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정요(貞觀政要)
沙月 李 盛 永(2007.2.11)
서 언
    요즈음 중국의 소위 ‘동북공정’으로 우리의 고조선, 고구려, 발해 역사를 통째로 탈취해 가려는 기도에 자극을 받았기 때문인지 TV 3사가 경쟁이라도 하듯 고구려-발해 때 이야기를 드라마로 엮어가고 있다. 맨 먼저 시작한 MBC TV는 월, 화 드라마로 ‘주몽’, 그 후발로 SBS TV와 KBS 1TV는 토, 일 주말드라마로 ‘연개소문’‘대조영’을 방영하고 있다.

    ‘주몽’은 고구려를 건국하는 과정이니까 시대적으로 좀 앞서지만, ‘연개소문’과 ‘대조영’은 약간의 연대가 차이 날 뿐 비슷한 시대를 배경으로 비슷한 주인공들이 등장하기 때문에 드라마 내용을 갖고 헷갈릴 때가 많다. 더구나 방영시간도 저녁 9시와 10시로 약간의 시간이 겹치고 있어 두 가지를 다 시청하려면 ‘연개소문’이 끝나자 마자 다음이야기를 접고, 곧바로 채널을 바꿔도 ‘대조영’이 이미 시작하여 조금 진행된 상태이다. 시청자에 대한 배려는 없고, TV 3사 입장만 고려한 탓으로 생각된다.

    또 ‘연개소문’은 고구려 장수를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인데 거의 반 정도의 장면이 중국 즉 수나라와 당나라에 관한 이야기로 전개된다.
    달반 전 어느 주말에은 당나라 고조 이연의 아들들의 정쟁에 관한 이야기가 방영되었는데, 장남 태자 건성(健成)과 4자 제왕(齊王) 원길(元吉)이 합심하여 2자 진왕(晉王) 세민(世民)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진왕이 간파하고 선수를 쳐서 태자와 제왕을 주살하고 태자의 책사 위징(魏徵)을 색출해 참살하라고 명했다가 위징의 의젓한 태도와 조리 있는 대변에 태종의 마음이 동하여 위징을 죽이지 않고, 자기의 신하로 만드는 과정이 나온다.

    당나라 건국 후 제2대 황제 자리를 놓고 형제간에 세력투쟁을 할 때 책봉된 태자 건성에게는 위징이 책사로 있었고, 제2자 진왕 이세민에게는 방현령(房玄齡)이 책사로 있었다. 세력투쟁에서 승리한 진왕 이세민은 정적이던 태자의 책사 위징도 포섭하여 방현령과 함께 이들의 올바른 말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황제 재위기간 627년-649년, 24년간 후세 사가들이 소위 ‘정관(貞觀)의 치(治)’라 칭송하는 정치철학의 황금시대를 이룩한다.

 ‘정관(貞觀)’은 당 태종 재위기간 24년 동안의 연호(年號)이다. 중국의 역대 왕조의 연호를 보면 ‘연대를 구분하기 위한 것’ 이상의 의미 즉 ‘국정지표(國政指表)’와 같은 뜻을 가지고 있다. 요즈음 우리나라 정권들이 내거는 슬로건으로 ‘문민정부’니, ‘국민의 정부’니, ‘참여정부’니 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한 황제가 재위 기간 1개의 연호만 갖는 것은 아니다. 당 고종의 경우 재위기간 34년 동안에 모두 14개 (永徽 6년, 顯慶 5년, 龍朔 3년, 麟德 2년, 乾封 2년, 總章 2년, 咸亨 3년, 上元 2년, 儀鳳 3년, 調露 1년, 永隆 1년, 開耀 1년, 永淳 1년, 弘道 1년)의 연호가 제정된다

    정관(貞觀)은 ‘신하와 백성의 소리를 똑바로 들어 세상을 곧게(貞) 본다(觀)’는 뜻이다. 당나라가 한(漢)나라 이후 500여년간의 혼란을 수습하여 중국을 통일하고, 300여년 간의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웠던 것도 초창기 ‘정관의 치’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사가들은 평가하고 있다. 이러한 찬란한 당나라 문화는 중국에 국한되지 않고 우리나라의 신라, 백제, 고구려 문화, 일본의 나라(奈良)와 헤이안(平安) 문화 등 동양 제국의 문화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당나라는 '하늘에서 귀양온 시선(詩仙)'이란 뜻으로 '적선(謫仙)'이라 한 이백(李白: 李太白)과 또한 '시성(詩聖)'이라 불리던 두보(杜甫: 杜子美)를 낳았고, 중국 문학의 황금기, 당(唐)-송(宋)대의 여덟 문장가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한유(韓愈: 韓退之)유종원(柳宗元)이 당나라가 낳은 문장들이다.

    이들은 우리나라 조선조 글하는 선비들의 귀감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일반 서민들에게도 선망의 대상이었다. 어머니가 어린 아기에게 불러주는 자장가 중에 "동방삭이 명을 주고, 석숭이 복을 주고, 이태백이 글을 준다" 하는 구절이 있다. 내가 어릴 때도 어머니가 어린 동생들을 재우면서 부르는 것을 많이 들었다.
    시문학 뿐만 아니라 조정과 지방 관제, 관혼상제 의식 등 많은 제도와 문물이 당나라의 것을 따 온 것이 많다.

    당태종은 24년간 재위에 있었는데 이 때가 당나라의 기틀을 잡는 시기로 후세의 사가나 정치평론가들로부터 ‘총명신무(聰明神武)’라는 찬사를 들을 만큼 훌륭한 군주로 기록되고 있다. 이는
    수나라 말기 혼란한 군웅할거 시대를 평정한 뛰어난 전략가이기도 하지만,
    재위기간 동안에 뛰어난 관제(官制)를 확립하였고,
    간의대부(諫議大夫)에 위징(魏徵)을 임명하는 등 적재 적소에 인재를 등용하여 기탄 없는 간언을 서슴없이 수렴하는 등 선치의 결과인 것이다.

    당태종은 진시황이나 한무제가 신봉했던 신선(神仙) 따위의 생각을 배격하고, 스스로는 유교(儒敎)정신에 입각하여 치국(治國)의 방침을 굳히고, 유학의 학문적 소양이 높고, 정치의 본질을 아는 자들로 하여금 국사를 맡도록 하였다.
    이러한 태종의 면모를 보여주는 사건으로
    (1)즉위 초기에 수나라 신하로써 수양제 시역(弑逆)에 가담했던 자들을 모조리 죄인으로 다스린 것과
    (2)유학의 경전인 오경(五經: 詩經, 書經, 易經, 春秋, 禮記)을 학자들로 하여금 알기 쉽게 정리하여 「오경정의(五經正義)」를 펴내 널리 보급한 것.(드라마에서 도교를 당나라 국교로 삼고, 고구려에 신봉하도록 강요하는 장면은 좀 이해가 안간다.)
    (3)또 궁녀 3천을 방귀(放歸: 궁을 내보내 귀가 시킴) 시키고 무고한 백성이 벌받지 않게 한 것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태종에게도 실수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고구려 정벌에 나선 것이 대표적인 예다. 고구려 정벌을 실패한 후 깊은 회오에 빠져있었다고 한다. 그렇게도 신뢰했던 위징이 죽은 후 도리어 불신하여 '고구려 정벌은 말리지 못했다' 는 문책으로 그의 묘비를 철거시켰다가 다시 세워주기도 했다고 한다.

    당태종이 죽은 후 50년쯤 뒤에 오긍(吳兢)이란 역사가가 당태종 시대의 정치철학을 정리하여 전 10권 40편에 달하는 책을 펴내어 「정관정요(貞觀政要)」라 하였다. 당태종과 신하들 특히 위징, 방현령 등과 정치에 관하여 주고 받는 대화형식으로 집필하였다
    태종과의 대화 상대로 나오는 신하로는 위징, 방현령, 왕규가 많이나오고, 그 외에도 봉덕이, 저수량, 잠문봉, 온은박, 곡나율, 소우, 고사렴, 두정륜, 두업, 유계, 두덕소, 조원해, 두여회, 이대량 등이 등장한다.

    「정관정요」의 저자 오긍(吳兢)은 당나라 중종, 현종 시대의 사관(史官)으로 현종 8년(서기 749년)에 80세 죽었는데 당나라 「사통(史通)」의 저자 유지기(劉知幾)와 함께 당시 일류 사가로 알려졌으며, 특히 「무후실록(武后實錄) 」편찬시는 곡필아세(曲筆阿世) 하지 않은 사람으로 널리 알려져 왔다.

    오긍(吳兢)정관정요를 쓰게 된 동기는 당나라 국가적 위기에 처허여 이를 극복하고 나라의 기틀을 바로잡고자 하는 충정에서 였다고 보고 있다.
    즉 영휘(永徽) 6년(서기 655년) 당 고종의 왕후가 된 측천무후(則天武后)가 고종이 만년에 중풍으로 눕자 모든 국가권력을 전단하였고, 고종이 죽자 어린 장자를 중종(中宗)에 앉혔다가 고분고분하지 않자 갈아치우고, 차자를 예종(睿宗)에 앉혀 전횡을 일삼다가 그도 모자라 사성(嗣聖) 7년(서기 690년) 측천무후 스스로 제위에 올라(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황제) 나라 이름을 주(周)로 고치고, 당 종실 사람들을 차례로 살해하였다.

    측천무후에 대한 저항세력들이 잇달아 일어났으나 모두 실패하고, 무씨(武氏: 측천무후의 성씨, 원이름은 무미랑) 일족에 의한 전제정치가 극성을 떨쳐 당나라는 존망의 위기를 맞는다. 다행이 무후가 노쇠하고, 병약해 지자 이를 틈타 장간지(張柬之)가 중종을 복위시켜 당나라 왕조를 회복하기에 이른다.

    오긍(吳兢)은 일찍부터 사관이 되었기 때문에 태종이 나라의 기초와 백년의 근본을 튼튼히 쌓기 위하여 어떤 노력을 기울였으며, 인재등용, 민심수렴, 탁월한 지도자적 풍모 등 태종에 관한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당나라 부흥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당태종의 굳건한 정치철학'이 절실하다고 믿었다.
    그래서 이 책을 써서 복위된 중종에게 당나라의 재건과 중흥을 위한 정치철학과 비결을 제공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중종은 그 그릇이 못되어 황후 위씨(韋氏)의 말에만 귀를 기울이다가 급기야 위씨일가의 전횡시대를 맞는다. 이 책의 저자 오긍의 기대는 빗나간 것이다.

    그러나, 이 「정관정요」책은
    당(唐)나라 때 헌종(憲宗: 서기 806년-820년), 문종(文宗: 서기 827년-840년)이 애독하였고, 선종(宣宗: 서기 847년-859년) 때는 주요 내용을 병풍으로 만들어 황제가 기거하는 방에 펴두고 늘 읽었다 하며,
    ② 송(宋)나라 인종(仁宗: 서기 1023년-1063년)이 애독하였고,
    ③ 요(遼)나라 흥종(興宗: )이 애독하였고,
    ④ 금(金)나라 세종(世宗: 서기 1161년-1189년)은 각본으로 펴내어 읽기를 권장하였고,
    ⑤ 원(元)나라 세조(世祖: 서기 1264년-1294년)가 애독하였고,
    ⑥ 명(明)나라 헌종(憲宗: 서기 1465년-1487년)이 간각(刊刻)하여 보급하였으며, 신종(神宗: 서기 1573년-1619년) 또한 애독하였고,
    ⑦ 청(淸)나라 고종(高宗: 乾隆帝, 서기 1736년-1795년) 역시 애독하고, ‘독정관정요(讀貞觀政要)’라는 시를 짓고, ‘정관정요서(貞觀政要序)’라는 글도 짓고, 이어서 ‘당태종론(唐太宗論)’이란 글도 지었다고 한다.
    ⑧ 일본에서는 유학자들이 탐독하고 덕천가강(德川家康)은 1593년 이책을 강의하게 하였고, 1600년에는 이 책을 개방하여 널리 보급하였다고 한다.


    이 「정관정요」책에 실린 내용은 비록 전제군주 시대의 군주의 지도자적 품성을 다듬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정리된 것이지만 오늘날의 민주주의 시대 국가 지도자의 품성 함양과 민심 소재의 파악, 위민정책을 입안과 추진에 부족함이 없는 책이다.     오긍의 「정관정요」를 편역하여 내 손에까지 들어오게 된 이 唐太宗「정관정요」
    1986년 번역 당시 내무부장관 김종호(金宗鎬) 편역자의 번역문,
    오긍(吳兢)의 원문(漢字),
    편역자의 자해(字解)
    편역자의 풀이
    편역자의 추가 해설
순으로 엮어져 있다.

    「정관정요」책은 총 56개 대화 주제가 7개 장(章)으로 정리되고, 8장에 위징 등의 상소문이 실려 있다. 내용이 길기 때문에 다음과 같이 4개로 구획하여 옮기고, 추려서 '정관정요초(貞觀政要抄)'를 별도로 올린다.다.
    정관정요-1: 서언, 제1장(군주는 배, 백성은 물: 대화1-8), 제2장(善을 행하면 번영하고, 惡을 행하면 멸망한다: 대화9-16),
    정관정요-2: 제3장(민중을 직접 다스리는 지방관일수혹 좋은 인물이 필요하다: 대화17-24), 제4장(피서 궁전을 짓자는 진언을 물리치다: 대화25-32),
    정관정요-3: 제5장(법의 적용을 신중히 하여 무고한 죄인이 없게 하다: 대화33-43), 제6장(良臣과 忠臣은 어떻게 다른가?: 대화44-50),
    정관정요-4: 제7장(군주가 暗愚하고 신하가 아첨하면 나라는 망한다: 대화51-56), 상소문(4개 중 1개, 房玄齡이 高句麗 정벌을 반대한 상소)
    정관정요抄) 56개대화 중에서 21개, 상소문 1개房玄齡이 高句麗 정벌을 반대한 상소)

정관정요(貞觀政要)


    이 글을 파일작업 하는 도중, 2007년 2월 10일자 조선일보 東아시아칼럼 난에 「‘帝國의추억’에 빠져드는 중국」이라는 박승준 북경지국장의 글을 접하게 되었는데 지금 중국에서는 중국중앙TV 채널1에서 박력이 넘치는 당태종 이세민(李世民)을 주인공으로 한 82부작 드라마 ‘정관장가(貞觀長歌)’가 절찬 중에 8일자로 24부까지 방영되었고, 이 정관장가가 끝나면 후속 편으로 ‘정관지치(貞觀之治)’라는 또 다른 당태종 이세민이 등장하는 드라마를 준비 중에 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TV에서 당(唐)나라 바람이 불자 출판사들이 앞 다투어 ‘대당제국 (大唐帝國)’, ‘정관정요(貞觀政要)’같은 당나라를 배경으로 한 책들을 내놓고, 드라마에서 책까지 당나라가 넘쳐 나자 중국의 신문과 방송에는 ‘장안(長安)의 열정’이니, ‘대당(大唐)의 기상’이니 하는 말들이 여기 저기 나돌고, ‘2007년은 관당년’(觀唐年: 당나라를 바라보는 해)이라는 말까지 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이 책 내용을 홈페이지에 올리는 것이 마치 중국의 '당나라 열풍'을 거드는 결과가 되는 것 같아 좀 꺼름직하기는 하지만 그런 중국의 당나라 열풍과는 관계 없이 책의 내용이 정치철학이 실종한 우리나라 이 시대에도 좋은 거울이 될 수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그대로 소개하려고 한다.

정관정요(貞觀政要)-1

    정관정요 책은 총 56개 대화 주제가 7개 장(章)으로 정리되고, 8장에 위징 등의 상소문이 실려 있다. 내용이 길기 때문에 다음과 같이 4개로 구획하여 옮기고자 한다.
    정관정요-1: 서언, 제1장(군주는 배, 백성은 물: 대화1-8), 제2장(善을 행하면 번영하고, 惡을 행하면 멸망한다: 대화9-16),
    정관정요-2: 제3장(민중을 직접 다스리는 지방관일수혹 좋은 인물이 필요하다: 대화17-24), 제4장(피서 궁전을 짓자는 진언을 물리치다: 대화25-32),
    정관정요-3: 제5장(법의 적용을 신중히 하여 무고한 죄인이 없게 하다: 대화33-43), 제6장(良臣과 忠臣은 어떻게 다른가?: 대화44-50),
    정관정요-4: 제7장(군주가 暗愚하고 신하가 아첨하면 나라는 망한다: 대화51-56), 상소문(4개 중 1개, 房玄齡이 高句麗 정벌을 반대한 상소)

    ◆ 대화(1) 군주로서의 마음의 자세
    정관(貞觀) 연대 초에 태종이 시신(侍臣)들에게 말하기를
    “군주로서 도리는 반드시 먼저 백성을 아끼고 가엽게 여겨 이를 보살피는 것이다.
    만약 백성을 괴롭힘으로써 자기 몸을 받들고자 함은 마치 자신의 넓적다리를 떼어 배를 채움과 같다. 그러면 배는 부르면서 몸은 쓰러진다.

    천하가 태평하기를 바란다면 모름지기 먼저 그 몸을 바르게 가져야 한다. 일찍이 몸을 바르게 가지고도 그 그림자가 굽은 것을 보지 못하였으며, 군주가 잘 다스리는데 백성이 어지러웠던 일은 없었다. 짐(朕)은 매양 이것을 생각한다.
    자신을 손상케 하는 것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 자신의 안에 있는 욕망에 의해서 그 재화(災禍)를 불러들이는 것이다.

    만약 입에 맞는 음식에 마음을 빼앗기거나 성색(聲色: 목소리와 얼굴빛, 음악과 여색)에 빠져 이를 즐긴다면 하고자 하는 바가 많아지고 씀씀이도 커진다. 그러면 정사는 그르치고 또 백성은 흩어진다.

    그리고 한마디라도 이치에 어긋나는 말을 하면 만백성은 이로 말미암아 통일을 잃고 분산한다. 백성의 원성이 일어나고 민심의 이반(離叛)이 생긴다. 짐은 늘 이것을 생각하고 감히 방일(放逸: 함부로 함)하지 못한다.”
하였다.

    이에 대하여 간의대부(諫議大夫) 위징(魏徵)이 답하여 아뢰기를
    “옛날의 성군들은 가까이 있는 일(現實)을 몸소 실천하여 능히 멀리 있는 모든 사물(理想)을 체득하였습니다.
    옛날 초(楚)나라에서는 섬하(詹何)를 초빙하여 치국(治國)의 대요를 물으니 첨하는 수신(修身)하는 방법에 대하여 대답하였습니다.

    초왕이 다시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을 물으니 섬하는 ‘군주가 자기 몸을 다스리고서도 나라가 어지러워졌다는 말을 아직 듣지 못하였습니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폐하께서 밝히신 바는 실로 고인(고인: 옛 성인)의 뜻과 같습니다.”
하였다.

    ◆ 대화(2) 창업(創業)과 수성(守成), 어느쪽이 어려운가?
    정관(貞觀) 10년(서기636년)에 태종이 시신(侍臣)들에게
    “제왕(帝王)의 업(業)으로 초창(草創) 곧 창업(創業)과 수문(守文) 곧 수성(守成) 중 어느 쪽이 더 어려운가?” 하고 물었다.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방현령(房玄齡)이 답하여 아뢰기를
    “천하가 어지러우면 군웅이 다투어 일어납니다. 적을 공파(攻破)해서 항복을 받고, 싸워서 이겨 겨우 세상을 평정합니다. 이러한 연유로 말씀드리자면 초창(草創) 쪽이 어렵다고 생각됩니다.”하였다.

    위징이 답하여 아뢰기를
    “제왕이 일어나면 받드시 전대의 쇠퇴하고 어지러웠던 일들을 이어받게 되니, 저 음침하고 교활한 자를 뒤엎었으니 백성들은 즐거이 천자를 추대하야 사해(四海: 온 세상)가 천명(天命)으로 돌아옵니다. 이것은 하늘이 내려주고, 백성으로부터 받는 것이니 어려운 일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미 천하를 얻은 뒤에는 제왕이 지향하는 바가 교만해지고, 방일 해 집니다.백성이 안정을 되찾고자 하나 부역이 그치지 않습니다. 백성은 지칠 대로 지쳤건만 사치한 사업은 그치지 않습니다. 나라가 쇠퇴하는 것은 언제나 이런 일로 말미암아 일어납니다. 이로써 말씀 드리면 수문(守文) 쪽이 더 어렵습니다.”
하였다.

    태종이 이르기를
    “현령은 지난날 나를 따라 천하를 평정하였으므로 간난(艱難)과 신고(辛苦)를 고루 경험하면서 거의 죽을 고비위험한 지경이르러 구사일생으로 겨우 목숨을 부지했다. 그의 말은 곧 그가 창업의 어려움을 겪은 까닭이다.

    위징은 지금부터 나와 함께 천하의 안정을 도모하면서 나의 마음이 교만해지고, 방일한 데로 흘렀다가는 반드시 위망(危亡)의 길을 밟을 것을 염려한다. 그래서 수문의 어려움을 말하는 것이다. 이제 창업의 어려움은 이미 지난 일이다. 수문의 어려움을 마땅히 제공(諸公)과 함께 신중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였다.

    ◆ 대화(3) 천하를 지키는 것이 쉬운가 어려운가?
    정관 15년(서기641년)에 태종이 시신들에게
    “천하를 지키는 일이 어려운가 쉬운가?” 하고 물었다.

    시중(侍中) 위징이 답하여 말하기를
    “매우 어렵습니다.” 하였다.

    이에 태종이
    “현자(賢者)와 능자(能者)에게 맡기고, 간쟁(諫爭)을 받아들인다면 어려울 것이 없지 않은가?” 하고 되물었다.

    위징이 대답하기를
    “고래로 제왕들을 관찰하건대 나라에 근심스러운 일이 있고, 위태로울 때는 현자에 맡기고 간언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태평한 세상이 되면 마음이 느려지고 게을러집니다. 태평을 믿고 관태(寬怠)를 탐하면 간하고자 하는 자가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날이 가고 달이 가는 동안에 쇠퇴하여지고 위망의 지경에 이릅니다.
    성인들이 ‘삶이 편안할 때에 위태로움을 생각하라’고 한 까닭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태평한 때일수록 경계해야 합니다. 어찌 어렵지 않다고 하십니까?”
하였다.

    ◆ 대화(4) 활의 좋고 나쁨에서 정치를 깨닫다.
    정관 초에 태종이 소우(蕭瑀)에게 일러 말하기를
    “짐은 어려서 궁시(弓矢)를 좋아했고, 스스로 능히 묘를 다했다고 일러왔다. 근자에 양궁(良弓) 십수(十數) 개를 얻어 궁공(弓工)에게 보였다. 그런데 궁공의 말이 ‘모두가 양재(良材)가 아닙니다’라고 한다. 짐이 그 까닭을 물으니, 궁공이 다시 말하기를 ‘나무의 심(心)이 곧지 않으면 나무의 결이 모두 바르지 못합니다. 활이 비록 굳세다 해도 화살이 곧게 날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좋은 활이 아닙니다’라고 했다.

    짐은 처음으로 깨달았다. 짐은 활로써 사방을 평정했고, 활을 사용한 일이 많았다. 그러나 그 이치를 체득하지 못했다. 하물며 짐은 천하를 차지한 지 얼마 안되고, 천하를 다스리는 일에 있어서는 본디부터 활에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미처 (활에 대한) 그 이치도 모르고 있었으니 하물며 정치에 있어서야 더 말 할 나위가 있겠는가?”
하였다.

    이후로 5품이상의 관리에게 조서를 내려 교대로 중서내성(中書內省)에 숙직을 하게 하면서 자주 불러 이야기 하면서 밖의 일을 물으면서 백성의 이해와 정치, 교육의 득실은 알기에 힘썼다.

    ◆ 대화(5) 왕규(王珪)의 의견을 들어 학문 있는 자를 발탁하다.
    정관 2년(서기628년)에 태종이 황문시랑(黃門侍郞) 왕규(王珪)에게
    “근래에 군주나 신하가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이 그 전시대(周, 漢 등)보다 무척 못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고 물었다.

    이에 대하여 왕규가 대답하기를
    “예전 제왕의 정사는 모두 그 뜻하는 바가 청정(淸淨)을 숭상하고, 백성의 마음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러나 근래의 제왕들은 오직 백성을 괴롭힘으로써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자 하였고, 그가 임명한 대신들 또한 경술(經術: 경서에서 가르치는 것)로써 하는 인사가 아니옵니다. 한나라 제산들은 경서에 정통하지 않은 이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만약 조정에 의혹사건이라도 생기면 모두 경서를 인용하여 결정하였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예교(禮敎)를 알고 정사는 태평성대를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에는 무(武)를 중히 여기고, 유학을 가벼이 여기며, 혹은 법률로써 백성을 엄하게 다스렸습니다. 유학의 시행은 이미 이그러졌고, 순풍(순풍)은 크게 깨졌습니다.”
하였다.

    태종이 그 말을 깊이 인정하고 그로부터 백관 중에서 학업이 우수하게 뛰어나고, 정치체제를 아는 자들에게 그 품계를 올려주고 거듭 발탁하여 기용하였다.

    ◆ 대화(6) 조칙(詔勅)에 대한 신하들의 간언(諫言) 없음을 힐책하다.
    정관 3년(서기629년)에 태종이 시신들에게
    “중서성과 문하성은 국가의 중요한 정무를 관장하는 관서이다. 그래서 재능 있는 인물을 발탁하여 이를 담당하게 하는데 그 맡은 바 임무는 실로 중대하다.

    만약 조칙(詔勅: 조서)에 옳지 않은 점이 있으면 누구나 강력하게 자기의 견해를 주장하여 철저하게 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근자에는 짐의 분부에 무조건 순종하여 짐의 비위를 맞추는데 급급하는 느낌이다. 그저 ‘지당하옵니다’만 연발하여 적당히 결재하여 통과시킬 뿐 단 한마디도 간(諫)하는 자가 없다.

    짐의 조칙에 잘못된 점이나 옳지 않는 점이 전혀 없어 신하로써 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다만 조칙에 서명이나 하고, 문서를 공포하는 정도에 그친다면 그것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 정도의 일을 위해서라면 무엇 때문에 많은 사람 중에 우수한 인물을 발탁해서 중대한 정무를 위임하는 절차를 밟을 필요가 있겠는가?

    차후로는 조칙에 온당하지 않은 점이 있다고 생각되면 반드시 자기 의견을 주장하는 상신(上申)을 서슴지 말아야 한다. 까닭 없이 두려워 하거나 꺼려서 결함을 알면서도 입을 다무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고 말하였다.

    ◆ 대화(7) 치국(治國)과 양병(養病)은 같다.
    정관 5년(서기631년)에 대종은 시신들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일과 병을 치료하는 일은 서로 같다고 할 수 있다. 병들었던 사람의 병을 치료되었을 때일수록 더욱 정성을 기울여 요양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 병이 치료되었다고 생각될 때 안심하고 병 중에 지키던 여러 가지 금제(禁制)를 깨뜨린다면 반드시 목숨까지 잃게 될 것이다.
    나라를 다스리는 것도 마찬가지다. 천하가 잠시 편안하게 다스려 질 때일수록 가장 두려워하고 삼가지 않으면 안 될 때인 것이다. 만일 경솔하게 자만하고 방자하게 군다면 반드시 멸망의 길을 밟으리라.

    지금 천하의 안위는 나 한 사람에게 걸려있다. 그러므로 날로 조심에 조심을 거듭하여 남들이 아무리 훌륭하다고 찬미하더라도 나는 아직 스스로 훌륭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물며 나의 귀와 눈과 수족으로서의 역할은 모두 경들에게 의지하고 있다. 나 개인의 힘만으로는 이 광대한 천하를 다스릴 수 없고 아무래도 경들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의리상으로 말한다면 나와 경들과는 이신동체(異身同體)인 것이다. 꼭 힘을 합치고 마음을 하나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 이것이 위태롭다고 생각되는 일이 있으면 숨김없이 극언(極言) 해 주기 바란다.
    만에 하나라도 군신 간에 서로 의심하는 일이 생기고 속마음을 충분히 터놓을 수 없는 일이 생기면 그야말로 그것은 국가를 다스림에 있어서 크게 손해 되는 일이다”
하였다.

    ◆ 대화(8) 군주는 배, 백성은 물과 같다.
    정관 6년(서기632년) 태종이 시신들에세 말하기를
    “옛 제왕들을 관찰하건대 성(盛)함이 있고 쇠(衰)함이 있는 것은 아침(朝)이 있으면 저녁(夕)이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들이 쇠망하는 것은 모두 신하가 군주의 귀와 눈을 가려 어둡게 함으로써 백성의 곤궁도, 변방에서의 반란도, 외적의 침입도 전혀 모르고, 그로 말미암아 군주는 정사에 있어서 어떻게 하면 좋을 것인지에 대하여 전혀 아는 바가 없게 된다.

    그리고 충정한 자는 군주의 태평 무드에 젖어 있는 기분을 손상시킬까 봐 두려워 하여 그러한 사실에 대하여 말하지 않고, 간사하여 아첨하기 좋아하는 자들만이 날이 갈수록 군주에게 접근한다. 그럼으로써 군주 자신이 정치상의 과실을 모르고 지내는 것이니 국가가 멸망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는 구중궁궐 깊숙이 들어앉은 몸이 되었으니 천하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고루 알 수 있는 처지에 놓여 있지 않다. 그러므로 그 임무를 경들에게 분담시켜 나의 귀와 눈을 대신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천하가 무사하고 세상이 편안하다고 해서 마음에 두지 않고 안일한 생각에 잠겨 있을 수는 없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군주가 덕으로써 백성을 사랑하면 백성도 또한 군주를 경애한다. 그러나 군주가 무도하면 백성은 이반한다. 가히 두려워 할 일이다.’ 라고 하였다.
    천자가 훌륭한 도덕을 가지고 있으면 백성은 그를 떠받든다. 그러나 천자가 무도하면 백성은 그를 천자의 자리에서 몰아낸다. 참으로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였다.

    이에 대하여 위징이 답하여 말하기를
    “예로부터 나라를 잃은 군주는 누구나 다 나라가 편안할 때 어려웠던 지난 날을 잊어버리고, 정사가 바로잡혔을 때 어지러웠던 지난 날의 일을 잊어버립니다. 그것이 나라를 오래 지탱해 나가지 못하게 되는 이유입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그 부(富)로 말하면 천하의 모든 것을 다 지녔고, 나라의 안팎이 다 청평(淸平)하고, 안태(安泰)함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항상 정치를 어떻게 하면 좋을 것인가를 생각하시고 늘 깊은 못에 엷게 언 얼음판을 밟듯이 조심조심 두려워하고, 삼가고 계시므로 우리나라는 국위가 빛나고 장구할 것입니다.

    신은 일찍이 옛말에 ‘군주는 배요, 백성은 물이라. 물은 능히 배를 띄울 수가 있지만, 한편 배를 전복시킬 수도 있는 것이다.’(君舟也 人水也 水能載舟 亦能覆舟)라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폐하께서는 백성이야 말로 두려운 존재라고 생각하고 계십니다만 신 또한 진실로 폐하께서 생각하고 계신바와 같습니다.”
라고 하였다.

    ◆ 대화(9) 난리 뒤일수록 도의심에 의한 정치를 행하라.
    정관 7년(서기633년)에 태종은 비서감(秘書監) 위징과 옛 정치의 득실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태종이
    “지금은 수(隨) 말기의 큰 난리를 치른 뒤라 민심이 황폐하여 있음으로 당장 평화로운 세상을 이루기는 어렵다.”고 하였다.

    이에 위징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대저 사람은 안락한 상태에 있게 되면 교만하며 방일해지고, 교만하고 방일해지면 무슨 일이 없을까 혼란을 생각하게 되고, 혼란을 생각하게 되면 다스리기가 어려워 집니다. 반대로 생명의 위험이 닥쳐 곤혹해지면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근심에 잠기게 되고, 죽음에 대한 근심이 생기면 잘 다스려지는 평화로운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되고, 평화로운 세상을 생각하면 다스리기가 쉬워집니다.
    그러므로 혼난 후의 백성을 다스리기 쉬운 것은 굶주린 사람이 아무 것이나 잘 먹는 것과 같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태종이 또
    “논어(論語) 가운데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선량한 사람이 다스린다면 백 년쯤 지나면 불선인(不善人)으 잔학한 행위가 제압되고, 살벌한 풍습이 사라진다’고 하시지 않았는가? 대란 뒤에 선정(善政)으로 평화로운 세상을 이루고자 함은 아무래도 조급한 바람이 아닌가?” 하였다.

    위징이
    “이 논어의 말은 보통 평범한 사람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이요 성현(聖賢)의 경우는 아닙니다. 폐하와 같은 거룩하신 천자께서 교화(敎化)를 행하시면 상하가 합심하게 될 것이고, 백성이 폐하의 교화에 따르는 것은 마치 메아리가 소리에 답하는 것과 같이 신속하게 반응이 나타날 것입니다.
    각별히 서두르지 않으시더라도 만 1년쯤이면 교화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3년에 성공을 거두더라도 오히려 늦다고 생각될 정도입니다.”
하였다.

    이 말을 들은 태종은 위징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봉덕이(封德彛)가 답하여 이르기를
    “하(夏), 은(殷), 주(周)의 3대 이후로는 사람들의 마음이 차차 경박해져서 진실된 마음이 없어졌아옵니다. 그래서 진(秦)나라의 정치는 오로지 법률에만 의존하여 엄중하게 백성을 단속하였고, 한(漢)나라의 정치는 군주의 덕에 의한 왕도정치(王道政治)만 행한 것이 아니고 무력과 권력에 의한 패도(覇道)를 혼용하였아옵니다. 그들도 모두 선정에 의한 평화로운 세상의 출현을 바랬지만 인간들이 참된 마음을 잃었으므로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옵니다.어찌 태평성세를 이를 수 있으면서 태평성세가 이루어지기를 바라지 않았겠아옵니까?

    위징은 단순한 독서인으로서 세상 형편을 모르는 탁상공론을 외치는 학자일 뿐 당세(當世) 시국에 있어서의 정무(政務)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는 것이옵니다. 만약 위징의 의견을 믿고 따르신다면 아마도 나라를 패망의 길로 이끄는 결과가 될 것이옵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위징이
    “옛날의 5제(五帝: )와 3왕(三王: )은 선정을 베풀지 않았던 시대의 백성을 모조리 바꿔치우고 나라를 다스린 것은 아니옵니다. 제도(帝道)를 행하면 황제가 되고, 왕도(王道)를 행하면 왕이 되었사옵니다. 그 시대의 백성을 어떻게 교화하느냐 하는 그 방법에 달렸을 뿐이옵니다. 이런 사실은 옛 서적들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는 것이옵니다.

    옛날 황제(黃帝)는 난을 일으킨 치우(蚩尤)와 70여 회나 싸웠을 만큼 당시의 난은 매우 심했던 것이옵니다. 그러나 싸워서 이긴 뒤에는 신속하게 선정을 베풀어 태평한 세상을 만들었습니다.
    구려(九黎)가 도덕을 어지렵혔으므로 전욱(?頊)이 그를 정벌하였습니다. 그러나 싸워서 이긴 뒤에 정치를 잘하여 태평한 세상을 만드는데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하의 걸왕(桀王)은 포악하였으므로 탕왕(湯王)은 걸왕을 쫓아냈습니다. 그리고 탕왕은 재세중(在世中)에 태평성세를 이루었습니다.
    은나라 주왕(紂王)이 무도했으므로 주(周)의 무왕(武王)이 이를 정벌하였습니다. 무왕의 뒤를 이은 성왕(成王) 대에 와서 태평한 세월이 되었습니다.

    봉덕이 등이 말한 바와 같이 고대로부터 차츰 사람의 인정이 경박해 가고 참된 마음이 없어져서 태고의 순박한 마음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이라면 5제3왕에서 천년 또는 2천년이 지난 지금 세상의 인간들은 도깨비나 괴물 같은 존재가 되었을 것입니다. 어찌해서 도저히 교화시킬 수 없다는 것입니까?”
하였다.

    봉덕이 등은 위징의 조리에 닿는 의견을 논박할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마음 속으로는 위징의 생각을 옳다고 여기지 않았다.

    태종은 위징의 의견에 전적으로 공명하여 항상 인의도덕(仁義道德)으로써 정치를 행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 결과 몇 해 사이에 천하가 평화롭게 다스려졌다. 그래서 태종이 군신들에게
    “정관 초년에 사람들은 모두 이견(異見)을 제기하여 ‘지금 세상에서는 반드시 제도(帝道)라든가 왕도(王道)라든가 하는 것과 같은 도덕이나 인격을 존중하는 정치를 행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 법이나 권력으로 엄하게 단속하지 않는다면 이런 거친 백성을 다스릴 수가 없다’고 하였다.

    그 때 다만 위징 한 사람만이 나에게 인의와 도덕을 주로 하는, 인간의 선의를 신뢰하는 정치를 행하여야 한다고 권하였다. 그래서 그의 말을 따른 결과 몇 해가 지나지 않은 동안에 중원(중原)은 물로 태평한 세상이 이루어졌고, 멀리 이민족까지도 자진해서 귀순해 오기에 이르렀다.

    그 중에서도 돌궐이라고 하는 종족은 고래로 늘 중원에 대하여 강적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돌궐의 추장들이 모두 칼을 허리에 차고 궁중을 숙위하여 그들의 부락에서는 중원의 의관을 몸에 걸치고 있다.
    나는 무기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수 년 사이에 이와 같은 평화로운 상태를 이루게 해 준 것은 모두가 위징의 힘이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고는 위징을 돌아보면서
    “보석이라는 것은 아무리 훌륭한 바탕을 지니고 있어도 돌 속에섞여 있어 양공(양공)에 의해 다듬어지지 않는다면 기왓장이나 잔돌과 구별할 수가 없다. 만약 양공을 만나 잘 다듬어진다면 만대에 이르는 보물이 된다.
    나에게 아름다운 바탕은 없지만 그대에 의해서 절차탁마(切嗟琢磨)되었다. 그대가 나의 인격을 인의(仁義)에 의하도록 다잡아 주었고, 도덕에 의해 넓혀 주느라고 애를 써 준 덕에 나는 천자로써 공업을 이룰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대 또한 양공(良工)으로써의 가치가 충분하다. 다만 그 때 반대를 주장한 봉덕이에게 이러한 상태를 보여줄 수 없게 된 것을 한스럽게 여길 뿐이다.”
하였다.

    이에 위징이 다시 절하고 태종의 칭찬을 사양하기를
    “흉노(匈奴)가 파멸되고 천하가 평안하게 된 것은 폐하의 성덕이 나라 아팎에 미쳐서 자연히 이루어진 것으로써 실로 저희 신하들의 힘에 의한 것이 아니옵니다. 신은 다만 저의 몸이 폐하와 같으신 명천자(明天子)의 치세에 맞추어 태어남 것이 기쁠 뿐이옵니다. 어찌 폐하의 공덕을 신의 공이라 할 수 있사옵니까?” 하였다.

    태종이 이르기를
    “나는 그대들을 신임할 수가 있었고, 그대들은 나의 신임에 부응해 주었다. 그러므로 그 공은 다만 나의 공이라 이를 수 없다. 그대는 어찌하여 그런 거추장스러운 인사치레로 사양하는가? 솔직하게 나의 찬사를 받아드릴 것이다.” 하였다.

    ◆ 대화(10) 안색을 부드럽게 하여 신하의 간언(諫言)을 받아들이다.
    정관 초년 어느 해 태종이 공경(公卿)들에게
    “사람은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보고자 하면 반드시 거울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군주가 자기의 과실을 알고자 하면 반드시 충신의 간언을 듣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군주가 자기 자신을 성군(聖君) 또는 현군(賢君)이라는 생각에 빠져 자신의 생각에만 의존하게 되면 신하들은 군주의 과실을 바로잡아 주려고 하지 않게 된다. 그러면 나라가 위험한 경지에 빠지지 않고자 희망해도 바라는 대로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군주는 그 나라를 멸망시키고 망국의 신하도 또한 자기 집안의 안전을 보전할 수 없게 된다.

    수(隨)나라 양제(煬帝)와 같은 포악한 천자의 경우에 있어서는 신하들은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최후까지 자신의 과실에 대하여 들을 수가 없었고, 그 결과 나라가 멸망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양제의 측근에 중용되었던 우세기(虞世基) 등도 군주의 과실을 간하다가 천자의 노여움을 살까 봐 두려워하여 천자의 비위를 맞추는 데 급급한 나머지 마침내 살해되고 말았다.

    전왕조인 수나라의 일은 먼 옛이야기가 아니다. 그대들은 세상의 사물을 관찰할 때마다 백성에게 불리한 일이 있으면 반드시 주저하지 말고 생각한 대로 충분히 말을 다하여 나의 과실을 바르게 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고 하였다.

    ◆ 대화(11) 명군(明君)과 양신(良臣)의 만남이 태평의 기초
    정간 원년(서기627년)에 태종이 시신들에게 말하기를
    “바른 군주가 사악한 신하를 신임하게 되면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 수가 없다.
    또 충정한 신하가 사악한 군주를 섬기게 될 때도 선정을 베풀어 태평한 세상을 이를 수가 없다.

    명군(明君)과 양신(良臣)이 맞추어 서로 만나는 일이 고기와 물과 같은 관계로써 친밀하다면 나라는 태평해질 것이다.

    나는 어리석은 자이지만 다행히도 제공이 나의 결함을 바로잡아주어 위험에서 건져주고 있다.
    어떤가? 제공의 꺼림 없는 직언과 기개 있고 강경한 의론에 의해 천하의 태평을 실행하고자 한다.”
하였다.

    간의대부 왕규가 태종의 말에 답하여
    “저는 이러한 것을 듣고 있습니다. ‘아무리 굽은 나무라도 먹줄을 따라서 켜면 똑바르게 되고, 어떠한 군주라도 간하는 말에 잘 따르면 성군이 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옛날의 뛰어난 군주에게는 반드시 임금에게 간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신하가 일곱 명씩이나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만약 간하는 사람이 임금에 의하여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서로 이어 죽음으로써 간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폐하께서는 마음을 활짝 여시고 신분이 낮은 자의 의견도 받아들이십니다. 어리석은 저는 거리낌 없이 직언 할 수 있는 조정에 있으면서도 판단력이 흐려 바른 의견을 제대로 말씀 드리기 어렵습니다만 진력을 다해 폐하의 선정을 돕고자 원합니다.”
하였다.

    태종은 왕규의 말을 옳다고 여겨 칭찬하였다. 그리고 조칙을 내려 이후로는 재상이 궁중에서 참여하여 국가의 정책을 논의하고 처리 할 때는 반드시 간관(諫官)도 함께 참여시켜 정사를 함께 의논하고 그의 의견을 개진하게 하였으며, 반드시 꺼림직한 마음을 두지 않고 그들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 대화 (12) 감정을 억제하고 간언을 듣다.
    정관 5년(서기631년)에 태종이 방현령 등에게
    “고래로 많은 제왕이 자신의 간정에 따라서 기뻐하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하여, 기쁘면 멋대로 공적이 없는 자에게 포상을 하기도 하고, 화가 나면 멋대로 죄 없는 자를 죽이기도 한다. 그러므로 천하의 사상(死喪)과 화란(華亂)이라는 것은 이러한 제왕의 반성 없는 행위가 원인이 되는 것이다.

    지금 나는 일찍부터 밤 늦게까지 이 문제에 대하여 마음을 쓰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래서 언제나 공 등은 진심을 다하고 꺼림 없이 철저하게 나를 간해주기를 바란다. 그러니 그대들은 또한 나의 충고를 꼭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어찌 남의 말이 자기의 의견과 같지 않다고 해서 그대로 자시느이 단점을 가싸면서 남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만약 나의 충고를 받아들일 수 없다면 어떻게 남을 충고할 수가 있겠는가? 잘 생각해 볼 일이다”
고 하였다.

    ◆ 대화(13) 군주에 대한 진언(陳言)을 대단히 어렵다.
    정관 25년에 태종이 위징에게 묻기를
    “근자에 조정에 벼슬하는 신하들이 아무도 의견을 말하지 않는데 그 까닭이 무엇일까?” 하였다.

    위징이 말하기를
    “폐하께서는 공평무사하게 마음을 터놓으시고 신하의 의견을 받아들이십니다. 그러므로 진심에서 우러나는 의견을 상주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옛 사람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아직 충분히 신임을 받지 못하면서 간하면 듣는 측에서는 자기를 헐뜯는 것으로 오해를 한다. 또 신임을 받으면서 간하지 않은 것은 국록(國祿)의 도둑놈이다 라고 한다’ 하였습니다. 다만 사람의 재능이라는 것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무기력한 사람은 충직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말을 하지 못합니다.
    벼슬자리를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은 무심히 말을 하다가는 자신의 지위가 위태로워질 것을 생각하고 말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어느 경우에나 다 입을 다물고 상사나 모든 사람에게 거슬리지 않게 동조함으로써 그날을 무사히 넘기고자 하는 까닭입니다”
하였다.

    태종이 말하기를
    “참으로 그대의 말이 옳다. 나는 언제고 이와 같은 것을 생각한다. 신하 된 자는 군주의 과실을 간하다가는 언제고 군주의 노여움을 사서 죽게 되지 않을까? 하고 두려워한다. 그것은 죄인의 몸이 되어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것이나, 많은 적군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나 다를 바가 무엇인가?
    까닭에 진심으로 정직한 신하는 성의를 다하여 간하기를 꺼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아가 성의를 다하는 자는 그야말로 지극히 얻기 어렵다.

    옛날 우왕(禹王)이 도리에 맞는 정직한 말을 들었을 때는 경의를 표하여 절을 했다는 것은 어러한 까닭이 아니겠는가? 나는 지금 가슴을 활짝 열어 제치고 신하들의 거리낌 없는 간언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대들은 겁쟁이처럼 두려움에 마음을 써서 생각한 대로 거리낌 없이 말하지 못한다는 따위의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였다.

    ◆ 대화(14) 악(惡)은 알기는 쉬우나 그것을 고치기는 어렵다.
    정관 초년에 태종이 황문시랑인 왕규와 여유 있는 태도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때 태종의 곁에는 한 미인이 그를 모시고 있었다. 그 여인은 원래 노강왕 원(王爰)의 애희였다. 원이 패하여 죽은 뒤에 몰수되어 국중으로 들어온 여자였다. 태종은 그 미인을 가리키며 왕규에게
    “노강왕은 무도한 사람으로서 남편을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았다. 이처럼 몹시 포악했으니 포악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하였다.

    이 말을 듣고 왕규는 자리에서 물러 앉으면서 대답하기를
    “폐하께서는 노강왕이 남의 아내를 빼앗은 것에 대하여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옳지 않다고 생각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이에 태종이
    “세상에 남편을 죽이고 그 아내를 빼앗는다는 것보다 더 옳지 않은 행위가 또 있겠는가? 나쁘다는 것은 정한 이치가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대는 나에게 그 옳고 그름을 묻고 있으니 대체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가?” 하고 물었다.

    왕규가 답하여 말하기를
    “저는 이러한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곧 「관자(管子)」라는 책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마는 제나라 환공(桓公)이 멸망한 곽국에 가서 부로(父老)에게 묻기를 ‘곽(郭)나라는 무슨 까닭으로 망했습니까?’ 하니,

    부로가 대담하기를 ‘곽나라 임금은 선을 선이라 하고, 악을 악이라 했기 때문입니다’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환공이 의아해서 ‘당신의 말씀대로라면 곽국의 임금은 현인이었습니다.그렇다면 멸망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하였더니

    부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곽국 임금은 선을 선이라 했지만 선을 행할 줄 몰랐고, 악을 악이라 했지만 그 악을 제거할 줄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것이 나라가 멸망하게 된 이유입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지금 이 연인은 역시 폐하의 곁에서 폐하를 모시고 있습니다. 외람된 말씀이오나 저는 폐하께서 그 남편을 죽이고 그 아내를 빼앗는 행위를 은근히 시인하시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만약 폐하께서 그것을 악이라고 알면서도 그것을 제거하지 못하시는 것입니다”
하였다.

    이 말을 들은 태종은 대단히 기뻐하여 그 말이야 말로 지극히 당연한 말이라고 칭찬하면서 서둘러 그 미인을 그의 친족에게 돌려보냈다.

    ◆ 대화(15) 선을 행하면 번영하고, 악을 행하면 멸망한다.
    정관 6년(서기632년)에 태종이 시신에게 이르기를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조(周)왕조나 진(秦)제국이 처음 일어나서 천하를 얻었다는 사실에는 각별하게 다른 점이 없다. 그럼에도 주나라는 선을 행하고자 노력하여 공덕을 거듭 쌓아 올렸다. 그것이 7백년이라는 긴 왕조를 이어갈 수가 있었던 기초를 쌓게 된 것이다.

    그런데 진나라의 경우는 정도가 지나치게 사치와 음란한 짓을 하였으며, 형벌로써 다스리기를 좋아하였으므로 겨우 2세에 불과해서 멸망하였다. 어떤가? 선을 행하는 자는 행복을 누리는 기간이 길고, 악을 행하는 자는 그 수명이 짧은 것이 안닌가?

    그리고 나는 또 이런 말도 들었다. 걸왕(桀왕)이나 주왕(紂王)은 제왕(帝王)이었다. 그런데 지위도 없고 미천한 사람에게 ‘너는 걸주(桀紂)와 같은 놈’이라고 하면 그것을 크게 치욕으로 생각한다.

    반대로 안연(顔淵)이나 민자건(閔子騫) 같은 이는 지위도 없고, 신분도 신통치 않은 사람들이건만 제왕(帝王)에게 ‘당신은 안(顔), 민(閔)과 같은 사람이라 하면 그것을 영예롭게 생각한다는 이야기다.

    이런 이야기는 제왕 된 자로써 깊이 부끄럽게 여겨야 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것으로써 모범으로 삼고 경계하고자 하나, 언제고 고대 성군들에게는 미칠 수가 없어 세상 사람들에게 웃음거리나 되지 않을가 두렵고, 그것이 늘 걱정된다.”
하였다.

    이에 위징이
    “저는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옛날 노(盧)나라 애공(哀公)이 공자에게 말하기를 ‘세상에는 심하게 잊어버리기를 잘하는 사람이 있는데 집을 이사할 때 그 많은 이삿짐 중에서 하필이면 자기의 아내를 그대로 놓아 두고 온 사람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공자가 ‘세상에 물건을 장 잊어버리기로는 그보다 훨씬 더 심한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옛날에 걸(桀)이라는 군주와 두(紂)라는 군주의 행적을 살펴보니, 그것은 아내 정도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결국 몸을 망치고 만 것입니다.’고 하였습니다.

    아무쪼록 폐하께서는 언제나 이런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명심하신다면 아마 후세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사는 일을 면하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하였다.

    ◆ 대화(16) 군신 다 같이 교만을 경계해야 한다.
    정관 14년(서기640년)에 고창국(高창國)을 평정하고, 그 축하를 위해 태종이 시신들을 모아 연회를 베풀었다. 그 자리에서 태종이 방현령에게 일러 말하기를
    “만약 고창국이 당에 대하여 칭신(稱臣)의 예를 지켜서 불손한 행위를 하지 않았다면 왜 멸망의 지경에 이르게 되었겠는가? 나는 이 한 나라를 평정한 뒤에 더욱 불안해지고 두려운 마음을 가지게 된다.

    이제 장구하고도 위대한 국가 건설이라는 사업을 보전해야겠다고 생각하면, 이에 만족해서 뽐내고 방자한 행위를 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 경계해야 하고, 마음을 다잡아서 아첨하는 자를 물리치고, 현명한 신하를 임용하여 되지 않게 지껄이는 말에 따라서 훌륭한 군자에 대하여 이러쿵저러쿵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런 것을 계율로 지키면서 행한다면 나라의 평화를 유지해 나갈 수 있게 되지 아니할까?”
하였다.

    위징이 나아가 아뢰기를
    “저는 예로부터의 제왕의 사적을 관찰하였습니다. 난세를 다스리는 왕업을 시작할 때에는 반드시 스스로 계율을 두려워 하여 신분이 낮은 자의 의견도 받아드리고 성의 있는 바른 말에 따릅니다. 그러나 일단 천하가 안정된 뒤에는 정욕(情欲)에 빠지게 되고, 아첨하는 소리 듣기를 즐기며 만족해 하고, 바른 간언 듣기를 싫어합니다.

    장량(張良)은 한고조의 모신(謀臣)이었습니다. 고조가 천자가 된 뒤에 정궁(正宮) 소생인 장자를 폐하고, 애희의 소생인 서자를 태자로 세우고자 할 때 정궁인 여후(呂后)의 부탁에도 불구하고 정평 있는 지모의 소유자인 장량도
    ‘천자께서 고난을 겪으실 때에는 나의 책략을 잘 받아 주셨지만 이제 제왕이 되시어 애희에 대한 애정에서 태자를 바꾸고자 하시는 이때에 입끝만으로의 변론으로는 어떻게 간할 방법이 없습니다. 하고는 결국 그 문제에 뛰어들어 의견을 진술하지 않았습니다.

    하물며 지금 폐하의 공덕이 성함을 말씀 드리자면 한고조와 비교할 때 고조 같은 이는 애초에 발 밑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폐하께서 천자의 위에 오르신 지 15년이 되었습니다. 폐하의 덕망은 천하에 널리 미치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거기다가 다시 또 고창(高昌)을 평정하셨음에도 불구하시고 더욱 국가의 안위에 마음을 쓰시어 충량(忠良)한 신하를 불러 쓰시고, 신하가 천자에게 직언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시려고 하시는 것은 천하를 위해 그 이상의 행복스러운 일은 다시 없습니다.

    옛날 제(齊)의 환공(桓公), 관중(管仲), 포숙아(鮑叔牙), 영척(영戚) 등 네사람이 주연을 베풀었습니다.
    환공이 포숙아에게 ‘왜 날보고 헌수(獻壽)를 빌지 않는가?’하니,

    숙아는 술잔을 받혀 들고 일어서면서 ‘아무쪼록 공께서는 내란이 일어났을 때 국외로 망명하시어 거(?)에서 고생하시던 때의 일을 잊지 않으시도록, 관중은 싸움에 져서 노나라에 잡혀가 죽음을 눈앞에 두었던 때의 일을 잊지 않도록, 영척은 가난할 때 수레 밑에서 소 여물을 먹이고 있을 때의 일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였습니다.

    이 말들을 듣고 환공이 자리에서 물라나 두 번 절하면서 ‘나와 두 사람의 대부(大夫)가 그대의 말을 잊지 않도록 한다면 나라의 위험은 없을 것이다’라고 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였다.

    태종이 위징에게
    “나는 아직 천자가 되기 전의 신분이 낮았던 당시의 일을 잊지 않겠다. 그대들도 포숙아의 사람됨을 잊지 않도록 하기 바란다” 고 하였다.

정관정요-1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