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변기행(竹邊紀行)
沙月 李盛永(2007. 11.20)
    보낸이: 윤석구 소원(所員)(4-대공-2)
    수   신: 이성영
    보낸날자: 98.04.24
    (내용)옛날 울진연대에서 연대장님 근무시절을 생각하며 (제 아내가)수필을 썼습니다. 연대장님께 참고로 올려드립니다. (4-대공-2실 윤석구)
수필 ‘죽변기행’ 표지

    나는 1982년 2월 5일부터 1983년 6월 16일까지 16개월간 경북 영덕-울진에서 2군의 제50향토사단 제121연대장을 했다. 이 연대는 영일군 청하면 월포리 남부와 포항 시를 제외한 경상북도의 해안을 간첩과 무장공비의 침투를 막아 해안을 지키는 것이 주임무였고. 울진군과 영덕군 그리고 영일군 북부가 작전 담당지역이었다.

    처음 부임하였을 때는 울진군은 작전지역이 아니었으나 3개월쯤 지났을 때 육군은 사단급 부대 재배치가 있어 경북 북부지역도 제50사단이 인수 받으면서 나는 제36사단 제107연대로부터 해안을 포함한 울진군 지역을 작전지역으로 인수 받았기 때문에 이후로는 우리 연대 작전지역이 되었다.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큰 사건 없이 연대장 복무를 마치고, 2군사령부 작전처 계획편성과장, 특검단 4부(율곡감사부) 감사관, 국방부 평가분석실 육군평가담당관(과장급)을 끝으로 1990년 2월말 전역하였다. 마침 대전 국방과학연구소(ADD)에 지휘통제통신정보체계(C3I) 개발과제가 부여되면서 군사학 전문가도 필요했기 때문에 운 좋게도 내가 추천되어 1990년 7월 1일 입소하여 2000년 6월 30일까지 하루도 빠짐 없는 10년을 대전 ADD에서 근무했다. 물론 가족은 서울에 있고 나 혼자서 기숙사에 입주하여 기거하고 주말에는 서울 가족에게로 올라왔다.

    국과연에 근무한 지 8년쯤 되는 어느날 연구소 내 전산망으로 위와 같은 내용의 E-mail을 하나 받았다. 제4본부에 근무하는 육사 후배이면서 내가 연대장으로 있을 때 중대장을 한 부하 윤석구 중령(박사)로부터였다. 윤중령은 같은 연구소에 있지만 다들 바쁜 연구개발 업무 때문에 자주 만나지는 못했었다. 간혹 식당에서나 마주치는 정도였다.
    읽어 가는 동안 그 시절 나와 우리 연대의 환상들이 파노라마가 되어 스쳐갔고, 그 때 장병 공히 그야말로 척박하다 할 만큼 열악한 환경 속에서 오직 임무완수를 위해 매진했던 열정, 좀 더 부하들을 따스하게 돌보지 못했다는 후회 등이 한동안 마음 속에 엉켜 있었다.
    며칠 후 글이라고는 별로 써 본 적이 없지만 뻐근한 가슴을 주체할 수 없어 팬을 들어 윤석구 중령에게 답신을 보낸 적이 있었다.

    벌써 10년이 다 돼가는 옛날 이야기인데 난 다른 종친회 관련 자료를 찾느라고 정리하지 않고 담아둔 박스를 뒤지다가 그 때 프린트 해 두었던 윤중령 부인의 ‘죽변기행’ 수필과 ‘죽변기행을 읽고’ 라는 제목의 나의 답신이 나와 다시 읽어보면서 나의 홈페이지에 올려 여러 사람들이 이 아름다운 글을 읽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윤중령이 지금도 국과연에 근무하는 지 알아보니 지금도 있기는 있는데 해외 출장중이라 하여 미리 이야기 하지 못하고 홈페이지에 먼저 올린다. 귀국하면 이야기 해야겠다.
죽변기행(竹邊紀行)
김희재(윤석구 중령 부인, 1998. 4. 24. 보내옴)

    차가 포항을 지나자 오른편 차창 너머에 바다가 예전처럼 누워있는 것이 보였다. 창문을 조금 열자 비릿하고 찝질한 갯바람이 확 끼쳐 들어왔다.
    냄새만으로도 나는 이미 고향에 돌아 온 나그네 심정이 되어 가슴이 설레기 시작했다. 목구멍이 뻐근하도록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기운이 솟구쳐 오르더니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오랜만에 그리운 이를 만난듯한 감격은 이렇게 바닷내를 타고 밀려 들었다.

    끝도 모를 수평선 저 너머까지 주욱 따라 가며 널려있는 잔 구름들 사이로 크고 작은 배들이 풍경화처럼 점점이 박혀있는 것도 내게는 모두가 옛 앨범을 들추어 내는 듯한 정다움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바다는 언제나처럼 변함도 없이 그 리듬과 동작으로 제 몸을 뒤집어 허옇게 거품을 뒤집어 쓰며 시치미를 떼고 누워 있었다.

    우리는 죽변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딱히 찾아 갈만한 집도 없고, 꼭 만날 사람도 없었지만 우리의 젊음과 추억을 찾아서 무작정 떠난 길이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 아이들의 고향, 그 애들의 생가를 찾아가는 길이었다.

    15년 전, 내가 처음 죽변에 도착을 하던 날은 이른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결혼 한지 채 1년도 안된 새댁이 남편을 찾아 허위허위 달려 오는 길이었다.
    결혼 후 남편은 광주 보병학교를 거쳐 영양에서 내륙 중대장을 하고 있었는데 같은 연대에 속해있던 해안중대에서 사고가 나는 바람에 그 중대의 후임 중대장으로 가게 되었다. 가방 한 개만 달랑 들고 떠난 남편을 찾아 임신 7개월의 몸으로 이삿짐을 실은 트럭을 타고 죽변에 왔을 때 그는 나를 맞아 반길 겨를도 없었다.
    갑작스레 부임을 한 남편으로서는 사고로 온통 쑥밭이 되어 술렁이는 중대원들의 마음을 수습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급선무였다. 남편은 홀몸도 아닌 내가 이사를 하고 짐 정리를 혼자서 힘겹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처럼 밤낮으로 부대 일에만 매달렸다.

    누가 가르친 것도 아닌데 나는 그러는 남편을 야속하거나 서운해 하지 않았다. 그가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잘 감당하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오히려 바쁘고 힘든 남편이 나 때문에 신경 쓰지 않게 해야겠다는 소박한 마음으로 그저 말없이 그의 곁을 지키며 해안 중대장 생활을 시작하였다.

    해안중대는 교대로 예비대에서 휴식과 정비를 하고 다시 해안으로 배치되는 법인데 사고를 낸 우리 중대는 다른 부대보다 몇 개월 더 예비대에 머무르며 정비를 하였다.
    예비대에 있는 동안 남편은 같은 울타리 안에 있으면서도 내게는 너무나 먼 당신이었다. 어쩌다 잠간씩 집에 들어 와서도 신경은 온통 부대 쪽에다 곤두 세우고 있었으므로 곁에 있어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중대장 관사는 부대 울타리 안에 있으면서도 부대와는 또 하나의 단으로 둘러 싸여 있어서 밖에서 보면 그곳에 집이 있다는 것조차 모르게 지어져 있었다.
    사방을 둘러 보아도 사람이라곤 하나도 없고 오직 바다와 백사장과 키 작은 해송만 빼곡히 둘러 서 있을 뿐인 외딴집, 종일토록 말 한마디 건네 줄 사라 하나 없는 그 집은 저 푸른 초원 위에 세워진 창살 없는 감옥이었다.
    게다가 마을과는 멀리 떨어져 있고 시내버스도 그리로는 다니질 않아서 시장을 가려면 족히 5리나 되는 길을 남산만한 배를 안고 걸어 가든지 숲 사이로 난 오솔길을 뚫고 국도로 올라가서 무작정 지나가는 아무 차라도 세워서 태워 달라고 부탁을 해야 했다.

    그렇다고 대위 봉급에 매 번 읍내로 전화를 해서 택시를 불러 타고 다닐 수도 없고 남편의 중대장 오토바이 뒤에 마누라가 매달려 타고 다닌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거의 매일 저녁마다 중대원들을 번갈아가며 중대장 관사에서 식사를 하자고 초대하는 바람에 나는 배를 쑥 내밀고 뒤뚱거리며 열심히 시장을 보러 다녔다.
    시장에서 오는 길엔 운이 좋으면 그 쪽 방향으로 가는 택시를 잡아 타기도 하고 완행버스를 만나기도 했다.
    이렇게 어렵사리 장을 보아다가 매일 장정들 저녁을 해대느라 부엌에서 헤어나지 못하면서도 난 한번도 불평을 하지 않았다. 이심전심으로 남편의 의중을 헤아려 짐작을 했기에 그렇게 하는 것이 내가 남편을 도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여겼다.

    그렇게 몇 달 동안 거의 모든 중대원들을 중대장 관사로 불러다 개별적으로 식사를 하며 대화를 하고 나자 뒤숭숭하던 중대 분위기가 많이 정돈이 되고 사고의 악몽에 시달리던 중대원들 모두가 다시금 씩씩하고 믿음직한 패기를 되찾았다.

    이렇게 부대가 제자리를 찾고 안정되어 가는 사이에 나는 첫 아이를 낳았다. 전남 광주에서 잉태되어 경북 영양을 거쳐 울진 죽변 예비대 관사에서 태어난 아이였다.
    아이가 태어난 지 겨우 두 달이나 지났을 무렵 남편의 부대는 해안으로 이동하게 되어 울진에서 한참을 남으로 내려와 덕신이란 마을로 이사를 하였다.

    덕신은 가난하고 조그만 마을이었다.
    중대장 관사는커녕 우리가 세를 들만한 집도 없는 전형적인 어촌이라 큰 살림은 마을회관 한 귀퉁이에다 쌓아놓고 마치 캠핑은 온 사람처럼 전기 밥솥과 전기 후라이팬, 옷가지들만 챙겨 가지고 부엌도 따로 없이 방만 한 칸을 얻어서 살림을 하였다.

    넓은 해안에다 병력을 죽 깔아 놓고 밤새도록 순찰을 둘아야 하는 남편은 낮에 병사들을 재워놓고 잡간 집에 들러 속옷만 갈아 입고 그저 얼굴만 보고 나갈 뿐 밥도 잠도 다 부대에서 해결을 했다.
    전투복에 얼룩무늬 헬멧을 쓰고 산적두목처럼 시커멓게 그을린 아빠가 오토바이를 타고 들어 서면 아니응 제 아빠인줄도 모르고 무섭다고 낯갈이를 하며 뒷걸음질을 했다.
    하지만 그렇게 슬쩍 얼굴만 보고 지나가도 남편은 내가 그 자리에 항상 그대로 머물러 있으므로 든든해 했고 나는 그가 있으므로 행복했다.

    덕신에서는 울진 읍내로 버스를 타고 장을 보러 다니고 아이 예방접종도 하러 다녔다.
    털털버스로 30분 이상이나 구불구불 달려가고 하루 종일 버스를 기다리느라 녹초가 되어도 읍내에 다녀 오면 모처럼 도회지에 갔다 온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도시에서 태어나 자란 덕분에 반 번도 이런 시골에서 살아보지 못한 나는 가끔 이렇게 나들이 하는 것을 전원생활의 낭만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나의 낭만주의는 계절이 바뀌면서 금새 난관에 부딪혔다.
    연탄 아궁이조차 없이 나무를 때서 살아야 하는 시골집에서 미리 준비해 놓은 땔나무도 없이 겨울을 나는 것이 결코 쉽지가 않았다.
    집집마다 자기들이 겨울을 날 만큼의 나무만 준비를 해 둔 까닭에 돈을 주고 살 수도 없는 형편이라 부득이 생나무를 해다가 때야만 했다.
    그렇지 않아도 나무를 때는 일이 어려운 판에 생나무를 때는 일은 거의 불가능했다.
    온 집안을 다 곰굴로 만들다시피 연기만 나고 불은 잘 붙지 않는 생나무를 태우느라 싱갱이를 하다 보면 눈이 매워서도 눈물이 나지만 쌓였던 외로움과 서글픔에 가슴속이 더 매키하니 아팠다.

    간신히 초저녁에 불을 지펴서 군불을 넣어도 새벽 두 세시만 되면 방은 여지없이 싸늘하게 식어 내렸다. 남편도 없이 동그마니 아이를 끼고 누워서 그래도 네 시 까지는 견딜 만 하지만 더 이상은 등이 시리게 추워서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그 밤중에 팔뚝만한 쥐가 우굴거리는 어두운 부엌에 혼자 나가서 다시 불을 지필 엄두도 나지 않고, 자다가 추워서 입술이 새파랗게 질린 아이를 그대로 두고 볼 수도 없고 해서 아이를 솜 포대기 둘러서 업고 얇은 담요를 푹 뒤집어 씌우고는 햇살이 확 퍼질 때까지 온 방안을 서성거렸다.

    그렇게 새우는 밤은 유난히도 춥고 지루했다.
    그런 밤이면 언제나 추위도 아랑곳 없이 밤새 오토바이를 타고 순찰을 돌고 있을 남편과 초소에서 바다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서 있을 그의 부하들을 생각했다.
    살을 에이는 바람 속에서 오로지 나라를 지킨다는 일념으로 밤을 새우고 있을 그들에게 비하면 이 정도는 추운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황금 빛 고운 여명이 문 창호지를 뚫고 들어 와 온 방을 가득 채울 때까지 아이를 업고서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하며 서성이다 보면, 비록 발은 시려도 마음은 그렇게 시리지 않고 오히려 나도 남편과 함께 순찰을 돈 것 같아 가슴 속까지 뿌듯하고 훈훈해졌다.
    그럭저럭 차츰 불을 지피는 요령도 생기고 추위를 나는 것이 그리 고통스럽게 느껴지지 않을 만하게 되어갈 무렵 우리는 무사히 해안 근무를 마치고 다시 예비대로 돌아왔다.

    한 번 해안에 나갔다가 돌아오니 15평 남짓한 예비중대 관사가 내게는 꿈의 궁전보다 더 호화로운 별장으로 느껴졌다. 무엇보다 수세식 화장실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문화의 혜택을 다 누리는 듯했다. 게다가 아침 설거지를 마치고 나서 호젓하게 혼자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식탁과 아궁이 대신 연탄을 때는 새마을 보일러가 있다는 사실에 나는 뛸 듯이 기뻐하며 감사했다.

    사람이 느끼는 행복이란 절대적인 조건이 있는 것이 아니고 마음 먹기 나름이라는 아주 평범한 진리를 이곳에 와서 절실히 느꼈다.지난 번에 살 때는 유배지라고 생각했던 해송 숲속에 있는 조그마한 외딴집이 이번에는 어디에도 견줄 수 없는 꿈의 궁전이 되었으니 말이다.

    남편도 처음 이곳에 들어 왔을 때와는 비교가 안되게 매사에 여유를 갖고 부대를 정비해 나갔고, 지난 1년 사이에 한 식구처럼 된 많은 중대 하사관 가족들과 죽변교회 교우들 덕분에 나도 지난번과는 다르게 적적하지 않은 생활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번엔 예정보다 빨리 해안으로 투입되는 바람에 예비대에 머무르는 기간은 지난 번의 절반도 되지 않게 짧았다.

    아쉬움 속에 이삿짐을 다시 묶으며 예비대를 떠날 채비를 하고 있는데 내 평생에 처음 보는 회오리바람이 바다를 가르고 몰려와 온 산하를 덮치기 시작했다.
    초저녁 어스름 무렵부터 불기 시작한 바람은 비는 한 방울도 오지 않으면서 해송 숲 건너에 있는 백사장의 모래 알갱이들을 다 헤집어 온 사방으로 흩어 버렸다.

    바다가 우는 소린지 전신주가 우는 소린지 분간을 할 수도 없는 혼돈스런 소음을 뚫고 굳게 걸어 잠근 창문을 부서져라 흔들며 눈을 뜰 수가 없을 정도로 모래가 날아 들어왔다. 바람이 심상치 않게 불기 시작하자 남편은 내일 이동할 병력을 확인해 보고 올 테니 문을 꼭 걸어 잠그고 있으라는 말만 내게 남기고 부대로 들어가 버렸다.

    전깃불도 어느새 나가버려 눈을 뜨고 있으나 감고 있으나 마찬가지인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세상의 모든 귀신들이 다 일어나 아우성을 치는 것 같은 그 밤에 나는 오도가도 못한 채 자는 아이를 끌어 안고 방 가운데에서 짐승처럼 엎드려 있었다.
    쉴새 없이 덜커덩거리는 유리창 소리와 고막을 깊숙히 파고드는 쇳가루 섞인 휘파람 같은 전신주 우는 소리는 마치 나를 고문 하듯 말초신경의 맨 끝 가닥까지 휘감고 늘어졌다.

    그렇게 얼마를 지났을까---
    천지를 뒤흔들던 소리가 서서히 잦아 들더니 먼동이 저만치서 희뿌옇게 밝아오고 있었다. 어둠이 물러가고 나자 제일 먼저 눈에 들어 온 것은 내 품에서 고이 자고 있는 아이의 얼굴이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새근새근 자고 있는 아이의 볼에 내 얼굴을 가만히 대 보았다. 세상의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따뜻하고 보드라운 감촉이 느껴지자 정말로 살아 있구나 하는 안도감과 함께 눈에서 눈물이 주루룩 흘러 내렸다.

    그 지독하고 고문 같은 어둠의 공포를 이기고 아이와 함께 무사한 것이 너무나도 감사했다.
    밖으로 나와보니 중대본부와 관사를 가르고 서 있던 담장이 간데 없이 허물어져 평상시에는 보이지 않던 부대가 눈 앞에 훤히 보이고, 그 옆에 서 있던 전신주들은 여름날의 엿가락처럼 아무렇게나 휘어져 전깃줄과 전화선이 제멋대로 엉키어 땅바닥에 구르고 있었다. 도로변에 세워 놓았던 트럭이 훌떡 뒤집혀서 네 바퀴가 하늘을 보고 누워 있는가 하면 거리의 가로수들이 뿌리째 뽑혀진 것도 부지기수로 많았다. 그런데도 다행히 우리 부대와 집은 담장이 무너진 것 외에는 별다른 피해가 없었다.

    날이 밝은 후에야 집으로 달려 온 남편은 우리 모자가 밤새 무사했음을 보고 아무런 말없이 나를 부둥켜 안았다. 위급한 상황에서는 가족보다 부대의 안위가 우선이라 밤새 중대장실에서 머물며 우리를 돌보지 못한 남편의 마음이 그대로 내게 다 전해오고 있었다.

    그 밤에 나는 군인의 아내란 한 남자를 그저 남편으로만 소유하려 들디 말고 평생 그가 지키고 사랑해야 하는 조국에 먼저 바칠 준비를 하고 살아야 함을 절실히 깨달았다.
    보통 사람들이 바라는 자잘한 일상의 행복보다 한 차원 높은 무엇과도 바꾸지 못할 위대한 사명감과 긍지를 가슴에 품고, 어떤 극한 상황에서든지 너끈히 이겨낼 수 있는 강한 생명력을 지닌 아낙이 되어야만 진정한 군인의 아내가 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언제 그렇게 바람이 불었느냐는 듯이 고요한 예비대를 뒤로하고 우리는 죽변에서 북쪽에 위치한 지형이 험하면서도 경관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고포 해안으로 이동하였다.

    거기에도 중대장 관사는 없었다.
    그래도 먼저 살던 덕신보다는 새마을 운동이 일찍 들어 왔는지 집을 개량한 집이 더러 있어서 이번엔 연탄 때는 양옥집에 세를 들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부엌이었다.
    주인 할머니기 까다로운 성미라 덕신에서처럼 한 부엌을 같이 못쓰고 이사하던 날로 화장실이 마주 보이는 집 뒤켠에다 비닐로 포장을 치고 간이 부엌을 만들어야 했다.

    늦봄에 이사를 했는데 그 해 따라 유독 비가 많이 내렸다. 부엌에서 대강 상을 보아 가지고 추녀 밑을 따라서 집을 한바퀴 삥 돌아 오다 보면 밥상인지 물상인지 구별하기가 어려웠다. 그릇마다 전부 뚜껑을 씌워 가지고 새색시 걸음으로 조심을 하고 왔어도 밥을 먹으려면 그릇을 다 들어내고 흥건히 고인 물을 다 딸아 낸 다음에 행주로 닦고서야 그 위에서 밥을 먹을 수가 있었다.
    게다가 집 마당에 있는 수도는 주인 할머니가 늘 꼭지를 뽑아 두는 바람에 언제나 그림의 떡이었다. 물값이 많이 나온다고 절대로 집에서 빨래를 못하게 하는 할머니 때문에 나는 매일같이 유모차에 아이를 태우고 그 지붕에다 빨래 함지를 싣고 개울에 나가서 해다가 널어야 했다. 덕분에 나는 누가 보아도 외지 사람이라고 느끼지 않을 만치 완벽한 동해안 촌부의 아낙처럼 되어 버렸다.

    그러던 차에 아이의 첫돌이라고 친정 어머니가 다니러 오셨다.
    어머니 생각에는 세상에 제일 잘나고 귀한 딸이라 시집도 잘 가서 남보다 편하게 잘 살 거라 기대했다가 막상 우리가 사는 모습을 보시고는 많이 서운해 하셨다.
    이렇게 살 바에는 당장 보따리를 싸 가지고 집에 가자고 야단을 하시던 친정 어머니. 군대생활을 이해 못하시는 그 분과 싱갱이를 하는 것이 내게는 제일 힘이 들었다.

    “이제 보니 내가 윤서방한테 속아도 단단히 속았구나. 너만 저한테 주면 평생 고생시키지 않고 행복하게 해 준다더니 고작 이게 행복이란 말이냐? 왼 종일 남편 얼굴도 구경 못하고 이런 촌구석에 처 박혀서 사는 게---”
    “중대장 때는 워낙 바쁘기 때문에 나 뿐 아니라 누구나 이렇게 살아요”
    “그렇다면 니가 굳이 여기서 같이 있을 필요도 없구나”
    “그래도 중대장을 혼자 하는 것보다는 같이 하는 게 훨씬 좋대요. 그래야 군대생활이 어떤 건지 제대로 배우기도 하고---”
    “이게 어디 군대생활을 배우는 거냐? 괜히 쓸데없이 고생만 죽살나게 하는 거지. 이렇게 너 혼자서 남의 집살이나 할 바엔 당장 보따리를 싸 가지고 집으로 올라 가자”
    “지금 나더러 이혼을 하란 말이세요?”
    “내 말은 그게 아니라--- 너도 배울 만큼 배운 사람이 배운 건 써먹지도 못하고 이란 데서 마냥 썩어 지내는 게 억울하지도 않냐?”
    “엄마, 난 지금 억울하게 그냥 썩어 지내는 게 아니에요. 이렇게 힘든 과정을 같이 겪어야 내가 진짜로 윤서방의 조강지처가 된다고 생각해요. 조강지처는 고생도 같이 하고 영화도 같이 누리는 것이라고 엄마가 그랬잖아요”
    “그것도 어느 정도 기본이 된 다음에 말이지. 너처럼 그렇게 무턱대고 남편을 위한답시고 모든 걸 희생하고 살면 이담에 누가 알아주기나 할 줄 아니?”
    “누가 뭐 알아 달라고 사나요? 그 사람이랑 있는 게 좋으니까 곁에 있는 거지--- 그런데 엄마, 나만 보면 그렇게 남편한테 잘하라고 신신당부를 하시더니 오늘은 왜 그러세요? 내가 뭐 서운하게 해드린 거 있어요? 자꾸만 역정을 내시고---”
    “너보다 공부도 못하던 아이들은 좋은 집에서 보란 듯이 편안하게 잘 사는데 너만 이런 촌구석에서 갖은 고생을 다 하며 사는 걸 보니 어미 속에서 불이 나서 그런다 왜?”
    “엄마’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면서요? 지금은 이래도 우린 갈수록 더 잘 살 건데 왜 지레 겁먹고 야단이세요?”
    “쯧쯧쯧--- 이것아 니 꼴을 한 번 들여다 봐라.그런 소리가 나오는지---”
    “내 꼴이 뭐가 어때서요? 난 지금 너무나 행복하고 아무 불만이 없다는데 왜 그러세요? 괜히 그런 소릴 해서 내 속을 뒤집어 놓으시려거든 다시는 우리 집에 오지 마세요”

    나는 결국 어머니에게 얼굴을 붉히며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어머니가 그러시는 것도 다 나를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밖에 말할 수 없는 친정어머니가 정말로 야속하고 미웠다.
    오히려 남편을 따라 꿋꿋이 사는 나를 대견하다고 칭찬을 해주길 바랬는지도 모른다.
    딸 자식은 다 소용없다더니 어느새 내 마음 속에서는 어머니보다 남편이 더 소중한 사람으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내 마음을 아셨는지 어머니는 나를 외면하고 돌아 앉아서 한동안 눈물만 훔치시고는 가실 때까지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 말씀도 않으셨다.
    다음날, 어머니를 배웅하고 돌아 오는 길에 나는 곧장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마을 뒤에 있는 바닷가로 나갔다.
    어머니 앞에서는 전혀 내색도 않고 가슴 밑바닥에 숨겨 놓았던 눈물 보따리를 풀어서 바다에 던지며 나는 다시금 마음에 깊이 다짐을 하였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절대로 후회하지 않는다.
    그가 가는 군인의 길이 지금은 그저 초라하고 궁색해 보여도 아무나 갈 수 없는 자부심과 사명감으로 가득찬 영광스런 길이라고 나는 믿는다.
    내가 가름이 되어 그가 꽃을 피울 수 있다면 내 인생 전부를 다 그에게 주리라.
    아무리 닥치는 현실이 어렵고 힘이 들어도 절대로 울지 않고 포기하지 않으며 내가 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모든 사람들 앞에 부끄럼이 없는 이름으로 기억이 되도록 순수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 해 살리라’

    아무도 없는 바닷가에다 유모차를 세워놓고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수평선의 아득한 경계선을 바라보며 나는 평생에 잊혀지지 않는 결심을 마음에 새겼고, 그 결심은 우리가 어떤 어려운 상황에 부딪쳤을 때라도 과감히 헤치고 나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차는 어느새 죽변항을 지나 예비대로 들어가는 작은 오솔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정말이지 너무도 멀리 돌아서 출발점으로 돌아오고 있는 것이었다.
    남편도 우리의 신혼시절을 고스란히 바쳤던 현장에 돌아오니 감회가 아주 새로운 모양이었다.
    “여기가 너희들이 태어난 집이란다. 저기 보이는 부대 뒤로 가면 아주 멋있는 집이 있는데 너희 둘 다 그 집에서 태어났지.”
    “그럼 여기가 우리 고향이에요?”
    “고향? 글쎄---”
    순간 우리는 누가 먼저 랄 것도 없이 서로 얼굴을 쳐다 보았다.
    작은 아이는 고포에서 생겨서 거의 만삭까지 있다가 마침 여기에 들어왔을 때 낳기만 하고는 바로 중대장 임기를 마치고 떠났기 때문이었다.

    “이 바보야, 여기는 그저 출생지냐. 고향이란 태어나서 자란 곳이야.”
    큰 애가 어느 틈에 동생을 윽박지르며 아는 체 하고 나섰다.
    “그럼, 우리 고향은 울진, 인천, 서울, 켈리포니아 몬트레이, 플로리다 탈라하시, 대전 중에 어디가 자짜야? 우린 고향이 너무 많네?”
    작은 아이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결코 길지 않는 세월 동안에 우리는 기억해 내기도 숨가쁠 만치 너무도 많이 먼 곳에서 먼 곳으로 돌아 다녔다.

    중대장을 마치자 마자 우리는 곧바로 미 해군대학원으로 위탁교육을 받으러 떠났고, 석사학위를 마치고 귀국해서 육본에 있다가 다시 박사학위를 하러 미국으로 날아갔다.
    되도록 쉽게 학위를 받을 수 있는 전공을 찾지 않고 굳이 어렵기로 유명한 핵물리학 이론을 택하여 거의 목숨을 걸어놓고 전투를 하다시피 공부를 하는 고지식한 남편 옆에서 바라보는 것은 전방에서 근무하는 것에 결코 뒤지지 않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모래시계를 뒤집어 놓은 것처럼 돌아갈 날을 처음부터 정해놓고 시작한 유학생황.
    자비로 공부하는 학생들은 언제까지 꼭 끝내야 한다는 부담감 없이 아무때고 r을 마치면 되는데 비해 국비로 위탁교육을 받으로 온 남편은 정해진 시간 안에 공부를 마치지 못하면 중간에 포기를 하고 그대로 돌아가야 할 형편이었다. 남편은 학위를 마치는 것이 마치 전쟁터에서 적을 물리치는 것이라도 되는 양 지도교수도 질릴 만치 밤낮없이 연구실에만 파묻혀 지내는 바람에 이번에도 집안 일은 몽땅 내차지였다.

    전방에서 근무를 할 때나, 미국에서 공부를 할 때나 남편은 언제나 자기 일에 열심을 다하고 나는 그의 곁에서 뒷바라지 하는 것을 사명으로 알고 살았다.
    천생연분인지 나는 남편만 곁에 있으면 아무리 힘든 여건에서도 주어진 일을 꼭 해낼 수 있는 힘을 얻었다.
    덕분에 남편은 미국 학생도 평균 8년이 걸려야 끝내는 핵물리학 박사학위를 4녕 반 만에 거뜬히 마치고 귀국하여 지금은 전문적인 식견이 필요한 자리에서 자기의 기량을 발휘하며 근무를 하게 되었다.

    아이들의 생가는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작고 초라한 모습으로 방치되어 있었다.
    더 이상 예비중대장 관사로 쓰이지 않고 단지 총각 장교들의 짐만 넣어두는 곳으로 변해버린 텅 빈 집에서 우리는 앨범 속에 있는 낡은 사진에서와 같은 포즈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옛날 사진에는 없는 나보다 더 키가 큰 아이들을 옆에 세우고 사진을 찍으며 나는 이곳이야말로 언제까지나 존재할 마음의 고향임을 실감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전방 골짜기든 미국이든 이 세상 끝 어느 곳이라도 남편이 있는 곳이 곧 내 고향이 되었고 내가 함께 있는 곳이 바로 그의 고향이 되었다.
    푸른 제복을 입고 군문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그가 자라난 곳만이 그의 고향이 아니고 어디든지 부르심을 받고 가는 거기가 곧 목숨을 바쳐 사랑할 고향이 된 것이다.

    지난 15년간 둘이서 한마음이 되어 성실하게 살아온 덕분에 가난하고 고달픈 순간에도 우리는 늘 기뻐하고 감사하며 행복하게 살았다. 그리고 분주하고 힘들었던 삶의 고비들을 무사히 넘기고 이렇게 중년의 길목에서 지나온 길을 반추해 보며 앞으로의 삶에다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을 수 있는 여행을 할 수 있게 된 것이 너무나 감사했다.
    앞으로 15년쯤 더 지난 후에 우리 아이들의 아이를 데리고 다시 이곳을 찾아 오게 된다면 우리의 모습은 어떻게 변해 있을까.
    바람이 있다면 그 때도 여전히 내 남편이 이 나라의 군인 임을 가장 큰 자랑으로 여기고 우리가 겪은 모든 삶의 질곡들을 오히려 훈장인양 우리 아이들에게 기꺼이 전해 줄 수 있는 충직한 군인과 아내이고 싶다.

    어느덧 죽변 백사장 너머로 노을이 붉게 타 들어 가고 있었다.
    아무 말없이 먼 하늘을 바라보던 남편은 내 손을 슬며시 끌어다가 꼭 쥐어 주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나의 마음을 다 알고 있다는 것처럼---
‘죽변기행’을 읽고
    윤석구 박사에게
    잊지 않고 보내주신 부인의 글 ‘죽변기행’을 읽고, 글 귀절마다에 스민 아름다운 향취와 그 시절 나의 추억에 도취되어 글을 쓸 줄도 모르면서 나도 모르게 횡설수설하여 답하니 읽어 보구려. 그리고 부인에게 글 재미있게 읽었다고 전해주시오.
옛날 연대장 이성영 드림(1998. 4. 29)
< ‘죽변기행’을 읽고 >
이성영(국방과학연구소 5-1-4)
    윤박사! 아니 윤중령!
    며칠 전 아침 방송 중에 죽변항에서 영덕대게잡이를 취재한 프로를 보면서 지금으로부터 십 오륙년 전에 울진, 영덕에서 연대장이라는 직책을 맡아서 북쪽으로는 고포에서 남쪽으로는 월포까지 180Km에 이르는 전선 아닌 전선, 해안선을 지킨다고 온갖 정성을 쏟아 붇던 그때의 일들이 마치 파노라마처럼 스쳐간 적이 있다오.

    부인께서 쓰신 ‘죽변기행’ 글을 읽다 보니 윤중령, 아니 윤대위가 오토바이를 타고 해안 소로길을 따라 낮밤을 가리지 않고 해안초소를 순찰하는 동안 나는 사동에 새로 이동한 연대본부
- 전에 전개대대가 있던 자리- 적막이 흐르는 허름한 외딴 관사의 나즈막한 방에서 어느 대대 어느 초소에서 무슨 긴급보고가 있을 지 몰라 마음을 조이며 무료함을 달래려고 낮에 가까운 매화천을 치나치면서 아마추어 수석가(나)가 줏어온 돌 받침을 깎는다고 서투른 솜씨에 발등을 찍고, 손가락도 베이던 생각이 나네요.
    잊지않고 보내주신 지난 날의 고달프고 그러면서도 행복했던 군인의 아내의 길을 촘촘이 엮어 펼쳐놓은 부인의 아름다운 글을 읽어보니 나 또한 지난날 오직 하나, 부여된 직분과 임무완수에 우직했던 그 시절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구료.

    윤중령이 갑작스레 죽변에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읽으니 그 때 죽변 해안초소에서 사고가 나던 그 시각에 나는 영덕에서 연대장에 취임하는 식을 마치고 간단한 다과회 중이었지요. 물론 그때는 그 부대가 내가 취임한 연대의 소속이 아니었으니까 마치 강 건너 불구경 정도였다고나 할까요
    그 해 봄에 육군에서는 사단급부대의 재배치가 있어 영덕에 있던 나의 연대는 울진까지도 맡게 되었고, 연대본부 자리는 양쪽의 중앙을 찾는 다는 것이 기성면 사동리 그러니까 윤중령이 처음 해안에 투입되었던 덕신리 보다 5Km 쯤 남쪽에 위치한 그 곳 전개대대가 있던 자리를 택하게 되었지요.
    그러다 보니 시설이 부족해서 일부 조립식 막사를 증축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터가 좁고 해서 그저 옹색하기가 이를 데 없었지요, 그렇지만 우리 연대가 수행해야 할 임무를 완수하는 데는 연대본부 시설이 문제가 될 수 없지요. 오직 예하 대대, 중대가 맡은 바 소임을 다 할 수 있도록 지원 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니까요.

    그 때 나는 고3 아들녀석과 고1 큰 딸 그리고 국민학교 4학년인 작은 딸이 있어 아내가 임지에 함께 할 수 없으니 영낙없이 홀아비 신세를 면할 수가 없어 하루 점심 한끼는 부대에서, 아침과 저녁은 방위병 숙소 당번에게 의존할 수 밖에 없었지요.
    한 달에 한번, 그것도 수금차
-그때는 봉급이 부대로 현금으로 직접 나왔음- 서울에서 내려오는 집사람은 포항이나 강능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울진까지 오는데 족히 열 두시간이 걸리니 몸은 파김치가 되어 들어오지만 그것도 며칠 쉬어 갈 수도 없이 다음날 포항이나 강능행 버스를 태워 보내야 했지요.
    저녁밥 먹고 바닷가에
-찦차로 갈 수 있는 곳이어야 하니까 통상 망양휴게소- 나가면 해안부대 지휘관들은 그렇게 지긋지긋하게 느껴지는 푸른 바다를 집사람은 마치 수학여행 온 소녀처럼 감탄을 연발하곤 했답니다. 원래 고향이 바다와는 거리가 먼 충청도, 그것도 해안이 없는 충청북도 사람이라 바닷물이 짜다는 것을 그때서야 실제로 알게 되었다니까요.

    우리 집사람은 그보다 19년을 거슬러 올라간 1964년에 강원도 한 후미진 곳 용호리라는 몇 집 안 되는 산촌의 다 쓰러져가는 오두막 집에 세 들어 대대작전장교의 아내로 신혼 살림을 시작했지요. 가구라고는 졸업 때 지급해준 알미늄빽과 비닐로 된 옷걸이식 옷장 하나로 말이오
    십 여년 전, 지금 윤중령이 부인과 아이들을 데리고 죽변을 찾아가듯 나도 집사람과 아이들을 데리고 신접살림을 시작했던 그곳에 가 보았는데 그 집은 물론 몇 집 안되던 동네가 흔적도 없이 살아졌더군요. 군부대가 없어지면서 살 곳을 찾아 모두 화천이나 춘천이나 서울로 갔겠지요.
    그때 대대 참모라고는 나와 군수장교 둘 뿐이라 삼일, 때로는 이틀에 한 번씩 일직을 교대해야 하니 새색시가 독수공방하는 것이 다반사였지요. 저녁이나 얻어먹고 갈려고 잠시 집에 들렸을 때 부엌에서 겨우 기어 나오는 새색시의 앞 머리칼에는 뒷산 용화산 기슭에서 줏어온 고자배기 속심에서 나온 간솔 불 끄름이 까맣게 조롱조롱 매달려 있던 기억이 생생하게 떠 오르네요.

    윤즁령이 해안을 처음 맡았던 덕신은 그래도 내게는 아름다운 추억들이 깃들은 곳이라오. 거기에는 망양리가 있고, 또 망양휴게소가 있지 않소. 집사람이 내려오면 으레 그러했고, 고향의 부모님이 오셨을 때도 이른 아침 꼭두 새벽에 그곳에 나가 동해의 해돋이를 구경하면서 나름대로의 부푼 꿈도 간직했었던 곳이니까요.
    휴게소 바로 아래 위장을 해서 눈 여겨 보지 않으면 알아 보지도 못하고 지나치는 해안초소와 중대본부가 있었던 것이 기억나네요. 그리고 그곳에서 윤중령을 본 것 같기도 하고요.

    예비중대가 있던 덕천은 내게몹시 아프고 미스터리 같은 기억이 남아 있는 곳이라오. 어느날 칠흑 같이 어둡던 그믐밤이었는데 관사의 전화기가 길게 울려서 무슨 불길한 생각으로 수화기를 들었는데 예감과는 달리 대대장의 흥분된 목소리로

    “연대장님! 한 놈 잡았습니다” 하지 않는가.
    차근차근 물어서 알게 된 것은 바로 덕천 예비중대가 있는 위치에서 북쪽으로 칠 팔백 미터 되는 곳, 2명 1조의 해안매복조 앞에 바다쪽에서 걸어 나오는 검은 그림자를 보고 수하를 하자 응답도 없이 엎드리길래 사격을 가하여 1명을 사살했다는 내용이었지요.
    우선 그 시각에 바다쪽에서 나왔고, 그 주변에는 마을도 없으니 틀림이 없을 것 같았지요. 아군 복장이라지만 그거야 어디 간첩이 인민군 복장을 하고 침투한 적이 있는가? 해안을 지키는 부대 지휘관 치고 이러한 상황을 하루에도 몇 번씩 상정해 보지 않은 사람이 있겠는가?

    그러나 잠시 후 풀 죽은 대대장의 목소리에서 ‘아차! 뭐가 잘못되었구나!’ 를 직감했지요. 자세한 내용을 알아본 즉 덕천의 예비중대에서 모범사병 세 사람
-소대 1명씩- 낮에 포상으로 죽변에 외출을 내 보냈는데 두 사람은 귀대하고 한 사람은 중대 위병소까지 왔다가 담배 한 갑 사가지고 온다면서 다시 나갔는데 그 시간까지 돌아오지 않아서 백방으로 찾고 있는 중인데 사살된 시체의 명찰이 그 병사의 이름이라 예비중대장이 현장에 확인하러 가는 중이라는 내용이었고, 이어서 들어 온 보고에는 맞다는 것이었지요.

    해안경게 근무를 바로 그 지역에서 한 고참 병사가 해안에는 총에 실탄을 장진한 채로 작업복 세 겹도 뚫는 다는 바닷가 모기의 극성스런 공격에도 눈하나 깜짝 않고 바다를 노려보고 있는 매복조 용사들이 바로 이러한 상황
-바다 쪽에서 괴물체가 걸어 나오는- 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텐데 왜 그러한 상황을 자기가 스스로 연출했을까?
    다음날 군사령부 5부 합동조사팀이 같은 시각에 같은 장소에서 상황을 재현 해 보고서는 매복조의 처치는 정당하고 아주 잘 한 것으로 막을 내리기는 했지만 지금까지도 그곳에서 있었던 그날 밤 일이 미스터리로 기억에 남아 있다오.

    부인의 글에 고포의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말인데 거기서 있었던 일도 떠 오르는구료. 잘 아는 바와 같이 고포마을은 경상북도와 강원도 지경에 있는 마을로 한 마을이 마을 가운데 흐르는 개울 하나로 나뉘어져 반은 강원도 땅이요, 반은 경상도 땅인데 옛날 울진-삼척 공비침투사태 때 120명의 대규모 무장공비가 해안으로 침투했던 현장이기 때문에 사단에서는 이곳을 경상북도 도민의 대간첩작전과 안보의식 고취를 위한 산 교육장이라 생각하고 도방위협의회 위원을 비롯하여 각부대 자매학교, 각급기관, 사회단체 등의 방문이 끊이지 않으니 소초장과 중대장은 말 할 것도 없고 대대장, 연대장까지 잠시도 이곳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는 곳이었지요.

    어느날도 사단에서 60세 이상 노인네들을 보내면서 당일 아침 지휘보고 때 사단장께서 각별히 관심을 갖도록 당부했기 때문에 시간에 맞추어 현장을 나갔다오.
    방문한 노인들은 어린 손주 같은 소초장, 갓 임관하여 이곳에서 장교생활을 처음 시작하는 홍안의 소년 같은 소초장의 현장 설명이 그렇게 재미 있는지 열심히 듣고, 설명이 끝나자 우뢰같은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지요.
    소초장의 열띤 설명과 노인네들이 경청하는 모습을 보고있던 나는 아침에 사단장께서 말씀하신 향토방위에 관한 주민들의 협조를 당부하는 말도 전할 겸 나서는 김에 고포해안의 백사장 남쪽 끝에 우뚝 솟아 있는 속칭 ‘갈매기똥바위’에 대한 설명이 조금 부족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보충설명을 조금 하였지요.

    “저 남쪽에 우뚝 선 바위를 ‘갈매기똥바위’라고 부른다고 소대장이 말씀 드렸는데, 보시는 바와 같이 많은 갈매기들이 그 위에서 살면서 똥, 오줌을 싸서 바위가 저렇게 하얗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러 어르신네께서 기억하실 저 울진-삼척공비침투사태 때 바로 저 바위에 쌓인 갈매기의 똥, 오줌 속에 들어있는 인광이 밤에 멀리 약 20마일의 수평선에서도 확실하게 식별되어 그것이 공비들이 이곳으로 침투하는데 길잡이가 되었다고 채포된 공비가 진술하였답니다.”

    일행은 죽변의 한 음식점으로 안내되어 식사를 기다리는 동안 이런 저런 이야기들이 오가는 중인데 저쪽 끝에서 갑자기 큰 소리로 “연대장!” 하고 외치는 것이 아닌가!
    “예” 하고 돌아보니 한 일흔 살쯤 돼 보이는 노인네가 얼굴에 싱글벙글 하는 웃음기를 띄면서,
    “아까 연대장이 갈매기똥바위에 갈매기들이 똥, 오줌을 싼다고 했는데 참말로 오줌도 싸는 거요? 나는 똥만 싸는 줄 아는데---.”
    좌중에서는 왁짝하고 웃음이 터져 나오면서 처음에는 노인네 쪽으로 시선이 쏠렸다가 누가 뭐라 한 적도 없는데 다음은 내게로 시선이 집중되더군요. 어떤 대답이 나올는지 몹시 궁금해 하는 눈빛으로---
    “예! 당연히 오줌도 싸지요. 그런데 갈매기는 똥과 오줌 구멍의 입구가 한군데 모여 있어서 나오면서 한데 썪여서 잘 구별할 수가 없어 사람들은 큰 것(대변)만 보고 ‘똥싼다’고만 하는데 더 정확히 말하자면 ‘똥, 오줌을 싼다’고 하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일 것입니다.” 하니 또 한 번 왁짝 웃음이 터져 나왔지요. 임기응변의 대답일 뿐 나는 지금도 갈매기가 똥만 싸는지, 오줌도 같이 싸는지 모른다오.

    부인의 글에 광풍에 시달린 이야기가 나오는데 밤새도록 각 부대 피해를 집계하여 사단에 보고하고, 사단에서는 군사령부에 보고했는지 다음날 아침 바람이 그친 후에 군사령부 군수처 차장을 단장으로 하는 조사단이 나와 연병장 한쪽 귀퉁이에 내려서 연병장을 걸어오면서 연병장 복판에 뒤집어져 있는 조립식 막사
(연대 참모부 사무실) 지붕을 보고는
    “어이 연대장! 보기도 안 좋게 막사 지붕을 왜 연병장 복판에다 갖다 놓았나?”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어이가 없어서
    “우리 연대에는 막사 지붕을 옮길 수 있는 병력이 없습니다” 하면서 간밤의 광풍의 짓임을 설명하니 조사단원들이 하나같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지요.
    지금 생각해도 동해안의 예측할 수 없는 공포에 쌓여 하룻밤을 지샌 것이 생각나는구료. 그나마 큰 다행이었던 것은 많은 물자피해를 내면서도 사람은 다친 병사도 한 사람 없었으니 이는 윤중령과 같이 가족에 앞서 부대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는 사명감에 불타는 예하 지휘관들이 있었으니까 그런 것이 아니겠소.

    윤중령! 부인의 ‘죽변기행’ 글은 내게 그 시절을 회상하게 하는 좋은 기회를 주었다오.군인의 길, 그것도 직업을 군인으로 택한 숱한 선후배들의 초급장교 시절이 부인의 글과 같이 이 길을 걸어보지 않은 사람과는 도저히 대화가 되지 않는 이야기들이 아니겠소.
    나 또한 앞에서 신혼 때의 한 도막을 얘기했지만 어찌 말로서, 글로서 실감나게 다 표현할 수 있겠소.
    내 비록 직업군인이면 누구나 갈망하는 그 끝을 보지 못하고 지휘관으로는 연대장을 끝으로 도중하차 하였지만 지금와서 지나온 길을 되돌아 보면서 일말의 후회도 없다오.
    그것은 젊은 시절 온 정렬을 군인에게는 우상과 같은 국가와 부여된 임무 그리고 나를 믿고 따르던 부하들에게 미련없이 다 바쳤다는 자부심과 내가 걸어 온 그 길이 비록 화려하지는 않았더라도 옳은 길이요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뜻뜻한 길이었음을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소.

    남들이 볼 때는 하찮은 것일지 몰라도 내게는 무척 소중한 것이라오. 내가 그 시절 나의 직분에 전력투구하고, 지금 이렇게 소중한 마음의 풍요를 간직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 다 내 곁에서 그림자처럼 나를 따르며 뒷바라지 해 온 집사람 덕분이라오.
    내가 영덕-울진에서 윤중령과 함께 잔잔한 바다를 걱정하고, 높은 파도가 치는 험한 바다를 좋아라고 바라보며 바닷가 모래톱 위에 난 수상한 발자국에 신경쓰고 있는 동안 집사람은 서울에서 점심도시락을 세 개씩, 네 개씩 싸면서 한 아들 두 딸을 뒷바라지 하여 하나같이 학교 공부도 남들에게 빠지지 않게 잘 하고, 또 집사람을 닮아서 심성이 착하고, 무엇보다도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는 쾌활한 젊은이로 길렀다오.

    아들은 어린시절 아빠 따라 전후방을 다니다 보니 국민학교를 다섯 군데, 중학교를 세 군네나 다녔지만 연세대학 학부에서 컴퓨터과학, 현역복무를 속초 북쪽 전방에서 마치고, 석사과정에서 컴퓨터아키택처를 전공하고, 지금은 삼성종합기술원에 연구원으로 적을 두고 있으면서 이곳 대전과학단지의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산학으로 전자공학 박사과정에 들어와 있으며, 대학 과(科)커풀로 아내를 맞아 컴퓨터 소프트웨어 개발에 있어 베테랑으로 측방지원하면서 고맙게도 이쁜 손녀를 선사하여 어언 다섯 살이 되어 온갖 재롱을 다 부린다오.
    큰 딸도 국민학교를 다섯 군데나 다녔지만 이화대학에서 닥터의 길을 걸어 서울대 출신의 남편과 부부 전문의 닥터가 되어 지금은 부산에서 대학병원과 개인병원에서 각각 인술을 펴면서 역시 박사과정을 밟고 있고, 막내도 연세대학교에서 영문학을 하고, 지금은 취미를 살린다면서 금년에 국문학 석사과정에 등록했다오.

    요즈음 나는 아침마다 연구소 앞 구암사에 차를 두고 우산봉 중간쯤에 있는 연화봉까지 오르내리는 길에 흘러간 옛노래로부터 꽤 신곡에 속하는 가요까지 흥얼거리는데 가장 많이 입에 오르는 레파토리 즉 십팔번이 무엇인지 알겠소?
    하수영의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라오. “젖은 손이 애처로워 살며시 잡아 본 순간, 거칠어진 손마디가 너무나도 안타까웠소---” 어느덧 콧등이 시큰해 진다오.

    ‘젊은이는 야망에 살고, 늙은이는 추억에 산다’는 말이 요즈음처럼 실감나는 때가 없었다오. 내가 이곳에 온지도 어언 8년이 되었소. 앞으로 남은 이곳 생활이 그리 길지는 않을 것이지마는 말년에 이렇게 좋은 조건으로 직장생활을 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오.
    무네미(水南)! 물 좋고, 공기 좋고, 아침 저녁 운동하기 좋아 건강한 몸을 유지하면서, 군에서 익힌 지식을 연구개발에 활용할 수 있는 이런 곳이 이 세상에 또 어디에 있겠소.
    몇 년 전부터 이곳에서 멀지 않는 곳에 있는 고향을 가꾸고 있다오.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 일구시고 손수 지으신 집과 농토를 남들이 경작하지 않겠다고 해서 묵힐 수도 없어 마로니에, 메타세쿼이어, 레드오크 등 나무를 심었는데 지금은 키가 큰 것은 4미터쯤 자라 봄과 가을에 과히 장관을 이룬다오.
    금년 봄에도 집사람과 둘이서 휴일을 이용하여 뒷밭에다 사과, 배, 단감, 복숭아, 자두, 살구 등 여러가지 과일나무를 200주나 심고 그 사이사이에 옥수수, 열무, 상추 등을 심었지요. 그리고 고추 심을 준비도 해놓고 왔는데 그것들이 얼마나 살았고 또 싹이 얼마나 났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또 고추모도 심을 겸 다음 주에 가 볼 생각이오.
    이렇게 여러 가지 과일 나무를 심은 것은 과수원을 해서 돈을 번다는 것보다는 이다음 손자, 손녀들에게 철 따라 먹는 과일을 고사리 같은 손에 쥐어주고 싶은 마음에서라오. 내 비록 추억에 사는 나이에 들어서고 있지만 내게도 조그마한 꿈은 마련하고 싶었던 게요.
    이 후에 언젠가 시골집 구조를 좀 고치고 정원도 아담하게 꾸며서 특별한 일이 없을 때는 고향집에서 지내면서 선산도 돌보고, 삼도봉-충청, 전라, 경상 삼도 지경의 산-에도 자주 오르는 것이 또 하나의 미래 설계라오.

    윤중령 부인의 글을 읽는 동안 이 혼탁한 세상, 온갖 비리와 부조리 그리고 불합리한 것들로만 채워진 것 같이 생각되는 이 사회가 어떻게 쓰러지지 않고 유지되는가? 하는 의문이 조금은 풀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오.
    나는 종교를 갖지는 않았지만 늘 ‘이렇게 혼탁한 세상은 분명 창조주의 어떤 징벌 조치가 있거나, 제물에 쓰러질 텐데’ 하는 생각이었는데 그렇지 않고 지탱해 나가는 것은 저널리스트들에게는 별로 매력을 못 느껴서 기사화 되지 않았을 뿐이지 윤중령 부부와 같이 보이지 않는 구석에서 묵묵히 일하는 소금 같은 존재가 있고, 비록 땅 속에 파묻혀 보이지는 않지만 빌딩을 떠받혀주는 파일과 같은 보이지 않는 존재들이 있기 때문이 아니겠느냐 하는 생각 말이오.

    나는 또 언젠가 아들, 딸, 손녀까지 데리고 동해안 길을 따라가며 그 옛날 뿌려놓은 추억과 세월을 줏으러 갈까 했는데 윤중령 부인의 글을 읽고 나니 그 때가 빨리 왔으면 하는 조바심이 생기는구료.

    잊지않고 부인의 아름다운 글을 보내줘서 정말 고맙소.
< 영덕-울진, 그 시절 추억의 사진 >
沙月 李盛永(2007.11.20)
    김희재 윤석구중령 부인의 ‘죽변기행’ 글을 다시 찾아 홈페이지에 올리면서 빛 바랜 앨범 속에 꽂혀있던 그 시절 추억의 사진을 몇 장 찾아내어 앨범으로 엮었다. 지금부터 25년 전 사진이라 날자는 기억되지 않지만 그 때 그 상황은 생생히 기억된다.
연대장 취임식과 다과회
전임 육사 동기생 박창모 대령으로부터 연대를 인계 받았다.
오른쪽은 차성호 제50사단장, 맨 왼쪽이 제36향토사단 107연대장
107연대장은 나의 취임식에 참석했다가 죽변 자기 부대 해안초소 사고 소식을 들었다.
부임초 사단 체육대회에서 종합우승
헌화 대행
내가 부임하기 얼마 전 영해 대진항 인근에서 해안 순찰 중 파도에 휩쓸려 순직한
고 김기남 하사 추모비에 배광석 5관구 사령관이 보내온 화분을 대신 헌화하였다.
연대가 실시한 2군 해안대침투 및 대강습상륙작전 시범
당일 군사령관(차규헌 대장) 갑작스런 일로 불참, 대신 군사령부 작전참모(오른쪽)와 5관구사령(가운데)과
그리고 50사단장(왼쪽)이 참석해서 영해 대진해수욕장 주변에서의 실시한 시범을 관람하고 있다.
대축도로(대진-축산간) 개설 준공기념 표석과 취지문
돌 선정과 취지문안은 내가 직접 작성하였다.
울진-봉화군 분천간 36번국도 확포장공사 협조회의
오른쪽이 김종호(?) 건설부장관, 왼쪽이 경북 도지사
대대장들과 함께
맨 왼쪽 배종균 중령도 죽변 해안초소 사고 후 급히 부임한 윤석구 대위 직속 대대장이다.
사단장교부인회의 해안부대 위문
맨 아래 사진 가운데가 차성호 사단장 부인이고, 그 왼쪽이 집사람이며.
뒤 누각은 평해의 월송정이다.
연말 단위대장회의서 부대표창 및 제1회 선봉부대 지정
선봉부대 지정후 표석과 기념촬영
위는 대대장들과, 아래는 중대장 이상 지휘관과 참모 일동
1983년 신년하례(대구 사단장 관사에서)
50사단장 이취임식 끝나고 기념촬영
이임사단장(오른쪽, 차성호 소장)과 취임사단장(왼쪽, 장홍렬 소장)
황영시 육군참모총장의 부대순시
사단장 취임 후 초도순시. 오른쪽이 이기백 2군사령관.
해안제3대대(대대장 이승관 중령) 운동회 구경
울진군 기관장 친선 테니스대회
울진, 영덕, 영양 선거구 출신 김중권 국회의원 주선으로 울진군내 모든 기관장이 참여.
우리 연대에서는 나와 내륙1대대장 하용문 중령이 출전하여 우승하였다.
연대시험 우수부대표창
제5관구 사령관(배광석 소장)으로부터 RCT우수부대로 표창을 받았다
이임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