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상(李鉉相)
沙月 李盛永(2011. 6. 18)
  오늘 아침(2011.6.18) 조선일보 萬物相(만물상)에 ‘차일혁 경무관’이란 제목의 글이 올랐다. 앞부분을 옮기면
  「6.25전쟁 때 빨치산 ‘남부군’ 사령관이었던 이현상은 1953년 9월 하동 쌍계사 근처 빗점골전투에서 사살됐다.
  그의 시신은 방부 처리 돼 서울로 옮겨져 창경원에 전시되었다가 20일 만에 다시 하동으로 내려갔다.
  빨치산 대장의 시신을 거둬주려는 사람은 일가친척 중에도 없었다.
  이현상의 장례를 치러준 이는 그를 사살한 지리산토벌대의 2연대장 차일혁 총경이었다.
  차일혁이현상을 화장한 뒤 뼈를 자기 철모에 넣고 M1 소총으로 빻아 섬진강에 뿌렸다.」


  나는 이 기사에서 차일혁 총경의 공비토벌 무용담과 그가 죽은 지(1958) 53년 만에 경무관으로 승진시키도록 결정했다는 사실도 흥미진진한 이야기지만 그보다 이기사가 내게 더 흥미를 같게 한 것은 ‘이현상’이라는 당시 빨치산 남부군사령관 이름이다.

  나는 어릴 때 삼촌의 지리산공비토벌 무용담에서 그의 이름을 들은 적이 있고, 2001년 우리 부부가 처음으로 지리산을 서-동 종주할 때 삼각봉벽소령대피소에서 그의 이름을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현상’ 이름을 지금까지 잊지 않고 있는 것은 공비토벌 역사에 관심이 있어서라기 보다는 내가 보학(譜學)과 나의 선조(先祖)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

  "혹시 그가 우리 집안의 선조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내 머리 한 구석에 늘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행적들 수집한 우리 가문의 선조들 가운데는 이런 빗나간 혁명가는 없었다. 나라와 사회의 불의에 분연히 일어나는 의기(義氣)를 가진 선조는 많았지만 나라와 민족을 배반하는 이른바 반역적인 행동을 행한 선조는 없었다.

  ‘이현상(李鉉相)’에 대해 내가 이런 의구심을 갖게 된 것은 그의 성씨가 李氏로 나와 같고, 나의 선친 항렬(行列) 자가 鉉(현)자로 같으며, 살아온 시대(時代, 일제-6.25한국전쟁)가 비슷하므로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내가 삼촌의 무용담으로 이현상이란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국민학교 5-6학년, 아마 6.25한국전쟁이 나기 몇 년 전인 1946-8년쯤 되는 것 같다.
  우리 집은 일제 말기 워낙 가난하여 나의 조부께서는 3남3녀의 아들 딸 중에 입 하나라도 줄일 생각으로 둘째 아들, 그러니까 내게는 큰 삼촌(李鉉九)을 시골에서는 좀 잘 산다는 먼 종씨 집안으로 양자를 보냈다.
  나와 촌수로 따지면 31촌이나 된다. 너 나 할 것 없이 워낙 가난한 시대였으니까 ‘10촌 넘으면 남’이라는 말이 상식으로 통하던 때인데 3촌이 31촌이 된 것이다.

  일제로부터 광복이 된 후 삼촌은 시골생활이 지겨워서 부모와 처자식을 몰라라 하고 가족들 몰래 대구로 가출을 했다.
  대구에 도착했지만 밑천 없고, 특별한 기술도 없이 다만 20대의 젊음 밖에 없으니 그리 쉽게 일자리가 나타날 리가 없어 여기 저기 기웃기웃하다가 발견한 것이 군대 모집이었다.
  미군 군정(軍政)하에서 대구에서 창설된 국방경비대 제6연대의 창설을 위한 지원병 모병이 한창이었는데 삼촌을 무작정 지원을 한 것이다. 맨 먼저 창설된 A중대는 1946년 2월 18일 창설되었다.

  1948년 10월 전남 여순반란사건이 일어나자 대구에 있던 제6연대(삼촌이 소속된 부대)가 출동을 하여 반란을 진압하였는데 주동자 일부가 지리산으로 잠입하고, 나머지는 어느 정도 진압되자 귀환 명령이 내려 귀환 도중이었다.
  지리산이 가까운 하동 근방을 지나다가 차량을 멈추고 잠시 휴식을 하면서 모든 장병들이 차에서 내려 길가에 일렬로 서서 노랗게 익은 벼논을 바라보며 소변을 보고 있었다.
  부대 내에 침투해 있던 불순분자(죄익)들이 기관총을 거치한 선두와 후미의 경계차량을 장악하고, 아군(동료)을 향해 무차별 발포하여 많은 사상자를 내고 지리산으로 도주하였다. 이 사건으로 부대는 귀환을 멈추고 지리산공비토벌에 들어갔었다는 것이다.

  그 후 삼촌이 휴가 와서 친가인 우리집에 들려 지리산공비토벌 무용담을 들려줄 때 나는 어린 나이에도 너무 흥미진진해서 숨을 죽이고 재미있게 들은 적이 있는데 그 무용담 속에서 지리산공비(빨치산) 총대장 이현상 이름이 들어있었다.

  그 후 이현상이란 이름을 다시 듣고 옛 기억을 되살린 것은 2001. 9.3-5. 지리산 첫 종주 후 종주기를 쓰면서 수집한 삼각고지(삼각봉)에 관련된 이야기 다음과 같은 이야기 중에 이현상이 나온다.

  ○ 삼각고지(三角高地, 1462m)
  「연하천에서 동쪽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종주길에서 북쪽 삼정리 마을로 내려가는 샛길이 갈라지는 삼거리가 있다. 오던 길보다 좀 높을 뿐인데 이곳이 하동의 화개면과 함양의 마천면, 남원의 산내면의 지경이 되는 곳이라 웬만한 지도에는 산봉 이름이 없지만 사람들이 삼각고지 또는 삼각봉이라 부른다.

  이 삼각고지 남쪽 계곡이 빗점골이라는 깊은 계곡이다. 6. 25를 전후하여 지리산이 빨찌산의 아지트가 되어 상당기간 국군의 대대적인 공비토별작전이 전개되었을 때 이 계곡 아래 의신마을에 사령부를 차리고 있던 빨찌산 남부군총사령관 이현상(李鉉相)이 이 빗점골로 도주하였다가 이 곳에서 최후를 맞은 곳이라 한다.」
지리산 삼각봉을 연한 지리산 주능선(백두대간) 지도
삼각봉은 명성봉과 형제봉 사이 지리산 주능선(백두대간)에서
북쪽 삼정산으로 벋은 능선이 분기(分岐)하는 지점으로
전남,북과 경남 삼도(三道)의 지경인 삼도봉에서 전북과 경남의 도경계가
동쪽으로 오다가 여기서 삼정산능선을 따라 북으로 가기 때문에
이 삼각봉부터 천왕봉까지 지리산 주능선 백두대간은 경남 1개 도에 속한다.
  또 벽소령대피소에서는 다음과 같은 지리산공비토벌루트 안내도와 설명을 입간판으로 세워놓고 있는데 간판 글 중에도 이현상이 나온다.
벽소령대피소의 공비토벌작전 안내도
  다음은 이현상이 최후를 마쳤다는 빗점골에 관한 영상을 인터넷 네이버에서 가져와 올린다.
대성리 의신-심정-빗점골-삼각고지
남쪽 하동 화개면 대성리 의신마을에서 백두대간 마루금의 벽소령을 넘어
북쪽 함양 마천면 음정마을에 이르는 도로 표식은
공비토벌을 위해 급히 개설한 비포장 작전도로로 지금도 그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다.
지리산 주능선 중부 남쪽 대성리 끝동네 심정마을
이현상이 사살된 빗점골 너덜지대
이현상이 사살된 빗점골 너덜지대 입구에 설치된 설명간판
  나는 인터넷 네이버에서 다음과 같은 그의 얼굴 사진과 가계(家系)에 대한 자료를 얻을 수 있었는데 우선 그가 충청남도(당시는 전라북도) 금산군 군북면 외부리에서 태어난 전주이씨(全州李氏) 가문의 사람이란 것이 확인되었다.
  더구나 그의 아버지는 금산군 군북면장을 지낸 이면배라 하니 나의 조부 항렬자인 均(균)자와는 거리가 멀다.
  내가 그 동안 의구심을 가져오던 것이 공연한 걱정을 했다는 것이 확인된 것이다.
남부군사령관 이현상
  이현상(李鉉相, 1905년 9월 27일 ~ 1953년 9월 17일)은 일제 강점기에 사회주의 계열에서 활동한 노동운동가이며, 광복 후에는 남조선로동당의 간부로 대한민국 영역에서의 파르티잔(빨치산) 활동을 주도했다. 이현상은 충청남도 금산군(당시 전라북도 금산읍) 군북면 외부리 출신이다. 이현상의 집안은 전주이씨 가문으로, 군북면에서 가장 토지를 많이 소유한 부농이었다. 아버지 이면배는 일제 강점기 초기에 군북면장을 지냈으며, 이현상이면배의 3남 중 막내아들이다. 이현상은 조혼 풍습에 따라 16세가 된 1920년에 이웃 무주군 무풍면의 유복한 집안 출신인 최문기와 혼인했다.」
이현상의 생애
  이현상에 대한 나의 의구심이 풀렸으니 가벼운 마음으로 인터넷 네이버에 실린 이현상의 생애를 간추려 올린다.
  일제 때부터 6.25한국전쟁 후까지 우리 땅에서 벌어진 좌익활동의 중요한 장면들을 엿볼 수 있다.

  - 이현상이면배의 3남 중 막내아들이었다.
  - 이현상은 조혼 풍습에 따라 16세가 된 1920년에 이웃 무주군 무풍면의 유복한 집안 출신인 최문기와 혼인했다.
  - 혼인한 이듬해인 1921년에 금산읍내에 있는 금산보통학교에 편입하여 신학문을 처음 접했다.
  -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고창군에 있는 사립 명문 고창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학업 성적은 매우 우수한 편이었으며, 학적부에 따르면 '침착하며 약간 집요한 데가 있는 성격'이었다.
  - 이현상은 고창고보에서 2학년까지 마친 뒤 1925년 경성부로 유학해 중앙고등보통학교에 편입했다.
  - 이현상은 중앙고보 재학 중인 1927년에 순종의 장례식을 계기로 일어난 6?10 만세운동에 참가한 것을 시작으로 사회운동에 뛰어들었다.
  - 이현상은 6월 10일 거사 당일에 중앙고보 학생들을 이끌고 시위에 참여했으며, 경찰에 체포되어 6개월 동안 수형 생활을 한 끝에 기소유예로 석방되었지만 이 사건으로 중앙고보에서는 퇴학을 당했다.
일제시대 첫번째 수형중 이현상의 모습
  - 이현상은 석방된 이듬해인 1927년 봄에 상하이로 밀항하였다.
  - 상하이에서 약 석달 동안 머물다가 귀국하여 고향 금산에서 청년 조직을 구성했다.
  - 1928년에는 보성전문학교 법과에 입학했다. 보성전문에 입학하고도 학업보다는 사회운동에 관심을 보이면서 김복진과 면담하여 고려공산청년회에 가입했다.

  -고려공청의 외곽 조직인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서무부장으로도 선출되었고, 신간회서울청년회에도 가입했다
  - 그러나 보성전문에 입학한지 몇 달 되지 않아 투옥되면서 학업은 중단하게 되었다
  - 고려공청학생과학연구회가 경찰의 검거 대상이 되면서 이현상도 체포되어 두 번째로 구속되었다. 이번에는 징역4년 형을 언도 받아 복역했다.
  - 그 동안 형무소에서 이재유김삼룡을 만나 교류하게 되었다.
  - 뜻이 맞는 동지가 된 이현상이재유, 김삼룡은 출소한 직후인 1933년 초에 경성트로이카를 결성해 본격적인 노동운동을 벌였다.
김삼룡과 이재유
  - 경성트로이카 조직은 서울 지역의 공장 파업을 조종하고 동맹휴학을 일으키며 활동하던 중 1933년 말에 대거 체포되었다.
  - 이현상도 붙잡혀 일년여에 걸친 재판 끝에 징역 4년형을 언도 받고 1938년에야 출옥했다.
  - 세 번째로 감옥살이를 하는 동안 중일 전쟁이 일어나고 많은 운동가들이 체포되거나 전향하여 상황은 악화되어 있었다.
  - 이현상은 남아 있는 운동가들을 끌어 모아 김삼룡, 이관술, 정태식, 김태준 등으로 구성된 경성콤그룹을 결성했다.
  - 이 조직에는 곧 박헌영도 영입되었습니다
  - 경성콤그룹이 기관지 《코뮤니스트》를 발행하고 전국적인 노동조직을 갖추어 가던 중, 대대적인 검거사태가 벌어지면서 1940년 이현상이 가장 먼저 체포되었다.
  - 이때는 전시체제가 강화되어 시국이 크게 경색된 시점으로, 구속된 이들 중 다수가 고문으로 사망하거나 병을 얻었다. 이현상도 복역 2년만인 1942년에 병으로 가석방되었다.
이관술과 박헌영
  - 광복 후 이현상은 광복 직후부터 활동을 개시하여 장안파 조선공산당에 대항하는 재건파에 합류했다.
  - 재건파는 곧 장안파를 무력화시키고 조선공산당을 결성했으며, 이현상중앙위원조직국원으로 선출되었다.
  - 1946년 말에는 박헌영이주하, 김삼룡, 이현상 등이 핵심 간부를 맡은 남로당도 결성되었다.
  - 1947년에 전평허성택, 박세형과 함께 체포되었다가 두 달 만에 풀려나기도 했다. 이때 일제 아래 악명 높은 고문전문가이던 노덕술 등으로부터 가혹한 고문을 받았다.
  - 동년 6월 25일 남로당 기관지 《노력인민》김원봉에 대해 평가한 글을 게재하여, 일제 강점기 동안 보여준 김원봉의 비타협적 투쟁과 군사적 업적을 높게 평한 바 있다.
  - 남로당은 이 글이 발표한 직후에 군사부를 신설해 유격 투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 1948년에는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월북으며 연석회의가 끌난 후에도 북조선에 남아서 소련 유학을 염두에 두고 러시아어를 배웠다.
  - 그러나 북조선에서 북로당이상조와 마찰을 빚으면서 유학 계획은 좌절되고 강동정치학원에 입교했다.
  - 평양 인근 강동군에 설치된 이 학교는 유격전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기관이었다.
  - 교육을 마친 뒤 이주하와 함께 단독 정부가 수립된 대한민국에 잠입해 활동할 것을 명령 받았다.
  - 이현상은 월남하여 지하 활동에 들어갔다.
  - 1948년에 여순 14연대 반란사건이 일어나자 이현상을 반란자들을 조종하여 반란을 지휘하였다.
  - 반란군은 거의 진압되고 남은 부대원들은 이현상의 지휘 아래 지리산으로 들어가 빨치산이 되었다.
  - 강동정치학원에서 교육을 받고 남파된 유격대도 조선인민유격대제1병단제3병단으로 가세하였는데 통칭 지리산유격대로 불리는 이현상부대제2병단으로 명명되었다.

  -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이현상도 참전했다.
  - 인천상륙작전후 조선인민군이 후퇴한 뒤에도 조선인민유격대 총사령관이승엽은 남한지역의 6개 도당 위원장회의를 소집하여 유격대들을 남부군이라는 이름으로 통합하여 유격전을 펼치도록 하였는데 이현상'로명선'이라는 가명으로 남부군사령관에 임명하였다.
  - 이현상은 등사기로 기관지인 《승리의 길》을 발행했다.
  - 남부군은 1951년 5월 26일 충북도청 소재지 청주를 기습하여 여러 관공서를 불태우고 청주형무소의 좌익수 142명을 석방시켰다.
  - 6월 초, 민주지산에 자리를 잡고 인근 도시와 경부선 군용열차를 습격하였다.
  - 6월 중순 덕유산 송치골에서 남한 6개 도당 위원장을 소집해 남부군 결성에 합의하고 총사령관으로 취임하였다.
  - 8월 14일 참모장 박종하가 가회전투 도중 사망하자 이현상남부군지리산으로 다시 들어갔다.
  - 11월 말부터 대한민국 국군과 경찰의 토벌 작전이 거세지면서, '조선인민유격대 독립4지대'로 개편된 이현상 부대는 어려운 처지에 몰렸다.
  - 1952년 1월 18일 군경토벌대에 쫓기던 지리산 일대 유격대와 좌익피난민 등 2,000 명이 대성리 골짜기에서 포위되었다. 미군이 네이팜탄 등을 투하하여 1,000명 이상 죽거나 체포되었고, 독립4지대도 한 달 만에 400명이던 대원이 150명으로 줄어들었다.

  - 1953년에는 대한민국 영역에 남은 유격대의 지위에 대한 언급 없이 한국전쟁 휴전협정이 체결되었다.
  - 협정 체결 1주일 후인 8월 3일에는 평양에서 박헌영이 정식으로 구속되고 리승엽 등은 처형되었다. 남로당 지휘계통에 있던 이현상은 전라남북도와 제주도, 경상남도 서부 지역을 책임지는 제5지구당 위원장직에서 물러나 평당원으로 돌아갔다.
  - 이현상은 모든 직책을 잃고 하산을 계획했으며 거의 같은 시기에 토벌대가 하동군 지리산 빗점골에 숨어 있던 이현상을 추적하여 대략의 위치를 파악했다.
  - 9월 17일에 토벌대는 빗점골을 포위했고, 이튿날인 9월 18일 오전에 총상을 입고 사망한 이현상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이현상이 시신으로 발견된 빗점골
  - 당시에도 이현상을 사살한 공을 놓고 차일혁이 이끄는 경찰수색대와 김종원의 국군부대가 다툼을 벌였고, 이태 등은 북조선의 지시로 암살되었다는 소문을 기록한 바도 있어 정확한 사망 경위는 알 수 없다.
  - 사망 날짜는 국군이 시신 발견 전날인 1953년 9월 17일로 추정했다.
  - 이현상의 시신은 방부 처리되어 서울로 이송되었으며 동향 출신의 친구인 유진산 등 지인들이 시신을 찾아와 확인했다. 빨치산의 최후를 보여준다는 명목으로 창경원과 도로변에서 바지만 입힌 채 유품과 더불어 전시하기도 했다.
  - 그러나 이현상의 가족들은 대부분 월북한데다, 남은 친척들은 한국 전쟁 중 고초를 당해 시신의 인수를 거부했다. 결국 토벌군 측의 차일혁이 섬진강에서 화장해 장례를 치러주었습니다.
이현상 사살 기사
  - 북한의 애국렬사릉에는 1968년에 조성된 이현상의 가묘가 있다.
  - 이현상은 북조선의 제1호 렬사증을 추서 받은 인물이며 애국렬사릉에도 가장 먼저 묻힌 인물인 것으로 알려졌다.
  - 1990년 8월에는 조국통일상도 추서되었다.
이현상의 가묘
  - 이현상의 부인과 자녀, 셋째 형의 가족 등 대부분의 가족들은 전쟁 중 이현상이 북조선으로 보냈다.
  - 이현상에게는 1남 3녀가 있었는데 외아들 이극은 모스크바 유학을 다녀온 후 김일성종합대학 교수를 지냈고 정년퇴직 후에 인민대학습당국제도서교환처장으로 일했다.
  - 맏딸 이무영중앙당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인민군 정치부노동당에서 일했다.
  - 둘째 딸 이문영만경대 혁명학원을 졸업하고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에서 일했다.
  - 막내딸 이상진은 북조선의 외교관으로 활동하다가 북조선의 첫 여성 일등서기관이 되어 경공업 분야를 담당했다. 이상진김대중의 북조선 방문 때 만수대의사당을 직접 안내한 일이 있다.
  - 처 최문기는 1972년에 사망해 혁명열사릉에 있는 이현상의 가묘에 홀로 묻혔다.
  - 대한민국에는 이현상어머니둘째 형수만 남았다. 이들은 이현상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어렵게 생활하다 사망했다. 특히 1975년 사망한 어머니는 무덤이 파헤쳐져 시신이 훼손되기도 했다.
  - 부인인 최문기 외에 지리산에서 빨치산 간호병 하수복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있다. 이 아들은 유복자로 태어났으며 교사로 일하고 있다.
2011.6. 18일자 조선일보 萬物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