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絶唱'. 이미자 노래인생 60년
그의 노래 뒤로 시대상이 영화처럼 흐른다.
어느세 황혼빛 '열아홉 순정'
기교 없이 불러야 원곡의 감동이 살죠
沙月 李盛永(2019.4.22 올림)

조선일보 2019. 4. 22일자 인터뷰 난에
'시대의 絶唱'. 이미자 노래인생 60년이
조선일보 논설고문 강천석(71)과의 인터뷰 기사가
김아사 기자의 정리로 실렸다.

중동 사막, 월남 밀림, 독일 탄광… '위대한 세대'와 부둥켜안고 불렀죠
2100여곡, 앨범560장, 월남장병 위문공연만 네 차례
가장 짠한 세곡은 '동백아가씨', '섬마을 선생님', '기러기아빠',

올해 78세, 아마 1941년생인가보다. 집사람과 동갑이네
기사를 읽는 동안 내내 눈시울이 젖었고, 콧등이 찡- 하였다.
내가 시골집에 가서 노래방 기계를 틀어놓을 때면
으례 이미자의 노래 '저강은 알고 있다', '살아있는 가로수',
'흑산도 아가씨', '낭주골 처녀'
부터 시작한다.

살아있는 가로수는 지금 우리와 아버지 시대의 삶을 노래한 것이다.

살아있는 가로수
찬바람이 부는 날도 비오는 날도
허리띠 졸라메고 말고삐 잡고
땀방울에 눈물적신 인생의 역로
지금은 황혼의 길 가고 있지만
살아있는 가로수엔 봄이 오네 꽃이 피네

가슴이 무너지던 슬픈 역사도
술 취해 울던 때도 옛날 이야기
바람부는 네거리에 낙엽과 같이
이제는 석양길에 홀로 섰지만
살아있는 가로수엔 봄이 오네 꽃이 피네

이미자(78)씨는 붙박이별처럼 60년 세월 동안 노래의 하늘을 지켜왔다. 그것도 모서리가 아닌 한복판에서.
최희준, 패티김…. 함께 반짝이던 뭇별이 다른 하늘로 떠나거나 지상으로 내려온 지금, 이제 그 혼자 남았다.
그래서일까. 이야기를 나눈 두 시간여 마치 정물(靜物)처럼 자세 한 번 흩트리지 않고 말을 이어가는 이미자의 등 뒤로 잉크 번지듯 흘러간 세월의 고적감이 번져 나갔다.

1959년 아직 소녀티를 벗지 못한 이미자가 취입한 노래 '열아홉 순정'이 올해 환갑을 맞았다.
'언제까지 나의 노래/ 아껴주는 당신 있음에/ 비를 맞으며 험한 길 헤쳐서/ 지금 나 여기 있네', '노래는 나의 인생'(작사·작곡 박춘석)'라고 노래하던 이미자가
5월 8~10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동백 아가씨' '섬마을 선생님'을 다시 부른다.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를 이번 무대를 앞두고 아픈 노래, 슬픈 노래로 당대의 아픔과 슬픔을 위로해주던 가수 이미자를
본지 강천석(71) 논설 고문이 만났다. 고희(古稀)의 팬은 팔십을 바라보는 가수 앞에서 한동안 호칭부터 헤맸다.
이미자 근영
이미자씨는 2시간 가까운 인터뷰 내내 자세를 고치지 않았다.
발은 가지런히 모았고, 등은 꼿꼿이 세웠다.
웃는 모습을 하고있는 슬픔의 여왕에게선 철녀 같은 풍모도 느껴졌다.
/이태경 기자
―이 선생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망설였습니다. 누가 '시대의 절창(絶唱)'이라는 아이디어를 내더군요.

"좋게 들어주셨네요. 사실 55주년 때보다 가창력은 못해요. 감정을 어떻게 실어야 한다는 경험이 받쳐주긴 하지만.
이번 60년 기념 음반은 사랑받은 만큼 제 목소리 그대로 들려드려도 괜찮다 싶어 녹음한 거예요.".


―제 청력이 옛날 같지 않은데 선생님 노랫말은 또렷이 귀에 박히네요.

"한 서린 노래가 마음에 닿으려면 가사 전달이 정확해야 해요. 혀 꼬부랑 소리는 감정을 실어나르지 못해요."

―몇 주 전 동년배들에게 누가 이 시대 최고 가수인가 떠봤더니 일곱 사람 가운데 여섯이 대번 이 선생을 꼽더라고요.
젊을 땐 엘비스 프레슬리를 흥얼대던 친구들이었는데 말이죠.


"기교 없이 군더더기 없이 앨범 취입했을 때와 똑같이 원곡 그대로 부른다는 것이 제가 지켜온 노래의 철칙이지요.
조심해도 박자를 당겼다 놓았다 하는 게 튀어나올 때가 없진 않지만."


―이 선생 노래는 노래 이상의 어떤 것인 듯해요.
노래의 등 뒤로 절벽 타듯이 그 시대를 살아온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 영화 필름 돌아가듯 흘러갑니다.


"바로 그 부분에서 내 노래와 그분들 가슴이 만나 서로 부둥켜안는 것인지도 모르지요.
중동의 사막, 월남의 밀림, 독일 지하 탄광에서 땀과 먼지로 범벅 된 그분들 얼굴을 보면서 정말 진심으로 위로해 드리고 싶었어요."


1964년 녹음한 '동백 아가씨'는 100만장이 팔렸다. 3000장 팔면 대박이라던 시대다.
'국민 가수'라는 말은 드물지 않다. 2차대전 후 프랑스에선 에디트 피아프(1915~1963), 이웃 일본에선 미소라 히바리(1937~1989)에게 그런 이름이 붙었다.
가수 이미자는 그 훨씬 너머에 있다. 그들이 노래한 세월이라야 20년 30년, 그러나 이미자의 가력(歌歷)은 올해 환갑이 됐다.
60년 노래 인생을 '마이웨이(my way)'로 마무리한 프랭크 시내트라(1915~1998)에게나 견줄 수 있을까.

―노래를 부르며 맞는 여든에는 어떤 감상이 따를까요.

"내가 어떻게 견뎌왔나를 생각해요. 튀지 말고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그런 마음으로 살아온 세월입니다."

가수 이미자는 60년간 2100여 곡을 부르고 앨범 560여 장을 냈다.
어느 노래엔들 애정이 실려 있지 않을까마는 이미자는 '동백 아가씨' '섬마을 선생님' '기러기 아빠' 세 노래를 앓던 손가락처럼 유독 챙긴다.
숫자로 본 이미자 노래인생 60년
―대히트를 치면 얼마 안 가 금지곡이 되곤 했지요.

"'동백 아가씨'는 레코드 차트에서 35주간 1위 했던 곡인데 하루아침에 방송에서 사라져 버렸어요. '섬마을 선생님' '기러기 아빠'도 그래서 더 짠한 마음이 들어요."

70년대 후쿠다 다케오 일본 총리가 방한했을 때 박정희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만찬을 베풀었다.
초청 가수로 나간 그에게 박 대통령은 신청곡으로 '동백 아가씨'를 내놨다.
자신이 좋아하는 곡마다 아랫사람들이 '왜색조' '퇴영적'이란 꼬리표를 붙인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이미자는 월남 파병 장병 위문 공연을 네 번 갔다.

"'이미자는 대통령이 지명했으니 꼭 가야 한다'는 거예요. 다들 위험하다고 꺼리던 분위기였어요.
우리 국적 항공사가 없던 터라 홍콩까진 외국 항공사 비행기로, 거기서 필리핀 클라크 공군기지를 거쳐 월남으론 미군 군용기를 타고 꼬박 사흘 걸려 도착했습니다.
노래를 시작하자마자 뚝뚝 눈물을 떨구던 병사들이 끝날 무렵엔 통곡을 해요. 동백 아가씨를 부르고 또 불렀어요."


―서양 젊은이들은 전쟁터에서 꿈에 치즈가 나타난다고 해요. 서양 사람에겐 치즈에 '어머니 맛' '아내의 정(情)'이 배어 있으니까요.
어머니와 아내를 떠나 먼 타국에서 땀으로 범벅 된 한국 젊은이들은 이 선생 노래에서 그리운 이들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위대한 세대가 있다면 바로 그분들 아니겠어요. 이제는 노년이세요. 위로해 드리고 싶습니다.
그때 그분들 가슴에 사무쳤던 노래를 들려 드리려고요. 그런데 떠나신 분도 많아 안타까워요."


이미자의 노래는 목 놓아 울지 않는다. 슬픔을 안으로 삼킨다.
'울컥'하기 전 '뭉클' 단계에서 멈추고 눈물을 '와락' 쏟기 전 '글썽' 단계에서 멈춘다.

―서양 밴드 롤링 스톤스나 요즘 아이돌 노래는 어린 소녀 팬을 기절시킵니다.

"청중을 기절시키는 노래는 오래 못 가요. 저는 슬픔의 방아쇠를 당기는 데서 멈춰요.
그래서 노래가 물리지 않는 건지도 모르지요."


―전성기 시절 이 선생이 섰던 무대 다른 편엔 패티김이 있었지요.

"저보다 세 살 위라서 언니라고 불러요. 그분은 서양식 저는 동양식, 개성이 분명했어요. 친했습니다. 서로를 인정하고요.
그분 은퇴 공연 때 분장실로 찾아갔어요. '언니 너무 아쉽다. 조금만 더 하셨으면 좋겠는데' 하니,
그분이 그래요. '미자는 여든까지 할 수 있어. 나는 그게 안 돼.'
그 시절 같이 활동하던 패티 언니, 현미, 최희준씨. 그분들 노래도 이번에 부릅니다."


몸 안에 노래가 고여 밖으로 흘러넘치는 천생 가수,
여든이 내일모레인 이미자 무대엔 노랫말을 옮겨주는 프롬프터가 없다. 강철나비*와 같은 집중력이다.
*강철나비: 1985년 동양인 최초로 스위스 로잔느 콩쿠르에서 우승한 발레리나 강수진은 이듬해 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에 입단, 1997년 수석 무용수가 됐다.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은 1961년 이후 자타 공인하는 ‘드라마 발레’의 온상이 되었는데 강수진은[로미오와 줄리엣], [오네긴], [말괄량이 길들이기] [까멜리아 레이디] 등 많은 드라마발레에 주연을 맡아 훌륭히 소화해 냈다.
마침내 1999년 동양인 최초로 무용계의 아카데미상 ‘브누아 드 라 당스’ 상, 2007년 독일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정부가 최고의 예술가에게만 수여하는 ‘캄머 탠처린(궁중 무용가)’에 선정되는 영광을 누렸다.
연약해 보이는 그녀의 외모와 달리 발레에 대한 강인한 의지를 가진 무용수 강수진에게 붙여진 별명이 ‘강철나비’.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에서 치열했던 그의 삶을 상징한다.
별명에 붙은 '나비'는 2막으로 된 유명한 푸치니 작 오페라 [나비부인]을 원작으로 하여
강수진이 주연을 맡은 동명(同名) 드라마발레[나비부인]을 원작 오페라 못지않게 훌륭히 해 낸데서 얻게 된 것이다.
강수진이 열연하는 드라마발레 [나비부인]의 한 장면
[나비부인]은 일본 나가사키를 무대로 게이샤 초초('나비',라는 뜻의 일본어)와 미국 해군 장교 핑커톤의 비극적 사랑이야기인데 아리아 대신 춤으로 그려낸 것이다.
강천석 논설고문과 인터뷰 장면
이미자씨와 강천석 논설고문은 '위대한 세대'에 대한 위로를 이야기했다. /이태경 기자
―노래 60년 결혼 50년 어느 쪽이 힘들었나요.

"노래는 제가 태어나면서 받은 선물이에요. 가정은 애써서 만들고 인내하면서 지킨 거라서 비교가 되지 않아요.
누가 아무나 주부 노릇 할 수 있다고 그러나요. 전업주부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어려운 전문 직업이에요."


총각 선생님을 연모한 섬마을 처녀 이미자는 사실은 서울 태생이다.
1970년 KBS 가요 프로에 출연한 인연으로 그 프로 PD이던 지금 남편 김창수씨를 만났다.
김씨는 아직도 옛 동료들에게 넉넉한 인품으로 기억되는 사람이다. 그런 남편이 우산을 받쳐 주는데도 종부(宗婦)로서 결혼 생활 입문은 만만치가 않았던 모양이다.

"집안 기제사(忌祭祀)가 돌아오면 온종일 지지고 부치고 끓이고. 그 바람에 손이 커져서 지금도 음식을 조금 하면 맛을 모르겠어요." .

한때는 주부 이미자에겐 자기 이름 저금통장도, 자기 이름 집도 없다는 말이 돌았다
자신이 유명한 게 남편의 그늘이 될까 봐 몸을 동그랗게 말아 일부러 작아진 것이다.
실제 이미자는 어깨가 작다. 그래서 한복이 예쁘게 맞는다는 말을 듣는다고 한다.

이미자는 어린 시절 아버지와 단둘이 살았다. 고단하고 외로웠다. 훗날 아버지가 재혼해 동생들이 태어나긴 했지만.
그의 노래에 담긴 슬픔의 원류, 아픔의 수원지(水源地)도 이 고단했던 유년기에서 비롯됐는지 모른다.
그런 이미자에게 가정은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 함락돼서는 안 되는 굳건한 성채(城砦)여야 했다.

"'실패해선 안 된다. 가정에서 실패하면 다 실패하는 거다'라는 말을 수없이 다짐하며 고개를 넘었어요."

'무대에서 주저앉더라도 노래하고 싶다'던 백 년 가수, '은퇴라는 단어는 입 밖에 내기 싫다'는 그녀도 '그럼 5년 뒤에 다시'라고 건네자 손사래를 쳤다.
우리 모두의 인생처럼 이미자의 노래 인생도 황혼빛에 붉게 물들고 있었다.

―이제 모든 것을 받아들일 때가 되신 거지요. 용서하고 싶은 상대, 용서받고 싶은 상대는 없나요.

"없어요. 다 녹였어요. 노래로 녹이고 세월이 녹이고…."

2시간여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서는 순간 불현듯 1970년대 서독 파견 광부들이 수백m 지하 막장에서 트랜지스터 라디오로 듣다 울고, 울고 다시 들었다는 이미자 무대도 이번이 마지막일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이미자 노래인생 60년 기념 음악회 5월 8~10일 서울 세종문화회관[문의: (02)724-6318]
60년을 한결같이 노래한다는 것
월남, 독일 탄광, 중동 등에서 울며 따라 부른 이미자 노래
60년간 똑같은 창법과 마음가짐
이런 가수가 있다니 행운 아닌가.
沙月 李盛永(2019.4.24 올림)

조선일보 2019. 4. 24일자 오피니언 태평로 난에
한현우 논설위원의 칼럼으로
'60년을 한결같이 노래한다는 것' 이란 제목의 글이 실렸다.
앞의 '이미자 노래인생 60년' 인터뷰기사와 맥을 같이하기에 추가로 올린다.

1965년 월남에 파병된 대한민국 국군 앞에 선 스물네 살 이미자를 상상해 본다.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여가수와 최악의 전쟁에 투입된 젊은 남자들의 만남이다.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까지 여덟 마디 도입부에 이어, 노래는 듣는 이의 감정을 바로 끌어올린다.
'얼마나 울었던가/ 동백 아가씨'. 20대 피 끓는 장정들은 이 노래가 임을 그리다 지쳐 동백꽃처럼 빨갛게 멍이 든 여자의 노래라는 사실을 잊는다.
그저 적도 타국에서 벌어진 남의 전장에 던져진 자신들의 처지를 떠올릴 뿐이다. 그들 역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밤을 각자의 사연을 안고 아프게 울며 보냈다.


한국 현대사에서 이미자의 등장은 그만큼 극적이다.
'동백 아가씨'는 서울의 대학생에게 버림받은 섬처녀의 비극을 그린 영화의 주제가였다.
당대 최고 배우 신성일과 엄앵란이 나왔다. 고국에서는 남녀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놓고 눈물짓는 영화가 대히트를 쳤는데,
베트남 정글에서는 동년배 남자들이 오로지 국가가 불렀다는 이유로 총과 수류탄을 안고 불안과 공포의 나날을 보냈다.
그들을 위로한 가수가 이미자였다. 이 노래는 여자가 부르기에도 워낙 고음이어서, 오히려 남자들이 한 옥타브 낮춰 따라 부르기 좋았다
남의 나라 햇볕에 그을린 대한민국 청년들이 "그리움에 지쳐서/ 울다 지쳐서" 하고 제가끔의 그리움을 안고 악쓰며 따라 불렀을 광경이 눈에 선하다.

1959년 데뷔한 이미자 선생이 60주년 무대에 선다는 기사를 읽으면서 대한민국 탄생 이후 지금까지 가장 오랫동안 무대에 서 온 여가수의 인생과 노래들을 떠올렸다.
이미자의 노래는 젊었을 때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본인 말처럼 바이올린 같던 음색이 조금 탁해졌고 밀어붙이는 힘이 약해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지금껏 지키고 있는 라이브 원칙은 '음반 녹음할 때와 똑같이 부르는 것'이다. 낼모레 여든이 되는 가수가 "음반과 똑같이 부르겠다"고 한다.
지금 전성기를 누리는 어떤 가수도 감히 이런 말을 할 수 없다. 무서운 자신감이다.


이미자 노래는 악보와 일치하지 않는다. 음을 놓았다가 당기고 밀었다가 잡아챈다. 그러나 그 테크닉이 요즘 트로트 가수들의 가볍게 출렁대는 창법과는 완전히 다르다.
장음(長音)을 낼 때 이미자의 바이브레이션은 인위적이지 않고 마치 중력으로 만들어지는 것처럼 자연스럽다. 이것이 이미자 노래 60년의 비결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노래는 조용히 부르는데도 두 번 들으면 벌써 시끄럽다. 이미자 노래는 무한 반복으로 틀어놓아도 시끄럽지 않다. 이것이 그 노래의 생명력이다.
그 생명력은 전쟁의 폐허에서 나라를 일으켜 세운 대한민국 저력 중 하나였다. 베트남과 독일 탄광과 중동 건설 현장에서 그의 노래들은 대한민국 남자들의 핏줄 속에 흘렀다.

이미자는 1980년대 대중음악에 발라드가 등장하면서 무대 중앙에서 조금씩 비켜났다. 거의 동시에 대중음악에 없던 '트로트'란 장르가 나타났을 때, 이미자는 그에 영합하는 대신 자신의 노래 방식에 머무르기로 했다.
함부로 TV에 나가지 않았고 히트곡 내려고 아무한테나 곡을 받지도 않았다. 음반과 똑같은 노래를 들려줄 수 있는 라이브 무대만큼은 매년 전국을 돌며 열어왔다.
그는 여전히 60년 전과 똑같은 창법으로 노래한다. 그때 피와 땀을 흘린 대가로 지금 대한민국의 어른이 된 세대에게 낯익은 위로를 준다.
60년을 한결같이, 똑같은 창법과 마음가짐으로 노래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우리에게 이미자 선생 같은 가수가 있다는 것은 놀라운 행운이다.
한현우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