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정요(貞觀政要)-2
沙月 李 盛 永(2007.3.7)
    정관정요 책은 총 56개 대화 주제가 7개 장(章)으로 정리되고, 8장에 위징 등의 상소문이 실려 있다. 내용이 길기 때문에 다음과 같이 4개로 구획하여 옮기고자 한다.
    정관정요-1: 서언, 제1장(군주는 배, 백성은 물: 대화1-8), 제2장(善을 행하면 번영하고, 惡을 행하면 멸망한다: 대화9-16),
    정관정요-2: 제3장(민중을 직접 다스리는 지방관일수혹 좋은 인물이 필요하다: 대화17-24), 제4장(피서 궁전을 짓자는 진언을 물리치다: 대화25-32),
    정관정요-3: 제5장(법의 적용을 신중히 하여 무고한 죄인이 없게 하다: 대화33-43), 제6장(良臣과 忠臣은 어떻게 다른가?: 대화44-50),
    정관정요-4: 제7장(군주가 暗愚하고 신하가 아첨하면 나라는 망한다: 대화51-56), 상소문(4개 중 1개, 房玄齡이 高句麗 정벌을 반대한 상소)

    ◆ 대화(17) 수성(守城)의 군주에게는 난을 일으키는 자가 많다.
    정관 17년(서기643년)에 태종이 시신들에게 이르기를
    “예로부터 국가를 창업한 군주의 자손의 세대에 이르러서는 어지러운 일이 많이 생기는데, 그것은 무슨 까닭일까?” 하고 물었다.

    이에 사공(司空) 방현령(房玄齡)이
    “그것은 어린 군주가 깊숙한 구중 궁궐에서 나고, 자랐으며, 어린 시절부터 부귀를 한 껏 누리는 지위에 있었으므로 세상의 물정을 몰라 진실과 허위를 분간한다든가, 국가를 다스림에 있어서 무엇이 안전한 것이며, 무엇이 위험한 일인가 하는 것들을 한 번도 경험한 일이 없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정치를 행하게 되므로 어지러운 일이 많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하고 대답하였다.

    이 말을 듣고 태종이
    “그대의 생각으로는 그 과실의 책임이 주군에게 있다고 밀어붙인다. 나는 그 죄가 신하의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대체로 공신의 자손이라는 것은 대개 재능도 없고, 품행도 좋지 않으면서 조상의 공훈의 음덕으로 쉽게 대신의 지위에 올라 덕의(德義)는 닦지 않고 사치만 즐긴다.

    주군이 유약(幼弱)한 데다가 신하 또한 재주가 없다. 그러므로 나라가 기울어져 가건만 그것을 버틸 수가 없다. 그러고도 어찌 어지러운 세상이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수(隨)의 양제(煬帝)는 우문술(宇文述)이 변방을 지키고 있을 때의 공적을 생각하고 그의 아들인 화급(化及)을 높은 지위에 발탁하였다. 그런데 화급은 그 은혜에 보답할 것은 생각지 않고 도리어 양제를 살해하고 말았다. 이것이 어찌 신하의 죄가 아니겠는가?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까닭은 공등(公等)이 자제들을 잘 훈계하고 격려하여서 바른 도리를 행하고 죄를 범하는 일이 없도록 해 주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나라를 위하여 경사스러운 일이 되는 것이다”
하였다.

    태종은 또 이르기를
    “우문화급(宇文化及)과 양현감(楊玄感)은 수조(隨朝)의 대신으로 천자의 가장 깊은 은혜를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자손들은 모두 반역을 하였으니 그 까닭이 무엇일까?” 하고 물었다.

    이에 잠문본(岑文本)이
    “도덕심이 있는 군자는 남에게서 받은 은혜를 언제까지나 잊지 않고 지니고 있으나, 마음이 비뚤어진 소인은 은혜를 간직하지 못하고 잊어버립니다. 현감(玄感)이나 화급(化及)과 같은 족속은 모두 소인들입니다. 그러므로 고인이 군자를 귀히 여기고 소인을 경멸한 것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이에 태종이
    “진실로 공의 말이 옳다” 고 하였다.

    ◆ 대화(18) 민중을 직접 다스리는 地方官일수록 좋은 인물이 필요하다.
    정관 2년(서기628년)에 태종이 시신들에게 이르기를
    “나는 매일 밤 언제나 백성들에 대한 생각으로 해서 때로는 밤 깊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는 일이 있다. 오직 지방의 도독(都督)이나 자사(刺史)들이 백성을 잘 다스릴 능력이 있는가 없는가에 대해 신경을 쓰고, 두려워 하고 있다.

    그래서 병풍 위에 그들 지방관의 성명을 적어두고 눕고 일어 날 때마다 언제나 그것을 들여 다 본다. 그리고 그들이 지방관으로 있으면서 혹 선정을 베푼 일이 있으면 그 사실을 상세하게 성명 밑에다 기입해 둔다.

    나는 깊숙한 궁중에 들어앉아 있으므로 먼 변방 곳곳에서 행하여 지는 지방관의 정사에 대하여 일일이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다. 원방의 정사를 위임할 자는 오직 도독과 자사 뿐인데 이들은 정말나라의 치란(治亂)에 관계가 있는 중요한 직책을 담당하고 있다.

    그러므로 많은 신하 중에서도 첫째로 꼭 그 일에 적합한 인물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다.”
하였다.

    ◆ 대화(19) 현재(賢才)가 묻히는 일을 우려한다.
    정관 2년(서기628년)에 태종이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 봉덕이(封德彛)에게 일러 말하기를
    “평화로운 나라를 이루는 근본은 다만 훌륭한 인재를 얻는 일이다. 근자에 그대에게 현명한 인재를 기용하라고 명하였건만 아직 단 한사람도 추천하는 일이 없었다. 천하를 다스리는 일은 지극히 중대하다. 그대는 마땅히 나의 근심과 노력을 분담해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현재(賢才)를 발굴해 주지 않으니 장차 나는 누구를 의지할 것인가?” 하였다.

    이에 봉덕이가 대답하기를
    “저는 어리석은 자입니다만, 어찌 저의 정(精)과 혼(魂)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오늘의 세상을 보건대 대중 속에서 각별히 뛰어나고 특이한 재능이 있는 자가 눈에 띄지 않습니다.” 하였다.

    이에 태종이
    “전 시대의 밝은 군주들은 신하를 씀에 있어서 각자의 기량에 따라서 썼다. 재능이 있는 인물을 딴 세상이나 다른 시대에서 빌어다 쓴 것이 아니고, 모든 인재를 그 나라 그 시대에 사람들 중에서 채용한 것이다.

    은(殷)나라의 고종(高宗)이 부열(傅說)을 꿈에서 보았고, 주(周)나라의 문왕(文王)이 여상(呂尙)을 만난 것과 같은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다려서 정치를 하자는 것인가? 어느 시대고 현재가 없을 수 있겠는가? 다만 애석하게도 쓸 만한 현재가 있는 데도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여 세상에 묻어두면서 알지 못하고 넘어가는 것이 가장 우려될 뿐이다.”
하였다.

    이 말을 듣고 봉덕이는 부끄러워서 얼굴을 붉히고 물러났다.

    ◆ 대화(20) 상벌을 분명하게 하고, 친척이라도 특별히 다루지 않는다.
    정관 원년(서기627년)에 당조(唐朝) 창업에 공로가 있는 중서령(中書令) 방현령(房玄齡)을 형국공(刑國公)에, 병부상서(兵部尙書) 두여회(杜如晦)를 채국공(蔡國公)에, 이부상서(吏部尙書) 장손무기(長孫無忌)를 제국공(齊國公)에 봉하여 훈공 제1등으로 하였는데 실제의 식읍(食邑)은 1천3백호였다.

    이에 대하여 태종의 숙부인 회안왕(淮安王) 신통(神通)이 불평을 털어놓으면서
    “수(隨)나라 말엽에 고조(高祖)께서 태원(太原)에서 의군(義軍)의 기치를 치켜들 때 나는 부하 병력을 이끌고 가장 먼저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폐하께서 포상하시는 것을 보니 방현령이나 두여회 등은 다만 문서나 뒤적이던 문관들로서 나와 같이 목숨을 걸고 싸운 자들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의 훈공이 제1등이라니요. 황공하오나 나는 이에 승복할 수가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이에 태종이
    “나라에 있어서 가장 중대한 일은 오직 상벌 뿐입니다. 만약 상이 그의 공로에 비해 적당하다고 생각되면 공이 없는 자들은 스스로 물러납니다. 벌이 죄에 비해 적당하다고 생각되면 악을 행한 자는 조심하고 두려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벌이라고 하는 것은 가볍게 행하여져서는 안 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게 됩니다.

    지금 나는 훈공을 잘 살펴서 행상(行賞)을 한 것입니다. 현령 등은 싸움에서의 공로는 없지마는 전쟁 중에는 대장의 본영에서 책략을 세우느라고 애썼고, 난이 끝난 뒤에는 나라의 경영을 위해 방책을 확립하는 등의 공적이 큽니다.

    한(漢)나라 고조(高祖: 劉邦)에게는 삼걸(三傑: 韓信, 張良, 蕭何)이 있었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인 소하는 싸움터에서의 군사적인 공로는 없었지만 전시에는 후방에서 지령을 발하였고, 전후에는 한고조를 천자에 추대하였습니다. 그것이 그의 공이 한조(漢朝)에 있어서 가장 으뜸되는 이유입니다.

    숙부께서는 우리 당나라 황실에 있어서 가장 근친이십니다. 그러므로 포상함에 있어서 인색할 까닭이 조금도 없습니다. 다만, 개인적인 연고로해서 함부로 훈공이 있는 신하들과 같이 포상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다른 많은 공신들은 자기들끼리 서로 말을 주고 받으며
    “폐하께서는 더없이 공평한 방법으로 포상을 행하시어 그 친척에게까지도 편파적인 행상을 하지 않으신다. 우리가 어떻게 함부로 불평을 호소할 수가 있겠는가?” 하고 물러들 갔다.

    처음에 당(唐) 고조(高祖)는 황족의 친척되는 사람이면 형제간이나 조카들은 물론이요 사촌, 재종, 삼종들까지도, 그리고 어린 젖먹이까지도 모두 왕으로 봉하여 그 수가 수십 명이나 되었다. 이 날 태종은 신하들에게
    “전한(前漢), 후한(後漢) 이래, 다만 아들과 형제만으로 왕으로 봉했다. 그 밖에 친척으로는 한(漢)의 가(賈)와 택(澤)과 같은 큰 공이 있는 사람이 아니면 아무도 왕으로 봉해질 수가 없었다. 만약 먼 친척까지를 모조리 왕으로 봉하고 그들에게 고루 노역자를 붙여 준다면 이것이야말로 만민을 괴롭게하여 자기 친척을 부양하는 것이 된다.” 하였다.

    그러고는 황족 중에서 먼저 군왕(郡王)에 봉하여졌더라도 그 이후에 특별한 공로가 없는 자는 모두 군공(郡公)으로 격하시켰다.

    ◆ 대화(21) 나라의 급무에 대한 군신(群臣)의 의견을 묻다.
    정관 16년(서기642년)에 태종이 시신들에게 이르기를
    “당금(當今) 나라에 있어서 최대의 급무는 무엇인가? 각각 생각한 바를 발표해 보라” 하였다.

    먼저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 고사렴(高士廉)이
    “백성들이 생활 안정을 도모함이 가장 급한 일입니다” 하였다.

    다음에 황문시랑(黃門侍郞) 유계(劉계)가
    “사방의 이민족을 무마함이 급무입니다” 하였다.

    이번에는 중서시랑(中書侍郞) 잠문본(岑文本)이
    “논어(論語)에 이르기를 ‘위정자는 도덕으로써 백성을 이끌고, 예절 바른 풍속으로써 백성을 통제한다’ 고 하였습니다. 이에 따른다면 바른 예절을 일으킴이 급무입니다” 하였다.

    마지막으로 간의대부(諫議大夫) 저수량(衣者 遂良)이
    “현세는 사방의 백성이 모두 폐하의 인격을 우러러 사모하고 있으므로 결코 못된 행동을 할 근심은 없습니다. 다만, 태자와 제왕에 대해서는 꼭 일정한 분한(分限)을 설정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폐하! 이 기회에 만대 후까지라도 표본(標本)이 될 만한 법을 정하시어 그것을 자손들에게 남기시는 것이 좋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이야말로 당금(當今)의 최대 급무가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태종이 이르기를
    “저수량의 말이 가장 옳다. 짐의 나이 50을 바라본다. 어느새 육체와 기력이 쇠함을 느낀다. 장자인 승건(承乾)을 태자로 삼아 동궁(東宮)을 지키게 하고 있다. 그러나 여러 아우와 서자들의 수는 40명이나 된다. 늘 마음 속으로 이들의 처우문제에 대하여 걱정을 하고 있다.

    예로부터 장자와 그의 이복 형제들 사이에 선량한 인물이 있어 그들을 잘 조정하지 않을 때는 국가가 기울고, 나아가 패망의 길을 걷게 되는 일이 많았다. 제공은 나를 위해 지혜 있고, 인격이 뛰어난 인물을 찾아내어 태자를 보좌케 하고, 나아가 모든 왕들에게까지도 모두 정당한 인물을 구해 돕게 하도록 하기 바란다.

    또 관원으로써 제왕을 섬기는 자는 같은 인물로써 오래도록 섬기게 해서는 안 된다. 오랜 세월을 두고 섬기다 보면 주군을 섬기는 신하와 같은 정분이 생기기 쉬워 뜻하지 않게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야망을 가지게 되는 일은 이러한 관계에서 많이 일어난다.

    그러므로 왕부(王府)에 딸리는 관원은 한 사람이 4년을 넘기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고 하였다.

    ◆ 대화(22) 현재(賢才)를 기용하여 인의(仁義)의 정치를 행하다.
    정관 원년(서기627년)에 태종이
    “내가 고래의 제왕을 관찰하건대, 자애심에서 우러나오는 인의 도덕으로써 정치를 행한 자는 그 나라의 국운이 대단히 길다. 그러나 법율을 중히 여기고 국가 권력에 의해 백성을 다스린 자는 일시적난세의 폐해를 건질 수는 있었지만 그 국가의 패망도 또한 빨리 왔다.

    훌륭한 전왕들의 사적을 보면 좋은 귀감(龜鑑)이 되기에 족하다. 이제 나는 오로지 인의와 성신(誠信)으로써 정치를 행하여 근대의 사회 도덕이 경박해지는 것을 개척하고자 생각한다.”
고 말하였다.

    이에 황문시랑(黃門侍郞) 왕규(王珪)가 대답하기를
    “전란으로 해서 천하가 피폐해진 것은 오랜 세월에 걸쳐 있습니다. 폐하께서는 그 폐해가 남아있는 세상에서 천자가 되시었습니다만, 도덕을 넓히시고 나쁜 풍습을 좋게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이것은 국가나 백성에게 있어서 만세 후까지라도 복된 일입니다.

    다만, 천하를 태평하게 하기 위해서는 현재가 아니고서는 다스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량한 인물을 얻는 일이 무엇보다도 첫째입니다.”
하였다.

    태종이 다시 이르기를
    “내가 현량한 인재를 얻고자 하는 진정을 어떻게 잠 잘 동안이라도 잊은 일이 있을까 보냐. 언제고 그것만을 골돌히 생각하고 있다,” 고 하였다.

    이번에는 급사중(給事中)인 두정륜(杜正倫)이
    “어느 세상이고 반드시 재능이 뛰어난 인물은 있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 때의 군주가 쓰는 방법에 따라 그의 재능이 충분히 발휘되는 것입니다.

    은(殷)나라 고종(高宗)이 부열(傅說)을 꿈에 보고 그를 찾아서 재상을 삼았고, 주(周)나라 문왕(文王)이 여상(呂尙)을 만나 스승으로 삼았다는 사실과 같은 기회를 기다렸다가 그러한 연후에 정치를 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한 우연한 기회를 기다리실 것이 아니라 폐하께서 적극적으로 현재를 구하시어 그를 신임하고, 중용하시는 일이 매우 중요합니다.”
하였다.

    태종이 깊이 두정륜(杜正倫)의 말을 받아들였다.

    ◆ 대화(23) 인의(仁義)의 도를 행할 것을 말하다.
    정관 12년(서기638년)에 태종이 시신들에게 이르기를
    “숲이 깊으면 새들이 서식하고, 개울의 흐름이 크면 물고기가 놀며, 사람이 인의도덕을 거듭 행하면 천하의 사람들이 자연히 그사람을 따르며 사모한다.(林深則鳥棲 水廣則魚游 仁義積則物自歸之)

    세상 사람들은 모두 내 몸에 달라붙는 재앙을 두려워서 피할 줄을 알면서도 인의(仁義)의 도(道)를 실행하는 일은 알지 못한다. 인의의 도를 실행하면 재앙은 스스로 일어나지 않는다. 인의의 도라고 하는 것은 언제나 마음에 간직해 두고 잊지 않도록 할 것이다. 끊임없이 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만약 극히 짧은 동안이라도 마음이 해이해지고 게을러진다면 인의와 도덕의 길에서 멀리 떨어져 나가는 경과가 된다. 그것은 마치 음식물이 신체의 영양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항상 뱃속에 음식물을 충분히 취해 두지 않으면 그의 생명을 보전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고 하였다.

    왕규가 이 말을 듣고 정중하게 머리를 숙여 예를 드리고 나서
    “폐하께서 지금 하신 말씀을 잘 알고 계신다는 것은 천하를 위하여 최상의 행복입니다.” 하였다.

    ◆ 대화(24) 신하는 군주의 예우에 대하여 보답할 것이다.
    정관 11년(서기637년)에 태종이 시신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옛날에, 적인(狄人: 중국 북방 미개 족속)이 위(衛)나라의 의공(懿公)을 살해하여 그 고기를 다 먹고 나서 다만 그의 간(肝)만을 남겨 놓았다. 의공의 신하인 홍연(洪演)은 하늘을 우러러 대성 통곡하고는 자기 몸을 갈라서 그 간을 꺼내고 대신 의공의 간을 자기 배 속에 넣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다.
    지금 세상에서는 그와 같은 충렬(忠烈)한 신하를 구하고자 하여도 아마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하였다.

    이에 특진(特進)인 위징이 대답하기를
    “그것은 군주가 신하를 어떻게 대우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옛날에 진(晉)나라의 예양(豫讓)은 지백(智伯)을 위해 복수하기로 다짐하고 조카 조양자(趙襄子)를 자살(刺殺) 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양자가 늘 자기를 죽이고자 노리고 있는 예양을 잡아서 예양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이전에 범씨(范氏)와 중행씨(中行氏)를 섬기지 않았던가? 지백은 그들을 멸망시켜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대는 오히려 지백을 섬겨 , 멸망한 범씨나 중행씨를 복수하지 않았다. 이제 와서 지백을 위해 복수하겠다고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예양이 대답하기를 ‘나는 이전에 범씨와 중행씨를 섬기었습니다. 그러나 두 분이 다 보통의 신하로 여겼을 뿐입니다. 그래서 나도 보통의 신하 정도로 그분들에게 은혜를 갚았습니다. 그러나 지백은 나를 국사(國士)로서 대우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국사로서의 은혜 갚음을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군이 평소에 신하를 어떻게 예우하느냐에 달린 것입니다. 충렬한 신하가 나타나느냐 않느냐 하는 책임은 국주가 신하의 인물 됨을 잘 살피어서 우수한 신하에게는 그에 상당한 예우를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입니다. 어찌하여 홍연과 같은 인물을 얻지 못하시겠습니까?”
하였다.

    ◆ 대화(25) 연고보다 재능을 중시하여 임용하다.
    태종이 처음에 황제의 위에 올랐을 때(서기627년) 중서령(中書令) 방현령이 아뢰어 말하기를
    “폐하께서 진왕(秦王)으로 계실 때 어전에서 측근으로 모시던 자로서 아직 적당한 관직을 얻지 못한 자들이 모두 전 태자였던 건성이나 제왕(齊王) 원길(元吉)의 측근에서 섬기던 자들에 대한 처우가 오히려 자기들 보다 먼저 이루어진 것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이에 태종이 이르기를
    “예전에 이르던 ‘더없이 공평하더”고 한 말은 결국 공평하여 헤아림이 있고, 사심이 없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단주(丹朱)와 상군(商均)은 다 요순(堯舜)의 친아들이었다. 그렇지만 요임금이나 순임금은 자기 아들을 폐하고, 천자의 지위를 전하지 않앗다.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은 주공(周公)에게 있어 형제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공은 주실(周室)의 안태를 위해 그 두 사람을 죽였다. 그래서 만민의 군주 된 자는 천하라는 것을 마음에 두고 모든 사람에게 개인적인 사정을 품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옛날 제강공명(諸葛孔明)은 삼국시대의 한 소국이었던 촉(蜀)나라 승상에 지나지 않았던 자이다. 그러함에도 오히려 ‘나의 마음은 저울과 같다. 저울이 물건의 경중을 공평하게 다는 것과 같다. 남을 위해 함부로 가볍게 또는 무겁게 달 수는 없다’고 하였다.

    하물며 나는 지금 당(唐)이라고 하는 대제국을 다스리고 있으므로 더욱 개인적인 연고에 의해 불공평한 것은 할 수 없다. 나나 그대들이 먹고 입는 것은 모두가 백성들의 노동에 의해서 생산되는 것들이다. 그렇다면 백성의 힘은 이를 위해 봉사하고 있는데 정부의 은혜는 아직 백성들에게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현재(賢才)를 가려서 쓰는 까닭은 결국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키고자 바라기 때문이다. 사람을 채용함에 있어서는 다만 그 인간이 쓸모가 있는가 없는가를 문제로 삼을 뿐이다. 어찌하여 새사람이라든가 전부터 친숙한 사람이라든가 하는 것으로 기분을 좌우할 수가 있겠는가?

    대개 한 번 만났던 사람이라도 친해질 수가 있는 일이거든 하물며 이전부터 측근에서 섬기던 자를 그렇게 빨리 잊을 수 있을 것인가? 그렇다고 하여 남보다 먼저 쓸 수가 있을 것인가?

    이제 그 쓸모가 있는가 없는가를 문제 삼지 않고 함부로 쓰이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원망한다고 하는 것은 어찌 더 없는 공평한 도리라고 하겠는가?”
하였다.

    ◆ 대화(26) 대주(戴胄)가 법을 지켜 태종을 간하다.
    정관 원년(서기627년)에 이부산서 장손무기가 어느 때 태종의 소명을 받고 궁중에 입궐했다. 법규대로라면 패도(佩刀)를 풀어놓고 들어가야 하는 것인데 얼떨결에 칼을 허리에 찬 채로 입궐했다. 그리고 궁중에서 퇴궐한 뒤에야 대궐문을 경위하던 무관인 감문교위(監門校尉)가 비로소 깨달았다.

    그런데 그것이 문제가 되어 그 처분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평의(評議)하게 되었는데 그 때 상서우복야 봉덕이의 의견은
    “감문교위는 장손무기가 칼을 찬 채로 입궐한 것을 몰랐다는 직무태만의 죄는 사형에 상당합니다. 장손무기가 잘못하여 칼을 찬 채로 입궐한 죄는 도형 2년에 벌금으로 동 20근을 바치면 됩니다.” 하였다.

    이에 태종은 그의 의견에 따르기로 하였다.
    이 때 사법차관(司法次官)에 해당하는 대리소경(大理少卿) 대주(戴胄)가 봉덕이의 의견에 반대하며
    “감문교위가 알아차리지 못한 것과 장손무기가 얼떨결에 칼을 찬 채로 입궐한 것과는 어느 쪽에도 잘못을 저지른 점에서는 같습니다. 신하로서 천자를 대하는 경우에 있어서는 실수라는 것이 용서를 받을 수 없는 것으로서 변명으로 통하지 않습니다.

    법률을 적용한다면 ‘천자를 받드는 약이나 음식물 또는 천자가 탄 배(舟船)를 실수로 법대로 운행하지 않은 자는 모두 사형에 처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만약 폐하께서 장손무기의 국가에 대한 훈공을 참작하시여 특별한 처치를 베푸신다면 저희들 사법관이 결정할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만일 법률에 의해 처단하시고자 하신다면 벌금으로 구리를 바치게 하심은 적당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이에 태종이 이르기를
    “법이라는 것은 천자인 나 한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천하 만민을 위한 법이다. 어찌하여 장손무기가 황후의 오라비로서 황실과 친척이 된다고 해서 간단하게 법률을 굽히고자 할 수가 있겠는가?” 하고, 거듭 협의하여 결정을 지으라고 하였다.

    그러나 봉덕이는 당초의 자기 주장을 고집하면서 바꾸려 하지 않았다. 이에 태종이 또 봉덕이의 의결에 따르고자 하였다.
    대주가 또다시 반대 의견을 아뢰어
    “감문교위는 장손무기의 얼떨결에 칼을 찬 채로 입궐한 것이 원인이 되어 죄를 저지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법률을 적용함에 있어서는 당연히 가볍게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의 과오를 문제 삼는다면 사정은 같습니다. 그런데도 한 쪽은 살고, 한쪽만 죽을 죄가 된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어긋나는 것입니다. 교위의 죄를 가볍게 다루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였다.

    이에 태종이 교위의 사형을 면제하였다.
    이 무렵은 국가 창건시기에 해당하였으므로 조정에서는 한창 관리를 선발하여 등용하는 길을 열어 놓고 있었다. 그런데 관리를 지망하는 자 중에는 수(隨)나라 때의 계급과 자격을 사칭하는 자가 있었다. 그래서 태종은 사칭한 자에게는 자수를 권하고, 만약 자수를 하지 않고 탄로 될 때는 사형에 처할 것이라고 공언하였다.

    그런지 얼마 뒤에 계급을 사칭한 자가 있어 그 사실이 밝혀졌다. 그 때 대주는 법률의 규정에 따라 그 유형을 판결하고 그것을 태종에게 주상(奏上) 하였다. 그런데 태종은 이를 불쾌하게 여겨
    “내가 칙령으로 자수하지 않은 자는 사형에 처하겠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그대의 단죄는 유형이다. 이렇게 되면 내가 온 백성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 되고 나를 불신하게 되는 것이다.” 하였다.

    이에 대주가
    “폐하께서 즉석에서 그 사람을 죽이신다면 저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담당 법관에게 넘기신 이상 저는 절대로 법률 규정을 어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태종이
    “그대는 자신이 법률을 충실히 지키기 위해 나에게 백성의 신용을 잃게 하려는 것인가?” 하였다.

    대주가 다시 아뢰기를
    “법률이라고 하는 것은 국가가 큰 신의를 천하에 공포한 것입니다. 그러나 말이라고 하는 것은 다만 그 때의 희로(喜怒)의 감정에 의해 발해지는 것입니다. 폐하께서 거짓말을 하는 자가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한 마디의 노여움을 발하시어 그러한 자는 사형에 처하라고 하셨으나 뒤에 그것이 옳지 않음을 깨달으시고, 법률의 규정에 따라 처치하라고 법관에게 넘기셨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작은 노여움을 참으시고, 큰 신의를 잃지 않고 보존하신 것입니다. 만약 노여워하시는 뜻에 따라 국가의 법률을 지키는 신의를 위반하시는 것은 저로서는 황송하오나 폐하를 위하여 그것을 심히 애석하게 여깁니다.”
하였다.

    태종은 이 말을 듣고
    “내가 법률에 어긋나는 경우에는 그대는 이것을 바로 잡아준다. 나는 법률의 시행에 있어서 아무것도 근심할 필요가 없다.” 고 하였다.

    ◆ 대화(27) 간언에 의해 공주의 결혼을 간소하게 하다.
    장락공주(長樂公主)는 문덕왕후(文德皇后)가 낳은 딸로서 태종이 가장 귀여워하였다.
    정관 연중에 강가(降嫁: 지체가 낮은 집으로 시집 감) 하려 할 때 태종이 담당 직원들에게 분부하여 그 차비를 장공주(長公主: 천자의 자매)인 태종의 자매들 때의 갑절로 하게 하였다.

    이 때 위징이 아뢰기를
    “옛날 후한의 명제는 그 아들을 왕으로 봉할 때 이르기를 ‘어찌 내 아들을 부군의 아들인 내 형제들과 같이 할 수 있을 것인가? 초왕이나 회양왕의 반의 영지로 하라’ 하였습니다.

    옛날 역사는 이것을 미담으로 꼽습니다. 천자의 자매를 장공주라 이르고, 천자의 따님을 공주라 이릅니다. ‘장(長)’이라는 글자가 덧붙은 것은 진실로 공주보다 높이는 까닭입니다. 자매와 따님 사이에는 정으로는 차이가 있게 마련입니다만, 예로써 정해진 예법을 넘어서는 안됩니다.

    만약 공주의 혼례 차지가 장공주들보다 앞서는 일이 있다고 하면 도라상 좋지 않은 일입니다. 부디 폐하께서는 이 점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태종은 위징의 간언에 대하여 참으로 좋은 말을 해 주었다고 칭찬하고는, 그의 말을 애랑의 어머니인 황후에게 말했다. 이 말을 들은 황후는 감탄하면서
    “위징이 아뢴 것은 참으로 공평합니다. 전부터 폐하께서 위징을 존경하고 중히 여기시는 것을 들어왔지만 아직 분명하게 그 까닭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위징의 간언을 들으니 그야말로 도의로써 군주의 욕망을 억제하는 진실된 중신입니다.

    저는 결발(結髮: 여자 나이 15세, 머리를 잡아매는 나이) 하면서 폐하와 부부가 되어 정중한 대접을 받으며 부부로서 정의는 실로 깊고도 두텁습니다. 그러하건만 무엇인가 아뢰고자 할 때마다 반드시 폐하의 안색을 살피면서 경솔하게 폐하의 위업을 손상하는 말은 도저히 아뢸 수가 없었습니다.

    하물며 신하인 경우에는 부부간의 정리처럼 친밀할 수는 없고, 예절에도 간격이 있습니다. 어찌 말씀드리기 어렵지 않은 일이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한비자는 신하가 군주에게 간언하는 일은 ‘설난(說難)’이라 하였고, 한의 무제를 섬긴 동방삭(東方朔)은 ‘진언이라고 쉬운 일이 아니다’고 한 것은 참으로 까닭이 있는 말입니다.

    옛말에 충언은 귀에 거슬리나 행함에 이롭다고 했습니다. 충언이야 말로 천자로써 국가를 보유하는 자의 긴요하고도 급무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충언을 받아들이면 세상은 바로잡아지고, 충언의 길을 막으면 정치가 어지러워집니다. 진실로 폐하께서 이 점을 잘 밝혀 주실 것을 바랍니다. 그렇게 하시면 천하 만민에게는 가장 큰 행복입니다.”
하였다.
    그러고는 태종에게 청하여 시신을 사자로 보내 비단 5백 필을 위징의 집에 보내어 포상하였다.

    ◆ 대화(28) 거직 노하여 신하의 정사(正邪: 바른지 사곡된 지)를 시험하라는 진언을 물리치다.
    정관 초년에 글을 올려 간사하고 아첨하는 신하를 제거할 것을 진언한 자가 있었다.
    태종은 그자에게 묻기를
    “내가 임용하는 신하는 모두 현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대는 간사하고 아첨하는 자가 누구인지를 알고 있는가?" 하였다.

    그 말에 대하여 글을 올린 자가 대답하기를
    “저는 민간에 있어서 누가 아첨하는 자인지를 알고 있지 못합니다. 부디 폐하께서 거짓으로 노한 체 하시고, 군신(群臣)들을 시험해 주십시오. 만약 천자의 노여움을 두려워하지 않고 꺼림없이 자기가 옳다고 믿는 바를 간언하는 자는 바른 자입니다.
    그와 반대로 군주의 뜻에 따라 어떠한 분부에도 고분고분 하는 자는 아첨하는 자입니다.”
하였다.

    태종이 봉덕이에게 이르기를
    “나는 ‘하천의 청탁(淸濁)은 그 원인이 수원(水源)에 있다’는 말을 들었다. 군주는 정치의 수원이요, 만민은 물의 흐름과 같은 것이다. 군주 자신이 거짓말이나 하여 속이는 짓ㅇㄹ 하고, 어떻게 신하들에게 정직한 행위를 하기를 바라겠는가?
    그것은 마치 수원이 흐려 있으면서 개울 물이 맑기를 바라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런 일은 도리로서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일찍이 위(魏)의 무제(武帝: 조조)가 사람을 속이고 거짓 행위가 많았으므로 그의 인품을 매우 낮추어 보고 경멸해 왔다. 그런 나로서 어떻게 이런 진언을 교령(敎令)으로 실시할 수 있겠는가? 나로서는 도저히 거짓으로 신하의 정사를 시험하는 갓은 할 수 없다.”
하고,

    상서(上書) 한 사람에게는
    “나는 신의라는 것이 널리 행해지기를 희망할 뿐, 남을 속이는 방법을 백성에게 가르치기를 바라지 않는다. 따라서 말은 아무 의의가 없다. 그러므로 나는 그대의 진언을 받아들일 수 없다.” 하였다.

    ◆ 대화(29) 피서궁전(避暑宮殿)을 짓자는 진언을 물리치다.
    정관 2년(서기628년)에 공경들이 아뢰기를
    “「예(禮)」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계하(季夏: 늦여름, 음력 6월)에는 서기(暑氣: 더위)를 피하기 위해 높은 건물에 살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제 성하(盛夏)는 물러가지 않은 데다가 가을 장마가 시작되려는 불순한 기후입니다. 그리고 궁중은 낮고 습합니다. 아무쪼록 높은 전각을 하나 세우시고, 그곳으로 옮기시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이에 대하여 태종이 이르기를
    “내게 기병(氣病: 관절염이나 신경통 등)이 있다. 그러므로 저습한 곳이 좋지 않을 것은 정한 이치다. 그러나 만약 그대들이 말하는 대로 하려면 경비가 많이 들 것이다. 옛날 한나라 문제는 노대(露臺) 하나를 꾸미고자 했으나 그 비용이 중산층의 집 열 채에 상당한다는 말은 듣고 그 비용을 아끼기 위해 공사를 중지시켰다.

    나의 인격이 한무제에는 멀리 미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는 비용이 문제를 지난다고 하는 것은 아무래도 백성의 부모가 되는 천자가 취할 수 있는 도리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어 공경들이 두 세 번 강력하게 청했으나 결국 허락하지 않았다.

    ◆ 대화(30) 한해(旱害)를 자기 책임으로 돌려 백성 구제에 힘쓰다.
    정관 2년(서기628년)에 관중지방(關中地方)에 한해가 있어 대단한 기근이 일어났다. 그 때 태종은 시신들에게 이르기를
    “홍수와 가뭄이 조화를 잃어 수해와 한해가 일어나는 것은 모두 인군(人君)으로서의 덕에 결함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마음을 닦지 못한 것은 나의 부덕의 소치이다. 하늘은 마땅히 나를 책할 일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아무 죄도 없는 백선들이 이렇게도 지독한 곤경에 빠져야 한단 말인가? 백성 중에는 귀여운 자녀를 파는 사람까지 있다는 말을 들었으니 나는 그들이 가엾어 견딜 수가 없을 지경이다.”
하고는
    어사대부(御史大夫)인 두업을 시켜 한해가 더욱 심한 지방을 순회하면서 조사하게 하고, 궁중의 금고를 열어 돈과 보화를 내어 팔려간 아이들을 되 사서 그들의 부모에게로 돌려보냈다.

    ◆ 대화(31) 세속의 미신을 배격하고, 신하의 죽음을 조상하다.
    정관 7년(서기633년) 양주(襄州)의 도독인 장공근(張公謹)이 서거하였다. 태종은 그 부음을 받고 몹시 탄식하고 슬퍼하여 궁중에서 나와 교외에 자리를 자고 장공근을 위해 조상하기로 하였다. 이에 대하여 담당 관원이 아뢰기를
    “음양설에 의하면 육십갑자의 용날에는 죽은 자를 곡하지 않는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세속에서도 꺼리고 피하는 것입니다.” 하면서 중지할 것을 간언했다.

    그 말을 듣고 태종이 이르기를
    “임금과 신하 사이의 정의는 부자의 경우와 같다. 슬픈 정이 마음 속에 일어나 곡을 하는데 어찌하여 용날을 피해 딴 날을 가려 행할 것인가?” 하고는 장공근의 죽음을 슬퍼하여 곡하는 예를 행하였다.

    ◆ 대화(32) 위징의 중용을 시기하여 모함하는 자 있었다.
    정관 10년(서기636년) 권귀(權貴: 권력 있고, 지위가 높은 자)로서 위징이 중용되는 데 대하여 시기하는 자가 있어 일이 있을 때마다 태종에게 아뢰어 말하기를
    “위징이 모든 것을 간 할 때에는 꼬치꼬치 몇 번이고 되풀이 하여 폐하께 그 말에 따르도록 하지 않고는 그치지 않습니다. 이것은 결국 군주를 유소(幼少)한 군주로 다루어 성인(成人)인 군주로서 다루지 다루지 않으려는 까닭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태종이 이 말을 듣고 이르기를
    “나는 수조(隋朝) 고관의 자제로 태어나 젊어서 학문에 힘쓰지 않았고, 다만 궁마(弓馬)의 술을 즐겼을 뿐이다. 그것으로 수말(隋末)에 의병을 일으켰을 때는 각지의 군웅을 격파하여 큰 공읠 세웠고, 그 공에 의하여 진왕(秦王)으로 봉해졌다.

    그리고 그로부터 부친이신 고조에게서 특별한 귀여움을 받게 되었다. 그러한 까닭으로 정치하는 방법이라든가 정책 같은 문제에 대하여서는 전연 생각한 일도 없고, 또 이해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 뒤 황태자가 되고, 처음으로 동궁이라는 궁전에 살게 되면서부터 천자가 된다는 책임을 통감하여 세상을 평화롭게 다스려 보고자 내 욕망 같은 것을 억제하면서 좋은 정치를 행하고자 생각했다.

    그 때 치국방책에 대하여 여러 가지 의견을 말하는 자들이 있었으나 다만 위징과 왕규 두 사람만이 예의와 도덕에 의하여 나를 지도하고 정치하는 방법을 일러줌으로써 나라는 인물을 크게 만들어 주었다.

    나는 면려(勉勵) 노력하여 두 사람의 지도에 따르는 것이 나를 위해서도 도 천하와 국가를 위해서도 크게 유익할 것임을 깨닫고 힘써 행하여 마지 않았다. 그 결과 오늘과 같은 평화롭고 안정된 세상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은 모두 위징 등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특별히 두터운 대우를 하면서 모든 일에 대하여 위징의 진언을 받아들이고 따르는 까닭은 그들에 대한 사적인 정리에서가 아니다.”
하였다.

    이에 말을 꺼낸 자는 부끄러워 입을 다물었고, 태종은 그를 꾸짖어 물러가게 하였다.

정관정요-2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