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에 한 사람만, 사설 옆 세 남자
沙月 李 盛 永(2009, 3, 19)
  지난주 금요일(2009. 3. 13) 태능체력단련장을 나갔을 때 이야기다.
  어느 홀인지는 잘 기억 나지 않는데 티 빡스로 올라가는 입구에 ‘티에는 한 사람만 올라가세요’ 라고 빨간 글씨로 주의를 환기시키는 패말이 꽃혀 있었다.

  티업하려는 사람 외에 다른 사람이 함께 올라 가면 골프 클럽을 휘두를 때 자칫 다칠 염려가 있기 때문에 티업 하는 사람, 한 사람만 올라 가라는 뜻인 것 쯤이야 골퍼라면 모를 사람이 없을 것이다.

  말이든 글이든 뜻만 정확히 통하면 그 기본적인 기능은 한 셈이라 동료들과 함께 웃다가 동료 한 사람이 캐디 보고 “야! 김양아! 티에는 골프공이 올라 가야지 왜 ‘한 사람’이 올라가냐?” 하고 웃고 지나갔다.
티에 공 대신 한 사람만 올라가라고?
  그러나 도시 거리에서나 시골 길에 수없이 많이 걸린 광고나 현수막, 교통표지 등에 이런 이치에 맞지도 않고, 한글 철자법이나 띄어쓰기를 잘못해서 따지고 보면 그 뜻이 틀려지는 것을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비록 남에게 뜻을 전하는 데는 문제가 없다 할지라도 사람들이 이치에 맞지 않거나 철자법이 틀린 광고나 현수막을 보게 되면 그 전하고자 하는 내용의 어필하는 강도가 현저히 저하되는 것은 사실이다.
  아래 사진은 2005년 7월 어느 날 아파트 뒤 동네 등산로에 올랐다가 좀 흥분해서 찍어와 이성영홈페이지( http://www.sungyoung.net/ ) >> 강산이야기 >> '용인 부아산'에 올렸던 사진이다.
주민들 의사는 물어보지도 않고---
문장이나 좀 다듬어 쓰지, 말이 돼야지---.
‘시민의 피해가 없도록’ 왜 피해가 없나? 당장 등산을 못하는데---,
‘환경을 최우선’ 무슨 환경인가?


* 이 건설회사는 2009년도 세계적인 경제위기에 직면하여 건설업체 구조조정에서
공적자금으로 소생을 지원하지 않는 퇴출대상업체로 낙점되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용인 부아산' 바로가기(클릭): 용인 부아산

  지난 월요일(2009. 3. 16) 아침 신문을 보면서 똑 같은 말 실수를 조선일보 A2면에서 보았다. 꽤 큰 글씨의 기사 제목에 “사설 옆 세 남자? 바로 당신입니다” 이다.

  최근에 조선일보는 편집을 좀 바꿨단다. 뒤에서 두 번째 면 즉 신문의 얼굴이라 할 수 있는 ‘사설’ 면 왼쪽 옆 오피니언 난에 전에는 신문사가 선택한 명사들의 칼럼을 실었는데, 3월 5일자(창간기념호라 함)부터 독자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최대한 충실하게 반영한다면서 ‘편집자에게’라는 새 코너를 만들고 사설과 똑 같은 크기의 공간에 세 사람의 독자의 글과 함께 사진도 싣고 있다.

  3월 16일 제 2면의 “사설 옆 세 남자? 바로 당신입니다” 라는 제목의 기사는 이를 홍보할 목적인 듯
  “이 코너는 조선일보의 남녀노소독자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가감없이 게재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 원칙을 지킬 것입니다. 조선일보의 기사나 칼럼에 대해 입장과 논조가 크게 달라도 좋습니다. 아니 더 환영합니다.---” 라고 강조하고 있다.

  참 좋은 난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걱정스러운 것이 있었다. 왜 ‘세 남자’ 냐?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여성부장관을 두고 있는 나라, 우리나라.
  요즘처럼 극성스런(?) 여성 인권운동가 들이 눈에 쌍심지를 돋구고 무단주차 잡는 폐쇄회로 카메라처럼 사회 곳곳을 빼놓지 않고 남녀성차별이 없는지 살피고 있어 기죽은 남성들은 대중목욕탕 안에서나 큰소리치는 나라, 우리나라.

  괜찮을까?
  앞의 ‘티에 한 사람만--’ 처럼 그것으로도 뜻이 통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는 없지만---
  실제 최근에 오른 글만 보아도 16일 당일에는 3명중 1명이 그리고 19일에는 3명중 2명의 여성이 글을 올렸다.

  16일은 관악산 월요산악회 모임의 날이라 서둘러 집을 나섰다. 나이 때문인지 점점 나오는 회원의 수가 줄어드는 것이 서글픈 생각이 드는데 그래도 그날은 두 자리 수 10명을 채워서 괜찮았다.

  마침 조선일보를 배낭에 넣고 온 동료가 있다기에 얼른 꺼내라고 해서 A2면의 문제의 기사를 폈다. 동료들도
  “거 참 그러네, ‘세 사람’이라 했어야 되는데---” 했지만, 골프장에서 ‘티에 한 사람만--’ 표지판을 보고도 웃고 넘어간 것처럼 뜻은 통하니까 문제는 없다는 식으로 넘어갔다.

  그러나 19일 아침 신문을 펴 드는 순간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숙향 숙명여대 대학원생의 글이 바로 “사설 옆 ‘세 남자’라니---” 다.

  내가 건성으로 지나간 A2면의 기사가 A1면의 ‘소녀시대 윤아의 궁금증 ▶ A2면’ ‘누구냐, 사설 옆 세 남자는?’에 대답하는 형식으로 쓰여진 것까지 들면서 16일자엔 ‘두 남자, 한 여자’의 글이 실렸으니 '앞 뒤가 안 맞는 편집’이라고 지적한 것 까지는 하나도 틀린 데가 없는 것 같다.

  그리고 ‘신문사로서 신중하고 넓은 생각이 미치지 못한 건 본의가 아니었으리라 생각되지만’ 하는 데까지도 맞는 말 같다.
  그러나 예서 끝나지 않고 ‘오랫동안 편향됐던 성차별의 타성이 은연중에 들어난 대목같기만 하다’ 는 대목은 내가 제3자인 만큼 그 진실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내 가벼운 생각으로는 글쓴이가 좀 지나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러나 글쓴이가 오해했다고 하더라도 그 오해의 소지를 제공한 것은 신문 쪽이다.
  ‘사회의 공기(公器)라는 신문조차 남성 우월주의를 암시적으로 심어주는 굵은 활자의 제목은 시대착오적이며 말없이 조용한 대다수 여성 독자들의 참여에 찬물을 끼얹는 편집(編輯)적 편집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는 대목에서는 정말 무서운 폐쇄회로 카메라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소름이 끼친다. 신문사 자업자득이니 명심 또 명심하여야 할 것 같다.

  ‘티에 한 사람만’이건 ‘사설 옆 세 남자’건 한번 씩 웃고 지나갈 수 있는 부드러운 세상이 그립다. 잘못이 있으면 '이러 이러한 것이 잘못됐으니 고쳐라'는 지적이야 사회 발전에 약이 될 것이겠지만
  편집자의 부주의한 실수를 놓고(글쓴이도 신문사 본의가 아니라는 것은 인정) '편향됐던 성차별의 타성이 은연중에 들어난 것', '여성 독자들의 참여에 찬물을 끼얹는 편집적 편집'으로 몰아가는 야박한 세상이 좋은 세상이라고 볼 수는 없지 않은가?


첨부: 조선일보(2009. 3. 19) A35면 [편집자에게]
사설 옆 '세 남자'라니…
정숙향 숙명여대 대학원생(2008, 3, 19)
▲ 정숙향 숙명여대 대학원생
조선일보 3월 16일자 A1면 '소녀시대 윤아가 묻는다'의 '누구냐, 사설 옆 세 남자는?'은 느닷없는 의외성으로 독자들의 눈길을 끌었다. 게다가 A2면 '투데이' 페이지엔 '사설 옆 세 남자? 바로 독자 당신입니다'라는 헤드라인으로 조선일보의 칼럼이나 기사와 논조가 다른 글이라도 '편집자에게'난은 더욱 환영한다는 오피니언 담당 편집 부국장의 글이 실렸다.

대중적 인기를 얻고 있는 소녀시대 윤아를 통해 조선일보 독자들의 열독률을 높이려는 시도는 이해된다. 문제는 왜 하필이면 '세 남자'인가이다. '세 사람', '세 논객', '세 독자' 등으로 표현했어야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역설적으로 같은 16일자엔 '두 남자, 한 여자'의 글이 실렸는데 이는 앞뒤가 안 맞는 편집이다. 선진국 주요 언론의 'Letters to the Editor'에는 남녀노소 독자들의 생각과 목소리가 골고루 반영되는 쌍방향의 소통이 사설과 이웃한 지면에서 이뤄지고 있는 게 이미 오랜 편집 관행이다.
그런데 각계각층 독자들을 골고루 아울러야 할 신문에서 마치 세 '남자'만 독자들인 양, 여성은 쏙 빼놓은 듯해 안타깝기 짝이 없다. 신문사로서 신중하고 넓은 생각이 미치지 못한 건 본의가 아니었으리라 생각되지만, 오랫동안 편향됐던 성차별의 타성이 은연중 드러난 대목같기만 하다. 사회의 '공기(公器)'라는 신문조차 남성 우월주의를 암시적으로 심어주는 굵은 활자의 제목은 시대착오적이며 말없이 조용한 대다수 여성 독자들의 참여에 찬물을 끼얹는 편집(偏執)적 편집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성 역할의 의미에 너무 예민한 것도 문제지만 언론으로서 성 차별을 극복하려는 노력도 필요하다.