명하였건만 아직 단 한사람도 추천하는 일이 없었다. 천하를 다스리는 일은 지극히 중대하다. 그대는 마땅히 나의 근심과 노력을 분담해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현재(賢才)를 발굴해 주지 않으니 장차 나는 누구를 의지할 것인가?” 하였다.

    이에 봉덕이가 대답하기를
    “저는 어리석은 자입니다만 어찌 저의 정(精)과 혼(魂)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오늘의 세상을 보건대 대중 속에서 각별히 뛰어나고 특이한 재능이 있는 자가 눈에 띄지 않습니다.” 하였다.

    이에 태종이
    “전 시대의 밝은 군주들은 신하를 씀에 있어서 각자의 기량에 따라서 썼다. 재능이 있는 인물을 딴 세상이나 다른 시대에서 빌어다 쓴 것이 아니고 모든 인재를 그 나라 그 시대에 사람들 중에서 채용한 것이다.

    은(殷)나라의 고종(高宗)이 부열(傅說)을 꿈에서 보았고, 주(周)나라의 문왕(文王)이 여상(呂尙)을 만난 것과 같은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다려서 정치를 하자는 것인가? 어느 시대고 현재가 없을 수 있겠는가? 다만 애석하게도 쓸 만한 현재가 있는 데도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여 세상에 묻어두면서 알지 못하고 넘어가는 것이 가장 우려될 뿐이다.”
하였다.

    이 말을 듣고 봉덕이는 부끄러워서 얼굴을 붉히고 물러났다.

◆ 대화(21) 나라의 급무에 대한 군신(君臣)의 의견을 묻다.
    정관 16년(서기642년)에 태종이 시신들에게 이르기를
    “당금(當今) 나라에 있어서 최대의 급무는 무엇인가? 각각 생각한 바를 발표해 보라” 하였다.

    먼저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 고사렴(高士廉)이
    “백성들이 생활 안정을 도모함이 가장 급한 일입니다” 하였다.

    다음에 황문시랑(黃門侍郞) 유계(劉계)가
    “사방의 이민족을 무마함이 급무입니다” 하였다.

    이번에는 중서시랑(中書侍郞) 잠문본(岑文本)이
    “논어(論語)에 이르기를 ‘위정자는 도덕으로써 백성을 이끌고, 예절 바른 풍속으로써 백성을 통제한다’ 고 하였습니다. 이에 따른다면 바른 예절을 일으킴이 급무입니다” 하였다.

    마지막으로 간의대부(諫議大夫) 저수량(衣者 遂良)이
    “현세는 사방의 백성이 모두 폐하의 인격을 우러러 사모하고 있으므로 결코 못된 행동을 할 근심은 없습니다. 다만, 태자와 제왕에 대해서는 꼭 일정한 분한(分限)을 설정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폐하! 이 기회에 만대 후까지라도 표본(標本)이 될 만한 법을 정하시어 그것을 자손들에게 남기시는 것이 좋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이야말로 당금(當今)의 최대 급무가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태종이 이르기를
    “저수량의 말이 가장 옳다. 짐의 나이 50을 바라본다. 어느새 육체와 기력이 쇠함을 느낀다. 장자인 승건(承乾)을 태자로 삼아 동궁(東宮)을 지키게 하고 있다. 그러나 여러 아우와 서자들의 수는 40명이나 된다. 늘 마음 속으로 이들의 처우문제에 대하여 걱정을 하고 있다.

    예로부터 장자와 그의 이복 형제들 사이에 선량한 인물이 있어 그들을 잘 조정하지 않을 때는 국가가 기울고, 나아가 패망의 길을 걷게 되는 일이 많았다. 제공은 나를 위해 지혜 있고, 인격이 뛰어난 인물을 찾아내어 태자를 보좌케 하고, 나아가 모든 왕들에게까지도 모두 정당한 인물을 구해 돕게 하도록 하기 바란다.

    또 관원으로써 제왕을 섬기는 자는 같은 인물로써 오래도록 섬기게 해서는 안 된다. 오랜 세월을 두고 섬기다 보면 주군을 섬기는 신하와 같은 정분이 생기기 쉬워 뜻하지 않게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야망을 가지게 되는 일은 이러한 관계에서 많이 일어난다.

    그러므로 왕부(王府)에 딸리는 관원은 한 사람이 4년을 넘기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고 하였다.

◆ 대화(26) 대주(戴胄)가 법을 지켜 태종을 간하다.
    정관 원년(서기627년)에 이부산서 장손무기가 어느 때 태종의 소명을 받고 궁중에 입궐했다. 법규대로라면 패도(佩刀)를 풀어놓고 들어가야 하는 것인데 얼떨결에 칼을 허리에 찬 채로 입궐했다. 그리고 궁중에서 퇴궐한 뒤에야 대궐문을 경위하던 무관인 감문교위(監門校尉)가 비로소 깨달았다.

    그런데 그것이 문제가 되어 그 처분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평의(評議)하게 되었는데 그 때 상서우복야 봉덕이의 의견은
    “감문교위는 장손무기가 칼을 찬 채로 입궐한 것을 몰랐다는 직무태만의 죄는 사형에 상당합니다. 장손무기가 잘못하여 칼을 찬 채로 입궐한 죄는 도형 2년에 벌금으로 동 20근을 바치면 됩니다.” 하였다.

    이에 태종은 그의 의견에 따르기로 하였다.
    이 때 사법차관(司法次官)에 해당하는 대리소경(大理少卿) 대주(戴胄)가 봉덕이의 의견에 반대하며
    “감문교위가 알아차리지 못한 것과 장손무기가 얼떨결에 칼을 찬 채로 입궐한 것과는 어느 쪽에도 잘못을 저지른 점에서는 같습니다. 신하로서 천자를 대하는 경우에 있어서는 실수라는 것이 용서를 받을 수 없는 것으로서 변명으로 통하지 않습니다.

    법률을 적용한다면 ‘천자를 받드는 약이나 음식물 또는 천자가 탄 배(舟船)를 실수로 법대로 운행하지 않은 자는 모두 사형에 처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만약 폐하께서 장손무기의 국가에 대한 훈공을 참작하시여 특별한 처치를 베푸신다면 저희들 사법관이 결정할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만일 법률에 의해 처단하시고자 하신다면 벌금으로 구리를 바치게 하심은 적당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이에 태종이 이르기를
    “법이라는 것은 천자인 나 한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천하 만민을 위한 법이다. 어찌하여 장손무기가 황후의 오라비로서 황실과 친척이 된다고 해서 간단하게 법률을 굽히고자 할 수가 있겠는가?” 하고, 거듭 협의하여 결정을 지으라고 하였다.

    그러나 봉덕이는 당초의 자기 주장을 고집하면서 바꾸려 하지 않았다. 이에 태종이 또 봉덕이의 의결에 따르고자 하였다.
    대주가 또다시 반대 의견을 아뢰어
    “감문교위는 장손무기의 얼떨결에 칼을 찬 채로 입궐한 것이 원인이 되어 죄를 저지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법률을 적용함에 있어서는 당연히 가볍게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의 과오를 문제 삼는다면 사정은 같습니다. 그런데도 한 쪽은 살고, 한쪽만 죽을 죄가 된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어긋나는 것입니다. 교위의 죄를 가볍게 다루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였다.

    이에 태종이 교위의 사형을 면제하였다.
    이 무렵은 국가 창건시기에 해당하였으므로 조정에서는 한창 관리를 선발하여 등용하는 길을 열어 놓고 있었다. 그런데 관리를 지망하는 자 중에는 수(隨)나라 때의 계급과 자격을 사칭하는 자가 있었다. 그래서 태종은 사칭한 자에게는 자수를 권하고, 만약 자수를 하지 않고 탄로 될 때는 사형에 처할 것이라고 공언하였다.

    그런지 얼마 뒤에 계급을 사칭한 자가 있어 그 사실이 밝혀졌다. 그 때 대주는 법률의 규정에 따라 그 유형을 판결하고 그것을 태종에게 주상(奏上) 하였다. 그런데 태종은 이를 불쾌하게 여겨
    “내가 칙령으로 자수하지 않은 자는 사형에 처하겠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그대의 단죄는 유형이다. 이렇게 되면 내가 온 백성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 되고 나를 불신하게 되는 것이다.” 하였다.

    이에 대주가
    “폐하께서 즉석에서 그 사람을 죽이신다면 저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담당 법관에게 넘기신 이상 저는 절대로 법률 규정을 어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태종이
    “그대는 자신이 법률을 충실히 지키기 위해 나에게 백성의 신용을 잃게 하려는 것인가?” 하였다.

    대주가 다시 아뢰기를
    “법률이라고 하는 것은 국가가 큰 신의를 천하에 공포한 것입니다. 그러나 말이라고 하는 것은 다만 그 때의 희로(喜怒)의 감정에 의해 발해지는 것입니다. 폐하께서 거짓말을 하는 자가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한 마디의 노여움을 발하시어 그러한 자는 사형에 처하라고 하셨으나 뒤에 그것이 옳지 않음을 깨달으시고, 법률의 규정에 따라 처치하라고 법관에게 넘기셨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작은 노여움을 참으시고, 큰 신의를 잃지 않고 보존하신 것입니다. 만약 노여워하시는 뜻에 따라 국가의 법률을 지키는 신의를 위반하시는 것은 저로서는 황송하오나 폐하를 위하여 그것을 심히 애석하게 여깁니다.”
하였다.

    태종은 이 말을 듣고
    “내가 법률에 어긋나는 경우에는 그대는 이것을 바로 잡아준다. 나는 법률의 시행에 있어서 아무것도 근심할 필요가 없다.” 고 하였다.

◆ 대화(27) 간언에 의해 공주의 결혼을 간소하게 하다.
    장락공주(長樂公主)는 문덕왕후(文德皇后)가 낳은 딸로서 태종이 가장 귀여워하였다.
    정관 연중에 강가(降嫁: 지체가 낮은 집으로 시집 감) 하려 할 때 태종이 담당 직원들에게 분부하여 그 차비를 장공주(長公主: 천자의 자매)인 태종의 자매들 때의 갑절로 하게 하였다.

    이 때 위징이 아뢰기를
    “옛날 후한의 명제는 그 아들을 왕으로 봉할 때 이르기를 ‘어찌 내 아들을 부군의 아들인 내 형제들과 같이 할 수 있을 것인가? 초왕이나 회양왕의 반의 영지로 하라’ 하였습니다.

    옛날 역사는 이것을 미담으로 꼽습니다. 천자의 자매를 장공주라 이르고, 천자의 따님을 공주라 이릅니다. ‘장(長)’이라는 글자가 덧붙은 것은 진실로 공주보다 높이는 까닭입니다. 자매와 따님 사이에는 정으로는 차이가 있게 마련입니다만, 예로써 정해진 예법을 넘어서는 안됩니다.

    만약 공주의 혼례 차지가 장공주들보다 앞서는 일이 있다고 하면 도라상 좋지 않은 일입니다. 부디 폐하께서는 이 점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태종은 위징의 간언에 대하여 참으로 좋은 말을 해 주었다고 칭찬하고는, 그의 말을 애랑의 어머니인 황후에게 말했다. 이 말을 들은 황후는 감탄하면서
    “위징이 아뢴 것은 참으로 공평합니다. 전부터 폐하께서 위징을 존경하고 중히 여기시는 것을 들어왔지만 아직 분명하게 그 까닭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위징의 간언을 들으니 그야말로 도의로써 군주의 욕망을 억제하는 진실된 중신입니다.

    저는 결발(結髮: 여자 나이 15세, 머리를 잡아매는 나이) 하면서 폐하와 부부가 되어 정중한 대접을 받으며 부부로서 정의는 실로 깊고도 두텁습니다. 그러하건만 무엇인가 아뢰고자 할 때마다 반드시 폐하의 안색을 살피면서 경솔하게 폐하의 위업을 손상하는 말은 도저히 아뢸 수가 없었습니다.

    하물며 신하인 경우에는 부부간의 정리처럼 친밀할 수는 없고, 예절에도 간격이 있습니다. 어찌 말씀드리기 어렵지 않은 일이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한비자는 신하가 군주에게 간언하는 일은 ‘설난(說難)’이라 하였고, 한의 무제를 섬긴 동방삭(東方朔)은 ‘진언이라고 쉬운 일이 아니다’고 한 것은 참으로 까닭이 있는 말입니다.

    옛말에 충언은 귀에 거슬리나 행함에 이롭다고 했습니다. 충언이야 말로 천자로써 국가를 보유하는 자의 긴요하고도 급무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충언을 받아들이면 세상은 바로잡아지고, 충언의 길을 막으면 정치가 어지러워집니다. 진실로 폐하께서 이 점을 잘 밝혀 주실 것을 바랍니다. 그렇게 하시면 천하 만민에게는 가장 큰 행복입니다.”
하였다.
    그러고는 태종에게 청하여 시신을 사자로 보내 비단 5백 필을 위징의 집에 보내어 포상하였다.

◆ 대화(28) 거짓 노하여 신하의 정사(正邪: 바른지 사곡된 지)를 시험하라는 진언을 물리치다.
    정관 초년에 글을 올려 간사하고 아첨하는 신하를 제거할 것을 진언한 자가 있었다.
    태종은 그자에게 묻기를
    “내가 임용하는 신하는 모두 현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대는 간사하고 아첨하는 자가 누구인지를 알고 있는가?" 하였다.

    그 말에 대하여 글을 올린 자가 대답하기를
    “저는 민간에 있어서 누가 아첨하는 자인지를 알고 있지 못합니다. 부디 폐하께서 거짓으로 노한 체 하시고, 군신(群臣)들을 시험해 주십시오. 만약 천자의 노여움을 두려워하지 않고 꺼림없이 자기가 옳다고 믿는 바를 간언하는 자는 바른 자입니다.
    그와 반대로 군주의 뜻에 따라 어떠한 분부에도 고분고분 하는 자는 아첨하는 자입니다.”
하였다.

    태종이 봉덕이에게 이르기를
    “나는 ‘하천의 청탁(淸濁)은 그 원인이 수원(水源)에 있다’는 말을 들었다. 군주는 정치의 수원이요, 만민은 물의 흐름과 같은 것이다. 군주 자신이 거짓말이나 하여 속이는 짓을 하고, 어떻게 신하들에게 정직한 행위를 하기를 바라겠는가?
    그것은 마치 수원이 흐려 있으면서 개울 물이 맑기를 바라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런 일은 도리로서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일찍이 위(魏)의 무제(武帝: 조조)가 사람을 속이고 거짓 행위가 많았으므로 그의 인품을 매우 낮추어 보고 경멸해 왔다. 그런 나로서 어떻게 이런 진언을 교령(敎令)으로 실시할 수 있겠는가? 나로서는 도저히 거짓으로 신하의 정사를 시험하는 짓은 할 수 없다.”
하고,

    상서(上書) 한 사람에게는
    “나는 신의라는 것이 널리 행해지기를 희망할 뿐, 남을 속이는 방법을 백성에게 가르치기를 바라지 않는다. 따라서 그대의 말은 아무 의의가 없다. 그러므로 나는 그대의 진언을 받아들일 수 없다.” 하였다.

◆ 대화(29) 피서궁전(避暑宮殿)을 짓자는 진언을 물리치다.
    정관 2년(서기628년)에 공경들이 아뢰기를
    “「예(禮)」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계하(季夏: 늦여름, 음력 6월)에는 서기(暑氣: 더위)를 피하기 위해 높은 건물에 살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제 성하(盛夏)는 물러가지 않은 데다가 가을 장마가 시작되려는 불순한 기후입니다. 그리고 궁중은 낮고 습합니다. 아무쪼록 높은 전각을 하나 세우시고, 그곳으로 옮기시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이에 대하여 태종이 이르기를
    “내게 기병(氣病: 관절염이나 신경통 등)이 있다. 그러므로 저습한 곳이 좋지 않을 것은 정한 이치다. 그러나 만약 그대들이 말하는 대로 하려면 경비가 많이 들 것이다. 옛날 한나라 문제는 노대(露臺) 하나를 꾸미고자 했으나 그 비용이 중산층의 집 열 채에 상당한다는 말은 듣고 그 비용을 아끼기 위해 공사를 중지시켰다.

    나의 인격이 한무제에는 멀리 미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는 비용이 문제를 지난다고 하는 것은 아무래도 백성의 부모가 되는 천자가 취할 수 있는 도리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어 공경들이 두 세 번 강력하게 청했으나 결국 허락하지 않았다.

◆ 대화(30) 한해(旱害)를 자기 책임으로 돌려 백성 구제에 힘쓰다.
    정관 2년(서기628년)에 관중지방(關中地方)에 한해가 있어 대단한 기근이 일어났다. 그 때 태종은 시신들에게 이르기를
    “홍수와 가뭄이 조화를 잃어 수해와 한해가 일어나는 것은 모두 인군(人君)으로서의 덕에 결함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마음을 닦지 못한 것은 나의 부덕의 소치이다. 하늘은 마땅히 나를 책할 일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아무 죄도 없는 백성들이 이렇게도 지독한 곤경에 빠져야 한단 말인가? 백성 중에는 귀여운 자녀를 파는 사람까지 있다는 말을 들었으니 나는 그들이 가엾어 견딜 수가 없을 지경이다.”
하고는
    어사대부(御史大夫)인 두업을 시켜 한해가 더욱 심한 지방을 순회하면서 조사하게 하고, 궁중의 금고를 열어 돈과 보화를 내어 팔려간 아이들을 되 사서 그들의 부모에게로 돌려보냈다.

◆ 대화(32) 위징의 중용을 시기하여 모함하는 자 있었다.
    정관 10년(서기636년) 권귀(權貴: 권력 있고, 지위가 높은 자)로서 위징이 중용되는 데 대하여 시기하는 자가 있어 일이 있을 때마다 태종에게 아뢰어 말하기를
    “위징이 모든 것을 간 할 때에는 꼬치꼬치 몇 번이고 되풀이 하여 폐하께 그 말에 따르도록 하지 않고는 그치지 않습니다. 이것은 결국 군주를 유소(幼少)한 군주로 다루어 성인(成人)인 군주로서 다루지 않으려는 까닭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태종이 이 말을 듣고 이르기를
    “나는 수조(隋朝) 고관의 자제로 태어나 젊어서 학문에 힘쓰지 않았고, 다만 궁마(弓馬)의 술을 즐겼을 뿐이다. 그것으로 수말(隋末)에 의병을 일으켰을 때는 각지의 군웅을 격파하여 큰 공읠 세웠고, 그 공에 의하여 진왕(秦王)으로 봉해졌다.

    그리고 그로부터 부친이신 고조에게서 특별한 귀여움을 받게 되었다. 그러한 까닭으로 정치하는 방법이라든가 정책 같은 문제에 대하여서는 전연 생각한 일도 없고, 또 이해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 뒤 황태자가 되고, 처음으로 동궁이라는 궁전에 살게 되면서부터 천자가 된다는 책임을 통감하여 세상을 평화롭게 다스려 보고자 내 욕망 같은 것을 억제하면서 좋은 정치를 행하고자 생각했다.

    그 때 치국방책에 대하여 여러 가지 의견을 말하는 자들이 있었으나 다만 위징과 왕규 두 사람만이 예의와 도덕에 의하여 나를 지도하고 정치하는 방법을 일러줌으로써 나라는 인물을 크게 만들어 주었다.

    나는 면려(勉勵) 노력하여 두 사람의 지도에 따르는 것이 나를 위해서도 천하와 국가를 위해서도 크게 유익할 것임을 깨닫고 힘써 행하여 마지 않았다. 그 결과 오늘과 같은 평화롭고 안정된 세상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은 모두 위징 등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특별히 두터운 대우를 하면서 모든 일에 대하여 위징의 진언을 받아들이고 따르는 까닭은 그들에 대한 사적인 정리에서가 아니다.”
하였다.

    이에 말을 꺼낸 자는 부끄러워 입을 다물었고, 태종은 그를 꾸짖어 물러가게 하였다.

◆ 대화(36) 왕규(王珪)는 공주를 며느리로 맞아 시부모로서의 예를 받다.
    예부상서 왕규의 아들 경직(敬直)이 태종의 딸 남평공주(南平公主)를 아내로 맞았다.
    그 때 왕규가 말하기를
    “예의 정한 바로는 신부가 구고(舅姑: 시부모)에게 알현하는 의식이 있다. 그런데 근자에 와서 좋은 풍속이 깨어지고 쇠퇴해져서 공주가 강가(降嫁: 지체 낮은 집으로 시집감) 함에 있어서는 그 예법이 폐지되었다.

    천자께서는 흠명(欽明:
몸을 삼가고 도리에 밝음)하신 훌륭한 분이시고, 그 거동은 예로부터 정해진 법제를 실행하신다. 내가 공주의 알현을 받는 것은 무슨 자신의 영예를 위해서가 아니다. 다만 국가로서의 훌륭한 예절을 지키자는 데에 그 이유가 있다.” 하고는
    기어이 그의 부인과 함께 어버이로서의 정해진 좌석에 맍아 공주 자신이 비녀를 들고 관궤(관饋: 노부모에게 세수를 시키고, 진지를 지어 올리는것 곧 시부모를 섬기는 것)의 예를 실행하게 하여 그 예를 마치고는 자리에서 물러났다.

    태종이 그 이야기를 듣고 참 잘 한 일이라 칭찬하고는 이후 공주가 강가할 때 시가 쪽에서 시부모가 있으면 이 예를 행하게 하였다.

◆ 대화(37) 법의 적용을 신중히 하여 무고한 죄가 없게 하다.
    정관 원년(서기627년)에 태종이 시신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한 번 죽은 자는 다시 살아날 수 없다. 그러므로 법률을 적용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관대하고간명하게 하도록 힘쓸 일이다. 고인이 이르기를 ‘관을 파는 자는 그 해 전염병이 번지기를 바란다. 그것은 사람이 미워서 죽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관을 팔아 이익을 남긴다는 생각 뿐이기 때문이다.(육棺者 欲歲之疫 非疾於人 利棺?故耳)'

    지금 많은 사법관들은 한 사건의 재판을 심리할 때에 반드시 지독히 엄격하게 문초를 하여 사법관으로서의 좋은 성적을 올리고자 한다. 앞으로 어떤 방법을 취하면 사법관에게 공평하고도 적절한 재판을 할 수 있게 할 것인가?”
하였다.

    이에 간의대부 왕규가 나아가 이르기를
    “다만 공평하고 정직한 마음가짐의 사람을 가려 사법관으로 삼고, 만약 재판에 있어서 심판이 도리에 어그러지지 않는 자에게는 봉급을 올려준다거나 상금으로 황금을 하사하신다면 아첨하기 위해 거짓으로 재판하는 자가 저절로 없어질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태종이 조서를 내려 왕규의 의견에 따랐다. 태종은 또 말하기를
    “옛날에 재판을 심판함에는 반드시 삼공이나 조정의 중신에게 물어서 처리했다. 지금의 3공(三公)과 9경(九卿)은 옛날의 그 직책에 해당한다. 오늘부터 사형에 해당하는 죄는 모두 재상과 중서성, 문하성의 4품 이상의 고관 및 상서와 9경에게 명하여 죽을 죄인가 아닌가를 평의(評議)하게 하겠다.
    이렇게 하면 아마 무실한 죄에 의해서 사형에 처해지는 자를 없게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이렇게 하기 4년이 지나는 동안에 사형의 단죄가 내려진 자는 온 천하에서 불과 29명 뿐으로 거의 형벌의 사형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 상태에까지 이르렀다.

◆ 대화(39) 병(兵)은 흉기이나 방비를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태종이 저술한 「제범(帝範)」이라는 책에서 이르기를
    “대저 무기라고 하는 것은 국가에 있어서 사람을 살상하기 위한 나쁜 도구다. 그 국토가 제아무리 광대한 대국이라고 하더라도 전쟁을 좋아하면 백성은 피폐한다. 그렇기는 하지만 국경이 평안하고 외적 침입의 근심이 전혀 없다고 해도 전쟁을 잊어버리면 백성을 침략의 위험 앞에 드러내는 결과가 된다.

    전쟁을 즐겨 백성을 피폐하게 하는 것은 국가를 보전하는 방법이 아니고, 군비를 게을리해서 무방비상태로 국민을 침략의 위험에 알몸으로 드러내는 것은 적에게 위엄을 보이는 방법이 아니다.

    그러므로 무비(武備)라고 하는 것은 전혀 제거해 버리는 것은 좋지 않고, 또 전쟁을 좋아해서 항상 병력을 사용하는 것도 좋지 않다. 그래서 농한기에 백성들에게 무예의 기술을 연습시키는 것은 만약의 경우에 대비하여 병사들로 하여금 대오를 정비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옛날 월왕(越王) 구천(句踐)은 적을 향하여 배를 불뚝 내밀고 버티어 서 있는 개구리를 보고 그 의기를 기리어 수레 위에서 경의를 표하기까지 하면서 항상 병사의 사기를 높이는데 힘 쓴 결과 마침내는 원수의 나라인 오(吳)를 멸망시키고 패자(覇者)의 공업을 성취하였다.

    그러나 서(徐)나라의 언왕(偃王)은 문덕(文德)에만 의존하여 무비(武備)를 버렸으므로 결국 국가가 멸망하고 말았다. 왜나 하면 월(越)은 항상 병사의 위의를 익히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서(徐)는 무비를 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공자의 말에 ‘훈련을 실시하지 않은 백성으로써 전쟁을 하는 것은 백성을 그대로 내던져 버리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궁시(弓矢)의 위력을 세우는 일, 다시 말해 무비(武備)를 갖추어 두는 일은 가장 중요한 일이다”
하였다.

◆ 대화(41) 귀속을 원하는 강국(康國)의 청을 허용하지 않다.
    정관 5년(서기631년)에 강국이 귀속할 것을 청해 왔다. 이 때 태종은 시신들에게 말하기를
    “전대(前代)의 제왕들은 영토를 확장하고자 힘써 그로 말미암아 사후에 외관상으로 만의 영예를 구하고자 하는 이가 많았다. 그러나 그것은 제왕 자신에게는 아무런 이익도 없고, 그 백성들은 전쟁을 치르기 위해 대단한 괴로움을 겪어야 한다.

    설령, 제왕이 자신에게 이익이 있다고 하더라도 백성들에게 해가 된다면 나는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 더욱이 표면상으로 만의 명예를 구하기 위해 백성들에게 손해를 끼치는 경우라면 나는 절대로 그런 일을 하지 않는다.

    강국의 청원을 받아들인다면 그 나라가 우리나라에 귀속한 이상 만약 그 나라가 다른 나라의 침략을 당한다든가 하여 급한 국난에 처했을 경우에 그것을 모른 체하고 도와주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되면 많은 병사를 만리 머나먼 곳까지 출병시키지 않을 수 없게 되는데 어찌 백성을 괴롭히는 일이 아닐 수 있느냐.

    백성을 괴롭히면서까지 자신의 명예를 구하고자 하는 일은 나의 바라는 바가 아니다. 귀속의 청을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고 하였다.

◆ 대화(43) 곡나율(谷那律)이 태종의 지나친 수렵을 간하다.
    곡나율이 간의대부가 되었다. 어느 때 태종의 사냥 길에 동반하게 되었고 도중에 비를 만났다.
    태종이 곡나율에게
    “유의(油衣) 우장(雨裝)은 어떻게 만들면 비가 새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하고 물었다.

    이 물음에 대하여 곡나율은
    “기와로 만들면 비는 절대로 새지 않을 것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이 대답은 결국 기와로 집을 이은 대궐 안에 있으면 우장이 샐 것을 근심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 그것은 태종이 수렵을 지나치게 즐기는 것을 말아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이었다.

    태종은 곡나율의 이 말을 퍽 기쁘게 받아들이고 크게 기뻐하면서 비단 2백 필을 하사하고, 아울러 황금띠 한 개를 내리었다.

◆ 대화(48) 양신(良臣)과 충신(忠臣)은 어떻게 다른가?
    정관 6년(서기632년) 상서우승(上書右丞) 위징에 대해 그가 자기의 친척을 위해 불공평하게 처리한다고 고해 바치는 자가 있었다.
    이에 태종이 어사대부인 온언박에게 명하여 그 사실을 조사하게 하였다. 그런데 조사한 결과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다.

    그 때 온은박이 아뢰기를
    “위징은 인신(人臣)인 이상 반드시 그의 본심이 누구에게나 알 수 없도록 언동을 하여 의심을 살 여지가 없도록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런데도 그러한 혐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남에게서 고해바치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것은 위징의 심경에는 사심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그에게도 또한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태종은 온은박을 통하여
    “그대는 나를 간하여 바로잡아 준 것이 지금까지 수 백 건에 이르고 있다. 그러니 어찌 사소한 일을 가지고 간단하게 그대의 훌륭한 많은 일을 손상시킬 수 있겠는가? 그러나 앞으로는 본심을 분명하게 밝혀 언동을 확실하게 하도록 하라.” 고 전하였다.

    그러한지 며칠 뒤에 태종은 위징에게 물어 말하기를
    “근자에 외부에 있어서 무엇인가 옳지 않은 일을 들은 일이 없는가?” 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위징은 정색을 하면서
    “지난 번에 온은박에게 폐하의 조서를 저에게 하달하게 하시고 ‘무슨 까닭으로 본심을 분명히 밝혀 남에게 혐의를 받지 않도록 하지 못하는가?’ 하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옳지 않았습니다. 제가 듣기로는 ‘군신(君臣)이라는 것은 그 뜻이 일치하여 그 관계기 일심동체다’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아직까지 사심 없는 바른 도리를 행하지 않고, 다만 외면적으로 남에게 의심받지 않을 일만 주로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만약 군신이나 상하나 모두가 외면적으로 남의 평판만을 생각하는 길을 따른다면 나라가 흥하는 것인지 멸하는 것인지 분간할 수가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이 말을 들은 태종은 깜짝 놀라 자세를 바로잡으면서
    “내가 앞서 의심받을 행동을 하지 말라는 말을 한 뒤에 곧 그것을 후회했다. 참으로 대단히 옳지 않는 말을 했다. 그러므로 그대도 또한 이런 일로 해서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말고, 숨기거나 거리끼는 마음을 가지지 말고, 전과 다름없이 하고 싶은 말을 다 해 주기 바란다.” 하였다.

    여기서 위징은 정중하게 배례(拜禮)하면서
    “저는 저의 목숨을 나라를 위해 바쳐 어디까지나 바른 길을 행하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결코 폐하를 속이거나 배반하는 짓을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아무쪼록 폐하께서는 저를 양신(良臣)으로 만들어 주시기를 바랄 뿐 저를 충신(忠臣)으로 만들려 하지 마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하였다.

    이에 태종이
    “충신(忠臣)과 양신(良臣)은 어떻게 다른가?” 하고 물었다.

    위징이 대답하기를
    “양신(良臣)이라 함은 옛날 성천자(聖天子)인 순(舜)임금의 조정에서 섬긴 직(稷), 계(契), 구요(咎繇) 등이 그러합니다. 충신(忠臣)이라 하는 것은 옛날 포악한 천자인 하(夏)의 걸왕(桀王)의 신하였던 용봉(龍逢)이나 은(殷)이 주왕(紂王)의 신하였던 숙부인 비간(比干)이 그렇습니다.

    양신(良臣)은 그 자신은 후세에 추앙되는 훌륭한 이름을 얻고, 군주에게는 성천자라는 훌륭한 칭호를 받도록 하며, 자손 대대로 그 가계(家系)가 이어져 끊이지 않아 그 행복은 한량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충신(忠臣)은 그 자신은 물론이요 그 일족이 몰살 당하고, 그 군주는 폭군으로 떨어지고, 나라도 가문도 다 멸망하고, 다만 충신이었다는 이름만 후세에 남기게 됩니다.

    이런 점으로 말씀 드리면 양신과 충신은 엄청나게 다른 것입니다.”
하였다.

    이 말을 듣고 태종은
    “그대는 다만 이 말이 어긋나지 않게 하라. 나는 반드시 나라를 바르게 다스릴 계획을 잊지 않을 것이다.” 하고는 위징에게 포상으로 비단 3백 필을 하사하였다.

◆ 대화(52) 제왕은 그 취미를 삼갈 것이다.
    정관 9년(서기635년) 태종이 시신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제왕이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그 즐기는 것에 대하여 신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오직 수렵에 쓰는 매나 개나 명마(名馬) 혹은 음악이라든가 미녀 특별히 진기한 음식이라도 내가 그것을 원하기만 한다면 곧바로 희망에 따라 손에 얻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일은 사람으로서의 정도(正道)를 깨뜨리는 일이다. 마찬가지로 마음이 옳지 않는 간사하고 아첨하는 신하도, 충성되고 곧은 신하도 그때의 군주가 좋아하는 바에 따라서 모이게 마련이다.

    만약 임용하고자 하는 신하에 현자를 얻을 수 없다면 어찌 나라가 멸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에 시중인 위징이 답하여 말하기를
    “저는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옛날 제(濟)의 위왕(威王)이 순우곤(淳于곤)에게 ‘내가 즐기고 있는 것은 옛날의 제왕과 같은가? 그렇지 않은가?’하고 물었습니다. 이에 곤이 말하기를 ‘옛날의 제왕이 즐긴 것은 네 가지였습니다만, 지금 임금께서 즐기시는 것은 다만 그 중 세 가지 뿐입니다.

    옛날의 성왕(聖王)은 여색(女色)을 좋아하였습니다. 임금께서도 그것을 좋아하고 계십니다.
    옛날의 성왕은 양마(良馬)를 좋아하였습니다. 임금께서도 그것을 좋아하고 계십니다.
    옛날의 성왕은 진기한 음식을 좋아하였습니다. 임금께서도 그것을 좋아하고 계십니다.
    다만 한 가지만 같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옛날의 성왕은 현자(賢者)를 좋아하였습니다. 그러나 임금께서는 현자를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하였습니다.

    이제 제왕(濟王)이 말하기를 ‘좋아할 만큼 가치 있는 현자가 없기 때문이다’ 하였습니다. 이에 곤이 말하기를 ‘옛날의 미녀에는 서시(西施), 모장(毛장)이 있었고, 진기한 음식으로는 용간(龍肝), 표태(豹胎)가 있었으며, 양마로는 비토(飛兎), 녹이(綠耳)가 있었습니다. 그런 것은 지금 세상에서는 벌써 없어졌습니다.

    그렇지만 임금님의 찬간(饌間)이나 후궁(後宮) 또는 마구(馬廐)에는 옛날의 미녀나, 옛날의 좋은 음식이나, 옛날의 양마에 필적할 만한 것들이 모두 갖추어져 있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임금님께서는 지금 시대에는 옛날의 현자(賢者)만한 인물이 없다고 생각하십니다.

    대체 지난 시대 현자가 지금의 임금님과 만날 수 있는 일입니까? 어떠하십니까? 미녀, 양마와 마찬가지로 열의를 가지고 구하신다면 얻을 수 있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였습니다.”
라고 하였다.

    태종이 위징의 이야기를 듣고 깊이 찬의를 표하였다.

◆ 상표문(3) 방현령(房玄齡)이 고구려(高句麗) 정벌을 반대한 상소.
    (주기) <정관17년 당태종에게 고구려 정벌을 반대하던 위징은 죽고,
              정관18년(서기644년) 당태종이 고구려 친정에 나서 결국 안시성 싸움에서 참패하고 철수한 후,
              정관22년(서기648년) 당태종이 고구려를 재차 정벌하려 하자
                  임종에 가까운 방현령이 고구려 정벌을 중지할 것을 상소한 것이다.
              당태종은 결국 재차 고구려 정벌에 나서지 못하고, 정관 23년(서기649년) 8월 죽고, 고종이 즉위하였다.>

    정관 22년(서기648년)에 태종이 거듭 고구려를 정벌하고자 했다. 이 때 방현령(房玄齡)은 병상에 누워 위독한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그러나 아들들을 돌아보면서
    “지금은 천하가 평화롭고 모든 것이 잘 되어 가고 있다. 다만 천자께서 동쪽에 있는 고구려를 정벌하고자 하신다. 이것을 그만 두지 않으면 반드시 장차 나라에 해가 될 것이다.
    천자께서는 고구려의 무례함을 격노하시어 정벌을 결의하시고, 신하 중에서는 천자가 불쾌하게 여기시더라도 이를 무릅쓰고 나아가 간하는 자가 없다.
    내가 이것을 알면서도 말하지 않는 것은 마음에 한을 품은 채 땅 속에 묻히는 것이 된다.”
하면서 기어이 상표문(上表文)을 받들어 태종에게 간하였다.

< 상표문(上表文) 전문 >
    “저는 이러한 말을 듣고 있습니다. ‘병(兵)은 모으지 않는 것을 미워하고, 무(武)는 창을 그치는 것을 존중한다’ 고 합니다.

    지금 세상은 폐하의 덕화가 어떠한 먼 곳에라도 미치지 않는 곳이 없어 상고에는 칭신(稱臣)하여 받들지 않던 나라도 폐하께서는 모두 신하로 삼으시었고, 제어하게 어렵던 이민족도 모두 제어하시었습니다.

    여러모로 고금의 역사를 관찰하건대 중국에 대하여 근심거리였던 것은 돌궐(突厥)보다 더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것을 폐하께서는 움직이지 않고 궁중에 계시면서 신(神)과 같은 책략(策略)으로 정벌의 수고도 없이 크고 작은 가한(可汗: 돌궐 추장)들이 속속 항복하여 이제 와서는 금위(禁衛)의 호위(護衛)를 분담하여 창을 들고 대열에 끼어 있습니다.

    그 뒤 설연타(薛延陀)가 맹위를 떨쳤습니다만 얼마 가지 않아 전멸되었고, 철륵(鐵勒)은 폐하의 은의를 사모하여 중국에 귀속하여 주현(州縣)의 설치를 원하고, 사막 이북은 만리에 걸쳐 티끌 하나 일어나지 않는 상태입니다.

    고창(高昌)이 멀리 유사(流砂) 일대에서 반역하였고, 토곡혼(吐谷渾)이 적석산(積石山) 일대에서 어정쩡한 태도를 취했습니다만 일부의 군대를 파견했을 뿐으로 어느 것이나 다 평정하였습니다.

    그런데 고구려는 역대에 걸쳐서 주벌(誅罰)에서 벗어나 이것을 토격(討擊)하지 못했습니다. 폐하께서는 그들이 반역하여 난리를 꾸미고, 주군을 죽이고, 백성을 학대함을 꾸짖어 스스로 대군을 인솔하시어 문죄(問罪)의 군을 일으켜 열흘도 지나지 않아 요동을 공략하여 떨어뜨리시어 전후의 포로가 수십만에 미치고, 그들을 여러 주에 분배하셨으므로 어디를 가나 그들 포로로 꽉 차 있습니다.

    수대(隋代) 이래 중국에 쌓였던 치욕을 씻고 지난 날의 전사자의 유해를 매장하시었습니다. 그 공덕을 비교한다면 전대 제왕들의 만 배에 이릅니다. 그것은 성명(聖明)하신 폐하께서 스스로 잘 알고 계시는 일이므로 저 같은 사람이 자세하게 이야기할 것은 아닙니다.

    그 위에 폐하의 인자하신 은혜는 나라 안 구석구석까지 미쳐 그 효(孝)의 덕은 부군(父君)을 하늘에 배(配)하여 제사하는 최고의 것입니다.

    이민족의 멸망의 기미가 보이면 틀림없이 몇 해 뒤에 있을 것을 지적하시고, 장수에게 명령을 내리실 때는 만리의 먼 곳에 전기(戰機)를 결정하시어 그 결과의 보고가 들어오는 것은 마차 신(神)이 앞 일을 내다보는 것과 같아 계략에 조금도 틀림이 없으십니다.

    대오 중에서 장수 재목을 발탁하시고, 범용한 모임에서 인물을 찾아 내시며, 먼 나라에서 온 이민족의 사자라도 한번 보실 뿐으로 잊지 않으시고, 별것 아닌 하급 관리의 이름도 한 번에 기억하시며, 쏘시는 화살은 일곱 겹 갑옷의 비늘을 꿰뚫고, 활은 여섯 균(鈞:
1균은 30근) 의 강궁(强弓)을 당기십니다.

    그 뿐만 아니라 서적이나 시가(詩歌), 문장(文章)에도 관심을 가지셔 필적은 옛날 종요(鐘繇), 장지(張芝)를 앞서고, 문장은 조식(曹植), 사마상여(司馬相如)에 앞서십니다.

    만민에게는 자애가 깊으시고,
    군신(群臣)을 예우하시고,
    작은 선행도 칭찬하시고,
    법망(法網)은 관대하고,
    되는 대로 사람을 벌주지 않으시며,
    귀에 거슬리는 간언도 반드시 들으시고,
    교묘하게 남을 중상하는 말은 딱 잘라 거절하시고,
    생명을 좋아하시는 덕은 개울물을 막고 물고기를 잡는 것을 금하시고,
    살생을 미워하시는 착한 마음은 도살장에서 칼을 휘두르지 못하게 하시며,
    일부러 수레에서 내리시어 화살에 맞아 다친 이사마(李思摩)의 고름을 빠셨으며,
    그 집에까지 가시어 위징(魏徵)의 관 앞에서 그의 죽음을 조상하시었고,
    전몰 졸병을 제사하여 곡하실 때는 그 슬픔이 전군을 통곡시키셨고,
    요동(遼東)의 싸움에서는 진창길에 사졸과 함께 흙을 져다가 메우셨으며,
    백성의 생명을 중히 여긴 점에 있어서는 특히 형옥(刑獄)의 신중을 기하셨습니다.

    저는 병으로 마음이 혼미하여 아무리 하여도 폐하의 위대한 공적을 다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폐하께서는 제왕으로서의 모든 좋은 점은 완전히 갖추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번의 고구려 정벌에 대하여 깊이 폐하를 위하여 이것을 애석하게 여기고 심히 경솔하다고 여깁니다.

    「주역(周易)」에 ‘나아갈 줄 알면서 물러설 줄 모르고, 보존함을 알면서 망하는 것을 모르고, 얻는 것을 알면서 잃는 것을 모른다면 이것이 성인인가?’라고 이르고, 또 이어서 ‘진퇴(進退)와 존망을 알면서 그 정(正)을 잃지 않는 자는 그것이 오직 성인인가?’ 하였습니다.
    이에 의하여 말씀 드리면 나아감에는 물러남의 뜻이 있고, 존(存)은 망(亡)의 기틀이며, 득(得)은 상(喪)의 이치입니다.
    노신이 폐하를 위해 애석하게 여기는 이유는 이러한 점에서 여쭙는 말씀입니다.

    노자(老子)‘족(足)한 것을 알면(知) 부끄럽지 않고(不辱), 그칠(止) 줄을 알면(知) 위태롭지 않다(不殆)’ 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생각하기로는 폐하의 위명(偉名)과 공덕(功德)은 충분히 족하고, 영토를 확장하는 일도 그만 그칠 때라고 여깁니다.

    저 고구려 같은 것으로 말씀 드리면 까마득하게 먼 변경의 보잘것없는 이민족으로서 인의(仁義)의 도(道)로써 대우할 상대도 아니고, 중국의 예의를 요구할 만한 상대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약간 무례한 짓을 하더라도 너그럽게 보아 모른 척하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만약 그들을 멸종시키고자 하신다면 짐승도 쫓기다 몰리면 돌아서서 물어뜯는 것이니 고구려도 반드시 완강하게 저항할 것입니다.

    더욱이 폐하께서는 사형수를 재결하심에 있어서도 반드시 세 번을 조사하고 다섯 번을 주상하여 절대로 틀림이 없다고 할 때에 비로소 사형에 처하십니다. 그리고 그 집행하는 날에는 고기 없는 소식(素食)을 권하고, 음악을 금하시는 것은 사람의 목숨은 소중한 것으로서 거룩한 자애심을 감동시키시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병사들은 아무런 죄도 없고, 이유도 없이 전쟁터로 끌려나가 칼날 아래 목숨을 던져 그들의 간(肝)과 뇌(腦)는 진창에 짓밟히고, 그 혼백은 갈 곳이 없습니다. 그들의 늙은 부모나 어린 자식, 남편을 잃은 아낙들은 관을 실은 수레를 바라보며 눈물을 짓고, 고골(枯骨)을 끌어안고 가슴을 두드립니다.
    이렇게 된 많은 백성의 슬픔이 모이는 곳은 반드시 음양의 변화가 생겨 날씨가 불순해지고, 농사는 흉작이 되며, 온 국민의 격렬한 원한이 될 것입니다.

    그뿐이겠습니까? 병기는 흉기이고, 전쟁은 위험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득이한 경우에 한해서 쓰는 것입니다.
    가령 고구려가 당조(唐朝)에 대하여 신하로서의 절의를 지키지 않는다면 폐하께서는 그를 주벌(誅罰)하시어도 상관없습니다.
    고구려가 중국의 인민을 침략한다면 폐하께서는 그를 멸하셔도 상관없습니다.
    고구려가 영원히 중국에 대하여 해를 끼치는 근심거리가 된다면 폐하께서는 그를 공격하여 항복시키셔도 상관없습니다.
    그 중에 어느 것 하나만이라도 있다면 설사 우리 병졸을 하루에 만 명을 죽이는 전쟁을 한다 해도 부끄러운 행위가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세가지 중 해당하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다만 중국을 번거롭게 하고,
    저들의 내란에 의해 막라지(莫離支
: 연개소문)가 그 군주인 고무(高武)를 죽이고,
    고구려 국정을 전단하고 있는 것을 옛 왕을 위해 한을 풀어주고,
    막라지가 신라를 침략한 것에 대하여 복수를 해 준다는 이유 뿐입니다.
    얼마나 얻는 것은 적고, 손실은 지나치게 큰 것이겠습니까?

    아무쪼록 폐하께서는 황조(皇祖)이신 노자(老子:
唐 宗姓 롱西李氏의 始祖라함)지족(止足)의 계(戒: 노자의 ‘知足不辱, 知止不殆’를 말함) 에 따라 만세에 걸치는 명예를 보전하시고, 빛처럼 광대한 은혜를 발하시고, 관대한 조서를 내리시어 양춘(陽春) 같은 덕택(德澤)은 베푸시어 고구려를 용서하여 반성시키시고, 바다에 띄워 있는 큰 선단(船團)을 불사르시어 응모한 병졸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신다면 자연히 중국도 이민족도 모두 폐하에게 따르고, 먼 곳에 있는 나라도 조용해지고, 가까운 국내도 평화로워질 것입니다.

    저는 노변 중에 있는 삼공(三公)으로서 머지 않아 세상을 떠날 것입니다. 다만 유감인 것은 저의 티끌 같고 이슬 같은 작은 힘이 폐하의 바다 같고, 산 같은 위대한 덕에 조금이라도 공헌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삼가 죽은에 임하여 남은 목숨이 끝날 때가지 다하여 사후에 풀을 묶어 생전의 은혜를 갚았다(結草報恩)고 하는 옛날 위무자(魏武子)의 첩(妾)의 노부(老父)의 정성을 미리 대신하고자 합니다.

    만약 나의 죽음에 임한 가련한 울부짖음이 받아들여진다면 저는 죽더라도 썩지 않을 것으로 믿습니다.”


    태종이 이 상표문을 읽고 탄식하며
    “이 사람은 이와 같이 위독한 상태에 있으면서도 우리 나라의 전도에 대하여 우려하고 있다. 참다운 충신이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