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라마야나」이야기
- 이 세상에서 가장 오래 그리고 가장 넓게 퍼진 인도의 신화 -
沙月 李 盛 永(2007.7.16)
    지난 6월 12일부터 17일까지 4박 6일로 중국 실크로드(Silkroad)를 관광 여행 한 적이 있다.
    실크로드는 아주 옛날부터 자연스럽게 생겨났지만 특히 일대를 흉노족이 장악하고 있던 중국 후한 광무제(통상 ‘한무제’라 칭함) 때 장건(張騫)이 사신으로 흉노 땅 저편의 월지국(月支國)에 파견하였는데, 장건은 흉노에게 2회나 붙잡혀 고초를 겪은 끝에 13년 만에 복귀하여 이곳을 <서역(西域)>이라 부르고 각종 정보를 얻어와 서역 각 나라로부터 문물이 오가는 길이 열리게 됨으로써 장건은 ‘서역개척자’로 불리게 되었다.
중국 돈황 양관고성(陽關故城)에 세워져 있는 ‘서역개척자’ 장건(張騫)의 동상
2007년 6월 14일 실크로드 관광 때 촬영

    중국 한나라(BC206-AD220년) 때 실크로드는 양관(陽關)과 옥문관(玉門關)을 기점으로 하여 ‘서역남도(西域南道)’‘서역북도(西域北道)’ 가 있었다.

    당왕조(서기618-907년) 때에는 주로 이곳 서역을 장악하고 있던 서돌궐(西突闕) 세력을 누르기 위하여 서역 경영에 나섰다. 당시 이 지역은 건조화가 진행되어 <서역남도>는 불교의 교류를 위하여 인도를 오가는 사람들이 주로 이용하고, 비단을 비롯하여 동서 문물이 오가는 길은 주로 <서역북도>를 이용했다.
    <서역북도>는 다시 천산남로(天山南路)천산북로(天山北路)로 나누어졌다.
실크로드 요도

    관광 4일째 되던 날(15일) 투루판(吐魯番) 지역을 관광하면서 화염산(火焰山)을 간 적이 있다.
    투루판분지 북부에 산이 빨간 모래로 이루어져 마치 맹렬한 불길의 화염처럼 보인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이러한 산들이 천산산맥의 한 지맥으로 10Km에 걸쳐 산맥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화염산
2007년 6월 15일 실크로드 관광 때 촬영

    중국 소설 서유기(西遊記)화염산(火焰山)이 나온다. 삼장법사 일행이 이 화염산 불길 때문에 길을 더 나아갈 수 없어 불을 끄기 위해 제1제자 손오공이 나찰녀·우마왕으로부터 파초선(芭蕉扇)을 훔쳐오는 활약을 하는 내용이 나온다.

    화염산맥을 지나가는 포장도로 길이 소설 서유기의 주인공 삼장법사로 나오는 당나라 태종 때 현장법사가 불경을 구하기 위해 인도로 갔다 돌아왔고, 신라의 혜초대사가 이 길로 돌아왔다는 길이다.
    당시는 길도 없을 뿐만 아니라 걷거나 사막에서 노숙하다가 모래바람을 만나 모래 속에 생매장되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고 한다.
현장법사가 인도를 갔다 돌아온 길
2007년 6월 15일 실크로드 관광 때 촬영.

    현장법사는 본명이 위(褘)이고, 하남 낙양 이씨현(里氏縣) 출생으로 13세에 승적에 올라 장안, 성도 등지를 돌면서 불교 공부를 하고, 서기627년 천축(인도)에 가서 서기645년에 돌아오면서 불상과 불경을 가지고 힌두쿠시산맥, 파밀고원 등 험로를 넘어 장안으로 돌아왔다.
    당태종의 후원을 받아 74부 1,335권의 경전을 한역(漢譯)하고, 인도 여행기인 대당서역기 12권을 저술하였다.

    중국 서안에 있는 대자은사(大慈恩寺)는 당태종이 서기628년 황태자(후에 고종) 모후 문덕왕후를 위하여 세운 사찰인데, 인도를 다녀온 현장법사가 머물면서 불경의 한역과 대당서역기를 저술하였던 곳이다.
    이 대자은사 경내에 있는 대안탑(大雁塔)은 당고종 652년에 현장법사가 발원하여 건립한 7층 높이 54m의 탑인데, 현장법사가 인도를 가면서 타클라마칸사막에서 방향을 잃고 헤맬 때 기러기가 남쪽으로 날아가며 길을 인도했다 하여 이름을 ‘대안(大雁: 큰 기러기)’이라 하였고,
    현장법사의 사리와 인도에서 가져온 불경, 현장법사의 전기 자은전(慈恩傳), 대당서역기, 대당고삼장법사행장 등이 보관되어 있다.
대자은사의 현장법사 동상과 대안탑
2002년 9월 14일 서안 관광 때 촬영.

    현장법사가 불경을 구하기 위해 인도로 갈 때와 올 때 투루판 동쪽 50여 Km에 있는 고창고성(당시 고창국)에 들렸다고 한다.
    당 태종 정관2년(서기628년) 봄에 현장은 말을 타고 이오(현 하밀)에 이르러 여기서 서북방향으로 갈려고 하였다. 이곳에서 고창국 사신을 만나 사신이 현장의 일을 국왕에게 사람을 보내 보고하니 고창국왕(구문태)가 신하들과 함께 고창고성에 와서 기다린다 하여 하는 수 없이 현장이 시신과 함께 6일 만에 고창고성에 도착하였다.

    고창국왕 구문태와 왕비는 그 동안 계속 불경을 읽으면서 현장법사의 도착을 기다렸다가 현장이 도착하자 만나서 이곳에 머물러 경법을 전해달라고 요구하였다 한다.
    그러나 현장은 인도를 갈 생각이 확고였기 때문에여 말리지 못하고, 대신 1개월 동안 경법을 전해주고, 인도에서 불경을 구해 돌아올 때 이곳에 3년 동안 머물러 줄 것을 부탁하면서 물, 식량 등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현장법사가 인도에 이르러 36개국을 돌면서 불경을 공부하고 15년 만에 불경을 구해 돌아왔을 때는 고창국왕 구문태는 죽고 그 아들이 있었으나 이미 당나라 지배하에 들어 있었다.
    현장법사는 약속대로 고창국에 머물면서 불경 번역과 불경을 고창 사람들에게 전했는데 그 때 현장법사가 머물던 사원 유적이 지금도 남아있다.
현장법사의 인도 여행로 요도
현장법사가 머물면서 불경 번역작업을 했다는 고창고성내의 사원 유적의 외부와 내부
2007년 6월 15일 실크로드 관광 때 촬영

    당(唐)나라 태종 때 현장법사가 불경을 구하기 위해 갖은 고난을 극복하고 인도로 여행한 사실은, 당나라 때에 이미 전설화(傳說化)되었는데, 그 후대에 이를 재미있게 꾸며 소설화 한 것이 서유기(西遊記)다.

    서유기(西遊記)의 성립과정을 보면
      - 남송(南宋) 때가 되자, 야담의 대본으로 보이는 짧고 소박한 이야기 성격을 지닌 《대당삼장취경시화(大唐三藏取經詩話)》가 나타나며, 손오공(孫悟空)이 후행자로, 사오정(沙悟淨)이 심사신(深沙神)으로서 등장한다.
      - 그 밖에 벽화·시·희곡 등에 전승된 단편적인 설화가 원(元)나라 말기에 거의 골격이 갖추어진 《서유기》가 되었다. 한국에 전해진 《박통사언해(朴通事諺解)》, 명나라의 백과전서 《영락대전(永樂大典)》 등에는 그 무렵의 단편이야기들이 실려 있다.
      - 이것이 오늘날과 같은 형태와 분량에 가깝게 된 것은 명나라 중엽에 완성된 《서유석니(액)전(西遊釋尼(厄)傳)》에 의해서다. 종래의 이야기를 집대성하고 대폭적으로 살을 붙였다고 하는 《석니전》 자체는 현존하고 있지 않고 편집자도 분명하지 않지만, 개요는 1592년 금릉(金陵)의 세덕당(世德堂)이 간행한 《서유기》 등에 전해졌으며, 여기서 《서유기》는 일단 완성을 보았다.
      - 그 뒤 청(淸)나라 때인 1662∼1722년에는 진사빈(陳士斌)이 논평한 《서유진전(西遊眞詮, 1696)》도 간행되었다.
      - 서유기의 저자가 명나라의 문인 오승은(吳承恩)이라고 하는 통설은 《회안부지(淮安府志)》의 기술 등에 근거한 것이지만, 성립과정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한 사람이 어느 시기에 다 쓴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쳐서 완성된 것이다.

    서유기의 내용 크게 나누어서 네 부분으로 구성된다.
      ① 손오공의 성장과정 이야기: 화과산(花果山) 선석(仙石)에서 태어난 오공은 변신하는 기술을 몸에 지니고, 근두운(1번 공중제비를 돌면 1만 8000리를 난다)을 타고, 여의봉(如意俸;일격에 상대방을 쓰러뜨릴 수 있다)을 무기삼아 천지를 어지럽힌다. 일단 천제(天帝)에게 붙잡힐 뻔했지만, 반도(蟠桃)를 걸신들린 듯이 먹고는 또다시 천궁을 어지럽히고, 천제쪽 신들과 싸움을 되풀이한다. 최후에는 여래(如來)의 다섯 손가락 밑에 눌리고 만다.
      ② 현장의 성장
      ③ 당태종(唐太宗)의 지옥순방
      ④ 인도로 가는 취경(取經: 불경을 구함)여행 등으로 이루어졌다.

    인도로 가는 취경여행 중에 삼장법사는 오행산(五行山) 밑에 있는 손오공(孫悟空)을 구출해 내고 인도로 가는 여행길에 나선다.
    도중에 백마가 된 용을 타고 다니며, 인간의 집에 사위로 들어가 있던 돼지의 괴물인 저팔계(猪八戒)를 종자(從者)로 삼고,
    다음은 유사하(流沙河)에서 강물에 빠진 사오정(沙悟淨)을 구해내 또 종자로 삼는다. 그래서 서유기에는 삼장법사,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이 등장한다.

    이리하여 일행은 구구팔십일난(九九八十一難: 81회의 고난)을 만나, 가지각색의 요괴와 싸운다. 금각(金角)·은각(銀角)을 표주박 속으로 빨아들이고, 나찰녀·우마왕으로부터 파초선(芭蕉扇)을 훔쳐내어 화염산의 불을 끄고, 무사히 서방의 낙토(樂土)에 이른다. 그리고 경문을 가지고 돌아온 일행은 그 공적으로 부처가 된다.

    이러한 내용의 서유기가 순수한 중국 사람들에 의한 창작물이 아니라 인도의 신화 「라마야나」이야기가 기원전 3세기부터 1세기경에 불경에 유입되었고, 불경에 유입된 「라마야나」의 한 유형이 중국에서 다시 서유기(西遊記)로 문화적 변용(變容)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 라마야나(Ramayana) >
    내가 정기 구독하는 인문잡지 안띠꾸스(ANTIQUUS) 15호(2007년 5-6월)에 「라마야나」특집이 게재되었다.
안띠꾸스 15호 표지

    특집은 I 라마야나의 가치와 영향, II 대서사시 『라마야나』 구조, III 그림과 사진으로 보는 『라마야나』, IV 동쪽으로 간 『라마야나』로 구성되었다.
    특집I에는 금강대 불교문화연구소 연구원 심재관씨의 글 「변형과 변신을 거듭하며 가장 멀리 가장 오래 살아남은 신화」라는 글이 실렸고,
    특집II에는 역시 심재관씨의 글 「힘과 정의와 사랑 사이를 줄타기하며 끝없이 영웅들을 창조해낸다」라는 글이 실렸고,
    특집III에는 심재관씨의 사진에 안따꾸스사 편집부의 글과 구성으로 「때로눈 원색으로 때로는 변신을 거듭하며 보는 이들의 영혼을 적시다」라는 제목으로 화보가 실렸고,
    특집IV에는 한국자치경영개발원 연구원 서규석씨의 글「동남아와 중국, 한국에까지 번져나가 힌두문화를 꽃피우다」라는 글이 실렸다.
    이들 네 편의 글과 화보 내용을 가지고 중국 실크로드 관광여행에서 듣고, 현장을 본 서유기의 뿌리라고 하는 「라마야나」에 관한 이야기를 엮어보려 한다.

    「라마야나」는 서사시(敍事詩)로 엮어진 신화인데, 기원전 500년경부터 서기 300년경에 이르는 수백 년 동안 인도에서 첨삭(添削)의 역사를 거듭하면서 창작되었고, 이 세상에서 가장 오래, 그리고 가장 널리 전파된 신화(神話)로 한편의 대서사시(大敍事詩)요, 인도 힌두문화의 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라마야나」는 한명의 천재시인이 창작한 것이 아니라 인도의 민중 속에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수백명 또는 그 이상의 음유시인들이 「라마야나」의 창작에 참여했고, 이들 음유시인들을 대표하는 상징적 저자 발미키(Valmiki)가 이들을 정리한 것을 지금 사람들은 읽고 있는 것이다.

    발미키가 정리한 「라마야나」는 모두 7권(kanda)으로 이들 시구를 합치면 모두 거의 2만개의 슐로카(Sloka: 聯)에 이르고, 이를 주석을 달아 한국어로 번역한다면 『태백산맥』이나 『토지』에 육박할 것이라 한다.
    이 방대한 서사시의 중심 이야기는 고대 인도의 전설적인 영웅 라마(Rama)의 모험담을 뼈대로 하고 있다. 「라마야나」는 이 라마(Rama)의 모험담을 진행시키면서 수없이 많은 기존 인도의 신화들과 전설들이 삽입된다.

    2000여년 이 흐르는 동안 「라마야나」는 지역에 따라 수많은 변형을 낳았고, 이들을 토대로 여러 장르의 문학과 예술 속에 다채롭게 각색되었기 때문에 동일한 내용의 「라마야나」일지라도 각 지방의 정서가 투영된 수많은 이본(異本)있다는 것을 이해해야만 인도의 각 지방과 동남아, 중국 등 이국(異國)에서 펼쳐지는 「라마야나」의 다양한 예술적 재현을 이해할 수 있다.

    인도에서는 「라마야나」가 구전되어 오다가 처음 산스크리트어로 기록되기 시작했는데 구전 상태에 따라 조금씩 달라 진본(眞本)과 위본(僞本)을 구별할 수가 없어 학자들은 산스크리트 「라마야나」의 편집하는데 노력을 경주하였다.
    지금 인도에서 통용되고 있는 「라마야나」의 교정본(Critical Edition)은 1960년 이후 15년간 바로다(Baroda)대학교동양연구소에서 출판된 것인데, 이 때 편집을 위해 수집한 산스크리트 「라마야나」의 이본들이 200여 종에 이르렀다고 한다.

    산스크리트 「라마야나」는 고대부터 인도인들의 정신세계를 이끌어가면서 인도 각 지역의 정서와 언어 감각에 맞게 각색되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북부지방에서 힌디어로 각색하여 널리 퍼진 툴시다스의 『람차리트므느스(Ramcaritmanas)』와 남부 케랄라주에서 타밀어로 각색한 『 이라마바타람(Iramavataram)』인데 이러한 각색은 지금도 계속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같은 「라마야나」일지라도 지방에 따라서는 이야기가 정 반대일 수도 있다. 발미키의 「라마야나」는 마왕 라바나가 사악한 존재인 반면, 남쪽에서 유행하는 「라마야나」에서는 라바나가 비극적인 영웅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라마야나」는 이렇게 지방에 따라 다른 판본이 등장할 뿐만 아니라 「라마야나」를 읽는 사람의 신분과 성별에 따라서도 다르게 읽히고 재해석된다. 라마의 왕권계승이나 하누만의 무용담은 남성들의 관심거리 지만 여성들에게는 시타의 탄생, 시타와 라마와의 결혼, 라바나의 시타 납치 등이 관심거리가 되고 있다
    그래서 「라마야나」의 큰 줄거리는 흡사하지만 어느 지역 어떤 계층에 의해 재현되는가에 따라 특정 일화가 강조되어 주된 줄거리가 되는 경우가 빈번하다..

    전해져 온 「라마야나」가 문학(詩)이라면 다른 예술의 장르에서도 「라마야나」가 나타난다. 즉 한 지방의 「라마야나」번안물은 그 지방의 무대에 올려지는 마당극이나 그림자인형극 같은 극예술의 시나리오가 된다. 인도 북부에서 공연되는 마당극 「라마릴라」 또는 「람릴라(Ramlila)」(‘라마의 놀이’라는 뜻)는 툴시다스의 『람차리트므느스(Ramcaritmanas)』를 토대로 하고 있다.

    문학과 극예술은 차이가 있다. 마당국이나 인형극에서는 특정한 몇 개의 에피소드를 강조하며 특히 등장인물 묘사가 풍자적이거나 과장 되는 경우가 많다.
    「라마야나」는 사원의 건축 속에서 거의 빠지지 않고 조각으로 등장하고, 그림자 인형극, 영화, 텔레비전 연속극, 어린이 장난감, 집안 외벽 장식(벽화), 집안 인테리어 소품, 가구 장식등에 까지 「라마야나」가 스며지 않는 곳이 없다.
연극으로 재연된「라마야나」의 한 장면
「빠릿」공연의 한 장면
인도 서북부 지방에서 행해지는 일종의 「라마야나」공연으로
모든 「라마야나」신화 이야기가 그려진 긴 천을 펼쳐놓고, 구연자(口演者)가 「라마야나」신화를 읊는 동안
등불을 든 보조자가 천에 그려진 구연자가 읊는 신화의 대목을 비춰준다.
샤트루그네슈와라 사원(위)과 「라마야나」조각(아래)
인도 오리사주(州) 부바네슈와르에 있는 샤트루그네슈와라 사원의 아래쪽 장식벽돌처럼
다섯 개의 「라마야나」장면이 조각되어있는데, 왼쪽으로부터
(1)발린의 반역으로 쫓겨난 원숭이 왕 수그리바가 라마에게 도움을 청하는 장면
(2)라마가 수그리바에게 왕위에 복귀시켜주겠다고 약속하는 장면
(3)라마가 수그리바와 함께 발리를 찾아가는 장면
(4)라마가 수그리바외 함께 서서 발린을 향해 활을 쏘는 장면
(5)수그리바의 적인 발리가 죽는 장면
카일라사나타 사원의 조각
인도 마하라슈트라주(州) 엘로라마을 16번 석굴사원 신정 계단부에 새겨진 「라마야나」장면.
원숭이부대의 전투장면과 바다를 건너기 위해 다리를 놓는 장면
스바르나잘레슈와라 사원북쪽 벽면 상단 조각 사진(위)와 부분사진3(아래)
왼쪽으로부터(1)마왕 라바나와 마술사 마리차의 계략을 알아차린 라마와 동생 락슈마나
(2)라마가 활을 쏘자 사슴으로 변했던 마술사 마리차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 온 장면
(3)황금사슴으로 변한 마술사의 꾐에 빠져 라마가 사슴을 쫓으며 숲속으로 들어가는 장면
아난타 바슈데바 사원의 라마와 락슈마나의 조각
세월의 풍파 속에 시달린 흔적이 역력하지만,
이들의 영웅담과 신화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다양한 형태로 살아 숨쉬고 있다.
인도 개인집의 「라마야나」그림 벽화 3점
< 발미키의 「라마야나」의 줄거리 >
    전 7권으로 된 발미키의 「라마야나」를 기준으로 하여 그 줄거리 이야기를 요약해서 그림과 함께 전개해 본다.

◆ 제1권 유년의 장(Bara-kanda)
    (요약) 유년의 장에서는 라마의 탄생 계기와 유년 시절의 모험담을 그리고 있다.

    옛날 인도의 아요디야 지역을 다스리던 다샤라타(Dasaratha) 라는 왕이 있었다. 그는 오랫동안 왕위를 계승할 아이가 없던 터라 하늘에 제사를 지내 아들을 얻고자 하였다.

    지상에서 다샤라타왕이 제사를 준비하는 하던 그 무렵 천상에서는 여러 신들이 마왕 라바나(Ravana)의 괴롭힘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마왕의 괴롭힘을 견디다 못한 신들은 힌두교 최고의 신인 비수뉴를 찾아가 인간으로 화하여 마왕 라바나를 물리쳐 달라고 부탁한다. 비슈누는 이에 동감하여 다샤라타의 아들로 태어나기로 결심한다.
가루다에 올라 탄 비슈누신(왼쪽)과 비슈누의 10대 화신의 하나 멧돼지 바라하(오른쪽)
왼쪽 사진의 가루디는 인도 신화에 나오는 상상의 큰 새.
비슈누신은 다샤라타왕의 아들라마로 변신한다. 그래서 라마는 비슈누신의 10개 화신 중의 하나다.
오른쪽 사진은 바하라가 물 속에서 대지의 여신을 끌어올리는 장면이다.

    제사가 끝나자 다샤라타의 부인들은 아들을 낳기 시작하는데,
    첫째 왕비 카우샬리아(Kausalya)라마(Rama)를 낳고,
    둘째 왕비 카이케이(Kaykey)바라타(Barata)를 낳고,
    셋째 왕비 스미트라(Sumitra)락슈마나(Laksmana)샤트루그나(Satrughna)를 낳는다.
    이들 왕자 중 맏형인 라마가 왕위을 계승하도록 하는데, 이 라마가 바로 비슈누신의 화신이다.

    「라마야나」 이야기는 라마에게 영웅적인 자질을 시험하는 몇 가지 시련을 주는데 그 하나가 ‘초인간적 힘’의 발휘다.
    유년시절 라마 형제들의 성자인 비슈와미트라(Visvamitra)가 궁으로 찾아와 왕에게 라마와 락슈마나(셋째 왕비 소생)를 빌려 줄 것을 청한다. 숲 속에 창궐하는 마귀들을 이들로 하여금 물리치게 하기 위해서였다.
    형제들의 도움으로 숲 속의 마귀들을 토벌한 성자는 이들에게 마법의 무기를 선사한다.

    이어 비데하국(國)의 자나카(Janaka)왕의 궁으로 데려가 자나카의 신비한 딸을 만나게 한다. 본래 자나카의 딸 시타(Sita)는 자나카 왕이 갈던 밭고랑에서 솟아나온 사람이라 하여 ‘시타(밭고랑)’이라 이름을 지었다.

    자나카왕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전설의 활을 꾸부릴 수 있는 자에게 딸 시타를 주겠노라고 약속을 하고 있었는데, 그 활은 오천 명의 크고 건장한 사내들이 힘겹게 끌고 온 여덟 개의 바퀴가 달린 철갑상자에 담겨져 있는 엄청나게 큰 것이었다.

    자니카왕은 성자 비슈와미트라와 라마를 향해 말했다.
    “모든 신들의 무리 아수라, 간다르바, 야차 중에서 내노라 하는 자들도 이 활을 구부릴 수 없었지. 활 줄을 걸지도, 시위를 당기지도, 심지어는 활을 들지도 못했지. 하물며 인간에게 그럴 만한 기회가 있을까?" 하였다.

    그 말을 들은 라마는 가볍게 활을 들어 활줄에다 화살을 걸었다. 그리고 활 시위를 당겼으나 너무 힘을 주었던 탓인지 그 거대한 활이 그만 두 동강 나고 말았다. 신들도 다루기 힘들었던 신비한 활을 라마는 순식간에 두 동강 내 버린 것이었다.

    그래서 인간의 몸을 빌지 않고 태어난 시타라마에게 넘겨졌으며, 라마의 아버지 다샤라타는 일들의 혼인식을 성대하게 치러주어 수년 동안 라마시타와 꿈 같은 나날을 보내게 된다.
라마와 시타의 결혼식 장면
가운데 불을 중심으로 저쪽에 라마(검은색 얼굴)와 시타(어머니가 부축)가 있고,
완쪽에 다른 세 형제들과 하객들이 식장으로 들어오고 있다.
오른쪽에는 라마의 아버지 다사라타왕(오른쪽 푸른색옷))과 시타의 아버지 자니카왕(왼쪽 붉은색옷)이 있다.

    그러나 라마에게는 영웅적 자질을 시험 받는 두 번째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에 요구하는 또 다른 영웅적 자질은 초인간적인 힘이 아니라 ‘정신적 평정’이었다.

◆ 제2권 아요디아 장(Ayodhya-kanda)
    (요약) 아요디아 장에서는 라마 왕자의 유배를 그리고 있다. 그의 유배는 둘째 왕비 카이케이의 시기심과 욕심에서 비롯된다.

    라마를 후계자로 결정한 늙은 왕 다샤라타는 왕좌를 물려주기 위해 즉위식을 준비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둘째 왕비 카이케이의 곱사등 몸종은 왕비에게 그녀의 아들 바라타가 왕위를 계승해야 한다고 부추긴다.

    오래 전에 다샤라타왕은 위기의 순간에 카이케이왕비가 자신을 구해준 보답으로 두 가지 소원을 반드시 들어주겠다고 맹세한 적이 있었다. 공교롭게도 그 때 다샤라타왕은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인 장남 라마의 이름으로 카이케이왕비에게 맹세했었다.
    몸종이 그 사실을 상기시키자 카이케이왕비는 지금이 그 소원을 말 할 수 있는 기화라고 생각하여 왕에게 그 때 일을 상기시키면서 단호하게 말했다.
    “오늘 나의 아들 바라타를 태자로 책봉하고, 아울러 라마가 오늘 바로 숲으로 떠나게 해 주세요”하였다.
    라마를 추방하고, 자신이 낳은 아들 바라타가 왕좌를 물려받게 해 달라고 왕에게 자신의 소원을 말 한 것이다.

    다샤라타왕은 디렘마에 빠진다. 지난날 카이케이 왕비에게 약속한 것을 지키려면 라마에게 왕권을 물려준다는 약속을 이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왕은 큰 번민에 빠진다.
    ‘카이케이를 만족시키자니 라마는 숲으로 사라져야 하고, 내가 맹세를 지키자니 또 다른 거짓을 저지르게 되는 구나. 세간의 내 평은 추락할 것이고, 불명예도 피할 수 없을 것이---’

    라마는 아버지 다샤라타가 약속을 지킬 수 있도록 스스로 왕궁을 떠날 결심을 한다.
    「라마야나」 저자는 아버지의 약속을 위해 ‘세속적인 왕권’의 욕망을 버리는 젊은 영웅 라마의 대범한 덕(德)을 칭송하려 했던 것이다.
    이런 라마를 따라 부인 시타와 셋째 왕비 소생의 동생 라슈마나가 그림자처럼 따라 나선다. 세 사람은 14년 동안 숲 속에서 유배생활을 함께 한다.
라마의 숲속 유배생활의 한 단면
숲속 유배생활 동안 라마, 시타, 라슈마나가 현자의 가르침을 받는다.

    한편 라마를 유배 보낸 뒤 슬픔에 잠긴 다샤라타왕은 자신이 젊었을 적에 저지른 업보를 첫째 왕비이며, 라마의 생모인 카우샬리아에게 그 사건을 말해준다.
    즉 옛날 다샤라타 왕이 사냥 도중에 실수로 어린 고행자를 죽게 한 적이 있는데, 그 고행자의 아버지가 저주하기를 “아들을 잃어버린 슬픔으로 죽게 되리라”는 예언이었다.
    다샤라타왕은 장남 라마를 잃은 슬픔이 너무 깊어 마침내 죽게 된다. 그 저주가 이루어진 것이다.

    한편 둘째 왕비 카이케이와 대신들은 그녀의 소생인 둘째 아들 바라타를 왕으로 옹립하려 한다. 그러나 바라타는 왕권이 맏형인 라마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며 여러 시종들과 함께 라마를 찾아 떠난다.
    그리하여 라마와 바라타 형제는 치트라쿠타(Citrakuta)산에서 만나 감격적인 포옹을 한다. 바라타는 눈물을 흘리며 자신과 자신의 어머니 카이케이를 책망하며 아버지의 죽음을 알린다.
라마와 바라타의 만남
바라타가 치트라쿠타산에 유배중인 라마를 찾아가 만나는 장면인데
라마가 친모인 카우살리아와 껴안고 인사하며, 부왕 다샤라타가 죽음을 전해 듣고 혼절한다.

    이제 라마가 왕권을 이어받을 시기가 온 것이다. 아버지의 죽음을 알고도 라마는 아버지와 둘째 어머니 카이케이가 맺은 약속을 지켜주기로 한다.
    그래서 라마는 숲 속에서 유배 기한인 14년을 채우기로 결심하고 왕궁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한다.

    아버지의 언약을 놓고 라마와 바라타 그리고 대신들과 왕실 사제 간의 해석이 분분하게 계속되지만 결국 라마는 왕궁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자기 희생과 세속적 상황의 초연함, 정신적 비범함이 또 다른 영웅의 자질로 묘사되는 장면이다.

    결국 동생 바라타는 라마의 이름으로 왕국을 통치하겠노라고 약속하고, 형 라마의 신발을 받아 돌아와 권좌 위에 왕의 상징으로 라마의 신발을 올려 놓는다.
바라타는 형 라마의 신발을 권좌 위에 올려놓는다.

◆ 제3권 숲 속의 장(Aranya-kanda)
    (요약) 숲 속의 장에서도 영웅의 고난은 계속된다. 여기서 영웅 라마는 사랑하는 사람 시타를 납치당한다.

    라마가 숲 속에 살면서 인육을 먹는 거인 비라다(Viradha)를 포함하여 여러 차례 마귀들과 싸워 살해한다. 그러던 중 마왕 라바나(Ravana)의 여동생인 마녀 슈르파나카(Surpanakha: ‘키 만한 손톱을 가진 자’라는 뜻)와 마주치게 되는데 그녀는 라마에게 마음을 빼앗기게 된다.

    그래서 라마에게 청혼하였으나 라마와 락슈마나는 그녀를 두고 농담을 한다. 라마
    "처자여! 나는 결혼했고, 또 내 부인을 사랑한다오. --- 여기 착한 내 동생 락슈마나가 있지. 미남이고, 결혼하지 않아 부인이 없으니 당신에게 관심을 보일 터이고, 정말 잘 생겼으니 당신의 아름다움에 걸 맞는 훌륭한 짝이 될 거요.” 하였다.

    이렇게 라마가 골치아픈 마녀의 청혼을 락슈마나에게 떠넘기자. 락슈마나는 마녀를 다시 라마에게 돌려보내면서
    ‘"차라리 라마에게 다시 가서 첩이 되겠다고 간청한다면, 지금의 부인 시타를 버리고 마녀만 사랑할 걸" 하면서 농담을 하였다.

    마녀는 이를 곧이 듣고 자신이 시타를 죽여버리겠다고 시타를 향해 덤벼든다. 그러지 이를 막기 위해 락슈마나는 마녀의 코와 귀를 잘라 모욕을 준 다음 쫓아버린다.
락슈마나가 마녀의 코와 귀를 벤다

    처참한 몰골이 된 슈르파나카는 막내 오빠인 카라(Khara)에게 복수를 부탁한다. 카라는 수 많은 괴물들을 이끌고 라마를 공격하지만 라마에게 살해당한다.
    슈르파나카는 다시 랑카(Lanka)섬의 지배자(마왕)로 있는 큰오빠 라바나(Ravana)에게 피신하면서 복수해 줄 것과 시타의 미색이 빼어나다는 사실도 알려주어 시타를 납치하도록 부추긴다.
연극「라마야나」에서 마왕 라바나의 분장
야외 마당극으로 재연된 「라마야나」에서 마왕 라바나
열 개의 머리와 열 개의 팔을 가진 괴물로 표현되고 있다.

    라바나는 하늘을 나는 황금마차를 타고 시타를 찾아간다. 먼저 라바나는 부하 마술사를 시켜 머리 둘 달린 황금을 숲으로 보내 시타를 현혹시킨다. 이를 본 시타라마에게 사슴을 잡아 줄 것을 요구하고, 라마는 사슴을 쫓는 동안 락슈마나에게 시타를 보호해달라고 부탁한다.
머리 둘 달린 황금사슴

    라마를 숲 속으로 따돌린 라바나 일당은 이번에는 락슈마나시타를 떼어 놓기 위해 숲 속에서 라마의 비명소리를 흉내 낸다. 라마의 비명소리를 들은 시타락슈마나에게 라마를 도와줄 것을 청한다.

    그러자 락슈마나는 형 라마의 말대로 계속 시타를 지켜야 할 것인가? 아니면 형수 시타의 말대로 라마를 도와야 할 것인가? 도대체 누구의 말에 따라야 옳은가?
    이런 경우는 「라마야나」속에서는 주인공들이 결정해야할 수 많은 디램마 중에 하나에 불과하다.

    결국 락슈마나라마를 구하러 가게 되고, 마왕 라바나는 홀로 남은 시타를 납치해서 하늘로 날아 오른다. 라마의 아버지 다샤라타왕의 친구였던 독수리 자타유(Jatayu)마왕 라바나시타 납치를 저지해 보지만 결과는 실패하고, 오히려 자타유마왕 라바나의 손에 죽고 만다.
황금사슴이 라마를 유인하는 사이 미왕 라바나는 시타를 납치한다
다샤라타왕의 친구였던 독수리 자타유
독수리 자타유마왕 라바나시타 납치를 저지하다가 라바나의 손에 죽는다.

    시타랑카섬으로 데리고 온 라바나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금은보화로 유혹하고, 감언이설로 시타의 환심을 사고자 하지만 라마에 대한 사랑과 신의가 굳은 시타는 결코 마을이 동요되지 않는다.
    시타를 설득하다가 지친 라바나는 열 두 달 안에 마음을 바꾸지 않으면 도륙한 다음 아침 식사로 먹어버리겠다고 최후통첩을 한다. 시타는 마귀들이 지키는 동굴에 감금된다.
마왕 라바나는 시타를 동굴에 감금

    한편 처소로 돌아 온 라마와 락슈마나는 시타를 찾아 나선다. 형제는 죽어가는 독수리 자타유를 만나 사건의 정황을 듣게 되지만 말을 끝내기도 전에 자타유는 숨을 거둔다. 형제는 무작정 시타를 찾아 나서 머리 없는 마귀 카반다(Khabandha)를 만나 저주를 풀어주고, 카반다는 그 보답으로 시타를 찾는데 도움을 중 원숭이 왕 수그리바(Sugriva)와 동맹을 맺도록 충고한다.

◆ 제4권 키슈킨다의 장(Kiskindha-kanda)
    (요약) 키슈킨다의 장에서부터 제6권 전투의 장까지는 라마가 어떻게 원숭이부대와 만나 연대하게 되었는가를 묘사하고 있다. 라마는 부인 시타를 납치당한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영웅은 평정과 연합, 그리고 뛰어난 지도력을 보여준다.

    카슈킨다는 남부 인도 산악지역의 이름으로 지금의 마이소르 북부지역 팜파강 발원 쪽으로 짐작된다.

    이 팜파 호수에 도착한 리마 왕자 형제는 주위의 아름다움에 매료되고, 원숭이의 왕 수그리바를 만나 우정이 싹트게 된다.
    라마가 수그리바의 적 발린(Valin)을 공격하는 일을 도와주는 대신 수그리바는 리마를 도와 시타를 되찾게 해 주겠다고 약속한다.

    발린이 거주하는 카슈킨다에서 수그리바와 발린은 전투를 벌리는데, 약속대로 리마는 위험에 빠진 수그리바를 구출한 뒤 발린을 살해함으로써 원숭이 집단의 왕권을 빼앗겼던 수그리바는 왕위를 회복하고, 발린의 아들 앙가다(Angada)를 후계자로 옹립한다.

    한편 수그리바의 부하 장수 가운데 유명한 하누만(Hanuman)이라는 원숭이가 있었다. 그는 바람의 신 바유(Vayu)의 아들이자 가장 현명하고 용맹스런 자였으므로 수그리바는 그에게 시타를 찾는 임무를 부여한다.
원숭이 장수 하누만(Hanuman)

    하누만은 앙가다 휘하의 병사들을 거느리고 남쪽으로 향한다. 이들은 숱한 모험을 겪게되고, 도중에 자타유의 형제 삼파티(Sampati)를 만난다. 삼파티는 자기도 자타유처럼 라바나와 싸우려고 했으나 날개가 타버려서 빈다야산에 머물고 수 밖에 없었다고 하였다.

    하지만 라바나시타를 어떻게 납치했으며, 랑카섬이 어디 쯤인지 설명해 주었다.
    하누만 일행은 삼파티의 말에 따라 랑카섬으로 향하지만 거대한 바다에 가로 막힌다. 그들은 회의를 열어 누가 멀리 뛰기를 가장 잘 하는지를 논의하여 하누만을 선발한다.

    그가 바람의 신 바유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하누만은 가장 높은 산 마헨드라(Mahendra) 정상으로 올락 바다를 건너 뛸 준비를 한다.

◆ 제5권 아름다움의 장(Sundara-kanda)
    (요약) 아름다움의 장에서는 원숭이왕 하누만의 모험이 그려진다. 이 모험에 그려진 하누만은 그 권능과 충직한 심성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인도에서는 라마에 버금가는 신으로 추앙되고 있다.

    라바나가 있는 랑카섬을 정찰하기 위해 마헨드라 산에서 바다를 건너기 위해 하늘로 뛰어오른 하누만은 나흘을 비행하여 바다를 건넌다.
    하늘을 나는 동안에도 하누만은 많은 모험과 경이로운 것을 체험한다. 이 때 묘사되는 하누만의 모험담은 마치 「서유기」에 나오는 손오공의 일화와 유사하다.

    한가지 일화를 보면 하루는 하누만이 사람의 그림자를 낚아채 생포하여 먹어 치우는 마녀 싱히카(Sinhika)를 만난다. 마녀가 하누만을 옭아매고 먹어치울려고 이빨로 물었을 때 하누만은 몸을 아주 작게 만들어 마녀의 입 속으로 들어간 다음 마녀의 내장을 잘라 마녀가 죽여버린다.

    하늘을 날아가는 동안 숱한 모험을 겪은 하누만은 마침내 랑카섬에 도착하여 조심스럽게 주변을 정찰 한 뒤 해질녘에 작은 고양이로 변신하여 마을로 들어간다.
    이어 마왕 라바나의 궁전 곳곳을 살피면서 라바나의 마차 푸슈파카(Puspaka)라바나 첩들의 처소를 누비며 시타를 찾는다.

    마침내 아소카 동산에서 비탄에 젖어있는 시타를 발견한 하누만라마의 친구라고 자신의 정체를 밝힌다.
    그러자 시타는 두 달 뒤면 라바나가 자신을 먹어치울 것이라며 그 안에 빠져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 제6권 전투의 장(Yuddha-kanda)
    (요약) 라마와 라바나 사이의 전투를 묘사한 부분으로 가장 긴 내용을 담는다.

    라마하누만이 무사히 정찰임무를 마치고 돌아 온 것을 기뻐하지만 곧 자신이 바다를 건너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절망에 빠진다.
    수그리바랑카섬까지 바다 위로 다리를 놓자고 제안한다. 하누만라바나가 있는 도시의 정확한 정보를 제시하고 라마는 출전에 맞추어 전열을 정비한다. 그리고 수많은 원숭이 부대가 바다를 향해 남쪽으로 향한다.
하누만의 랑카섬 정찰결과 보고 장면

    라마는 공예(工藝)의 신 비수바카르만의 아들이며 바다의 신인 날라(Nala)에게 바다에 다리를 놓을 수 있도록 도움을 청하고, 날라라마의 청을 받아들인다.

    라마의 명령에 따라 원숭이들은 바위와 나무들을 구해서 수일에 걸쳐 바다를 건널 다리를 완성한다. 마침내 모든 원숭이 부대가 랑카섬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라바나의 도시는 원숭이 부대에 의하여 포위되었고, 라바나와 그의 군대는 라마와 원숭이 부대에 대항한다. 양 진영은 장수들끼리의 결투도 이어진다.

    라마 진영의 장수로는 락슈마나하누만, 앙가다, 곰의 왕 잠바바트(Jambavat) 등이 있고, 라바나 진영의 장수로는 라바나의 아들 인드라지트(indrajit)가 있다. 인드라지트는 모든 종류의 마법에 달통해 있었고,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모습을 감출 수 있었다.

    라마락슈마나인드라지트와 싸우다가 치명적인 상처를 입자 곰왕 잡바바트의 말에 따라 하누만은 야밤을 틈타 약을 구하러 카일라사(Kailasa)산에 오른다.
    이 산에는 네 가지의 신성한 약초가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하누만은 급한 김에 산봉우리 전체를 뽑아서 전쟁터로 가져간다.
하누만이 약초가 숨겨진 산봉우리를 뽑아온다.

    부상당한 라마락슈마나하누만이 뽑아 온 산봉우리에서 뿜어 나오는 약초의 향기를 맡고 상처를 치료하자 하누만은 산봉우리를 제자리에 갖다 놓는다.

    라바나는 전장에 나와 수일간 낮과 밤에 걸쳐 라마와 대결을 벌인다. 이 때 신들이 등장하여 라마를 응원한다. 인드라신라마에게 자기 마차와 활을 선사한다. 그러나 라바나의 머리는 벨 때마다 다시 솟아나와 쉽사리 죽지 않는다.

    오랜 전투 끝에 라마는 부라마신이 만든 무기로 라바나의 심장을 뚫어 죽인다. 마귀의 잔당들은 패주하고, 원숭이 부대는 승리에 들뜨게 된다.
최후의 전투
라마가 쏜 화살에 라바나의 목이 떨어진다.

    라바나의 장례를 치른 뒤 라마라바나의 형제이며 선량한 마음씨를 가진 비비샤나를 랑카섬의 새로운 왕으로 옹립한다.
    드디어 라마시타를 구해내고 승리를 알린다. 그러나 라마는 모든 이가 보는 앞에서 시타를 거부한다.
    라마라바나에게 통한의 보복을 완수했음을 선언했지만 부인인 시타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잠시나마 다른 남자의 소유였던, 다른 남자의 정욕을 느꼈던 여자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시타라마의 의심에 놀라워하며 흐느낀다. 그리고 락슈마나에게 장작불을 피워달라고 부탁한 뒤 자신이 부정하다면 불에 타 죽을 것이요, 부정하지 않다면 불 속에서 살아 남을 것이라고 말한다.
    라마시타의 이 같은 무모한 행동을 묵인해버린다. 불 속에 뛰어든 시타아그나신이 받아 라마에게 넘겨준다. 시타의 순결이 입증된 것이다.
시타의 순결 입증

    라마하누만, 그리고 원숭이부대들은 이제 고향 아요디아로 돌아간다. 고향에서는 라마의 이복동생 바라타샤트루그나, 그리고 어머니들이 라마를 반갑게 맞이한다.
    백성들의 환호 속에 개선한 라마는 마침내 왕좌에 올라 오랜 세월 동안 태평성대를 누리게 된다.
라마의 즉위식

◆ 제7권 최후의 장(Uttara-kanda)
    (요약) 최후의 장에서는 시타에 대한 뒷이야기와 후대에 첨가된 신화들이 삽입된다. 라마시타에 관련된 부분은 일부에 지나지 않으며, 앞부분은 대체로 마귀들의 출생이나 인드라신라바나의 전투, 그리고 하누만의 성장기를 다룬다.
    그러나 이 장에서도 라마는 중요한 시련을 맞는다. 즉 시타와의 관계에서 라마는 다시 시련을 맞는데 이 이야기를 통해 고대 인도의 이상적인 군주상(君主像)을 보여주고 있다.


    라마시타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시간을 갖는다. 임신까지 하게 된 시타는 라마와 약속한 데로 숲속으로 소풍 갈 생각에 들 떠 있다.
    라마는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면서 불현듯 사람들이 자신과 부인 시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졌다. 친구들이 말하기를
    “너에 대해서 말들이 많더군. 좋은 것도 있고, 나쁜 것도 있어”하였다.
    라마는 더욱 궁금해 그 내용을 물었다. 그러자 친구들 입에서 이상한 소문의 말들이 흘러나왔다.
    “라마는 분명히 시타가 제공하는 성적인 쾌락에 맛들인 게 분명해.”
    “시타가 랑카섬에 납치되어 라바나의 무릎에 앉았던 것도 개의치 않는 걸 봐.”
    “그 모든 시간 동안 시타라바나의 지배 아래 있었잖아.”
    “어떻게 라마가 그런 시타를 다시 취할 수 있는 거지? “
    “지금부터 그런 행위는 나라의 법이 될게 아니겠어? 왕이 하는 건 사람들도 따라 하니까 말야.”


    이런 말들은 도시와 시골 할 것 없이 나라 안의 모든 곳에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 소문들의 저의는 ‘시타가 납치되어 있는 동안 라바나의 무릎 위에 앉은 적이 있는데도(이 말에는 매우 성적인 뜻이 내포됨) 라마가 다시 시타를 부인으로 받아들인 것을 인정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상적인 군주로서의 면모를 생각하니 라마는 백성들의 불만과 소문을 도외시 할 수 없었다. 깊은 고심 끝에 라마는 동생 이복 동생 락슈마나를 시켜 시타를 나라 밖으로 추방시킬 것을 명한다. 락슈마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형수 시타를 마차에 태워 갠지스강 건너편까지 배웅한다. 그리고는 이 모든 일이 백성들의 입을 통한 소문에서 비롯된 일임을 말해준다.

    큰 슬픔 속에 시타라마의 안녕을 빈다. 이 대목에서 시타는 사회적 문화적 가치에 투쟁하지 않고, 라마에게도 불평하지도 않는다. 시티는 남편이자 당대의 이상적인 군주인 라마의 결정을 순순히 받아들인다. 여기서 라마는 대중의 선(善)과 통합을 위해 개인적인 감정을 억누를 수 있는 이상적인 군주로 그려진다.

    * 시타에 대한 이 같은 일은 과거에도 여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라마야나」의 중요한 대목이었을 뿐만 아니라 시타와 라마의 관계는 현재도 패미니스트 비평가들이 「라마야나」를 읽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다.

    부인 시타가 순결을 증명하기 위해 장작불 속에 뛰어들어도 말리지 않거나, 어렵게 되찾은 부인 시타를 소문 때문에 다시 포기하는 라마의 판단은 당대 사회의 시선을 반영한 것이다.

    「라마야나」는 남성 중심의 이데올로기의 요소가 내포되어 있다. 특히 제6권 전투의 장과 제7권 최후의 장에서 시타는 대중 앞에서 자신의 순결을 증명해야 하는 대목은 남성의 여성에 대한 가부장적 권능을 대중의 의식 속에까지 각인 시키는 효과를 발휘한다.

    가련한 시타는 얼마 지니지 않아 숲 속에 있는 수행자이자 시인인 발미키 암자에서 쌍둥이 형제는 쿠사(Kusa)라바(Lava)를 낳는다.
    많은 세월이 흐른 뒤 두 아이는 자라나 발미키의 제자가 된다.

    그 즈음에 라마는 제사를 행하게 되는데 이를 위해 발미키는 두 제자와 함께 라마의 궁으로 온다. 발미키는 두 제자에게 자신이 지은 「라마야나」를 제사 의례에서 읊도록 한다.
    모든 청중들은 쌍둥이 형제 시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라마야나」이야기를 를 듣는다. 특히 왕 라마는 이 이야기가 바로 자신의 이야기며, 이를 노래하는 두 시인이 바로 자신과 시타의 아들임을 알게 된다.

    라마시타를 다시 그리워하며 자신에게 돌아오기를 기대하고 발미키를 찾아가 시타가 제사 의례에 참관한 많은 사람들 앞에서 다시 한 번 순결함을 선언할 수 있게끔 해달라고 부탁한다.
라마가 발미키를 찾아간다

    다음날 발미키시타를 대중 앞으로 데려와 시타의 순결함과 두 음유 시인이 라마의 자식임을 선언한다.
    라마는 다시 시타가 직접 자신의 순결을 선언하는 것을 듣고자 원한다. 하늘에서도 신들이 시타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내려온다.

    시타는 자신의 순결을 ‘공공의 장소’에서 선언하지만 라마가 원하는 내용은 아니었다. 시타는 외쳤다.
    “진정으로 나는 라마 외에 그 누구도 생각해본 적이 없으니 부디 대지의 여신이시여!
    그대의 자궁을 나에게 열어 주소서! 마음과 말과 행동 모두 오직 라마를 위한 것이었으니 부디 땅의 여신이시여!
    나에게 문을 열어 주소서!
    만일 내가 말한 바가 모두 진실이라면 라마 외에 그 어떤 남자도 내가 알지 못한 것이라면 땅의 여신이시여!
    부디 나에게 문을 열어 주소서!”


    시타의 이 말들이 떨어지자마자 땅이 갈라지더니 대지의 여신이 솟아나와 시타를 안은 채 사라져 버린다. 라마가 사랑했던 시타는 그렇게 해서 영원히 사라져 버린다.
땅의 여신이 시타를 안아주고 있다.
<「라마야나」의 동남아와 중국으로의 전파 >
    「라마야나」는 비록 인도에서 창작되었지만 「라마야나」이야기는 오래 전에 이미 인도의 시공(時空)을 넘어 중앙아시아와 동남아시아로 퍼져나가 문화적 자양분이 되었다. 「라마야나」는
      - 태국으로 건너가 『라마키엔(Ramakien)』이 되었고,
      - 캄보디아에서는 『라마케르티(Ramakerti)』로 탈바꿈 하였고,
      - 라오스에서는 『프라 락 프라 람(Phra Lak Phra Lam)』으로 변신했고,
      - 말레지아, 인도네시아, 미얀마, 더 북쪽으로 호탄부터 티베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라마야나」이본(異本)들이 나타나고,
      - 심지어는 『본생경(本生經, Jataka)』의 특성을 빌어 불경(佛經)에도 「라마야나」가 나타난다.

    「라마야나」가 먼 이국까지 전파되게 된 것은 이 신화가 가지는 정치적 역할 때문이었을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라오스의 「라마야나」『프라락프라람(Phra Lak Phra Lam)』는 라오스 건국신화를 함축하고 있는데, 혼인동맹을 통해 주변국가들을 병합한 것을 정당화 하는 것처럼 인도에서 산스크리트어「라마야나」를 받아들인 대부분의 동남아 군주들은 이 신화 속의 주인공 라마를 자신과 동일시 하면서 ‘왕이 곧 신의 화신’이란 생각을 주입시켜 자신의 왕권을 신성시하면서 강화하는 것이다.

    반대로 적국의 왕을 「라마야나」속의 마왕 라바나에 대비시킴으로써 적국을 정복하기 위한 전쟁을 정당화 시켰다.
    그러나 이런 생각들은 군주들의 「라마야나」해석일 뿐, 백성들은 동일한 「라마야나」에서도 그들 나름대로의 다른 해석을 한다.

    서기1세기부터 동남아는 인도에 ‘황금의 땅(수바르나부미)’으로 알려져 인도인들의 동남아 항해가 빈번해졌다. 인도의 상인, 승려, 여행가 등 다양한 인도인들이 동남아를 오가면서 동남아 토착사회는 그들 나름대로 힌두문명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동남아 지역에는 힌두-자바문명, 힌두-참파문명, 힌두-크메르문명이 그들 토착문화에 인도 문화가 가미되어 발전한 문명들이다.
    인도네이시아 자바섬에는 「라마야나」‘야바드위파’로 등장하고,

    1세기경 인도 출신의 바라문(브라만) 캬운디냐가 캄보디아 토착민 수장의 딸과 결혼하여 캄보디아 땅이 부남국(扶南國)을 세웠고, 서기192년에는 구련(區連)이란 왕이 지금의 캄보디아 중, 남부 참파(Champa)에 나라를 세우고 인도문명을 받아들였다.

    1세기경 인도문명이 동남아에 크게 유입된 이후 4세기에서 6세기까지는 2차로 동남아에 힌두문명의 물결이 몰려온다.
    서기367년에 천축(인도) 출신의 전단(?檀)이 부남국의 왕이 되고,
    베트남의 참파왕국에서 발견된 서기400년경의 산스크리트어 비문에는 법불(范佛)이라는 왕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데, 범(范)은 인도의 성씨로 인도인이 왕이 되었음을 말하며,
    베트남의 동두옹,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의 팔렘방, 쟈바, 셀레베스에서는 이 시기의 불상과 산스크리트어 비문들이 발견되었다.

    힌두문명의 동남아 유입의 다섯 가지 본질은
        (1)힌두교의 왕권개념
        (2)힌두교와 불교
        (3)고담(고담) 신화인 푸라나(Purana)
        (4)율법(법전)인 다르마샤스트라(Dharma-sastra)
        (5)산스크리트어 인데,

    (3)의 고담 신화에 속하는 「라마야나」, 「마하바라타」, 「하리밤사」등은 인도네시아, 마레이지아, 크메르, 태국, 라오스 등지에서 궁정서사시, 고전극, 그림자연극, 무용, 건축예술 등에 흡입되어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이웃나라 문학에 많은 변형을 낳게 하고, 새로운 사상이 생겨나는 원천이 되었다.

    특히 「라마야나」는 힌두왕국과 불교왕국에 고루 수용되어 그 나라들의 기층문화를 이루었으며, 중국을 거쳐 한국 건축예술에도 그 흔적을 남겼다.

    ◆ < 인도네시아 >
    인도와 지리적으로 가까워 인도인의 이주가 빈번했던 인도네시아에는 일찍부터 힌두교와 불교가 전파되었고, 수마트라 북쪽에는 힌두 왕국이 많이 생겨났다.
    「라마야나」의 번안작인 「라마야나-카카윈(Ramayana-Kakawin」는 족자카르타를 중심으로 하는 마타람왕국의 신독왕 말기(서기929-948년)에 시인 요기슈바라에 의해 고대 자바어로 편찬되었는데, 발미키의 원작이 2만 4000개의 슐로카(聯)인데 비해 이는 2,774개의 슐로카로 구성되고, 마지막 7장이 없다.

    그러나 서기850년 경에 건립된 족자카르타의 프람바난(Prambanan)사원「라마야나」부조가 조각되어 있는데, 「라마야나-카카윈」을 인용하여 프람바난(Prambanan)사원의 아름다움과 시타공주의 소재를 찾아 나서는 하누만을 그리고 있다.
    즉 프람바난(Prambanan)사원을 「라마야나」의 무대인 인도의 아요디아로 설정하고, 사원 성벽 너머를 상상 속의 랑카섬에 비유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인도네사아의 문학뿐만 아니라 무용극, 그림자연극, 발레, 영화 등 모든 예술 장르의 소재로 등장한다.

    그 대표적인 예술이 가면극 ‘와양 웡(Wayang wong)’인데 궁중무용극으로 소재는 「라마야나」와 자바 토착 영웅 이야기인 「라덴판지(Raden Panji)」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남녀 춤꾼이 참여하고, 대사는 나레이터와 코라스를 통해 전달된다. ‘와양 웡’궁중극인데 반해 ‘와양 포팽(Wayang Topeng)’는 거리나 시장 등 공공 장소에서 공연하여 대중의 감흥에 호소하는 민간 그림자극이다.
    또 서기1182-1185년에는 「라마야나」에 자극을 받아 카메슈바라왕과 장갈라공주의 혼인을 모델로 하여 만들어진 그림자극 「라덴판지」는 마치 「라마야나」라마왕자시타처럼 사랑과 이별, 재회과정을 거쳐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러브스토리인데, 서기1921년 태국의 왕자가 「판지 로망스」라는 이름으로 번안하기도 하였다.
인도네시아 자바에 있는 프람바난사원의 조각 일부
라마가 부라마신이 만든 무기로 마왕 라바나의 심장을 향해 활을 쏘고 있다.
인도네시아 「라마야나」그림자 인형극의 한 장면

    이런 것들로 보아 「라마야나」의 인도네시아 유입시기는 「라마야나-카카윈」보다 더 빠를 것으로 보고 있다. 또 발리섬에서는 산스크리스트어로 된 「라마야나」의 22개 슐로카가 발견되었는데, 빌미키의 「라마야나」서사시와 동일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 < 태국 >
    태국은 불교를 국교로 하고 있으나 국왕으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라마의 고난과 행동을 마땅히 배워야 하는 규범으로 여겨져 왔다. 서기1431년 아유타왕국이 크메르의 앙코르왕국을 침공하여 그곳에서 「라마키안」을 접하면서 이를 수용하여 문학뿐만 아니라 무용극과 가면극으로 각색하면서 태국에 「라마야나」가 유입되는 계기가 되었다.

    오늘날 태국의 「라마키안」은 18세기 이후에 만들어진 것인데, 남인도의 타밀어판 「라마야나」의 영향을 받아 불교사상인 윤회(輪廻)와 업(業)을 바탕으로 백성들에게 설화적인 지침을 제시하고자 차크리 왕조라마1세(서기1782-1809년 재위)가 직접 번안한 것이다.

    라마1세「라마야나」를 무용극(라콘)으로 각색하고, 라마2세는 가면극(콘)으로 각색하였는데 이로부터 노래와 무용이 곁들여진 「라마야나」가면극이 태국을 대표하는 예술로 자리잡았다.

    태국에서 국왕이 직접 「라마야나」를 번안한 배경에는 정치적인 배경이 있었다. 치앙마이 부근에 탁신왕국을 세웠던 프라야탁신을 처형하고, 차크리 왕조를 연 라마1세는 혼란한 초기 정국을 다스리기 위한 지침서로 「라마야나」를 번안하였다.
    서민 출신인 라마1세가 왕조의 정통성을 확보하는 차원에서 불교사원 왓 프라케우에 에메랄드불상(라마1세가 차크리장군으로 있을 때 1778년 탁신왕의 지시로 라오스를 공격하여 그곳에서 가져온 것임)을 봉안하는 대규모 행사를 치르고, 서기1785-86년에는「본생경」에 나오는「라마야나」이야기를 프레스코 벽화로 장식하였고, 서기1789년에 「라마키안」을 편찬하였다.

    라마1세가 편찬한 「라마키안」의 줄거리는
    세계의 중심인 수미산에 살던 프라 나라이는 멧돼지로 변하여 인간세계에 못된 행동을 일삼는 도깨비 히란약을 죽이고 지상을 평온하게 하였으며, 아유타 왕국의 톳사롯왕의 아들 프라람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내용이다.
    프라람과 아내 씨다, 프라람의 동생 프라락과 프라프롯, 원숭이신 하누만 등이 선(善)의 편이고, 도깨비왕 톳사칸과 피펙, 인트라칫 등이 악(惡)의 화신으로 나온다.

    이처럼 태국의 「라마키안」은 라마1세 자신이 이전 프라 탁신왕을 시해하고 왕이 된 것에 정당성을 얻으려는 의도가 숨어있다. 또 옛날 번영했던 아유타왕국을 재현하고, 업(業)과 윤회(輪廻)사상에 입각하여 시민들이 지켜야 할 의무와 도덕을 「라마키안」이란 종교적 옛 이야기를 통해 계도하려는데 목적이 있었다.
태국 「라마키안」공연의 한 장면
태국 나콘시탐마랏사원의 벽화
납치한 시타를 한 손으로 껴안은 채 독수리 자타유와 싸우는 마왕 라바나의 모습
    태국에서는 역대 왕들이 ‘라마’라는 이름을 애용해 왔다. 수코타이왕국 건국자 람캄행은 왕 이름을‘라마프라티쉬타’라 하였는데 이는 ‘강력한 라마’또는 ‘라마가 인정한 자’라는 뜻이다. 이로부터 각 왕조의 왕들은 그 이름에 ‘라마’라는 단어를 즐겨 썼다. 차크리왕조는 창시자 ‘라마1세’로부터 시작하여 ‘라마2세’, “라마3세’---- 로 이어와 현재 태국의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은 차크리왕조의‘라마9세’로 정치적 실권은 없지만 국민들의 절대적인 존경을 받고 있어 총리 등 실세 정치가들도 무시하지 못한다.
    또 옛날 강력했던 아유타왕국(크메르 앙코르왓 왕국을 침공)의 명칭 ‘아유타’도 인도 발미키「라마야나」라마 왕자의 왕도(王都)였던 ‘아요디아’에서 따 온 말이다.

    ◆ < 캄보디아 >
    캄보디아에서는 크메르판 「라마야나」「림케르(Reamker」라고 불린다.
    캄보디아 참파(Champa)에는 3세기부터 「라마야나」가 유입된 이후 라마와 라바나에 대한 조각 표현이 일상화되어 왔다.

    반테이 스레이사원(서기967-968년)에 조각된 부조는 원숭이왕국 왕 발리와 수그리바의 싸움, 시타를 납치한 라바나, 시바 신과 파르바티가 거주하는 히말라야를 뒤흔들고 있는 라바나 등이 조각되어 있고,

    바푸오나원(서기1050-1066년)에는 라마와 락슈마나, 라바나 형제들이 조각되어 있으며,

    앙코르 왓트사원(서기1113-1150년)에는 라마와 라바나 군대, 하누만이 이끄는 원숭이군단과 아수라 군단의 전투 장면이 50m에 달하는 벽면에 조각되어 있고, 제3회랑에는 라마왕자가 미틸라왕국의 자나카왕이 벌인 활쏘기대회에 나가 활을 쏘고 시타공주를 얻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북쪽회랑에는 1500년대 중반에 그린 크리슈나와 바나(원숭이왕 발리의 아들)의 싸움이 추가로 그려져 있다.

    푸놈펜왕궁에는 「라마야나」프레스코가 조각되어 이곳이 곧 세계의 중심인 「라마야나」의 아요디아를 상징하고 있다.

    서기1177-1781년까지 크메르와 참파가 벌린 전쟁기록 비문 중에는
    “참파왕 자야인드라발만은 득의 양양한 라바나처럼 자신의 군대로 전차를 이동시켰다”
    “라마와 시타의 아들 쿠사가 아요디아로 개선한 것처럼 역대 왕들이 승리를 얻고 앙코르 왕도로 귀환했다”
등의 표현이 들어있을 정도로 크메르에서는 「라마야나」가 널리 퍼져있다.

    ◆ < 말레이시아 >
    말레이시아에서는 「라마야나」「히카얏 스리 라마」로 불려지고 있다.
    서기1326년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트랭가누 비문에도 내용이 언급되어 있고, 서기1650년경 말레이반도남부 조호르에 위치한 술탄왕국의 「말레이연대기」(세자라 말라유)에도 기록되어있는데 말레이시아 「라마야나」는 인도네시아 자바의 힌두문화에 많이 영향을 받았으나 14세기부터는 이슬람 색채가 가미된 그림자연극 와양 쿨릿(Wayang Kulit)으로 대중화 하였다.

    ◆ < 라오스 >
    라오스의「라마야나」「프라 락 프라 람(Phra Lak Phra Lam)」이라 부른다.
    14세기 크메르왕국의 도움을 받아 라오스인이 최초로 건립한 란상(Lan Xang)왕국은 크메르 문물을 받아들였으나 라오스는 인종적으로 타이인과 같은 분파이고 언어도 비슷하여 라오스의「라마야나」태국에서 전승되어왔다.
    라오스에서는 라마왕자가 비슈누의 화신이 아니라 부처의 화신으로 각색된다.

    ◆ < 미얀마 >
    미얀마는 동남아 다른 나라에 비하여 늦게 여러 종류의 「라마야나」문학을 받아들였는데 17세기에 들어 온 「라마오투(Rama Watthu)」, 19세기 초의 「마하라마(Maha Rama)」 등 서너 종류가 있다.

    ◆ < 티벳트, 중국 >
    동남아 각국과 민족이 일찍이 「라마야나」문학을 궁정예술이나 연극과 시의 주제로 직접 받아들였으나, 불교를 신봉하는 티벳트나 중국 등 대륙 국가들은 부처의 전생 이야기인 육도집경(六度集經)이나 잡보장경(雜寶藏經) 같은 불경으로 해석되거나,
    당나라 때 현장법사가 인도에 가서 불경을 구해오는 과정을 소설화 한 서유기(西遊記) 를 통해 「라마야나」를 간접적으로 받아들였다.

    * 티벳트의 종교적, 정치적 지도자를 '달리이 라마'나 불교 수련승을 '라마승'이라 부르는 것도 「라마야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잡보장경」「십사왕(十奢王)」의 인연전(因緣傳)에는 시타마왕 라바나에게 납치되어 라마가 원숭이 하누만 등의 도움으로 받아 라바나를 죽이고 시타를 찾아오는 내용이 빠진 발미키 「라마야나」의 원형과 매우 흡사한 이야기가 실려있는데
    「라마야나」에서 라마라바나의 싸움은 「본생경」이나 「육도집경」에서 붓다마왕 파순(파라파피야스)이 벌이는 대결구조와 같고, 라마왕자가 활을 쏘아 시타공주를 얻는 대목은 싯달타 태자가 활을 쏘아 야소다라를 얻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또 다른 불경인「입릉가경(入楞伽經)」에는 라바나(羅婆那)야차왕(夜叉王)이 언급되어있고,
    「대장엄론」에는 「라마연서(羅摩延書)」「바라타서(婆羅他書)」가 등장하는데, 이것이 바로 「라마야나」「마하바라타」를 말하는 것이다.

    이처럼 「라마야나」가 불경에 유입된 시기는 기원전 3세기부터 1세기 무렵이다. 불교가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전해지면서 중국사람들과 우리는 불경을 통해서 「라마야나」의 한 유형을 접할 수 있었다.

    「라마야나」에서 랑카섬마왕 라바나라마왕자에게 죽임을 당하는데, 불경에서는 마라천자 또는 야차왕 라바나가 부처에게 항복하여 충실한 불자가 되며,
    「라마야나」에서 라마의 동생 바라타가 14년 뒤에 왕위를 기꺼이 라마에게 물려주어 형제간의 갈등이 없듯이 불경에서는 형제간의 갈등이 없다.

    중국에서는 「라마야나」「서유기(西遊記)」로 문화적 변신을 가져오는데, 현장법사가 인도를 다녀온 후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그 뼈대가 구성되는 「서유기」 는 원나라 때에 와서 지금과 같은 현장법사(삼장법사)와 의인화 된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 같은 인물이 활약하는 형태로 완성된다.

    「라마야나」에서 라마를 돕는데 충실한 하누만랑카섬을 공격하기 위해 다리를 놓고, 부상당한 라마를 살리기 위해 약초를 구해오는 등의 역할을 하는데, 서유기에서 손오공(孫悟空)화염산의 불을 끄기 위하여 우마왕으로부터 파초선을 훔쳐오는 등 하누만과 비슷한 조연 역할을 한다.

    ◆ < 우리나라 >
    우리나라에 「라마야나」가 직접 들어 온 흔적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으나, 금관가야의 시조 김수로왕이 인도 출신의 여인 허황후 황옥을 부인으로 받아들인 역사 기록으로 볼 때 그동안 없어졌거나, 찾지 못 할 뿐이지 「라마야나」가 유입 되었을 가능성은 다분히 있다.

    고려 말기(서기1347-1352년) 경에 만들어진 「박통사언해(朴通事諺解)」 (박씨 성을 가진 통역관이 쓴 중국어 학습서)에 「서유기」원형이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서유기」가 우리나라에 전해진 것은 고려 때인 것으로 추정된다.

    「박통사언해」에 어급된 「서유기」는 14세기 원나라에 유포되던 내용으로 중국의「서유기」는 일반 서민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문체로 되어 있다고 하였다. 예를 들면
    당삼장의 서유기를 사러가자 - (중략) - 당승이 서천을 향하여 경을 가질라 갈 제, 서유기는 우전즈런 하니 답답한 제 보기 됴흐니라”는 표현으로 우리나라 「서유기」의 초기 원형이 소개되고 있다.

    서유기의 내용이 우리나라 절에 조각된 대표적인 예는 서울 종로3가 탑골(파고다)공원에 있는 원각사 10층석탑이다. 원각사가 조선 세조 10년(서기1464년)에 중건되었으므로 박통사가 중국어 학습서에 기록한 이후 약 1세기 후에 「서유기」는 대중적으로 인기가 모아졌다고 짐작할 수 있다.
원각사 10층석탑의 「서유기」조각
< 결언 >
    「라마야나」는 살아 숨쉬는 신화이다. 「라마야나」는 가장 먼 지역까지 여행한 신화이며, 또 가장 오랫동안 살아 전해오는 신화이다.

    「라마야나」는 완전한 남성 라마와 완전한 여성 시타가 겪는 시련, 유혹, 인내, 의무를 그리고 있기 때문에 인간사의 희로애락이 담겨 있어 서민들이 공감할 수 있는 요소들을 많이 함유하고 있다.
    부모의 뜻을 받들고, 배우자를 선택하며, 부부끼리 갈등을 겪는 등 「라마야나」에 등장하는 각가지 시련은 인간이 살아가면서 겪을 수 있는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러기 때문에 「라마야나」는 인도의 신화지만, 시대와 문화권에 얽매이지 않고 오래 동안 그리고 널리 퍼져 나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