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수화풍(地水火風) 수난의 백제 왕성
「바람드리성」(風納土城)
沙月 李盛永(2010. 2. 10)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 발행 「국토와 지명」이라는 책 맨 앞머리에 송파구 풍납토성(風納土城)에 관한 이야기가 ‘지수화풍(地水火風)의 수난이 되풀이 된 백제 왕성’이라는 부제와 함께 실려있다.
  지수화풍(地水火風)은 땅과 물과 불과 바람, 인간은 물론이고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와 직접적으로 관계가 깊은 것들이다.
  불가(佛家)에서는 이것들을 四大(사대)라 하는데, 여기서 大(대)는 단순히 ‘크다’는 뜻이 아니라 모든 물체를 구성하는 원소(元素)라는 뜻으로 우주(宇宙)를 구성하는 네 가지 기본 원소를 지(地), 수(水), 화(火), 풍(風)로 생각하였다.
  따라서 사람의 도 이 네 가지 원소로 이루어진 것으로 ‘四大(사대)’라 하기도 한다.

  「국토와 지명」은 사람의 몸을 ‘四大(사대)’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가령 사람이 죽으면
  - 머리털과 이빨, 손톱, 가죽, 힘줄, 뼈와 해골과 때 낀 것은 모두 땅(地)으로 돌아가고,
  - 가래침과 고름과 피와 진액과 침과 눈물과 정액은 물(水)로 돌아가고,
  - 더운 기운은 불(火)로 돌아가고,
  - 움직이는 기운은 바람(風)으로 돌아간다고 하였다.
    곧 「지수화풍(地水火風)」사대(四大)이다.」


  사람의 ‘四大(사대)’로 표현한 예순(禮順) 비구니 이씨(李氏: 조선 인조반정공신 李貴의 딸) 작 한시‘自歎(자탄)’한 편이 문헌편찬회 발간 「한국역대명시전서(韓國歷代名詩全書)」에 실려 있어 옮긴다.
自歎(자탄) 혼자탄식함                                       
  祗今衣上汚黃塵(지금의상오황진) 어느 듯 풍진 속에 더렵혔느니
  何事靑山不許人(하사청산불허인) 무슨 일로 청산마저 싫다는 구나
  *환宇只能囚四大(환우지능수사대) 하늘 땅 넓다해도 이 잡아둘 데 없네
  金吾難禁遠遊身(금오난금원유신) 금오랑, 네 어이 멀리멀리 떠도는 날 잡으려나
      *환: 갓머리 밑에 環에서 王을 뺀 자임
* 自歎(자탄) 시감상 바로가기(클릭): : 自歎(자탄)
  서울 송파구 풍납동(風納洞) 이름은 이 곳에 풍납토성(風納土城)이 있어 생긴 이름인데 풍납동(風納洞)의 내력을 보면
  - 조선시대에는 '바람드리'라는 이름으로 경기도 광주목에 속하였다.
  -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도(道)-시,군(市,郡)-읍,면,동(邑,面,洞)-리(里), 통/반(統/班)으로 개편할 때 웃바람드리와 아랫바람드리를 합하여 경기도 광주군 구천면 풍납리(風納里)라 하였고,
  - 1963년 서울특별시 성동구에 편입되면서 풍납동(風納洞)으로 되었다.
  - 1975년 강남구, 1979년 강동구를 거쳐 1988년 송파구 관할로 되었다.


  그러니까 ‘풍납(風納)’이란 ‘바람드리’를 한자어로 표기한 것이다. 그런데 왜 이곳을 ‘바람드리’라고 하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자 그대로 해석하면 ‘바람이 들다’ 라는 뜻이니 아마 이곳은 한강 남쪽 강가로 바람을 막아주는 산이나 언덕이 없고, 확 틔어있어 바람이 많고 세었던 데서 온 말이 아닌가 싶다.

  이곳이 세인들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일제 때인 1925년 여름 대홍수 이후부터라고 한다. 홍수로 강변이 범람하면서 땅 속에 묻혔던 중국 동진(東晉)시대의 청동초두(靑銅 金焦 斗: 세 개의 다리와 손잡이 자루가 달린 군사용 작은 냄비) 등 중요한 유물이 나오면서 사서(史書)에 백제 초기의 수도라고 기록된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이 이곳이 아닌가 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 후 2002년 초까지 국립문화재연구소 유적발굴단의 발굴 조사로 너비 40m, 높이 9.5m, 길이 3.5Km, 면적 22만 6000여평의 국내 최대 판축토성(板築土城)과 수 백점의 기와더미와 토기 그리고 각종 대형 건물터가 드러났는데 국립문화재연구소는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결과, 이 성이 서기전(BC) 2세기에서 서기 3세기에 축성된 것이라고 2000년 4월에 발표했다.

  성의 규모와 축성 시기를 보았을 때 당시 이곳에 이 성을 축조 한 집단은 이미 상당한 규모의 국가 체제를 수립한 것으로 학계에서는 해석함으로서 500년 가까운 한성백제수도의 정확한 위치를 놓고 하남시 춘궁동 일대, 몽촌토성, 풍납토성 등 지론이 분분하였는데 이곳 풍납토성백제 왕성(王城)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인 것으로 굳어지고 있다.
2002년 풍납토성 발굴 당시 현장설명회
풍납토성에서 출토된 청동초두
풍납토성에서 출토된 토기
  풍납토성의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은 백제 제21대 개로왕(蓋鹵王) 21년(문주왕1년)에 고구려 장수왕의 3만 대군 앞에 맥없이 함락되어 은 사로잡혀 처형되고, 수도는 무자비하게 파괴되어 신라군의 원병으로 고구려군은 물러갔지만 더 이상 수도로 회복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계속되는 고구려의 위협에 견딜 수가 없어 문주왕이 즉위하자 웅진(熊津: 공주)으로 천도하였다.

  「국토와 지명」은 이러한 풍납토성의 부침을 놓고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엮어 설명하고 있다.
  500년 도읍지도 지수화풍(地水火風)으로 돌아가는 것 또한 막을 길 없는 대자연의 법칙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1,500년간 땅 속에 잠들어 있었던 한성백제(漢城百濟)의 500년 왕성 풍납토성(風納土城)을 두고 하는 말이다.
  ① 고구려 장수왕의 3만 대군에 함락될 때 철저하게 파괴되었는데 옛날 공성(攻城)의 기본은 불(火)이니 풍납토성(風納土城)도 불이 성에 들었으니 곧 화납(火納)이며,
  ② 풍납토성(風納土城)은 왕성으로 한강 수운을 고려하여 건설했기 때문에 여러 차례 홍수 때 한강 물에 휩쓸려 왕성이 흙더미 속에 파묻혔다가 1925년 대홍수 때 그 흙덩이가 떠내려가는 바람에 백제 초기 유물들이 세상에 들어나면서 그 존재가 드러나기 시작 했으니 이는 곧 수납(水納)이며,
  ③ 바람결에 들려왔던(風聞) 백제왕성설이 이곳 ‘바람드리성’, 풍납토성이 백제왕성이라는 사실로 들어났으니 풍납(風納)이며,
  ④ 풍납토성 22만 6천평은 전체가 ‘유물의 밭’이요 ‘문화재의 보고’라 할 만큼 흙(地,土) 속에 많은 문화재가 들어 있으니 이는 곧 지납(地納)이요, 토납(土納)이다.


  그런데 이런 풍납토성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의 비극적 종말은 단순한 고구려의 영토확장정책 때문만이 아니라 150여 년의 숙원(宿怨)을 갚는 과정이었다는 것이 흥미롭다..
  형제국인 고구려와 백제가 원한에 얽혀 대륙과 한반도에서 피투성이가 되도록 치고 받으며 싸우는 과정을 박영규의 「고구려본기」에서 추려 엮어본다.

  서기전(BC) 19년에 동부여에서 아버지 주몽을 찾아온 유리가 고구려 태자로 책봉되자, 주몽의 후처 소서노와 두 아들 비류온조는 고구려를 떠나 남쪽으로 내려와 백제국을 세우는데, 건국초기에 한반도와 중국 황하 남쪽 산동반도에 각각 기반을 형성한다.

  그래서 초기 백제는 한반도백제대륙백제로 이원화된 상태였다가 동한(東漢)과 고구려가 팽창해 오자 산동 지역에 일부 근거지만 남기고 대륙백제는 한반도백제에 결합하여 마한(馬韓)의 여러 나라들을 무너뜨리고, 한반도의 가장 강한 신진세력으로 부상한다.

  한반도백제는 서기전(BC) 18년 온조가 백제를 건국하여 제21대 개로왕이 고구려 장수왕에게 포로가 되어 처형된 서기475년(개로왕 21년) 제22대 문주왕이 도읍을 웅주(熊州, 현 공주)로 옮길 때까지 493년간을 사가들은 ‘한성백제(漢城百濟)’라고 하는데 그 수도는 처음에는 한수 이북의 하북위례성(河北慰禮城)에 정했다가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얼마 안되어 낙랑말갈의 침공에 위협을 느끼고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으로 옮긴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자 한반도에는 또 하나의 신진세력으로 부상하고 있던 신라와 세력다툼을 하게 되니 만주와 한반도에는 삼국정립(鼎立)하게 된다.

  중국의 동한이 망하고, 5호16국 혼란한 시대가 시작되자 백제는 다시 대륙의 기반을 되찾아 산동반도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게 된다.
  한편, 고구려는 17대 서천왕의 북진정책이 성공하여 부여의 땅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다시 남진정책을 펴서 대방을 공격하였다.
  그런데 당시 백제 9대 책계왕은 대방왕의 딸 보과를 왕비로 맞아들여 백제와 대방 간에는 옹서지간(翁壻之間)이었기 때문에 대방이 고구려의 공격을 받고 백제에 구원을 요청하자 백제는 구원병을 보내 도우니 고구려 서천왕의 남진정책은 무위로 돌아가게 되었다. 백제 건국 후 300여 년 만에 간접적이지만 고구려와 백제가 처음으로 충돌한 것이다.

  그 후 상당기간 고구려와 백제는 군사적 충돌이 없었다. 그러나 83년이 지난 서기 369년에 발해만과 요서지역의 관할권을 놓고 직접적인 적대관계로 치양전투와 같은 치열한 전투를 벌이면서 고구려 제16대 고국원왕이 전사하게 되자 한 핏줄의 형제국이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관계가 된다.

  즉 서기 370년, 동쪽을 압박하던 중국 북방의 연(燕)나라가 전진(前陳)에게 멸망하자 중국 대륙에서의 백제의 팽창정책은 더욱 가속화되어 요서지역으로 진출을 꾀하고 있을 때 고구려가 연나라 패망을 계기로 잃었던 영토를 회복하려 요서지역 공략에 나서 백제를 공격하였으나 패하에서 백제군 복병을 만나 패하는 바람에 고구려는 수세에 몰렸다.

  백제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북진을 계속하여 서기371년 10월에는 백제 13대 근초고왕태자 근수구와 함께 군사 3만을 이끌고 직접 출전하여 요동까지 진출하여 고구려 도성 평양성을 공격하기에 이른다.
  이에 당황한 고구려군은 평양성을 중심으로 수성작전에 들어갔으나 사기가 치솟은 백제군을 당하기가 힘들었다. 이 평양성 싸움에서 고구려 고국원왕은 백제군이 쏜 화살에 치명상을 입어 쓰러졌다. 그러나 태자 구부의 통솔력에 힘입어 고구려 군이 잘 버티자 먼 거리를 행군해 온 백제군은 속전속결이 여의치 않자 고국원왕에게 치명상을 입힌 것으로 만족하고 고구려의 반격을 받기 전에 퇴각하였다.

  백제군이 물러간 다음 고국원왕은 화살에 맞은 상처가 도져 죽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들은 백제군은 사기가 치솟아 그 이후에도 고구려와 대등한 싸움을 벌이며 대륙에서의 영토확장에 주력하게 된다.

  세월은 흘러 서기 439년 대륙에는 남쪽은 한(漢)족의 송(宋)왕조, 북쪽은 선비(鮮卑)족의 위(魏)왕조, 북위(北魏) 남송(南宋)의 이른바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가 정착되어 중원 쪽이 안정되자 고구려는 오랫동안 미루어왔던 백제에 대한 복수전(復讐戰)을 전개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를 미리 눈치 챈 백제는 이미 서기429년에 신라와 화친을 맺고 고구려의 침략에 대비하고 있었다.

  장수왕 42년(454) 7월, 고구려는 신라의 북쪽 변경부터 먼저 공격하고, 이듬해 10월에는 백제를 공격하였다. 삼국의 한반도에서의 각축전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나제동맹을 확고히 하자 고구려는 오히려 나제연합군에 밀리는 형국이 되었고, 설상가상으로 세력을 강화한 북위가 혼인관계를 맺자는 요구를 하며 압력을 가해오자 고구려는 한동안 공격을 중지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북위와의 관계와 내정을 안정시킨 장수왕은 서기468년 말갈 군사 1만을 동원하여 신라의 실직주(강원도 삼척)를 빼앗자 이듬해 백제가 군사를 동원하여 고구려 남쪽 변경을 공격하면서 북위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의 배후를 공격하도록 요청하였으나 북위가 거절하여 백제의 의도가 관철되지 않자 고구려는 본격적으로 백제를 공략하기 위한 공작에 들어간다.

  즉 고구려 바둑의 고수 승려 도림(道琳)을 바둑을 무척 애호하는 백제 개로왕에게 침투시켜 늘 함께 바둑을 두면서 개로왕을 충동질하여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벌이도록 하였다. 이에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지자 고구려 장수왕은 서기475년에 3만의 대군을 이끌고 백제를 침입하여 단숨에 도성(都城: 하남위례성, 풍남토성)을 함락하고 개로왕(蓋鹵王)을 사로잡아 곧 한강 북쪽의 아차성(阿且城) 밑으로 끌고 가 참수하였다. 그러나 신라군 1만 명이 백제를 도와 출병하는 바람에 고구려는 점령했던 백제의 한성 도성을 포기하고 물러나야 했다.

  이로써 고구려는 소수림왕 이후 4대에 걸친 158년 만에 고국원왕의 원수를 갚아 숙원(宿怨)을 푸는 반면 백제의 한성 도성은 철저히 붕괴되고, 또 앞으로 계속될 고구려의 남진정책에 대비해서 도읍을 남쪽 웅진(熊津: 곰나루, 공주)옮기므로써 그 세력도 한반도 남쪽으로 위축되게 되었다.
< 원한의 158년간 각국의 세력판도 >
고구려 15대 미천왕 20년 때(서기319년)
백제 11대 비류왕 16년 때
고구려 16대 고국원왕 42년, 17대 소수림왕 1년 때(서기371년)
백제 13대 근초고왕 26년 때
제20대 장수왕 63년 때(서기475년)
백제 21대 개로왕 21년, 22대 문주왕 1년 때
  * 일제로부터 해방된 후에도 이병도를 비롯한 소위 식민사관 역사학자들에 의해서 만들어졌던 국사교과서를 가지고 배웠던 우리들은 '대륙백제'라는 말도 들은 적이 없다.
  일제는 의도적으로 우리의 역사를 삼국(三國) 이전 즉 고조선은 국가라는 체제가 존재하지 않고, 다만 전해오는 허망한 '단군신화' 뿐이라고 하였고, 삼국의 역사도 만주와 한반도로 국한시키는 역사왜곡에 혈안이 되었었다. 지금은 어떻게 가르치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