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장대(西將臺), 화산(花山), 지지대(遲遲臺) 이야기
沙月 李 盛 永(2015, 9, 26)
수원의 그 처녀
(안주연 노래)
1. 진달래같은 붉은볼에 입맞춤하면
2. 초생달- 이 곱게뜨던 서장대
에서

비둘기처럼 노래하던 설익은 처녀
꼭돌아오마 다짐하고 떠나간 그대

성숙한 여인 되어 기다리건만
그약속 굳게 믿고 기다리건만

첫사랑을 주고가신 님은 안 오고
나를두고 떠나가신 님은 안 오고

화산가는 지지대에 노송도 울어
노송나무 가지끝에 바람도 울어

눈물이 마를 날없는 수원의 그 처녀
손꼽아 별을 헤이는 수원의 그 처녀
내가 자주 흥얼거리는 가요 중에 ‘수원의 그 처녀’라는 제목의 노래가 있다.
위 내용의 가사다. 첫사랑을 떠나 보내고 돌아오기만 기다리는 처녀의 애틋한 사랑을 노래한 것이다.

이 노래가사 중에 3개의 고유명사가 나오는데 서장대, 화산, 지지대다.
이것들은 조선조 제22대 정조 임금이 전 대(영조)에 극심한 소론과 노론의 당쟁의 재물로 억울하게 희생된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효행(孝行)과 이(당쟁)를 타파하고 새로운 세상을 열겠다는 이루지 못한 꿈 화성파천(華城播遷)이라는 정치적 야망과 관련된 이야기가 얽혀있는 곳들이다.

이 세곳의 이야기를 그림과 설명으로 엮어 가려는 것이 오늘의 이야기 주제다.
◆ 서장대(西將臺)
성(城)에서 장수가 전투지휘를 하는 지휘소를 장대(將臺)라고 하고, 사주를 둘러싼 산성(山城)이나 읍성(邑城)에서는 그 규모와 지형에 따라 차이가 나지만 통상 동, 서, 남, 북 4개로 구획을 나누어 전투지휘를 하는 경우 서쪽 부분의 전투지휘소를 서장대(西將臺)라고 한다.

남한산성의 경우 동, 서, 남, 북, 외에 외동장대(外東將臺)가 있어 5개의 장대가 있고, 4개 장대는 다 허물어지고 터(址)만 남아있고, 서장대만 남아 개축하여 守御將臺(수어장대)란 현판이 걸려 있다. ‘임금(나라)을 지키는 장대’란 뜻이다.
남한산성 구조 요도와 서장대
수원 화성(華城)에는 동장대(東將臺)서장대(西將臺) 2개소가 있다. 화성이 복원되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서 서장대와 동장대도 산뜻하게 복원되었으며, 지금 서장대는 정조 임금의 친필 華城將臺(화성장대)란 간판이 걸려있다. 이 노래에 나오는 서장대화성의 서장대를 말하는 것이다
화성(華城)의 구조 요도와 서장대
화성 설명
서장대이야기는 이 화성에 대한 설명과 2012. 4. 15.(일요일)
우리 부부와 박영배 부인 셋이서 한 바퀴 돈 적이 있어 그 때 앨범으로 대신한다.
* 화성(華城)I(화서문-서장대-팔달문) 바로가기(클릭): 화성(華城)I
* 화성(華城)II(팔달문-동장대-화서문) 바로가기(클릭): 화성(華城)II
◆ 화산(花山)
화산(花山, 108.2m)은 현 화성시 태안읍 송산동에 있고, 정상이 남수원골프장 내에 들어있는 산이다. 서쪽에 장조(莊祖: 思悼世子, 莊獻世子)와 경의왕후(敬懿王后)의 능 융릉(隆陵)과 그 서쪽에 정조(正祖)와 효의왕후(孝懿王后)의 능 건릉(乾陵)이 있고, 남쪽 산 아래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지은 원찰(願刹) 용주사(龍珠寺)가 있다.
용주사 인근 송산동에서 바라본 화산
남수원 골프장 주차장에서 바라본 화산 정상
대동여지도의 花山(화산) 표기
▶ 융건릉(隆健陵)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묘는 본디 경기도 양주군 남쪽 중량포 배봉산(지금 동대문구 휘경동) 기슭에 있었다.
정조가 즉위하면서 곧바로 사도세자의 존호를 장헌(莊獻)이라 추상하고, 묘호(墓號)를 수은묘(垂恩墓)에서 영우원(永祐園)으로 바꿨다.
정조 13년(1789) 이곳 화성으로 이장하면서 현륭원(顯隆園), 묘호(廟號)를 장조(莊祖)로 추존하면서 능호(陵號)를 융릉(隆陵)으로 격상하였다.

조선왕조에서 가장 효성스러운 왕은 정조(正祖)였다. 수원·화성 일대가 효심의 고장이 된 데는 사도세자의 능을 이곳으로 이장해 오면서부터다.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는 28세의 나이에 뒤주에 갇혀 생죽음을 당했다. 아버지 영조에 의해서이지만 당쟁의 희생물이었다. 정조는 나이 불과 10세에 한 맺힌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하였다.
정조는 왕위에 오르자 아버지의 원혼을 위로하고 달래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법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무엇이든 했다.

무엇보다 견딜 수 없는 일은 아버지 사도세자가 역적으로 남아 있는 한 정조 자신은 반역자의 아들이라는 사실이었다.
정조는 아버지의 온전한 복권을 위해서 온갖 노력과 눈물겨운 효심을 바쳤다. 그리고 영조의 눈을 어둡게 해, 세자를 비운의 왕자로 몰고 간 당쟁을 종식시키고, 새로운 국가 건설을 위해 화성천도(華城遷都)를 꿈꾸었던 것이다.
정조는 한 해에 몇 차례씩 아버지의 능행(陵行) 길에 올랐는데, 때때로 눈물짓고 통곡하기를 그치지 못했다고 한다.
정조는 죽어서도 끝내 아버지 능 가까이 건능(乾陵)에 묻혔으니 정조의 효성은 깊은 슬픔을 동반한 것이어서 더욱 애틋하다.
융건능 설명
세계문화유산 표지
▷ 융릉(隆陵)
융릉 설명
융릉의 홍살문
융릉 제각(祭閣) 정자각(丁字閣)과 그 오른쪽 뒤로 융릉 봉분이 보인다.
정자각 뒤와 양 옆에서 올려다 본 융릉 봉분과 석물
목책 위쪽으로는 출입통제 구역이다.
사도장헌세자(思悼莊獻世子) 헌릉원비(獻陵園碑)와 비문 해역
장조(莊祖) 융릉비(隆陵碑)와 비문 해역
융릉은 사도장헌세자(思悼莊獻世子) 때의 헌릉원비(獻陵園碑)와
장조(莊祖)로 추존된 후의 융릉비(隆陵碑) 2기가 서 있다
제각(祭閣) 정자각(丁字閣)의 앞과 서측 옆과 내부
▷ 건릉(健陵)
건릉 설명
홍살문과 수리중인 제각 정자각(丁字閣)

올려다 본 건릉
봉분은 조금만 보인다. 목책 위로는 출입통제구역이라 가까이 가서 찍을 수 없다.
건릉비각과 건릉비 및 비문 해역
▷ 융건릉(隆健陵) 능역 노송(老松) 지대
융건릉의 능역으로 들어서면 울창한 소나무 숲이 이어지는데 이 또한 정조가 효성으로 심고 가꾸어진 소나무 숲이다.

정조는 이곳에 소나무를 조림해 놓고 백성들이 이 소나무를 땔감으로 자꾸 베어가자 나무에다 돈을 달아 놓고 ‘이 돈을 가져가 땔감을 살지언정 이 나무는 베지 말라’고 써 붙이니 백성들이 정조의 지극한 효성과 나무사랑에 감동하여 이후로는 나무를 베어 가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또 어느 해는 송충이가 극성을 부려 이들 소나무가 다 죽게 되었을 때 정조가 송충이 몇 마리를 잡아서 입에 넣고 질겅질겅 씹자 어디서인가 수 만 마리의 까치와 까마귀가 몰려와 순식간에 송충이를 다 잡아 먹었다고 한다. 하늘도, 미물도 정조임금의 효성과 나무사랑에 감동한 것이다.
융건릉을 오가며 능역의 노송지대를 걷다
▶ 용주사(龍珠寺)
용주사 표석
화산 남쪽 기슭의 용주사(龍珠寺), 이곳에는 본디 신라 문성왕 16년(854)에 염거화상이 창건한 갈양사(葛陽寺)가 있었고, 고려 광종 21년(970)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수륙재를 개설하는 등 청정하고 이름 높은 도량이었으나, 병자호란(丙子胡亂)으로 소실된 채 숲 속에 묻혀 있었다.

정조가 아버지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크게 다시 짓고(1790) 원찰(願刹)로 삼으니 용주사의 구석구석에 효심이 어려 있다.
용주사가 사도세자의 원찰이 되기까지는 당대의 고승 보경당(寶鏡堂)의 숨은 의지가 있었다.
보경스님은 융릉의 이장지를 찾아다니는 정조를 만나기 위해 가까운 대황리에 머물며 『부모은중경』을 설하고, 이 너머에 능지(陵地)가 있다고 진언했던 것이다.
정조는 보경스님의『부모은중경』 설법에 감동을 받았고, 용주사 중창의 도총섭(都總攝)을 맡아 4년 만에 불사를 완성하니 전국에서 들어온 시주가 8만 냥이 넘었으며, 145칸의 대찰 면모를 갖추었다.

낙성식 전날 밤에 정조의 꿈에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꿈'을 꾸고 절 이름을 용주사(龍珠寺)라 했다고 전한다.
효행본찰 용주사 현수막과 용주사 효행박물관
내부는 구경하지 못했다. 다음기회에 관람해 보아야겠다.
정조 임금이 기증한 부모은중경을 비롯하여 보물 1095호 봉림사 아미타불,
복장 유물, 친필 봉불기복게, 김홍도의 사곡병풍 등 용주사가 소장하고 있는
격조높은 문화재를 전시하고 있다고 한다.
용주사 절 어귀에 이르면 연풍교(連豊橋)가 있는데, 그 주변의 자연석에 '到此門來莫存知解'(도차문래막존지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는데 '이 문에 이르러선 마음을 허공과 같이 비우라'는 뜻이다.
'到此門來莫存知解' 표석 2개
홍살문 설명
절간에 유교 형식의 홍살문은 드문 일이나 이곳 외에 계룡산 동학사에서도 본 적이 있다.
이곳은 사도세자와 헌경왕후 혜경궁홍씨, 그리고 정조의 위폐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기 때문이라 설명하고 있으며,

동학사는 경내에 고려 태조 때 지은 신라충신 박제상 (朴堤上) 사당 동계사(東鷄祠)가 있고,
조선조 초에 지은 고려의 세 학자이며 충신인 목은(牧隱) 이색(李穡),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야은(冶隱) 길재(吉再) 이른바 삼은(三隱)을 모신 삼은각 (三隱閣)이 있고,
세조 때 단종을 비롯하여 안평, 금성대군, 황보인, 김종서 등 세조에게 죽임을 당했던 280여 원혼을 달래는 초혼제를 지내는 초혼각(招魂閣, 그 후 肅募殿 )에서 제사를 지내기 때문이라 한다.
사천왕문에 이르기 전 홍살문과 심문각
조선 후기의 문화적 변화가 영향을 미쳤는지, 아니면 왕궁의 법도가 영향을 주었는지 용주사는 특별하고 진기한 사찰구조를 이루고 있다. 사천왕문이 있어야 할 자리에 궁궐의 대문처럼 보이는 삼문각이 있고,
그 양 옆으론 마치 사대부집 행랑채와 같은 건물이 길게 전면을 차지하고 있는데 절기마다 찾아오는 정조임금의 행차에 동행하는 신하들과 하인들의 숙박을 위한 시설(행랑채) 같다.
입구에서 천왕문 자리까지 일주문을 대신하는 큼직한 선돌들이 양 옆에서 호위하며 방문객을 맞는데 보기 드문 일이다.
용주사 천왕문과 4천왕 그리고 도깨비 문양
천왕들의 요대 자리에 새겨진 도깨비 문양은 우리 민족의 먼(BC2700년경) 조상 치우천왕의상징이다.
어느 절이나 사천왕이 있는 곳이면 마찬가지로 배에 요대 바클 자리에 도깨비 문양이 그려져 있다. 우리민족의 도깨비는 먼 조상 '치우(蚩尤)'의 대표적인 상징이다.
'치미(蚩尾)'라는 막새기와, 삼족오(三足烏), 장승, 두꺼비, 두무, 씨름과 황소 등도 치우의 상징이다.

치우는 기원전 2700년 경(단군왕검보다 350여 년 전) 중국 한(漢)족이 시조로 떠받드는 황제(黃帝)와 같은 시기에 중원(中原)의 땅을 놓고 치열하게 쟁탈전을 벌려 싸움마다 이겨 황제와 그 군사들을 혼줄냈던 동이족(東夷族)의 한 군장(君將)이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물론이고 중국 사람들까지도 치우는 '강자(强者)', '전쟁의 신'으로 인식되어 한고조 유방이 항우와의 싸움에 나가기 전에 치우사당에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삼국지 이후로는 관우를 전쟁의 신으로 모심)

불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와 토착신앙과 융합하는 과정에서 부처를 지키고, 절을 지키고, 중생을 지켜주는 사천왕(四天王)은 강자(强者) 이어야 하기 때문에 치우의 상징 도깨비 문양을 배에 그린 것이다.

신라 30대 문무왕 15년에 8년 동안 힘겨운 싸움 끝에 이 땅에서 당군을 몰아내고, 3년 후인 서기 679년에 당나라가 다시 넘보지 못하게 해 달라는 염원으로 경주 배반동 낭산 밑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지을 때 지붕에 녹유귀면와라 불리는 도깨비상을 새긴 기와를 얹었다. >
삼문(三門)

.
좌우에 7칸의 행랑채 깆춘 다른 사찰에서 볼 수 없는 배지붕의 궁궐 양식이다.
용주사 사적비

석탑과 전면 천보루(天保樓), 후면 홍제루(弘濟樓) 현판의 건물
절 삼문을 들어서면 왕궁에서나 이름 붙일법한 '천보루(天寶樓)’가 궁전이나 관청 건물처럼 아래층이 모두 돌기둥으로 되고, 2층 누각 3면에 난간을 둘러 웅장하게 만들었다.

천보루 앞에 대웅보전 앞마당에 있을 법한 석탑 한 기가 서 있는 게 이상스럽다. 탑이 대웅전 앞이 아닌 누각 앞에 놓여 있는 것은 이곳 말고는 보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천보루를 머리 위에 이고 계단을 오르게 되는데, 이 계단이 또한 예사롭지 않다. 원형 표면에 비운문(飛雲紋), 북 모양의 막음돌에 삼태극과 모란문양을 새겨 멋을 부렸다. 여느 사찰에서는 보기 드문 일이어서 진기하다.
천보루 앞에 선 층 석탑
천보루 후면에 홍제루(弘濟樓) 현판
이 누각의 바깥쪽 天寶樓(천보루)라는 현판이 있는가 하면, 안쪽에는 弘濟樓(홍제루)란 편액이 걸려있다. (弘濟는 정조 임금의 호이며, 정조임금의 문집을 弘濟全書라 한다)
조선조 임금의 호(號)
구분(代) 묘호(廟號) 호(號) 구분(代) 묘호(廟號) 호(號)
16대 인조(仁祖) 송찬(松窓) 25대 순조(純祖) 순재(純齋)
17대 효종(孝宗) 죽오(竹梧) 추존 문조(文祖) 경헌(敬軒)
21대 영조(英祖) 양성(養性) 24대 헌종(憲宗) 원헌(元軒)
추존 장조(莊祖) 의재(毅齋) 25대 철종(哲宗) 대남재(大男齋)
22대 정조(正祖) 홍제(弘濟) 26대 고종(高宗) 주연(珠淵)
조선조에 추존된 임금은 위 장조(莊祖: 사도세자, 정조의 父), 문조(文祖: 헌조 父) 외에
덕종(德宗: 성종 父), 진종(眞宗: 영조 長子, 10세 卒) 가 있음
홍제루 양 옆으로는 요사 건물을 틈 없이 맞춰 지어 대웅전을 향해 U형을 이루고 있고. 대웅전 주변만 넓게 트여 있는 것이다.

천보루 밑 계단을 밟고 대웅전 앞에 들어서면 또 하나의 기이한 장면이 펼쳐진다. 대웅전을 정면으로 탑이 놓여야 할 자리에 마치 왕릉의 참도(參道)와 같은 길이 똑바로 나 있다. 여기에 있어야 할 석탑이 천보루 앞 마당에 있는 것이 이 절의 특별한 구조다.

노전(爐殿)과 극락전(極樂殿)이 대웅전 양 옆에 직각으로 서 있다. 그 밖의 여러 전각들은 공간을 최대로 활용하며 대칭·비대칭 구조를 자연스레 연출하고 있다. 이는 한국 건축물의 특성이어서, 잘 보존된 조선시대 사찰을 만나보는 좋은 예이다.
노전(爐殿)에는 경기도유형문화재 제11호와 제12호인 금동향로와 청동향로를 보관하고 있다.
대웅보전, 삼존불, 탱화, 설명문
대웅보전 삼존불(三尊佛: 釋迦如來佛, , 藥師如來佛, 阿彌陀佛)을 모신
1790년 창건당시 지어진 정면 3칸, 측면 3칸의 건물이 보존되고 있다.
삼존불 후면의 삼세여래후불탱화(三世如來後佛撑畵)는 김홍도의 작품으로
우리나라 최초로 후불탱화에 서양화의 음영기법을 도입하여 그린 귀중한 성보이다.
김홍도는 그림도 뛰어나거니와 정조의 총애를 한 몸에 받은 화원이어서 서로의 뜻이 썩 잘 교감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대웅보전 편액이 정조의 친필이며, 용주사 창건문·상량문도 정조가 쓴 것(御製)이다. 뿐만 아니라 정조는 용주사 창건기 상하권도 경건한 필체로 직접 쓴 것으로 전해져 아버지의 진혼을 위해 그리도 극진했던 것이다.
대웅전 뒤와 옆 불화
부모은중경탑과 호성전(護聖殿) 외부와 내부
이곳은 장조(莊祖: 장헌세자, 사도세자)와 헌경왕후(獻敬王后 혜경궁홍씨)
정조(正祖)와 효의왕후(孝毅王后)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지내는 곳이다.
이로써 용주사가 원찰(願刹)임이 입증되는 것이다.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은 부모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높은가를, 그 은혜를 어떻게 갚을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설한 불교경전으로 부모의 은혜를 10가지로 제시하고, 보은의 어려움을 8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보은의 방법으로는 남에게 베풀며 진리를 실현하는 것이 최상의 길이요 덕이지만, 불효를 저지르면 영락없이 아비무간지옥에 떨어지고 만다는 대승경전의 내용이다. 정조는 이를 억울하게 이승을 떠난 아버지 사도세자의 넋을 위로하고 추효(追孝)하기 위해 1796년 목판에 새겼다.

현재 용주사에 보존돼 있는 경판은 모두 세 종류 85매이다. 동판 7매는 변상도, 석판 24매는 한역경문, 목판 54매는 한역·국역경문·변상도로 되어 있다. 그 가운데 목판 54매는 정조 20년(1796)에 제작한 것이고, 동판과 석판은 1802년 순조가 하사한 것이다.

정조 때 만든 21점의 변상도는 매우 정교한 필치로 묘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필법과 인물의 배치 등으로 보아 당시 용주사에 내려와 있던 도화서원 김홍도의 작품이 확실해 보인다. >
부모은중경비 3면
부모은중경판 샘플
부모은중경판(父母恩重經板)은 용주사의 상징으로 알려졌으며,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7호로 지정되어 있다

판본에 글씨와 그림을 그린 이가 기록되어 있지 않아 여러 가지 추측을 불러일으키고 있으나 판화 곳곳에서 김홍도의 필치가 엿보여 판화의 원본을 김홍도가 그린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정조는 당대의 최고 화원으로 김홍도를 가장 아끼고 총애했으며, 그림에 관한 한 모든 것을 김홍도와 의논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니 더욱 김홍도의 작품이라 단정해도 좋을 것이다.

한편 정조는 단원 김홍도에게 『부모은중경』과 탱화를 그리게 하면서 그에 앞서 7일간의 기도를 시켰다고 한다. 그만큼 정성을 쏟았고 가피력(加被力)을 믿었던 것이다..

용주사 대웅보전으로 오르는 계단의 소맷돌에는 보통 사찰의 계단 소맷돌에서 볼 수 있는 연화문이나 당초문이 새겨져 있지 않고 구름무늬와 삼태극, 모란무늬가 새겨져 있다.
이는 융릉(隆陵: 사도세자)의 정자각 계단의 소맷돌에도 이와 똑같이 되어 있어 용주사가 사도세자의 원찰(願刹)임을 말해준다.
시방칠등각(十方七燈閣)
시방칠등각(十方七燈閣)은 칠성각의 다른 이름으로
칠성과 산신, 독성이 탱화로 모셔진 곳이다.
천불당(千佛堂)
범본각, 범종과 버종에 새겨진 삼존불, 설명
심문각 행랑채 왼쪽 옆으로는 정조가 심었다는 회양나무가 수령 200여 년을자랑하며 푸르게 자라고 있다. 천연기념물 제264호이다.
천연기념물 표석과 수령200년의 회양목
대웅보전등 여러 절집 주변에 식재된 그 후손 회양목들
◆ 지지대(遲遲臺)
1번국도로 수원시와 의왕시 경계가 지지대고개이다. 이 고개는 우리 땅 산경(山經) 중 한남정맥(漢南正脈)이 광교산(582m)-백운산(564m)에서 범봉(250m)-오봉산(205m)으로 기수를 낮추어 군포시 산본의 수리산(478m)으로 건너가기 위해 내려선 가장 낮은 분수령이며, 이 북쪽에 내린 물은 안양천으로 모여 한강으로 흐르고, 남쪽에 내린 물들은 수원시가지를 거쳐 아산만 서해로 흘러든다.

이 지지대고개의 옛 이름은 『여지대전도(輿地大全圖)』, 『해동지도(海東地圖)』등에 사근현(沙近峴:
대동여지도에는 沙斤)이었는데 정조가 『팔도군현지도』에는 '미륵현(彌勒峴)'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고개 부근에 미륵당(彌勒堂)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후에 지지현(遲遲峴)으로 바뀌고 지금은 사람들은 ‘지지대고개’라 부른다. 이 또한 정조 임금의 부친 능행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노래에서 ‘화산 가는 지지대’라 한 것도 바로 정조 임금의 능행길에서 아버지 사도세자의 현륭원(顯隆園) 또는 융릉(隆陵)이 있는 화산이 처음으로 보이는 고개, 또 능행을 마치고 귀경하는 길에 화산이 마지막 보이는 고개인 이 지지대고개를 말한 것이다. 귀경길에 임금(정조)이 고개에서 갈 생각을 하지 않고 화산을 뒤돌아 보는 바람에 귀경길이 ‘늦어졌다(遲遲)’는 말이 곧 고개 이름이 된 것이다. 아마 이 노래의 수원의 그 처녀도 첫사랑을 준 님이 서울 쪽으로 갔는지 이 지지대고개에 와서 님이 돌아오기를 기다린다는 뜻인 것 같다. 그 모습이 하도 애처로워 노송도, 바람도 함께 울었다는 내용이다.
대동여지도의 사근(沙斤) 표기
지지대비 표지, 비각으로 오르는 계단과 하마비
'대인이나 소인이나 모두 말에서 내려서 가라'
지지대 비각과 비, 설명
이 비는 조선 순조 7년(1807) 화성어사 신현(申絢)이 정조의 갸륵한 효성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비가 지지대비(遲遲臺碑)이다. 정조가 융릉에 참배하러 갈 때 이 고개에 오르면 화산의 장헌세자릉이 빤히 보이는데 발길은 더디기만 했다. 정조는 그때마다 "왜 이리 더디냐(遲)"고 역정을 냈다 하니 한달음에 달려가 부왕을 뵙고 싶어했음이 역력하다.

참배를 마치고 돌아갈 때는 으레 이 고개에서 이르러 화산릉을 돌아보며 못내 발길 돌리기를 아쉬워해 귀경행차가 많이 늦어졌다(遲) 한다. 해서 이 고개를 느릴 지(遲)자를 겹쳐 써 지지대고개로 불렀다는 훈훈한 일화가 전한다. 지지란 공자가 노(魯)나라를 떠날 때 '지지오행야'(遲遲吾行也)라 한 말에서 비롯되었다. 지지대비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4호이다.
미륵당과 설명문
노송지대 표지, 지금 남아있는 노송 그리고 설명문
지지대고개 정상에서부터 예전 경수(京水)국도를 따라 약 5㎞ 구간에 낙락장송이 줄지어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고 있었다.
1789년 4월 정조가 융릉의 식목관에게 돈 천 냥을 주어 능참 때 지나는 이 길에 소나무 500주와 능수버들 40주를 심게 하여 조성된 것이라 한다.
세월이 지나 대부분 고사했고 지금은 130여 그루의 낙락장송이 길목을 지키며 시민의 휴식처가 되고 있다. 경기도 기념물 제19호이다.

정조의 효심어린 일화가 이 노송지대에도 서려 있다. 소나무들이 무럭무럭 자라주기를 바라고 있던 어느 때 송충이가 들끓었다. 정조는 주민들에게 상금을 내리며 잡게 했지만 송충이가 쉽게 없어지지 않았다.
어느 왕릉 행차길에는 신하에게 일러 송충이를 잡아 오게 하여 송충이를 깨물면서 진노했다.
"네가 아무리 미물일망정 어찌 내가 가꾸는 솔잎을 갉아먹느냐!" 그러자 솔잎을 갉아먹던 송충이들이 일시에 땅바닥에 떨어져 죽었다는 감동적인 일화이다.
정조 임금 동상
언제 누가 세웠는지 모르겠다.
프랑스군 참전비
1974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국방부가 6.25당시
프랑스군이 주둔한 지지대 고개 일원에 전사자 262명의 이름이 새겨진 참전비를 건립했다.
지지대쉼터 표석과 건물
지지대고개에서 만난 경기도 삼남길
경기도가 과천의 남태령을 기점으로 안성의 안성천교까지
10개 구간을 구획하여 요즈음 유행인 올레길(걷는 길)을 개설하였다.

이 길은 옛 조선조 간선도로 10개 중 충청, 전라, 경상 이른바
삼남(三南)으로 통하는 제6,7로가 지나가는 길을 병행하거나 교차하면서 가기 때문에
'삼남길'이라 명명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 조선조 10개 간선도로 바로가기(클릭): 조선조 10개 간선도로
◆ 경기도 삼남(三南)길
경기도 삼남(三南)길
명칭 구간 경유지/요도 의미/길잡이 Km/시

1






남태

표석
|
인덕

옛터
과천-안양
한양으로 들어가는 관문길/

남태령역을 나와 남태령방향으로 조금 가면
나타나는 남태령 옛길 표석을 기점으로한다.
과천성당 지나 만나는 온온사는 정조임금이
능행차시 묵어간 곳이며, 이를 지나면 관악산
등산로 입구인 과천향교를 지나간다.
과천시청과 정부과천청사를 지나며 정조임금
이 물맛이 좋다하여 벼슬을 내렸다는 기자우물
을 만나고, 좀 더 길을 재촉하면 인덕원 옛터에
도착한다.
8.7
Km

2:30

2





인덕

옛터
|
백운
호수
입구
안양-의왕

옛 도로교통 중심지 인덕원 지나는 길/
인덕원은 과천, 안양,의왕을 잇는 삼남대로의
요지, 옛길 관련 문헌에도 빠지지 않은 곳으로
교통의 요지인 만큼 자연적으로 주막(여관)과
가게들이 많이 생겨났다.
그래서 이름자에 원(院)자가 붙었고, 지금도
인덕원 옛터 표석이 남아있다.
인덕원을 지나 학의천을 따라 가면
빼어난 경관의 백운호수를 만나게 된다.
3.5
Km

1:00

3





백운
호수
입구
|
지지
대비
의왕

과거 보러 한양 가던 길/
모락산길은 과거보러 한양가던 이들이 걸었던
길이다. 백운호수와 연결된 이 길은 세종 3자
임영대군묘역을 지나 모락산 동쪽으로 이어
지고, 오매기마을 지나 의왕시가지 쪽으로
길을 잡으면 정조 임금의 능행차길의 요지
사근행궁터(고천동사무소)를 지나 골사그네로
가고, 사근행궁을 거치지 않으면 통미마을 지나
직선길로 골사그네에 이른다.
조금 더 가서 지지대비가 있는 지지대고개에서
수원땅이 시작된다.
12.6
(10.1)
Km

3:40
(3:00)

4





지지
대비
|
서호
공원
입구
수원
백로와 오리가 노니는 서호천을 걷는 길/

지지대(遲遲臺)고개는 정조임금이 아버지
사도세자의 현릉원을 행차하고 돌아가는 길이
못내 아쉬워서 이곳에서 행차가 머뭇거리며
늦어진(遲) 데서 유래된 이름, 이름 자체로서
정조임금의 효심을 느낄 수 있다.
화장실문화전시관 해우재(解憂齋)는 옛 추억을
되새기는 곳, 서호천을 따른 길을 걷다 보면
여기산 백로서식지도 본다.
7.1
Km

2:00

5





서호
공원
입구
|
배양
수원-화성
탁 트인 중복들 가로질러 걷는 길/

서호(西湖: 祝萬堤)는 정조 임금이 수원의
농업을 장려하기 위해 축조한 인공저수지로
지금도농촌진흥청 시험장이 있다.
향미정에서 바라보는 서호낙조(西湖落照)
수원8경 중의 하나로 꼽히는 절경이다.
서호를 따라 남하하다보면 지금은 폐기된
수인선 협궤 철로를 만나고 더 남하하면
수원과 화성의 경계 배양교에 이르러 끝난다.
7
Km

2:00

6






배양

|
세마
화성-오산
아버지 사도세자 향한 정조의 효심이 깃든 길/

배양교로부터 화성시에 접어들어 황구지천변의
들판을 따라가면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정조
임금의 효심이 깃든 용주사(龍珠寺)에 이른다.
다시 남쪽으로 독산성(禿山城)을 바라보며 길을
재촉하다 보면 세마교에 이르러 이 길은 끝난다.
코스 자체는 짧은 편이지만 용주사 서쪽 인근의
융건릉(隆健陵) 경내에도 잘 정리된 걷는 길이
있음으로 짬을 내서 걸어보면 더욱 정조 임금의
효행심을 느낄 수 있다.
6.8
Km

1:50

7





세마

|
은빛
개울
공원
오산
독산성 올라 주변 풍광 한 눈에 볼 수 있는 길/
세마교를 출발하면 곧바로 독산성으로오르는
길이다.
임진왜란 때 권율장군이 왜군을 무리친 이야기
가 전해지는 성이다.
주변 경관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좋은 조망대다.
백제고찰 보적사와 산림욕장을 지나 계속 가면
금암동 고인돌공원이 있는데 한강 이남에서
최초 발견된 고인돌 로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
7.2
Km

2:00

8





은빛
개울
공원
|
맑음

공원
오산
도심 속에 숨은 여유를 찾는 길/
세교지구 아파트를 지나면 다시 숲길로
이어져 오산시가지 도심 한가운데 이런 한적한
길이 숨어있었나 싶을 정도로 조용한 숲길이
약수터를 지나 공자를 모신 사당 궐리사(闕里
祠)
에도착한다.
권리사에서 도심을 지나면 오산시민들의 산책로
로 사랑받는 오산천길을 만나 걷다 보면 평택으
로 들어가는 길목에 자리한 맑음터공원에 이른다.
5.3
Km

1:40

9






맑음

공원
|
원균
장군
오산-평택
평택 옛 중심 진위고을 지나는 길/
맑음터공원을 출발하여 야막리 쪽으로남하하면
평택시 진위현 관아가 있던진위면사무소와
진위천 인근의 풍광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진위향교에 이르면 옛 진위현의 위세를 느낀다.
진위천을 건너 남하하면 ‘훤치고개’라 불렀던
소백치와 대백치를 지나게 되고, 더 남하하면
내리저수지 인근에 위치한 원균장군 묘에 도착
하여이 길은 끝난다.
17.4
Km

4:50

10





원균
장군

|
안성
천교
평택-안성

바른 정치 이상이 담긴 대동법길/
원균장군묘를 출발하남하하면 평택-음성(제천)
간의 40번고속도로를 지나 새마을운동 모범
마을로 선정되었던 칠원에 이른다.
이곳에는 인조 임금이 ‘물맛이 훌륭하다’
여 벼슬을 내렸다는 옥관지정을 볼 수 있다.
평택의 자랑 배꽃이 만발한 들판을 지나면
동법(大同法) 시행기념비
에 이르고, 옛 소쇄원
자리와 미륵불을 지나면 소사벌을 거쳐 경기
도와 충청도의 지경이며 안성천위로 지나가는
경부고속도로의 안성천교에 이르면 경기도
삼남길은 끝난다.
14.5
Km

4: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