白頭大幹(백두대간) 서쪽에서 나서, 동쪽에 묻힌
論介(논개) 이야기
沙月 李 盛 永(2005.12.29)
  임관 40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추진한 서해안과 남해안 일원을 한바퀴 도는 ‘길따라 맛따라’ 국내 여행 때 진주 촉석루에 들렸는데 저녁 식사시간 때문에 정작 촉석루에는 올라보지도 않고, ‘충절(忠節)의 여신’ 논개 사당 의기사(義妓祠)에 참배하고, 논개가 왜장을 껴안고 남강 물로 뛰어 든 의암(義巖)에는 올랐다.

  문화재 소개 현판에 의하면 논개 이야기는 유몽인(柳夢寅, 호 於于堂, 조선 명종-인조 때 이조참판)의 어우야담(於于野談)에 실려 세상에 알려진 이야기다. 이 곳 논개 유적은 인조7년(1629)에 ‘義巖(의암)’두 자가 각인(刻印)되고, 경종2년(1722)의 의암사적비(義巖事蹟碑)가 건립되었으며, 의기사((義妓祠)는 영조 16년(1740) 경상우병사 남덕하가 창건하고 2차 중건하였다가 현재의 건물은 1956년 진주의 의기창렬회(義妓彰烈會)가 시민의 모금으로 건립한 것이라 한다.
진주 촉석루 경내 의기사(義妓祠)에 모신 논개 영정
촉석루 아래 남강 가의 의암(義岩:오른쪽)과 의암사적비(왼쪽 비각)
  촉석루 논개 유적들은 논개를 의기(義妓: 의로운 기생)라 하여 기생이라는 것을 기정 사실로 하고 있지만 또 다른 논개의 생애 이야기를 읽고 보면 원래 논개는 기생이 아니었고, 다만 나라와 부군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기생으로 위장했던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주논개는 조선 선조 8년(1575)에 영취산 북쪽 계곡 지금의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주촌마을(주씨 집성촌)에서 주달문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육십령-영취산을 잇는 백두대간 마루금에서 서쪽으로 직선거리 약 5Km 되는 곳이다.

  백두대간이 덕유산의 끝맺음 육십령을 지나서 계속 전라도 장수와 경상도 함양의 지경을 따라 남하하다가 백운산(1278.6m, 수 많은 우리나라 백운산 중에서 두 번째로 높음) 조금 못 미쳐 금남호남정맥(錦南湖南正脈)을 분기시키는 산이 영취산(1075.6m)다.

  영취산에서 금남호남정맥을 따라 서쪽 1Km 쯤에 해발 930m의 높은 무령고개가 있고, 여기 샘에서 발원한 물이 북쪽으로 흘러 주촌마을 오동제에 갇혔다가 장계천이 되어 청천면에서 금강에 합류하여 진안의 용담땜으로 흘러 드는데 논개 생가(生家)는 오동제 저수지 서쪽에 있었다. 조선 헌종12년(1846)에 건립한 ‘矗石義妓論介生長鄕竪名碑’(촉석의기논개생장향수명비: 촉석루에서 의롭게 죽은 기생 논개가 태어나서 자란 고향임을 알리기 위해 세운 비)라는 긴 이름의 비석이 있다.

  오동제가 대곡저수지로 증축되면서 생가가 수몰되자 장수군에서는 주촌마을에서 남쪽으로 1Km쯤으로 옮겨 생가를 복원하고, 논개 부모의 묘, 논개 석상 등을 세워 성역화 하였다.(논개 생가지 복원 및 성역화 사진 참조)
  또 장수군은 복원된 논개 생가지와 영정을 군의 상징으로 삼아 행정관서에 대형 홍보간판을 붙여놓고 있는가 하면 복원된 생가지를 관광자원화 하기 위하여 장수읍에서 바로 통하는 도로를 개설하였다.
장수군 장계면사무소 현관의 대형 홍보간판
왼쪽이 복원된 논개 생가지이고, 오른쪽이 논개 영정
  논개가 13세 되던 해에 부친 주달문이 죽자 주색잡기에 빠져 있던 숙부 주달무가 당시 장수 토호 김풍헌에게 논개를 민며느리로 팔아 탕진해 버리고 심지어 모녀가 살던 집도 잡혀 논개 모녀는 오갈데 없게 되었다.

  그러나 논개 모녀가 민며느리로 들어가는 것을 완강히 반대하자 주달무는 적반하장으로 김풍헌과 작당하여 장수현감에게 소장(訴狀)을 올려 논개 모녀를 고소하였다. 장수현감 최경희가 소장을 검토하고 모녀를 불러 심리해 보니 소장의 주장이 억지임이 들어 나자 주달무를 정신이 들도록 곤장을 쳐 보냈다. 그러나 이미 살집도 날아간 뒤라 오갈 데가 없는 모녀가 딱해서 모녀를 현감 집에 머물면서 부인의 병 수발을 들게 하였다.

  논개 모녀의 정성어린 병 수발에도 불구하고 현감 부인이 세상을 떴다. 모녀의 정성에 감동한 현감은 죽은 처가 권한 데로 논개를 후처로 맞아드려 부부의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 후 5년이 지나 선조 25년(1592)에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1차 진주성 대첩이 있은 후, 선조26년(1593)에 최경희가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가 되어 진주성으로 갈 때 논개도 함께 가서 남편의 뒷바라지를 하게 되었다.(兵使: 兵馬節度使의 약칭, 종2품 무관)

  2차 진주성 싸움은 선조26년(1593) 6월 병사 최경회(崔慶會)를 비롯하여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양산주, 충청병사 황진(黃進), 사천현감 장윤(張潤), 김해부사 이종인(李宗仁), 의병장 고종후(高從厚), 강희열(姜熙悅), 이해(李海), 김준민(金俊民) 등이 성내 수천에 불과한 군사와 6-7만의 백성으로 10만의 왜적에게 결사항전 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6월 20일 성이 함락되자 황진, 장윤, 김준민 등은 전사하고, 최경희는 김천일, 고종후, 양산주 등과 함께 남강에 뛰어들어 자결하였으며, 성 내의 군사와 백성 6만 여명이 학살당하였다.

  2차 진주성 전투가 끝난 직후 왜군들이 촉석루(矗石樓)에서 승전축하연을 벌릴 때 논개도 기적에 올려 기생으로 변장하여 연회장에 끼어 들었다. 한창 흥이 올랐을 때 왜장 게다니무라로쿠스께(毛谷村六助)를 물가로 바위로 유인하여 껴안고 열흘 동안 내린 장마로 한껏 불어난 남강 강물에 뛰어들어 함께 죽었다. 논개가 왜장을 유인하여 껴안고 강물에 뛰어든 바위를 사람들은 ‘의암(義岩)’이라 부르는 것은 앞에서 사진과 함께 이야기 하였다.

  진주성이 함락된 후 장수지역 의병들이 남강 하류를 수색하여 며칠 후 창원의 지수목(지금의 진주시 지수면)에서 그 때까지도 왜장을 껴안은 채로 죽은 논개와 최경희의 시신을 찾아냈다. 이들 부부의 시신을 논개의 고향 장수로 운구하는 한편 사람을 보내서 주씨 문중과 장례 문제를 상의하였으나 왜적의 보복을 두려워 한 종중은 이를 거절하였다.

  논개 부부의 운구행렬이 육십령고개를 바라보고 오를 때 이 전갈을 듣고 하는 수 없이 그 곳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고 돌아갔는데 이 사실은 운구행렬에 참여했던 의병의 후손들에게 전설로 전해 오다가 순절한지 382년이 지난 1975년에 논개 부부의 묘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 곳은 지금의 함양군 서상면 금당리 방지마을인데 지금 성역화하였다. 백두대간 마루금에서 동쪽으로 직선거리 약 5Km 되는 곳이다. 결국 논개는 백두대간의 서쪽에서 태어나 동쪽에 묻힌것이다.
논개 생가와 무덤 위치도

◆ 논개 생가지 복원 및 성역화 사진
논개 생가지 성역화 조감도
의낭루(義娘樓)
의낭정(義娘亭)
복원된 논개 생가(生家)
복원된 논개생가에 모신 논개영정
논개 석상 앞과 뒤
위 사진 뒤로 보이는 묘소가 논개 부모의 묘
논개 생장지사적불망비
논개 부군 최경회의 정려비각
논개 정려각과 정려비
논개 시비

◆ 논개 묘소 성역화 사진(준비중)
논개(論介)
(변영로 시)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마음 흘러라.


아릿답던 그 아미(蛾眉)
높게 흔들리우며,
그 석류 속 같은 입술
죽음을 입맞추었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마음 흘러라.


흐르는 강물은
길이 길이 푸르리니
그대의 꽃다운 혼
어이 아니 붉으리.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마음 흘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