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원(李芳遠)의 외교전략
"먼저 나서(서) 사태를 제압한다"
沙月 李盛永(2021.2.18) 옮김
조선일보 2021. 2. 16일자 오피니언 난에 여주대학 박현모 교수의
조선 태종 이방원의 외교력에관한 실록이야기 장면이 올랐다.
이방원, 하면 우리는 맨 먼저 고려 충신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참살한 것
태조 이성계가 조선 태조 후비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를 총애한 나머지
그 소생의 제8남 이방석(李芳碩)을 세자로 봉하자 왕자의 난으로 죽이고 ,
장자 이방과(李芳果)를 제2대 왕 정종(定宗)에 옹위했다가
2년 후에 양위(讓位) 받아 등극한 후 함흥차사 같은 환란이 먼저 떠올라
선정(善政)이니, 외교력(外交力)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 것으로 생각해 왔다..

그러나 박교수의 짤막한 실록의 글을 보니
선발제지(先發制之
: 먼저 나서서 사태를 제압한다)로 표현된 외교전략이
초기에 대중(對中)외교의 기반을 굳건히 하였다고 생각된다.
사족으로 추가한다면 태종은 외교 뿐만 아니라 조선8도의 행정구역을 설정 등
내치(內治)의 기틀과 세종 같은 성군을 찾아 내서 양위함으로써
나라를 문명된 나라로 탄생 시키는 기반을 튼튼히 닦은 것은 사실이라 생각된다.
참고: 明 건국: 서기 1368洪武1년, 태조 주원장
---朝鮮 건국: 서기 1392년洪武25년,태조 이성계


부 제
이방원, 고려 때 이어 조선 건국 후 명(明) 수도로 가 주원장(朱元璋: 明太祖) 만나
조선과 여진 결탁 등 의혹 푼 주원장 "우대하는 예를 갖추라"
훗날 영락제(永樂帝
: 明 제3대 太宗)가 되는 실력자 연왕(燕王)도 미리 만나 우호와 신뢰 쌓아
조선의 군주 중에서 외교를 가장 잘한 사람은 누구일까?
주저 없이 태종 이방원(李芳遠)을 꼽겠다.
그의 방식은 한마디로 “선발제지(先發制之)”라는 말로 집약할 수 있다.
‘먼저 나서(서) 사태를 제압한다’는 이 말은 정도전을 제거할 때를 회상하면서 태종이 쓴 표현이다.
실제로 그는 탁월한 정보력으로 사태를 파악한 다음, 상황을 유리한 쪽으로 이끌어 나가는 데 귀재(鬼才)였다.
이 방식은 명나라 황제 주원장(朱元璋)을 만났을 때도 발휘되었다. 몇 가지 장면으로 나눠서 살펴보자.
(서기 1394년 이방원이 남경에서 주원장을 만나는 장면 그림)
일러스트= 이철원
#장면1. 정안군 이방원의 이야기.

‘태조실록’ 3년(1394년) 11월 19일의 기록은 이방원이 중국에 가서 명 태조 주원장을 만나고 돌아왔음을 전한다.
“우리 전하가 명나라 서울에서 돌아왔다[我殿下回自京師]”
(注1) 라는 한 줄 문장은 태종의 외교 리더십을 함축하고 있다.
‘우리 전하’로 지칭된 이방원은 이날(11월 19일)로부터 약 5개월 전인 6월 7일에 명의 수도 난징(南京)행 길에 올랐다.
조선 외교문서의 용어를 문제 삼아 ‘조선 왕자를 보내라’는 주원장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 요구를 받은 태조 이성계는 고심 끝에 다섯째 아들 이방원을 불러 도움을 요청했다.
“네가 아니면 황제의 질문에 제대로 답변할 사람이 없구나.”
이방원으로서는 부왕의 요청을 거절할 수도 있었다.
만 리나 되는 중국 사행(使行)길이 위험할뿐더러 조선을 심하게 압박해 오는 주원장에게 무슨 험한 꼴을 당할지 알 수 없었다.
무엇보다 불과 2년 전인 1392년에 부왕 이성계는 건국의 일등 공로자인 자신을 제쳐놓고 이복동생 이방석세자로 책봉했다.
이성계가 ‘수척해진 이방원의 건강’을 염려한 것에서 보이듯이, 스물여덟 살 젊은 이방원은 깊은 배신감에 힘들어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방원은 “나라를 위하는 대계(大計)인데 제가 어찌 피하겠습니까?”라면서 아버지의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장면2. 이방원이 만난 명 태조 주원장의 이야기.

1394년은 주원장이 명나라를 세운 지 27년째 되는 해였다.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홍건적 두목을 거쳐 대륙을 석권하고 제위(帝位)에 오르기까지 산전수전을 다 겪은 67세의 주원장.
그즈음에 그는 확고한 요동 지배를 위해 그동안의 우호적인 태도를 바꾸어 조선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조선이 요동의 장수를 매수하고 여진족 수백 명을 조선 땅으로 유인해 갔다’고 질책하는가 하면,
외교문서의 어투
(語套: 말을 하는 버릇이나 본새)를 문제 삼아 아예 국교 단절을 선언했다.
조선의 사신들을 요동에서 다섯 차례나 되돌려 보낸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조선의 왕자를 보내라”는 요구는 인질을 담보로 조선을 협박하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인질’로 온 조선의 왕자는 초면이 아니었다.
6년 전인 1388년에 고려의 이색을 따라왔던 이방원이 어엿한 조선의 왕자가 되어 다시 나타났다.
실록을 보면 주원장은 이방원을 두세 차례 불러 대화를 나누었다.
이방원은 우선 외교문서 속의 표현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다[詳明].
외교문서에 “조선 국왕”이라 하지 않고
“조선국 권지국사(權知國事: 아직 왕호를 인정받지 못한 기간 동안에 임시로 나라 일을 맡아 다스린다는 뜻의 칭호)”라고 적은 이유는
황제가 국호만 내려주고 왕의 작호(爵號)까지는 내린 적이 없어서 감히 왕이라고 일컫지 못한 것이라며,
이제 작호까지 허락한다면 기꺼이 사용하겠다고 말했다.
주원장 자신이 의혹을 품고 있던 문자 표현의 오해를 충분히 불식했다.
이방원의 말을 들은 주원장은 흡족해하며 “우대하는 예를 갖추어 조선으로 안전하게 돌려보내라”고 지시했다.
양국 간의 외교적 갈등이 원만히 해결된 것이다.
#장면3. 이방원이 귀국 길에 만난 연왕 주체 이야기.

명 태조 주원장의 넷째 아들 주체(注2)는 1394년 당시 군사가 제일 많은 베이징(北京)의 번왕(藩王)으로서 14년째 세력을 키워오고 있었다.
2년 전 황태자가 갑자기 병으로 사망하면서 대권까지 꿈꾸고 있었다. 주체는 훗날(1402년) 마침내 황제(永樂帝)에 오른다.
이방원이 조선으로 돌아오던 그때 주체는 주원장의 호출을 받아 난징으로 가던 길이었다.
실록을 보면 두 사람은 베이징 근처에서 마주쳤다.
급히 달리던[疾行·질행] 주체가 길가에 서 있는 이방원을 보고 수레를 멈추게[停駕·정가] 했다.
수레의 휘장을 젖힌 주체는 온화한 말로 이방원과 한참 동안 이야기하고는 지나갔다.
장차 조선과 명의 최고 권력자가 될 두 사람이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때 형성된 두 사람의 호의와 신뢰는 양국의 국교 정상화와 협력 관계 유지에 밑거름이 되었다.
한반도의 지도자가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조건은 뛰어난 외교 역량이란 점을 새삼 깨닫는다.
여주대 세종리더십연구소장 박현모
(注1)[我殿下回自京師](아전하회자경사)
실록의 한 귀절인데 음미 해 볼만한 귀절이다.
[我殿下: 우리전하]: 殿下는 왕자들을 말하는 호칭인데 당시만 해도 태조 아래는 8명의 왕자가 있었고, 이복동생인 제8자 의안대군 이방석(李芳碩)이 세자에 봉해져 있는 상태이다.
따라서 통상이면 사관이 '定安大君' 또는 '定安大君 殿下'라고 군호(君號)를 썼을 터인데 굳이 '우리전하[我殿下]'라고 쓴 것은 '친밀감''자타가 공인하는 차세대 임금'임을 은연중에 표현한 것이라 생각된다.
[回自京師]에서 '--에서', '---로 부터' 뜻으로 의 '---에', '--으로', '---까지'와 상대적인 조사이다.
京師는 우리 말로는 '서울'이고, 현 한자어로는 '都', '首都', '京城',등과 같은 말인데, 여기서는 自와 합쳐 '明나라 서울'을 의미한다.
그런데 '돌아왔다'가 큰 여운을 남긴다.
사신으로 갔으면 빠르거나 늦거나 간에 의당 돌아오는 것이니 큰 의미가 없기 때문에 '○○○사신으로 갔다'는데 방점을 두고 기록할 것인데(목적에 따른 사신의 종류 예: 正朝使, 聖節使, 千秋使, 冬至使, 謝恩使, 奏請使, 陳奏使,進賀使, 進慰使, 進香使, 辯誣使, 參핵使 등)
여기서 굳이 '回'자를 써서'돌아왔다'에 방첨을 둔 것은 '돌아 올 수 없었는데 돌아왔다', '어려운 일을 잘 처리하고 쉽게 돌아왔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이방원이 명나라에 간 것은 위 예와 같은 평상적인 사신이 아니라 '왕자 인질'로 간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사관들이 [回自京師]라 썼고, 박현모 교수가 "한 줄 문장은 태종의 외교 리더십을 함축하고 있다"고 해석한 것으로 생각된다. (내 생각)


(注2)주체(朱)( 변)
명나라의 황제(재위, 1403-1424). 태조(太祖)의 네째 아들이다.
홍무(洪武) 3년(1370) 연왕(燕王)에 봉해졌다. 13년(1380) 봉지(封地) 북평(北平)에 왔다.
여러 차례 장수들을 이끌고 북원(北元: 명나라에 의해 중국 본토에서 몽골지방으로 쫓겨간 원나라의 잔존세력)을 공격했다.
건문(建文) 원년(1399) 병사를 일으켜 정난(靖難)이라 불렀다.
(제위를 惠帝에게 전위케 함)
4년(1402) 경사(京師)를 함락시키고 제위(太宗)에 올랐다.
제태(齊泰)와 황자징(黃子澄), 방효유(方孝孺) 등을 죽이고, 그 가족들을 몰살시켰으며, 간당(奸黨)으로 연루되어 죽은 사람도 상당수였다.
다음 해 연호를 영락(永樂)이라 정하고 북평을 북경(北京) 순천부(順天府)로 삼았다.
(행적이 이방원과 유사: 이방원도 태조7년(1398)년 정도전, 세자 李芳碩 등 제거한 거사를 '定社'라 하고, 왕위을 차자 방과(芳果: 定宗)에게 전위케 헸다가 3년 후에 양위 받아 왕위 태종(太宗)에 오름))

(참고: 朝鮮 제3대 國王 이방원 廟號 太宗, 재위기간 서기1401∼1418, 18년
---- 明 제3대 永樂帝 廟號 太宗, 永樂은 年號, 재위 서기1403∼1424, 2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