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한 장의 그림           

Can't Anybody Blow the Whistle?

(이제 그만 누가 호각좀 불어줘! - 제발 사업좀 보내 주세요)

 

 

 

 

 

 

 

 

 

 

 

 

 

 


 

90년대 초 내가 군에서 예편을 하고 운 좋게도 국과연으로 자리를 옮겨 공직(?)생활을 계속하게 된 것은 우여곡절 끝에 국과연이 맡아서 개발하기로 결정된 지휘통제통신 및 정보체계(C3I)의 개발에 있어서 군 요구에 관한 검토와 체계기술을 군의 전술적 운용에 접목시키는데 필요한 군출신요원으로 추천된 것이다.

 

군사장비나 무기체계의 연구개발에 있어서 그 출발점은군요구’이다. 영어로는 ROC(Required Operation Capability)인데 이것이 개발자에게는 크리스찬에게 성경과 같은 존재다.
대포나 전차처럼 군에서 많이 운용해 본 경험이 있는 무기체계에 있어서 보다 발전된 체계로 획득하기 위한 군요구는 다소의 욕심이 따르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비교적 명확하다.

 

그런데 C3I체계는 사정이 달랐다.
경리단, 군수사 등 일부 행정부대에서 컴퓨터의 전산기능을 활용하여 특정 행정소요를 빠르게 처리를 하는 수준으로 운용해 본 경험 뿐 방대한 자료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컴퓨터 기능을 이용하여 군의 제반 요소가 복합적으로 얽히는 지휘, 통제, 통신 및 정보의 전술적 문제를  신속히 해결하는 체계는 군에서 운용해 본 경험도 없고, 선진국의 소개나 견학을 하는 정도의 지식으로 군요구를 내놓다 보니 다음과 같은 여러 측면에서 무리한 요구가 될 수 밖에 없었다.

  - 스타워즈를 연상하는 공상, 망상적인 과도한 요구.

  - 자칭 권위자들이 군웅활거 하면서 아집에 따라 이사람 말 다르고, 저 사람 말이 다른 통일되지 않는 중구난방식 요구.

- 당시 국내외 기술수준은 고려하지 않고 완급(緩急)의 필요성 만을 내세운 사업추진

순서(전략제대-전술제대 순)에 대한 시비

- 이 연구의 수주(?)에 실패한 타 연구기관이 은근히 개발의 실패를 바라면서 소요자(군)를 부추기며 선진국에서 가능성만 제시되었을 뿐 입증되지도 않은 기술의 적용을 요구하는 등 이루 다 열거할 수가 없는 상태였다.
대부분이 군 면제를 받아 군이라고는 몇 주 간의 훈련소 생활 밖에 하지 않았기 때문에 군을 잘 모르고 두려움의 존재로 생각하는 순진한 국과연과 업체의 연구원들에게는 어이가 없어 할 말을 잃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소요와 군요구에 대한 검토는 체계개발요구검토 (SRR: System Requirement Review) 및 소프트웨어규격검토(SSR: Software Spec Review)로서 끝나야 함에도 불구하고, 체계설계검토(SDR: System Design Review), 소프트웨어개략설계검토(PDR: Preliminary Design Review), 상세설계검토(CDR: Critical Design Review), 시험준비상태검토(TRR: Test Readiness Review), 심지어는 개발자자체시혐과정(업체), 개발관리자(국과연)의 기술시험평가, 사용자(군)의 운용시험평가 과정에까지 소요 및 군 요구에 관한 엉뚱한 문제를 야기시키니 군 요구는 개발 전 과정에서 항상 핫이슈가 되어 연구원들을 괴롭혔던 것이다.

 

그래서 개발관리와 체계개발에 여념이 없을 국과연과 업체의 연구인력들은 본연의 연구활동보다 군요구의 부당성을 해명하고 이해 시키는데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경주해야 하는 실정이었다.

 

내가 국과연에 몸담게 된 것이 바로 이런 현상을 최소화하여 개발요원으로 하여금 개발활동에 전념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는데 기여하고자 하는 사명을 띄고 있는데 한마디로 이러한 소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고 자책하면서 의기 소침 해 있을 때 박준호 동기가 미 참모대학 사업관리자과정(PM)을 마치고 돌아와서 이 한 장의 그림을 내게 주었다.

 

이 그림은 미 참모대학 학생 두 사람이 마주 앉아서 ‘기병(騎兵)’을 주제로 하여 한 사람은 군요구 제기자(提起者)가 되고 또 한 사람은 이를 구현(具顯)하기 위한 개념설계를 하는 개발자 (開發者)가 되어 군요구가 제기되면 개발자는 효과적이고 가능성 있는 구현방안을 모색하여 그림으로 그려나가서 최종 완성된 개념설계의 그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그림은 미 참모대학 사업관리자과정에서는 참고 교재로 채택하여 잘못된 소요제기와 체계구현의 표본으로 삼아 학생들에게 소개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 그림을 체계개발요구검토(SRR) 때 브리핑 슬라이드로 만들어 소요 및 군요구 제기 관련 실무요원과 국과연 및 업체 개발요원이 합석한 자리에서 비추고 간단한 설명을 곁들였다.

“여러분은 이 그림을 보고 한낱 만화를 보는 기분으로 웃어넘기지만 우리 C3I 지휘소자동체계의 개발이 이 그림처럼 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이 그림은 전장(戰場)에서 기병(騎兵)의 장점인 기동성(機動性) 과 기민성(機敏性)을 십분 발휘하여 적진 속에 뛰어들어 좌충우돌 (左衝右突)하면서 적으로 하여금 혼비백산(魂飛魄散)하도록 해야 할 기병을 구현한 그림입니다.

보십시오. 군 요구자는 기우(杞憂)에 가까운 안전문제와 하찮은 것들을 요구하고, 개발자는 이를 충실하게 구현한 결과가 이 모양이 된 것입니다. 기동성과 기민성은커녕 움직이기 조차 어려운 기병이 되지 않았습니까? 간단히 웃고 넘어갈 일이 아니라 다 함께 심각하게 생각하고 우리 사업이 이렇게 되지 않도록 항상 유념해야 할 것입니다.”

 

책장을 뒤지다가 책갈피 속에 끼어 있는 이 그림이 나와 새삼 옛날 일이 회상 되어 몇 자 적어보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