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하는 습관
沙月 李 盛 永(2005. 7. 1)
  친구 조성환이 전철문고 제2집 ‘메아리’를 냈는데 이 책에 실린 66개의 글들은 평소 자기가 느끼고, 생각한 바를 기록해 둔 ‘기록하는 습관’이 돋보이는 글들이다. 그 중에는 지금부터 37년 전인 1967년의 글도 있다. 또 ‘기록하는 습관’이란 글에는 두 가지 예를 들고 있다.

  하나는 1983년 KAL기 사건 때 비행기가 추락하는 동안에 한 일본인 승객이 당시 상황을 기록으로 남겼다는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조성환의 아들이 극심한 산고 끝에 밤 늦게 제왕절개수술로서 세상에 태어날 때 수술을 끝 낸 담당의사가 늦은 밤 지쳐 있을 그 시간에 지금 끝 낸 수술경과를 기록으로 남기기 위하여 녹음을 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나에게는 평소 기록하는 습관과 관련하여 두 가지 옛이야기가 떠오른다. 하나는 앞 이야기의 전자와 같이 한계상황에서 기록을 남긴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나의 선친에 관한 이야기다.

◆ 일본군 잠수함 개발 이야기
  일본은 태평양 전쟁을 개시하는 첫 기습공격으로 하와이 진주만을 공격했는데 이 때 주로 항공기를 사용했지만 10척의 잠수정도 사용했다고 한다.점수정이 모함에 실려 가까운 거리까지 가서 모선으로부터 분리, 발진하여 진주만에 정박한 미해군 전투함을 향해 돌진했는데 목표까지 이른 것은 한 척도 없고 모두 엉뚱한 곳에 들이받아서 만재했던 폭약의 폭발과 함께 승무원은 장렬하게 전사하였다고 한다.
  잠수정의 승무원은 단 1명, 그야말로 바다 속의 가미가제 특공대인 것이다. 비록 목적달성은 못했지만 그 희생정신을 높이 찬양하여 그들을 ‘십군신(十軍神)’으로 모셨는데 얼마 후 한 승무원이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왔기 때문에 그 명칭을 ‘구군신(九軍神)’으로 바꾸었다는 이야기를 육사 시절 전사시간에 들은 기억이 난다.

  내가 국과연에 근무할 때 함정장비 개발팀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이다. 태평양전쟁 말기에 일본은 제공권을 빼앗기면서 은밀병기로 잠수함 개발을 역점사업으로 추진하였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잠수함 시제품이 제작되어 수조(水槽)에서 각종 기술시험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성패를 판가름하는 실용시험을 위하여 넓은 바다로 나갔다.

  모든 기계 장치들을 최종적으로 점검하여 이상이 없음을 확인하고 제1차 수중잠수시험을 위하여 선수를 낮추고 서서히 아래로 내려갔다. 잠수하는 과정은 성공적이었다.목표하는 수심까지 내려가 일단 정지하고 모든 상황을 채크 하였다. 모든 것이 이상이 없다. 전 승무원과 탑승한 시험평가를 담당한 과학기술자들이 손뼉을 치며 환호하였고, 준비해 온 샴페인까지 터트렸다.

  제1차 잠수시험은 성공적이라고 판정하고 선채를 부상시키는 작동에 들어갔다. 그러나 선채는 부상하지 않고 오히려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하였다. 시제품에 장치된 모든 수단을 동원해도 헛수고였다.
  결국 잠수함 시제품은 깊이를 모르는 바다 밑바닥에 옆으로 기우뚱 하게 앉았다. 이제는 방법이 없다. 이 깊이에서 사람이 탈출하겠다고 해치를 열고 밖으로 나갔다가는 단 5초도 못 견디고 자동차 바퀴 밑에 깔린 성냥갑처럼 찌부러질 것이다, 당시 일본에는 이만한 깊이의 함정 선체를 인양할 장비도 없었다. 밖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이나 안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나 뭘 어떻게 할 아무것도 없는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다.

  침몰한 잠수함에는 그래도 침수가 없는 것이 천만 다행이었다. 그러나 구조의 손길은 기대할 데가 없었다. 더군다나 전쟁중이다. 혹시 미국이라면 그들은 이미 잠수함을 운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도 구조해 낼 수 있는 능력이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국은 나라의 존망을 걸어 놓고 싸우고 있는 적이다. 그들에게 극비에 속하는 ‘잠수함 개발’ 사실을 노출시키면서 구조를 청하는 것은 더더욱 할 수 없는 일이다.

  가라앉은 시제 잠수함에 탄 승무원과 과학기술자들의 생명은 언제가 될지 모르는 종말을 기다려야 하는 그야말로 한계상황이 되었다. 그 종말은 잠수함 내부 공간에 산소가 사람의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양 이하로 떨어졌을 때일 것이다. 얼마나 긴 시간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사람이 죽음에 임하는 것은 고통이다. 이 시간이 길수록 고통은 길고 크다.

  잠수함에 탄 승무원과 과학기술자 전원은 한 사람도 구조되지 못하고 잠수함과 함께 태평양 깊은 바다 밑에 잠들고 말았고, 잠수함 개발사업은 이로부터 한 발자국도 더 나가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전쟁은 끝났다. 일본은 패전국이 되었다. 일본 헌법은 영구히 군대를 갖지 못하도록 규정하였다. 그러나 전후 미국과 소련을 주축으로 하는 동서 양 진영으로 갈리는 이른바 ‘냉전시대’가 되는 바람에 일본은 이름만 군대가 아닌 군대와 똑 같은 막강한 소위 ‘자위대’를 갖게 되었다. 물론 해상자위대도 창설되었다. 도서국가로서 육상과 공중보다 더 우선적으로 창설하였다.

  한 때 미국의 해군력을 능가했던 일본. 그들은 곧 잠수함 개발을 다시 시작했다. 미국과 소련은 이미 핵잠수함을 건조하고 있을 때이다.
  잠수함개발을 다시 시작하면서 태평양 바다 밑에 가라 앉은 잠수함 시제품 인양을 제1과제로 설정했다. 이 과제가 성공한다면 잠수함 개발은 훨씬 앞당길 수 있기 때문이다. 또 그간의 해양기술 발전은 이것이 가능하였다.

  잠수함 시제품은 인양되었다. 잠수함 인양팀은 인양된 잠수함 속에서 여러 구의 시체를 확인하였다. 어느 좁고 작은 방에서 손에 서류를 꼭 쥐고 죽은 시체를 발견하였다.
  그 시체는 잠수함 시험평가를 책임진 수석 과학기술자(이름은 잊어버렸다)의 시체이고, 그가 손에 꼭 쥔 서류는 잠수함이 부상하지 못하고 아래로 가라앉기 시작한 그 시간부터 그가 더 이상 쓸 수 없을 때가지 쓴 실용시험평가 전반에 관한 내용과 잠수함이 부상하지 못하고 밑으로 가라 앉을 때의 모든 상황을 상세히 적고, 자기 나름대로 평가한 원인을 기록한 것들이었다.

  이 서류는 일본의 잠수함 개발에 크게 기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과학기술자정신의 귀감이 되어 과학자들 사이에는 신화처럼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이 사실 또한 ‘기록하는 습관’의 중요성을 웅변으로 설명해 주고 있다.

◆ 나의 선친의 기록하는 습관 이야기
  나의 선친은 일제 때 기미독립운동이 있기 3년 전인 1916년에 가난한 시골 농촌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동네에 서당이 있었지만 서당에 다니면서 한문 공부를 하지 못했고, 일본 사람들이 일본말로 가르치는 이른바 소학교도 22세 때인 1938년에야 창설되었기 때문에 다니지 못했다. 또 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었을 때는 이미 나이 28세로 사실상 여덟 식구의 가장이었기 때문에 가난한 살림을 꾸려가며 학교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라고는 전혀 없었다.

  그러나 한문도 옥편을 찾아가면서라도 고전들을 해득할 수 있었고, 면 일대 동갑계 때 한시 한 수씩 읊기도 하였다. 이 모두 주경야독(晝耕夜讀) 독학으로 공부하였다. 또 한자 글씨는 서당을 다니면서 글방 선생을 두고 한문을 익혔다는 사람들을 모두 제치고 어느 집 새집 지을 때 상량문이나, 매년 3월 3진날이면 집 대문이나 방문 앞에 써 붙이는 ‘立春大吉(입춘대길)’과 ‘建陽多慶(건양다경)’ 글씨를 수 십장씩 써야 했다. 우리 동네 뿐만 아니라 먼 동네에서도 아는 사람이면 써 달라고 오기 때문이다.

선친의 글씨 입춘대길과 건양다경

금난계(부항면 동갑계) 금석문(김천시 부항면 월곡리 소재)

  이 글씨도 오전에 일찍 나무 한짐 얼른 해다 놓고 서당으로 뛰어 가서 서당 친구들이 점심 먹으러 간 사이 다 쓴 신문지가 먹물로 새까맣게 되어 더 이상 글씨가 안 보일 때까지 쓰고 또 쓰면서 혼자 익힌 글씨다.
  물론 해방되고 한글도 독학으로 익혔다. 교과서 가지고 글을 배운 적이 없기 때문에 소리 나는 대로 적다 보니 철자법과 띄어쓰기가 틀리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사실을 기록하는 데는 조금도 어려움이 없었다.

  농한기에 한가하거나 비가 와서 농사일을 할 수 없을 때 대부분 동네 사람들이 사랑방에 모여 술을 마시거나 화투를 칠 때도 선친은 혼자 집에서 빌려 온 고전을 해독하느라고 옥편을 펴서 넘기거나, 먹을 갈아 필사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유품으로 남은 선친의 필사본 책은 典故大方(전고대방), 金陵郡誌(금릉군지), 古文眞寶(고문진보), 百禮祝輯(백례축집), 土亭寶訣(토정보결), 千字文(천자문), 童蒙先習(동몽선습), 先祖世系圖(선조세계도), 심지어는 동네 전답과 임야의 地番對照帳(지번대조장)도 있다.

  이 중 토정보결은 필사한 후 매년 정초면 온 동네 사람들의 일년 운수를 보아주느라고 하도 책장을 넘겨서 표지 글자를 알 수 없도록 퇴색되었다. 그리고 천자문과 동몽선습은 나에게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선친으로부터 천자문과 동몽선습을 배운 것이 한문공부의 전부다. 겨울 농한기(農閑期)에 아래채 가마솥에 소 죽을 끓이면서 난 방에서 큰 소리로 천자문이나 동몽선습을 읽으면 선친은 밖에서 듣고 틀린 것을 바로잡아 주거나 다음 구절을 가르쳐 주었다.

< 선친의 필사본 책들 >
천자문(1949년 2월 필사-64쪽)

동몽선습(1951년 1월 필사-14쪽)

토정보결(1955년 필사-74쪽)

전고대방(1957년 1월 필사-156쪽)

백례축집(1957년 11월 필사-48쪽)

지번대조(1967년 1월 필사-40쪽)

고문진보(1973년 5월 23일 필사-38쪽)

금릉군지(1975년 12월 필사-88쪽)

선조세계도(두루말이 길이 8.8m)

장자성영 결혼때 직접 쓴 납폐(納幣)

  선친의 글씨 연습이나 고전 필사 습관은 평생 동안 계속되었다. 1970년 5월 내가 월남에서 귀국할 때 중대 인사계가 귀국 박스를 못 채워서 몹시 고민한 것 같았다. 귀국하여 시골집에 도착한 후 빡스를 풀어보니 물건으로 채우지 못한 공간을 휴지로 채워서 엄청난 양의 휴지가 쏟아져 나왔다.

  월남서 군대에 지급된 휴지는 색갈이 카키색이고, 창호지에 버금갈 정도로 질겼었다. 당시는 내 생활 주변에 수세식 화장실이 없었으니까 이를 사용해볼 기회가 없었지만 아마 사용할 수 없을 것 같다. 요즈음 휴게소 화장실에 손 씻고 닦으라고 비치한 휴지를 수세식 변기에 쓰지 말라고 경고문이 붙은 것을 보면 말이다. 그보다 더 두껍고 질겼으니까---

  월남서 귀국 빡스에 담겨져 온 휴지는 두루말이가 아니고 크리낵스처럼 낱장으로 되어 있는데 곽에 들지 않고 그냥 포장되어 있었다. 수세식 화장실에는 쓸 수 없었겠지만 재래식 뒷간에는 아주 안성맞춤이었다.
  그러나 선친은 이 휴지들을 한 장도 새 것으로 뒷간에서 쓰지 않았다. 붓글씨 연습을 한 다음에 뒷간에 갖다 놓았다. 한지처럼 붓글씨 쓰는 데 참 좋았던 모양이다. 이를 안 후 언젠가 집사람이 문구사에 가서 화선지를 한 뭉치 사다가 시골 가는 길에 갖다 드렸지만 한 장도 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월남서 귀국한지 10년 후 1980년 선친이 별세하셨고, 돌아가신 후에 시골집 벽장을 정리하다 보니 그 때까지도 월남휴지가 꽤 많이 남아 있었다.

  선친의 기록하는 습관 이야기는 이와 같은 책 필사는 부수적인 이야기이고, 본격적인 것은 일상생활의 기록들이다. 1963년도부터 내가 육군사관학교 때 쓰다 남은 노-트에 선친 나름대로의 양식으로 가계부, 추수기록부, 금전차용기록부, 여행경비기록부, 선영석물입석비용기록부, 혼사경비기록부, 부기장(賻記帳: 부조금기록부) 등이 그것이다.

▶ 가계부 기록
  가계부 기록은 전형적인 금전출납부 양식으로 월별로 작성하였는데 일자(日字), 적요(摘要), 수입(收入), 지출(支出), 잔고(殘高), 사유(事由) 난을 두고 있다. < br>
  수입 중에 대부분은 차용금이다. 이 가계부와 다음 금전차용기록부를 읽어보면서 요즈음 카드 빚에 쪼들려 카드 돌려 막기를 연상하게 한다. 그 만큼 가정형편이 넉넉하지 못하고 어려웠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50-60년대 농촌 살림 특히 농사에만 의존하는 집은 너나 할 것 없이 비슷했다. 특히 학생을 많이 둔 집은 집에 잔돈푼이 남아 있을 때가 없었다. 6남매를 키우고, 공부시키다 보니 월사금, 책값, 교복 값 등등 수시로 가져가야 하는 학비 때문에 일요일이면 이웃집에 돈 빌리러 다니는 것이 예사였다. 우리집에서는 돈 빌리러 가는 일은 어머니가 거의 전담했었다.

  우리들은 그것도 모르고 제 때에 월사금(학비)을 가져가지 못할 때 불평하고 투정을 부렸었다.

가계부기록

가계부 기록 예1 [1963年度(년도) 1月(월)]
일자 摘要(적요) 收入(수입) 支出(지출 殘高(잔고) 事由(사유)
1 꼭감(곶감) 14접 8束(속) 2,760 2,760 渴溪 姜信九
2 꼭감(곶감) 釜山으로 送付(송부) 運賃(운임) 160 2,600 갈계 강신구
1962年度肥料外上(외상)都(도) 會計(회계)(班長) 2,200 400 鉉德(현덕) 給(급)
3 厠均(칙균)商店(상점)外上(외상)都(도) 會計(회계), 449원 內(내) 300 100 殘149원
大邱 孫書房(손서방)內外(내외)來家(래가)時 두부 4모 20 80 鉉祐(현우)
4 歲內(세내)簿 荷(부하)代金(대금)1,300원중1,100전용잔금 200 280
厠均店(칙균점)酒半升(주반승)及(급)墨筆(묵필)1개(愚喜來時) 15 265 (영옥) 給(급)
東億(동억)麥價(맥가)殘額(잔액)124원內(내) 100 365
미물(메밀)2升(승)及(급)煙草(연초)市場(시장)雜費(잡비) 200 165 市場(시장)
5 正永(정영)掌甲(장갑) 1足(족) 15 150 永玉給(영옥급)
狗肉代(구육대)半分(반분)(興均給) 215 -65 興均給(흥균급)
鉉鈿(현전) 臨時(임시) 立借金(입차금) 100 35
10 興均(흥균)簿荷(부하)資金(자금)返環(반환)立替金(입체금) 60 95 興均捧(흥균봉)
興均(흥균) 세메 半俵代(반표대) 80 15 興均給(흥균급)
正永(정영)蹴球(축구) 大會時(대회시) 20 -5 正永(정영)
파랑새 2匣(갑) 12 -17 仁均(인균)
물명태 2匹(필) 30 -47 永玉(영옥)
두부 2모 10 -57 鉉祐(현우)
18 金鳳九(김봉구)許(허)文鐘儀條(문종의조)借務金(차무금)회계 500 443 債務計(체무계)0,
借本人500
金鳳九(김봉구)許(허)借用金(차용금)合計(합계) 320 123
17 文在鍍妻氏(문제도처씨) 債務金(채무금) 2,000 2,123 臼(구)12월12일
金鳳九(김봉구)許(허)前者(전자)臼繰(구조)越金(월금)藥價(약가) 100 2,023 62년78월이전
18 金鳳九 以上(이상) 藥價(약가)總計(총계) 580내 430 1,593 150在
月谷(월곡)成藥局(성약국)許(허)臼藥代(구약대)殘(잔) 50 1,543 母特去給(모특거급)
月谷(월곡)成藥局(성약국) 人蔘(인삼)買入(매입) 50 1,493 母特去給(모특거급)
長川宅(장천택)借用金(차용금) 80 1,413
19 正永(정영)상하의(上下衣) 200 1,213 市場
正永(정영)下服(하복) 180 1,033
옷병차료비 200 833 治療所(치료소)
祭祀(제사) 魚物(어물) 130 703 市場(시장)
前日(전일)鉉鈿(현전)許(허)借用金(차용금)返濟(반제) 100 603 貞姬支給(정희지급)
20 食油(식유)짜는價(가) 58 548 月谷(월곡)
興均(흥균)蓋瓦代(개와대)組合利子(조합이자)(135원內100前者捧) 32 577 3원在(재)
石油(석유) 半升代(반승대) 14 563 貞姬支給
구리무(크림)1통 月谷(월곡)龍範(용범) 35 - 2월14일支
22 공책연필 13 550
石姬(석희)도화지 5 545
23 煙草(연초)10봉 60 485 仁均給(인균급)
協同組合(협동조합)外上(외상)計(계) 145 340 鳳基給(봉기급)
20 淑姬(숙희)下衣(하의)月谷(월곡)龍範(용범) 58 282 否員給(부원급)
23 肥料(비료)前年(전년)外上代(외상대)잔액(殘額) 56 226 鉉德給(현덕급)
秋穀(추곡)災害(재해)調査時(조사시)費(비)(부장비) 30 196
가래병(餠:가래떡)製成費(제성비) 50 146 四人組分(4인조분)
正永(정영)洋髮(양발)1足(족)代(대) 50 96 永玉家給(영옥가급)
祭(제)豚肉代(돈육대)3斤(근)(每斤34원) 102 96 2월9일 給(급)
28 盛永(성영)에게冊(책)4券(권)付送(부송)小包代(소포대) 30 66 郵遞夫(우체부)
30 正永(정영)登校(등교)車費(차비) 66 0
月谷(월곡)金學永(김학영)問喪(문상)賻助金(부조금) 30 -30
金鳳九(김봉구)借入金(차입금) 50 20 2월9일 返(반)
사과 4介(개) 10 10
金鳳九家(김봉구가)沃度(옥도)정기1甁(병) 5 5 母支給(모지급)
正永(정영)洋髮(양발)1足 (現金50원給30外上) (30) 5 母支給(모지급)
毛山宅(모산택)臨時(임시)借入金(차입금) 100 105 2월9일 給(급)
正永(정영)上記(상기)洋髮代(양발대)現金條(현금조) 50 55
家庭用(가정용)잡비(雜費) 55 0
卒業生(졸업생)記念品代(기념품대)石姬(석희)先生(선생)給(급) 15 -15 石姬支給(석희급)



▶ 금전차용 기록(縱書)
    금전차용기록은 언 듯 보면 차용증서 같이 보인다. 차용한 사실과 약속한 이자율과 반제 할 기한을 명확하게 쓰고 있다. 이어서 반제 한 사실을 언제 어떻게 돈을 마련하여 그리고 원리금 합계 얼마를 갚았으며 갚을 때 상황 즉 누가 누구에게 주었는지를 명확히 쓰고있다. 또 반제 한 건에 대해서는 크게 두 줄 X표로 삭선하였다.

    금전 뿐만 아니라 벼로 차용하는 수도 있었다. 농촌에서 벼는 쉽게 환전이 가능하기 때문에 돈을 구할 수 없을 때는 곡식에 여유가 있는 집에서 벼를 차용하여 환전하여 사용하였다.
금전차용기록

(금전차용 기록 예1) 64陽(양)十二月二十八日陰(음)十一月二五日 李德有(이덕유) 許(허)
  一金(일금)五仟(오천)원整
  右金(우금)을 正(정)히 借用(차용)한 바 利子(이자) 月(월) 五厘(오리)로 爲定(위정) 返濟期日(반제기일)은 請求(청구)할 時(시)로함 (点出壹萬원條返濟)
  陰(음) 六月(유월) 十七日(십칠일) 豚兒(돈아:돼지새끼) 賣代(매대:판돈)로 返濟(반제)하였음 元利合(원리합) 六個月分(육개월분) 六仟五百(육천오백)원으로 會計(회계)하였음
  本人(본인) 支出(지출) 及(급) 契約書(계약서) 차자옴

  (벼 차용기록 예2) 65陽(양)一月二十日陰(음)十二月십팔日 李鉉祥(이현상)
  正租(정조) 十斗(십두)也(야)
  右租(우조)을 正(정)히 借用(차용)한 바 利子(이자) 長利(장리)로 하고 返濟期日(반제기일)은 秋收(추수) 後(후)로 定(정)함 (每斤 十五원二拾錢式 日用外上金)陰(음) 十一月(십일월) 五日(오일) 元利合(원리합) 一百五十斤(일백오십근)을 返濟(반제)하였음 나부리宅(택)이가 持參(지참)

▶ 추수기록
  추수기록은 건넌들논(越坪沓 월평답: 하답 3마지기), 방내논(坊川沓 방천답: 2마지기), 쇠목논(金項沓 금항답: 상답 7마지기, 다른 한자어 牛項沓) 별로 소출(所出)을 수입으로 잡고, 연간 사용계획을 지출로 잡아서 기록하고 있는데 지출계획 기록중에 흥미로운 것이 몇 가지가 있다.
  성주도(城主稻)는 우리나라 고대 단군조선시대부터 내려온다고 전해지는 부루단지 사상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2대 단군 부루께서 백성들에게 벼 농사법을 가르치고 장려해서 우리민족이 농경민족으로 자리잡아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하며, 백성들은 부루단군에게 고마움을 표하는 뜻에서 가장 충실한 벼를 골라 단지에 넣고, 큰방(내실) 웃목이나 아래목 코너 약 0.6-1m 높이에 3각 실겅을 만들어 단지를 올려 놓고 집안에 좋은 일이 있으면 할머니들은 이 부루단지 앞에서 감사함을 표하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는 잘 해결될 것을 이 부루단지 앞에서 빌기도 하는 업신으로 삼았다.
  부루단지에 담은 벼는 이듬해 새 벼가 추수되면 치환된다. 그러고 보면 이는 최악의 경우를 대비한 비상미 역할도 하는 것이었다.
  里長料(이장료)는 동네 이장에게 집집이 거출하여 주는 것으로서 당시 이장은 무보수 봉사직으로 할 일은 많고 자기 농사일에 많은 지장을 주기 때문에 서로 하지 않을려고 하기 때문에 약간의 벼를 거출하여 보상하는 것이었다.
  理髮料(이발료)는 동네 이발 경험이 있는 나이 많은 사람이 운용하는 간이 이발소에 1년 내내 이발을 하고, 가을 추수 후에 한 말 정도의 벼를 냈다.
  또 잡비에 들어있는 ‘질나가시’는 길감독 즉 신작로(비포장 좁은 도로)를 순찰하며 붕괴된 곳을 보수하는 사람에게 보수조로 주는 돈을 말하는 일본식 말이다. 이장이 적당량을 모아서 준다. '숙부분' 또는 '숙부도조'는 방내 논 중에 종숙부 명의가 1마지기 있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소작료를 '숙부도조'라고 하였다.
  셀러리맨의 가계부에서 봉급이 곧 수입이 되듯이 별다른 부업이 없는 농가에서는 추수한 벼가 곧 일년간 지출을 담보해 주는 수입원인 것이다
추수기록부




(예1) 1963年度(년도) 産(산) 秋穀(추곡) 生産記(생산기)
摘要(적요) 收入(수입)/
支出(지출
殘量(잔량) 備考(비고)
越坪沓(월평답: 건넌들논) 108 斗(두) 108 斗(두) 上두지(윗뒤주)
方內沓(방내답: 방내논) 52 斗(두) 160 斗(두)
金項沓(금항답: 쇠목논) 152 斗(두) 312 斗(두)
計(계) 312 斗(두)
초련 10 斗(두) 302 斗(두)
차나락 10 斗(두) 292 斗(두)
種稻(종도: 씨나락) 10 斗(두) 282 斗(두)
叔父分(숙부분) 12 斗(두) 270 斗(두
성주稻(도) 6 斗(두) 264 斗(두)
上(상)두지(뒤주)入(입) 108 斗(두) 156 斗(두)
食糧分(식량분) 50 斗(두) 106 斗(두)
電氣料(전기료) 2 斗(두) 104 斗(두)
里長料(이장료) 1 斗(두) 103 斗(두)
理髮料(이발료) 2 斗(두) 101 斗(두)
雜費(잡비:질나가시,洞垈料) 1 斗(두) 100 斗(두)
祭需用(제수용) 5 斗(두) 95 斗(두)
肥料外上代(비료외상대) 急(급) 貸與穀(대여곡) 40 斗(두) 55 斗(두)
金巡警(김순경) 6 斗(두 49 斗(두)
糧食分(양식분) 16 斗(두) 33 斗(두)
糧食分(양식분) 16 斗(두) 17 斗(두)

  # 金巡警(김순경)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추수 후에 벼로 갚겠다는 약속으로 현금을 빌린 것 같다. 동네에서 학교 교사나 지서 순경을 봉급을 받는 직업이기 때문에 집에 큰 돈은 없어도 약간의 돈은 늘 있기 때문에 급하면 빌리러 가는 경우가 많았다.
  또 이들은 어차피 쌀을 사 먹어야 하기 때문에 먼 시장에 가는 것 보다 농민들에게서 구하는 것이 농촌의 후한 인심을 고려하면 훨씬 이득이었다.

(예 2) 1964年度 租(조:벼) 收入記(수입기)
摘要(적요) 收入(수입) 支出(지출) 殘量(잔량) 備考(비고)
越坪(월평:건넌들)3斗只(3두지: 서마지기) 110斗(두) 110斗(두) 上庫入(상고입)
種稻(종도)1 口入(입:가마니) 6 斗(두) 104 斗(두)
城主稻(성주도)1 口入(입:가마니) 6 斗(두) 98 斗(두)
食糧(식량) 18 斗(두) 80 斗(두)
食糧(식량) 20 斗(두) 60 斗(두)
賣却(매각) 15 斗(두) 45 斗(두)
金項(금항:쇠목) 5斗只(5두지:닷마지기) 128 斗(두) 128 斗(두)
防內(방내) 2斗只(2두지:두마지기) 54 斗(두) 182 斗(두)
永均(영균) 1日 貨金(화금:짐 진 품) 1 斗(두) 181 斗(두)
食糧稻(식량도) 10 斗(두) 171 斗(두)
叔父(숙부) 賭租(도조) 13 斗(두) 158 斗(두)
食糧稻(식량도) 24 斗(두) 136 斗(두)
農地稅(농지세) 3 口入(입) 15 斗(두) 121 斗(두)
換買(환매) 1 口入(입) 5 斗(두) 116 斗(두)
理髮料(이발료) 20斤(근) 1 斗(두) 115 斗(두)
知禮(지례) 基永(기영) 550斤(근) 30 斗(두) 85 斗(두)
食糧(식량) 25 斗(두) 60 斗(두)
私家中分(사가중분) 25 斗(두) 35 斗(두)
鐘均(종균)賣却(매각) 6 斗(두) 29 斗(두)
食糧(식량) 29 斗(두) 0

▶여행경비기록(縱書)
  농촌에서 여행이란 계를 모아서 농한기에 동네사람들이 함께 설악산이나 제주도 등 관광지에 가거나 회갑 등에 객지에 나간 자식들이 돈을 모아 관광을 보내주는 이른바 ‘효도관광’인데 선친이 기록하고 있는 제주도 관광도 모친 회갑을 기해서 2박3일간 제주도에 보내드린 효도관광이었다.

여행경비기록과 만장굴 사진

(예1) 一九八0年陰(음)二月二十日 濟州島旅行費記(제주도여행비기)
摘要(적요) 收入(수입)/支出(지출)
收入(수입)
서울서 一同(일동:성영,정영,무영,정희,석희) 二拾萬(이십만)원
南室(남실:장녀) 二萬(이만)원
辛源國(신원국:처남) 一萬(일만)원
辛花玉(신화옥:지례 처제) 一萬(일만)원
大邱(대구) 南君(남군) 妹(매:누이동생) 五仟(오천)원
大邱(대구) 南君(남군:사위) 內外(내외) 春秋服(춘추복) 各(각)一攝(일섭)
計(계) 二拾四萬五仟(이십사만오천)원
支出(지출)
大邱(대구)서 濟州(제주) 왕복 飛行機費(비행기비) 拾三萬(십삼만)원
洋靴(양화: 신사화구두) 一足(일족) 一萬六仟(일만육천)원
二泊三日(이박삼일) 雜費(잡비) 三萬(삼만)원
計(계 拾七萬六仟(십칠만육천)원
殘額(잔액) 六萬九仟(육만구천)원

  # 收入 計(수입계)에 支出 計(지출계)를 除(제)하니 殘額(잔액) 六萬九仟(육만구천)원인데
  家用 雜費(가용잡비)로 入(입)이라.

▶여행기록(縱書)
濟州道觀光旅行記(제주도관광여행기)

                                自大邱飛行場(자대구비행장) 至濟州島(지제주도) 50분
                                濟州島市 大成莊 留宿 (제주도시 대성장 유숙)
                                龍頭岩 海邊(용두암 해변)
                                抗蒙土성(항몽토성) 三別抄亂(삼별초난) 抗蒙軍 築城(항몽군 축성)
                                抗蒙殉義碑(항몽군 축성) 朴大統領創設(박대통령창설)
                                三防山藥水屈(삼방산약수굴)(부처 - 乘馬場)
                                挾才屈(협재굴) 長(장) 約百(약백)메타
                                天帝淵瀑布(천제연폭포) 一層(일층), 二層(이층), 三層(삼층)
                                泰和食堂 午食(태화식당 오식)
                                蜜柑團地(밀감단지)
                                虎城(호성) 虎頭(호두) 도중(島中)
                                할미바위(할아비바위 - 애기바위 - 총각신부바위)
                                天池淵瀑布(천지연폭포) 一層(일층), 二層(이층)에는 深沼(심소)
                                西歸浦富貴莊留宿(서귀포부귀장유숙)
                                海女業場(해녀업장)
                                漢拏山五一六橫斷道路(한라산오일육횡단도로) 五一六記念(오일육기념)으로 道路修工(도로수공)
                                漢拏山 頂上 雪景(한라산 정상 설경) 休게所(휴게소)
                                漢拏山牧場(한라산목장) 해수욕탕(해수욕탕)
                                耽羅木石苑(탐라목석원) 갑도리와 갑순이
                                萬丈屈(만장굴) 神龜(식구)까지육백m 石柱(석주)까지 四百(400)m 合一千(합1,000)m)
                                      長(장)=一千(1,000)m 高(고)=10m 橫(횡)10m 神龜촬영代(신구촬영대) 1,500원)
                                三姓穴(삼성혈)=高梁夫(고량부) 藥水井(약수정)
                                東京食堂午食(동경식당오식)
                                午后四時飛行機乘車(오후사시비행기승차)

▶ 묘지 석물 입석기록
  선친은 1980년도에 별세하였다. 아마 스스로의 명을 짐작했는지 1년전인 1979년도는 많은 일을 하셨다. 모친 회갑이었기는 하지만 위 제주도 여행도 하였고, 족보 발간에 지례(知禮)지역 담당 도청(都廳)으로 추천되어 훌륭히 해 냈다.

  또 고조(高祖)까지 묘에 상석9좌(座)를 놓았다. 자식이 셋이나 있지만 모두 객지에 나가 있어 고향이라고는 명절에 잠깐 얼굴만 보이니 선친께서 세상을 떠나면 선조들의 산소를 실묘(失墓) 할 까봐 몹시 걱정되었던 모양이다. 석물이래야 호화분묘와는 거리가 멀다. 상석 하나에 앞 면에 누구의 묘라는 것을 새기고, 왼쪽 옆에 그 자손들의 이름을 작은 글씨로 새긴 것이 전부다.
묘지석물입석기록

1979年 潤(윤)六月30日字(자)石物(석물)立石時(입석시)用金記(용금기)(단위: 원)
摘要(적요) 支出(지출)
石物(석물) 九座(구좌)[單價(단가) 40,000] 360,000
運搬時(운반시)-刻字人(각자인), 運搬手(운반수) 酒代(주대), 午食代(오식대), 積載人(적재인) 下載時(하재시) 酒代(주대) 及(급) 雜費(잡비) 20,000
장거리 15,000
담배-청자5匣(갑), 청자2匣(갑), 八永出金(팔영출금) 7,000
酒代(주대)-12斗(두), 酒(주) 3斗(두),代(대), 八永出金(팔영출금) 18,000
運貨(운화)-人夫(인부)八名(팔명) 2日分 [1日5,000式] 80,000
豚(돈;돼지) 1首(수) 及(급) 白米(백미)雜費(잡비)은 不入計(불입계: 계산에 넣지 않음) ?
以上(이상)計(계) 500,000

  誠入金記(성입금기)(단위: 원)
摘要(적요) 支出(지출)
盛永(성영) 100,000
正永(정영)-豚肉(돈육)1斤(근) 及(급) 반찬 100,000
南銑(남선)-牛肉(우육)2斤(근) 及(급) 海物(해물) 50,000
鉉穆(현목) 10,000
朴利在(박이재) 2,000
金用俊(김용준) 3,000
李成基(이성기) 2,000
鉉瑾(현근)-白米(백미)1斗(두) 80,000
計(계) 347,000

  # 無賃出役(무임출역): 鉉杓(현표), 鉉鈿(현전), 厠均(칙균), 志均(지균), 東億(동억),源國(원국), 源太(원태), 又洙(또수), 孟和(맹화), 致俊(치준), 三達(삼달)


▶ 혼사비용기록
  선친은 3남 3녀로 모두 6남매를 두었다. 선친께서 하세할 때까지 막내 아들 하나만 혼사를 못 치루고 2남 3녀를 혼인시켰다. 그러니까 다섯 자식의 혼사비용과 부조기록을 손수 정리하여 기록해 두었다.

  특히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혼사비용기록 마지막에 그 당시의 쌀값 또는 벼값을 기록해 둔 것이었다. 쌀은 1되에 얼마, 벼는 1근에 얼마로 기록해 두었다.세월이 40여년 흐른 지금도 그 비용이 지금으로 하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있는 기록이다.
  먼 훗날 자식들에게 그 어려운 시절 키우고, 학교 보내고, 시집장가 보내느라고 얼마나 등골이 휘었는지 생각해보라는 멧세지가 함께 담겨져 있는 것 같다.

혼사비용기록
一九七0年十一月記(기) 正永(정영)時(시)婚費(혼비)
摘要(적요) 支出(지출) 摘要(적요) 支出(지출)
양단치마저고리 3,450 신부코-더(코트) 8,000
빤작 “ 3,300 廣木(광목) 1통 2,600
춘추 “ 2,400 속해(솜) 1장 100
하복지 “ 1,200 納幣時(납폐시)路費(로비)太郞(대랑) 500
웃티 “ 1,050 豚(돈:돼지)1首(수)代(대) 13,000
안감 400 적(부침이)거리, 잡채거리 5,600
바지저고리 1,600 素麵(소면)1箱(상) 1,600
안감 700 海魚物(해어물), 사과, 신 1,800
옥양목-10마 700 담배1보, 신탄진3갑 630
두루막 540 장가길時(시)正永(정영) 5,000
“ 안 250 내(선친) 여비 200
화장품 3,000 新行(신행)下人(하인)路費(로비) 1,200
가방 350 再行時(재행시)正永(정영) 1,000
잠옷 450 감주(甘州) 이수기(李壽奇)路費(로비) 200
쪼기(조끼) 450 담배1보루 450
시마비 3명 240 담배 신탄진7갑 420
“ 10명 670 正永 (정영)서울行(행)旅費(여비) 3,000
처마(치마)저고리 안감 400 婦(부)의 코-더 製貨(제화) 5,000
금반지 3돈 9,300 鉉允(현윤)신행時(시)下人(하인)車費(차비) 及(급) 荷費(하비) 500
혼수짐바(끈) 7마 140 婦(부)쑥처마(쑥색치마) 300
신 1족 130
혼수次(차)大邱(대구)路費(로비) 600 支出總計(지출총계) 118,070원


  # 혼사부조금 숙모(叔母)2,000원 등 72인 계43,800원 현금과 신원국(辛源國) 떡1箱(상) 등 24인의 현물부조(세부내역 생략)

▶ 부기장
  내가 육사에서 쓰던 노-트에서 남은 낱장을 모아 책을 매고 1964년부터 1980년 간에 있었던 막내를 제외한 2남3녀의 혼사와 부 그리고 모의 회갑 수연 부조금과 물목을 기록하였다. 식장에 비치하여 내빈이 직접 기록하거나 접수인이 기록한 것이 아니라 선친이 직접 확인하고 정리하여 기록한 것이다.




부기장

  (1) 1964년 (음) 9월 9일 장남 성영 결혼,
  (2) 1967년 (음) 10월 19일 장녀 숙희 결혼(차남 정영보다 2세 아래지만 앞서 출가 하였음),
  (3) 1970년 (음) 11월 차남 정영 결혼,
  (4) 1971년 차녀 정희 결혼,
  (5) 1975년 (음) 6월 6일 3녀 석희 결혼,
  (6) 1976년 (음) 3월 6일 부 회갑 수연,
  (7) 1980년 (음) 3월 20일 모 회갑 수연 등이다.

  이 기록들에도 맨 앞이나 뒤에 당시의 백미(白米) 또는 정조(正租)의 가격을 기록하여 시대가 바뀌고 화폐가치가 변해도 그 금액의 대소를 가늠할 수 있게 하고 있다.

부 회갑연 부조기록

1980년 3월 20일 모친 회갑연 기념사진
손자 시화와 손녀 미애만 학교 때문에 불참

  내가 월남에 가 있는 동안 집사람이 두 아이 데리고 시골에 가 있을 때 선친께서는 종종 집사람에게는 조상에 관한 이야기를 했었고 때로는 "조상의 묘도 다 잃어버리지나 않을까?"하는 걱정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내게 직접 조상에 대한 관심을 가져라는 말 씀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바쁜 장교생활로 전후방으로 이삿짐 싸 들고 뛰어다니며, 항상 고되고 바쁜 생활임을 잘 알고 계셨으니 말 해 봐야 되겠느냐는 생각이었을 게다.
  선친께서는 당신의 기록하는 습관에 따라 책을 필사하고, 세계도를 만드시고, 가정사에 관한 제반 사항들을 기록해 두시면서 아마 맘 속으로는 '이렇게 기록을 해 두면 얘가 까막 눈은 아니니까 언젠가 보고 관심을 가지고 조상을 찾고, 족보에 관한 것을 연구할 것이다' 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실제로 내가 조상에 대한 것을 관심 깊게 찾아 자료들을 정리하고, 보학상식에 대한 눈을 뜨게 된 것도 바로 선친의 유품을 살피면서부터 시작되었으니까 선친께서는 내게 말 한마디 하지 않았지만 당신의 기록하는 습관을 통해서 생각한 바 목적을 달성 한 셈이다.
  나 또한 선친의 방법을 답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조상에 관한 자료 정리와 이야기, 내 자신 듣고, 보고, 경험했던 일들을 이야기로 쓰는 것이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