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정요(貞觀政要)-3
沙月 李 盛 永(2007.3.9)
    정관정요 책은 총 56개 대화 주제가 7개 장(章)으로 정리되고, 8장에 위징 등의 상소문이 실려 있다. 내용이 길기 때문에 다음과 같이 4개로 구획하여 옮기고자 한다.
    정관정요-1: 서언, 제1장(군주는 배, 백성은 물: 대화1-8), 제2장(善을 행하면 번영하고, 惡을 행하면 멸망한다: 대화9-16),
    정관정요-2: 제3장(민중을 직접 다스리는 지방관일수혹 좋은 인물이 필요하다: 대화17-24), 제4장(피서 궁전을 짓자는 진언을 물리치다: 대화25-32),
    정관정요-3: 제5장(법의 적용을 신중히 하여 무고한 죄인이 없게 하다: 대화33-43), 제6장(良臣과 忠臣은 어떻게 다른가?: 대화44-50),
    정관정요-4: 제7장(군주가 暗愚하고 신하가 아첨하면 나라는 망한다: 대화51-56), 상소문(4개 중 1개, 房玄齡이 高句麗 정벌을 반대한 상소)

    ◆ 대화(33) 신하의 진언을 힐문함은 직언을 유도하는 도에 어긋난다.
    정관 18년(서기644년)에 태종이 시신들에게 이르기를
    ‘대저 신하로서 제왕에게 답할 경우에는 대개의 경우 군주의 기분에 맞추어 거슬림이 없도록 아첨을 늘어놓아 마음에 들도록 하고 있다. 나는 지금 나의 과실에 대하여 듣고 싶어 한다. 그러므로 그대들은 다 주저하지 말고 생각한 바를 말할 것이다." 하였다.

    이에 대하여 산기상시(散騎常侍) 유계(劉?)가 대답하기를
    “폐하께서 공경들과 어떤 문제에 대하여 논의하시거나 의견을 상서하는 자가 있을 때마다 폐하의 뜻에 맞지 않으신다고 때에 따라서는 그의 면전에서 의논이나 상서의 내용에 대하여 힐문을 가하십니다.

    그래서 신하들은 부끄러워 물러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아마도 신하들의 직언을 유도하시는 방법이 아닌 줄로 압니다.”
하였다.

    이 말을 듣고 태종은
    “나도 또한 그렇게 힐문한 것을 후회하고 있다. 그대의 말은 지극히 당연하다. 꼭 그것을 위해 이러한 결점을 고치도록 하겠다.” 하였다.

    ◆ 대화(34) 실패는 모두 이욕(利慾)에 눈이 어두워 일어나는 것이라고 경계하다.
    정관 16년(서기642년)에 태종이 시신들을 경계하여 말하기를
    “고인의 말에 ‘새는 숲에서 살고 있건만 그래도 더욱 그 나무가 높지 않은 것을 두려워 하여 다시 또 나무의 높은 가지 끝에 깃들인다. 물고기는 물 속에 숨어 있건만 그래도 더욱 그 물이 깊지 않는 것을 두려워하여 또다시 깊은 바닥에 구멍 속에 살고 있다.(鳥棲於林 猶恐其不高 復巢於木末 魚藏於泉 猶恐其不深 復窟穴於其下)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잡히게 되는 까닭은 모두 먹이를 탐내어 먹기 때문이다’ 하였다.

    지금 신하들은 임명되어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많은 녹봉을 받고 있다. 그렇다면 반드시 성실하고 정직한 길을 실행하여 공명하고 결백하게 사는 방법을 알아 실천할 일이다. 그렇게 하면 재앙이나 실패가 없고 장구하게 부나 지위를 지킬 수 있을 것이다.

    옛 사람은 또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재앙이나 행복은 어느 집에 온다고 미리 약속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 사람의 행위에 의하여 불러 들이게 되는 것이다.’(禍福無門 惟人所召) 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자신을 재앙의 구렁으로 떨어뜨리는 것은 모두 재산이나 이익을 탐하는 욕심이 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저 새나 물고기와 다를 바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대들은 이 말을 충분히 음미하여 조심하는 것이 좋다.”
하였다.

    ◆ 대화(35) 저수량(?遂良)이 기거주(起居注)가 되어 태종의 언행을 기록하고, 태종이 보자는 요청을 거부하다.
    정관 13년(서기639년)에 저수량이 간의대부가 되어 기거주의 주관(主管)도 겸하고 있었다.
    태종이 물어 말하기를
    “그대는 요즘 기거주의 일을 관장하고 있다. 대체 어떤 것을 쓰는 것인가? 대저 인군은 그 게재된 것을 볼 수 있는 것인가? 내가 그 주기를 보고자 하는 것은 기재에 대하여 제재를 가하거나 간섭을 하자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내가 행한 일의 좋은 점과 나쁜 점을 보고 그것을 앞으로의 내 행동에 경계로 할 뿐이다.” 하였다.

    이에 대하여 저수량은
    “지금의 기거라고 하는 것은 옛날 좌사(左史), 우사(右史)와 같은 것으로 인군의 언행을 기록하는 직책입니다. 그러므로 군주의 언행은 선악에 관계없이 반드시 다 기록합니다. 옳지 않은 일도 그대로 다 쓰게 되어 있는 것이므로 인군으로서는 법에 어긋나는 행위를 하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제왕으로서 스스로 기록을 읽어 보신 예는 예로부터 들어 본 일이 없습니다.” 하고, 태종의 요청을 거절하였다.

    태종이 이르기를
    “내게 옳지 않은 일이 있었다면 그대는 꼭 그대로 기록하는가?” 하고 물었다.

    저수량이 대답하기를
    “저는 다음과 같은 공자의 말을 듣고 있습니다. ‘도덕을 지키려면 먼저 자기의 관직을 지키고, 그 직책을 완수하는 이상의 것이 없다’(守道不如守官) 저의 직책은 기록을 담당하는 일입니다. 어찌해서 천자의 불선(不善)이라 해서 그것을 기록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곁에 있던 황문시랑(黃門侍郞) 유계(劉?)가 아뢰기를
    “인군에게 과실이 있으면 그것은 마치 일식(日蝕)과 월식(月蝕) 같은 것으로서 만민이 다 그것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령 저수량이 그 과실을 기록하지 않더라도 천하 만민이 모두 그 사실을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 대화(36) 왕규(王珪)는 공주를 며느리로 맞아 시부모로서의 예를 받다.
    예부상서 왕규의 아들 경직(敬直)이 태종의 딸 남평공주(南平公主)를 아내로 맞았다.
    그 때 왕규가 말하기를
    “예의 정한 바로는 신부가 구고(舅姑: 시부모)에게 알현하는 의식이 있다. 그런데 근자에 와서 좋은 풍속이 깨어지고 쇠퇴해져서 공주가 강가(降嫁: 지체 낮은 집으로 시집감) 함에 있어서는 그 예법이 폐지되었다.

    천자께서는 흠명(欽明: 몸을 삼가고 도리에 밝음)하신 훌륭한 분이시고, 그 거동은 예로부터 정해진 법제를 실행하신다. 내가 공주의 알현을 받는 것은 무슨 자신의 영예를 위해서가 아니다. 다만 국가로서의 훌륭한 예절을 지키자는 데에 그 이유가 있다.”
하고는
    기어이 그의 부인과 함께 어버이로서의 정해진 좌석에 맍아 공주 자신이 비녀를 들고 관궤(관饋)의 예를 실행하게 하여 그 예를 마치고는 자리에서 물러났다.

    태종이 그 이야기를 듣고 참 잘 한 일이라 칭찬하고는 이후 공주가 강가할 때 시가 쪽에서 시부모가 있으면 이 예를 행하게 하였다.

    ◆ 대화(37) 법의 적용을 신중히 하여 무고한 죄가 없게 하다.
    정관 원년(서기627년)에 태종이 시신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한 번 죽은 자는 다시 살아날 수 없다. 그러므로 법률을 적용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관대하고간명하게 하도록 힘쓸 일이다. 고인이 이르기를 ‘관을 파는 자는 그 해 전염병이 번지기를 바란다. 그것은 사람이 미워서 죽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관을 팔아 이익을 남긴다는 생각 뿐이기 때문이다’(?棺者 欲歲之疫 非疾於人 利棺?故耳)

    지금 많은 사법관들은 한 사건의 재판을 심리할 때에 반드시 지독히 엄격하게 문초를 하여 사법관으로서의 좋은 성적을 올리고자 한다. 앞으로 어떤 방법을 취하면 사법관에게 공평하고도 적절한 재판을 할 수 있게 할 것인가?”
하였다.
    이에 간의대부 왕규가 나아가 이르기를
    “다만 공평하고 정직한 마음가짐의 사람을 가려 사법관으로 삼고, 만약 재판에 있어서 심판이 도리에 어그러지지 않는 자에게는 봉급을 올려준다거나 상금으로 황금을 하사하신다면 아첨하기 위해 거짓으로 재판하는 자가 저절로 없어질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태종이 조서를 내려 왕규의 의견에 따랐다. 태종은 또 말하기를
    “옛날에 재판을 심판함에는 반드시 삼공이나 조정의 중신에게 물어서 처리했다.자금의 3공(三公)과 9경(九卿)은 옛날의 그 직책에 해당한다. 오늘부터 사형에 해당하는 죄는 모두 재상과 중서성, 문하성의 4품 이상의 고관 및 상서와 9경에게 명하여 죽을 죄인가 아닌가를 평의(評議)하게 하겠다.
    이렇게 하면 아마 무실한 죄에 의해서 사형에 처해지는 자를 없게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이렇게 하기 4년이 지나는 동안에 사형의 단죄가 내려진 자는 온 천하에서 불과 29명 뿐으로 거의 형벌의 사형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 상태에까지 이르렀다.

    ◆ 대화(38) 재판관에게 공평에 힘쓰라고 경계하다.
    정관 16년(서기642년)에 태종이 대리경(大理卿) 손복가(孫伏伽)에게 말하기를
    “대저 갑옷을 만드는 자는 갑옷이 굳고 단단하기를 바라면서 자기가 만든 갑옷이 좋지 않아서 아군에게 상처를 입히지나 않을까 하고 걱정한다. 화살을 만드는 자는 화살이 날카롭기를 바라면서 자기가 만든 화살이 나빠서 적에게 상처를 입히지 못하게 되면 어쩌나 하고 걱정한다.(夫作甲者 欲其堅 恐人傷 作箭者 欲其銳 恐人不傷)

    왜냐하면 세상 일에는 각각 담당자가 있고, 그의 이익은 그 담당한 직무를 잘 처리하느냐 어떠냐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나는 언제나 법관에게 지금 형벌의 경중의 상태를 물으면 법관들은 언제나 ‘옛날보다 부드럽습니다' 라고 대답한다. 하지만 재판을 관장하는 법관의 이익은 사람을 사형에 처하고 사람에게 혼을 내 줌으로서 자신이 영달하고 그리고 평판을 높이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닐까 근심한다.

    지금 내가 가장 근심하는 점은 바로 이점에 있을 뿐이다. 아무쪼록 자기의 영달을 위해 재판을 엄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바라는 것이니 관대하고 공평하게 하는 데에 힘쓸 것이다”
하였다.

    ◆ 대화(39) 병(兵)은 흉기이나 방비를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태종이 저술한 「제범(帝範)」이라는 책에서 이르기를
    “대저 무기라고 하는 것은 국가에 있어서 사람을 살상하기 위한 나쁜 도구다. 그 국토가 제아무리 광대한 대국이라고 하더라도 전쟁을 좋아하면 백성은 피폐한다. 그렇기는 하지만 국경이 평안하고 외적 침입의 근심이 전혀 없다고 해도 전쟁을 잊어버리면 백성을 침략의 위험 앞에 드러내는 결과가 된다.

    전쟁을 즐겨 백성을 피폐하게 하는 것은 국가를 보전하는 방법이 아니고, 군비를 게을리해서 무방비상태로 국민을 침략의 위험에 알몸으로 드러내는 것은 적에게 위엄을 보이는 방법이 아니다.

    그러므로 무비(武備)라고 하는 것은 전혀 제거해 버리는 것은 좋지 않고, 또 전쟁을 좋아해서 항상 병력을 사용하는 것도 좋지 않다. 그래서 농한기에 백성들에게 무예의 기술을 연습시키는 것은 만약의 경우에 대비하여 병사들로 하여금 대오를 정비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옛날 월왕(越王) 구천(句踐)은 적을 향하여 배를 불뚝 내밀고 버티어 서 있는 개구리를 보고 그 의기를 기리어 수레 위에서 경의를 표하기까지 하면서 항상 병사의 사기를 높이는데 힘 쓴 결과 마침내는 원수의 나라인 오(吳)를 멸망시키고 패자(覇者)의 공업을 성취하였다.

    그러나 서(徐)나라의 언왕(偃王)은 문덕(文德)에만 의존하여 무비(武備)를 버렸으므로 결국 국가가 멸망하고 말았다. 왜나 하면 월은 항상 병사의 위의를 익히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서는 무비를 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공자의 말에 ‘훈련을 실시하지 않은 백성으로써 전쟁을 하는 것은 백성을 그대로 내던져 버리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궁시(弓矢)의 위력을 세우는 일, 다시 말해 무비를 갖추어 두는 일은 가장 중요한 일이다”
하였다.

    ◆ 대화(40) 임읍국(林邑國)을 정벌하라는 진언을 물리치다.
    정관 4년(서기630년)에 담당 관원이 아뢰어 이르기를
    “임읍국의 야만인에게서 받들어 온 문서의 문구가 당제국(唐帝國)의 천자에 대하여 심히 불순하고 무례합니다. 아무쪼록 군병을 파견하여 토벌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였다.

    이에 태종이 말하기를
    “무기라는 것은 원래 사람을 살상하는 흉악한 기구다. 그러므로 만부득이한 경우에 한해서 쓰는 것이다. 그래서 광무제(光武帝)는 말하기를 ‘한 번 군대를 파견할 때마다 마음을 괴롭히게 되어 어느 새인지 모르게 두발이 하얗게 되었다’ 고 하였다.

    예로부터 전쟁을 좋아하여 필요 이상으로 무기를 사용하고 멸망하지 않은 나라가 없다. 전진(前秦)의 부견(符堅)은 자기 병력의 강성한 것을 믿고 꼭 진(晉)나라를 병탄하고자 하여 백만 대군을 일으켰으나, 한 번의 대회전으로 대패하여 나라가 멸망하였다.

    수(隋)의 양제(煬帝)도 또한 기어이 고구려(高句麗)를 정벌하고자 하여 해마다 수많은 백성을 동원하여 싸움터로 몰아넣어 고역을 치르게 하였으므로 백성들의 쌓이는 원성을 견딜 수 없어 각지에서 반란이 발발하였고, 마지막에는 대수롭지 않은 신하에게 피살되었다.

    돌궐(突厥)의 힐리(?利) 같은 경우에는 지금까지 때때로 우리나라에 침입하였으므로 저들의 부락은 그 침략전쟁으로 해서 지칠 대로 지쳐서 드디어 멸망하고 말았다. 나는 지금 내 눈으로 그 사실을 보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쉽사리 군병을 파견할 수 있겠느냐? 더욱이 임읍국을 정벌하러 가려면 그 많은 험한 산을 넘어야 하고, 그 땅에는 악성의 풍토병이 많다. 만약 내가 사랑하는 병사들이 악역으로 쓰러지는 일이 생긴다면 설령 그 만족(蠻族)을 쳐부수어 멸망시킨다고 하더라도 그 손실을 보충하지는 못할 것이다.
    언어상의 문제 따위를 마음에 둘 필요가 있겠는가?”
하고는 결국 임읍국의 정벌을 실행하지 않았다.

    ◆ 대화(41) 귀속을 원하는 강국(康國)의 청을 허용하지 않다.
    정관 5년(서기631년)에 강국이 귀속할 것을 청해 왔다. 이 때 태종은 시신들에게 말하기를
    “전대(前代)의 제왕들은 영토를 확장하고자 힘써 그로 말미암아 사후에 외관상으로 만의 영예를 구하고자 하는 이가 많았다. 그러나 그것은 제왕 자신에게는 아무런 이익도 없고, 그 백성들은 전쟁을 치르기 위해 대단한 괴로움을 겪어야 한다.

    설령, 제왕이 자신에게 이익이 있다고 하더라도 백성들에게 해가 된다면 나는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 더욱이 표면상으로 만의 명예를 구하기 위해 백성들에게 손해를 끼치는 경우라면 나는 정대로 그런 일을 하지 않는다.

    강국의 청원을 받아들인다면 그 나라가 우리나라에 귀속한 이상 만약 그 나라가 다른 나라의 침략을 당한다든가 하여 급한 국난에 처했을 경우에 그것을 모른 체하고 도와주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되면 많은 병사를 만리 머나먼 곳까지 출병시키지 않을 수 없게 되는데 어찌 백성을 괴롭히는 일이 아닐 수 있느냐.
    백성을 괴롭히면서까지 자신의 명예를 구하고자 하는 일은 나의 바라는 바가 아니다. 귀속의 청을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고 하였다.

    ◆ 대화(42) 북방의 야만족을 정벌하지 않고 화친책을 취하다.

    정관 16년(서기642년)에 태종이 시신들에게 말하기를
    “북방 만족은 예로부터 대대로 중국 본토에 침입해 와서 난폭한 짓을 행하였다. 지금 철륵(鐵勒)의 설연타(薛延陀)는 완강하다. 반드시 이에 대한 대책을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심사숙고한 바로는 다만 두 가지 방책이 있다.

    10만의 정병을 가려 그를 쳐부수고 그 놈을 포로로 하여 중국 본토를 원수로 삼는 악한 자들을 남김 없이 쓸어버린다면 앞으로 백 년 동안은 무사할 것이다. 이것이 한가지 방책이다.

    다른 한가지는 만약 저편에서 화친할 것을 바라도록 하게 하는 일에 성공한다면 그와 혼인의 인연을 맺는다. 나는 천하 만백성의 어버이다. 임시 변통으로 만민에게 이익이 될 수 있는 일이라면 어찌 딸 하나를 아낄 것인가?

    북방 만족의 풍습은 주부의 권세가 강하여 무슨 일에 있어 주부의 주장에 좌우되는 일이 많다고 한다. 그뿐 아니라 내 딸이 자식을 낳는다면 그 놈이 내게는 외손자가 된다. 외손이라면 반드시 중국에 대한 침략을 일삼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이렇게 판단해 보면 국경 주변이 30년은 무사할 수가 있을 것이다.

    이 두 가자 중 어느 쪽을 택하는 것이 좋을 것인가.”
하였다.

    이에 대하여 사공(司空) 방현령이 대답하기를
    “수왕조(隋王朝) 시대에 큰 난리를 치르고 백성들의 호구의 태반은 아직 회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무기는 흉기요 전쟁은 위험한 것이므로 성인 공자도 신중하게 대처해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폐하께서 말씀하시는 화친 정책은 실로 천하의 만민을 위해 그 위에 더 없는 행복한 일입니다.”
하였다.

    ◆ 대화(43) 곡나율(谷那律)이 태종의 지나친 수렵을 간하다.
    곡나율이 간의대부가 되었다. 어느 때 태종의 사냥 길에 동반하게 되었고 도중에 비를 만났다.
    태종이 곡나율에게
    “유의(油衣) 우장(雨裝)은 어떻게 만들면 비가 새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하고 물었다.

    이 물음에 대하여 곡나율은
    “기와로 만들면 비는 절대로 새지 않을 것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이 대답은 결국 기와로 집을 이은 대궐 안에 있으면 우장이 샐 것을 근심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 그것은 태종이 수렵을 지나치게 즐기는 것을 말아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이었다.

    태종은 곡나율의 이 말을 퍽 기쁘게 받아들이고 크게 기뻐하면서 비단 2백 필을 하사하고, 아울러 황금띠 한 개를 내리었다.

    ◆ 대화(44) 태자를 폐하려 하고 공신을 살해한 한고조(漢高祖)를 비난하다.
    정관 6년(서기632년)에 태종이 시신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예로부터 인군을 보면 훌륭한 업적을 성취한 많은 자들이 그 사업을 굳게 지키지 못하였다.
    예컨대 한고조는 본디 사수(泗水) 일대의 한 정장(亭長)에 불과하였다. 처음에는 만민을 위험에서 건져 포학한 진(秦)나라를 멸망시키고 제왕으로서의 사업을 완성하였다.

    그러나 만약 다시 그의 재세가 수 십 년쯤 연장되었다고 하면 일찍이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여 국가를 멸망으로 이끌었던 일이 되풀이 되지 않았다고 보장할 수 없는 일이다.

    어떤 점에서 그와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느냐 하면 효혜제(孝惠帝)는 본부인의 소생으로 태자로 책봉되어 중요한 지위에 있으면서 그 성질이 온순하고, 공손하며, 정중하여 자애심이 깊고, 효심이 두터운 인물이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고조는 사랑하는 애희(愛姬) 척부인(戚夫人)의 소생인 조왕(趙王) 여의(如意)를 사랑한 나머지 태자를 바꾸고자 하였다.

    소하(蕭何)와 한신(韓信)은 장량(張良)과 함께 한(漢)의 삼걸(三傑)이라 일컬어질 만큼 진(秦)과 초(楚)를 격파하여 한제국(漢帝國)의 기초를 쌓은 공적이 대단히 높다.

    그러나 소하는 이렇다 할 죄목도 없이 투옥되었고, 한신 또한 조리에도 닿지 않은 이유로 해서 지위에서 제거되었다. 이것을 본 그 밖의 공신인 경포(?布) 등 화가 자기에게도 미칠 것을 두려워 하여 안심할 수가 없었고, 그 결과 반역을 꾀하지 않을 수 없기에 이르렀다.

    한고조의 군신과 부자 사이의 도리에 벗어나는 일은 이와 같았다. 얼마나 국가를 보존하는 일이 곤란한 것인가를 보이는 명백한 증거가 아닌가?

    그러므로 나는 천자의 지위가 안태(安泰)하다는 것을 결코 기대하지 않는다. 언제나 천자의 지위라는 것은 영구히 안전한 것이 아니라 또한 위망(危亡)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자신을 경계하고, 두려워 하며, 근신하여 그것으로써 끝을 안전하게 보전하고자 한다.”
하였다.

    ◆ 대화(45) 국가를 장구히 보전할 방책을 묻다.
    정관 16(서기642년)년에 태종이 위징에게 묻기를
    “근고(近古)의 제왕을 관찰하건대 제왕의 위(位)를 전하는 일이 10대에 이르는 자가 있는가 하면, 불과 1대, 2대에 그치는 자가 있고, 그 중에는 제왕의 지위를 획득한 자 자신이 살해되는 경우도 있다. 이것을 두려워하는 생각이 늘 내 가슴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까딱 잘못하다가는 백성을 어루만지고 부양하는데 있어 그 처치를 그르치는 것이 아닌가 우려되는 바도 있고, 또 내 마음이 방종해 져서 기뻐하는 일이나 노하는 일이 정도를 넘어 상벌을 공정하게 하지 못하는 일이 생기지나 않을까 하고 걱정한다.

    그러나 자기의 그러한 점은 자기 자신으로는 알 수가 없는 일이니 그대는 나를 위하여 그러한 점을 진언해 주기 바란다. 나는 기필코 그대의 말을 표준으로 삼을 것이다.”
하였다.

    이에 대하여 위징이 말하기를
    “사람의 기호(嗜好)하는 욕망이나 희노((喜怒)의 감정은 현자(賢者)나 우자(愚者)를 가릴 것 없이 다 같습니다. 현자는 욕망이나 감정을 잘 조절하여 적당한 정도를 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자는 그것을 제어하지 못하고 욕망이나 감정의 취향에 따라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여 그 처신에 실패하는 결과를 가져 옵니다.

    폐하의 뛰어난 덕망은 헤아릴 수 없이 깊어 지금 같은 태평한 세월에 있어서도 항상위험한 날이 닥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일반인의 감정과는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무쪼록 바라는 바는 끊임없이 스스로의 욕망이나 감정을 잘 제어하시어 유종의 미를 거두어 주셨으면 합니다. 그렇게만 하신다면 후손들은 폐하의 음덕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 대화(46) 수(隋)나라의 가혹한 형벌에 대하여 말하다.
    정관 4년(서기630년)에 태종은 전대인 수조(隋朝)에 있어서 무자비하게 죄인을 감금한 문제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이에 대하여 위징이 답하여
    “제가 이전 수조를 섬기고 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때 도둑이 생겼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떄 양제(煬帝)는 어사징(於士澄)에게 명하여 도둑을 잡게 했습니다. 그런데 다만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점이 있는 사람은 모조리 잡아들여 지독한 고문을 가했습니다. 그래서 죄 없이 죄인이 된 자가 2천여 명이나 되고, 모두 그날로 참수형에 처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대리승(大理丞)인 장원제(張元濟)가 그것을 이상하게 여겨 시험 삼아 그 실상을 조사해 보니 6, 7명은 도둑이 일어난 날에는 그 이전에 있었던 어떤 사건으로 해서 다른 곳에 잡혀 있다가 겨우 풀려 나오자 마자 또 이 사건의 혐의를 받고 잡혀와서 고문에 못 이겨 알지도 못하는 일이면서 자기들이 도둑질을 했노라고 자백을 했습니다.

    장원제는 이 사실을 안 뒤로는 더욱 철저하게 조사하기에 전념한 결과 2천 명 중 단 아홉사람만이 그 날의 행동이 분명하지 않은 자였습니다. 더욱이 관원 가운데 그 사람을 잘 아는 자가 아홉 명 중에 네 사람은 도둑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그런데도 관원들은 양제가 참수형에 처하라고 명했으므로 기어이 그 사실을 상신하지 않고 2천 명 전부를 남김없이 죽여버렸습니다”
하였다.

    이 말을 듣고 태종이 이르기를
    “그것은 다만 양제가 무도했을 뿐만 아니라 신하들 또한 성의를 다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 경우에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천자를 바른 도리로써 간하여 그로 말미암아 천자의 노여움을 사서 죽음을 당하는 경우가 있더라도 피해서는 안 될 일이다.

    어떻게 해서 다만 아첨만을 일삼아 군주를 기쁘게 하고, 군주의 칭찬받는 것만을 좋게 생각할 수 있을 것인가? 군주도 신하도 이와 같고서 어찌 나라가 패망하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인가?

    나는 그대들이 다 함께 나를 도와 주는 덕으로 드디어 죄인이 없이 감옥이 텅 비어 있을 정도로 좋은 세상을 만들어 낼 수 있게 되었다. 아무쪼록 그대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훌륭히 해서 언제까지나 오늘과 같은 상태가 되게 해 주기 바란다”
고 하였다.

    ◆ 대화(47) 궁중으로 들이기로 결정했던 미인에게 약혼자가 있다는 진언으로 중지하다.
    정관 5년(서기631년)에 수조(隋朝) 때의 통사사인(通事舍人)이었던 정인기(鄭仁基)의 딸은 멋진 절세의 미인이었다.
    문덕왕후는 좋은 여인을 널리 구하다가 이 처자를 발견하고 궁중으로 불러들여 태종의 궁녀로 삼고자 했다. 그래서 태종은 이를 불러 충화(充華)로 삼기로 했다.
    그리하여 그 조서는 이미 내려졌고, 천자의 명령을 전할 정식 칙사가 막 출발하려 할 즈음이었다.

    위징은 그녀의 약혼자의 아버지인 육강이 그 처녀는 이미 육씨의 아들에게 허혼한 사이라는 말을 듣고 급히 달려가 진언하여 말하기를
    “폐하께서는 백성에게 어버이가 되시고 만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하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백성이 근심항 때 함께 근심하시고 백성이 즐거워할 때 함께 즐거워하셔야 합니다. 예로부터 도덕이 높은 군주는 백성의 마음을 스스로의 마음으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군주가 훌륭한 궁전에서 지낼 때 백성에게도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집이 있어야겠다고 바라고, 좋은 음식을 먹을 때에는 백성이 굶주리고 추워하는 근심이 없기를 바라며, 아름다운 궁녀를 구하고자 생각하면 백성에게도 부부생활의 즐거움이 있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이것이 군주로서 항상 행하여야 할 바른 도리입니다.

    지금 정씨의 딸은 전부터 다른 사람과 약혼을 하고 있습니다. 폐하께서는 약혼자가 있는 여자를 불러들여 거기에 아무런 의문도 품지 않으시고 약혼자가 있는 여자가 아닌가 하는 하문도 없이 충화로 삼을 것이라는 것을 천하에 공포하였습니다. 어떻게 그러한 일을 백성의 어버이신 천자로서 하싷 수가 있는 바른 도리라고 하겠습니까?

    저는 전해 들어서 알 뿐입니다. 약혼하였다는 사실은 그 진위에 대해 확실한 증거가 없습니다. 그래서 설령 그것이 소문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폐하의 훌륭한 인격을 손상하는 일이 되지 않을까 걱정 끝에 신하 된 도리로서 마음 다부지게 먹고 숨김없이 아뢰는 바입니다.

    군주의 일거 일동은 선과 악을 가리지 않고 반드시 공식 기록에 기재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도리에 어긋나는 행위라도 반드시 사실 그대로 후세에 전해지기 마련입니다. 아무쪼록 이 문제에 대하여는 특별히 마음에 두시고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태종이 위징의 진언을 듣고 크게 놀라 특별히 손수 위징에게 답하는 조칙을 써서 깊이 자신의 생각이 모자란 점을 엄히 꾸짖고, 결국 칙사의 출발을 중지시키고 곧바로 처녀를 본래의 약혼자에게로 보냈다.

    그런데 좌복야 방현령, 중서령 온언박, 예부상서 왕규 어사대부 위정 등 궁정 안팎의 조신들이 모두 말하기를
    “처녀가 육씨와 약혼하였다는 사실은 분명한 증거가 없습니다. 정씨의 딸로써 충화를 삼는다는 조서가 공포된 이상 이를 중지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였다.

    육씨 측에서도 반대하는 의견서를 받들어 올리면서
    “저의 부친인 강(康)이 재세시(在世時) 정씨댁과 친하게 왕래하였고, 때로는 재물을 서로 보내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약혼의 결납 같은 성질의 것은 아니었습니다. 처음부터 혼인에 대한 교섭은 전혀 없었습니다. 이것은 친척들도 다 아는 사실입니다. 다만 외부 사람들이 아무런 실정도 모르면서 되는 대로 그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그리고 그 밖의 대신들도 모두 그 처녀를 궁중에 들일 것을 권하였다.
    태종이 여기서 약간의 의심을 품으면서 위징에게 묻기를
    “군신(群臣)들은 더러 나의 뜻에 아첨하여 따르는 일이 있을는지는 모르나 육씨는 왜 저와 같이 필요 이상이 말을 벌이는 것일까?” 하였다.

    이에 위징이 아뢰기를
    “제가 추측하건대 육씨의 마음은 알 만합니다. 아마도 폐하를 태상황(太上皇)과 같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이 말을 듣고 태종은
    “그건 무슨 뜻의 말인가?” 하였다.

    이에 위징은
    “태상황께서 처음 경성(京城)을 평정하셨을 때 신처겸의 아내를 들여와 얼마간 총애하신 일이 잇습니다. 신처겸은 그 때 사인(舍人)으로 있었는데 태상황께서는 그것을 알고 불쾌하게 여겨서 결국 황태자께 명하여 그를 만천현이라는 고을의 지방관으로 좌천시켰습니다.

    그래서 신차겸은 끊임없이 공포에 떨면서 언제나 무사하게 모가지가 붙어 있을 수 있을까 하는 근심으로 지냈습니다.

    육상(陸爽)은 폐하께서 지금은 호용하신다 하더라도 뒷날 남 모르게 지독한 견책을 가하시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가 굳이 거듭 변명을 늘어 놓는 까닭은 그 본심이 그런 점에 있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그가 극력 변명하는 태도는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이 말을 듣고 태종이 웃으면서
    “외부 사람의 의견으로는 혹은 그럴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말로만 하는 것은 반드시 충분하게 사람을 신용하게 하지 못할 것이다.” 하고는 곧 칙서를 내려
    “지금 정씨의 딸이 먼저 다른 사람과 정혼한 사이라는 사실을 들었다. 지난날 충화로 삼는다는 문서를 공포한 날 그것을 상세하게 조사하지 않았던 것은 나의 잘못한 일이요, 또 담당 관원의 과실도 있다. 그러므로 충화라는 청을 주었던 일은 이에 정지할 것이다.” 하였다.

    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태종을 성명(聖明)의 군주라고 칭찬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 대화(48) 양신(良臣)과 충신(忠臣)은 어떻게 다른가?
    정관 6년(서기632년) 상서우승(上書右丞) 위징에 대해 그가 자기의 친척을 위해 불공평하게 처리한다고 고해 바치는 자가 있었다.
    이에 태종이 어사대부인 온언박에게 명하여 그 사실을 조사하게 하였다. 그런데 조사한 결과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다.

    그 때 온은박이 아뢰기를
    “위징은 인신(人臣)인 이상 반드시 그의 본심이 누구에게나 알 수 없도록 언동을 하여 의심을 살 여지가 없도록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런데도 그러한 혐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남에게서 고해바치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것은 위징의 심경에는 사심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그에게도 또한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태종은 온은박을 통하여
    “그대는 나를 간하여 바로잡아 준 것이 지금까지 수 백 건에 이르고 있다. 그러니 어찌 사소한 일을 가지고 간단하게 그대의 훌륭한 많은 일을 손상시킬 수 있겠는가? 그러나 앞으로는 본심을 분명하게 밝혀 언동을 확실하게 하도록 하라.” 고 전하였다.

    그러한지 며칠 뒤에 태종은 위징에게 물어 말하기를
    “근자에 외부에 있어서 무엇인가 옳지 않은 일을 들은 일이 없는가?” 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위징은 정색을 하면서
    “지난 번에 온은박에게 폐하의 조서를 저에게 하달하게 하시고 ‘무슨 까닭으로 본심을 분명히 밝혀 남에게 혐의를 받지 않도록 하지 못하는가?’ 하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옳지 않았습니다. 제가 듣기로는 ‘군신(君臣)이라는 것은 그 뜻이 일치하여 그 관계기 일심동체다’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아직까지 사심 없는 바른 도리를 행하지 않고 다만 외면적으로 남에게 의심받을 짓을 하지 않은 일만 주로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만약 군신이나 상하나 모두가 외면적으로 남의 평판만을 생각하는 길을 따른다면 나라가 흥하는 것인지 멸하는 것인지 분간할 수가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이 말을 들은 태종은 깜짝 놀라 자세를 바로잡으면서
    “내가 앞서 의심받을 행동을 하지 말라는 말을 한 뒤에 곧 그것을 후회했다. 참으로 대단히 엃지 않는 말을 했다. 그러므로 그대도 또한 이런 일로 해서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말고 숨기거나 거리끼는 마음을 가지지 말고 정과 다름없이 하고 싶은 말을 대해 주기 바란다.” 하였다.

    여기서 위징은 정중하게 배례(拜禮)하면서
    “저는 저의 목숨을 나라를 위해 바쳐 어디까지나 바른 길을 행하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결코 폐하를 속이거나 배반하는 짓을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아무쪼록 폐하께서는 저를 양신(良臣)으로 만들어 주시기를 바랄 뿐 저를 충신(忠臣)으로 만들려 하지 마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하였다.

    이에 태종이
    “충신(忠臣)과 양신(良臣)은 어떻게 다른가?” 하고 물었다.

    위징이 대답하기를
    “양신(良臣)이라 함은 옛날 성천자(聖天子)인 순(舜)임금의 조정에서 섬긴 직(稷), 계(契), 구요(咎繇) 등이 그러합니다. 충신(忠臣)이라 하는 것은 옛날 포악한 천자인 하(夏)의 걸왕(桀王)의 신하였던 용봉(龍逢)이나 은(殷)이 주왕(紂王)의 신하였던 숙부인 비간(比干)이 그렇습니다.

    양신(良臣)은 그 자신은 후세에 추앙되는 훌륭한 이름을 얻고, 군주에게는 성천자라는 훌륭한 칭호를 받도록 하며, 자손 대대로 그 가계(家系)가 이어져 끊이지 않아 그 행복은 한량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충신(忠臣)은 그 자신은 물론이요 그 일족이 몰살 당하고, 그 군주는 폭군으로 떨어지고, 나라도 가문도 다 멸망하고, 다만 충신이었다는 이름만 후세에 남기게 됩니다.

    이런 점으로 말씀 드리면 양신과 충신은 엄청나게 다른 것입니다.”
하였다.

    이 말을 듣고 태종은
    “그대는 다만 이 말이 어긋나지 않게 하라. 나는 반드시 나라를 바르게 다스릴 계획을 잊지 않을 것이다.” 하고는 위징에게 포상으로 비단 3백 필을 하사하였다.

    ◆ 대화(49) 재상의 직분을 밝히고 태종의 과실을 간하다.
    정관 8년(서기634년)에 재상인 좌복야 방현령과 우복야 고사렴(高士廉)이 길에서 영조(營造)의 일을 맡아보는 소부감(少府監)인 두덕소(竇德素)를 만나
    “북문, 곧 내정(內廷)에서는 요즈음 새로 무슨 공사를 하고 있는가?” 하고 물었다.

    두덕소가 이 사실을 태종에게 아뢰었다. 이에 태종이 방현령 등에게 말하기를
    “그대들은 다만 재상의 관아인 남아(南牙)의 일만 알고 있으면 되는 것이다. 내가 내정에 약간의 공사를 한다고 해서 그것이 그대들의 직책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하였다.

    이에 방현령 등은 황공해서 사과해 마지 않았다.
    이 때 위징이 진언하여 말하기를
    “저는 폐하께서 현령 등을 꾸짖으시는 까닭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또 현령과 사렴 등이 사죄하는 뜻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방현령은 일찍부터 대신으로 임명되어 있어 말 할 것도 없이 폐하의 손발과 이목에 상당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궁전 안에서 공사가 있다면 어찌 모르고 지낼 수가 있겠습니까? 그 방현령이 담당 책임자에게 물었다고 해서 꾸짖어시는 것은 저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점입니다. 거기다가 공사에 대해서는 역시 방법에 이해가 있고, 공사하는 사람을 쓰는 데에도 많고 적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폐하께서 하시는 일이 정당하다면 당연히 폐하를 도와드려서 그것을 완성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만약 하시는 일이 정당하지 않다고 하면 이미 공사가 착수되었다고 하더라도 당연히 페하께 말씀드려서 그것을 중지시켜야 합니다. 이것이야 말로 군주가 신하를 부리고, 신하가 군주를 섬기는 정당한 도리입니다.

    방현령 등이 공사를 담당한 관원에게 물은 일은 본디부터 죄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시고 폐하께서는 그것을 꾸짖어셨습니다. 그리고 현령 등은 자신들의 지킬 바 정당한 직분을 분별하지 못하고 다만 꾸지람을 받아들여 사죄하는 것만 알고 있을 뿐입니다. 이것 또한 저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점입니다.”
하였다.

    이에 위징의 간언을 듣고 태종은 깊이 자신의 잘못을 부끄럽게 여겼다.

    ◆ 대화(50) 순행지 장관의 지나친 영접을 엄하게 꾸짖다.
    정관 7년(서기633년)에 태종이 포주(蒲州)로 거동하였다.
    포주의 자사 조원해(趙元楷)는 그 고장 원로급의 노인들에게 할당하여 황색 비단 옷을 몸에 걸치고 태종을 맞이하여 길 좌측에 배알케 하였다. 그 뿐 아니라 관청의 건물을 아름답게 장식하고 고을 성벽의 성루를 비롯하여 토성 등을 손질하는 등 비위를 맞추느라 애를 썼다.

    그리고 남 모르게 양 백 여 마리와 물고기 수천 수를 길러 두고 태종을 수행하여 온 신분 높은 황족들에게 선물로 바치려고 하였다.

    태종이 이 사실을 알고 조원해를 꾸짖어 나무라기를
    “나는 황하(黃河)와 낙수(洛水) 일대를 순행 시찰하면서 몇 고을을 거쳐 왔다. 그리고 필요한 물품이 있으면 모두 관청의 것으로 충당하였다.

    그대는 양을 먹이고, 물고기를 기르고, 건물을 아름답게 장식하였다. 이것이야말로 멸망한 수나라의 못된 풍습으로서 결코 행하여서는 안될 일들이다. 나의 뜻을 잘 알아서 그대의 낡은 근성을 고치지 않으면 안된다.”
하고 말하였다.

    조원해는 수나라를 섬기면서 간사하고 아첨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자신의 행위를 부끄럽게 여기고 두려워 하여 며칠 동안 식음을 전폐하다가 마침내 세상을 떠났다.

정관정요-3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