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과 이집트
沙月 李 盛 永(2006.4.30)
  관광회사 상품으로 모집한 3월 29일부터 열흘간 지중해 동부지역 3국(이집트, 그리스, 터키) 관광여행 회원26명 중에 동기생 다섯 가족 9명이 참여하여 3월 30일부터 4월 2일까지 4일간 이집트를 구경했다.

  이집트 관광 이틀째인 3월 31일 카이로 남쪽으로 600여Km 떨어진 이집트 신왕국 수도 룩소까지 비행기를 타고 가서 관광하였는데, 고대 이집트 역대 파라오들이 이집트 태양신 아문 '라'를 모신 카르닉신전 한 기둥에 프랑스어 글씨가 새겨져 있는 데 가이드가 ‘나폴레온의 흔적’이라고 설명하였다.

  육사 4학년 때 전사를 배우면서 나폴레옹 하면 Italy 전역, Marengo 전역, Ulm 전역, Austerlitz 전역, Jena 전역, Eylan 전역, Russia전역, Leipzig 전역, France 전역, Waterloo 전역 등 쟁쟁한 전역에 몹시 흥분했던 기억은 있지만, 나폴레옹이 이집트에서 뭘 했다는 기억은 남아있질 않았다.

  나폴레온전쟁사 시간이면 누구 할 것 없이 나폴레옹의 천재적인 전략과 군대 지휘 기술을 찬양하고, 흠모하기까지 했는데 정작 이집트전역에 있어서는 전사적인 입장에서 별로 기억할 만한 큰 승패의 결과가 없었기 때문인 것 같다. 다른 전역에 비해 이집트 전역은 상대가 안되는 이집트군과 그저 심심하게 끝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쟁의 천재, 세계를 정복하려는 야망에 부풀어 있던 나폴레옹이 이렇게 카이로에서 600Km나 떨어진 룩소까지 와서 이런 흔적을 남겼을까 하는 의문까지 생긴 것 같다.

  여행에서 돌아와 곧바로 시골집으로 내려 갔는데 마침 그곳에는 육사 전사학 교재들이 서가에 꽂혀 있고, 작년부터 받아보는 인문잡지 ‘안띠꾸스’에 <나일강을 따라 이집트 문명을 찾아>라는 기획 취재물에 ‘나폴레옹의 이집트 열광의 역사 - 피라미드의 예언을 들은 사나이’라는 글을 읽게 되면서 나폴레옹이 고대 이집트 문명을 밝은 세상에 내 놓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 그 윤곽을 요약하였다.
나폴레온의 흔적이라는 카르닉신전 기둥의 프랑스어 글씨
    고대 이집트문명에 대한 유럽인들의 관심은 2700년 전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는 이집트 방문이 유행처럼 되어 솔론(BC640-560), 헤카타이오스BC550-475), 헤로도토스(BC484-442)등이 이집트에 관한 기록들을 남겼다.

    본격적인 이집트열풍을 일으킨 것은 알랙산더대왕이다. 알래산더대왕과 그 후예들은 이집트를 정복하고, 알랙산드리아를 건설했을 뿐만 아니라 세계 최대의 도서관을 짓고, 이 도서관을 통해 방대한 이집트문명의 흔적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였다.

    이집트열풍은 로마시대로 이어졌다. 씨저,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가 정복 또는 망명지로 이집트를 오갔고, BC30년 그리스계 이집트 왕조의 마지막 여왕 크레오파트라 7세가 악티움전투 패전 후 자살 함으로서 이집트는 ‘로마제국의 곡식창고’가 되었다.

    이집트에서 옮겨 온 오벨리스크가 로마의 성베드로성당 광장의 중앙에 세워졌고, 로마 황제의 무덤은 피라미드의 형태를 본 따 거대한 마우솔래움으로 지어졌다.

    로마시대에 최고조에 달했던 이집트 열풍을 이어받은 사람은 프랑스의 나폴레옹이다. 1798년 5월 38,000명의 군대를 실은 328척의 함대가 프랑스 남부의 툴롱항을 출발해서 이집트로 떠날 때도 나폴레옹을 비롯한 몇몇 고위층 인사를 제외하고는 이 함대가 무엇을 위해, 어디로 가는지 몰랐다고 한다.
나폴레옹
이태리를 정복하기 위해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이 함대에는 무려 167명의 학자들이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에 동참했다. 고고학자, 언어학자, 지리학자, 수학자 등 전문가 뿐만 아니라 화가, 시인, 음악가 등 예술가들도 끼어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당시 프랑스가 자랑하던 국립학술원 정예 멤버들이었다.

    나폴레옹은 이집트 원정에 앞서 이집트가 가진 잠재적 가치를 철저히 탐구하려 했던 것이다. 그래서 고대 유적 뿐만 아니라 지질, 농작물, 동식물, 주민들의 동향 등을 분석해 낼 수 있는 학자들을 참여 시켰던 것이다. 그래서 나폴레옹의 함대는 ‘원정대’라기 보다는 ‘지중해에 떠다니는 연구소’란 표현이 더 실감 났다고 한다.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을 계획할 때 알렉산드대왕을 모델로 삼았다고 한다. 알렉산드대왕의 군사원정에는 항상 학자들을 대동하고 다닌 것으로도 유명하다. 나폴레옹 원정의 최종 목표는 당시 유럽의 라이벌이었던 영국으로부터 인도를 빼앗는 것이었다고 한다. 알렉산드대왕처럼 이집트에 확고한 교두보를 설치하고, 수에즈운하를 뚫어 인도와의 최단거리 무역로를 개설하는 것이 그의 원대한 꿈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원대한 꿈을 안고 영국 넬슨 제독이 이끄는 영국함대가 한 달 내내 지키고 있는 길목을 안개를 틈 타 교묘히 감시망을 피해 일단 이집트를 점령하기 위하여 1798년 7월 1일 알렉산드리어 항구의 서쪽 해변에 도착하였다.

    나폴레옹군은 7월 2일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하고, 카이로로 전진하는 가운데 도중에 2-3회의 조우전이 있었지만 상대가 되지 않았고, 21일부터 카이로 공략에 나섰다. 이 때 이집트는 오스만터키 지배 하에 있으면서 주로 기병으로 편성된 Namaiukes군이 카이로를 지키고 있었다. 카이로 성문 앞에서 벌어진 피라미드전투에서 나폴레옹군은 대승을 하여 24일 카이로를 탈취하고 항복을 받았다.

    그러나 알랙산드리아 동쪽 아부키르항에 정박해 있던 프랑스 배들을 영국 함대가 한 달간 추적 끝에 발견하고 기습 공격하여 328척 중 2척만 탈출하고 나머지는 모두 나포되거나 파선되었다. 그래서 프랑스 학자들이 싣고 온 서적과 탐사 장비들도 모두 침몰된 배와 함께 알렉산드리아 앞 바다 속에 가라앉고 말았다고 한다.

    영국 해군이 지중해를 장악하여 나폴레옹군이 이집트에 고립된 후에도 나폴레옹의 이집트 연구 열정은 식지 않았다고 한다. 나폴레옹은 1798년 8월 23일 카이로에 프랑스학술원을 개원하고, 본격적인 이집트탐사와 개발에 들어갔다.

    피라미드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후 나폴레옹은 학자들에게 대피라미드의 비밀을 밝혀낼 것을 지시했다. 원정에 참여했던 수학자 몽즈는 대피라미드의 체적이 2,600,000 입방m나 되며 이것만 가지고도 프랑스 국경을 3m의 높이 0.3m의 폭으로 쌀 수 있는 양이라고 계산했다고 한다.

    나폴레옹은 업무에 지친 피곤한 몸으로도 밤 늦게까지 학자들과 이집트 문명에 관한 토론을 벌렸다고 하니 그가 얼마나 이집트 문명에 심취해 있었는지를 짐작하게 해 준다.

    나폴레옹이 이집트 문명이 햇빛을 보게 하는데 가장 큰 공로는 로제타석의 발견과 고대 이집트 상형문자의 해독이다.
    1799년 7월, 프랑스 나폴레옹군 공병대가 지중해 연안 로제타 근처에서 줄리앙요새를 건설하기 위하여 오래된 석조건물을 헐던 중 한 병사가 높이 1.25m의 단단하고 새까만 현무암 돌비석 하나를 발견하였는데 이 비석에는 상형문자와 흘림체 민용 문자, 그리고 그리스어 등 세 종류의 문자가 촘촘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이 돌은 '로제타석'이라 명명되어 지금 정품은 대영박물관에 보관되어있고, 이집트박물관에는 모조품이 전시되어있음)
로제타석
    비문의 그리스어를 해독한 학자들은 이 비가 프톨레마이오스5세의 공적을 찬양하기 위해 만들어진 공적비로 BC196년 경 당시 북부 이집트의 중심도시 사이스(Sais)의 한 궁전 광장에 세워졌던 것임을 밝혀냈다.

    로제타석의 비문으로 새겨진 이집트 상형문자를 완전하게 해독해 내고, 이를 토대로 고대 이집트 상형문자를 완전히 해독해내 고대이집트문명이 세상에 빛을 보게 한 사람은 프랑스 언어학자 샹폴리옹(Champolion, 1790-1832년)이었다.
샹폴리옹
어릴 때부터 고대어에 천재적인 소질을 보였던 그는 17세에 이집트 파라오들의 연대기를 재구성하였고,
1822년에는 로제타석비를 토대로 고대 이집트 상형문자를 완전히 해독하는데 성공하였다.
    로제타석의 그리스어를 분석하던 샹폴리옹은 카르투슈(타원형 모양의 고대 이집트 왕과 신의 명찰) 안에 이집트 상형문자로 새겨진 것이 프톨레마이오스라는 것을 확인했고, 이집트 필레섬에서 가져온 오벨리스크에서 크레오파트라 이름의 상형문자를 알아내고, 이들 두 왕의 이름을 비교하여 중복되는 몇 개의 글자를 확인하였다.

    샹폴리옹은 이런 방식으로 이집트 신전 벽에 자주 등장하는 파라오들의 이름들을 차례로 읽어서 1822년 <소리글자로서의 이집트 상형문자>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비쟌틴제국의 테오도시우스(Theodosius, 347-395년) 황제에 칙령으로 ‘이집트 신전 폐쇄’ 이후 1400여년 동안 인류의 기억 속에서 완전히 잊혀졌던 이집트 상형문자가 그 비밀을 드러낸 것이다.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은 결국 정치적으로는 실패로 끝났지만 그가 이집트문명에 대한 연구에 끼친 영향은 엄청나게 컸다. 프랑스로 돌아 온 나폴레옹은 국가적인 사업으로 이집트 탐사 성과를 집대성 했다. 즉 20여년에 걸쳐 총 24권에 이르는 <이집트>(Description de l’ Egypte)를 출간한 것이다. 이집트의 유적과 유물 뿐만 아니라 지질, 동식물, 원주민들의 풍습, 종교에 이르기까지 이집트에 관한 방대한 분량의 지식이 담겨져 있는 이집트에 관한 백과사전이었다.

    나폴레옹과 프랑스 학자들의 열정을 담은 <이집트>가 발간되자 유럽사회에 이집트 신드롬이 몰아쳤다. 미라, 오벨리스크, 피라미드 등에 관한 고고학자들의 논설이 그치지 않았고, 화가들은 이집트 각종 풍물을 화폭에 담았다.
    (1961년 내가 배운 ‘나폴레온전쟁사’ 교재와 인문잡지 안띠꾸스(ANTIQUUS) 통권6호 협성대학교 교양학부 교수 김성의 ‘나폴레옹과 이집트 열광의 역사-피라미드의 예언을 들은 사나이’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